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셋. 바둑시합, 그 열네 번째
때는 복사꽃이며 배꽃이 앞다투어 만개하는 어느 봄날.
화산(華山)의 무수히 많은 봉우리 중 하나를 골라 터를 잡고 있는 화산 노파의 거처에 불쑥 머리는 둘, 눈은 여섯 달린 검은 고양이가 나타나 주인을 불러오라고 말을 해 어린 시녀 아이를 기절시켰다.
화산 노파가 이야기를 듣고 뜰에 나와 그 흉물을 쳐다보았더니 다시없이 괴상하게 생긴 두 입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아들 이름값을 치러줄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다. 바둑시합을 하기로 하였다. 이번엔 대원산에서 준비를 한다 했으니 구경 오너라. 시작은 보름날이다.”
그리 간단한 말 몇 마디 남기고 고양이는 펑, 하고 연기와 함께 나뭇조각으로 돌아갔다.
“대원산…….”
떠오르는 곳은 위후의 저택이다. 아직 기억력이 가물가물할 지경은 아니나 화산 노파는 이 뜬금없는 초대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필 괴이하게 생긴 고양이 모형을 빌어 말을 전한 그자, 누구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아신. 그자를 본 지도 대략 사십 년이 다 되어 가나?
그렇다 해도 이름값을 치러준다니 괘씸한 소리다. 제가 언제부터 아비 노릇을 했다고 저리 기세가 등등한가? 료가 죽을 뻔한 걸 살려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나 역시 지독히 뻔뻔한 자다 싶었다. 화산 노파는 미간을 찡그리고 혀를 찼으나 곧 뒤를 돌아보며 시종에게 지시했다.
“반도에 가야겠다. 가는 김에 유를 보고 와야겠으니 그 아이 주려고 모아둔 선물들을 다 챙겨 놓아라.”
이제 봄이 왔다고 춘정이 일어나는 젊음은 아니지만, 이 색다른 일 앞에서 화산 노파의 마음은 자못 널을 뛰었다. 더불어 그 핑계로 료의 저택에 가서 며칠 놀고 올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가장 좋은 것은 ‘유’를 보는 일이다. 이십 년 전 료와 침아 사이에 태어난 첫아들의 이름이 유라 한다. 두 아이가 부탁해 화산 노파는 고심 끝에 유라는 이름을 골랐고 그들은 기쁘게 아이에게 그 이름을 붙여 주었다. 맑고 깊다는 이름의 뜻대로 태어난 아이는 새까만 비늘에 붉은 눈이 다시없이 예뻐 이제 화산 노파는 뱀이라면 설사 살무사라 해도 먹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어졌다.
그 순하던 아이가 열다섯을 넘기면서부터는 곧잘 둔갑술을 익힌다 하더니 지금은 개구쟁이 소년이 따로 없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료의 아비 아신이 불쑥 찾아와 애를 보고 가는 모양이었다. 손자가 잘 크고 있다면서 흡족해한단다. 또 올 때마다 유며 료, 침아에게 생각지 못한 큰 선물을 주고 간다는데 침아는 그걸 마뜩하게 여기지 않는다. 저러다 어느 날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할까 봐 겁이 난다고 언젠가 화산 노파에게만 고백한 적도 있다. 그때 화산 노파는 그자는 애들은 귀찮아한다고 안심시켜 주었지만 아주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하여간 안 그래도 이제나 보러 갈까, 저제나 보러 갈까 했다. 지난해 여름에 보러 갔다가 그들의 여름 별장에도 따라가고 가을까지 머물다 왔으니 그만하면 못 본 지 오래되지도 않아 다시 찾아가도 폐가 아닐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반도에 가신다지요?”
날이 저물고 얼마 되지 않아 사랑채에 머물던 휘가 찾아왔다.
“그래, 이 늙은이도 불러주는 이가 있구나.”
단출하게 입은 모습도 화사하기만 한 휘는 여전히 혼자다.
사십 년 전 침아와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후 몇 년이 흘러 보게 된 휘는 사뭇 어른스러워져 화산 노파는 마치 다른 자를 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북쪽 후원을 채우고 있던 여자들도 모두 떠나보내고 진짜 화초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다시피 하여 운몽산 저택은 물론 이제는 그 산 일대가 사시사철 꽃으로 그득하여 작은 화산(華山)이 따로 없을 정도이다.
다만 가끔 저택을 청작에게 맡기고 사나흘 정도 바람을 쐬고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일탈이다.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휘가 이틀 전에 화산 노파의 저택 문을 두드렸다. 종자도 없이, 밥이나 얻어먹으러 왔다고 해맑게 웃는 휘를 화산 노파가 반겨 맞이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혹시 어느 멋진 분을 제가 할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요?”
“녀석, 어른을 놀리긴.”
농을 하는 모습도 예전과 달리 담백하기 짝이 없다. 한결 그 영기가 맑아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어차피 너도 돌아갈 터인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 잠깐 누굴 만난 다음에 료를 보러 갈 참이다.”
“저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가겠습니다.”
산뜻한 대답에 화산 노파는 손톱집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휘와 료는 지난 사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교류가 전혀 없었다. 료는 굳이 청하지 않고, 휘는 굳이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산 노파가 중간에서 물꼬를 트기엔 걸리는 점이 많다. 그래도 저번에 료가 아들을 얻었을 때 휘는 청작을 대신 보내어 축하의 인사와 함께 훌륭한 선물을 보내준 적은 있다. 료도 감사히 받고 감사예물을 보냈다. 그나마 아주 끈을 놓은 것은 아니라고 여겨 화산 노파는 위안하고 있다.
“그래. 나중에 기회가 오면 가보렴.”
앞으로 사십 년 후에도 이런 식으로 보고 살지 않으면 모종의 계책을 써서라도 만날 자리를 주선해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하며 화산 노파는 말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려는 화산 노파에게 사랑채의 휘 공자님이 보냈다면서 시녀가 그림 한 점을 만 두루마리를 가져왔다. 화산의 풍경을 그린 썩 빼어난 채색화를 흘끗 보고 도로 말려던 화산 노파의 눈에 그림 왼쪽 아래에 낙관처럼 적힌 두 글자가 들어왔다.
“사완(思婉)? 어여쁨을 생각한다?”
얼핏 생각해선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화산 노파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린 오른쪽 아래에는 풀숲에서 쉬고 있는 작은 새가 노란 꽃을 보고 있었다. 눈썹을 슥 추켜세우고 도로 그림을 말면서 물었다.
“이걸 가져가라 하시던?”
“료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 부탁드린다면서요.”
“이리 그림을 그릴 바엔 서찰 몇 줄이라도 적어 줄 것이지. 가서 불러오겠느냐?”
“막 주무시려고 자리에 드시는 걸 보고 왔는데요.”
“음. 별수 없군. 알겠다. 깨어나면 내 잘 전해 주겠다 약조하더라고 알려라.”
아쉽게 사랑채 쪽을 돌아보고서 화산 노파는 저택을 나섰다.
사뭇 먼 길이라, 길을 재촉하였지만 반도의 북쪽에 있는 대원산에 이르렀을 때엔 이미 보름달이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다행인 것은 아신과 위후의 바둑은 이제 막 시작 단계였다는 것이다.
백 년에 한 번씩 두는 바둑은 한 번 시작이면 사나흘은 기본이요, 때론 열흘도 우습게 간다는 것을 화산 노파가 어찌 알았겠는가. 둘 다 지나치게 먼 수까지 내다보는 고수들이라 한 점, 한 점을 놓는 것을 기다리다 보면 곁에서 보는 자들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바둑을 두고 있는 둘 옆에서는 주연의 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화산 노파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료, 침아야, 그리고 우리 유. 잘 지냈느냐?”
깍듯하게 절을 하고 다가오는 부부와 달리 어린아이는 좋아라 달려와 화산 노파의 다리에 매달렸다.
“왕할머니, 왕할머니, 저 보고 싶었지요? 제가 저번에 보내드린 편지 보셨지요? 거기 그린 그림이 뭐라고 생각하셨어요? 어머니는 그게 아직도 벼룩을 그린 것인 줄로만 알고 계세요.”
“글쎄, 왕할머니는 말이다, 늙어서 깜박깜박한단다. 그게 뭐였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아요. 여기서 다시 한 번 그려서 보여주지 않겠느냐?”
“얼마든지요!”
그러면서 지필묵을 찾는 귀여운 소년의 부탁에 시종들이 웃으며 재빨리 필요한 걸 가져다주었다. 유가 무엇을 그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아주 공을 들여 작업에 매진하는 동안 화산 노파는 료 부부와 그간의 이야기를 얼마쯤 나누었다.
이젠 둘 다 백 살을 넘겼으니 조금은 원숙해졌나 싶다가도 서로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풋풋한 어린것들 같았다. 고획조의 노쇠가 느리단 것은 화산 노파도 대충 알고 있었으나 아직도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침아의 외모는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래서 저는 남쪽 섬 중에 무인도를 골라서 겨울 별장을 지었으면 싶어요. 따뜻한 곳에서라면 유가 동면을 하는 시일도 줄어들 것 같고 해서. 해가 갈수록 저 아이가 잠만 자는 겨울이 싫어지는 거 있죠.”
침아가 유를 쳐다보며 큰 눈을 말똥말똥거리자 어떻게 알았는지 그림 그리는데 온 신경이 쏠려 있던 유가 고개를 들어 제 어미를 보았다. 붓도 내팽개치고 달려와 침아의 무릎에 팔을 올리며 묻는다.
“어머니, 우셔요?”
침아의 눈이 말갛게 일렁거리는 것을 보고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아들의 얼굴을 감싸며 침아가 고개를 저었다.
“울긴. 어미가 슬퍼 보이니?”
“음. 아니요. 그치만 어머닌 안 슬플 때도 우시잖아요.”
그러면서 유가 힐끗 료를 쏘아보는 모습에 화산 노파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아들이 어미를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유는 그 정도가 유별나다. 단적인 예로 유는 어미와 떨어지는 것이 싫어서 아직도 제 방을 내버려두고 부모 방에서 잔다. 침아는 “아들, 우리 예쁜 아들”하고 그저 품 안을 떠나지 않으려는 자식이 좋아서 행복해하지만, 그 상황을 료가 심히 못마땅하게 여김은 명약관화했다.
어여쁜 것은 부모를 닮아 당연하고, 노래도 잘해, 춤도 잘 춰, 하물며 비파에 피리조차 잘 다루는 이 아들의 존재가 나날이 료의 투기심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침아는 어린아이라면, 껌뻑 죽는다. 아들과 아비가 대립하는 상황이 오면 열에 아홉은 아들 편을 드는 건 그렇다 쳐도 시도 때도 없이 어미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관심을 받으려 기를 쓰는 아들 때문에, 하물며 부모방에 들어와 버젓이 가운데서 자는 아들 때문에 료가 완전히 본의 아니게 금욕생활을 한 지도 어언 몇 년인지 모른다.
어쩌다 한 번씩 아이의 눈을 피해 도둑질이라도 하듯이 허겁지겁 정을 나누는 일도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료의 한계다. 사방에 춘색 가득한 이 봄에 침아와 딱 두 번 잠자리를 했다. 우송이 저자에 나가려 하는데 도련님은 같이 가시지 않겠느냐며 유를 꾀어냈던 덕분이다. 겨울? 그나마 사계절 중에 겨울이 있어서 숨 쉬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침아는 이제 아이가 동면을 하는 기간을 좀 줄여보겠다고 겨울 별장을 짓자 야단이다. 료의 의젓함은 속을 몰라주는 부인 앞에서 바닥이 나고 있다.
며칠 전에 료는 침아에게 선언을 했다. 아이를 이제 제 방에서 자도록 다스리지 않는다면 겨울 별장이고 뭐고 꿈도 꾸지 말라고. 거기다 그 아이 방이란 것도 원래의 방이 아니라 뚝 떨어진 사랑채로 옮겨 버렸다. 거기서 더 나아가 계속 이리 아이를 감싸고돌면 할아버지에게 보내버리겠다는 소리까지 했다.
침아가 발끈하여 어찌 그러느냐며 따지고 들었고, 둘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여태 휘어 잡혀 사는 척 해주던 료가 무섭게 정색을 하고 애 교육을 잘못하고 있다면서 침아를 다그치는 서슬이 자못 날카로워서 종국엔 침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을 유가 보았다.
비록 침아가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아비를 보는 유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했다. 지금처럼.
“왕할머니랑 즐거운 이야기를 했거든. 웃다가도 눈물 나는 거, 우리 아들 알지? 하품을 하다가도 자칫하면 눈물이 나잖아.”
“졸리셔요, 어머니? 그럼 자러 가요.”
엉뚱하게도 저 좋을 대로 듣는 버릇은 아비와 판박이다. 침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왕할머니께 그림 보여주는 건 어쩌고?”
“그래. 그림을 꼭 보고 싶구나, 유야. 그리고 오늘 밤엔 할미랑 자지 않을 테냐? 할미가 유 주려고 이것저것 선물을 가져왔는데 구경도 할 겸.”
“음. 하지만…….”
침아와 화산 노파를 번갈아 보며 갈등하는 소년에게 침아가 톡톡 머리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왕할머니, 같이 잘게요 해야지. 왕할머니가 서운해 하시면 이 어미가 울고 싶어질 텐데.”
“왕할머니, 같이 잘게요.”
대뜸 그렇게 말하더니 화산 노파의 귀에 대고 유가 속삭였다. ‘실은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서운해 하실 것 같아서요’란다. 나름 영악하다. 이런 면은 어미를 쏙 뺐다.
그렇지만 그 귓속말 부모도 다 들을 수 있었다는 걸 모르니 아직 어리다. 그 점이 귀여워 침아도 웃고 료도 웃었다. 화산 노파는 유를 안아 그 뺨에 듬뿍 입맞춤을 해주었다. 유가 그 배는 화산 노파에게 돌려주니 상냥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다.
한편에서 그러건 말건 위후와 아신의 바둑은 느리고도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보는 이들은 저자들이 눈을 뜨고 자나 의심할 지경으로 바둑판만 쳐다보면서.
달이 아예 하늘에서 사라지고 지평선이 희붐하게 밝기 시작해서 구경꾼들도 주섬주섬 자러 갈 준비를 하였지만 바둑을 두는 둘은 엉덩이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밤새 바둑판 위에 놓인 돌 수는 고작 서른 점이나 될까.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서 저러고 며칠을 있는다는 말이지?”
화산 노파가 혀를 차며 물었더니 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옆에 둔 도끼자루가 썩을 지경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요.”
“알 수가 없구나. 역시 사내들은 기묘한 짓을 해.”
“안 그런 사내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 서방을 쳐다보는 침아의 눈길에 정이 넘실거린다. 료는 툭 그녀의 어깨를 장난스레 치면서 말했다.
“기묘한 짓이라면 부인이 독점하고 있지 않소?”
“어머나, 항상 이렇게 밉살스럽게 구신다니까요.”
“그런 점이 더욱 좋다 할 땐 언제고.”
“언제 또 그런 말을 했나요? 듣는 귀가 한참 이상하셔.”
이쪽에서 어깨로 툭, 저쪽에서 어깨로 툭, 그러면서도 팔짱은 꼭 끼고 걸어가는 그들은 이미 뒤에서 따라오는 화산 노파나 유의 일은 안중에도 없다. 유가 잘 자라는 말도 해주지 않고 멀어져가는 어미를 보며 입술이 한 자쯤 나온 것을 보면서 화산 노파는 토닥토닥 작은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유야, 너도 어서 커서 네 어미처럼 어여쁜 각시를 맞이하려무나. 그러면 둘이서 실컷 즐겁게 놀 수 있다지.”
“어머니처럼 예쁜 각시가 세상에 또 있을 리 없는 걸요.”
아이의 표정이 심각했다. 료의 마음고생도 앞으로 한참은 이어지겠구나 하면서 화산 노파는 빙그레 웃었다.
준비된 방으로 돌아가 화산 노파는 유에게 선물들을 구경시켜주다가 그림 생각이 나서 종자를 시켜 료의 방으로 보내게 했다. 막 소세를 하고 돌아온 침아가 료가 보고 있던 그림을 보고서는 무엇이냐 물었다.
“외숙이 보냈다는군.”
아직 입에 붙지 않은 말이 자못 어색하게 들렸지만 침아는 아무 내색 없이 다가와 그림을 보았다. 솜씨가 빼어나다고 칭찬한 것은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다 아래쪽에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다. 료가 보고 있는 것도 그것이었다.
“제비꽃이야.”
노란 꽃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고, 침아도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사완(思婉). 화산 노파는 이해하지 못한 글귀지만 침아에겐 충분히 전해졌다.
완아를 그리워한다, 나는 완아를 가슴에 품고 있다…….
조용하고도 담백한 휘의 고백이었다.
완아가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리하여 이번 생에선…….
두 눈 가득 그리움을 담아 완이란 글자를 어루만지는 침아를 료가 등 뒤에서 살뜰히 안아주었다. 료의 손을 꼭 잡으며 침아는 착잡한 마음을 잠재웠다. 돌아서서 료에게 안기며 침아가 속삭였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요, 우리는.”
“말하면 입 아픈 소리. 입은 이러라고 있는 거다.”
료가 그녀의 입술을 덮어왔다. 그대로 그녀를 들어 침상으로 데려갔다. 고운 금빛 휘장 사이로 들어간 둘이 금세 새하얀 나신이 되어 서로를 껴안는 것이 어른어른 비쳤다.
“어흑……. 아, 료, 천천히…….”
“아, 미안하다. 아팠느냐?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흣, 후우……. 아아, 좋구나. 침아야, 침아야…….”
사내의 정염이 해일과 같으니 계집은 이내 거기에 휘말려 천지분간을 할 수 없어졌다. 계집의 교성이며 사내의 신음이 날이 훤해지도록 이어지니 좌우의 방들이 비었기 망정이지 손님으로 든 저택에 두고두고 이야깃거리 하나 주고 갈 뻔했다.
화산 노파의 배려는 그 저택에 엿새를 머무는 동안 두 번 더 있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유가 푹 빠져 왕할머니 곁에서 자겠노라 자청해 왔다. 물론 어미에게 몰래 서운해 하지 마시라면서 왕할머니께 받은 엿을 주기는 했다.
그런 아이이니 침아가 함께 자지 못함을 섭섭해 하는 것은 진심이다. 하지만 료에게 혼이 나가도록 질탕히 안기는 것 역시 좋다. 아내와 어미의 역할 사이에서 매번 마음의 추가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내심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엿새 만에 흰 원숭이와 검은 이무기의 바둑 시합은 끝이 났다. 백돌의 승리. 이백 년 동안 졌던 것을 설욕한 흰 원숭이는 무엇을 원하느냐는 아신의 물음에 거들먹거리며 대꾸했다.
“나도 이번 참엔 묵혀두었다 나중에 써먹겠어.”
아신은 싱긋,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가.”
제대로 된 식사를 좀 해야겠다고 말한 아신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위후는 원래 그런 녀석이라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손님 대접이 소홀했다며 그날 밤은 성대한 연회가 펼쳐졌다. 위후가 자랑하는 가기들이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유는 피리를, 위후는 금을 타고, 침아는 춤을 추었다. 료도 한 자리 차지해 비파를 탔는데, 다행스럽게도 실수 한 번 저지르지 않고 그럴싸하게 연주해 화산 노파에게 칭찬을 들었다. 다만 침아와 유는 위후의 금 솜씨만을 거푸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 료의 심사를 거슬렀다.
그렇지만 대신 얻은 것이 있었으니, 유가 위후 님께 금을 배우고 싶다면서 여기 당분간 머무르면 안 되느냐 물어왔다는 점이다.
본디 유는 껄렁하기 짝이 없는 위후를 유난히도 따라서 한 해에 한 번 꼴로 만날 때마다 헤어지는 것을 몹시 서글퍼 했다. 아무래도 이무기들에게만 효과를 보이는 마력 같은 게 위후에게 있는 게 아닐까, 료는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료 생각엔 남겨둬도 좋을 것 같은데 침아는 돌아가서 생각해 보겠다면서 웃는 얼굴로 안 된다는 뜻을 보였다. 그녀 역시 위후를 좋아는 하나, 옆에서 보고 배울 점이 삼 할이라면 배워선 안 되는 것이 칠 할인 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든 와도 좋다. 하지만 한 달 정도 대륙에 장사를 다녀와야 하니 보고 싶어도 참아야겠다.”
“그 장삿길에 절 데려가시면 안 되나요?”
위후가 유를 달래는 소리에 유의 조름은 더 심해졌다.
“안 돼. 아직은 네가 어려서 할 수 있는 일도 없구나. 내 장삿길에 가려면 일꾼 한 명 몫은 해야 한단다. 적어도, 네 아비만큼은 큰 다음에. 알겠지?”
“그러려면 아직 멀었는데…….”
시무룩해진 유가 화산 노파에게 달려가 치맛자락에 매달려 칭얼거리는 동안 침아는 위후와 한켠에서 조용히 말을 주고받았다.
“부탁드린 일에 대해선 믿고 있겠습니다.”
“아무렴, 이 위후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겠다고? 그런데 저번에 들여간 산호 침상은 어찌, 마음에 들더냐?”
“아참, 그걸 잊고 있었군요. 제발 부탁인데요, 저희 순진한 서방님한테 그런 비싸기만 하고 자리만 차지하는 몹쓸 것 좀 그만 파시지요?”
“음.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 걱정 마라. 이번에 네 낭군께서 주문한 진주 의자는 보는 순간 마음에 쏙 들 테니까.”
“……진주, 의자요?”
온화했던 침아의 얼굴 관자놀이에 핏대가 서면서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위후가 한 발짝 물러서며 둘 사이에 방패라도 세우듯이 부채를 폈다.
“내 덤으로 네 서방에게 어울릴 옥대(玉帶)도 두어 개, 아니 네 개쯤 끼워 보내주마.”
“옥대 네 개를 끼워줘도 남는 게 있는 그 진주 의자는 대체 얼마짜리 물건이랍니까? 예? 예?”
“음. 네 머리 수식도 몇 개 보내주랴? 어째 꾸민 게 영…….”
딴청을 피우면서 위후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떨어진 자리에서 모른 체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던 료는 슬그머니 웃음을 삼킨다. 그런데 부탁이란 게 뭘까?
돌아가는 수레 속에서 침아는 료에게 솔선해서 그 일을 언급했다.
“해묵은 일인데, 매듭이 깨끗하게 지어지지 않아서 종종 생각이 났거든요. 그쪽으로 가실 일이 있다기에 어찌 사는지 봐 달라 했지요.”
“그쪽이라면?”
“파현입니다.”
파현이란 소리에 료는 까맣게 잊고 있던 난씨 자매의 일을 떠올렸다. 살짝 그가 미간을 찌푸리자 침아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계집들 간의 일인데, 정히 듣고 싶다면 감추지 않겠어요.”
어쩔까 저울질해 보면서 료는 침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너한테 해로운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느냐?”
“그런 건 없습니다. 전혀요.”
“그럼 됐다. 너만 무탈하면 되지. 아, 그런데 그네들이랑 다시 얽히고 싶지는 않다.”
“염려 마셔요. 교류를 하려는 뜻 같은 건 한 치도 없어요.”
“그럼 정말 됐어. 자, 우리 부인 게 앉지 말고 예 앉지 그러오?”
료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침아에게 두 팔을 내밀자 침아가 일어나 그의 다리 사이에 와서 앉았다. 화산 노파가 유를 데리고 수레를 탄 덕분에 오랜만에 오붓하게 수레 안에서 단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의 목덜미며 귀를 지분거리며 자못 음란한 말을 속삭이는 료 때문에 흐드러지게 웃으면서 침아는 수레의 창을 열고 발을 젖혔다. 낙조가 한창인 하늘에 배꽃인지 복사꽃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모를 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보셔요. 아름답기도 하지요.”
“응.”
힐끗 바깥을 내다본 료도 잠시 꽃에 시선을 주었으나 이내 침아를 쳐다보며 싱글거렸다.
“그래도 내 꽃만 한 것이 없지.”
쪽쪽, 다시 입맞춤해 오는 장난꾸러기를 상대하느라 침아는 가는 길에 진주 의자 이야기를 하기로 한 것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파현의 구릉진 언덕에 있는 난씨의 저택에 승냥이 장사치가 나타난 것은 절기로 곡우(穀雨)인 날이었다.
귀한 골동품을 구하러 다닌다는 승냥이는 장사 대금으로 가져온 사치스럽고 정교하기 짝이 없는 장신구들을 늘어놓아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물론 시종들까지 구름처럼 몰려와 구경에 나섰다. 화사한 걸로는 새 중에 으뜸일 난씨 일족을 모시는 자들이라 꾸미기 좋아하는 것은 다들 거기서 거기, 승냥이가 데려온 종자는 물건을 가져오고 주머니에 금이며 은을 챙겨 넣느라 바빴다.
그러던 중에 남쪽의 뜰로부터 고성이 일어나고 뭔가 부서지기라도 하는 듯한 큰소리가 자꾸 들려오니 승냥이가 놀라서 무슨 일이 있느냐 물었다.
“아, 둘째 아씨가 또 세간을 때려 부수는 모양이시지요.”
시녀는 심상한 일이란 것처럼 거리낌 없이 그렇게 말하며 귀걸이를 대보기 바빴다. 승냥이는 그 말에 별달리 말은 않고 부리는 종자 중 하나에게 눈짓을 하였다. 그 종자가 어딘가로 고갯짓을 하니 지붕에 올라와 있던 고양이 하나가 남쪽 뜰로 달려갔다.
단 하루 만에 볼 것은 다 보고 들을 것도 들었다.
난씨 저택의 첫째 딸은 이미 이십오 년 전에 멀리 서경으로 시집을 갔고, 둘째 딸은 반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크게 아프고 나서 성격이 자못 괴팍해져 걸핏하면 신경질에 세간을 때려 부수고 아랫것들을 못살게 굴어 단단히 미움을 받는 골칫덩이로 전락했다. 부모도 이젠 손을 놓았는데 시종인 정만이 여전히 정성을 다해 모시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라고 다들 혀를 찼다. 하루도 그 몸에 멍 가실 날이 없고, 손톱자국도 걸핏하면 달고 다니는 정을 바보라고 흉보는 자들도 있었다.
그날 밤이 깊었을 때 위후는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나무에 올라 어떤 피리를 불었다. 소리가 나지 않았으나, 그 나지 않는 소리가 필경 누군가에게는 가 닿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어둠 속에서 하늘을 가로질러 붉은 난새가 날아와 그의 앞에서 날개를 쉬었다. 멍한 눈빛은 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위후가 말했다.
“네 개심하여 착하게 살고 있다 하면 묵은 잘못도 씻어주라 하였지만, 이래서야 어찌 상서로운 새라 불릴 자격이 있느냐? 갈 길이 멀다. 어서 네게 마땅한 모습으로 돌아가거라.”
그 말이 떨어지자 천천히 난새의 모습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그 자리에는 한 마리 붉은 소가 버티고 서 있었다. 살집은 투실투실하나 까맣고 맑아야 할 눈은 짓물러 고름 같은 눈곱이 잔뜩 끼어 있다.
“못났다. 못났어. 자, 가자. 어서 가자. 뭘 하누?”
나무에서 뛰어내린 위후가 소의 등에 올라타 채찍으로 때리며 몰고 간다. 뒤늦게 소는 입을 벌려 소리를 쳐보지만 나오는 것은 음매 하는 소의 울음이었다.
“나 참. 내가 하다 하다 소 장사를 다 하게 생겼군. 나는 암만해도 걔한테 너무 무르다니까.”
그런 탄식을 남겨 놓고 위후는 소를 타고 언덕을 떠났다.
다음날, 아씨가 없어진 걸 발견한 파현의 저택에서는 소동이 났다. 누구보다 사색이 되어 찾으러 다닌 것은 정이었다. 며칠을 파현 일대를 뒤졌으나 종적 하나 찾을 수 없어 낙담한 정이 물가에서 쉬고 있을 때 웬 동자 하나가 서찰을 전했다.
“내게?”
동자는 빙긋이 웃고는 돌아서서 걸어가다가 올빼미가 되어 날아올랐다. 정은 서찰을 펴 들었다.
<아직 나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십여 년 전에 인연이 있었던 자인데, 그때 그대와 주고받은 말이 있지요.>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나면서 서찰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 해친 자는 잊어도, 당한 자는 잊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나 나는 굳이 원한이라고까지 여기진 않았기에 어느샌가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내 벗 하나가 그쪽을 지날 일이 있다기에 기억을 했습니다. 그 아씨의 일, 그리고 속에 품은 정 하나로 바보처럼 아씨의 곁을 지키던 그대의 일.
만약 그대가 이 서찰을 읽게 된다 하면, 안타깝게도 그 아씨, 아직도 착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겠지요. 실로 안타깝습니다. 그 아씨가 아니라, 여전히 곁을 지키고 있을 그대의 일이요.
지극한 마음만으로도 돌려놓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한다면, 당신의 아씨, 조금 곤경을 겪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잘 것 없는 몸이긴 하나 몇 가지 배워둔 서투른 술법이 있어 예전에 조금 장난을 쳐두었었지요. 그대가 경계하던 눈빛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리 경계하고도 장난에 걸려들었지만요. 그것이 통했다고 하면 아마 지금쯤 당신의 아씨, 소가 되어 인간에게 팔려나갔을 것입니다.
예, 소입니다. 인간은 소를 농사의 큰 방편으로 삼기 때문에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밥상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 벗이 소를 살 인간에게 얼마간의 암시도 해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일은 실컷 하게 되겠지요.
오십 년쯤 걸릴 것입니다. 그때쯤이면 자연히 주술도 효력을 잃어 다시 난새로 돌아올 것입니다. 난새의 긴 일생에서 한 오십 년 논 갈고 밭 가는 일을 했다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 정도 고생을 하는 것은 오히려 아씨에겐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마음이 아픕니까? 어떻게든 되찾아 보살펴 주고 싶어요?
그럼 찾아보세요. 세상을 떠돌면서 그 아씨가 몸을 감춘 소를 찾아보세요. 너무 막막하여 일어설 힘이 나지 않는다면, 특별히 실마리를 드리겠습니다.
인절미를 가지고 다니세요. 그것을 먹는 소가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기다리든지, 떠나든지, 아니면 찾으러 다니든지 오로지 그대의 몫입니다.
다만 한 가지, 그대의 보답 받지 못하는 연정을 가엾게 여기는 이가 주위에 없는지 돌아보세요. 때로 외사랑에 몸을 던진 이보다, 그런 이를 지켜봐야 하는 이의 마음속에 원망이 크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때로 그 누군가는 괴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대는 보았지요. 나라는 괴물을.
그대는, 혹은 그대 주위의 누군가는 그런 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찰을 접으며 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 다가가 제 얼굴을 비췄다. 아직 가선에게 맞아 생긴 멍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을.
“나는 괴물인가?”
서글픔과 체념에 길들여진 두 눈 아래에서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은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저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무는 해가 그의 뒤를 비쳤다. 날이 바뀌면 인절미를 넣은 짐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나야 할 터였다.
달빛 휘황한 깊은 밤. 유는 화산 노파와 함께 바둑을 두고 우송과 문복이 그 곁에서 바둑 구경을 하는 것을 보고서 료와 침아는 저택 근처의 계곡으로 산보를 나왔다. 한창때가 지난 배꽃이 얼마쯤 나무에 남아 있는 것을 료가 바람으로 흔들어 그들의 머리 위로 꽃비가 내렸다.
아무 말 없이도 즐거워하는 침아를 보는 것으로 료는 흡족했다. 달리다 멈추기도 하고 꽃을 잡으러 날아올랐다가 아무것도 못 잡고 내려와 깔깔거리기도 하고 이내 바닥에 흩어진 꽃잎을 주워 료에게 뿌리기도 하며 침아의 발랄함은 멈출 줄 몰랐다.
문득 계곡 주변을 맴도는 올빼미 하나가 오더니 침아의 머리 위로 툭, 뭔가를 떨어트리고 갔다. 땅에 떨어진 죽간을 들어 밝은 부분을 살피니 두 글자가 적혀 있다. <성사(成事)>. 일이 완료되었다는 위후의 보고였다.
침아는 빙긋이 웃었다가 또 이내 한숨을 쉬었다. 다가와 옆에서 죽간을 본 료가 물었다.
“뭔데 네 표정이 복잡하냐?”
“전에 말씀드렸던 계집들 간의 일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대로 되었다는군요.”
“생각대로 됐으면 잘 된 거 아니냐?”
“그 반대이길 바랐습니다.”
다시 물끄러미 죽간을 내려다보다가 침아는 료에게 팔짱을 껴오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뜬금없는 감사의 말에 료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에게 침아가 상그레 웃자 료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고맙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뭐가 됐든.”
“피, 엉터리야.”
그녀의 핀잔에도 료는 싱글거리기만 했다. 침아는 그에게서 팔을 풀더니 힘차게 달려 나갔다. 줄줄이 늘어선 배나무 사이를 뛰다가 훌쩍 날아오르며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이윽고 료가 겉옷을 벗어던지고 그 뒤를 따르니 그나마 남아 있던 배꽃들이 짐새의 힘찬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에 휩쓸려 다음 해를 기약하며 떠나갔다.
달을 향해 날아가며 꽃 같은 흰 새와 커다란 검은 새는 너울너울 춤을 춘다.
또 한 번의 흔한 봄밤. 하지만 오늘이 가면 다시 오지 않을 그 하루 안에서 그들은 가장 아름답게 노닐고 있었다.
<기담: 야행유녀(夜行遊女), 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