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다시금, 귀로(歸路) (30/33)

29. 다시금, 귀로(歸路)

물가에 밤이 찾아오면서 반딧불이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저들의 모습도 얼마 안 가 볼 수 없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덧없고 가엾었다. 내년이면 또 단조가 이 물가를 채우겠지만 지금 여기서 한창 제 목숨을 빛내고 있는 것들은 아닐 것이다.

“누님!”

문복이 멀리서부터 날아오며 몇 번이나 불렀지만 단조의 구애의 춤에 푹 빠진 침아는 턱을 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누님, 누님, 누니이임!”

날개를 접고 바로 근처에 내려선다는 게 실패해서 문복은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다 벌떡 몸을 일으키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정어정 걸어왔다. 나는 것조차 서투른데 정작 영력은 탁월해서 제 무리에서조차 내쳐진 이 박쥐에게 침아는 손을 뻗어 뺨을 살짝 꼬집었다.

“어디 다치진 않았지?”

“괜찮습니다. 제가 한두 번 이러나요.”

쓰다듬어주는 것보다 꼬집어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묘한 취향대로 기분 좋게 침아의 손길을 만끽하는 문복을 보다가 침아는 단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또 반딧불이를 보십니까?”

“달리 할 일도 없고…….”

“비파를 타시면 좋은데. 제가 가져올까요?”

“아니야. 노래도 부르고 싶지 않아.”

“음. 그러면 휘파람새라도 잡아 올까요?”

“됐어. 나 좋자고 억지로 새를 울리는 건 아니지. 문복인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면 좋니?”

“음. 누구를 위해 하느냐가 문제이지요. 누님을 위해서라면 하기 싫은 일 해도 좋아요. 위후 님한테도 안 대들잖아요!”

“에그, 참. 우리 문복인 누굴 닮아 이리 착하담.”

히힛 하고 웃으면서 문복은 침아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함께 단조의 춤을 구경했다. 이따금 작은 못 주변으로 모기를 비롯한 날것들이 날면 문복이 이리 뛰고 저리 날면서 잡아먹기도 했다. 침아에게선 항상 좋은 꽃향기 같은 게 나서 여름밤이면 자신처럼 든든한 파수꾼이 필요했다. 반딧불이 역시 퍽 좋아하는 벌레였는데 침아가 워낙 좋아하는 터라 이젠 먹지 않는다. 문복은 누님을 위해서라면 하고 싶은 일도 포기할 줄 아는 기특한 동생이다.

그렇게 자부심으로 충만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뭔가 걸리는 것이 있어 눈을 꾹 감았다. 뭐더라. 뭔가 용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뭐지. 뭐지?

“아아참! 누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침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시들하게 물었다. 위후의 저택에 손님이 드는 것은 일상다반사라 궁금하고 말 것도 없다.

“운몽산에서 온 손님이요. 퍽 대단한 수레를 타고 왔는데, 그래서 위후 님이 누님을 불러오라고 시켰는데 제가 깜빡……, 엇, 누님 같이 가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침아는 위후의 저택으로 난 오솔길을 달려가다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함께 가자고 소리치면서 문복도 비틀비틀 날아올랐다.

“손님이 오셨다구요…….”

사랑방에 면한 마당에 날아 내리며 마침 거기서 나온 시녀에게 물었더니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을 가리켰다.

“나이 지긋한 여자분이십니다.”

속삭이면서 시녀는 가지고 있던 소반을 내려놓고 침아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빠른 손길로 정리해 주었다.

침아는 위후의 저택에서 꽤 대접받고 지냈다. 이미 침아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위후가 제 낭속들에게 침아를 ‘귀한 손님’이라고 주지시켰음을 침아는 알지 못한다. 위후가 말하는 ‘귀한 손님’이 장래의 큰손이 될 거물 고객을 뜻한다는 것도 침아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위후가 침아에게 시종일관 껄렁하게 굴어도 그 외의 다른 누구도 침아를 함부로 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특별히 대접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침아는 위후를 모시는 자들이 그녀를 대하는 경외의 이유를 파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되돌아온 이 열흘간, 그녀는 정신을 아주 딴 데 놓고 있었다. 가슴 아래 묶은 붉은 띠를 다시 곱게 매어주는 시녀에게 침아는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표정이 어떠셨습니까? 손님분이요.”

“유모를 쓰고 계셨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네.”

“언뜻 들은 목소리는 참 듣기 좋았지요. 온화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랬어요?”

기쁨에 눈을 빛내다가, 지레짐작하지 말자 하면서 침아는 두 손을 맞잡았다. 시녀는 침아의 치맛자락까지 세심히 살펴준 뒤 들어가 보시라 말하고 물러섰다.

마루를 지나 사랑방 앞에 이르러 기척을 하고 들어오라는 위후의 목소리에 조심히 침아는 문을 열었다. 보랏빛 유모를 길게 늘어뜨린 화산 노파의 뒷모습에 그녀는 당장 달려가 묻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위후가 그녀에게 눈짓을 해보이곤 슥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방에 둘만 남게 되고서도 한참 만에 화산 노파가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와서 얼굴을 보여주렴.”

침아는 다가가서 화산 노파의 오른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자리에 섰다. 찻잔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화산 노파는 보지도 않고 말했다.

“앉으렴. 홑몸도 아니라면서.”

퍼뜩 놀라 침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위후가 말을 했나? 그러지 않기로 약속을 했으면서. 그가 나간 문을 원망스레 쳐다보는 잠깐의 시선을 알았던지 화산 노파가 중얼거렸다.

“저자가 알려주지는 않았다. 누구라 할까, 그래, 네게는 시아비가 되는 자가 알려주었지. 그게 아니라도 언젠가는 알았어야 할 일이 아니냐. 영원한 비밀이란 건,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

그늘이 서린 눈빛으로 침아가 그 자리에 앉았다. 하얀 우의가 펼쳐져 어둑해진 방에서도 스스로 빛을 머금어 아롱아롱했다.

비로소 화산 노파가 고개를 돌리고 그런 침아의 날개옷과 고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야 네 안에 있던 우물의 정체가 납득이 가는구나. 내 저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고 의아히 여긴 적이 있는데 아무리 봐도 그저 인간일 뿐이라 웃음 짓고 만 일이 있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났어. 하물며 그런 흉을 달고 있는 고획조를 본 일이 있어야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서 화산 노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처럼 좋은 향기를 머금은 인간이 있기는 힘든 법인데……. 눈은 참 간사한 것이야. 게다가 저자는 혈통이 좋다느니 하면서 아예 대놓고 수작을 부렸건만.”

침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삼 용서를 빌 기력이 없었다. 그저 착잡하게 눈을 내리깔고 작은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그 모습이 화산 노파가 보아 온 어떤 모습보다도 어려 보였다. 거짓의 짐을 완전히 내려놓았으니, 이게 바로 본 얼굴이겠지 하며 화산 노파는 가늘게 뜬 눈에 미소를 담았다.

고획조는 무리지어 생활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들은 거의 홀로 지내다, 제 후계를 길러야 할 때가 오면 얼마 동안 딸을 데리고 다니는 일이 있다. 화산 노파가 천 년 가까이 사는 동안 보았던 고획조는 세 명인데, 그 나이의 차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소녀처럼 천진하고 화사한 향기를 내는 고운 이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사교성이 극히 부족해 계속 교류를 이어나간 이가 없다.

침아를 보고 고획조를 연상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이다. 인간이라기보다 한없이 새에 가까웠던 다른 고획조들에 비해 그녀는 인간다웠다. 어떤 고획조는 홀로 지내는 동안 말하는 법을 아예 잊기도 한다. 고독을 즐기는 그들의 습성은 고칠 수 없는 지병에 가까운 것이나 침아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

“낳을 참이냐?”

돌연 질문을 던지자 침아는 창백해진 얼굴을 들었다. 제 배를 감싸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낳습니다.”

“당연히?”

작은 입술을 깨물며 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를 해치겠다고 한 것도 아니건만 화산 노파를 보는 침아의 눈에 단단히 경계의 빛이 서렸다.

“날개도 없는 것을?”

“저도 본디 날개 같은 건 없었습니다.”

딱 잘라 말한 침아는 격앙된 기분에 휩쓸려 초조하게 기다리던 것을 물었다.

“그는요? 깨어났습니까?”

유모로 가려진 얼굴에서 화산 노파의 검은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허랑하구나. 그리도 궁금했으면 진즉에 찾아올 수 있는 날수였다.”

그 날카로운 말에 침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차마…….”

“죽었다는 말을 들을까 차마 오지 못했다는 것이냐, 살았다는 말을 들을까 차마 오지 못했다는 것이냐?”

“어찌 그런 말씀을……. 꿈에라도 제가 그가 죽길 바랐겠습니까?”

“나는 모르겠구나. 네 과연 무슨 마음인지. 나는 그저 내 배로 낳지 못했을 뿐,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료가 너 때문에 죽을 작정을 하고, 그것을 실제로 저질렀다는 것을 알 뿐이다.”

“저를 어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알려주셔요. 깨어났나요? 벌써 열흘이 다 됐는데……벌써 열흘이…….”

어린아이를 오래 고문하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화산 노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제 아침에 눈을 떴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을 들썩이는 침아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개를 숙였어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떨리는 어깨를 감추지는 못했다. 기쁠 것이다. 눈을 뜬 료를 보았을 때 화산 노파도 이젠 살았구나, 하는 기쁨에 맥이 탁 풀려 울다가 웃다가 그랬다.

긴 잠에서 깨어난 료의 눈은 방에 있던 자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아 움직였다. 그러다 메마른 입술을 움직여 말했더랬다.

“침아가, 살아 돌아온 꿈을 꾸었습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그를 보며, 화산 노파도, 우송도, 청작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로 시선만 주고받으며 저게 무슨 말인가 하였다.

대답을 내놓은 것은 열흘 전부터 운몽산 저택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손님. 하지만 이제 당연한 듯이 저택의 주인처럼 행세하는 그자는 죽어가는 료를 제 입에 물고 저택에 들이닥쳤던 커다란 검은 이무기이다.

팔자에 화기(火氣)가 전혀 없는 녀석이라 살리려면 불이 필요하다며 사방에 불을 피우게 하고 료를 제 몸으로 감싸 똬리를 튼 채 사흘 밤낮을 꼼짝도 하지 않았던 모습을 본 이래 저택의 모든 이가 본능적으로 그에게 굴종했다. 비가 없는 하늘에서 그의 위로만 마른번개가 치고, 때로 스산한 바람과 함께 아스라한 검은 안개가 일며 불기를 꺼트리려 다가왔지만 내내 자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이무기가 문득 고개를 들며 붉은 눈을 빛내면 사방이 괴괴하리만큼 고요해졌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화산 노파는 그자가 그 사흘간 생사의 갈림길에 선 료를 생의 길로 붙잡아 당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화산 노파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어떠한 불길한 기운을 그자는 분명히 보면서, 사뭇 즐거운 듯이 웃으며 밀쳐내고 있다는 것도.

사흘이 지났을 때 검은 이무기는 이제 이 녀석은 잠자고 있는 것일 뿐이라면서 료를 짚더미라도 되는 듯 물어서 우송에게 던졌다. 우송과 화산 노파, 청작이 함께 료를 다시 세워진 서쪽의 원래 처소로 들이고 얼마 후 어딘가로 사라졌던 그자가 돌아왔다.

멱을 감고 왔다며 활짝 웃는, 인간으로 화한 모습조차 무섭도록 아름다운 사내는, 자신을 ‘아신’이라고 소개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 말에 화산 노파는 그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조카손녀 섬이 서찰에 써 보낸 무수한 상찬의 말들은 연모에 푹 빠진 나머지 남발한 귀여운 과장 같은 게 아니었다.

섬의 연인이었고, 료의 진짜 아비인 남자는 실로 강한 자였다. 이런 자의 피를 받았으니 2년 가까이 땅에 묻혀 있던 알조차 살아남을 수밖에. 그렇게 이해하게 되는 무언가를 아신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뿜어냈다.

료는 이제 자고 있을 뿐이라고 한 뒤에도 깨어나는 건 보고 가야겠다며 저택에 머무른 아신은 그 후 이레 동안 꽤 성실하게 료에게 제 기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틀 전에는 료를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더니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자신과 퍽 많이 닮지 않았느냐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 말이 맞았다. 아직 료가 앳된 얼굴이기는 하였으나 보다 세월이 지나면 어떤 얼굴이 될지 짐작하게 될 정도로 닮은 부자였다. 다만 그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활짝 미소 짓고 있을 때조차 다가가길 꺼리게 만드는 묘한 싸늘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단순히 체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비롯된 공기라고 해야 할까.

료와는 달랐다. 료는, 설사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보다는 훨씬 따스한 기운을 발한다.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둘이 알게 되는 일은 평생 없는 쪽이 좋았으리라고 화산 노파는 생각하게 되었다. 허나 지금은 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그런 내색은 하지 못했다.

하물며 이제 둘의 부자 관계가 밝혀지는 것을 막을 명목도 없다. ……이미 약조를 한 것이다. 중간에서 거간꾼 노릇을 한 자가 있었다. 그것이 침아를 화산 노파에게 팔았던 장사치, 승냥이였다.

“피차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신, 그 사내라면 그저 내키는 대로 작은도령 앞에 나타나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짐새 일족의 심기를 거스른다고 하여도 눈 하나 깜박할 리 없지요. 오히려 즐겁게 싸우자고 나설 자입니다. 다만 오랜만에 예의를 갖춰볼까 하고 변덕을 부리고 있고, 짐새 일족과도 좋은 관계를 지키고 싶은 모양이니 아무쪼록 적대하진 마시지요. 사이좋게 지내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적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작은도령이 살아 있는 동안엔 짐새 일족에게 해는 끼치지 않을 것이라 제가 보장하지요.”

료의 생명이 경각에 달해 있던 때에 홀연히 승냥이가 화산 노파의 침전에 나타나 그런 제안을 했더랬다. 당장 아신이 없으면 료가 위태로운 상황에 화산 노파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나마 이쪽의 자존심을 생각해 주는 것인지 며칠 전에 보았을 땐 불손하기 짝이 없던 승냥이가 퍽 공손하게 나왔다. 비록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반협박에 가까웠으나.

그가 단순한 승냥이 따위가 아니란 것도 화산 노파는 안다. 하지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까지는 이런저런 짐작을 해볼 뿐이다. 다만 분명히 아는 것은 저 아신이란 사뭇 대단한 이무기와 대등하게 어깨를 겨루는 정도의 걸물이란 정도이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 아신이 료가 깨어나 한 말에 대해 내놓은 대답은 이러했다.

“유명(幽冥)계에 한없이 가까이 갔다가 돌아왔으니 얼마간의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것쯤이야 당연한 일이지. 무수히 많은 꿈을 꾸며 걸어갔을 테니까. 저 녀석의 경우엔 날아갔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어디까지가 꿈인지 판단하는 것은 당분간 무리야. 시일이 좀 지나면 제 스스로 구별할 때가 오겠지만……. 그러기 전에 가능성 자체를 원천봉쇄할 수도 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잊게 한다는 뜻이야. 유명계까지 가는 동안 꿨던 꿈을 계속 기억하는 것은 저렇게 어린 녀석에겐 무리거든. 증발되는 꿈속에 죽음에 이르던 순간까지 포함되는 건 드문 일도 아니고. 유체가 되어 떠도는 숱한 망량들 중에 꽤 많은 수가 제 죽은 일조차 기억 못하는 걸 좀 봐.”

따로 듣는 귀 없이 화산 노파와 독대한 자리에서 아신은 그 이야기 끝에 떠보듯이 물었다.

“네게 그런 재주가 없다면 내 손을 빌려줄 수 있어. 저 알아서 하게 놔둘까, 아니면 잊게 만들어줄까?”

화산 노파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사내 앞에서 그녀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아신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며칠 주겠다고 하고선 웃었다.

그 얼떨떨할 지경으로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화산 노파는 침아에게 말했다.

“료가 보름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울고 있던 침아의 어깨가 흠칫했다.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는 그녀에게 화산 노파는 내처 말했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제 꿈인 줄 알아.”

아주 약간 고개를 드나 싶더니 침아가 물었다.

“……제가 호환으로 잘못된 줄만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모양이더라. 오늘 나오기 전에 그 애가 네 머리꽂이가 어디 갔느냐 찾더구나. 내 그걸로 네가 자결하려 했기 때문에 이미 치워버렸다 했다.”

그러면서 화산 노파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침아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은으로 된 부분이 새까맣게 변색되었음에도 자석영으로 된 꽃은 아직 얼마쯤 반짝거리고 있는 침아의 머리꽂이였다.

그 끔찍한 물건을 말없이 바라보다 침아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화산 노파는 침아의 손에 비취가락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꽂이를 들어 두 손으로 감싸 쥔 침아는 그것을 가슴에 대고 눈물만 방울방울 짓다가 마침내 화산 노파를 쳐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제게 가져다주셔서. 제가 가져도 되는 것이지요?”

“어찌해도 상관없다. 내 어찌 맨정신으로 그것을 볼 수 있겠느냐.”

지금도 괴로운 낯을 지으며 화산 노파는 시선을 피했다. 침아는 수건을 꺼내어 머리꽂이를 잘 싸서 제 품에 넣었다. 다시금 절을 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절을 하며 엎드린 채로 침아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분께는 그것이 좋겠지요. 할 수 있다면 이대로 영영 잊게 해주십시오. 위후 님께 들으니 그분의 수명은 앞으로도 퍽 길다 했습니다. 다시는 나쁜 마음을 먹는 일 없을 터이니, 어르신께서도 안심하십시오.”

화산 노파는 잠시 침아의 가냘픈 몸을 응시했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잠잠하게 흔들린다. 겉으로 보이는 눈물은 그친 듯했으나, 그 속도 그러할지.

“너는 그것으로 좋으냐?”

화산 노파의 질문에 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제가 후회하는 일은 너무 많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만……이 일로는 후회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 단호한 태도가 오히려 화산 노파의 눈에 가엾게 비쳤다. 후회치 않을 것이라 하나 그것은 지나봐야 아는 일이다.

“그래. 잊어서 좋은 일도 세상엔 있는 법이지. 료가 아침마다 마신 물에 망우초를 띄운 것도 그런 발상이었더냐?”

퍼뜩 고개를 들어 침아가 놀란 눈을 깜박였다. 그걸 어찌 아시느냐는 표정에 화산 노파는 가벼이 혀를 찼다.

“무슨 이야기 중엔가 료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 이야길 비쳤지. 나는 아무래도 꺼림칙해 료에게 하루쯤 그 물을 걸러보라 하였다. 늙으면 의심이 많아지기 마련이야…….”

“그럼 료가…….”

“내 말대로 했겠지. 그렇게 하겠다고 내게 약조했으니 말이다.”

“그랬겠지요. 약조를 했다면.”

료는 그런 사내다. 둘 다 그런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의미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 물을 다 마셨으면 좋았을 텐데.”

침아의 중얼거림에 화산 노파가 물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느냐?”

머뭇거리며 화산 노파를 바라보았으나 결국 침아는 거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말갛게 젖은 눈을 떨구며 침아는 작은 어깨를 움츠리고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화산 노파가 말했다.

“새끼 때문이라면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저 위후란 자의 깜냥쯤 되면 잘 거둬줄 수양부모쯤이야 찾을 수도 있을 테니, 낳고서…….”

아이만 낳고 돌아오라는 뜻을 전하는 화산 노파의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서글픈 말이었으나 그 정도도 아주 큰 선심임을 침아는 모르지 않았다. 료에게 날개 없는 자식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화산 노파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료에게 침아가 어떤 존재인지도 알기에 최대한 고심한 끝에 권하는 말일 터이다.

“제가 기를 것입니다. 아비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서, 잘 기를 것입니다. 아무쪼록 어르신도 이제 가시면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료의 일은……. 제 욕심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가 절 그저 사랑스러웠던 첫 연인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그의 연정을 버린 적이 없고, 그는 제게 배신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가 그렇게 기억해 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침아가 화산 노파를 본다. 젖은 눈이 반짝거리니, 그야말로 말하는 꽃 같고, 닦아낸 옥 같은 고운 계집이라 화산 노파는 새삼 생각했다. 과연 이런 아이를 료가 잊게 될는지? 언젠가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는 날이 오기는 할는지?

미련이 이는 것을 뿌리치듯이 화산 노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 료의 일은 마무리된 것으로 하자. 하지만 네가 료의 새끼를 품은 이상 나마저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설사 날개가 없는 것이라 해도, 내가 살아 있는 한은 돌봐줄 것이다. 다만 내가 이리 너를 찾는 일은 이제 바이없을 것이다.”

따라 일어서는 침아를 보던 화산 노파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어리구나. 아직.”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화산 노파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침아는 저택 밖까지 걸음을 옮겨 멀어지는 수레를 배웅했다.

둥둥 떠가던 횃불이 하나의 별처럼 멀어지다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 곁에 위후가 다가서며 물었다.

“뭐라 하더냐?”

“절더러 아직 어리다 하시더군요.”

“흥. 저도 아직 어린 주제에 설교는.”

그리 톡 쏘아 말하며 이빨을 쑤시는 위후의 말에 침아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료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내가 뭐랬냐. 하여간 고생을 사서 하지. 감히 내 말을 의심하고.”

근 열흘 만에 비로소 침아의 얼굴에 진짜 표정이 돌아온 것을 곁눈으로 확인하고선 계수나무 이쑤시개를 잘근거리며 위후는 트릿하게 웃었다.

“못 믿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내 머리털을 한 움큼이나 뽑아놓은 것이 말은 잘한다.”

“……상황이 나빴던 거지요.”

침아는 쑥스럽게 코를 긁적거렸다. 위후는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담장에 앉아 이제나 침아가 불러줄까 하고 기다리는 문복을 향해 소리쳤다.

“비파를 찾아 정자로 오너라.”

그런 후에 앞장서면서 침아에게 산보나 하자고 했다. 침아는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화산 노파가 떠나간 길을 바라보고는 엷게 웃으며 위후를 따라 걸음을 떼었다.

그녀가 단조의 춤을 구경하던 연못이 보이는 곳에 정자가 있다. 화조절 밤에 물에 빠졌던 일로 한동안 신세질 때 위후가 연못을 만들겠다 소리를 하더니 그 후 3개월 사이에 연못은 물론, 정자까지 뚝딱 해치웠다. 물욕 많고 성미 급한 위후다운 일이었다.

정자에 올라 난간에 걸터앉은 위후가 부채를 활짝 펴 얼굴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하나 싶더니, 다음 순간 부채 밖으로 보인 건 얼굴은 물론 체격까지 자그마한 미소년이었다.

“넌 이 얼굴을 더 좋아하지.”

처음 섬에서 만났을 때의 흰 원숭이가 취하고 있던 동자의 모습.

“인간의 어린아이는 귀엽지요. 하긴 어릴 때 귀엽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런 말을 하며 아직 나올 기미도 없는 제 아랫배를 쓸어 만지는 침아를 보고는 위후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네 새끼는 더없이 귀여울 거라 이거냐?”

“……제가 그걸 소리 내어 말했습니까?”

“말을 말자.”

부채를 소리 나게 접으며 위후는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동자의 모습이건만 뚜둑 뚜둑 뼈 맞추는 소리가 나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비파를 가지러 간 문복은 어디서 비파를 만들어 오는지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없다. 달이 아직 뜨지 않아 별만 가득 차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위후를 따라 침아도 말없이 밤하늘을 보았다.

하루, 하루가 피가 마르는 듯이 길게 느껴지더니 어느새 열흘이 지났다. 이제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을 들었다 생각하니 맥이 탁 풀리는 것도 같다. 난간에 등을 대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침아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하지만 대신 하품이 나왔다. 위후에게서 전염이라도 됐나 하며 입을 가리던 침아의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저 게으름뱅이, 하여간 동작 느린 것 하고는…….”

문복이 비파를 매고 날아오는 것을 본 위후가 흉을 보려고 침아를 돌아보았다가 자는 걸 발견했다. 문복이 정자에 다다랐을 땐 다시금 승냥이의 모습이 된 위후가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왔다.

“주무십니까?”

“보다시피 자고 있다.”

문복에게서 비파를 받은 위후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더니 아주 작은 소리로 비파를 뜯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어쩐지 파도소리를 연상케 해서 문복은 신기해하며 쳐다보았다.

“네 누님이 저리 불편하게 자는 게 안 보이느냐? 베개라도 가져와야지.”

“아, 그런 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말했다가 위후가 쏘아보자 입을 꾹 다물고 문복은 다시 열심히 저택으로 돌아갔다. 위후는 비파를 뜯으면서 전에 없이 자상한 미소로 침아를 쳐다보았다.

“그래, 아기야. 이제는 푹 자야지.”

당대 제일가는 비파의 명수라 해도 족할 위후의 자장가를 들으며 침아는 제 날개옷 속에서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잤다. 하지만 위후로선 난감하게도, 그가 의도한 파도소리에 가까운 음률은 침아를 빗소리가 들리는 꿈으로 데려갔다.

다시 그 밤. 보름의 밤이다.

열흘 내내,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겨우 잠들어도 그녀를 쫓아온 광경.

제 눈앞에서 료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침아는 비명을 지를 생각조차 못했다. 제대로 된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그냥 한순간 모든 게 먹이 되더니 평생 겪어본 그 어떤 것보다 지독한 고통이 몸을 휩쓸었다. 숨 쉬는 법을 잊고,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문득 멈추었으니 때로 큰 충격이 너무도 멀쩡하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어찌 일어나는지, 그때 침아는 알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료와 같은 날 같은 시에 죽는 줄 알았던 침아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또 하나의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 사이를 헤치고 날아온 새까만 이무기의 형상을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순 침아는 구름이 자신들에게 떨어져 내리는 줄 알고 소스라쳐 료를 덮으려 하며 마비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 이무기가 료를 데려가려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엔, 덤볐다. 그때 침아는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암흑의 덩어리가 이무기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새빨간 눈을 빛내는 검은 형체는 저승에서 찾아온 죽음의 신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못 데려간다고 발악을 하며 이무기에게 덤벼들었으나, 상대가 됐을 리 없다. 이무기는 그녀를 귀찮은 듯이 툭 머리로 친 것만으로도 배에서 얼마나 되는 곳까지 날려버렸다. 가까스로 물에 빠지기 전에 날아오른 침아가 또다시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다. 소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각다귀가 어떤 신세가 되던가? 이무기는 료를 물고 고개를 들면서 꼬리를 좌우로 움직였다. 거기에 언뜻 빗맞기만 해도 침아의 앞일은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바로 그때 “아신! 안 돼! 그 아이는 네 손자를 품고 있다니까! 그새 잊었나?”라면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이무기를 말렸다. 이무기의 동작이 멈칫하기 무섭게 그 목소리는 이내 침아에게 소리쳤다. “괜찮다, 이것아! 이 녀석이 데려가야 살릴 수 있어. 아니면 네 서방, 이대로 죽일 참이냐?”

침아가 황망히 돌아본 곳에 급한 숨을 몰아쉬며 물 위를 뛰어온 위후가 있었다. 그가 그녀를 붙들어 이무기에게서 떼어놓았다. 이무기는 날개도 없는데 하늘을 날아 남쪽으로 향했다.

“위후 님, 위후 님, 저것이, 료를, 료를 데려가요. 살려주세요, 위후 님, 료를 살려주세요. 위후 님이 오시면 틀림없이, 아, 저것, 저것이 어디로, 위후 님, 제발…….”

충격도 충격이고, 할 말도 터질 듯이 많아 어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침아를 꽉 붙든 채 위후는 천천히, 침착하게 말했다.

“잘 들어, 아기야. 살 거다. 저 작은도령, 앞날이 구만리라고. 이런 일로 죽을 것 같으냐? 너, 내가 남의 운명 가지고 허튼소리 하는 거 봤느냐?”

“하, 하지만…….”

“자, 보아라. 저기 날아가는 것을. 저게 무엇인지 아느냐?”

가까이에서는 너무 커다란 덩치에 뭔지 가늠조차 안 되던 것이 얼마쯤 멀어지자 그 형체가 보였다. 침아는 멍하니 “용……?”하고 중얼거렸다. 위후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용은 무슨. 이무기다. 날고 기어봤자 저놈도 아직 이무기라고.”

“이무기? 아, 이무기라면 료의 어머니 쪽 일족이라도…….”

퍼뜩 떠오른 대로 물었더니 위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비다. 저 도령 어미는 짐새였어. 당연하지 않으냐?”

뭐가 뭔지 그 순간에 침아더러 이해하라는 건 무리였다. 침아는 다만 저택으로 날아가는 검은 이무기를 보고, 위후를 보며 수십 번 확인했다.

“사는 거지요? 틀림없이 사는 거지요?”

“산다니까. 자, 슬쩍 지나가면서 어쩌고 있는지 보자꾸나.”

침아의 날개옷에서 깃털 하나를 잡아 뜯은 위후가 그것을 휙 하늘로 던졌고 그것이 팔랑이다 그들 앞에 내려왔을 땐 몇 백 배로 커진 깃털 양탄자가 되었다. 거기에 올라탄 둘이 저택의 하늘을 지나갔다. 그들은 불을 피우느라 우왕좌왕하는 저택의 낭속들을 보았다. 그들을 지휘하는 청작도.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있는 우송도. 그리고 시녀들의 부축에 의지해 간신히 버티고 서 있다가 하늘을 지나가는 묘한 것을 올려다보는 화산 노파도 보았다.

무엇보다, 이무기의 느슨한 똬리 속에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는 료를 보았다. 다시 침아의 울음이 터져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본 위후가 혀를 찼다.

“저 도령한테 필요한 건 불이지 물이 아니다. 기어코 네가 네 서방을 잡아먹을 참이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울지 않습니다. 안 울어요. 아, 아아, 료, 료…….”

양탄자가 더 나아가며 료의 모습이 멀어지자 침아가 손을 뻗으며 그대로 내려가려 했다. 날개가 있으니 잘못될 리야 없지만, 울지 않는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으니 별도리가 없었다. 위후는 그의 제자가 썩 잘 써먹는 기술의 원조를 보여주었다. 목덜미를 붙잡아 당기면서 혈 자리를 가볍게 짚어준 것만으로 침아가 축 늘어졌다. 그리 기절한 침아를 데리고 위후는 좀 더 멀리까지 간 뒤에야 다른 탈것을 골라 자리를 옮겼다.

위후의 대원산 저택에 거의 다 와갈 때 침아는 경기를 하듯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당장 료에게 돌아가겠다고 야단인 걸 말리느라 애 좀 먹었다. 또 기절시킬까 봐 경계하는 데다가 잠들라고 주술도 쓰고 향도 써 봤지만 집념이 강한 건지 내성이 생긴 건지, 날이 새기까지 몇 번이고 깨어나 달아날 시도를 하는 데에는 위후도 두 손 들었다.

결국 가둬놓고 모른 체하는 것으로 하루 나절을 보낸 뒤 조용해졌다기에 제풀에 지쳤나 싶어 아랫것들을 시켜 들여다보게 했다가 무슨 황소처럼 날뛰며 도망가는 걸 붙잡느라 한바탕 저택이 난리였다. 위후가 보다 못해 한마디로 정곡을 찔렀다.

“무슨 낯짝으로 네가 거길 가느냐?”

그 말이 어떤 주술보다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침아가 말을 잃은 것을 보고 위후는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 도령이 누구 때문에 그 꼴이 됐는데? 염치를 알아야지.”

일부러 더 신랄하게 한 말이다. 그 말도 여지없이 통했다. 침아는 넋 나간 듯이 멍해졌고 위후는 낭속들을 시켜 그녀를 다시 제 방으로 들여보냈다. 낭속들 열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지키는 가운데 대원산의 다른 곳은 다 멀쩡한데 위후의 저택을 포함한 일대에만 비가 왔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울지는 않았으나 그런 해괴한 날씨로 보아 그 속이 짐작이 갔다.

어쩔 수 없었다. 경거망동하기에는 침아의 몸도 좋지 않았다. 독주에 짐새의 피까지 삼켰으나 용케도 잘못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뱃속의 아이 덕분이었다. 아비처럼 독에 대한 내성이 있든지, 아니면 아신을 닮아 무시무시하게 생명력이 끈질긴 놈이든지 간에 형체도 아직 잡히지 않은 녀석치고는 큰일을 했다. 그런 힘이 지켜주었다고 해도 당장 멀쩡해지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침아는 무조건 쉬어야 했고, 위후는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들여보내는 음식이며 탕약은 먹어도, 비는 계속 내리고, 결국 침아가 앓아누웠다. 위후가 들여다보러 갈 때마다 침아의 눈은 더 짓물러 갔다. 물어보는 건 딱 하나, “료는 살아 있는 게 맞습니까?”였다.

살아 있다 뿐이냐, 아주 오래도 산다 하고 대답하는 것도 지쳐 한 번은 묻지도 않았는데 아들 둘에 딸 하나를 얻는다, 자식들끼리 싸우면 크게 다칠 일이 있으니 미리부터 조심시켜라 등등 별말을 다 했다. 도통 침아는 미더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말을 해준 뒷날엔 일어나 앉아 문복을 상대로 글공부를 시켰다. 다음날엔 방 앞마당에서 산책을 했고 그 뒤로는 새로 생긴 연못 근처까지 다녔다. 그리고 더는 료는 살아 있느냐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잠드는 무렵이면 여전히 저택 위로 안개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시간이 짧으니, 그녀의 잠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도 위후는 짐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료……. 료, 안 돼, 안 돼요……. 위후 님, 위후 님, 살려주세요.”

평온하게 잠들었다 싶었는데 금세 흐느껴 울며 몸을 떨고 있다. 위후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연못 수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둥근 원이 수없이 퍼졌다.

“이 녀석아. 난 비를 안 좋아한단 말이다.”

인상을 쓰며 위후는 침아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 손길에 진정이 된 침아가 다시 색색 고른 소리를 내며 잔다. 위후는 도로 난간에 올라타 연못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자다가 우는 게 버릇이 되게 생긴 아기를 어찌한다…….”

그때 연못 건너 하늘에서 갈지(之)자로 날면서 오는 시커먼 박쥐가 보였다. “또 비네, 또 비야.”라고 투덜대며 베개를 끙끙대며 들고 온 문복이 정자에 이르러 철퍼덕 주저앉았다. 위후의 눈이 빛났다.

“너, 네 누님한테 예쁨 받고 싶지?”

“이를 말입니까?”

“그럼 내 말을 들을 테냐?”

당장 말해 보라는 듯 문복이 작은 눈을 빛내며 쫑쫑 위후에게 뛰어왔다. 위후는 박쥐의 작은 귀를 잡아당겨 무어라, 무어라 속닥거렸다.

“문복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다음날 오전, 소세를 하러 나온 위후에게 침아가 그런 말을 하러 왔다.

“어디 가서 놀고 있는 모양이지. 돼지우리에 가봐라.”

“거기도 가보았습니다. 없어요.”

“어련히 알아서 돌아올까. 제 앞가림도 못하는 멍충이더냐.”

“……그러지 마시고, 한 번 찾아 주시면 안 될까요? 어린것인데.”

“글쎄, 온다니까. 내 힘이 그깟 박쥐 새끼 찾으려고 있는 줄 알아? 없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난리냐.”

“이틀 전 저녁에 보고 못 보았는데요.”

“그래? 흥. 그럼 오늘 저녁까진 오겠지. 그놈이 가봐야 어딜 간다고.”

그렇게 의뭉을 떨면서 위후는 모른 체하였다. 그날 오전엔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부산을 떨면서 침아를 돌아보지 않았더니 구석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결국 돌아갔다. 붙여둔 아랫것에게 들으니 혼자서 문복을 찾아 산을 훑는다 하였다. 아무리 찾아보았자, 이 산에 있을 리 없다. 위후는 짓궂게 웃으며 해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밤이 이슥해지고, 느지막이 저녁을 들고 있는 위후에게 다시 침아가 찾아왔다. 침아와 지내는 동안엔 혼자 나가 반나절 이상을 보낸 적이 없는 아이였다며 초조하게 찾아 달라고 빌었다. 위후는 못내 싫은 기색으로 저녁을 다 들고서야 간신히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주인찾기를 하자.”

문복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인 칠보 향갑을 가지고 가볍게 술법을 행했다. 침아도 나름 혼자 따라 해본 바 있지만 한 번도 통한 적 없는 술법이 눈 깜짝할 새에 효력을 보였다.

어딘가의 대숲이 보였다. 쏴아아 흩어지는 바람으로 대나무가 흔들리는 가운데 계속, 대나무만 한없이 보였다. 날아오르다가도 하늘로 못 가고 도로 떨어진다. 길도 보이지 않는 대숲을 우왕좌왕하는지 잠깐 보는 사이에도 이쪽까지 어지럼증이 들었다.

“왜 저러는 건지요?”

“멍청한 녀석이 결계에 딱 걸린 거지. 초대받지 않은 곳에 들어가려고 까불었던 모양이다.”

침아는 알 수 없다는 듯이 위후를 보고는 다시 흙비 너머의 풍경을 살폈다. 그러다 그녀는 둥근 식탁처럼 판판한 불그스름한 돌을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기는……!”

“아는 곳이냐?”

짐짓 모른 척 묻는 위후의 질문에 침아가 입술을 깨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문복이가 운몽산에 갔나 봅니다.”

“응? 거긴 뭣 하러? 네가 보냈느냐?”

“제가 어찌…….”

그녀가 어깨를 늘어뜨리자 위후가 부채를 탁탁 치며 하품을 했다. 흙비 내리던 풍경도 사라지고 향갑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들어갈 생각을 단념하면 결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게다. 그럼 돌아오겠지. 괜한 걱정 말고 그만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위후는 돌아서서 이제 일이나 할까 하고 크게 중얼거리며 서각으로 향했다.

침아는 향갑을 들어 흙먼지를 털다가 한숨을 쉬었다. 문복이 게까지 간 뜻이 얼추 짐작이 갔다. 그녀에게 칭찬을 바랐던 건지, 아니면 더 안심시켜주려고 그랬던 건지, 하여튼 료를 보러 간 것일 게다. 단순하지만 끈기 하나는 매서울 정도라 쉬 돌아올 성싶지 않았다.

“제가……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뒤쫓아 온 침아가 위후에게 허락을 구하여 말했을 때, 위후는 눈으로 웃고선 돌아보면서는 짜증을 냈다.

“거 알아서 돌아올 텐데 왜 그리 성화냐? 네가 그러니까 고것이 그리 어리광을 부리는 게야.”

그런 위후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 허락을 얻어 침아는 운몽산으로 떠났다. 그녀의 모습이 저택 위 하늘 너머로 사라진 뒤 위후는 시종을 시켜 새장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새장 안의 올빼미를 꺼내어 팔등에 올리고 쓰다듬어주다가 깃털 하나를 뽑았다. 시종에게 붓을 받아 그 깃털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깃털을 가지고 위후는 마당으로 나와 활도 없이 활을 당기는 시늉을 하였다. 얼굴이 찡그려지면서 왼쪽 팔뚝이 긴장하여 단단해졌다. 그러다 왼쪽 손에 쥐고 있던 깃털을 놓았을 때, 마치 화살의 현이 튕기는 듯이 ‘핑’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덮은 것은 위후의 외침이었다.

“아신!”

깃털이 쏘아놓은 살처럼 하늘로 쭉 뻗어 날아갔다. 그러다 문득 파란 불꽃에 휩싸여 아예 사라졌다.

확실히 보냈다. 위후는 씩 웃고는 중얼거렸다.

“그 녀석 엉덩이라도 맞추면 오죽 좋을꼬.”

깃털은, 향나무 아래서 느긋하게 졸고 있던 아신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가 땅에 꽂혔다. 눈을 뜬 아신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올빼미 깃을 보고선 아무렇지 않게 뽑아 서찰을 읽었다.

“귀찮게스리. 주제도 모르는 원숭이 놈.”

몸을 일으키는 신경질적인 움직임조차 따를 자 없이 우아한 그가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뒤로 남겨진 서찰은 어느새 한 줌의 재가 된 후였다.

침아는 날아가면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이나 산의 풍경, 들판의 풍경, 인가(人家) 등등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서둘렀다. 아직 기력이 맘 같지 않아 운몽산에 거의 이르렀을 때엔 숨이 차고 눈앞이 흔들렸다.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운몽산 대숲 속에 내려섰을 때 침아는 다시 움직일 힘을 낼 때까지 좀 쉬어야 했다.

드러누워서 하늘을 보다가 숨을 돌릴 만하자 아주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바람이 다 새는 어설픈 휘파람은 문복을 부르는 신호였다. 몇 번이나 그런 휘파람을 불고 침아는 눈을 감고 쉬었다.

이제 겨우 일어나 앉은 료에게 아신이 나가서 산보라도 하자고 찾아왔을 때 우송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들은 척은커녕, 아예 우송을 그 자리에 없는 놈 치면서 아신은 료에게 집 뒤에 있는 물 구경을 가자고 재차 말했다. 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히 나가신다면 제가 업고 가겠다는 우송의 말을 료도 무시했다. 다만 료는 우송의 어깨에 한 번 손을 올리며 괜찮다는 뜻을 보인 것이 달랐다 할 것이다.

둘이 방을 나갔다. 따라 나가는 우송의 면전에서 손조차 대지 않은 방문이 탁 닫혔다. 시커먼 뱀 녀석 짓이 틀림없어 우송은 핏대가 솟은 얼굴로 문을 열려 했으나, 이놈의 문이 찰싹 붙기라도 했는지 열릴 생각도 안 했다. 하다 하다 발로 찼는데 뭔 놈의 창호지 바른 문이 무쇠철판처럼 끄떡도 없다.

작은 창문으로 나가려고 했다가 몸이 낀 우송이 누구 없냐고 소리치는 동안 아신은 료를 데리고 유유히 세우지로 향했다.

“생긴 게 퍽 수더분한 산인데 용케도 여태 저택을 두고 사는구나.”

세우지에서 저택 쪽을 건너다보며 아신이 말했다.

“하지만 지세가 별 볼 일 없다. 수명은 채우고 살지 몰라도 영달할 준재가 나오긴 힘들어. 나라면 다른 곳에 거처를 구하겠다.”

료는 아무래도 관심 없다는 눈으로 세우지의 물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보다 까맣게 흔들리는 못에 비친 가느다란 달이 구름에 숨었다 나오길 반복했다.

아신은 그런 료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나랑 함께 떠날 테냐?”

료가 천천히 아신을 돌아보았다. 눈이 있으니 그도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과 참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안다. 휘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들었던 그 말의 뜻을 다시 깨닫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제 아비를 닮았겠군. 밉살스러운 것.

이 자가 아비라면, 죽었다는 어미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는 섬이라는 누이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먹먹한 머리로도 가능했다.

이렇다 할 감상은 없었다. 그저, 아, 그랬던가― 하고 말았다. 모르고 지낸 세월에 특별한 회한 따위도 없었다. 진짜 아비를 만나고, 그 아비가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들었다고 해도 복받치는 무엇도 없다.

머리도, 가슴도 예전과는 다른 것 같다. 그냥 다 시들했다. 깨어 있을 때에도 항상 졸음에 겨운 듯이 무기력한 것은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뭔가가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다만 되찾을 방법이 없을 뿐.

“떠나 보았자, 하늘 아래고 땅 위가 아닙니까. 시시합니다.”

료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자 아신이 웃었다.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네가 얼마나 작은지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천지를 입에 담느냐?”

“어렴풋이 압니다. 천지에게 있어 제가 당랑(螳螂)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불경스러운 말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천지가 보복하려 들지는 않을 겁니다.”

달려드는 수레를 제 앞발로 멈추고자 한 사마귀도 되지 못한다는 자조. 아신이 물었다.

“멈출 수레라도 네게 있긴 하느냐?”

료는 침묵했다. 아신이 손을 뻗어 한 번 끌어올리는 시늉을 하자 세우지의 물이 쏴아아 소리를 내며 한 길 높이로 일어섰다. 느닷없이 공중에 물의 섬이 생기고 물을 빼앗긴 생물들은 마른자리에서 영문을 몰라 퍼덕이느라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가련한 무리들을 웃으며 들여다보던 아신이 료에게 말했다.

“날 따라오면, 그리 오래지 않아 천지라는 수레를 버티는 당랑 정도는 되게 해주마.”

그러니 자신을 따라오라 하는 유혹에 가까운 권유였다. 물을 솟아오르게 하여 형체까지 유지하는 술법은 신기했으나 료의 눈이 얼마간이라도 빛난 것은 그 실력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다른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침아가 저것을 보았다면 얼마나 놀랐을까. 그 아이라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자에게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졸랐을까.

문득 료는 자신의 왼편을 돌아보았다. 거기를 늘 제자리로 삼아 서 있던 침아가 이젠 없다.

“이런 거창한 일을 하실 줄 안다면 단조 몇 마리 불러오는 것은 더 쉬우시겠지요.”

덤덤한 료의 말에 아신은 조금 미간을 찡그리며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세우지는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대신 일대에 해일이라도 난 듯이 물보라가 떨어져 세우지를 둘러싼 나무들이 멱을 감았을 따름이다. 그 와중에도 젖은 곳 하나 없이 멀끔한 두 사내가 있는 곳에 점점이 희미한 불빛이 생겨났다. 어둠을 갈라낸 틈 사이로 반딧불이가 춤을 추며 나타났다. 처음 몇 마리가, 이내 수십 마리로, 그치란 소리가 없으니 아예 수백으로 번졌다.

한동안 세우지 위로 퍼져나가는 빛의 무리를 바라보던 료가 내민 손끝에 반딧불이 하나가 와서 앉았다. 바르르 바르르 엉덩이를 흔들 때마다 불빛이 반짝거렸다. 료가 희미하게 웃었다.

“원하는 게, 계집뿐이야?”

한심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신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미소 지으며 붉은 혀를 놀렸다.

“갖게 해주마. 그러다 질리면 나한테 오렴.”

료가 고개를 돌렸다. 비로소 아신의 눈을 제대로 보았다. 아신은 눈을 마주한 이상 이 어린아이를 현혹시키는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갖게 해주마. 다 끝나고, 내게 오는 거다. 아이야.”

료가 빙그레 웃었다.

“살려주신 걸로 이미 충분합니다. 아버님.”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제 손 위의 반딧불이를 응시한다.

아신의 눈이 커졌다. 이내 그가 놀랍도록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피를 받은 아이가, 아무렴 반편일 리가 없지 하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침아는 보았다. 아신이 아이의 마음을 꾀려고 보인 물 묘기가 일으킨 큰 굉음이 그녀를 깨워 불러들였던 것이다. 별빛, 거기에 반딧불이의 빛을 반사해내며 은빛으로 일렁이는 세우지 물빛이 아롱거리는 료의 얼굴을 침아는 자귀나무 뒤에 숨어 바라보았다.

그저 그가 살아서 웃고, 말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침아의 마음이 한없이 다사로워졌다. 온 세상의 행복을 저 혼자 독차지한 듯이 벅차서 이윽고 그녀의 시야에서 료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게 될 때에도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누님.”

“쉿.”

무어라 말하려 하는 문복의 입을 틀어막으며 침아는 그의 모습이 아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지, 하고 속으로 거듭 되뇌며.

그가 가버리고 난 한참 후 침아는 세우지 앞으로 나왔다. 반딧불이 속에서 그녀는 춤을 추었다. 그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기쁨이 가슴에서 넘쳐났다. 피곤조차 모르며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금가루를 뿌린 듯, 은가루를 입힌 듯 화사하고 그 미소는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야명주가 달빛에 반짝이는 것보다 고우니 설사 정말 항아라 해도 이런 밤에는 달 속에 숨어 제 모습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

“고맙구나, 문복아. 네 덕분이다.”

“하지만…….”

“이젠 됐어. 다 됐어. 그러니 돌아가자.”

먼저 날아오른 침아를 따라 문복이 날개를 펼쳐 파닥파닥 비행을 했다. 세우지의 물이 멀어지고 저택이 멀어진다. 문복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문득 제 날개 속에 붙어 반짝거리는 반딧불이 하나를 보았다.

“응? 으응?”

여러모로 떨쳐내려고 애써봤으나 이 작은놈은 강했다. 그러는 사이 침아는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다 보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하며 문복은 침아를 따라가려고 열심히 작은 날개를 움직였다.

아직 남쪽 하늘에 걸려 있는 기름한 달이 새하얀 새와 작은 박쥐를 따라갔다.

결국 문복은 대원산 저택까지 제 힘으로 못 날고 창피하지만 침아의 품에 안겨 갔다. 안 자려고 했는데, 자 버렸다. 문복은 아직 서른 살도 못 된 아기라서 말이다. 많이 자야, 얼른 큰다. 침아도 그리 말해준 적이 있으니 자는 건 창피하지 않다.

희붐히 동이 틀 무렵 대원산에 다다른 침아는 저택에 들기 전에 샘이 있는 곳에 내려서 목을 축였다. 목마름이 가시자 허기가 말도 못하게 찾아왔다. 이 근처에 수국이 어디 있었는데 하고 찾다가 이제야 좀 무겁게 느껴지는 문복을 살며시 품에서 떼어 놓았다. 그때 문복의 품에서 반딧불이가 날아올랐다.

“어머.”

침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자 반딧불이가 손가락 끝에 앉았다. 꼬물꼬물 손가락을 타고 손등으로 기어가는 모습에 빙긋 웃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설마 거기서 예까지 따라온 거니? 굉장하구나.”

팔등으로 기어오르다가 부르르 날개를 펼치며 반딧불이가 그녀의 어깨에 앉았다. 더는 움직이지 않는 반딧불이를 보고 침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수국을 찾아냈다. 자고 있는 문복을 남겨놓고서 침아는 수국을 향해 뛰었다. 청보라색 수국꽃 중에 싱싱하게 이슬을 머금은 것 위에 반딧불이를 내려놓았다.

“피곤하지? 너도 목 좀 축이고 푹 자렴. 이 근처 멀지 않은 곳에 연못도 있단다. 거기에 네 친구들이 꽤 살아. 이따 저녁에 가서 짝을 찾으렴.”

상냥한 말에 이어 꽃을 들여다보면서 침아는 저 먹을 꽃을 꺾었다. 품에 그득하도록 꺾은 꽃이 너무 많다 싶었던지 수국을 향해 말했다.

“미안해. 내가 둘 몫을 먹어야 하거든. 대신 내가 틈나는 대로 남은 한약재 모아다가 네 거름으로 줄게. 우울해하면 안 돼. 아직 남은 꽃도 많잖아. 그리고 네가 진짜 맛있어서 먹는 거니까. 우리 아기도 너 닮아서 예뻐질 거야. 음. 이건 위로가 안 되려나.”

머쓱하게 코를 찡긋하고는 돌아서서 타닥타닥 뛰어갔다. 자고 있는 문복을 물동이처럼 제 머리에 이고 침아는 꽃을 먹으며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수국에서 쉬라고 했던 반딧불이가 그 뒤를 따라가다가 저택 안, 그녀가 머무는 방 앞마당에 있는 나무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잠시 후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꼼짝없이 죽은 것처럼 보이던 그 반딧불이는 한참 있다가 바람이 일자 다시 몸을 뒤집더니 여기가 어디지 하고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땅에서 맴을 돌았다. 그러다 마음을 정했는지 훌쩍 날아갔다. 침아가 말했던 연못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믐날 밤의 일이다. 모처럼 일찍 잠들었던 화산 노파는 잠결에 누군가 근처를 서성이는 기척을 느껴 눈을 떴다. 어둑한 방 안은 고요했으나, 침상을 두르고 있는 휘장이 바람이라도 분 듯 흔들렸다. 창이 열려 있나 싶어 휘장을 걷어 쳐다보니 실제로 얼마쯤 열린 창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 애들하고는.”

문단속을 건성으로 하고 간 시녀의 일에 혀를 차며 침상에서 내려서려는데 가까이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내가 열었어. 난 더운 게 싫어서.”

깜짝 놀라 돌아본 곳에 아신이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여지 열매를 들어 던졌다 받는 손장난을 치면서 그가 놀라서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는 화산 노파에게 말했다.

“그만 가볼까 하고. 인사를 하고 다니는 건 내 방식이 아닌데, 이번은 예외로 했네. 뭘 그리 놀라? 애들도 아니고.”

애들도 아닌 화산 노파를 애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사내가 말은 잘한다. 틀림없이 저 사내, 뱀 중에서도 성질 고약한 능구렁이일 거라 생각하면서 화산 노파는 표정을 수습했다.

“가시겠다고요. 료에게 아직 이렇다 할…….”

“아, 그 녀석 일이라면 걱정 마. 이미 알아. 내가 제 아비인걸.”

어느 틈에 말하였나 하며 화산 노파는 미간에 수심을 띄웠다. 잠들기 전에 들여다보았을 때에도 료는 다른 내색은 없었다. 우울하고, 말수 없는 예전의 료로 돌아간 듯이.

“나도 아니야. 자네도 아니고 나도 아니니, 저 스스로 알았겠지. 그렇지 않을까 했어. 그 정도 머리도 없으면 내 새끼가 아니지.”

우쭐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리 생각하는 사내였다. 여지를 깨물며 아신은 그 즙을 자못 달다는 듯이 핥았다.

“이십 년 전에 데려가지 않은 게 잘한 일이지. 나는 애 키우는 재주는 없어서. 이제는 컸다고 따라나서질 않으니 아쉬운 건지, 뭔지.”

“이십 년 전에, 이미 료를 보신 것입니까?”

“자식이 하나 더 있거든. 딸인데 장난이 심해. 그 녀석 생각이 언뜻 나서 오랜만에 반도에 건너왔다가 이쪽에서 묘하게 당기는 게 있어서. 죽은 줄 알았던 새끼가 살아 있으니 신기하긴 한데 너무 어리더라고. 어미도 어렸었고, 그나마 난산으로 죽었으니 애가 약한 것이야 도리가 없지.”

여지 씨를 뱉고 즙이 묻은 손을 깨끗하게 할짝거린 아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섬이 생각이 나서 화산 노파는 가슴 속에 격한 감정이 일었다. 그 어린것에게 이 사내는 과연 얼마나 진심이 있었을까?

“또 깜박 잊기 전에 만났으면 하였더니, 이런 기회가 생겼지. 제법 마음에 들어. 잘 키워주어 고맙네.”

활짝 웃는 사내의 미소에도 화산 노파는 못내 불쾌했다. 이번 경우 같은 일을 ‘기회’라 부르는 그 머릿속이 의심스럽다. 그 승냥이도 그렇고, 이 사내도 상종을 하기엔 껄끄럽기 매한가지였다. 승냥이에게 추궁했을 때엔 모르쇠로 나왔으나, 이 사내라면 다를지 모른다 싶어 화산 노파는 용기를 내었다.

“위후란 자가 이런 기회가 있다고 알려주었던 모양이지요?”

아신은 웃었다. 유도신문임을 뻔히 알면서 놀리듯이 넘어가 주었다.

“백 년에 한 번씩 만나서 바둑을 두는데, 마침 내가 이기고 안 받은 빚이 있었거든.”

백 년에 한 번씩 두는 바둑이라. 화산 노파는 순전히 궁금하여 물었다.

“그 바둑 몇 번이나 두셨습니까?”

“왜? 자네도 끼려고? 다음에 둘 때 한 번 불러주지.”

슥 문간을 향해 발소리도 없이 걸어가던 아신이 문득 고개를 돌려 말했다.

“참 료에게 내 주술은 통하질 않아. 아무래도 내 새끼라 그런 것 같아.”

“그 말씀은…….”

“억지로 하려고 들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기껏 몇 십 년쯤 그 고획조 일을 잊는다고 해봤자, 위후가 그러는데 어차피……. 됐어. 내가 떠들 일도 아니지.”

문을 열면서 아신은 아주 화사한 미소를 화산 노파에게 지었다.

“자네가 그 애한테 붙여준 이름이 마음에 들어. 료. 내 딸 이름이 란이거든. 남매란 느낌이 들지 않나?”

거기에 대한 화산 노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신은 문을 닫고 나갔다. 화산 노파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급히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더니 거기에 누가 있었냐 싶게 뜰은 이미 괴괴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사내였다고 생각하면서 화산 노파는 잠자리에 들었다. 전전반측하다가 겨우 잠이 든다 싶은 즈음, 아주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깼다.

“누구냐?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이를 보고 화산 노파는 휘장을 걷으며 놀라 물었다.

“료. 무슨 일이냐?”

비도 내리지 않는데 흠뻑 젖어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들어온 료는 푸른빛으로 변한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음력 유월 초이튿날 오후, 위후의 저택 앞에 낯선 유벽거가 멈추었다. 붉은 수레에 앞서 말을 타고 온 두 명의 사내가 있었는데 그중 한쪽을 보고 승냥이들은 털을 치켜세우며 이를 드러냈다. 체격을 줄였어도 우송의 이목구비는 그대로였으니 못 알아볼 리 없다. 우송도 만만찮은 기운을 내뿜으며 창을 꼬나드는 것을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사내가 만류하고는 문지기 중 하나에게 명자를 내밀었다.

“주인을 뵙고자 하오만. 나는 운몽산 저택을 관리하는 청작이라 하네.”

“수레에는 뉘가 계시오?”

문지기의 질문에 우송이 수레의 발을 걷어 안을 보였다.

“보다시피 빈 수레이오,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문지기와 우송의 주고받는 눈길에 불꽃이 튀었다. 청작은 한숨을 쉬며 이 더벅머리에게 가재(家宰) 노릇은 당분간 무리라고 분명하게 결론 내렸다.

일가가 모두 새인 운몽산 식솔들과 달리, 일가가 거의 모두 네발짐승인 대원산 저택에서 말은 더 빨리 퍼졌다. 아마도 주인의 성향을 따라가는 것일 게다.

서책을 보면서 나름 태교에 힘쓰고 있던 침아에게 차를 올리러 온 어린 시녀가 색다른 손님 이야기를 한 것은 우송 일행이 저택 대문 앞에 이른 후 일각이 넘었을까 말까 한 때였다.

“손님?”

연꽃차를 반갑게 마시는 침아에게 시녀는 우선 아주 고운 수레에 대한 묘사를 장광설로 늘어놓다가 한참 후에 찾아온 손님들의 정체에 대해 말했다.

“그러니까 오신 분들이 저기 남쪽 운몽산에서 오셨다 하더군요. 험상궂게 생긴 사내는 모르겠고, 다른 나이 지긋한 남자는 이름이 청작이라고 했답니다. 보고 온 이들이 다, 그자는 매가 틀림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겼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매인 줄 아는 걸까요? 어머, 아씨. 어디 가시게요?”

“내 잠시 바람을 좀……. 아, 문복이가 오면 연못 쪽으로 오라고 말 좀…….”

말도 채 다 못 맺고 침아는 허둥지둥 나서다가 다시 들어와 자신의 날개옷을 챙겨 나갔다. 그리고 서둘러 저택을 돌아 뒷동산에 있는 연못 쪽으로 걷다가, 이내 뛰었다.

운몽산에서 료를 보고 온 후로 침아는 날개옷을 벗어두었다. 밴 새끼가 짐새가 아니라 하니 죽을 걱정도 없고 해 서둘러 아이를 낳고 싶어서였다. 고획조가 되어서는 인간의 몸으로 일 년 걸릴 일도 수십 년은 우습다. 생의 주기가 확연히 느려지기 때문이다. 날개옷을 벗으면 그만큼 빨리 나이를 먹게 된다는 위험이 있지만 료를 대신해 아이라도 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해산할 때가 가까워지면 섬으로 들어가기로 말도 해놓았다. 천적으로부터 아이도 보호하고 몇 십 년 지내면서 위후에게 날개옷도 서너 벌쯤 더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침아는 제 새끼를 키우고, 위후는 적당한 인간을 골라 고획조의 대가 끊이지 않게 한다. 이를테면 상생 전략이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아주 명료했던 그 미래의 계획이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들 이야기에 사뭇 불안해졌다. 수레가 왔다 하는데, 또 화산 노파인가? 이제 다시 볼일 없다고 못을 박고 갔건만. 어쩌면 운몽산에 머문다는 료의 아비인가?

혹, 아이를 내놓으라 할까? 위후에게 듣자니, 료의 진짜 아비라는 이무기는 그가 만나본 가장 제멋대로의 종자라 하였다.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 유치한 질문을 했더니 그 콧대 높은 위후가 딱 잘라 말했다. 내가 진다. 다만 내 목숨은 건질 자신 있다. 그러면서 그 녀석이 진심으로 뺏으려 한다면 네가 고획조가 아니라 옥황상제 딸이라고 해도 애는 단념하는 게 좋다며 겁을 주었다.

“아아, 어쩌나.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구나.”

무조건 멀리 날아가 볼까 하다가 어차피 위후조차 이기지 못한다는 상대를 내가 무슨 수로 피하나 싶어 맥이 탁 풀렸다. 이미 마음속에선 저택을 찾은 자가 그 검은 이무기라고 여기는 것이다. 심장이 몹시도 크게 뛰는 것도 아무래도 불길한 징조처럼 여겨져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쩌나. 어쩌나.”

그 소리만 되풀이하며 연못가를 바장거렸다. 지킬 거라곤 자신의 목숨 하나고, 그마저도 인간치고 이만큼 살았으니 됐지 않냐며 가벼이 여기던 전과 달리 이제 침아는 지켜야 할 것을 품고 있어 아주 겁쟁이가 되었다. 한 번 생각한 것을 추진하는 데에도 나쁜 가능성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고, 또 일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도 그녀의 뜻대로라 내게 사뭇 냉철한 구석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것은 아득한 옛날 일 같다.

“아니지. 위후 님께서 우리 아기 퍽 대단한 걸물이 된다고 했으니 무슨 나쁜 일이야 있을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하다가 또 금세 창백해져선 얼굴을 감쌌다.

“내 아기를 뺏어가서 대단한 걸물로 키운다는 소리였나? 물론 그 이무기, 진짜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연못 가장자리에 웅크려 앉아 침아는 며칠 전부터 꽃을 틔워 화사해진 연못을 우울하게 들여다보았다. 연잎에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 얼마 후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 해가 쨍쨍히 나고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온다.

“이 근처에서 여우가 시집가는 걸까.”

가만히 중얼거리고 침아는 돌 하나를 들어 연못에 던졌다.

“정말이라면 신랑 신부 잘 사세요.”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비가 오는 걸 느껴 물 밖으로 기어 나와 울 준비를 하던 개구리들이 무언가에 겁을 집어먹고 슬그머니 다시 물속으로 달아나는 것을 침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침아의 가까이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녀의 바로 옆으로 떨어졌지만 그것도 몰랐다. 문득, 바스락하고 작은 나뭇가지가 밟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문복이니?”

돌아보던 침아는 역광을 받아 부옇게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그만 털썩 뒤로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까만 옷을 입은 누군가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걸음을 떼어 다가오지만, 거의 소리라고는 나지 않았다. 방금 전의 소리는 일부러 낸 것이 아니었을까.

침아는 불현듯 눈을 깜박거렸고 이내 머리를 젓기도 하고 눈도 비볐다. 자신이 하도 보고 싶어서 착각을 하는 거라 여겼다. 어쩌면 눈앞에 있는 자는 료의 아비라는 그자일 수도 있다. 운몽산에 가서 본 부자는 그 정도로 닮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올려다본 남자의 모습은 그였다.

“료……!”

중얼거렸지만 거의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침아의 입 안에서 삼켜지다시피 한 그 부름에 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침아야.”

“료?”

이번엔 아주 작은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료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한 걸음 더 다가서 그녀의 신발 끝에 그의 신이 닿았다. 료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왔어.”

깊어진 눈빛만큼이나, 나직하게 들려와 그녀의 온 정신을 흔들어 놓는 그의 목소리에 침아의 머릿속은 아주 새하얘져 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했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움직였으나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

“료.”

료가 웃었다. 착 가라앉은 듯이 보이던 말간 눈이 일순 동요하며 크게 일렁거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고 잠시 후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리러 왔어.”

눈앞에 내밀어진 하얀 손을 보며 땅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그녀의 오른손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잡고 싶었다. 언젠가의 그 날처럼. 데리러 온 그의 품에 안겨 떠나고 싶었다.

손은 얼마쯤 공중으로 떴으나 다시 툭하고, 땅에 떨어졌다. 마치 그 손이 저 혼자 멋대로 움직일까 걱정하는 듯이 침아는 아예 손을 등 뒤로 감추고 고개를 숙이고서 몇 번이나 입술을 들썩인 끝에 말했다.

“안 가요.”

“왜?”

그처럼 곤혹스러운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환한 하늘 아래 여전히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침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당신에게 나쁜 짓을 했어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 거면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요. 정말 나쁜 짓이니까. 그래서 나는 벌을 받아야 해. 당신이랑은 못 가요.”

“내가 밉니?”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을!”

당황하여 그를 보는 침아에게 료가 아직도 손을 내민 채로 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벌을 주는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침아는 나쁜 여자니까 당신 곁에 있어선 안 되는 거예요. 당신은 훨씬 좋은 여자를 만나서…….”

“또 그 소리.”

소리는 치지 않았지만, 료는 진저리를 내며 그녀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까칠하게 여위어 한층 날카로워진 눈매 안의 까만 눈동자가 불현듯 제 본래의 심홍의 빛깔로 뒤덮였다.

“내가 살아 있었던 건 너와 함께 한 4년뿐이었다는 말, 벌써 잊었어?”

침아는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그 보름밤에 한 말이 아니던가. 료는 잊지 않았다. 번번이 실패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주술도, 화산 노파의 노력도.

“……나 때문에 심장을 찌르는 어리석은 짓까지 했으면 됐잖아요. 죽다 살아났으면서, 왜 또 여기까지 와요. 나 같은 게 뭐라고.”

그녀의 탄식에 료가 웃었다. 그가 옷깃을 열어 자신의 가슴을 보여주었다. 왼쪽 가슴에 선명하게 생긴 흉터는, 얄궂은 농담같이도 꽃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자석영 머리꽂이의 꽃모양을 띈 돌이 살에 깊게 박히면서 그런 자국을 낸 것이다.

“보렴, 침아야. 여기에 네가 있다. 너는 꽃을 먹으며 살고, 나는 너라는 꽃과 함께 하는 세월을 먹으며 살련다. 죽다 살아났으면서 왜 왔느냐 물었느냐? 더욱 선명해졌거든. 내가 살아야 할 이유. 내가 되살아난 건, 너랑 오래오래 살라는 하늘의 뜻이야.”

다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자. 너를 태우고 갈 어여쁜 수레도 가져왔어. 안에 꽃을 채워 놓았단다. 보고 싶지 않으냐?”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눈빛이 깊어졌어도 여전히 료는 료였다. 침아에게만은 한없이 상냥할 수 있는 아주, 아주 좋은 사내.

침아는 웃었다. 료가 그런 일을 겪고서도 여전히 순수한 그대로인 것이 신기하고 기뻐서. 하지만 여전히 보름날 밤과 같은 이유가 그녀에겐 존재했다. 고개를 저었다. 울지 않으려고 가슴을 움켜쥐고 안간힘을 썼다.

“미안해요. 정말로 예쁠 테지만, 봐선 안 돼요. 나는 못 가요.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가요. 못 가요. 나는 못 가요. 나는…….”

결국 빗물을 빌려 눈물을 감추려 하는 침아의 얼굴을 료가 감쌌다. 기분 좋은 차가운 손에 침아는 바르르 떨었지만 내색치 않으려고 가슴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료의 눈이 일그러졌다. 노여운 게 아니라 한탄의 뜻이었다.

“바보 같기는. 내가 그렇게 미덥지 않았느냐? 네가 아이를 가졌다 하면 내가 기뻐할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게야?”

소스라쳐서 그를 쳐다보는 침아의 놀란 눈에 떠오른 것은 실로 두려움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아, 이젠 어쩌나 하는 마음속 말과 함께 침아가 속삭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내가 품은 아이는 짐새가 아니래요.”

료는 잠시 말을 잃고 그녀의 얼굴만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아기처럼 부드럽게 대해 주리라 오는 길 내내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그렇게 만지는 사이에 격정에 휘말려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뜨거운 몸을 마침내 품에 안자 꽃의 낙인이 남은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너만 거짓말을 한 줄 아느냐? 나도 했다. 너는 인간이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너와 나 사이에 아이가 있는 꿈을 꾸었어. 태어날 아이가 짐새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고, 이무기가 될 수도, 아예 나처럼 묘한 형질이 될 수도 있었다. 넷 중 둘이 널 죽게 할 수 있으니 그것으로 단념해야지 한 거야. 그러면서도 너 내게 애원하였을 때, 못 이긴 척 그 뜻을 들어준 내 음험함을 아느냐? 어쩌면, 혹시 어쩌면 하고 기대한 내 못된 마음을 너도 몰랐지 않으냐. 네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날개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는데 너는 그것밖에 생각지 않았구나! 혼자서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이 답답이 같으니라고…….”

침아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 그녀는 가슴에 한으로 남을 뻔한 말을 쏟아냈다.

“당신이 원한 것처럼 당당한 짐새로 클 아이를 낳고 싶었어요. 나중에, 지금의 일이 다 옛날이야기가 될 나중이 오면 당신에게 보내서 기쁘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때라도 나도 당신을 진정으로 연모했다고 전하면, 그것으로 난 족하다고……. 그렇지만 품게 된 아이는……서글프게도 날개는커녕…….”

“쉿. 아이가 듣겠다.”

깜짝 놀라 료가 그녀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침아에게 료가 말했다.

“네가 건강하게 해산만 한다면 아이가 설사 발이 백 개가 달린 지네처럼 생겼다 해도 나는 얼마든지 귀엽게 여길 것이야.”

이번엔 침아가 질겁하여 료의 입을 덮었다.

“안 돼요, 방금 말은 실수예요, 해님, 달님, 천지신령님, 다 귀를 씻으세요. 예쁜 아이를 주셔요. 저 말고 이분 닮은 예쁜 아이를 주셔요.”

그렇게 사방을 돌아보며 빈 다음에 료를 밀쳐내며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태교 중인데 느닷없이 오셔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가셔요, 이미 애는 품었으니 옆에 안 계셔도 낳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낳으면 기별은 할 터이니 그때 멀쩡한 애를 보러 오든지 말든지…….”

순식간에 성질 괄괄한 말괄량이로 돌변한 침아 때문에 료는 잠시 얼떨떨했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기 시작했고 곧 호탕하게 웃으면서 침아를 제 품으로 붙잡아 당겼다. 침아도 웃고 싶었으나 눈물이 너무 나서 그의 품에 파고들어 얼굴을 숨겼다. 그대로 둘은 뒤로 쓰러지듯 누웠다. 료는 침아를 꼭 껴안았다가 얼굴을 들여다보고 다시 꼭 껴안았다가 얼굴을 쳐다보길 수십 번쯤 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라.”

침아의 울음소리가 겨우겨우 잦아들었을 때에 료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침아가 퍼뜩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앞으로 절대, 거짓말 같은 건 안 하겠어요.”

제 발이 저려 그렇게 맹세를 하는 것에 료가 웃었다.

“그건 당연하고.”

“그럼……. 아, 상냥한 부인이 될게요. 나 사실 몹시 착해요. 완아는 절더러 아주 순하다고도 했어요. 내 동생이 한 말이니까 맞는 말이에요.”

또 제 발이 저려서 나오는 약조. 료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그건 기대해 보마.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거야.”

“무엇을 바라는 데요? 말만 해요, 내 다 들어줄게.”

“날 위한다는 이유로, 내게 비밀 같은 걸 만들지 마라. 그 이유를 알게 된 후에도, 그건 너무도 쓸쓸한 일이야.”

침아는 물끄러미 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심홍색으로 반짝이는 눈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에 젖은 그의 이마에 침아가 입술을 댔다.

“약속할게요. 다시는 안 그래. 다시는 당신 쓸쓸하게 안 해요.”

“정말 믿어도 되느냐?”

료가 의심하는 척하자 침아는 큰 눈을 어쩔 줄 모르는 듯 깜박거리다가 그의 입술에 입 맞추고 그를 꼭 껴안았다.

“지켜봐요. 내 평생이 걸려도 증명할게요.”

따뜻한 온기와 향긋한 체취, 더없이 좋은 감촉을 지닌 제 여자를 흠뻑 안는 료의 눈가에 이슬이 배었다.

“그 평생, 너무 길다고 불평해도 나는 모른다.”

다시금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침아는 웃음으로 터뜨렸다. 침아의 웃음소리가 구슬처럼 잘게 부서졌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음률을 료는 알지 못한다.

한여름 속에서, 사내는 다시금 온 세상이 제 것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이윽고 붉은 수레가 출발했다.

여우비 내리는 길을, 수레는 나는 듯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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