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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 단조의 호수 (32/33)

그 둘. 단조의 호수

다시 찾은 호수는 일찍이 떠오른 만월을 받아 맑게 일렁거리는 가운데 가장자리의 부들 사이로 원추리꽃이 드문드문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귤빛 꽃을 어루만지듯이 날면서 침아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 참, 그 부분!”

침아를 보는 것에 푹 빠져 있던 료는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침아가 치맛자락을 나부끼면서 그에게 단숨에 날아오면서 패옥소리가 잘그랑거렸다. 그의 머리 위에 이르러 눕듯이 날개를 멈춘 침아가 손으로 톡톡 그의 머리를 눌렀다.

“몇 번이나 들려줬는데 왜 번번이 같은 부분을 틀리는 거예요? 하여간, 소질이 없다니까!”

그러면서 침아는 그의 손에서 비파를 앗아갔다. 아, 내가 또 가락을 틀렸나 하며 료는 턱을 긁적거렸다. 침아는 술대 없이 가느다란 손을 움직여 비파의 현을 뜯었다. 딩딩딩 하면서 청아한 음률이 흘렀다. 료는 헤벌린 입에 함빡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런 거였지.”

“아, 그런 거였지라니. 아, 그런 거였지라니. 탈 마음이 없는 게야. 내 아주 좋아하는 곡이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연습 부족이다.”

“연습 부족은 무슨. 백 번도 탔겠다.”

흥, 하고 혀를 내빼물면서 침아가 골을 냈지만 료는 여전히 웃으면서 그녀의 패옥에 달린 술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백 번까지는 아니다. 한 오십 번이나 될까 말까 한데. 허풍쟁이구나, 너는.”

“어머머, 이젠 나를 허풍쟁이로 몰기까지? 얄미워라.”

샐쭉한 표정에 이어 침아는 패옥을 료의 손에서 홱 잡아 빼더니 술대까지 챙겨 단번에 료에게서 멀어졌다. 호수 맞은편 원추리 군락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녀가 제대로 비파를 타기 시작했다.

아리따운 그 아가씨 오얏나무 숲에서 나를 기다린다 하였다네.

간밤 비에 시내가 불어 못 오실까 근심이네 그 아가씨 어찌 올까.

고운 꽃신 품에 안고 치맛자락만 살짝살짝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못 오실까 근심이네 못 오실까 근심이네 내 아가씨 어찌 올까.

건넛마을 그 도련님 오얏나무 숲에서 나를 기다린다 하였다네.

얄미운 비 시샘을 하나 시내를 건너 어찌 가나 그 도련님 어찌하나.

이제나저제나 오락가락 저 구름이 원수구나 개었다 흐렸다 개었다 흐렸다,

가버릴까 근심이네 가버릴까 근심이네 내 도련님 가지 마소.

“잘한다!”

청아한 비파 소리와 달달한 침아의 목소리는 다시없을 짝이구나! 료는 그렇게 감탄하면서 탁, 제 허벅지를 쳤다. 그 느긋한 모습에 침아가 한소리 했다.

“칭찬이 문제가 아니라 잘 들으시라니까요. 피리를 잘 부는 것도 아니고, 노래도 영 아니고. 비파 하나라도 타는 흉내라도 내라는 것이 무리한 부탁입니까?”

“무리는 아니지. 다만 소질이 없는 걸 어쩌누? 누구 말대로.”

이젠 아예 배 째란 식으로 눈을 끔벅거리는 료의 모습에 침아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가 흐흥, 하고 웃었다.

“차라리 저 우송을 가르쳐서 지음(知音)을 만들든가 해야지.”

“우송이 녀석이 비파를 타? 허, 그 꿈 한 번 야무지다.”

“그도 아니면 나는 위후 님에게나 가렵니다. 그분은 음률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고 솜씨 자랑도 곧잘 하시니 게 있으면 귀 하나는 즐겁거든요. 태교에 좋은 음률을 듣는 것만 한 것이 없다는데 이년의 서방이란 분은 요령만 피우시고.”

골려주려고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그 소리에 파르르 떠는 것을 보고 싶은 모양이지 하면서 료는 싱겁게 웃었다. 침아가 보고 싶어 하는 대로 꼬마 신랑 노릇을 해줄까, 아니면 의젓한 서방 노릇을 할까 잠시 저울질했다.

그가 택한 것은 털썩 뒤로 드러눕는 것이었다.

“아아, 비파 좀 못 타는 걸로 이렇게까지 구박을 받을 줄은 몰랐구나. 타고난 솜씨가 박한 것이니 하늘을 원망할밖에. 네 태교를 위해서라니 내 어찌 잡겠느냐. 내 아무 데도 안 가고 이 호수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갔다가 속히 오려무나.”

료의 구슬픈 어조에 침아는 술대를 내려놓고 반신반의한다. 해보는 소리가 틀림없다 하면서도 아직 미안한 것이 많은 몸이니 조금만 그가 의기소침한 기색을 보여도 금세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우송에게 이 근처에 초당을 지으라 해야겠다. 그리고 이 호수를 망부호(望婦湖)라 불러야지.”

망부호라니. 완아가 휘를 기다리던 곰발바위 생각이 나면서 침아는 더럭 서러워졌다. 불현듯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니 먼 하늘에서 구름이 꿈틀거리며 이곳으로 다가올 기척을 냈다.

료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만 슬쩍 들었다. 침아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왔다.

“울지 마라, 내 귀여운 아이야. 내가 농을 해본 거다. 너 간다 하면 나도 따라가지 어찌 너만 보내겠느냐? 응? 내가 너 없이 어찌 산다고. 동면이라도 할 줄 안다면 모르겠다.”

품에 안아 료가 다독다독 달래주니 금세 서글픈 마음은 진정되었으나 그것으로 끝이면 침아가 아니다. 젖은 옷고름을 눈에 꼭 누르고 있다가 가을 물결 같은 눈을 료에게 지그시 맞추며 말했다.

“내게 비파를 타 주는 것이 싫증난 거라면 더는 조르지 않을 거예요.”

“싫증이라니! 내 마음 같아선 비파의 명수라도 되고 남았겠는데, 실력이 맘과 같지 않으니 그것이 부끄러워 저어하는 것이지 어찌 싫증을 내겠느냐?”

“비파의 명수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서툴러도 좋으니까 열심히 연습해서 잘하는 곡 한두 곡쯤 있으면 돼요.”

“음. 한두 곡쯤이야.”

“그래서 나중에 우리 아들에겐 피리를 배우게 하고, 딸에겐 가야금을 배우게 하고, 또 딸이 태어나면 석경을 치게 할까? 아니지, 목소리 좋은 딸이면 노래를 가르쳐야지. 나는 가야금을 타도 좋고 석경을 쳐도 좋고 노래를 불러도 좋고 아니면 춤을 춰도 좋고. 애들이 뭘 잘하는지 아직 모르니까 다 시켜본 다음에 결정해야지. 그래서 말이에요, 달 밝은 밤이면 온 가족이 바람 좋고 꽃 많은 물가에서 떠들썩하게 노는 거야. 아아, 상상만 해도 몸이 들썩들썩하지 않아요?”

수심을 드리운 눈으로 바람 불면 날아갈 꽃처럼 그에게 안겨든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금세 환해진 침아의 얼굴에선 광채가 일었다. 료는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을 상상하며 즐거운 기대에 푹 빠진 침아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그 향긋한 몸을 사뭇 힘주어 안았다.

“그런 원대한 꿈이 있다 하니 어찌 협조하지 않을 수 있겠소. 비파 연습, 정말로 열심히 하리다, 부인. 이제 되었소, 부인? 응? 말을 좀 해보오, 부인.”

부인, 부인 해대는 료를 쳐다보던 침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앳된 얼굴을 하고 부인 소리를 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얼굴 생긴 게 앳된 게 무슨 소용이오? 인간으로 친다면 증조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나이라면서요, 부인. 하긴 그렇게 치면 그대는 할머니도 보통 할머니가 아니긴 합니다만.”

“어머, 밉살스럽기도 해라. 나는 아름다운 야행유녀라고요! 할머니 소리를 들을 만큼 살 작정은 아니네요!”

침아가 발끈하며 항의하자 료가 웃음을 싹 거두며 정색을 했다.

“이럴 줄 알았어. 그게 본심이로군!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나와 해로동혈하겠다는 소리는 그냥 잠자리에서 해본 소리였어!”

“어……해본 소리가 아니라, 할 때는 진심으로…….”

단단히 실언을 한 침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또르륵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볼살이 통통한 찰떡같은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조물조물하며 료가 빈정거렸다.

“이 멋진 낭군에, 올망졸망한 아이들이야 어찌 되든 말든 자기 늙는 것은 절대 싫다 이거지?”

“나중 일이잖아요, 나중 일. 그때 가면 또 마음이 어찌 변할지 지금 장담이야 하겠어요?”

“장담해야지! 말로 장담하는 버릇을 해야 마음도 움직이는 법이야.”

“알았어요, 알았어. 늙어서 흰머리 송송 돋고 주름 자글자글해도 버티고 살 테니까.”

“약해!”

“뭘 더 어쩌라고요?”

“같은 무덤에 묻히겠다가 빠졌잖아.”

“어휴 참. 알았어요, 알았어. 그치만 난 새니까 무덤에 갇히는 건 싫은데. 다른 새들처럼 우리도 풍장(風葬)을……. 아니에요, 같은 무덤에 묻혀요. 죽어서도 오순도순 징글징글하게 보고 사는 거지요. 침아는 기뻐요.”

그의 가슴에 폭 안겨 침아가 새롱거렸다. 입으로 ‘으이구, 꼬마 신랑, 꼬마 신랑’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료가 볼 수 없는 교묘한 위치다.

하지만 침아 역시 볼 수 없는 게 있다.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흥, 도무지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라고 핀잔하는 료의 얼굴에 담긴 자애로운 표정. 놀랍도록 의젓한 그 눈빛을 그녀가 보았다면 서방님, 소리가 절로 나왔을 텐데. 하지만 침아가 그런 눈빛을 보려면 시간이 꽤 걸리리라.

되도록 오래, 료는 그녀에게 휘어 잡혀 사는 척해줄 생각이다. 때론 철부지처럼 말하고, 때론 엉뚱한 투기를 부려가며 그녀가 바라는 꼬마 신랑 노릇을 해줄 참이다. 이따금 어쩔 수 없이 며칠 떨어져야 하는 일이 생기면 절대로 앓아눕고야 말 것이다. 언젠가 그와 그녀의 아이들 앞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너희 아버지는 내가 붙어 있어야 한단 말이지. 나 없으면 하루도 안 돼서 아프지 뭐니.”

기분이 상한 척하는 료의 심기를 풀어주려고 침아가 애교스럽게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쪽쪽 입맞춤을 했다. 여간해서 그의 부루퉁한 표정이 가시질 않자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고 료는 보복하듯 자기도 간지럼 태우기에 동참했다. 그것이 그만 경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간지럼으로는 절대로 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 밤 침아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항복, 항복! 이러다 죽겠어요!”

달아나다가 침아의 신이 벗겨지고 버선이 벗겨졌다. 그의 손에 잡힌 어린아이처럼 만질만질한 발을 또 간질이다가 덥석 깨무는 바람에 침아는 정말로 웃다 죽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하지만 여전히 웃느라 숨이 가쁜 그녀와 달리 료의 생각은 새하얀 그녀의 속살에 금세 다른 쪽으로 치달았다.

“어, 어머……!”

잘 놀다가 갑자기 눈을 번득이며 허리춤을 풀기 시작한 료 때문에 침아는 놀라서 소리를 냈다. 몸을 일으키면서 말리려 했다.

“왜 이래요,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멀지 않은 곳에 우송이랑 문복이가…….”

“이미 다른 곳에서 기다리라고 보냈다.”

“그치만…….”

“초당을 지을 거다. 이 근처 어딘가에. 내일 우송에게 자리를 골라 보라고 할 생각이야.”

바쁘게 손을 놀리며 서로의 옷을 벗기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춘 료가 호수 쪽을 쳐다보았다.

“네가 이곳을 좋아한다고 했지 않느냐. 나도 틀림없이 좋아할 거니까.”

그러니 이렇게 시작하자고 꾀는 듯 요염한 표정이라 침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뜨거운 정염을 담아 그녀를 향해 내려오는 료의 얼굴을 감싸며 침아는 보드랍게 입술을 겹쳤다. 옷을 벗기던 서두름은 내려두고 료는 아주 천천히, 사뭇 정성을 다해서 그녀에게 입 맞추고 온몸을 고루 애무하였다.

다시 만난 지 보름도 되지 않았지만, 밤마다 몸을 섞은 횟수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많다. 료가 이 일에 너무 푹 빠진 것이 아닌가 싶어 며칠 전 밤엔 침아가 우리에겐 앞으로 많은 날이 있다면서 그를 말려보았지만, 료는 아주 간단한 말로 침아를 설득시켰다.

“앞으로 많은 날이 있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오늘이 지나가버리면, 다시 되찾을 수 있느냐?”

침아도 비로소 생각을 했다. 시일이 흘러 흘러 언젠가는, 서로의 얼굴만 보아도 살을 맞대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는 지금 시절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고.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가버리면 되찾을 수 없는 것이다.

문득 그녀가 바라본 하늘에 반딧불이 하나가 지나갔다. 암컷이라 불빛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수컷을 찾아내 행복을 누리러 간 것일까?

“으응…….”

료가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고 애무하자 작게 신음하면서 침아는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다가 고개를 들고 새삼스레 눈앞에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아름다운 만월을 가운데에 수놓고 금빛 모래별을 뿌려 뽑아낸 한 폭의 푸른 비단 병풍 한 폭. 거기엔 미풍에 일렁이는 호수의 수런거림도 담겨 있다. 원추리의 향기, 부들의 속삭임, 풀벌레들의 이야기도.

그 풍경화엔 오래전의 자신도 있었다.

옛날의 그녀는 날개옷을 짓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다만 첫눈에 아, 여기다 싶은 곳을 찾았고, 보름이면 날아와 달이 이울도록 옷을 지었다. 앞으로도 옷을 지을 때면 찾을 생각이다.

어젯밤 유월 보름을 앞두고 료에게 그녀의 비밀 호수에 대해 이야기하자 료는 당장 보고 싶다고 성화였다. 한 번이라면 보여줄 수 있다면서 오늘 이곳을 찾았다.

침아는 아직 위후에게 빚진 날개옷 세 벌이 있다. 위후는 엄연히 짐새 일족의 부인이 된 몸이시니, 그 말만으로도 약조는 지킬 것이라 믿는다며 그녀의 왼쪽 눈에 얽힌 주박을 거두어 들였다. 이제 그녀의 왼쪽 눈은 눈속임이 아니라 본연의 역할을 다 하며 세상을 볼 수 있다.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은, 그리고 이곳의 풍경은 첫눈에 반한 옛날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무엇이 바뀌었을까. 길게 고민할 것도 없다. 그 풍경 속에 연모하는 이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별안간 토라진 듯 채근해 오는 료의 목소리에 침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료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딴생각을 하면 금세 알게 돼 있어. 어찌 내게 안겨 있으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느냐? 내가 부드럽게만 대해 주었더니 못쓰겠구나.”

그러면서 료는 침아의 안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신음하는 그녀를 꼭 껴안고 둘은 뒹굴뒹굴 풀숲을 한바탕 굴렀다. 버석버석 풀들이 요란하게 항의하는 가운데 풋내가 비리도록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찰싹 휘감긴 두 몸뚱이는 서로를 빨고 핥으며 떨어질 줄 모른다.

도로 원래 자리까지 굴러왔을 때, 침아가 료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상기된 뺨을 빛내며 침아가 웃음 지었다.

“단조를 보고 있었어요.”

뒤늦게 아까 그의 질문에 대답하자, 료는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그는 침아를 안을 때 그녀 말고는 아무 생각도 간직하지 않는 것이다.

“단조? 아아, 저것들? 저것이 왜?”

“단조는 짝짓기를 하면, 거의 한 달 후쯤에 산란을 하거든요. 알아요?”

“처음 들어. 그래서?”

“그런데 애벌레가 성충이 된 뒤로 얼마나 사는지 알아요?”

“글쎄……. 두어 달쯤?”

“보름을 살면 죽어요.”

“흠. 짧구나. 미물이라 어쩔 수 없겠지.”

“우리가 단조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저 위의 누군가도 우릴 보고 그런 소릴 할지도 몰라요.”

침아가 슬쩍 하늘을 가리키며 귓가에 소곤거리는 말에 료가 쿡쿡 웃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료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저 단조로 서찰을 주고받았던가?”

“서찰이요?”

“너, 죽은 척 떠나 있을 때 내가 보고 싶어 단조를 보냈지 않으냐.”

떠올리면 미안한 일이라 침아는 괜히 심통을 냈다.

“보고 싶어서는 무슨. 하도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지. 아야아.”

료는 그녀의 코를 깨물고 나서 눈을 부릅떴다.

“보고 싶어서 그랬으면서.”

“네, 네.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살 수가 있어야지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 이렇게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말로 해줘. 나는 몸도 고프고, 말도 고프다.”

“사내란. 나 보고 수다스럽다고만 해봐라.”

혀를 차는 그녀를 함빡 껴안고 료는 괜스레 낄낄대며 웃었다. 그런 그의 시야 저편에 꽁무니에서 깜박깜박 빛을 내며 반딧불이 하나가 날아갔다. 웃음이 자연스레 그치고 그는 한숨 쉬듯 말했다.

“나도 네게 서찰을 보냈었지. 그런데 내 경우엔 단조를 보내는 것에 그쳤어. 너처럼 말은 못 해봤구나.”

“언제요?”

“너 지난 그믐 며칠 전 밤에 운몽산에 왔었지?”

“어…….”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을 삼키는 침아에게 료가 대답했다.

“널 따라다니는 그 박쥐를 봤거든.”

“문복인 그런 소리 없었는데.”

“긴 잠에서 깨어난 뒤로 내겐 묘한 재주가 생겼다. 뭐라고 할까, 의식을 띄워 보낸다고 해야 하나? 계속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따금 어디 어디가 보고 싶다 싶으면 어느 순간 그곳을 보고 있는 걸 알게 되었지. 거기에 존재하는 눈을 가진 무엇의 몸을 빌려서.”

“그 거울이랑 비슷한 거네요? 왜 당신이 저번에 청작 아저씨랑 나갈 때 방에다 두고 간 그 천리경 말이에요.”

“역시 그 거울의 정체도 알고 있었구나. 그래. 그 비슷한 재주인 것 같아. 그 재주로 내가 방에 앉아 대숲을 소요하고 있을 때, 문복이가 왔어.”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던 그녀가 불현듯 아!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반딧불이! 문복이 날개 속에 묻혀서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구나. 그렇죠? 그게 당신이 보냈다는 서찰이야.”

료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 조그만 것의 눈으로 너를 보았지. 네가 말하는 것도 들었어. 네가 아이 이야기를 했을 땐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긴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알 수가 없더구나. 어째서. 내 아이를 가진 게 분명한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날 떨쳐내려 애를 썼는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며칠을 헛고생하다가 결국 화산 할머님께 여쭈었지. 그 대답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우리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못할 짓까지 했단 말이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누르기 위해 침아는 부러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료의 뺨을 문질문질 손으로 비벼댔다.

“그래요, 다 나 때문이지요. 두고두고 잊을 만하면 말해서 이 연약한 부인 심장을 따끔따끔하게 만들라고요. 어우, 미워, 미워.”

제멋대로 료의 얼굴을 비틀어대다가, 그의 눈을 손으로 가리고서는 쪽쪽 입술을 훔쳤다. 다시금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던 침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연모해요. 당신을 연모해요. 료. 난 당신이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이렇게 좋아하는 당신, 마음 아프게 한 거, 죽을 만큼 미안해요.”

경건하리만치 조심스레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던 그녀의 눈에서 이슬이 흘러내렸다. 그 이슬은 료의 눈을 덮은 침아의 손등에 떨어졌다가 흘러서 그의 뺨에 닿았다. 료가 침아의 손을 밀어내고, 그녀의 감긴 눈 사이로 흐르는 이슬을 보았다. 얼굴을 살며시 들게 해 눈물을 핥아주고서 료가 속삭였다.

“그래도 내가 더 널 연모한다, 내 귀여운 아이야.”

“어떻게 안다고. 내 속에 들어온 것도 아니면서.”

“들어갔는데? 지금?”

응? 하고 그를 쳐다보던 침아가 비로소 무슨 소린지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음탕해요!”

얼굴을 가리며 소리치는 침아가 너무 귀여워서 료는 버썩 껴안아 아래에 눕히고 수없이 입 맞추고 닳도록 애무했다. 더할 수 없이 농염해져 가는 정사의 열기 때문일까, 그날 밤 호수를 맴도는 단조들의 짝짓기는 그 어느 때보다 성황을 이루었다.

이제 동이 틀 즈음 그들이 한숨 자는 동안 우송은 주인의 뜻대로 초당 자리를 보러 일대를 돌아다닐 것이다. 한 며칠 기둥을 세우고 이엉이나 올리면서 우송이 실력 발휘를 하고 운몽산 저택으로 돌아올 즈음엔 료와 침아의 여행 준비도 끝난 후일 테고.

그러면 그들의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화목한 한 쌍의 부부와, 반인반우, 그리고 박쥐 한 마리가 동행하는 여행길은 그들이 기대하는 이상으로 즐거울 것이다.

그 여행의 끝 무렵 경치 좋고 물 좋은 심산유곡에 그들을 위한 둥지가 세워질 테고 거기서 해산 준비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일이란 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그들의 아들이 태어날 곳은 바로 이 자리, 단조의 호수를 앞에 낀 그들의 초당이다. 여름에 잠시 단조 구경을 하러 온 길에 몸을 풀고, 이후 부모가 번갈아가며 알을 품는 동안 충직한 가재 우송은 초당을 증축하느라 여름 내내 땀깨나 흘릴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귀여운 처녀 하나가 자신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 처녀도 우송도 아직은 짐작도 못한다. 지금은 그저 둘이 만나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앙숙이다. 앞으로도 족히 이십 년은 그렇게 미운 정을 쌓을 것이다.

언젠가 료의 가족이 여름 별장, 혹은 단조의 별장이라 부를 어여쁜 저택이 들어설 호숫가를 비추던 보름달이, 지상의 풍경에 민망해지기라도 했던지 슬며시 고운 얼굴을 구름 속으로 감추었다.

깜박깜박, 암컷을 찾는 반딧불이의 불빛이 그래서 더 고운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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