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백원후
살을 에는 추위와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온몸을 감싸는 기운이 꼭 묵의 품 안처럼 포근하고 따뜻하여 기분이 좋다.
“하아앙…. 오라버니.”
손끝으로 느껴지는 묘한 찰박임에 여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온통 반짝이는 보석들이 너울너울 느릿하게 굽이져 움직인다. 하늘하늘 물풀처럼 흔들리는 머리카락.
“어, 어어어어!”
자글자글 부드럽게 발끝으로 닿는 보석들을 딛고 선 여울이 몸을 일으켰다.
촤르르르.
벌거벗은 나신으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굴러떨어진다. 커다란 원형의 대리석 욕조 가득 찬 물 위로 떠 있는 꽃들의 향기가 진동을 했다.
“후후후, 지금에서야 일어나다니 꽤나 잠꾸러기인걸!”
부드러운 선율처럼 들려온 음성에 여울이 돌아서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은실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진주로 말아 올려 작은 금관을 쓴 여인의 얼굴은 달걀처럼 매끄러웠으며, 은빛 눈썹 아래 짙은 제비꽃 눈동자가 보석처럼 박혀 있다.
“후후후, 안 본 사이 많이 자랐구나.”
“배, 백여우?”
말이 헛나갔다.
이런, 우라질!
“나는 여우가 아니라 흰 원숭이란다. 우라질, 여울아.”
‘우라질’이란 소리에 여울이 숨을 들이켰다. 사부님과 친분이 깊은 백원후에게 ‘백여우’라 했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그런데, 요신도 욕을 하나?
“아! 백원후 님. 영산의 여울이 인사 올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여울은 정신이 없다.
꿈을 꾸는 건가? 고기를 먹는다는 소리에 꼭 만나고 싶었던 백원후가 꿈에 나타났나 보다.
“후후후, 그래 몸은 어떠하냐?”
“몸이요?”
“초경이 시작되어 천명이 널 데려왔더구나. 쯔즈쯔, 미리 보냈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백원후의 손짓에 물 밖으로 나오자 여인의 모습을 한 식신 둘이 비단으로 여울의 몸을 감쌌다.
물기를 닦아 내려나 했던 녹색의 비단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몸으로 감겨들어 소매와 치마의 형태를 이루었다.
“아니. 다른 거!”
고개를 젓는 백원후의 모습에 시녀들이 끝도 없이 각양각색의 비단을 들고 나타났다. 화려한 비단들은 여울의 몸에 착착 감겨 여러 형태의 옷으로 변했다.
“이런 것밖에 없어? 다음!”
사방으로 펄럭거리는 비단들이 깃발처럼 휘날렸다. 연이어 고개를 젓는 백원후의 손짓에 휘리리휘리리 철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아냐, 아니라고!”
푸른색과 흰색 비단이 여울의 몸으로 동시에 감겨들었다. 푸른색은 가슴 아래 일자로 늘어져 은실로 매듭이 지어지고 백색은 하늘하늘한 소매가 되었다. 그 모습에 백원후가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푸른색이 잘 어울리는구나.”
가슴을 겨우 가린 푸른 비단은 어깨는 훤히 드러낸 채 한 뼘 가슴 아래로 은실에 묶여 풍만한 소매가 손을 가리며 늘어졌다.
“좋아! 다음!”
손뼉을 치자 이번에는 작은 시동 둘이 제 몸보다 큰 은쟁반을 머리에 이고 나타났다. 갖가지 장신구가 산더미처럼 쌓인 은쟁반의 등장에 여울의 입이 떡 벌어졌다.
“흐음, 무엇이 좋을까?”
백원후가 은으로 세공된 작은 꽃들을 허공 위로 던졌다. 동시에 젖어 있던 여울의 머리카락이 둥실둥실 공중으로 떠오른다.
은빛 꽃들은 머리카락에 들러붙어 밧줄처럼 꼬이며 말려 올라갔다. 여울의 머리는 순식간에 반짝이는 꽃밭이 되어 버렸다.
“꽃에는 나비가 있어야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비가 내리듯 금빛 나비들이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은꽃에 금나비에 여울의 머리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삐딱해진 여울과는 상관없이 백원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머리카락이 좀 짧구나. 흐음, 어쩔 수 없지.”
귀걸이에 목걸이, 반지까지. 주렁주렁 장신구를 달고 보석이 박힌 가죽신까지 꿰어 신고서야 백원후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은경!”
식신들이 가져온 커다란 은경 속엔 여울은 없고 낯선 여인이 서 있다. 천녀처럼 고운 모습에 여울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모르고.
“옷이 날개라더니.”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비단옷에 장신구까지. 몸뚱이에 걸친 것만으로도 영주성 내 여러 채의 집을 살 수 있을 터였다.
은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여울은 묘하게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은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오라버니에게도 보여 주면 좋을 텐데.’
지금 여울의 모습을 묵이 본다면 무어라 말할까?
“이리 오렴.”
백원후가 여울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인다.
걸음을 옮기자 난생처음 느껴 보는 매끄러운 감촉이 서늘하게 다리를 스쳤다. 소름이 돋아 올랐다. 손으로 만져 보니 더없이 부드러워 손가락이 녹아 버릴 것 같다.
‘오홋, 감촉 좋은걸?’
장부처럼 씩씩하게 걷던 여울의 걸음걸이가 절로 조심스러워진다.
머리는 무겁지 치맛자락은 사타구니로 감겨들지.
‘망할! 이렇게 불편해서야 어찌 뛰어다니나!’
앞서 걷는 백원후를 흉내 내며 엉덩이를 살랑살랑, 여울은 붉은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문득, 정신을 잃기 전에 요란하게 울어 대던 반야가 떠올랐다.
“저…. 혹시 반야도 함께 오지 않았나요?”
“반야?”
“제가 기르는 문조인데. 머리와 꽁지는 검은색이고.”
여울이 손을 모아 반야의 외양을 설명했다.
“함께 왔다면 어딘가에 있겠지. 찾아보라 이르마.”
눈을 뜬 이후 한 번도 여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반야인데 어딜 간 걸까?
생각도 잠시, 백원후를 따라 접견실로 들어선 여울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아아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진수성찬의 요리들. 갈빗대가 드러난 산양구이와 얇게 저미어 채소와 버무린 소고기 냉채, 돼지 조림, 고기 경단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후후후, 나처럼 고기를 즐긴다지?”
아! 그리도 만나기를 고대했던 백원후, 그녀와 엄청나게 잘 지내리란 확신이 가슴으로 파도처럼 밀려든다. 눈앞에 펼쳐진 고기 요리들을 바라보는 여울의 눈동자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어서 먹으렴.”
“감사히 먹겠습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제일 큰 뼈다귀를 잡아 뜯는 여울의 모습을 지켜보는 백원후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후후후, 어린것을 어찌 풀떼기만 먹여 기르나.’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것이 천명에게 내어 달라 조르고 싶을 정도다.
‘하긴, 긴 세월 짝도 없이 식신하고만 살았으니.’
아름다운 궁전이 있고, 열락 같은 벗이 있다 한들 쌓여만 가는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맛있느냐?”
“엄청나게 맛이 좋습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여울의 빨간 입술이 어여쁜 곡선을 그리니 백원후의 입술이 따라 웃는다.
“후후후, 그럼, 나와 이곳에서 살까? 매일 좋은 옷 입고, 맛난 고기 먹으면서?”
그리하고 싶습니다. 정말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요.
“어찌 대답이 없누? 나와 여기서 살자니까.”
하지만 백원후와 살 팔자였다면 천명이 아닌 그녀를 먼저 만났겠지.
“쩝쩝쩝, 정말 맛이 좋습니다. 쩝쩝.”
“후후후, 딴청을 부리는 것도 꼭 천명을 닮았군.”
백원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여울이 양 볼 가득 고기를 오물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이리도 잘 먹으니 참으로 보기 좋구나.”
턱을 괴고 여울을 바라보는 백원후의 눈빛이 정겹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졌던 요리들은 전쟁터처럼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승전의 나팔처럼 마지막 갈빗대 하나를 입에 문 여울이 한숨을 내어 쉬며 물러앉았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래. 후후후, 달거리가 끝날 때까지 머물다 가려무나. 내 매일매일 고기로 상을 채우라 이를 것이니.”
“매일매일이요?”
도대체 얼마나 부자이기에 이리 맛난 음식을 매일 먹는단 말인가. 아차차! 부자가 아니라 요신이었지!
“그런데, 제가 큰 병에 걸린 건가요? 피를 엄청나게 흘렸는데, 눈을 뜨니 낯선 곳이라. 여긴 어딘가요?”
“후후후, 일찍도 묻는구나. 이곳은 화산에 있는 수정궁이란다.”
여울이 놀란 듯 백원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화산? 수정궁이요?”
“산 전체가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리 이름 지었지. 물론 천계에 오르면 더 좋은 궁을 짓겠지만, 뭐. 여기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
백원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여울이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이런! 배가 너무 불러 숨쉬기가 힘들다.
“네가 지낼 곳을 일러 줄 테니, 따라오너라.”
“감사합니다.”
반들거리는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따라 걷는 여울은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반야가 이곳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여울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영산은 온통 눈으로 뒤덮였는데 이곳은 꼭 봄날 같아요.”
“내가 겨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우아! 저도 겨울 싫어해요. 사방이 허연 게 마음까지 시리다니까요.”
붉은 기둥이 늘어선 복도는 사방이 트여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이 가득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달거리 때문이다. 온전하게 여인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긴 복도를 걸으며 여울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달에 한 번씩 피를 쏟게 될 거라는 소리에 갑자기 억울하다.
“이제 겨우 열한 살인데, 벌써 여인이 되다니!”
“훗! 상당히 억울한 목소리구나.”
“당장 애를 낳을 것도 아닌데, 너무 일찍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후후후, 어쩌겠느냐. 이 세상에 암컷으로 난 것들은 모두 겪는 일인걸.”
“그럼 백원후 님도?”
“난 요신이니 조금 다르지. 뭐, 그건 알 필요 없고.”
요신인 백원후는 원하는 짝을 만나 몸을 나누지 않는 한 달거리는 하지 않는다.
“지금이야 귀찮고 불편하여 억울한 마음도 들겠지만, 네가 평생을 함께하고픈 이를 만나게 된다면.”
묵 오라버니나 반야 같은?
“그리되면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더없는 축복임을 알게 될 거다. 정인을 꼭 닮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백원후는 천명을 선택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녀에게로 흐르지 않는다.
“그런 날이…. 온다면 말이다.”
씁쓸한 백원후의 목소리에도 여울은 괜스레 몸이 꼬이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개천에 살 때야 먹쇠나 칠석이 중 하나와 살림을 차려 개수와 풍년이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거지 마누라보다는 나무꾼 마누라가 낫지. 묵이 오라버니라면 아이를 낳아도 비럭질은 시키지 않을 거야. 도술도 부릴 줄 아니까, 헤헤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키득거리며 백원후의 뒤를 쫓다 보니 그녀가 문득 멈춰 선 채 여울을 내려다본다.
“뭐가 그리 재미있지?”
“아, 아니 그게 생각 좀 하느라고.”
“무슨?”
“화산은 영산에서는 얼마나 떨어져 있나 싶어서.”
“흐음…. 글쎄다. 천오백 리 정도 되려나?”
여울이 셈을 헤아려 보니 천오백 리면 열이레를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제기랄! 돌아가면 어떻게 해서든 결계 여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벌써 집이 그리운 게냐.”
“아니요. 헤헤헤, 다음에 찾아뵈려면 얼마나 달려와야 하나 해서.”
갑작스레 백원후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천명이 살쾡이가 아닌 여우를 들였구나.”
“예?”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니 섭섭다 하려 했거늘. 얼마나 달려야 나를 찾을 수 있느냐 물으니 내색도 못 하겠어. 영악한 것 같으니.”
“오래오래 있고 싶지만, 사부님도 걱정하실 테고.”
“그렇지. 노인네 아주 애간장을 태우고 있을 게야. 이 백원후가 요상한 것을 가르치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지.”
“요상한 것이요? 혹시 결계를 여는 뭐. 그런 거?”
여울의 물음에 백원후가 걸음을 멈춰 섰다.
“결계? 아직도 결계 여는 법은 배우지 못한 건가?”
“아…. 네. 제가 하도 망나니같이 굴어서, 사부님이 먼저 사람 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야장천 나무만 하고 있습니다.”
“흥! 사람보고 사람이 되라 해야지.”
“예?”
혹여 그녀의 망나니짓이 여기까지 소문이 났나 싶어 여울이 되묻자 백원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자, 여기가 네가 쓸 방이다.”
열 척 높이의 나무 문이 열리자 백원후의 뒤를 따라 여울은 화려하게 꾸며진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영산의 초가집 두 배만 한 넓이로 공주의 방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공주님 방 같아요!”
기둥 달린 침상에는 잠자리 날개 같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금박 장식의 가구들이 벽 쪽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른편으로 창문 대신 정원으로 향한 반원의 문밖에 만개한 꽃향기가 그윽하게 밀려들어 왔다.
“어떠냐? 마음에 드니?”
어느새 침상에 기대어 앉은 백원후가 손짓하며 옆자리를 두드린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던 여울이 쪼르르 달려가 앉자 백원후가 그녀의 머리에서 하나하나 장신구를 떼어 냈다.
“아름다움은 늘 불편함이 따르지.”
“도술로 한 방에 풀어 버리면 되잖아요.”
“편리함에 젖어 스스로 움직이는 즐거움을 잊으면 안 되지.”
“사부님도 그러셨어요.”
“후후후, 무어라 하였는데?”
“편리함은 정도를 갖지 않으니, 그 안락함은 오장육부를 녹이는 독이 되리라. 항시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편하면 좋기야 하지, 뭐. 오장육부를 녹일 것까지야.”
익숙하게 장신구를 떼어 내는 백원후의 손길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조금은 서늘한 손가락이 여울의 목덜미를 훑어 내렸다.
“은… 이라.”
“어? 오라버니도 그리 말했는데.”
여울이 손을 올려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고대 국가에서 내려오는 성씨래요.”
“오래되었지. 서른여섯 개의 부족을 통합했던 율국의 깃발이 사라진 지 벌써 삼천 년이 되어 가는구나.”
은꽃과 금나비를 떼어 낸 백원후가 수정 빗으로 여울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무인의 나라였던 율국에는 아름다운 하늘 꽃이 피었으니 천화라 불리었다. 신녀들 또한 천녀들이 시샘할 만큼 아름다웠지. 대대로 대천화를 배출했던 은씨 가문은 여아가 태어나면 ‘은’이란 문자를 목에 새겨 넣었단다. 사라진 율국의 문자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사라진 문자. 사라졌다는 건 없어졌다는 건데, 묵 오라버니는 어떻게 알아봤을까?
‘신녀라면 무녀와 같은 거 아닌가? 그럼 나는 무녀의 자손인 건가? 그래서 망할 잡것들이 눈에 보이는 건가?’
배도 부르겠다 머리를 만져 주는 백원후의 다정한 손길에 눈치 없이 잠이 밀려든다.
“저, 반야 좀 찾아 주시면 안 될까요? 분명 함께 왔을 거예요. 제가 없으면 자꾸 울어서. 함께 있어야 하는데….”
“알에서 나온 새들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이를 주인으로 섬긴다지? 후후후, 그럼 걱정할 바 없지 않으냐. 눈을 뜨면 네 머리맡에 있을 테니.”
가벼워진 머리채가 자꾸만 앞으로 쏟아졌다. 배부르고 등 따듯한 지금, 여울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아…. 그냥 여기 살았으면 좋겠다.’
사부님도 묵도 반야도, 그리고 개천의 아이들까지. 모두가 이곳에 모여 풍족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사방이 보석으로 가득하니 묵은 힘들게 나무를 해서 가난한 이를 돕지 않아도 되고. 사부님은 좋아하는 소나무 한 그루만 들고 오면 될 테고.
‘백원후 님도 외로워 보이는데…. 다 같이 그리 모여 살면 안 되는 걸까.’
개천을 떠나온 지 삼 년이 지났건만, 여울은 한시도 그 아이들을 잊은 적이 없다.
잠든 여울을 조용히 바라보던 백원후가 비단 금침을 덮어 주곤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원으로 통하는 휘장을 스치며 들어서는 바람이 서늘해졌다.
“오늘은 시간이 빨리 가는군.”
수정궁은 인계가 아닌 천계의 시간에 맞춰져 있으니 봄은 새벽이요, 여름은 낮이라. 가을은 저녁으로 밤이면 눈 내리는 겨울이 된다. 수정궁의 하루는 천계와 같이 인계의 일 년인 것이다.
“일다경에 한 번씩은 잠들게 생겼네.”
문을 나서니 식신 둘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다.
“어디에 두었느냐.”
“새장에 가두어 서재에 두었습니다.”
“가져와.”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백원후가 멈춰 섰다.
“혼자 걷는 것은 재미없어.”
손을 저으니 텅 빈 복도로 금세 문 하나가 생겨났다.
스르륵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선 백원후는 푹신한 방석에 앉아 낮은 창턱에 팔을 고였다.
삐, 삐이, 삐, 삐삐~.
새장을 손에 든 식신이 나타나자 백원후가 손짓하여 그들을 물리곤 요란하게 울어 대는 문조를 쳐다봤다.
“흐음, 네가 반야로구나.”
“삐이이~. 삐, 삐.”
“그래. 여울과 함께 두면 집 생각이 날까 하여 떨어뜨려 놓았더니 널 찾아 달라 부탁하니 어쩐다?”
“삐이, 삐이이이~.”
“그냥 영산으로 돌려보낼까?”
“삐, 삐, 삐, 삐, 삐.”
그녀의 혼잣말에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니 백원후는 웃음이 나왔다.
“여울과도 그리 수다를 떠는 게냐.”
“삐, 삐이이이~.”
뭐라고 하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백원후가 손가락으로 선홍색 부리 끝을 튕겼다.
“삐아아야야야, 아야.”
어지간히 아팠던지 반야가 연신 머리를 털어 댄다.
“아우. 아우 아파!”
“엄살하고는. 한 대 쥐어 맞은 값으로 언문이 트였으니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우리 여울이는 어디 있답니까!”
“후후후, 말투가 제 주인과 꼭 닮았구나.”
“당장 여울에게 데려다주세요.”
“안 그래도 내 그러려던 참이긴 한데….”
새장 안에 갇힌 반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원후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간다.
“기껏해야 칠팔 년 살까?”
“흥! 칠 년을 살든 팔 년을 살든.”
“보아하니 그중 삼분의 일은 이미 지나간 듯하고, 수정궁의 하루가 저물어 가니 너의 일 년은 또다시 사라졌구나.”
느릿하게 턱 선을 어루만지는 백원후의 표정이 묘하게 섬뜩하다.
“내가 여울이를 하루 이틀 더 잡아 두면 어찌 되려나?”
“뭐, 뭐라고요?”
“그럼…. 넌 영산으로 돌아가자마자 울지 못할 정도로 노쇠하여 기력을 잃겠구나.”
백원후의 말에 반야의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렸다. 피를 쏟는 여울을 쫓아와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어쩌나, 여울이 참으로 슬퍼하겠어.”
“천명 선생님께서 도술을 쓰시니 제 수명도 늘려 주실지 몰라요.”
“오호라!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더냐. 어리석기는. 천명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짓 따위 하지 않아.”
그러한 사내였다면 내 이리 애태우지도 않았을 터.
“그러기에는 너무나 강직한 사내거든.”
하면 정말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죽어야 한단 말인가. 억울하다. 힘들게 알을 깨고 나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죽어야 하다니!
반야의 작은 심장이 절망감으로 파닥인다.
“왜…. 더 살고 싶으냐?”
요기로 가득한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백원후.
반야의 가슴으로 두려움이 차올랐다.
“더, 살, 수 있나요?”
“흐음, 글쎄다.”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백원후가 웃었다. 파닥파닥, 새장에 갇힌 반야의 절망이 절절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짜릿함이군.
“염마장에 새겨진 명줄을 늘인다는 것이 엿가락 늘이듯 그리 쉬운 것은 아닌지라.”
작은 풀잎 하나라도 모두가 주어진 시간을 살아간다. 만물의 시간이 적힌 염마장을 고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물의 생을 관장하는 남두성군과 사후에 처리를 관장하는 북두성군을 모두 만나야 하니 실로 귀찮은 일이었다.
“흐음, 우선은 깐깐하기 짝이 없는 남두성군을 만나 거래를 해야겠지. 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저 작은 새 한 마리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백원후는 물끄러미 반야를 응시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여울이 지옥 불에 뛰어들어도 넌 함께하려 하겠지?”
“물론이지요.”
“그래. 그렇게 그림자처럼 여울에게 붙어 다닐 테니. 그 아이가 어디에서 무얼 하든 내게 소식을 전해 준다면 네 명을 늘려 주마.”
백원후의 말에 반야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여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고해바치라니.
“간자 노릇을 하란 말씀인가요?”
“거창하게 간자라고 할 것까지야. 나라를 팔아먹으라 이르는 것도 아닌데.”
“하면 어찌하여 여울에 대한 것을 알고자 하는 건가요?”
“그건…. 내가 그 아이를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어 반야의 머리가 갸우뚱하게 기운다.
“당신은 암컷이잖아요. 근데 어찌 여울을 탐내는 건지.”
“하하하하, 암수의 애틋함을 논하다니, 새 주제에 제 주인보다 더 똑똑하구나. 탐내는 것은 맞다. 하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조금 다르단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천명이 여울을 거두었고, 난 천명의 벗이니 나 또한 벗의 아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안 할랍니다. 그냥 죽더라도 짧은 시간 함께한 것으로 만족할래요.”
요것 봐라.
생각지도 못하게 머리를 굴리는 반야의 모습에 백원후는 살짝 당황스럽다.
‘어려서 거두어들인 것은 제 주인을 닮아 간다 하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똑 부러진 면이 있구나.’
여울을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하기도 하고, 천하의 백원후가 고작 문조 한 마리와 거래를 하려 한다는 것이 비위가 틀어지기도 한다.
“멍청한 반야야, 쉽게 일러 주마. 여울에게 천명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이니 그 벗인 나는 굳이 따지자면 할머니 같은 존재가 된다.”
할머니라. 괜찮군.
스스로 뱉어 놓은 말이 너무나 정겹게 마음에 와닿으니 백원후는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요?”
“그렇지. 할머니가 손녀 이야기 듣고 싶은 것이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내가 너무 오래 살아 모든 것이 무료하여 그러한다.”
“정말인가요?”
“아니면 내가 뭐하러 그 아이를 데려다 씻기고 입히고 고기까지 먹였을까?”
“여울이 고기를 먹었어요?”
“소 한 마리는 해치웠을걸!”
고기가 먹고 싶다 노래를 하던 여울을 보며 자신이 문조가 아니라 사냥을 하는 맹금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던 반야였다. 여울이 원하는 것을 내어 주는 백원후를 마냥 경계하며 밀어낼 수도 없었다.
정말 여울을 예뻐해서 그런 걸까?
“내 전에 인간 세상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지. 그때 내게도 너와 같은 벗이 있었다. 눈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갈기를 가진 백마라 ‘백야’라 이름 지었다.”
“백야….”
“임이 주신 첫 선물이기에 참으로 아끼었다.”
“하면, 지금은.”
“후후후, 목이 잘려 죽었다.”
히익! 저리도 슬픈 눈을 하고 어쩌면 저리도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 여인은….
“내게 오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을, 그 아이를 지켜 주지 못한 것이 내겐 또 다른 지옥이 되었구나.”
옅은 제비꽃색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짙은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반야는 고민이 너무 깊다.
혹 여울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정말 여울을 좋아하는 거예요?”
너무나도 순수한 물음에 백원후가 숨을 들이켰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천명도 그 재앙덩어리 묵이란 녀석도, 하다못해 하찮은 미물조차도 그 아이를 품으려 하니…. 지금 나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천명의 연인으로 자리하지 못하고 벗으로 머물러야 했던 백원후의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 끝에 여울이 왔다. 천명과 그녀의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과도 같은 파벽을 넘어.
‘천명이 짧은 생을 마감하여도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게 될…. 그가 선택한 아이.’
아이를 낳아 보지 않은 백원후는 여울과의 첫 만남 이후 재회를 고대했다.
‘정말 그 아이가 맞는 것일까.’
갚아야 할 빚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기다림의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그 때문에 파벽을 오른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에 참으로 오랜만에 설렘을 느꼈다.
“난…. 그 아이가 참으로 좋다.”
혼잣말을 하듯 온유한 미소를 짓는 백원후의 모습에 반야가 한숨을 폭 내어 쉰다.
“하지만 일일이 일러바친다는 것이 좀….”
조심스럽고 까다롭다.
문조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반야의 망설임에 백원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여울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절대 없을 터이니. 네가 걱정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좋아요. 그리하지요.”
반야의 대답에 백원후가 살며시 고개를 튼다.
오른쪽 눈으로 맑은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이내 눈동자와 같은 보라색 결정체로 응고되어 똑 떨어졌다.
“삼켜라. 나의 기운이 담긴 눈물이 네 안에 끊어지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심어 줄 게다.”
하얗고 기다란 손끝에 달린 보석을 바라보던 반야가 날름 부리로 물어 머리를 쳐들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보석의 차가운 느낌에 파르르 몸이 떨렸다.
“이제 너는 수많은 갈래의 언어를 이해하며 말할 것이다. 모습을 바꾸는 둔갑술과 몸을 여러 개로 나누는 분신술 그리고 몸을 숨기는 은형술을 행할 수 있다.”
백원후는 강한 요기를 흡수하느라 숨을 할딱이며 늘어진 반야를 새장에서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또한 천 리를 내어다 보는 눈과 천 길 낭떠러지에서 솟아오르는 날개를 줄 것이니, 네 앞의 모든 결계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
세상에 나온 지 이제 겨우 삼 년, 반야는 칠천 년을 살아온 요신의 힘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작은 몸이었다.
아쉽다. 새가 아니었다면, 아니, 새라 하여도 수리와 같은 맹금류였다면 더 많은 재주를 얻었을 것이다. 어떠한 위험에서도 여울을 지켜 줄 수 있는 보다 공격적인 술법들을….
“아쉽구나. 타고난 신체가 미약한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방어적인 기술들뿐이니.”
하지만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이제 반야는 더 높이, 더 멀리 날며 여울의 시야를 넓혀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