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하나. 해후 며칠 후의 운몽산 (31/33)

뒷이야기

그 하나. 해후 며칠 후의 운몽산

“그럼 난 잠시 다녀올 테니까.”

“예. 다녀오셔요.”

오늘부터 여행길에 가져갈 짐들을 꾸리기 시작한 차에 잠시 마루에 나와 저녁놀을 보며 쉬던 중이었다.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망중한을 즐기던 료는 뭔가 생각난 게 있다면서 우송에게 갔다 오겠다고 일어섰다. 부채를 흔들며 침아가 다녀오라며 방긋 웃자 댓돌로 내려서던 료가 다시 마루에 앉아 그녀에게 가까이 오란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침아가 다가갔더니 위팔을 잡으며 그가 입맞춤을 해왔다.

“아이참.”

슬쩍 밀어내면서 침아는 마루 한쪽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문복을 힐끗 보았다. 문복은 꾹 눈을 감고 자고 있다.

“잠깐 사이에 어디로 사라질까 봐.”

“안 사라져요.”

료는 농으로 해본 말이었지만, 해놓고 나니 하는 쪽도 듣는 쪽도 아직은 쿡쿡 가슴 한켠이 아리는 말이었다. 괜한 말을 했다 싶어 료가 어색해하는 것이 눈에 보여 침아는 제가 나서서 료의 뺨에 쪽쪽 입맞춤을 했다.

“어서 돌아와야 해요.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이쪽 하늘 위에 비구름 몰려드는 게 보일 테니까. 알았죠?”

료가 싱긋 웃으며 침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함빡 정이 실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그녀에게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어느 편이 먼저랄 것도 없이 농염하게 상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침아를 잡은 료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의 가슴팍에 기댄 침아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서서히 침아의 등이 마루 쪽으로 기울어져가니, 그나마 마루 밖에 있던 료의 두 다리도 마루로 오를 준비를 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서로의 옷고름이 풀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푸잇취!”

그때 퍼뜩 들려온 누군가의 재채기 소리가 후끈 달아올랐던 분위기에 촤악! 하고 찬물을 끼얹었다. 둘은 입술을 비비느라 여념이 없었으니, 이 자리에서 재채기를 할 자는 딱 하나뿐이다.

“으흠, 나는 그러니까, 음, 우송을 보고 올 테니까.”

“예, 갔다 와요.”

이 두 번째 전송은 성공리에 끝났다. 료는 머쓱해하면서 재빨리 뜰을 걸어갔고 침아는 부채로 제 얼굴을 부치며 료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걸 쳐다보다가 중문을 지나 보이지 않게 되자 겨우 한숨을 쉬었다.

“누님…… 미안해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문복이 사과를 해왔다. 침아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선 키득거렸다. 그러다 눈만 굴려서 문복을 쳐다보았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안 자고 있었나 보지?”

“자는 척하려고 했는데, 그만 궁금해져서 쳐다보고 말았어요. 한 눈으로만 본다는 게 두 눈으로 다 보고, 그러다 망할 놈의 재채기가 나와서…….”

“재채기가 안 나왔으면 다 보고 있었겠네? 아이고, 민망해.”

민망함 반, 놀림 반으로 그렇게 말하자 문복이 재빨리 침아의 옆으로 날아와 극구 부인했다.

“아니에요, 그럴 작정은 아니었어요. 그냥, 아주 조금만 보다 말려고 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제 무덤 파기다 싶었던지 문복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서방님도 계실 때엔 같이 안 있을래요. 제가 자꾸 방해꾼 신세가 되는 것 같아요.”

“아니야, 우리 문복이가 방해꾼이라니.”

“저 눈치 그렇게 없지 않거든요? 서방님이 저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잘 알아요.”

“어머, 그건 정말 아니다.”

“누님은 몰라요. 걱정 마세요, 누님. 문복인 섭섭하지 않아요. 서방님이 누님을 아주 좋아해서 그러는 거니까요. 물론 저도 누님이 아주 좋지만…….”

그러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문복 때문에 침아는 난감해져서 문복을 무릎에 안아 토닥토닥 얼렀다. 문복은 눈물을 그치려고 애를 쓰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작은 머리를 굴리다가 돌연 소리쳤다.

“전 그 못생긴 소가 정말 싫어요!”

“응? 또 우송 이야기야?”

“당연히 그 소대가리 이야기죠.”

“어허.”

기껏 잘 참고 있나 했더니 기회는 이때다 하고 투정을 섞어 말하는 문복을 보며 침아는 내심 웃겼지만 짐짓 목소리를 깔았다.

“싫다구요, 싫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내 그리 싫더라니, 벌써 며칠째인데 저는 물론이고 누님한테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 좀 봐요. 엄연히 상전의 부인인데! 말을 걸어도 너는 짖어라 나는 안 듣는다, 뭐 그딴 놈이 다 있지요?”

“너보다 나이가 많아. 어디서 놈놈 해대는 거니?”

“그러니까요! 낫살이나 먹은 소 주제에 소갈머리가 나쁘다고요!”

“어허, 이 녀석이 그래도. 너 정말 나한테 회초리라도 맞아야겠구나.”

“누님이 때리는 회초리라면 웃으면서라도 맞지요. 그치만 그 소는 진짜 그러면 안 되잖아요. 서방님도 누님이라면 애지중지인데, 어찌 종 주제에 누님한테 트릿하게 구나요. 계속 그러면 언제 한 번 제가 박치기를 해줄 테니까요.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해주고 말 거예요.”

침아는 정말로 곤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문복이 해보는 말이 아니라, 정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그 위후 님한테도 겁 없이 대들던 아이이니 우송에게 겁을 먹겠는가.

무릎에서 문복을 내려놓고 침아는 그 아이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기세등등해 있던 문복은 침아의 침묵이 길어지자 점차점차 의기소침해졌다. 마침내는 침묵을 못 이겨 문복이 물었다.

“그러지 말라고 하시려는 거지요, 누님?”

침아가 방긋 웃었다.

“문복아.”

“예, 누님.”

“서방님 있잖아.”

“예, 서방님이요.”

“난 서방님이 참말로 좋단다.”

문복은 몸을 외로 꼬면서 괜스레 제가 더 쑥스러워했다. 그런 문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아가 말했다.

“근데 내가 서방님한테 너무 미안한 짓을 많이 했거든. 알지?”

문복은 대답 없이 눈을 꾹 감았다. 알긴 하지만 심복은 못하겠다는 문복 나름의 항의이다. 침아는 그 모습이 귀여워 더 크게 웃었다.

“그래서 앞으론 매일같이 서방님이 웃으실 일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우리 문복이랑, 우리 서방님이 아끼는 우송이랑 서로 앙숙이 되어 싸우면 서방님이 웃으실까, 얼굴을 찡그리실까?”

“……얼굴을 찡그리시지요. 그렇지만, 그 소대가리는 누님한테!”

목청 높여 항의하려는 문복에게 침아는 입술에 검지를 세우며 쉿, 하고 조용히 시켰다. 문복은 단박에 말을 들었다.

“너 이 누님을 물로 보느냐?”

“예? 설마요!”

“내가, 우송이보다 두 배는 더 오래 살았거든? 그런데도 우송이 하나 못 다스릴 성싶어서 네가 호들갑이야?”

침아가 표정을 엄하게 짓자 문복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누님이 작심을 하면 무섭지요.”

“그래. 내가 작심을 하면 무섭단다. 그러니까 괜한 분란 일으킬 생각 말고 문복인 서방님한테 앞으로 더 깍듯이 잘하기다?”

“지금도 깍듯한데…….”

“더 깍듯이. 나는 서방님이 우리 문복이 칭찬하는 소리 한 번 듣는 게 소원이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찡긋 오른쪽 눈을 감아 보이며 말하자 문복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듣겠습니다! 누님, 저만 믿으셔요.”

그렇게 장담한 문복은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어 갈 곳이 있다면서 후루룩 날아갔다. 그 모습을 귀엽게 보면서도, 저 아이가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하면서 침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노을질 때 저택을 나간 문복은 그날 밤은 물론 이튿날에 이어 그 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걱정하는 마음이 든 침아가 나서서 찾아보고 싶기도 했고, 또 우송을 만나 따로 하고픈 이야기도 있었지만 여행 짐을 꾸릴 때를 빼놓고는 침아를 제 곁에서 떼놓을 줄 모르는 료 때문에 그럴 짬이 없었다. 그와 한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것은 침아도 료만큼 간절했다.

보고 있어도, 만지고 있어도, 입 맞추고 있어도 좋은 마음이 넘치는 것을 어찌 풀지 몰라 둘은 얼떨떨할 지경이다. 본디 료 혼자 주도적으로 끌어가던 감정의 물결에 침아가 주저주저하며 따라오던 것을, 이제 침아 역시 그에 못지않은 감정을 쏟아내며 동참하니 불어난 물길이 얼마나 넓고, 그 힘이 얼마나 세찰지는 말할 것도 없다.

둘 다 자중 따윈 잊어버린 채 끼니를 챙기는 것조차 잊고 그저 서로 눈만 맞으면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 안달을 내니, 손도 대지 않은 식사가 부엌에 쌓여간다는 소리에 걱정되어 청작이 들여다보러 왔다가 먼 복도까지 들려오는 남녀의 격한 색정의 신음에 기겁을 하며 돌아가기도 했다. 넌지시 화산 노파에게 그 곤란한 이야기를 비쳤더니 화산 노파는 달관한 듯 웃으며 한마디 하였다.

“내버려두게. 먹을 만큼 먹으면 다른 쪽 배도 고파지겠지.”

퍽 엉큼한 말이라 청작 같이 나이 지긋한 사내도 얼굴에 홍조가 돌아 자리를 떠났다. 화산 노파는 시녀들을 내보내고 조용히 차를 기울이며 못 말릴 애들이란 듯이 웃다가 혼잣말을 하였다.

“이러다 태중의 아기가 색골이 되거나 하면 어쩌누?”

고개를 갸웃해 보던 화산 노파는 차를 마시고 일어나 책궤 쪽으로 다가갔다. 덮개를 치우고 그 안에 넣어둔 서찰 한 통을 꺼냈다.

“떠나기 전에 이것을 주어야 할 터인데.”

료가 생사의 경로를 오가던 즈음에 낯선 심부름꾼 하나가 어렵게 저택에 들어 전한 서찰은 휘가 화산 노파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경황이 없어 받고도 내버려두었다가 한시름 덜고 나서 확인해 보니, 서찰의 내용은 화산 노파라기보다 료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서두에 모든 것은 휘 자신의 무정함이 낳은 죄이고, 침아에게는 일말의 허물도 없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 옛날 정을 주었던 인간 여자의 일과 얽힌 침아의 일을 얼마쯤 말하고는 있었으나 침아를 죽은 척 꾸며 납치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뜻이었다면서 스스로 죄를 끌어안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오로지 료를 괴롭힐 생각에 못된 마음을 먹은 형을 원망하라면서, 침아는 실로 료의 일에 지극하였으니 의혹의 감정은 버리고 찾아서 다시 잘 살길 바란다는 뜻도 적고 있었다.

당장엔 얼굴을 들고 마주볼 자신이 없어 한동안 세상 유람을 하고 돌아가겠다고 하는 마지막 문구에서, 거듭 휘는 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이미 일의 경과에 대해 알고 있느니 만큼 화산 노파는 휘가 전하는 사과의 말이 자못 기특해 보였다. 때로 깜짝 놀랄 만큼 냉혹한 면이 있던 그 아이, 제가 욕을 들을지언정 다른 이의 일을 염려해 주고 있는 모습이 신기한 것도 당연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휘가 분명히 얼마쯤 자랐다는 것을 행간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료에게 서찰을 보이는 것은 괜히 잊어가는 기억에 긁어 부스럼 같아서 못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은 깨끗이 사라졌다. 과거를 또렷이 기억하는 료에게 이 서찰을 보여야 형제간에 생긴 균열이 아주 조금이라도 아물 수 있을 것이다.

“아니지, 이제는 외숙과 조카인가…….”

가만히 중얼거리면서 화산 노파는 턱을 괴고 웃었다. 기회를 보아 료를 데리고 섬이의 무덤에 한 번 가보아야겠다 하면서.

청작에게 한 화산 노파의 말은 당연히 적중했다. 아직도 다른 쪽 허기가 중요했던 료와 달리 포태를 하고 있는 침아의 본능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아기를 위해 뭐라도 입에 넣어야 한다면서 료를 밀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꽃과 물만으로는 애가 버티지 못할 거라는 료의 주장에 다시 곡기를 입에 대기 시작한 침아는 너무도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료가 배가 불러 흐뭇해하고 있을 때 화산 노파의 시녀가 와서 그에게 건너오라는 전갈을 했다.

시중을 드는 여자와 청작까지 불러다 침아의 곁을 지키게 하고 료가 남쪽 객청으로 건너갔다. 화산 노파는 놀리는 말은 일절 입에 담지 않고 그저 덤덤히 휘의 서찰을 보였다. 료는 차분히 앉아서 서찰을 읽었다.

어찌 반응할까, 화산 노파가 내심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료는 표면으로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괜찮으냐?”

“그 휘 형님을 생각하자니 서찰의 내용이 다소 놀랍긴 하군요.”

“답장을 띄울 생각이긴 한데…….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단호한 어투에 화산 노파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의절이라도 할 참이냐?”

“그리 번거로운 일을 하고 말고 할 정도의 정도 없습니다.”

싸늘한 말투와 달리 표정은 덤덤했다. 화산 노파가 가만히 료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자 료는 서찰을 내려두고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바깥 하늘을 내다보며 말했다.

“다만 제 어미를 몹시 아꼈다 들었으니, 저로 인해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마음이 크게 상하셨을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겠습니다.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보니 그간의 일이 다소간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해는 이해일 뿐, 당장 마주 대하여 어떤 감정이 들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그러고 서 있다가 화산 노파를 돌아보며 료가 엷게 웃었다.

“시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휘 형님, 아니 외숙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화산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거듭하여.

“그래. 그거면 됐다. 네 말대로 시일이 필요한 일도 있지.”

료는 웃는 얼굴 그대로 다시 창밖을 돌아본다.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 듬직하게 보이는 것에서 화산 노파는 새삼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휘가 한 뼘 자랐다 하면, 료는 두서너 뼘은 더 자랐음이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침아. 그 아이는 시작은 악연이었을지 모르되 이 집에 들어와 형제를 모두 성장케 하였다고. 특히 료는 그 아이로 인해 성장하고, 단단해졌다.

훨씬 더 자랄 것이다. 료도, 침아도 서로 함께하면서 더 크고 성숙한 존재가 되리라.

결국 좋은 인연인 것이다. 천생연분. 아마도 그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하면서 화산 노파는 미소를 머금는다. 그 연분에 자신이 아주 작은 공로나마 있었던 것을 훗날 자랑하겠거니 하면서.

아무래도 과식을 한 것 같다면서 침아는 세우지로 산보를 나갔다. 청작과 시녀가 뒤를 따라왔다. 혼자서 가고 싶었으나, 홀로 내보냈다가는 료에게 큰 야단을 들을 거라는 청작의 말에 침아가 수긍했음은 물론이다. 한동안은 일신의 자유보다 료를 안심시켜주는 것에 더 힘써야 함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단지 며칠 사이좋게 지낸 것으로 료의 마음에 생긴 생채기가 아물었을 것이란 오판은 하지 않는다. 그 상처가 아주 아무는 것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다. 어서 낫게 해주고 싶지만, 어떤 일은 오로지 세월이 흐르는 것만이 치유제가 되기도 하니까.

“아아, 덥다. 올해 농사는 풍년이 들려나.”

쨍쨍 내리쬐는 해를 올려다보고는 기분 좋게 타박타박 뛰어 세우지 가장자리로 다가섰다. 물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담그고 목덜미를 씻는데 문득 시선의 앞쪽에 둥근 기포가 올라오더니 거북 껍질이 둥실하고 떠올랐다.

“응?”

이건 또 무어지, 하며 쳐다보니 껍질 속에서 쑤욱 거북이 목을 내밀었다. 그 거북, 희한하게도 흰 원숭이 머리를 달고 있다.

“잘 살고 있느냐, 아기야?”

위후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야 물론…….”

말하다 말고 퍼뜩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청작과 시녀는 어째선지 선 채로 얼음이 되어 있다. 시녀는 하품을 하다 마는 얼굴이고 청작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서서 졸고 있는 형상이다. 위후가 기가 차다는 듯 쏘아댔다.

“너는 내 신통력을 무시하느냐? 아무렴 방해꾼을 병풍 삼아 이야기를 하겠느냐, 이 몸이.”

“아, 예, 예. 대단하십니다.”

심드렁하게 찬양하는 침아를 보며 흰 원숭이는 그것도 칭찬이라고 기고만장한 얼굴을 한다.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이 몸은 장사를 안 하면 안 했지, 뒷일까지 깨끗하게 책임지는 주의거든. 그런데 저 저택은 무슨 기운이 그리 강한지 이젠 들어갈 틈도 없더구나.”

“그렇습니까?”

“네 작은도령이랑 네 더 작은 도령 때문이다.”

료랑 침아 뱃속의 아기 때문이란 소리에 침아는 슬쩍 목덜미를 긁었다.

“그렇습니까?”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보면서 흰 원숭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머리가 물에 잠겨 어푸푸 물을 뱉어냈다.

“네 더 작은 도령 말이지, 이무기지만 짐새의 독에도 내성이 있을 게다. 네가 네 서방 피를 마시고도 멀쩡히 산 것을 보면 모르겠느냐? 내 생각에는 말이다, 완이던가 완아던가 하는 그 귀신이 잠시라도 형체를 갖춘 일 역시 그 아이 힘이 있어 그랬을 거라는데 걸겠다.”

“흐음.”

“퍽 대단한 것이 될 게 틀림없대두. 아신 그 녀석도 걸물이 될 거라고 장담했으니 잘 키워야 돼. 태교는 잘 하고 있겠지?”

“일단 마음으로는…….”

차마 태교고 뭐고 다 잊고 며칠 그 아비 되는 자와 살 섞는 일에 탐닉해 있었노라 말할 수는 없다. 얼굴이 다소 붉어지며 눈을 피하는 것을 보고 위후는 대뜸 눈치를 채고 낄낄댔다.

그가 또 무슨 음탕한 소리를 지껄일지 몰라 침아는 촤악 물을 뿌려 위후가 물벼락을 맞게 했다. 이 무슨 짓이냐고 그가 노발대발하는 틈을 타 침아가 침착하게 물었다.

“안 그래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의 앞일만 못 볼 뿐, 다른 이들의 몇 백 년 후까지 내다보시는 영험한 흰 원숭이, 위후 님.”

“뭔데?”

“제가 이 저택에 들어오는 일, 굳이 십 년이 걸릴 일이었습니까?”

“으응?”

목을 쭉 늘여 빼는 위후를 보며 침아는 빙그레 웃고 다시 말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석연찮아서 말이지요. 십 년이 걸려서 들어올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십 년을 기다려서 제가 료와 만날 시기를 조율했던 것이 아닌지 싶어졌지 뭡니까.”

“으으응?”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괜스레 말꼬리를 늘이는 위후의 꼴이 더욱 의심을 부채질했다.

“저는 아무래도 생겨먹은 게 어리석은 터라 위후 님 말씀만 하늘같이 믿고 움직였던 것이지만, 돌이켜보니 꼭 제가 화산 할머님 손에 팔려가는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싶네요. 휘라는 작자, 분방하리만치 밖으로 나돌길 좋아했는데 그 앞에 우연을 가장하여 나타날 기회, 위후 님 같은 분이 못 만드셨을까요?”

“어허, 이거 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내가 어렵게 천명을 엿본 것을 가지고 이제 일 다 끝났다고 의심하고 들다니 괘씸한지고.”

“아니오, 일이 다 끝났다고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이제서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겁니다. 그 안에 들어 있을 때는 제가 치열하게 제 머리로 싸워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단순히 위후 님 손에 들려 있던 바둑돌 하나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바, 바둑?”

터무니없이 예리한 침아의 감에 위후는 뜨끔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침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빙긋 웃으며 파고들었다.

“료의 부친이신 그 아신이란 분이랑은 바둑 친구라고 들었습니다만? 두 분이 백 년마다 내기 바둑을 두신다면서요? 마지막 바둑에서 위후 님이 지셨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대체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어떤 놈이 주절거린단 말이냐? 원 집안 단속을 어찌 하는 게야, 이놈들이!”

“아이참, 화내지 마셔요. 저야 한집안 식구나 마찬가지니 이런저런 이야길 들은 거지요. 위후 님을 아버님처럼 생각한다는 제 말은 진담이었습니다.”

그가 벌컥 화를 내며 말을 돌리려 하자 침아가 살랑살랑 웃으면서 달래고 나섰다. 위후는 아주 어린것은 싫어하지만, 그 어린것이 애교 있게 따르는 것에 은근히 약하다. 거드름 피우는 성격을 조금만 참아주면 위후도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는데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어 진심으로 어린것들이 따르질 않는다. 하지만 침아는 달랐다.

게다가 가끔씩 그녀는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곤 한다. 밖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받들어 모셔지는 대쪽 같은 기세의 권력자지만 집에 돌아가선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수염이 잡아당겨져도 허허 웃기만 하는 노인의 심정이랄까. 수염을 잡아당겨줄 손녀가 있어서 뿌듯한 노인 말이다.

이제 일이 끝났다고 인연을 딱 끊기엔, 어쩐지 허전하다. 며칠간 심심해하면서 침아 고 녀석이랑 만날 일 없나 하고 이 저택 주변에 관심을 둔 것은 말할 수 없지만.

문득 위후의 눈 뒤에서 잔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그렇지, 그렇지. 좋은 수가 생각났다.

“하여간에 계집이 눈치는 빨라서는.”

툭하고 혼잣말처럼 내뱉은 위후의 말에 침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역시, 뭔가가 있었군요?”

“네 말대로 굳이 십 년을 기다릴 것까지는 없었지만, 아신 그 녀석이 워낙…….”

말끝을 흐리면서 위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침아는 끈기 있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해줄 말은 이것뿐이다. 나는 그 녀석에게 내기빚이 있었고, 그 녀석은 아들이랑 만날 기회를 찾고 있었어. 그냥 만나서는 안 되고, 아주 극적으로. 그 녀석, 화려한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게 약점이라면 약점이거든.”

“……아주 극적으로, 이를테면 아들의 목숨을 구해줄 기회라던가?”

침아의 물음에 위후는 슬쩍 눈썹을 치켜 올리고 말았다. 침아는 한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 의뭉스런 원숭이와 그 무서운 이무기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았던 것일까?

“혹시 위후 님, 설마 저 문복이의 일도……?”

애초에 흰 원숭이에 대한 말을 꺼내 그녀가 위후를 찾아가게 만들었던 박쥐에 대해서도 의심이 일었다. 위후는 펄쩍 뛰었다.

“아니다! 내가 아무리 종자가 없기로서니 그 멍청한 것을 썼겠느냐?”

침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위후는 그건 절대 아니라고 몇 번이고 펄쩍 뛰며 기막혀했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내 언제 너한테 해가 되는 일을 한 적 있느냐? 괜히 자기편을 의심치 말거라. 네가 조심해야 할 녀석은, 따로 있다.”

“그게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야. 아신이지. 그놈, 절대 선한 놈이 아니다.”

“위후 님도 그리 선한 놈은 아니거든요?”

“나랑 비교하면 안 돼. 그놈은 어떨 때엔 대책 없이 나쁜 놈이 된단 말이지. 아니 그보다 너는 날 아버지처럼 생각한다더니, 뭐? 선한 놈이 아니야? 그게 감히 할 소리냐?”

위후가 또 벌컥 화를 냈는데 이번엔 말을 돌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진짜 화가 난 걸로 보였다. 침아는 백배사죄했다. 하긴, 위후가 부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싶었다. 침아는 아신이 전보다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다.

“어쩌지요. 료는 그래도 아버지라고 은근 생각하는 눈치던데.”

“걱정 마라. 내가 있는 이상 그놈이 못된 술수는 함부로 못 부릴 게다.”

“위후 님이요?”

“나는 장사꾼 아니냐. 한 번 맺은 계약을 소중히 여기지.”

“흐응.”

과연 그 이유뿐인가 하고 침아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게 그에게 들리기라도 했는지 위후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뭐, 내가 심심하기도 하고.”

그제야 침아가 픽 웃었다. 그게 본심인 게지 하면서.

“알고 보니 그분이랑 퍽 친한 친구이신 거지요?”

“친하긴 개뿔!”

“안 친한 분이랑 어떻게 백 년마다 꼬박꼬박 만나 바둑을 두신답니까?”

“그러니까 몹쓸 세상인 게다. 내 실력에 버금갈 바둑 실력자가 이 넓고 넓은 세상에 그 한 놈뿐이라니, 이게 대체 말이 되느냐?”

이것도 진심으로 보였다. 침아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분과 안 친하시다는 거 믿어 드리지요.”

“글쎄, 그리 선심 쓰듯 말하지 말래두!”

“예, 예. 믿어요, 믿어.”

두 손을 벌려 보이며 침아는 됐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웃었다.

“제가 믿건 안 믿건 그런 게 뭐 중요하다고.”

“아 글쎄, 믿어야 한다니까!”

기가 막혀서 버둥거리던 위후의 몸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거북의 몸을 빌렸으니 뒤집힌 채 짧은 발만 움찔움찔, 물속에서 어서 날 뒤집어라 소리치는 위후가 어찌나 우습게 보이던지 침아는 옆으로 쓰러져서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한참만에 뒤집어 주었더니 위후는 단단히 삐쳐서 내 다시 오나 봐라 하고 이를 갈면서 거북에게서 떠나버렸다. 바로 이런 면이 귀엽다는 거다.

그가 떠나자 시녀와 청작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아는 시치미를 뚝 뗀 채 물가에 앉아 거북이 물로 돌아가는 것을 구경했다. 거북이가 사라진 뒤엔 햇빛 좋은 하늘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일말의 의심이 아무래도 사실이었나 본데, 이제 와 불평한들 무슨 소용인가. 의뭉스런 늙은이들 손에 놀아났다고 발끈하기엔 지금 누리고 있는 기쁨이 너무도 크다. 결과적으로 돌고 돌았으나, 료와 그녀는 맺어졌다. 그 손을 두 번 다시 놓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엔 감사라도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우송을 보러 가야겠어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작에게 말하자 청작이 오후에 지나치면서 수레를 손보고 있는 걸 보았다면서 그리로 안내했다.

과연 우송은 전에 본 붉은 수레를 새로 고치는 일로 바빴다. 그들이 오는 것도 모르고 일하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우송을 보고서 침아는 청작과 시녀에게 물러가란 손짓을 했다. 청작이 그 뜻을 알았는지 조용히 시녀를 데리고 갔다.

“우송아.”

침아가 부르는 소리에 우송이 움찔하더니 힐끗 머리를 돌릴 듯하다가 그대로 탕탕 망치질만 했다.

“우송아.”

두 번 부르자 그가 슬쩍 머리를 긁적거렸다. 침아가 씩 웃으며 다시 불렀다.

“우송 아저씨.”

“아이구, 그러지 마십쇼!”

그제야 펄쩍 뛰며 우송이 돌아섰다. 얼굴이 마주치자 못내 곤혹스런 듯이 눈을 하늘로 돌린다.

“앞으론 나 안 보고 살 작정인 게지요?”

“아이구, 글쎄, 존대하시지 말라니까요, 마님.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거 이제 다 아는데.”

커다란 손을 휘저으며 우송은 뒷걸음질까지 쳤다. 침아는 부러 더 바짝 다가섰다.

“나 제대로 볼 때까지 계속 존대할 거예요. 우송 아저씨, 나 보기 싫어 그러지요?”

“아니, 보기 싫긴 누가 보기가 싫답니까. 제가 뭐라고…….”

그러면서 힐끗 침아를 쳐다보았다가 금세 얼굴을 찡그리며 홱 고개를 돌렸다. 침아는 이 솔직하기 짝이 없는 거인을 대하여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 마음 그대로 꾸벅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내 잘못했어요. 속여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앞으로 다신 그렇게 못된 짓 안 할 거니까, 그만 화 풀어요.”

“아이고, 아이고, 이러시지 말라니까요. 제발…….”

우송은 허리를 숙이다 못해 침아 앞에 엎드려야 했다. 그래야 겨우 키가 맞았다.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으며 우송이 중얼중얼했다.

“제가 뭐 제 일로 화가 났답니까. 단지, 우리 주인님, 그 불쌍했던 모습 생각하니 도저히 아직 얼굴 볼 마음이 안 드는 걸 어쩝니까. 주인님은 도량이 하늘만큼 넓다지만, 이놈은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라서 말이지요.”

“알아요. 우송 아저씨, 주인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끔찍했지. 그래서 비는 거라오. 내가 잘못했어요. 나 때문에 괜히 슬픈 일 많이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 다시는 안 그래요. 우리 서방님, 우는 일도, 슬퍼할 일도 없게 내 죽는 날까지 잘 모시고 살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친하게 지내요. 우리가 서로 본체만체하고 지내면 서방님 마음이 어떻겠어요. 나 서방님한테 미움 받기 싫단 말이에요.”

“누구는 미움 받고 싶어 이러나요…….”

우송이 웅얼거리다가 슬쩍 머리를 들어 침아를 보았다.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그가 말했다.

“주인님한테 진짜로 잘하셔야 합니다.”

“잘할게요. 매일같이 웃게 할 거예요. 내 머리카락이 많이 길면 머리카락으로 신이라도 삼아 드리지.”

“정말로 다시는 말도 안 되는 일로 속 썩이시면 안 돼요.”

“속 안 썩여요. 나 때문에 우리 서방님 속상하다 하시면 그때는 그냥 콱 죽어버리지.”

“아이구! 그런 흉측한 소리 마시구요!”

생각만으로도 질린다는 듯이 우송이 소리를 치자 침아가 허리를 숙인 채로 고개만 슥 들었다. 우송과 눈이 마주쳤다. 우송은 애써 노력하면서 침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 노력을 끈질기게 이어가면서 그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구요. 마님이 우리 주인님 아주 좋아하시는 거. 눈에 딱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건. 근데도 좋아하는 남자 마음에 대못을 박을 수 있다니 이놈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아요. 그거 평생 후회할 거예요. 하지만 후회만 해선 안 되니까 그 배로 열심히 아끼고 연모하며 살 거예요. 믿어줘요, 우송 아저씨.”

빤히 침아를 보던 우송이 배시시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제대로 보면 존대 안 하신다 해놓고서. 하여간에 어쩐지 암여우 같으십니다, 마님은.”

“어머, 그걸 잊었다.”

허리를 펴고 선 침아가 혀를 내빼물며 히죽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우송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우리 다시 친하게 지내기로 해. 응? 나 너도 귀여워서 좋아했었단 말이야.”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이 커다란 놈이 어딜 봐서 귀엽다고…….”

“귀엽다니까? 참말이지 귀여워, 우리 우송인.”

“아유, 원 놀리는 방법도 가지가지십니다. 귀여운 건 마님이시지요.”

우송은 벌게진 얼굴로 손을 내젓다가 슬쩍 침아가 내민 손에 제 커다란 손을 갖다 대었다. 그 손의 손가락들을 잡고 침아가 힘차게 흔들었다.

“오래오래 사이좋게 같이 살자, 우리.”

“살아본 뒤에 그런 건 말씀하시라고요. 우선 한 삼백 년쯤 살고서.”

새침 떠는 우송이 자못 신기하기만 해서 침아는 크게 웃었다. 그 웃음에 동화되었던지 슬며시 우송도 입술을 비죽거리며 웃는다.

둘이 그러고 있는데 어디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내 부인이랑 내 종자가 손에 손을 맞잡고 좋아한다느니 귀엽다느니 오래오래 같이 살자느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게지?”

휙 둘이 돌아본 곳에 료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혹시 지금 내 눈을 피해서 둘이 밀회라도 하는 것이야?”

“어머!”

“아이구, 주인님, 무슨 그런 말씀을……. 어, 어엇, 마님, 마님 왜 이러셔요?”

순진한 우송이 지레 놀라 온몸을 다 움직여 아니라고 항변하는데 침아는 우송의 다리를 꼭 붙잡으며 한 손으론 옷고름을 눈에 대고 우는 시늉을 했다.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이 소용 있나요. 다 밝혀진 마당에 우리가 뭘 어쩌겠어요.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셔요.”

“아이구,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주인님, 믿지 마세요, 저는 이런 일은 꿈에도 상상을 한 적이 없어요! 이런 여자, 무서워서 싫다고요!”

“어머, 우송. 내가 이렇게 예쁘게 생겼으면 됐지 더 뭘 바라는 거야? 내가 귀엽다고 할 땐 언제고 뭐? 무서워서 싫어? 무서워서 싫어?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두고두고 보고 싶은 모양이지?”

도끼눈을 하고 그를 쏘아보는 침아의 표정에 뜨끔해 우송이 료를 쳐다보니 료가 얼굴을 돌리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멍해진 우송을 두고 료가 침아에게 손짓해 가까이 오게 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료는 허리를 끌어안아 당기면서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우송인 진짜 순진해서 그리 놀려먹으면 안 된다니까.”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그래요. 당신이야말로 제 무서운 모습 보고 싶어요?”

“됐다. 나는 더는 사양이야.”

진지한 말에 이어 침아가 그 말에 혹여 상처받을까 이마에 쪽 입술을 대며 말했다.

“이리 귀엽고 예쁜데 무서운 구석 같은 게 어디 있다고.”

“그렇지요? 역시 우송이 눈이 이상한 거지요?”

“응. 원래 머리는 그리 좋지 않았거든.”

둘이 속닥거리는 시늉을 하였으나 우송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 들리거든요, 마님? 그리고 주인님?”

그러나 그 말이 안 들리는 듯이 침아가 료에게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머리가 좋지 않은데, 우리 집 가재 일을 어떻게 맡기지요?”

“총명한 보조를 하나 두어야겠지?”

“우리 문복이가 좀 똑똑한데.”

“문복이가 그렇단 말이야? 그거 잘 됐군. 우리 우송인 충직하고, 우리 문복이는 똑똑하다니 집안이 잘 꾸려지겠어.”

“그러다 둘이 나중에 혼인도 하면 좋구요.”

“그래. 그러다 둘이 나중에 혼인……. 으응?”

아까부터 계속 그랬듯이 농으로 주고받는 말인 줄 알았던 료는 아무리 농이래도 이건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우송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다. 침아는 그런 료와 우송을 돌아보며 천진하게도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혼인을 하면 좋겠다고요. 문복이 아직 서른도 안 된 아이거든요. 아직 둔갑술을 못 익힌 게 그렇지만, 위후 님께서 마흔 전에는 깨우칠 거라고 하셨어요. 문복이 착하고 귀여운 아이니까 틀림없이 좋은 배필감이…….”

“아니, 그보다, 그 녀석은 사내잖아.”

료의 말에 침아가 이번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찰싹 그의 팔을 때리며 웃었다.

“어머, 갑자기 농을 잘하시게 됐네. 딱 보면 알잖아요. 계집애예요.”

해보는 말 같지 않았다. 하물며 농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료는 우송을 쳐다보았다. 너 알았니? 하고 눈으로 묻자 우송이 맹렬히 고개를 흔든다. 절대로 몰랐습니다. 어딜 봐서 그것이 암컷입니까?

“그렇지만 널 보고 틀림없이 누님이라고 늘……. 그리고 우송에게도 형님이라고 인사하는 걸 내 귀로 들었는데.”

“그냥 입버릇이에요. 목소리가 그렇게 가냘픈데 어딜 봐서 사내겠어요?”

어딜 봐서가 아니라 박쥐는 다들 그런 줄 알았다. 두 사내는 진정 충격에 휩싸여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퍼뜩 무슨 소리를 들은 료가 고개를 돌려 남쪽 하늘을 보니 새파란 하늘 저 멀리에 까만 점 하나가 나타났다. 침아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으나 아직 뭔가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반색을 했다.

“어머, 문복이가 오네.”

우송의 눈에는 아직도 보이려면 한참 남았다. 그래도 우송은 도망치듯이 망치를 부여잡고 탕탕 수레바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로 료와 침아를 쫓아낼 작정이었으나 둘은 꼼짝도 않고 서서 하늘을 쳐다보다가 이내 우송의 작업을 보면서 이런저런 말을 했다.

“누님! 누님, 누니이이이임, 히이이이익!”

“우아아아아아악!”

가까운 하늘에 이르러 지상의 침아를 발견한 문복이 반가움에 그녀를 부른다는 것이 입에 물고 있던 줄을 놓치는 결과가 되었다. 뭔가 새까만 것이 줄줄이 꿰어 있는 꿰미가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그것이 하필 우송의 시원하게 벗은 웃통에 안착했다. 철썩하고 제 몸에 떨어진 것이 뭔가 하고 쳐다본 우송은 그것이 전갈을 줄줄이 꿴 것이란 걸 발견하자 눈을 뒤집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실로 대단한 성량이었다. 몸에 붙은 전갈 꿰미를 붙잡아 바닥으로 팽개치고 발로 바득바득 밟는 것이 그야말로 전광석화의 속도였다.

“히이이이익! 이놈의 못된 소, 그걸 왜 밟아! 서방님 드리려고 가져온 건데, 얼마나 어렵게 잡아온 건데, 그걸 왜 밟아, 이 못된 소! 못생긴 소대가리가 하는 짓도 꼭 저 같은 짓을 해! 이 나쁜 놈아아아!”

문복은 결코 허언을 내뱉지 않는다. 며칠 전에 말했듯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우송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박치기를 해대고 할퀴고 발로 차대니 우송은 그 커다란 몸집으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에 이 빌어먹을 작은 것이 계집애란 소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구, 주인님, 마님, 이것 좀 어찌 해주십시오! 아이구, 저는 암컷은 이제 안 때린단 말입니다!”

그 마음이 갸륵하다고 침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엉망이 된 전갈 꿰미를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걸 찾으러 가서 며칠간 안 보였었구나. 아직 사냥도 서툴러서 몇 년 전까진 호수에서 침아가 물고기도 잡아주곤 하였는데. 특히나 전갈이라니 오죽 고생을 하였을꼬. 하여간 귀여운 아이다.

“저기요, 서방님.”

침아가 료의 귀에 대고 아주 작은 소리로 귀엣말을 하였다. 료가 그것을 듣고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복아. 얘, 문복아.”

료가 문복을 부르자 우송의 머리 주변을 미친 듯이 날며 공격을 퍼붓던 것을 딱 멈추고 문복이 료를 향해 다소곳이 몸을 돌렸다.

“예, 서방님.”

“전갈은 고맙다. 날 주려고 가져온 거랬지? 네 마음 감사히 받았으니 더는 그리 말거라. 문복이는 아주 착하다던데?”

“그렇지만 하나도 못 드셨는데…….”

“먹은 거나 진배없다. 문복인 이런 기특한 생각도 할 줄 아는 총명한 아이구나. 과연 침아가 아끼는 동생이야.”

침아가 넌지시 문복이 칭찬을 해주라 한 대로 료가 넘치게 해준 말에 료를 바라보는 문복의 눈이 마치 별이라도 담은 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눈으로 문복이 대꾸했다.

“그걸 알아보시는 걸 보니 서방님도 우리 누님 낭군 될 자격이 있으십니다. 과연 우리 누님 보는 눈이 잘못될 리가 없지요.”

듣고 보니 료가 아니라, 침아를 칭찬하는 말이다. 어제까지였다면 내심 못마땅할 말이었겠으나 오늘의 료는 어디까지나 상냥했다.

“그렇지. 너희 누님은 보는 눈이 훌륭해.”

“암요, 우리 누님은 눈 또한 완벽하지요.”

“그래, 그래. 다른 데도 다 완벽한데 말이지. 코도 완벽하고 입술은 또 어찌 저리 완벽할까?”

“일일이 다 말하자면 입 아플 정도로 완벽하지요.”

둘이서 그리 합이 착착 맞게 침아 찬양을 해대니 중간에 서 있는 침아는 종래엔 고개를 들 수 없어지고야 말았다. 그만 좀 하라고 료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보았으나 료는 모른 척하면서 문복과 화기애애하게 수다를 떨었다.

저 녀석이 계집애라지 않은가. 아아, 이걸로 그의 마지막 한 가지의 걱정거리도 해소되었다.

어느 틈엔가 우송이 그 큰 몸집을 이끌고 자리에서 사라지고 만 것도 다들 몰랐다. 어딘가에서 울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전갈을 찾느라 고생한 문복에게 목욕부터 하라고 이르고 서쪽 채로 돌아가는 길에 침아는 발개진 얼굴로 료를 쏘아보았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좋은지 료는 연신 웃고 있었다.

“같이 좀 웃지요?”

“아, 안 된다. 너는 말해도 모를 테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치잇.”

“어허, 부인. 조금 고분해지신 거 아니었소?”

“……아닙니다, 서방님. 고분해진 거 맞아요.”

그러면서 입을 딱 봉한 침아였지만, 대신 그에게 팔짱을 낀 팔에 상체를 찰싹 붙여 그를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료가 고개를 기울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배도 찼겠다, 오붓하게 둘이서 목욕이라도 함께, 어떠하오?”

침아가 마찬가지로 속삭였다.

“태교를 위해서 이제 남은 하루는 아주 요조하게 지내겠나이다, 서방님.”

뜨끔하여 료가 침아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계속 걸어가다 그가 말했다.

“아까 내가 왜 웃었는지 말해 주면…….”

“아니오, 이젠 필요 없어요.”

료의 한쪽 어깨가 처졌다. 침아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웃는다.

가까운 나무에서는 매미가 문득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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