소설리스트

10. 수정궁 (10/34)

10. 수정궁

동풍이 언 땅을 녹이며 봄이 왔다. 기러기들이 북쪽을 향해 날기 시작했지만 여울은 돌아오지 않았다. 굳이 천명에게 그녀가 돌아올 날을 묻지 않던 묵은 점점 말수가 없어졌다.

“오라버니! 같이 가!”

나무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지만 숲에 가면 여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라버니! 마을에서 국밥 사 먹으면 안 돼?”

“다리 아파. 업어 줘.”

자꾸만 돌아보는 묵은 그녀의 빈자리에 뜨거운 한숨을 삼킨다.

“건들지 마. 오늘은 개꿈을 꿔서 기분이 안 좋다고.”

“꿈에 웬 여자가 자꾸 울어. 우라질! 귀신이 붙었나?”

요신의 궁이니 흉몽은 꾸지 않겠지.

하루 종일 쫑알거리는 여울이 사라진 집에는 적막감조차 감돌았다. 천명은 말이 없고 묵은 그녀의 빈 침상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겨울은 다 지나갔는데, 여울이 없는 집은 아무리 불을 때어도 춥기만 했다.

“사부님…. 언제쯤 돌아올까요?”

“때가 되면 오겠지.”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여울이 공부하던 책상을 쓰다듬는 천명이나 그녀에게 만들어 주었던 활을 만지작거리는 묵이나 쓸쓸해 보인다.

“껄껄껄, 어딜 가든 잘 지낼 아이가 아니더냐. 적적하면 운몽산에나 다녀오려무나.”

“운몽산에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하루밖에 안 되었는걸요.”

“허허, 그랬던가.”

여울이 없는 집이 너무나 쓸쓸하여 묵은 그해 겨울을 운몽산에서 보냈다. 하루 종일 열락과 대련을 하여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

진수성찬에 연신 술잔을 홀짝이는 여울을 지켜보는 백원후의 얼굴은 의문으로 가득하다.

‘자라나는 속도가 분명히 보이는데…. 너무나 멀쩡하단 말이지.’

수정궁에서야 밤이지만 인계에서는 겨울이니 하루에 일 년의 시간이 흐르는 시공의 차이를 모르는 여울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여울아, 적당히 좀 마셔.”

여울은 인간의 모습을 한 반야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복숭아같이 통통한 볼 사이로 뾰족한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반야인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머리통을 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 죽을 지경이다.

“내일이면 배앓이한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곁에 붙어 앉아 소맷자락을 붙잡는 반야는 귀밑으로 방울처럼 머리까지 말아 올려 여울 또래의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어우! 사람 되더니 잔소리가 더 늘었어. 맞죠.”

“그러게나 말이다.”

웃음 짓는 백원후의 시선에 반야가 지지 않고 노려본다. 둘 사이에 오가는 묘한 긴장감에도 여울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헤벌쭉 웃는다.

“세상에! 고기보다 맛난 것이 또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천명이 이곳으로 널 보낸 것이 아니겠느냐.”

백원후는 달거리가 끝나면 보내 주마, 하였으나 멈추는가 싶으면 다시 흐르는 피를 보며 여울은 달거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반백 년 살아온 천명보다야 반만년을 넘어 살아온 내가 세상 이치는 더 밝지 않을까?”

“에이, 그래서 우라질이 반갑다는 말인 줄 아셨답니까.”

“호호호호, 망할 노인네. 감히 날 속이다니. 욕인 줄 알았다면 이리 어여쁜 머리통이 아직도 달려 있을까?”

환하게 웃는 백원후의 모습과 달리 여울은 뜨끔하여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온몸을 달구었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정말 인간도 잡아먹은 적이 있어요?”

“흐음…. 발이 달린 것들은 죄다 잡아먹던 시절이 있었지.”

갑작스레 조용해진 여울의 모습에 백원후가 노루 다리 살을 집어 준다.

“옜다. 여우 도령이 잡아 준다던 노루다.”

“헤헤헤, 잘 지내고 있겠지요?”

“글쎄다.”

잠에서 깨어 머리맡에 누워 있던 반야를 만나 반가운 것도 잠시, 백원후의 술상으로 불려 온 여울은 지난 이야기를 하며 술독에 빠져 버렸다.

“여우라는 것들이 워낙에 정이 많아 아직도 널 그리워하며 울고 있을걸?”

“정말요?”

금세 울상을 짓는 여울의 모습에 백원후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재미지다. 널 골려 먹는 재미에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겠구나.”

“아, 정말! 저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고요.”

“그 정도로 마음이 아파서 어쩌누? 쇠털처럼 많은 만남과 이별이 스쳐 갈 터인데….”

“하아아아, 그러게요.”

“호호호, 그러게요 그러게요 하는 것이 그러한가 그러한가 돌림 노래 부르는 네 사부와 꼭 같구나.”

“사부님이 제게 저주를 퍼부었지 않습니까. 마음 주는 모든 것들이 족쇄가 될 것이라고요.”

“맞는 말이구먼.”

“그냥 영산에서 사부님과 묵 오라버니와 반야랑 나무나 하며 평생 살면 안 될까요?”

“나는?”

아이처럼 뾰로통해진 백원후의 모습에 여울은 배시시 웃음이 샌다.

“당연히 자주 찾아뵈어야죠. 혹시 저와 같은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풋! 개천의 아이들을 이야기하는 게로구나.”

즐겁게 시작한 이야기였으나 어느새 여울은 묵직한 한숨을 뱉어 내고 있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각자의 길이 있으니 굳이 얽매어 두려 하지 말려무나. 천명이 말한 족쇄는 네 마음에 있는 것이니.”

“하아…. 그러게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여울은 어느새 술상에 엎드려 버렸다. 잠든 여울을 조용히 지켜보던 백원후의 시선이 하얗게 눈이 쌓인 정원으로 향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은 아침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인계에 봄이 오면 수정궁에도 아침이 올 테니.

***

봄이 가고 청개구리 우는 여름의 시작에 묵은 그녀가 좋아하던 벚나무 아래 섰다.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벚꽃들처럼 우리 모두 함께 모여 살면 좋겠어. 사부님이랑 오라버니랑 반야랑…. 그리고 개천의 아이들까지.”

개천에서의 기억 때문인지 춥고 배고픈 겨울을 싫어했던 여울은 벚꽃이 피면 여름이 온다며 유난히 좋아했었다.

“하얗게 꽃눈이 내리네. 춥지도 않고 너어무 예쁘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는 것을 좋아했던 여울을 떠올리는 묵의 명치끝으로 저릿한 통증이 일었다.

한시도 그녀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아프고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른다.

‘이 감정들은 무엇일까.’

화가 난다.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혹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기가 치솟는다.

그녀가 보•고• 싶•다•.

가슴이 저릿저릿하다가 눈동자가 시큰거린다.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깨달음. 통증은 걱정과 근심이 아닌 그리움이었다.

“여울아아아아아아아!”

아득한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메아리만이 돌아올 뿐, 그해 가을이 지나도록 여울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산으로 가야겠습니다.”

“…….”

“화산으로 결계를 열어 주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직접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조용히 서책을 읽던 천명이 긴 한숨을 내어 쉬었다.

“가고 싶다 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백원후의 수정궁이 있는 화산은 인계에 위치하여 있으나 유일하게 천계의 시간이 흐르는 곳, 초대 없이는 그 누구의 침범도 허락지 않는 시공의 땅이었다.

***

놀러 온 열락조차 돌려보낸 백원후는 여울과 마주 앉아 대낮부터 술판이 거나하다.

“큭큭큭, 머리에 배꽃이 피었습니다.”

단아하게 배꽃 한 송이 꽂고 앉아 있는 백원후의 모습에 여울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예쁜 장신구들은 다 어쩌시고 배꽃을 꽂으셨답니까? 할머니.”

“때로는 금은보화보다 한 송이 배꽃으로 마음이 녹아날 때가 있단다, 호호호.”

오고 가는 술잔 속에 듬뿍 들어찬 것은 술만이 아니었는지, ‘할머니’라 불러 보라 채근하는 백원후의 꼬임에 여울은 그녀를 ‘할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송화령 이야기나 좀 더 해 보렴.”

“송화령이요? 아! 소나무. 사부님의 소나무!”

“그래. 머리에 하얗게 배꽃이 피었다지?”

“그러게요. 그리될 줄 누가 알았답니까.”

“호호호, 모두가 인과율이 아니겠느냐.”

“인과율이요?”

“모든 결과는 원인에서 발생되는 것을 말하지. 씨를 뿌리면 수확을 얻는 것처럼.”

“하지만 송화령은 제게 잘못한 것이 없는걸요?”

“후후후, 할머니인 내게 버릇없이 굴었던 것을 손녀인 네가 대신 갚아 준 격이지.”

“제가 어찌.”

“꼭 당사자에게 대갚음하지 않아도 악행은 돌고 돌아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통해 내게로 돌아온단다.”

“아….”

착하게 살아야겠구나. 함부로 던진 돌이 돌고 돌아 다시 뒤통수를 친다니.

반만년을 넘어 살아왔다는 백원후는 재미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들은 어느새 여울의 가슴으로 하나둘씩 별처럼 박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래저래 상사굴에 들어갔던 이유들이 떠올라 여울의 얼굴은 점점 더 침울해진다. 하다못해 산군들의 수염을 죄다 뽑은 일은 어떠한 형태로 여울에게 돌아올지. 제기랄!

“머리털이 죄다 뽑히는 건 아닐까요?”

“호호호, 내 열락에게 그 소문을 듣긴 들었지. 열락이야 네 사부를 어려워하니 산군들에게 직접 가서 고하라 일렀다지.”

“그 죄를 다 어찌 갚죠?”

“수염은 천명이 다 돌려주었다 하지 않았느냐. 내 열락의 산군들에게는 따로 값을 치를 것이니 염려 말거라.”

다정하게 어깨를 다독이는 백원후의 말에 여울은 그제야 한시름 놓였다.

“정말 그리해 주시렵니까.”

“걱정 말래두. 그래, 송화령은 어찌 지내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자존심에 시들어 죽지 않고?”

“그게 말입니다. 사부님이 접붙이기하였던 돌배나무 가지를 다시 떼 내어 송화령 옆 우물가에 심었는데.”

“그런데?”

“돌배나무가 자라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웬 도령 하나가 나타났지요.”

풀잎 하나, 돌 조각 하나도 생명이라. 천명에게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여울이지만 사실 그리 와닿지는 않았었다. 송화령과 돌배나무 도령을 보기 전까진.

“도령이라. 에이, 설마.”

설마 그 자존심 센 송화령이 하찮은 돌배나무 도령과?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가끔 보면 밤에….”

“밤에?”

“예. 모두가 잠든 밤에.”

야릇한 상상으로 두 눈을 반짝이던 백원후가 여울에게로 가까이 다가앉으며 재촉했다.

“그래 무엇을 하더냐. 둘이서. 밤에?”

“둘이 나란히 앉아 달구경 하더이다.”

“달구경? 겨우 월천녀의 월궁을 쳐다보고 있다고?”

“네. 송화령이 돌배나무 도령 어깨에 머리를 얹고. 요렇게.”

백원후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여울을 휙 밀어 버렸다.

“에잉! 고작 달구경이라니!”

좋아해야 할지. 성이 나야 할지. 백원후는 분간이 가질 않았다. 송화령에게 천명이 아닌 다른 사내가 생겼다니 마음이 놓이기는 한데…. 왜 이렇게 비위가 상하지?

“그 통나무 의자 오라버니가 내게 만들어 준 것인데, 췟!”

“넌 묵이란 아이가 꽤나 좋은가 보구나.”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 보고 싶네요.”

눈앞에 고기가 가득하여도 오라버니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으니 아무래도 여울은 고기보다 묵이 더 좋은 듯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대답해 줘야지. 고기보다 오라버니가 좋다고.

“여우 도령은 잊었나 보지?”

“아…. 호영이.”

뜨끔. 여울은 원망스레 백원후를 쳐다봤다. 왜 자꾸 호영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백원후 님 말처럼 그리 외롭게 울고 있진 않겠지. 하아아아.

“후후후, 졸린 게로구나.”

“하아아, 이상하게 자꾸 잠이 와요.”

여울이 상 위로 팔을 괴고 턱을 얹었다. 수정궁에 온 뒤로는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꾸벅꾸벅 졸던 여울은 어제처럼 다시 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잘 자야 몸도 자라지.”

파닥파닥.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인간의 몸으로 변한 반야가 여울의 옆으로 자리했다.

“언제까지 잡아 두실 요량이십니까.”

“가겠다는 걸 붙잡은 것은 아니지 않으냐.”

“인계의 시간으로는 이미 일 년 반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싸늘한 백원후의 눈초리에 반야가 몸을 떨었다. 그저 눈길 한번 주었을 뿐인데도 섬뜩한 요기가 온몸을 조여 온다.

“시간이 그리 흐른다는 것을 안다면 이리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리 장담하는 거지? 이 아이가 원하는 것은 전부 이곳에 있는데.”

“요괴야 도술이나 부려 가며 맘 내키는 대로 살겠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개천의 아이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보시고도 그러하십니까. 만나는 인연마다 가슴앓이하며 하나둘씩 정을 쌓아 가는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감히 하찮은 문조 한 마리가 요신들 중에도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그녀를 ‘요괴’라 불렀다. 죽여 버릴까?

‘아니야. 저 새를 죽이면 여울이 날 원망할 테니.’

술잔을 드는 백원후의 손가락에서 푸르스름한 요기가 서늘하게 흘러내린다. 날개라도 부러뜨려?

‘관두자. 흐음…. 주인을 잘 만났구나, 반야야.’

하긴, 언제까지 여울을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이른 아침 결계의 파장이 느껴져 눈을 뜬 백원후는 영산으로 열린 결계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혹여나 천명이 찾아온 것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영산과 화산을 가르는 경계에는 삼베 도복 한 벌과 예쁜 배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을 뿐이다.

도복은 여울의 것이요, 그 위에 놓은 배꽃 한 송이는 백원후의 것이다.

하늘하늘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꽃씨 같은 것이 여인의 마음이라. 얼굴도 보지 않고 돌아간 천명에 대한 백원후의 원망은 배꽃 한 송이에 눈 녹듯 녹아 버렸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난 여울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이상하다. 허리도 쑤시고 어깨도 결리고, 간밤에 나무를 이고 잔 양 이곳저곳 온몸이 아프다.

“가슴이 왜 이렇게 부었지?”

“부은 게 아니라 커진 거겠죠.”

뾰로통한 반야의 말에 여울이 가슴을 한 움큼 손에 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마신 술이 전부 가슴으로 모였나?

“커졌네. 진짜 커졌어. 맞지?”

“잘 봐요. 가슴만 커졌나.”

속 시원하게 삼 년이라는 시간을 여기서 잡아먹고 있노라 말하고 싶으나 반야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말을 해 줘, 말아. 백원후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어휴, 그 많던 눈치는 어디로 갔나 몰라.’

겨울잠 자는 곰처럼 자는 내내 몸이 자라난 것도 모르는 여울이 반야는 답답해 죽겠다.

“그러네. 머리카락도 엄청 길어졌네.”

“네, 네. 손발도 길어지고, 어른이 된 것 같아요.”

“맞지? 큭큭, 역시 아이들은 고기를 먹어 줘야 해.”

“얼른 일어나요. 해가 중천에 떴어요.”

영산은 벌써 여름이라고요.

반야가 닦달을 하며 여울을 침상에서 잡아당겼다.

“왜 그리 닦달이야. 시간이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도망간다고요. 벌써 삼 년이나 지났어요. 이크!”

반야가 저도 모르게 비밀을 누설하곤 양손으로 입을 가린다. 갈래머리로 땋아 귀 위에 매달린 머리가 방울처럼 흔들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잠이 덜 깬 여울이 피식 웃었다.

“겨우 사흘째인데, 삼 년은 무슨.”

그도 그럴 것이 입고 잔 옷도 몸에 맞춰 늘어났으니, 개구쟁이 여울이 다른 여인네들처럼 매일 은경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자라 버린 몸을 느낄 수 없어 시간의 흐름도 손안의 모래처럼 흩어져 버렸다.

“에잇! 바보 같으니라고!”

“아야앗! 반야!”

“멍청이! 묵 오라버니는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새로 변한 반야가 여울의 머리를 쪼아 대곤 휘리릭 정원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오, 아파라. 잊어버리긴 누굴 잊었다는 거야. 간밤에도 오라버니 꿈을 꾸었는데.”

꿈에 나타난 묵은 그녀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은’이라 새겨진 곳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그런 묵을 떠올리려니 화르륵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가씨, 기침하셨습니까.”

때맞춰 들어온 식신들의 시중을 받아 세안을 끝낸 여울은 옷을 갈아입었다.

“어째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걸신이 들렸나.”

“양고기 좀 더 내올까요?”

“아니. 그만 먹을래요. 숨쉬기도 힘들어. 참,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서재에 계십니다.”

식신들이 내오는 음식들을 모조리 비워 버린 여울은 긴 복도를 따라 서재로 향했다. 그녀의 품 안에는 어제 백원후가 읽어 보라 권했던 춘화첩 한 권이 안겨 있다.

“할머니, 간밤에 평안하셨나요?”

정중히 문안 인사를 건네니 커다란 떡갈나무 탁자에 앉아 있던 백원후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앉거라.”

“예.”

조신하게 치맛자락을 붙잡고 탁자에 마주 앉는 여울의 모습에 백원후가 흐뭇하게 웃는다.

이 정도면 예절 교육 잘 시켰지, 뭐.

“후후후, 간밤에 평안하였느냐?”

“예. 어제는 술이 좀 과했나 봐요. 늦잠을 잤습니다.”

“호호호, 자야지. 많이 자야 얼른 클 게 아니냐.”

“팔다리가 쑥쑥 길어진 것이, 가슴도 커진 것 같아요.”

“호호호, 그래. 장하구나.”

장할 것까지야. 먹은 대로 크는 것을.

배시시 웃는 여울의 모습은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온유하고 차분해 보인다.

“한데,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후후후,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 싶어 그러한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생각이 달라지면 언행 또한 달라지는 법이지.”

그러고 보니 욕질이 부쩍 줄었다. 고기를 많이 먹어 행복하여 그러한가 하였더니 아니었나?

백원후와의 시간은 여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질 테고 그리되면 습관 또한 변할 터이니 종국에는 삶 자체가 달라진단다.”

하루에 열댓 번도 더 잠으로 빠져들었지만 깨어나면 백원후는 늘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하며 혹은 정원을 거닐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면 백원후는 그녀의 침상에 앉아 머리를 빗겨 주며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용은 제각기였으나 결론은 늘 똑같다. 인과율의 법칙, 사랑받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깨달음으로 여울의 행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 서책은 다 읽었느냐?”

“예. 좀 야릇하더이다.”

“야릇하다?”

여울이 얼굴을 붉히자 서책을 받아 든 백원후가 웃는다.

“덕분에 좋은 꿈을 꾸었나 보구나.”

“아, 아닙니다.”

“내가 직접 말해 주면 좋겠지만, 천명이 질색을 하니 서책이라도 읽혀야지 어쩌겠누.”

열네 살 소녀처럼 키득거리던 백원후가 서책을 제자리에 꽂으려 일어섰다.

“호호호, 천명에게는 비밀이니라.”

여울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삼베옷으로 향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것이 낯이 익다.

“사부님께서 보내신 건가요?”

“그래, 이제 슬슬 돌아갈 차비를 해야지?”

행여나 섭섭다 할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던 차에 다행이다 싶어 여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한숨이누?”

“섭섭해서 그러죠.”

“그럼 더 있다 가련?”

순간 여울이 메추리 삼킨 도롱뇽 같은 표정을 지으니 백원후가 웃는다.

“호호호, 솔직해도 어쩜 이리도 솔직할까.”

“그것이 아니오라.”

“되었다. 더 붙잡아 두었다간 천명에게 미움 살까 오늘쯤에 보내려 하였으니.”

백원후가 여울의 손을 잡아 토닥인다.

“보고 싶어 어쩌누.”

“저도 보고 싶을 거예요.”

“가기 전에 일러 줄 것이 있다. 이곳의 시간은 인계가 아닌 천계의 시간에 맞춰져 있단다. 하여 네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겨우 사흘이지만 인계에서는 삼 년이 지났다.”

“예에? 그, 그럼. 열한 살 겨울에 왔으니, 전 열네 살이 된 건가요?”

“그렇지. 똑똑한 것.”

“아니, 왜 미리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원망하는 게냐?”

새치름한 백원후의 표정에 여울은 애꿎은 입술만 깨문다.

그렇구나. 그래서 사부님이 백원후를 만나러 가면 보름씩 있다 오는 거였구나. 한 달이라고 해 봤자 수정궁에서는 겨우 한 시진. 이런, 망할!

“흠흠, 너와의 담소가 너무나 즐거워 시간을 잊었지 뭐냐.”

“아….”

화를 내기에는 그녀가 여울에게 베풀어 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특히.

‘고기는 배 터지게 먹었으니 참아야 해.’

자리에서 일어선 여울이 백원후에게 공손하게 절을 했다. 헤어짐을 생각하니 화기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많은 가르침과 더없이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으니 참으로 큰 은혜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냐. 내 너를 보내기 아쉬워 그러한 것이니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말거라.”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은 상했으나 아깝지 않았다?”

“후후후, 예. 제가 어디에 간들 이리 다정한 할머니를 만나겠습니까. 더 많은 시간 내어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말간 눈으로 웃는 여울의 모습에 백원후의 가슴으로 알 수 없는 일렁임이 찾아들었다.

“꼭 다시 놀러 오너라. 응?”

“그리하겠습니다.”

백원후는 몸을 일으키는 여울을 답삭 품에 안았다.

“내 너를 위해 온 산을 뒤져 고기를 잔뜩 잡아 놓을 것이니.”

“큭큭, 그리 마셔요. 그 많은 원한을 어찌 다 갚겠습니까. 이제 실컷 먹었으니 앞으로는 좀 덜 먹어도 되지 싶습니다.”

옳거니. 철도 들었구나.

몰라보게 자라난 여울을 가슴에 안은 백원후는 쉬이 놓을 줄을 모른다.

“여울아.”

“예.”

“살기 위해 먹는 것은 죄가 아니다.”

“어째서 그리 말씀하십니까?”

“살육을 위한 사냥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말이다.”

여울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솔잎만 먹으라 강요하지 않는 사부님이지만, 살생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백원후는 왜 그에 반하는 말을 하는 것일까.

물끄러미 백원후를 올려다보던 여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별을 앞두고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그리하겠습니다.”

“천명이 고기를 못 먹게 하면 언제든지 수정궁으로 오너라.”

“정말요?”

백원후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보라색 가락지를 빼내어 여울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이 반지가 수정궁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줄 게다.”

“할머니….”

“아쉬워서 어쩌누. 아쉽다. 너무 아쉬워.”

아쉬워하는 백원후를 뒤로하고 여울은 방으로 돌아와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오가는 식신들이 그간 여울이 입었던 옷과 장신구를 침상 위에 죽 늘어놓고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췟! 드디어 집에 갈 생각이 들었나 보지?”

“너, 너, 너. 시간이 그리 흘러가는데, 나한텐 말도 없고.”

정원으로 향하는 문턱에 앉아 있는 반야를 향해 여울이 원망의 눈초리를 쏘아 보냈다.

“바보 같은 네가 눈치가 없었던 거지. 흥!”

“어휴! 아주 방언 터지셨어!”

예전에는 ‘삐, 삐삐’만 하는 통에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하여도 속은 편했는데. 말문이 터지기가 무섭게 주둥이가 어찌나 청산유수인지.

‘어휴! 돌아가면 사부님께 절대 말대답하지 말아야지!’

짧지만 짧지 않은 수정궁에서의 사흘, 여울의 가슴에는 가을 낙엽처럼 겹겹이 쌓인 교훈으로 가득했다.

“어쩌지 모두 가져가려면 짐이 너무 많아.”

“전부 가져가려고?”

“흐응, 할머니가 준 건데…. 놓고 가면 섭섭해하시지.”

“네가 섭섭한 건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여울이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후다닥 날아오른 반야는 이미 옷장 위에 앉아 있다.

“너 이리 안 내려와?”

“내려가면 때릴 건데, 내가 바본가? 메에에에!”

혀를 빼어 문 반야가 정원으로 날아가 버렸다.

홀로 남은 여울은 약이 올라 울화통이 터졌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이걸 가지고 가자니 저게 더 좋은 것 같고. 이걸 놓고 가자니 아쉽고. 아…. 진짜 어쩌지?’

침상 위로 펼쳐진 아름다운 옷들과 장신구들을 바라보던 여울이 늘어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전부 가져가시면 되잖아요. 저희 식신들이 뒤를 따를 것입니다.”

“아니요. 안 돼요. 영산의 집은 이곳보다 훨씬 좁은걸요. 이걸 다 가져가면 머리에 이고 자야 한다고요.”

영산으로 돌아가면 전과 같은 생활이 다시 시작될 텐데, 나무하러 가면서 하늘하늘한 비단옷을 입을 순 없었다. 수정궁에서 지내듯 공주처럼 담소나 나누며 산책할 것도 아니고.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 별게 다 고민이네.”

털썩 침상에 누워 버린 여울의 손에 무언가 까칠까칠한 것이 닿았다. 비단옷들 아래 삼베 도복이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도술 없이 천명이 직접 만들어 준 옷.

투박한 바느질 솜씨에 모양새도 곱지 않지만, 파벽을 올라도 나뭇가지에 긁혀도 뜯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마치 그녀를 지켜 주고픈 사부님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사부님….’

사부님의 정성이 담긴 도복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쌉싸래한 솔잎 향이 가슴으로 내려앉는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준비 마치셨는지 묻습니다.”

사부님의 삼베옷과 백원후의 비단옷을 각각 양손에 쥔 여울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 다 했다 말씀드려요. 금방 가요!”

가늘었던 백원후의 눈매가 여울을 훑어 내리며 동그랗게 열린다.

“하아, 하아. 할머니, 많이 기다리셨어요?”

“여울아….”

장신구 하나 없이 머리를 땋아 내린 여울이 쥐색의 도복 차림으로 백원후의 앞에 섰다.

“다른 짐은.”

“모두 두고 갑니다.”

“왜. 마음에 드는 것이 없던 게냐.”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백원후가 준 것이라곤 손에 낀 가락지 하나가 전부다.

“가져가고픈 것이 정말 하나도 없어?”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여울이 그녀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모두 가져가고 싶죠. 할머니도 등에 업어 가고 싶은걸요.”

“한데….”

“제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배 터지게 고기 먹고 배앓이 하던 날 기억하세요?”

“그래, 그랬었지.”

“과한 것은 모자라느니만 못하다 하셨죠. 담을 수 있는 그릇의 양은 스스로가 판단해야 하는 거라고.”

말없이 바라보던 백원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옷들은 영산에 어울리지 않아요. 비단옷 펄럭이며 파벽을 오르내리다 흠집이라도 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래. 네 말이 맞구나. 하지만 한 벌 정도는 가져가도 되지 않느냐.”

“후후후, 고운 옷 한 벌 가져가면 그 옷이 입고 싶어 이 베옷에 눈길이나 주겠어요?”

어찌 이리 욕심이 없을꼬.

여울의 손을 잡고 결계를 향해 걷는 백원후의 가슴으로 따뜻한 미풍이 분다.

“예쁘고 좋은 선물들은 이곳에 잘 보관해 주세요. 다음에 오면 고운 옷 입고 머리 장식 짤랑이며 할머니랑 술 마실라니까.”

“후후후, 그래. 그리하자.”

영악한 대답에 백원후는 결국 웃음 짓고 말았다.

‘두고 가는 옷들이 다시 만날 기약이라. 천명도 주지 않은 정표를 네가 주고 가는구나.’

여울의 손을 꼭 잡은 백원후가 초산을 향해 열린 동굴 앞에 섰다.

“동굴을 따라 가면 초산이 나올 게다.”

“초산이요?”

반야의 고향인 초산은 영산에서 반나절 거리이니 그리 멀지는 않다. 하지만 빨리 묵을 만나고 싶은 여울은 맥이 빠졌다.

“영산으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 아니고요?”

“후후후, 네 몸은 인계의 시간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필요로 하니 차분하게 호흡하며 천천히 걷도록 하여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여울은 어둠 속에 빛을 발하고 서 있는 백원후를 향해 엎드려 절했다.

“부디 강녕하시여 다시 오는 날, 이 손녀를 마중 나와 주세요.”

“내, 꼭 그리하마. 잘 가거라.”

몸을 일으킨 여울은 한걸음에 달려가 백원후를 꼭 끌어안았다. 이별은 늘 아쉬워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선물들을 놓고 간다 하여 마음 상하신 것은 아니지요?”

“후후후, 그럴 리가. 다시 돌아와 입는다 하니 어찌 두고 간다 말할까. 조심해서 가거라.”

백원후는 고개를 든 여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허리까지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참으로 많이도 자랐다.

‘내 선물은 하찮은 옷과 장신구에 비할 바 아니니.’

멀찍이 날아가 길을 재촉하는 반야에게 머물렀던 백원후의 시선이 여울의 손에 끼워 준 가락지로 향했다.

‘알짜배기만 골라 가는구나, 후후후.’

험난한 여정이 될 그녀의 앞날에 방패가 되어 줄 반야와 피난처가 되어 줄 수정궁의 열쇠를 내어 주었으니.

‘또 다른 선물은 가는 길목에 놓아두었으니 잊지 말고 챙겨 가거라.’

빛을 향해 달려가는 여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백원후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후후후, 천명…. 내기에 진 값으로 아이에게 주겠다 약조한 선물들이니, 타박하지 말게나.”

백원후는 하염없이 서서 여울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만약 저 아이가 내가 생각하는 그 아이가 맞다면.

‘내 전에는 네게 살을 날려 그에게 버림받았으나 이번에는 너를 품어 그의 마음을 얻으리라. 하늘을 거스를지라도 기꺼이 품어 안을 게야.’

백원후의 곁으로 식신들이 다가섰다.

“주인님,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아니. 가 볼 데가 있어.”

백원후는 광목국의 수도 영주를 향해 결계를 열었다.

‘개천의 개수란 자를 만나 봐야겠다.’

율국의 멸망 이전에 감쪽같이 사라졌던 은가의 자손이, 그것도 대천화의 환생이 다시 나타난 것이 이상하다.

‘어떻게 그자의 손으로 흘러들었는지 알아봐야겠어.’

은령과 꼭 같은 모습으로, 하필이면 야차가 예고한 부활을 앞둔 이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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