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01. 서문 (1/34)

기담 여울랑 1권

01. 서문

궁핍한 아비는 어린 자식을 팔아 인(仁)을 버리고,

자식은 늙은 노모를 버려 효(孝)가 자취를 감춘다.

친우의 끝도 없는 시기와 다툼은 신(信)을 죽이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핍박함에 의(義)가 떠나간다.

신하가 주군의 가슴에 칼을 꽂아 충(忠)이 꺾이니,

사랑 없는 정염이 원통하여 애(愛)가 서글피 운다.

도를 잃은 인계에 재(災)와 화(禍)만이 가득하구나.

<천선 낭랑의 노래>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극에 달하니 선악의 구분이 사라졌다. 서로가 서로를 죽임에 주저함이 없어, 처참한 동족 살육은 빈번하게 자행되었다.

원한은 태산처럼 쌓이고 복수는 염원이 되어 인계와 마계의 경계에 균열이 생겨났으니…. 백 년 전쟁 인요대전의 시작이었다.

마계의 태무신 야차는 요괴와 악귀들을 이끌고 폭풍처럼 인계를 휩쓸어 버렸다. 불과 삼십여 일 만에 대륙의 반이 태무신의 깃발 아래 마군에게 점령되었다.

요괴에게 먹힌 인간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요. 악귀가 씐 이 또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니. 이제 인계는 사망의 그늘에 갇혀 염라대왕의 치세에 들어갈 판이었다.

그러나 마계의 확장을 극렬하게 경계하던 이들이 있었으니, 반선이라 부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나 신선이 된 도사들과 신선의 반열에 오른 요괴들이었다.

이들의 개입으로 전쟁의 판세는 뒤틀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마군에 맞서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계의 시간으로 사십구 일 되는 날.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인간의 수는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야차에게 죽임을 당한 반선들은 육신을 잃고 삼계로 승천하였다.

멸망을 앞둔 인간들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으며, 그들의 피와 눈물이 신녀들의 기도가 되어 천계로 태워졌다.

천계에 든 반선들의 상고는 삼계를 흔들어 상사천을 넘고, 천신들이 머무는 삼청까지 다다랐다. 고심하던 천신들이 천존의 궁, 옥경에 모여들었다.

이에 천계의 주인, 대라천의 천존이 진노하였다.

“두 종족의 결계는 인간들 스스로 허문 것이니 결과의 책임은 오로지 그들만의 몫이다.”

천계의 율법에 천신들은 일족인 염라대왕과 대적할 수 없으니 인간들의 멸망은 예고된 재앙이었다.

땅은 피를 머금지 못하여 강을 만들고, 뼈는 산을 만들어 공허한 귀곡성만이 음울하게 전장을 맴돈다.

동식물이 자취를 감춘 인계는 빠른 속도로 황폐화되었다. 땅이 흙을 잡아 두지 못하여 바람을 따라 대지의 형태가 바뀌었다. 인계는 마계의 적토와 같이 유황 내음 가득한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여 천선 낭랑의 슬픔은 하늘같이 높고, 그녀의 비탄함은 바다와 같이 깊어졌다. 인간의 출산과 혼인을 관할하던 여신의 노래는 너무나 애통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팠다.

“천계의 주인이시여. 대라천의 천존이시여. 어찌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 하십니까.”

“천선은 낭랑들의 본이 되어야 할진대, 어찌하여 나의 명을 거역하려 하는가! 분명 관여치 말라 하였다.”

서릿발처럼 매섭고 천산처럼 무거운 천언에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으나 긴 머리 풀어 헤쳐 읍소하는 천선은 물러섬이 없다.

“천존이시여. 가장 고귀하고 존엄하신 대라천이여. 그들을 버리지 마소서. 그들을 가여이 여겨 주시옵소서.”

“침묵하라!”

“짧은 삶, 윤회를 거듭하여 하늘을 섬기고 업보를 지우고 쌓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옥경은 천선의 눈물을 밟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천존이시여! 그들을 살피어 주소서!”

“관여치 말라 일렀거늘! 천선 낭랑은 북대전 냉궁에서 근신하라!”

천선은 냉궁에 유폐되어서도 몸 안의 모든 기운을 태워 가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살갗이 갈라지는 추위에 그녀의 눈물은 구슬이 되어 떨어지고 입김은 눈꽃처럼 내려앉았다.

“자비와 긍휼의 천존이시여, 그들을 돌아보소서. 천계는 서른여섯 층이요. 마계는 열여덟 층인데. 어찌 한 줌 땅이 전부인 이들을 멸하려 하십니까.”

슬픔은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과도 같아서 천계의 모든 이들이 저마다 손을 놓고 탄식했다. 웃음이 사라지고, 금은보화로 반짝이던 천수목들이 빛을 잃으니 짙은 슬픔에 감싸인 천계에 극락조의 지저귐마저 멈춰 버렸다.

생로병사를 알지 못하는 천인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끝끝내 침묵하였던 천존의 한숨이 깊다.

“천선의 눈물이 대라천에 은하수를 만드는구나.”

피골이 상접한 천선의 몸을 감싼 기운은 연홍빛으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런 천선을 바라보던 천존의 시선이 인계로 향했다.

“교만과 탐욕으로 제명도 살지 못하는 것이 인간들이다. 고귀한 천신의 생을 태울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인가?”

“저들의 잘못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옵니다. 하나 풀 한 포기 돌 하나가 모두 천존의 품 안에 있거늘…. 저들 또한 하늘을 섬기는 자들 아니옵니까.”

“천선…. 그대는.”

생을 태워 흘리는 어질고 의로운 눈물이 마침내 천존의 가슴에 스며든다.

“잘못은 벌하시되 내치지 마시옵고 두루 살피어 품어 주소서.”

“잘못은 명명백백하나 멸족은 말아 달라….”

침묵은 길지 않았다. 천존은 전쟁의 끝을 선포했다.

“상제는 천무신을 필두로 천군의 열두 수장 중 여섯을 선별하여 인계로 출병하라! 경계의 균열은 인간의 죄이니 염라대왕을 탓할 수 없다. 하나, 인계에서 벌어진 살육전은 일방적인 도살에 가까운 바, 그 죄를 물어 마군의 수장 태무신을 소멸하라!”

“존명!”

천존의 명을 받은 옥황상제는 바로 천무신 대라선을 소환하였다. 서른 척 신장에 세 개의 머리, 아홉 개의 눈과 여덟 개의 팔을 가진 대라선은 푸른 구름을 토해 내며 여섯 신장들과 함께 천만 천군과 함께 인계로 내려왔다.

***

마군 토벌은 파죽지세로 이어졌고 요괴와 악귀들은 마계로 쫓겨났다. 사방에서 천군의 뿔피리와 승전의 북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흑룡이 새겨진 검은 깃발은 극락조가 새겨진 황금빛 깃발로 교체되고 요괴들의 절규로 천지가 들끓었다.

천무신과 태무신, 대라선과 야차의 격돌은 열흘 낮밤을 쉬지 않았다.

대라선의 천일검과 야차의 설창이 부딪치니 뇌성을 울리며 섬광이 번뜩였다. 대라선의 발아래 지축이 가라앉고 야차의 설창에 대지가 치솟아 대륙의 형태를 바꾸었다.

토벌을 끝낸 여섯 신장이 대라선과 합류하고서야 야차는 제압이 되었다. 아무리 내려쳐도 새살이 돋아나고 피가 솟구쳐도 야차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의 소멸은 불가능했다.

“크흐흐흐, 천일검 따위로 나를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더냐. 크핫핫핫, 하하하.”

“염라대왕께서도 너의 소멸을 허락하였으니 순순히 천존의 명을 받들라.”

“훗! 염라의 허락이라. 그와는 같은 길을 걸었을 뿐! 나 야차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샛노란 홍채를 번뜩이며 발악하는 야차의 몸을 제압하고 있는 여섯 신장의 시선이 대라선에게로 향했다.

“소멸할 수 없다면 봉인을 해야겠지.”

대라선의 손이 야차의 가슴을 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야차의 몸에서 뜯겨져 나온 심장을 내려다보는 대라선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검붉은 심장은 이미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살아 있는 자의 것이 아니다.’

“후후후, 이미 오래전에 죽어 굳어 버린 돌덩이. 버리기도 귀찮았는데. 손수 꺼내어 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어, 어째서….”

“그까짓 심장 개나 줘 버리라지! 하하하핫핫핫!”

동시에 여섯 신장들이 각기 야차의 팔다리를 끊어 내고 머리통을 뽑아 버렸다.

“백 년이 지나고, 천 년이 지나 인간들이 오늘을 잊어버리는 날! 나 야차는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피를 토하는 야차의 머리를 땅속 깊숙이 밀어 넣은 대라선은 그 위로 열다섯 자 바위를 세워 천언령을 새겼다.

재앙을 깨우는 자 억겁의 대가를 치르리라.

사방으로 뿜어 나간 야차의 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제 주인을 지키려는 듯 형태를 갖춘 흑룡은 가시처럼 비늘을 세우며 무덤을 칭칭 감으니 그 길이가 무려 백 리에 달했다.

또한 심장이 도려지고 사지가 잘려 나간 야차의 몸은 여섯 신장들에 의해 각각 오만 리 대륙 끝으로 흩어져 천언령으로 봉인되었다.

천계의 백 일, 인계의 시간으로 꼭 백 년 만에 인요대전은 막을 내렸다.

“근본을 버리지 못한 반선들은 중용의 도를 깨고 인계와 마계의 전쟁에 개입하여 두 세계는 물론 천족 간의 불화를 유발하였다. 천계의 규율을 어지럽힌 죄, 억겁의 염화 지옥에 빠져 마땅하나, 약한 이들을 긍휼히 여긴 그 마음이 가상하여 천계의 출입을 금하는 것으로 죗값을 대신한다. 반선들은 죽어서도 천계에 오르지 못하니 사후, 귀허에 있는 오신산에 머물도록 하라.”

또한 천존은 하늘과 땅과 물을 관장하는 삼관대제에게 인계의 복구를 명하니, 이에 여신들은 기뻐하며 저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왕모는 구천현녀에게 도화령과 다른 식령들을 주어 함께 보내고 천후마조 또한 그녀가 아끼는 관음과 그 제자들을 지상으로 내려보냈다.

지상에 내려간 삼관대제 중 천관은 하늘을 열어 해와 달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였다. 지관은 뒤틀린 대지를 복구하였다.

구천현녀가 도화령을 풀어 잔재하던 요기를 흡수토록 하니 사방으로 흩어진 식령들이 초목을 일으켰다.

관음이 역병들을 수습하는 사이 그 제자들은 살아남은 동물들을 모아 짝을 채웠다. 이어 수관에게서 바다의 정화가 끝났다는 소식과 함께 비가 내렸다.

사흘 낮밤을 쉼 없이 내린 비가 그치자 비로소 인계는 전쟁 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선 낭랑은 눈물로 비어 버린 가슴이 벅차올라 천존 앞에 엎드려 감읍한다.

“천존의 높고 넓은 은혜를 이 천녀가 어찌 갚아야 하오리까.”

“백 일 동안 너의 생을 태워 흘린 눈물이 전쟁을 끝냈으니 그 복도 그 화도 네가 받아야 할 것이다.”

천존은 천선 낭랑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나비처럼 엎드려 있던 그녀가 두루마리를 받아 펼쳤다.

하나. 부모에게 불효하지 말 것.

둘. 생명을 다치게 하지 말 것.

셋. 반역하거나 배신하지 말 것.

넷. 간음하지 말 것.

다섯. 험담하거나 속이지 말 것.

여섯. 남의 것을 빼앗지 말 것.

일곱. 해와 달 아래서 벗지 말 것.

여덟. 거만하게 굴거나 악하게 굴지 말 것.

아홉. 아이나 노인, 환자를 버리지 말 것.

열. 큰 이익을 자랑하지 말 것.

두루마리에 적힌 것은 태초에 천존이 인간에게 주었던, 그들에게 잊혀져 버린 열 가지 계율이었다.

“또다시 오늘과 같은 날이 도래한다면, 그때에는 너의 생으로도 그들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너는 인계로 내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널리 가르치고 경계토록 하라.”

하얀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댄 천선이 양손으로 두루마리를 높이 올려 천존을 향해 절하였다.

인요대전이 끝나고 일곱째 되던 날.

하늘에서 밝은 빛과 함께 두루마리를 품에 안은 천녀가 오색구름 사이로 황하 땅 천공산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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