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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여우 주막 (4/34)

04. 여우 주막

“사부님! 요괴란 무엇입니까?”

“요사스럽고 괴이한 행동으로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무리들을 말한다.”

영산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지팡이 하나 짚고 앞서가는 천명의 뒤를 쫓는 여울은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하면 인간이라도 포악한 자들은 요괴라 할 수 있는 건가요?”

“껄껄껄, 개수란 자를 말하는 게로구나.”

“사부님 보시기엔 그리 보이지 않던가요?”

여울의 입에서 ‘사부님’ 소리가 입에 찰떡같이 붙어 나온다. 앞으로 그녀를 먹여 주고 재워 주며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사람이었다.

“사부님! 사부님. 요선각이란 곳에서 제가 얼마나 식겁했는지 아십니까. 세상에 요괴가 그리 많을 줄이야.”

“요선들은 살생을 않고 도를 닦아 신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니 요괴라 함은 옳지 않다.”

“개뿔!”

퍽! 천명의 지팡이가 여지없이 여울의 등짝을 후려쳤다.

개수에게 얻어터지며 자란 여울인지라 찍소리 없이 맞고는 금세 등짝을 펴며 넉살 좋게 웃었다.

“어허! 개뿔이라니. 입에 설충이라도 든 것이냐.”

“설충이요?”

“사람의 입에 기생하며 역병을 옮기는 요괴다.”

“욕을 역병이라 하심은 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전하는 이들까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역병과도 같다.”

“잘못했습니다.”

조심하고 조심하여도 장단 맞춰 튀어나오는 욕설은 어찌해야 할지.

“제 말은 검은 뱀이 절 잡아먹으려 했는데 어찌 신선이라 부를까. 뭐, 언제 요괴로 되돌아가 사람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사람도 아이가 있고 어른이 있듯이 요선 또한 그러하니 시간이 걸리는 게지.”

봇짐 하나 없이 맨발로 폴짝폴짝. 여울은 천명의 곁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하면 사람도 아니요 동물도 아닌 것들은 전부 요괴입니까?”

“껄껄껄껄, 무엇이 그리도 궁금할까?”

“요선들이 그리 많다면 요괴들은 더더욱 많을 것 아닙니까.”

금방이라도 요괴가 나타날까 주위를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다.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 들려올 뿐, 모두가 잠든 밤길엔 오가는 사람조차 없다.

‘하긴, 요괴나 인간이나….’

잔혹하기 그지없는 개수를 떠올리니 여울의 마음은 자연스레 개천에 두고 온 아이들에게로 흐른다.

‘나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을까? 분명 칠석이 대장 노릇을 할 텐데. 그 성질에 아이들에게 패악질이나 않을지.’

애꾸눈 개수를 만난 천명은 그가 부르는 대로 소 다섯 마리 값에 여울을 샀다. 비쩍 곯은 계집아이의 값으로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었다.

“계집답지 않게 날래고 민첩하니, 비럭질이나 도둑질을 시켜도 소 다섯 마리는 뽑을 게요. 반반하게 생겼으니 밥만 잘 먹여 기르면 이삼 년 뒤에 기루에 넘겨도 되고.”

개수의 말만으로도 그간 여울이 어찌 살았는지 모든 것을 파악한 천명은 아무런 대꾸 없이 돈을 건넸다.

개수야 남의 등골 빼먹는 데 이력이 난 자이니 무조건 비싸게 값을 부른 것이다. 하나 똑똑해 보이는 천명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값을 치렀는지 도대체가 여울은 알 수가 없었다.

신이 난 개수가 천으로 가려진 애꾸눈을 움찔거리며 여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가거라! 아이들 걱정은 말고! 내 이 돈으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일 터이니.”

개천 아이들의 운명이란 것이 결국에는 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살아서 이곳을 나가는 방법은 어딘가로 팔려 가는 것뿐이니. 여울은 그리 운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안녕, 송이야. 먹쇠, 칠석이, 분례, 돌석이, 개똥이, 순이 모두 안녕. 안녕…. 개천.’

그리도 떠나고 싶었던 개천이었건만 여울은 홀가분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봇짐 하나 없이 천명을 따라나선 여울은 처음과 달리 개천에서 멀어질수록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도선이라면 돌도 돈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여울은 다른 아이들도 함께 데려가 달라 부탁하였으나 천명의 거절은 단호했다.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준비되어 있으니 염려치 말거라. 더 이상은 개입해서는 안 된다.”

배 속의 기생충으로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야 할 송이가 천명의 옥돌을 삼킨 덕에 명줄을 늘렸다 하니, 여울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여울의 다짐하는 소리에 멈춰 선 천명이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휙 낚아챘다.

“으에엑! 그게 뭐예요?”

“환이로구나.”

“제 몸에 붙어 있던 건가요? 이런 우라질!”

“환은 인간의 근심과 같은 안 좋은 감정들이 요괴로 변한 것이지.”

기겁을 하며 머리를 털어 대던 여울이 얌전히 천명의 손에 앉아 있는 회색 물체를 쳐다봤다.

꾸우, 꾸우. 꾸우, 꾸우꾸우우우.

“손도 발도 없는 것이, 아직 새끼인가 봅니다.”

주먹만 한 털 뭉치가 요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하나뿐인 눈을 깜박인다.

가만히 보니 귀엽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개천에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삼켜 준다면 오히려 도움이 되는 물건 아닌가. 가져다 길러 볼까?

“겉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아니 되니.”

“별로 위협적으로 생기지는 않았는데요. 피 빨아 먹는 개벼룩보단 낫지 않습니까.”

“개천 아이들에 대한 너의 근심이 깊어지면 그것을 먹고 금세 자라나 네 척추를 부술 게다.”

히익.

물러서는 여울의 모습에 천명이 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이 아이에게 네가 먹을 근심과 슬픔은 없을 터이니 그만 가 보아라.”

파바밧! 파사사사. 사르르.

아이들에 대한 근심 때문에 생겨난 환이 천명의 손안에서 먼지처럼 흩어져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환은 사라졌지만 천명을 따라 걷는 여울은 여전히 제 몸 털어 대기 바쁘다.

망할 잡것들! 어디 처먹을 것이 없어서.

“여울아….”

“예.”

“그만 털어도 된다.”

“자꾸 뭐가 있는 것 같아서요. 우라질!”

또다시 튀어나온 욕설에 아차 싶어 눈치를 보던 여울은 슬금슬금 천명의 곁으로 다가가 등짝을 내밀었다.

열 대 때려도 됩니다. 사부님.

“여울아.”

“예.”

“말이란 것은 언령과도 같은 것이라. 그것은 네 입에서 뱉어지는 순간 복이 되고 혹은 살이 되어 돌아오느니.”

“조심하겠습니다.”

순하게 올려다보는 눈망울에 천명은 더 나무라려던 마음을 접었다.

“저…. 사부님, 요괴 이야기 더 해 주시렵니까?”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더냐?”

“요괴도 엄마 아빠가 있을까요?”

“용이나 백호 같은 신수들 또한 이무기나 호랑이가 진화한 것이라. 선기를 얻어 하늘에 오르면 신수가 될 것이요. 반대로 요기가 쌓이면 요괴가 되는 것이지. 기린이나 봉황처럼 애초에 신수로 태어나는 순혈들이 있으나 대부분은 변이의 과정을 통해 그리된다.”

“하면 모든 것들이 요괴로 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동식물이 세상에 태어나 수백, 수천 년 기를 축적하면 정이 된다. 이들은 환술, 선술, 동물을 부리는 능력과 같은 강한 힘과 높은 지능을 갖추게 된다. 그중 사악한 무리를 요괴라 하고 선한 무리들을 정괴라 한다.”

꼬박 반나절을 걸었는데도 다리 아프다 투정 않는 여울이 기특하여 천명은 그녀의 물음에 성심껏 답해 주었다. 그러나 여울의 물음은 그 끝이 없었다.

무엇이 그리 궁금할까. 여울은 먹이 달라 조르는 새끼 새처럼 짹짹거린다.

“하면 귀신도 착한 귀신이 있고 나쁜 귀신이 있단 말인가요?”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귀신 또한 선령이 있으니 악령도 있지. 보통은 악귀라 부른다.”

“아…. 참으로 이해가 아니 갑니다. 인간들 살기에도 빠듯한 세상인데, 천계나 마계에서 살지 왜 우리들을 괴롭힌단 말입니까.”

세상 걱정 다 짊어진 듯한 여덟 살짜리의 한탄에 천명은 웃음이 나왔다. 보통의 아이들 같으면 요괴 쫓는 법을 알려 달라 조를 터인데, 여울은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자 했다.

기특하도다.

끼니도 거르고 밤새 걸어 영주 땅을 벗어나자 해가 떴다.

쉬지 않고 걷고 또 걷고. 산을 하나 넘어서자 수레 하나 지나갈 만한 길에는 또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이고, 다리야. 노인네가 힘도 좋아.’

지친 기색조차 없는 천명을 따라 달빛 아래 걷는 여울은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기운이 빠지니 덩달아 입도 무거워졌다.

“여울아.”

“예.”

“지쳤느냐?”

“아닙니다. 갈 수 있습니다.”

무어라 대답을 할까? 어차피 쉬어 갈 데도 없는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영산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이렇게 백 일을 더 걸어야 한다.”

“망! 아…. 예.”

망할 욕지거리가 튀어나오자 날름 삼킨 여울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덟 살 평생 영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여울은 성문 밖이 얼마나 넓은지 알지 못했다.

묵묵히 천명을 따라 걷던 여울은 또다시 개천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행여나 환이 다시 생겨날까 부지런히 머리를 털어 보았지만 생각은 그리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련이라 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음의 짐이 되어 병을 만들기도 한단다.”

여울은 미련이란 감정을 마음의 짐이 아닌 살아가는 힘으로 결정했다.

‘돌덩이를 금덩이로 바꿀 만큼 도술을 배우면 아이들을 찾아 함께 살아야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여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꼬르륵. 배에 주었던 힘이 주먹으로 갔나? 힘 빠진 배에서 소리가 났다. 사나흘 굶는 거야 일도 아닌데, 너무 많이 걸었나 보다. 또다시 꼬르륵.

“잠시 쉬어 가자꾸나.”

“여기서요? 길 한복판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 위를 살피는 여울의 물음에 천명이 지팡이를 들어 허공을 두드렸다. 순간 그의 지팡이가 닿은 곳에 먹물이 번지듯 나무 문이 나타났다.

똑똑똑.

곱상한 여인네 하나가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뉘시오?”

“길 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습니까?”

어여쁜 얼굴이다. 가느다란 눈매에서 흐르는 묘한 색기가 시선을 끌었다. 여인이 천명의 곁에 선 여울을 훑어보며 배시시 웃었다.

“묵어가는 대신 저 아이를 주시렵니까?”

“껄껄껄, 이 아이는 내 손녀이니 내어 줄 수 없고 다른 것을 드리리다.”

천명이 송이가 삼킨 것과 같은 돌을 내밀자 망설이던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대문을 열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뜬금없이 숲길이 나왔다. 좁은 길을 향해 우거진 나무조차 음산하게 생긴 것이 재수 없다.

“사부님, 제가 보기엔 그저 돌로 보이는데, 꽤 귀한 것인가 봅니다.”

“월광석이라 하는 것이다. 별똥별을 다듬어 만든 것이니 인계의 물건이 아니라 천계의 것이라 해야겠지. 요괴들이 천 년을 모아야 하는 선기가 들어 있다.”

“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니 귀한 물건이겠구나. 그래서 송이의 명도 그리 늘어난 거로구나. 하긴! 요선각에서도 별처럼 날아가 결계를 열었었지?

여울은 문득 요선각으로 향하던 골목길이 생각났다. 요상한 기운이 스멀거리는 것이 지금과 분위기가 비슷한데? 설마….

“사부님…. 대문까지 오기에도 한참인데, 어떻게 금방 문을 열었을까요?”

“여우 주막이다.”

“여, 여우 주막이요? 그럼 앞서 걷는 저, 그.”

“하루만 묵어갈 것이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큰 탈 없을 게야.”

빌어먹을! 여우가 주막을 한단다. 사부님 따라다니다 멀쩡한 명줄이 줄어드는 건 아닌지.

여울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숲길의 끝으로 정말 허름한 주막이 나왔다. 방이라곤 단 두 칸뿐인 초가집, 여울은 천명을 따라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도선님, 식사는 무엇으로 차릴까요?”

여인의 물음에 여울은 후다닥 천명에게 다가앉아 속삭였다.

“사부님, 사부님이 도선인 것을 아는 것을 보니 여우 요괴가 분명한가 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도선의 주머니를 훔친 너보다는 영특하구나.”

여울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천명이 여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닭 한 마리 잡아 주고 목욕물이나 좀 데워 주시구려.”

얌전하게 답하며 고개 숙인 여인이 슬쩍 여울을 곁눈질하며 웃는다. 마치 새색시 쳐다보는 신랑 같아 소름이 돋아 올랐다.

사람 간 파먹은 여우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은 터라 여울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간이 오그라들었다.

‘왜 자꾸 쳐다보고 지랄이야.’

여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여울은 가부좌를 틀어 앉은 천명에게 말했다.

“내일이면 또다시 더러워질 텐데 무엇하러 씻으려 하십니까. 사부님! 그냥 식사나 하고 일찍 주무시지요.”

“내가 아니라 네가 씻을 거다.”

“에에에엑?”

요괴를 보았을 때보다 더 기겁을 하는 여울의 모습에 천명의 주름진 눈이 웃는다.

“사부님! 작년에 씻고 새해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목욕이라니….”

거지는 더럽고 냄새 나는 것도 기술이라.

냄새가 구려야 뭐라도 빨리 주어 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여울아.”

“예.”

“어제 밥은 먹었느냐.”

목욕 이야기 하다 뜬금없이 밥은.

“어제 초상집에서 거하게 얻어먹었습니다. 제가 초상집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아가거든요.”

죽어도 떠나지 못하고 집 앞에서 서성이는 귀신들이 보이니 당연할 수밖에.

“어제 먹어도 오늘 배가 고픈데, 내일 고파질 배는 채워 무엇할까. 넌 닭 먹지 말고 그냥 자거라.”

아….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여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욕에 대해 심도 높은 고민에 빠졌다.

“도선님, 목욕물 준비되었습니다.”

저승사자의 목소리라도 들은 양, 화들짝 놀란 여울이 새파랗게 질려 몸을 일으켰다.

“껄껄껄껄, 내 너를 만나 이 생에 웃을 것을 다 웃어 버리는구나.”

“그리 좋으십니까.”

“고양이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씻는 것을 싫어할까. 내가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를 주워 왔나?”

“괭이라뇨! 절대 아닙니다. 하필이면 괭이 새끼에 비교를 하십니까.”

“가서 씻거라. 후에는 씻지 말라 하여도 씻게 될 테니.”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허허허, 정말 그러할까.”

껄껄거리는 천명이 얄미워 여울의 눈이 샐쭉해졌다.

“여울아.”

“예에에에에에!”

신경질이 나니 대답에도 성질이 묻어난다.

“이곳에서는 누구에게도 네 이름을 알려 주어서는 아니 된다. 통성명은 연을 맺는 초대이니.”

“문밖에서 사부님이 절 부르는 소릴 들었을지 어찌 압니까.”

“훔쳐 듣는 것과 직접 말하여 주는 것은 다르다.”

여울은 대꾸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 기다리고 선 여인은 문을 열어 주었던 여인과 같은 담갈색 눈동자를 가졌으나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자꾸만 쳐다보고 웃던 여인의 어미인가?

“이리로 오시지요.”

여울은 별다른 생각 없이 따라 걸었다. 초가집을 빙 돌아 뒤꼍으로 가니 창고 같은 곳에 커다란 나무 목욕통이 놓여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날 삶아 먹으려나!’

생각도 잠시.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빨리 맞고 누워 자는 것이 상책!

여울은 여인이 빤히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훌훌 옷을 벗어 던졌다. 개천의 여울에게 부끄럼 따위 있을 리 없다. 있었다면 벌써 장날에 엿 바꾸어 먹었겠지.

“왜 그러고 서 있어요. 가요. 지키고 서 있지 않아도 씻어요. 씻는다고요.”

“목욕 시중 들려 합니다.”

“일없습니다.”

“도선께서 그리하라 하였습니다.”

아! 사부님! 정말 숨도 못 쉬게 들고 잡는구나.

뜨끈한 물속에 들어 앉아 있으려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가 거친 천으로 그녀의 몸을 문질러 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아, 아얏! 이봐요. 살살 좀.”

“어머! 어머, 어머머. 때 좀 봐. 이렇게나 더러운데, 어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킁, 킁킁.”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것들이 수제비 띄우듯 물 위에 동동 떠 있다. 거지 생활을 하며 그녀를 갑옷처럼 지켜 주었던 껍데기들…. 괜스레 눈물이 나려 한다. 안녕! 안녕!

“머리카락은 왜 이리 짧아요?”

“짧은 게 편하니까요.”

“암컷은 털이 많아야지.”

암컷? 털? 역시 사람이 아니었어. 어휴.

“털 관리가 될 때 이야기죠.”

작은 사내아이가 물동이를 들고 와 물을 새로이 채우곤 아쉬운 듯 힐끔거리며 나가 버렸다.

‘도대체 몇 마리나 살고 있는 거야? 엄마 여우, 아까 그 젊은 여자 여우. 꼬마 여우….’

이제껏 목욕이라고는 개천에서 멱 감는 것이 전부였다. 뜨거운 물에 껍데기를 벗겨 내고 나니 팔자에 없는 호강에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흐음…. 목욕이라는 거 생각보다 괜찮네.

“호호호, 도선 따라다니기 힘들지 않아? 그런데 이름은 뭐라고 부르나?”

“아직 이틀밖에 안 따라다녔어요.”

“이틀?”

“만난 지 이틀 되었으니까.”

“그렇지? 손녀라더니. 아무리 봐도 핏줄은 아니더라. 호호호, 그럼 정도 많이 안 들었겠네. 도선님은 아기씨를 뭐라고 부르셔?”

아차! 여우의 수작에 넘어가 천명의 손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버리다니!

자꾸만 이름을 묻는 여우에게 모른 척 대꾸를 했다.

“정이야 듬뿍 들었죠.”

“이틀밖에 안 따라다녔다며 고새 정이 들었다고?”

은근하게 말을 놓기 시작한 여우가 참으로 수다스럽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가물가물 잠이 오기 시작했다.

“소 다섯 마리 값에 날 샀는데, 핏덩이를 버린 부모보다 낫지 않소.”

“겨우 소 다섯 마리? 난 열 마리도 내겠다.”

열 마리?

번뜩 눈을 뜬 여울의 벌어진 입에 여우가 나뭇가지 하나를 쑥 집어넣었다.

“이게 뭐요?”

“버드나무 가지. 이 닦아야지. 근데 왜 이름을 말 안 해 줘?”

“웅, 웅웅웅.”

직접 나뭇가지를 잡고 이를 문지르며 닦는 법을 가르쳐 주는 여우가 너무나 다정하다. 어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여울은 그녀가 요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뭐,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 여우들은 재물 모으는 데는 솜씨가 좋다우.”

“아…. 그래요?”

“여기서 나와 살지 않을래? 도선 따라다니며 고생하는 것보다 배부르고 등 뜨습고 여기가 낫지 않아?”

“잡아먹으려고?”

“아니, 아니. 아까 왜 물동이 들고 왔던….”

“꼬마 애?”

“내 아들인데, 우리 호영이 각시 삼으면 딱 좋겠구먼.”

“에에에에? 아들도 여우일 거 아냐.”

남녀 간의 운우지정을 모르는 여울은 누군가의 각시가 된다는 것보다 상대가 여우라는 것이 우습다.

“그렇지. 내 새끼니까. 참, 이름이 뭐라 했더라?”

“여우가 여우한테 장가들어야지 왜 인간한테 장가를 들어.”

“어머! 여우 각시 여우 신랑 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떵떵거리고 잘살아. 내가 말했잖아. 재물 모으는 재주가 있다고. 새끼들도 인물들이 얼마나 좋은데.”

“풋! 아직 땅꼬마던데?”

“어머? 그래도 백두 살이야. 장가들 때 됐어.”

“거짓말! 백두 살인데 왜 저리 작아.”

“그거야. 네가 부끄러워할까 봐, 아기처럼 하고 오라 했지.”

제 몸통보다 큰 물동이 들고 왔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까 문 열어 준 것도 우리 아들인데? 널 보고 홀딱 반했나 봐.”

“여자가 열어 줬거든?”

“호호호, 주막에 사내가 있으면 누가 좋아해. 그래서 치마 입혔지. 다시 오라 해 볼까. 진짜 잘생겼어.”

막무가내로 조르는 여우를 보며 여울은 난처해졌다. 여우의 각시가 되고픈 마음은 절대로 없지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그녀의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에이, 난 여덟 살인데 백두 살짜리랑 어찌 사누.”

“어머! 열여덟 될 때까지 우리가 기다리면 되지. 누가 잡아먹나? 근데, 아까 이름이 뭐라 했지?”

“안 돼, 안 돼. 죽어도 내가 먼저 죽을 테고.”

“우리 호영이 각시 되면 호영이가 세상의 좋은 것은 죄다 가져다 먹일 텐데, 다른 인간들보다 두 배는 더 살아.”

“그냥 다른 인간 구해요.”

“흥! 뭐, 아무하고나 눈이 맞나? 여우인지 알고 받아 주어야 해로하지. 구미호들도 속이고 살다 애 낳고 헤어지는데, 우린 이제 겨우 꼬리 다섯 개라고.”

실랑이를 하고 있자니 물이 차가워졌다.

여울이 자리에서 일어서니 여우가 고운 치마저고리를 꺼내 든다.

“나 치마 안 입어.”

“그래? 호영아! 호영아! 바지 가져와!”

밖에서 후다닥하는 소리와 함께 훤칠한 사내 하나가 보따리 하나를 안고 들어섰다.

인간 나이로 스무 살쯤 되었을까?

훤칠한 키와 달리 곱상한 얼굴이다. 문을 열어 주었던 여인과 비슷했지만 치마만 두른 것이 아니라 둔갑을 했던 것 같다.

가늘던 눈매는 굵직하고 시원스레 뻗어 서글서글한 눈동자를 감싸고 뾰족하던 콧날 또한 아까와는 달리 두툼하여 우직하다. 여울과 시선을 맞추며 눈꼬리를 활처럼 휘며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

“어….”

“난 호영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지?”

알몸의 여울은 넋을 잃은 채 호영을 올려다봤다.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담갈색 눈동자가 너무 예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간다.

“이름이 없는 거야?”

“아냐. 있어. 나는 개…”

인연을 맺는 초대!

벼락 맞은 듯 여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우의 미색에 빠져 하마터면 ‘개천의 여울’이라 말할 뻔했네! 아우! 방심하지 말아야지.

“개 뭐라고?”

“어? 천.”

“개•천•? 개천이구나?”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름 예쁘다. 개천.”

“…….”

“근데, 바지 입으려고?”

“아…. 아니, 치마.”

호영에게 넋이 빠져 버린 여울은 저도 모르게 치마를 가리키고 말았다.

평생 입어 보지도 않은 치마를! 개떡 주며 입으라 해도 입지 않을 펄럭 치마를!

신이 난 여우 엄마가 목욕통 속에 서 있는 여울을 날름 들어 물 밖에 세우곤 물기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호호호, 이름을 알았으니 되었네. 고뿔 들겠어. 옷 입자. 손도 작고, 발도 작고. 아유, 언제 크나. 호호호.”

물에 젖은 떠꺼머리도 얌전하게 내려앉았겠다. 연한 진달래색 치마에 병아리색 저고리를 입으니 그럭저럭 보아 줄 만하다.

너무나 좋아하는 여우 엄마를 보자니 여울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끈해졌다. 덩달아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다.

“아유, 예뻐라. 부끄럼도 없고 씩씩하니. 호영아! 어떠니? 참 좋지?”

“네, 어머니.”

“그럼 개천이 방까지 데려다주렴. 신발 없으니까 업고 가. 당장 신발부터 만들어야겠다.”

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네.

멍하니 서 있던 여울은 어느새 여우 도령 호영의 등에 업혀 있었다. 가슴 설레는 사향 내음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사내의 등이 이리도 넓고 포근하였던가.

“기다리면 언젠가 올 줄 알았어.”

생전 처음 누군가의 등에 업혀 본 여울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꼭 그러안았다. 너른 등이 참으로 따뜻하여 구름 위에 누운 듯 포근하다.

오라비가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도선의 선기가 너무 강해서 결계 치고 숨어 있었어. 어머니가 문 열지 말라 하셨는데, 말 안 듣고 열어 보니 네가 있더라.”

“혼자 온 것도 아닌데.”

“하하하, 난 너밖에 안 보였어.”

구름처럼 몽롱하게 들려오는 호영의 목소리는 물안개처럼 그윽했다. 여울을 등에 업은 호영이 그녀의 발을 만지작거린다.

“개천은 발이 참 작구나. 인간들은 더디 자란다는데. 내가 해마다 좋은 신발 만들어 줄게.”

‘개천이 아닌데…. 여울인데.’

이름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졌으나 여울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름을 말하면 정말 그의 각시가 될 것 같았다.

주막을 하고 있으니 굶지는 않을 것이고, 이렇게 잘생기고 자상한 신랑이라면 인간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고….

‘시집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속절없는 한숨만 나온다.

‘아니야. 요괴들에게서 날 구해 주고 지옥 같은 개천에서 꺼내 준 것도 사부님인데, 이렇게 흔들리면 안 돼!’

그리 멀지도 않은 길, 방문 앞에 다다르니 호영이 그녀를 내려 주곤 살며시 손을 잡았다.

“나한테 시집오면 정말정말 예뻐할 거야. 매일매일 품에 안고 놓지 않을 거야. 우리는 인간들하고 달라서 다른 암컷에게 눈 돌리거나 하지 않아.”

정말 백두 살이 맞는 건가? 주름 하나 없이 고운 얼굴.

“들어가. 닭 삶아서 가져다 놨어. 개천이 하나 도선님 하나.”

남녀의 정은 모르나 모름지기 먹을 것에서 정분이 난다는 사람들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흉포하기 그지없는 애꾸눈 개수조차도 좋은 것은 처 풍년의 앞에 밀어 주었으니 말이다. 풍년은 술 취한 개수에게 그리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그럼, 호영아 하고 불러 봐.”

“아…. 호영 님.”

“풋! 귀여워.”

삼켜 버릴 것처럼 쳐다보던 호영이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꾹 눌렀다.

“내일은 닭 말고 노루 고기 구워 줄까?”

“닭도 괜찮은데.”

“노루가 더 맛있어. 한번 먹고 나면 닭은 쳐다도 안 볼걸?”

원래가 남의 살은 다 맛난 것 아니었나?

여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호영이 더욱 환하게 웃었다.

“오늘 밤은 엄청 바쁘겠는걸! 노루도 잡아야 하고 신발도 만들어야 하고.”

아쉬운 듯 한참이나 여울을 바라보던 호영은 휙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던 여울이 방문을 열자 닭이 놓인 상 앞에 앉아 있던 천명이 고개를 들었다.

“치마를 입었구나.”

“예.”

“닭 한 마리 달라 했는데, 두 마리를 가져다주었구나.”

“예.”

천명은 얼이 빠져 돌아온 여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계산 빠른 여우들이 닭을 두 마리나 보낸 것도 그러하고 계산에 없는 비싼 옷을 입혀 보낸 것도 그러하고 여우들의 행태에 천명은 웃음만 나왔다.

“아까와는 달리 식욕이 없어 보인다.”

“예.”

월광석을 주었다고는 하나 욕심 많은 여우에게는 닭 한 마리와 하룻밤 방값으로 끝났을 터, 그렇다면?

“여우에게 이름을 알려 준 게로구나.”

“예…. 힉! 아닙니다! 아니 가르쳐 주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여울이 아닌 개천으로 알고 있으니 이름을 말해 준 것은 분명 아닌데….

“사부님, 혹 가짜 이름을 말한다면 어찌 됩니까.”

“이름이 초대라 한다면 그 부름에 응답을 하는 것은 문을 열어 주는 것과 같다. 하니,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큰 문제없다.”

“대답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조용히 여울을 응시하던 천명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말하지 않았더냐. 말이라는 것은 언령이라. 뱉어 내는 순간 족쇄와도 같은 약속이 되는 것이다.”

“하오면.”

“네 입에서 나간 것이라면, 설령 가짜라 하여도 부름에 답하는 순간 진짜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하아…. 개천이 될 수도 있단 말이구나.’

어쩔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오니 기운이 쪽 빠져 어깨가 축 처진다.

대답이야 아니 하면 그만이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어서 먹어라. 이제 영산에 들면 내 그늘 아래 살게 될 것이니 살생으로 인한 육식은 금해야 한다. 이 닭이 마지막이니 실컷 먹어 두어라.”

“원래가 고기 구경 못 하고 살았습니다.”

여울은 시큰둥하게 닭 다리 하나를 잡아 입에 넣었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생에 처음 겪어 보았던 짧은 설렘은 닭 다리 하나에 멀리 사라져 버렸다.

“엄청나게 맛이 좋습니다.”

닭고기가 입 안에서 녹아 버리자 여울은 헐레벌떡 씹지도 않고 삼키기 시작했다. 닭 한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우는 동안 천명의 앞에 놓인 것은 손 하나 닿지 않은 채 얌전하게 놓여 있다.

“사부님은 아니 드십니까?”

“나는 고기를 취하지 않는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에도 여울은 냉큼 달라 소리 못 하고 그의 눈치를 본다.

천명이 슬그머니 닭을 밀어 주니 여울은 거절 않고 덥석 다리를 잡았다.

닭 두 마리를 삼키고 상을 문밖에 내어 놓은 여울은 숨쉬기조차 버겁다. 트림을 하면 닭이 쏟아져 나올까 꾹꾹 참으며 천명이 이부자리 펴는 것을 도왔다.

목욕도 했겠다. 배도 부르겠다. 새 옷까지 입고 포근한 이부자리에 누우니 살살 눈이 감긴다. 그렇게 여울은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뜬금없는 고양이 소리에 여울은 눈을 떴다.

“야옹, 야아아옹. 야옹, 야옹.”

“망할 괭이 새끼!”

이불을 박차며 몸을 일으키자 천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기 전에 먼저 생각하는 것이 순서다.”

“예?”

“상위 포식자인 여우의 집에 고양이라….”

돌아눕는 천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울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럼 저 고양이는?

야아옹, 야옹. 야오으, 으애. 으앵, 으애앵.

고양이 소리에서 어린아이 우는 소리로 또다시 새소리로 바뀌어 계속 들려왔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이상한 소음들이 들려와 여울은 당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천아….”

끊임없이 들리던 소리가 잠시 끊어졌나 싶더니 이내 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천아….”

벌떡 일어난 여울이 문가를 쳐다봤다.

뭐야. 노루 사냥 간다더니 벌써 노루를 잡아 온 건가?

뾰족한 귀를 치켜세운 여우의 그림자가 보인다.

“사, 사부님!”

아무리 불러도 사부님은 기척도 없고.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문을 열어 봐야 할까?’

여울은 고민에 휩싸였다.

“네 입에서 나간 것이라면, 설령 가짜라 하여도 부름에 답하는 순간 진짜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끄으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던 여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개천아, 나 왔어. 호영이. 나와 봐, 응?”

나지막한 목소리는 점점 애틋해졌다.

신경을 바짝 세우고 웅크려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명치끝이 아프다. 욕심 부려 삼킨 닭이 얹혔나 보다.

“개천아, 잠시만 나와 봐. 네게 줄 것이 있어.”

끙끙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쓴 여울은 잠 한숨 못 자고 버텼다.

호영은 밤새도록 문밖에서 개천을 마르고 닳도록 불러 댔다.

‘우라질! 개천이란 소리는 왜 해 가지고!’

욕을 해 가며 끙끙거리는 사이 두 눈은 천 근 무게로 내려앉았다. 여울은 엎드린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문밖에선 여전히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제발, 그만 좀 해….

“여울아…. 여울아.”

“왜! 왜! 왜!”

이불을 휙 들추며 일어선 여울은 성을 이기지 못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에에에에에! 그만 좀 처부르라고!”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고 나니 꿈에서 깨어난 듯 방 안은 환해져 있었다.

아, 아침이구나.

“닭 두 마리에 목청이 좋아졌는데, 어찌 얼굴은 너구리 상이 되었을꼬.”

잠을 못 잔 탓에 충혈된 여울의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가 정말 너구리 같다.

“사부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아.”

“껄껄껄껄, 오냐. 이제 슬슬 떠나야지?”

귀에 쇠말뚝을 박은 것인지.

단잠을 이룬 듯 천명의 얼굴이 더없이 밝아 보이니 여울은 괜스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삿갓을 집어 든 천명이 먼저 방문을 열고 나섰다. 뒤따라 나온 여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그녀를 부르던 호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우에게 무슨 약조를 한 것이냐.”

신발을 신던 천명이 발밑에 놓인 비단 신발을 가리켰다. 여울은 이곳까지 맨발로 걸어왔고 어제만 해도 분명 없던 것이었다.

‘아! 이것을 주려 그리도 불러 댔구나.’

흙바닥으로 뛰어내린 여울이 신발을 집어 들었다. 하룻밤 사이 어쩜 이리도 고운 신발을 만들었을까.

“여우들은 혼인을 청할 때 자신의 꼬리털을 엮어 만든 신발을 상대에게 보내지. 평생 짝을 이루어 함께 걷겠노라 약조하는 것이다.”

조용한 천명의 목소리에 여울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다. 후회가 되었다. 어째서 쓸데없는 소릴 지껄였던 걸까.

“어찌하겠느냐.”

“예?”

“나는 길을 보여 줄 뿐, 그 길을 갈 것인지는 너의 선택이니. 이곳에 머물고자 하여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

무어라 대꾸를 할 사이도 없이 천명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신발을 품에 안은 여울이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사부님! 같이 가요!”

분명 숲길이었는데, 해가 뜨고 보니 자그마한 정원 끝으로 멀지 않은 곳에 대문이 보였다. 대문 옆에는 고운 쪽빛 옷을 입은 댕기 머리 호영이 서 있다.

“잘 쉬었다 가이.”

“안녕히 가십시오. 도선 어르신.”

호영이 허리를 숙이니 천명이 삿갓을 잠시 잡아 내리며 대문을 빠져나갔다.

천명처럼 가벼이 스쳐 갈 수 없었던 여울은 호영의 앞에 멈춰 섰다.

“저….”

“가려는 거야?”

“응.”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담갈색 눈동자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여울은 품에 안고 있던 신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혼인을 청할 때 쓰는 귀한 것이라 들었어. 돌려줄게.”

“내게는 이제 소용없는 물건인걸.”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춘 호영이 여울의 발에 신발을 끼워 주었다. 부드럽게 발이 들어찬 신발은 여울에게 꼭 맞아떨어진다. 여울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널 위해 만든 것이니 그 누구에게도 맞지 않아.”

“하지만.”

“신발의 주인은 너인걸. 버려지면 너무 가엽잖아.”

천명은 작별의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 듯 멀어져 가고, 여울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쓰다듬는 호영의 손길은 애틋하기만 하다. 겨우 하룻밤 정인 것을….

“붙잡고 싶지만…. 안 되겠지?”

여울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맑은 개울처럼 흔들렸다. 애써 웃는 호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자 여울의 가슴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잘 가, 개천아.”

참으로 아름다운 사내, 하지만 여울은 그의 품에 머물 수 없었다.

대문을 넘어선 여울은 호영에게 돌아섰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은…. 개천이 아니야.”

진짜 이름조차 알려 줄 수 없었지만, 차마 이대로는 떠날 수 없었다.

신발을 벗어 든 여울이 호영을 향해 가지런히 내려놓곤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댔다. 처음으로 받아 본 관심과 사랑을 외면해야 하는 마음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다.

“여우 도령 마음 밟으며 갈 수 없어 귀한 선물 놓고 가. 하지만 베풀어 준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미안해.”

자리에서 일어선 여울은 그대로 돌아 천명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개천아! 언제든지 돌아와도 돼! 기다릴게! 개천아!”

호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여울은 돌아보지 않았다.

다정했던 여우 모자에게 상처를 주어 버린 스스로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가벼이 입 놀리지 않으리라.’

말 한마디로 이어진 짧은 인연이 이다지도 가슴 아픈 눈물이 될 줄이야.

여울은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주먹으로 훔치며 내달렸다. 멀리 천명의 모습이 보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개수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아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녀가 두 눈을 벅벅 문질렀다.

“어흑, 흑흑.”

묵묵히 앞을 향해 걷는 천명은 아무런 말이 없다.

화가 나신 걸까?

쏟아지는 눈물을 삼켜 가며 그를 따라 걸었다.

“다음에는 눈물도 두고 오너라.”

“다음은. 흑흑흑, 다음은 없습니다. 흑.”

개천 아이들로 근심이 깊어 환까지 불러들였던 여울.

“입이 가벼우면 널리 풍파가 따르고, 정이 가벼우면 슬픔이 깊다.”

“입도. 마음도 단단히 부여잡을 것입니다. 훌쩍.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은…. 훌쩍, 하지 않습니다.”

비참한 거지 생활을 하면서도 햇살같이 반짝이던 아이. 천대받던 이 아이가 처음 받아 본 관심과 사랑은 그 대상이 요괴라고는 하나 버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가야 할 길은 모든 것을 버려야만 걸을 수 있는 외로운 길이니 어찌하겠느냐.’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여울은 민첩하고 영리했으며, 강인하고 담대했다.

단 하나, 아이의 가장 큰 장점이 최악의 약점이 되리란 사실은 천명을 당혹스럽게 했다.

‘지나치게 순수하고 착한 심성은 거짓이 없다.’

약삭빠른 머리로도 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결국에 모든 감정이 표정과 말로 드러났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요괴들을 상대해야 할 그녀에게는 최대의 약점.

‘그 심성은 결국 너를 옭아매어 덫에 빠지게 할지니.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다스려야 한다.’

일부러 여우 도령이 있는 주막을 골라 하루 반나절을 꼬박 걸었다. 모든 상황을 간파하고 있던 천명은 그녀가 가명을 내어 준 것이 영특하다 생각하였으나, 착오였다. 여우 모자가 베풀었던 선행에 여린 마음은 결국에 청혼의 신발까지 받아들였으니.

배움의 첫걸음에서부터 착한 심성은 여울의 발목을 잡는다.

‘마음 주는 모든 것이 너의 족쇄가 되리라.’

홀로 걷는 천명은 여울의 선택을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깨끗하게 마음을 잘라 내고 그를 쫓아왔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참으로 오랜만에 천명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어느새 이 아이에게 물들어 가는 것인가.

“선택에 아픔은 있어도 후회는 없어야 한다.”

“예, 사부님.”

여울의 나이 이제 여덟 살, 광목국의 수도 영주를 누비고 다니며 척박한 삶 속에 세상을 안다 자부하였다. 영주에서 벗어난 지 겨우 나흘. 여울은 그녀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깨달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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