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정사(情死)
낙조(落照)가 졌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빛이 짙어지는 하늘의 핏기는 마치 갓 물들인 치맛자락을 크게 펼쳐놓은 것만 같아 한없이 귀 기울이면 똑, 똑 어딘가에 붉은 물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성싶었다.
침아에게는 들렸다. 스산하게 바람이 일곤 하는 가슴에 이따금 떨어지는 물소리가.
그럴 때면 생각했다. 지금, 멀리 있는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지 않았는가 하고.
자신이 너무도 보잘것없는 존재라 느껴져 문득 탄식했다. 저 너른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큰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생명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미안해하는 생명이 이 순간, 어찌 그녀 하나뿐이랴.
별것 아니다. 별것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세계에서는, 보잘것없는 온 목숨을 다해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란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다. 해버린 짓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한다.
그 후회에서 일어나기 위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 온통 흐릿한 안개의 저편을 바라보는 것 같은 일이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있었다.
“용서를 빌어야 해.”
땅거미가 지고, 어스름이 찾아온 수이산에 바람이 불었다. 종일 곰발바위에 나앉아 있었던 침아의 몸이 그 미풍에도 위태로이 흔들렸다. 물 말고 제대로 된 무언가를 먹은 게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반딧불이의 꿈을 통해 료를 엿볼 때면 하루가 다르게 창백해져가는 그의 모습에 허기조차 느낄 수 없었으니까.
어제 오랫동안 별러왔던 일을 벌여놓고 먹었던 꽃 몇 줌은 아마도 눈물이 되어 다 휘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을 먹고 말고 할 의욕은 없다. 지금 같아선 살아 있는 것조차 싫증난다. 이대로 어딘가 깊고 어두운 곳에 틀어박혀 오래오래 잠이나 잤으면 싶다.
하지만 마침내 달이 뜨는 것을 보면서 침아는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일이 아니라고 자신을 추슬렀다. 먼 길을 가야 한다. 날개옷 없이.
일어서려다가, 어찔어찔 현기증이 핑 돌아 도로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이마를 짚고 입술을 축이려다가 이미 입 안도 바짝 말라 혀가 타는 듯이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엎드린 채로 침아는 실성한 듯 웃었다.
“계집의 꼴이 그게 무어냐?”
뜬금없는 핀잔의 소리에 침아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반딧불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미 머리에 이어 가슴까지 모습을 드러낸 위후―오늘은 저 좋아하는 대로 승냥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얼마 후 완성된 손을 들어 부채질을 했다. 오늘 그 부채엔 커다란 붉은 새가 그려져 있다.
“남쪽은 덥구나.”
당연한 감상에 이어 그녀를 본 위후는 부채를 휘휘 저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꼴 좀 보란 말이다. 머리는 산발을 해가지고, 옷차림은 또 그게 무어냐? 한 사흘 피죽도 못 먹었느냐?”
“……그리 걱정이 되십니까?”
반가움에 침아는 웃었다. 비록 그는 타산적인 관계라 여기는지 몰라도, 막막하던 차에 보게 된 위후의 얼굴에 침아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옛날, 자신을 거둬준 그 여자에 대한 기분과도 얼마쯤 닮은 감정이다. 다만 그의 그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기분이 저 멀리 어둠 속으로 달아난다.
“내가 널 걱정할 정도로만 살아보던가.”
다리에 이어 발까지 완성된 위후가 침아의 무릎께를 툭, 걷어찼다.
“내가 피까지 주어서 살려놓은 걸 잊은 건 아니지? 내 피는 비싸. 소중해.”
“황감하게 생각하고 있다지요.”
“황감이고 나발이고, 실질적인 무언가로 갚을 생각을 해! 누구는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느냐?”
“가끔 땅도 파시지 않으십니까?”
제 마음에 드는 예술품이 누구누구의 무덤에 부장되어 있다더라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 길로 당장에 도굴도 눈 하나 깜빡 않고 해대는 자이다. 위후는 그도 그렇군 하며 수염을 잡아당기다가 밉살스럽게 침아를 쏘아보았다.
“아직 입심이 산 걸 보면 죽을 날은 멀었군. 그래도 지금 그 꼴은 영 아니다. 당장 제대로 씻고 꾸미기부터 해! 고획조는 늙어 죽지 않고, 병들어 죽지 않는다. 제가 추해진다 싶으면 알아서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지. 너는 늙지도 병들지도 않았으면서 뭣 하는 짓이냐, 지금?”
침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기합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지 않았다. 움막을 향해 돌아서기 전에 위후에게 한마디 하기는 했다.
“제 후생들을 위해서라도 늙어 죽는 고획조가 하나쯤 있어야겠군요.”
“흥! 벌써부터 살 욕심은.”
다시 하품을 하는 위후를 남겨놓고 침아는 움막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위후는 곰발바위 아래를 내려다보고선 혀를 찼다.
“다 글렀군.”
고개를 젓기 무섭게 부채로 입을 가리고 씩 웃는다. 그 모습이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처럼 일렁거리더니 이내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반딧불이들은 자유를 되찾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동녘 하늘에서 빛나는 휘황한 보름달을 향해 날아가듯이.
샘물로 깨끗이 씻고 실컷 목을 축이고 나자 한결 기운이 났다. 샘 근처의 큰 가래나무 아래에 수국이 만발한 것을 이제야 완상하면서 침아는 수국꽃을 세 송이 따 먹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먹었지만 먹다 보니 허기가 느껴져 한 송이를 더 끊어 먹으면서 움막으로 돌아갔다.
불도 켜지 않은 움막의 침상에 앉아 꽃을 먹고 있노라니 끽끽 우는 소리와 함께 문간에 무언가 다가와 부딪쳤다.
“어머, 어찌 그러고 있어?”
내다보았더니 문복이 문에 머리를 박았던지 쓰러져 있었다. 입에 물고 있던 지등(紙燈)의 손잡이를 뱉으면서 문복이 울먹거렸다.
“문이 열려 있는 줄 알고……. 에구, 누님. 저 보지 마세요. 눈에 몹쓸 게 생겼어요.”
“응?”
“별것 아닌 안질이다.”
멧돼지를 타고 나타난 위후가 곰방대를 뻑뻑 피우다 말고 대답했다.
“안질? 어쩌다 그랬니? 괜찮아, 보여줘 봐.”
“싫어요, 싫어요. 보기 흉해요!”
옆에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침아에게 냅다 소리 지른 문복이 허둥지둥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갔다. 갈팡질팡, 어째 나는 것까지 시원찮다.
“좀 고쳐주시지 않고요.”
“흥,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어야 온정을 베풀든가 말든가 하지. 저 좋다고 돼지우리에서 놀다 더러운 게 옮은 거니 누굴 탓하겠어?”
“그러지 말고 아껴주셔요. 연약한 아이입니다.”
“싫다. 너나 많이 아껴라.”
위후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문복의 일로 침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땅에 쓰러진 지등을 고쳐 들고 안으로 위후를 들였다. 어두운 걸 싫어하는 위후를 위해 등잔을 모두 꺼내 조르륵 늘어놓았다. 움막 안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해졌다.
침아가 먹던 수국꽃을 쳐다본 위후는 다시 그녀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날개옷, 네 손으로 주진 않았을 테고.”
쓴웃음을 지으며 침아는 아궁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 드실 거지요?”
불 피울 준비를 하려고 잔가지를 모으는 그녀의 등을 보며 위후가 말했다.
“운몽산에 다녀오는 길이다.”
침아의 손에서 잔가지가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다시 그것을 주워 모으며 그녀가 그대로 등 돌린 채 물었다.
“왜요?”
“그 노파가 어제 날 찾아왔었다.”
다시 잔가지가 흩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화산 어르신 말씀이십니까?”
“어르신은 무슨. 나보다 한참 어린 걸 두고. 아무튼 왔어. 잠깐 방심했는데 고것 발톱에 잡히고 말았지 뭐냐. 그래서 죽일까 하다가…….”
“안 돼요.”
“그래, 안 죽였으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고. 짐새랑 척을 지는 게 누구는 반가울 줄 아느냐? 아무튼 잡히고 나서 어찌하나 보자 싶어서 내버려뒀더니 그 산까지 날 데려가더구나. 이야기를 해도 제 영역에서 하는 게 승기를 잡기 쉽다는 걸 아는 게지. 과연 나이를 헛으로 먹지는 않았어.”
말은 가볍게 하지만 위후는 담배를 태우며 찌푸린 낯으로 다리며 어깨를 한 번씩 툭툭 두드리고 있다. 한 차례 둘 사이에 소요가 있었던 듯하여 침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 여자, 네가 뭐냐고 묻더라.”
도로 모아든 나뭇가지들을 가지고 침아는 아궁이로 걸어갔다. 등잔을 하나 내려 불을 붙이는데 위후가 말했다.
“뭐긴 뭐냐, 인간이다 그랬지. 그랬더니 인간인 건 아는데, 인간이 아닐 땐 뭐냐고 묻더라.”
불붙은 가지를 아궁이에 넣고 입으로 불어 바람을 일으켰다. 매캐한 연기가 일어 침아는 눈을 가렸다. 콜록거림은, 이어지는 위후의 말에 더 심해졌다.
“네가 고획조라는 거, 이미 짐작하면서도 의뭉스럽게 굴더군. 듣자니 네 어미랑도 언제 본 적이 있는 모양이던데.”
침아를 거두어준 여자의 일을 위후는 늘 ‘어미’라고 칭했다. 그리 불러본 적 없다고 침아가 의아해했지만 부른 적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둘의 관계가 무엇이었느냐가 중요하다고 위후는 잘라 말했다. 그 여자가 다른 새끼를 몇 낳았을지는 모르나 날개옷을 주어 제 후사로 삼은 이는 침아뿐. 그렇기에 넌 그 여자를 어미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얼마 안 가 침아 자신의 생각이 되었다. 그 여자를 어미로 여기는 마음이 굳어져, 완아에 대한 책임감을 더 깊이 새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고분고분 실토라도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천하의 위후 님께서 늙은 짐새의 위협에 못 이겨?”
“천만에! 내 말 안 하기로 작정하면 설사 옥황상제인들 내 입에서 원하는 답을 들을 성싶으냐? 죽이든 살리든 나는 모르겠으니 멋대로 하라며 뻗대었지. 마음을 바꾸었던지 다음엔 먹을 걸로 꾀더구나. 덕택에 한상 잘 차려 받아서 잘 먹고 마셨다. 술을 먹여 내 입을 열려고 한 것 같은데, 내 주량이 보통이더냐? 그 저택 뒤에 있는 세우지 정도는 술로 채워놓았어야 할 일이지.”
터무니없는 과장과 함께 낄낄대는 그를 보고 침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윽고 위후가 내뱉은 말에 한가로이 웃고 있을 기분은 사라졌다.
“아침에 작은도령이 네 날개옷을 들고 온 걸 보기 전까진, 주흥이 퍽 도도했는데. 흥.”
뻑뻑 연기를 빨아들이고 휴, 내뱉으며 위후는 탄식했다.
“나는 다 좋은데 고질병이 둘 있으니 하나는 술이요, 하나는 호기심이지.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내 수중의 눈이 멀쩡한 걸 보면 네가 죽은 것은 아닐 테고…….”
그러면서 위후는 품속에서 주먹만 한 진주 빛깔의 유리구슬을 꺼내 놓았다. 구슬 안에 기묘한 구름 같은 연기가 일렁이는 가운데 침아의 왼쪽 눈알이 둥둥 떠 있다. 허상이기도 하고 실상이기도 하다. 이대로 깨부숴버리면 침아의 왼쪽 눈은 영영 앞을 보지 못한다. 그녀와 위후 간에 맺은 계약이자, 주박을 사물화한 형상인 것이다.
“한데 그 형이란 녀석을 실컷 조지고 있어야 할 네 날개옷은 왜 여기 있나? 마음먹으면 너한테 당장 오는 것도 가능했지만 눈앞에 그 도령이 있으니 빠른 길을 택했다. 뭐 술기운도 그러라고 부추겼고…….”
거드름을 피웠지만 이내 위후는 작은 소리로 고백했다.
“게다가 그 도령은 여차하면 진짜 날 죽일 것 같더라고.”
위후에 비하면 료는 그야말로 까마득히 어린 자이건만 그리 풀 죽은 목소리를 내니 침아가 상황도 잊고 웃었다. 위후는 정색을 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언젠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미진한 것에게 반죽음을 당할 거란 예언을 들었단 말이다. 그게 그 녀석이 아니리란 보장도 없는데 내가 긴장 안 하겠느냐?”
다른 이들의 일은 몇 백 년 후까지 내다보는 신통한 흰 원숭이도 제 앞길은 보이지 않는다 하니 그것이 또 묘한 일이다. 침아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이제 서서히 큰 장작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불꽃을 보며 물었다.
“그가……듣고자 하는 걸 다 알려주셨습니까?”
“난 장사꾼이야. 물물교환을 했으면 했지 공짜 장사는 안 해. 그 도령은 내게 말을 하고, 나는 그 도령에게 말을 하고. 우리가 말하는 자리에 다른 자들은 없었다. 그 늙은이, 못내 아쉬운 기색이더군.”
술과 호기심에 못 이겨 전의를 상실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제 본성에 충실한 위후였다. 그가 한 이야기를 료가 화산 노파에게 옮겼을까? 그러나 그런 궁금함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무엇을, 어디까지.”
“목적을 이야기했지. 그 도령 형한테 품은 원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말재간이 없는지, 그 어린 도령이 심문 기술이 좋은지, 말하다 보니 온갖 것을 시시콜콜히 쏟아 바치고 있지 뭐냐.”
위후가 곰방대를 탁탁 털더니 혀를 찼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현혹(眩惑)’을 당한 게 틀림없더군.”
“현혹을……?”
“타고난 능력이다. 아마 하는 저도 모르면서 했겠지. 그 녀석 안에 흐르는 이무기의 피, 퍽 대단한 자에게 온 것일 게다. 조금만 관록이 있는 녀석이었다면 꼼짝없이 내 진짜 이름이고 뭐고 다 풀어버릴 뻔했어. 그놈의 술을 끊어야지, 진짜.”
하등 지킬 가능성 없는 말을 내뱉으며 위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뒷짐을 지고 그가 움막 안을 걸어 다니는 사이 침아는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잠시 후 준비된 차를 마시며 위후가 말했다.
“그 도령, 듣는 동안엔 물론 다 듣고 난 후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더구나. 본디 그리 대범하더냐?”
“도량이라면 그 형 되는 자와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견문이 좁은 것을 트여준다면 어디까지 클지 저는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뒤 침아는 불을 바라보며 길게 침묵했다. 궁금한 것이 있을 법도 한데 그리 담담하니 보는 위후가 답답해졌다.
“일이 다 얼크러졌지. 그 형이란 자, 달아났지? 작은도령이 도중에 찾아와 망친 게냐?”
“아닙니다. 일이 다 끝나고 제가 이 산을 떠나다 그와 마주쳤습니다. 큰도령은, 그냥 간 것입니다. 완아가 제게 그리해 달라 하더군요.”
“완아가…….”
곰방대에 담뱃잎을 채우며 위후는 멀거니 중얼거렸다. 힐끗 침아에게 향한 그의 시선이 그녀의 아랫배로 향했다.
“네 일을 작은도령에게 고자질한 자라면 대충 알고 있다. 또 그 둘째 난새였다. 그 와중에 많이 다쳤다 하더라. 모습은 못 봤지만 제 언니 있는 곳으로 간다고 시종들이 수레에 실어 내가는 것을 보았지.”
“참으로 악연이었군요.”
쓴웃음을 짓는 침아에게 위후가 물었다.
“이제 어쩔 참이냐?”
“날개옷을 찾으러 오라 하더군요. 가야지요.”
“언제?”
“지금이라도. 위후 님만 뵙고 갈 작정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서라도 오실 줄 알았지요.”
곰방대에 불을 붙인 위후는 미간을 찡그렸다.
“옷이 목적이면 굳이 갈 건 무어냐? 옷이라면 한 벌 더 있지 않으냐.”
위후 아래에서 머물던 때에 침아는 여벌의 날개옷을 한 벌 지었다. 위후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삯으로 옷을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 옷을 침아에게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다. 물론 그 옷을 받는다면 침아는 두 배, 세 배로 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위후는 제 입으로 말한 대로 속속들이 장사꾼이다.
“나중에 혹 필요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가야 합니다. 가서, 용서를 빌어야지요.”
“용서를 빈다? 용서해줄 거라고 보느냐?”
“용서받지 못해도 좋습니다. 십 년……아니 백 년이라도 좋으니 곁에서 빌게 해주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보기 싫다고 내치면, 그땐 돌아와야지요.”
“흥. 한 번 들어갔다 평생 족쇄에 매어두면 어쩌려고? 또 날더러 구하러 오란 소리냐?”
“설마요.”
“설마라니. 나는 네가 그 도령을 귀엽다, 순진하다 해대는 소리만 믿었는데 귀엽고 순진한 건 오히려 네가 아니냐? 계집의 한(恨)만 두렵고 질긴 것인 줄 아느냐? 사내의 한 역시 나라를 무너뜨리고 제 부모 자식조차 잡아먹을 만큼 독하다. 하물며 첫 정을 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고 믿는 상황에서? 가는 즉시 창 없는 조롱에 가두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위후의 극단적인 말에도 침아의 표정엔 겁먹은 기색조차 없었다.
“염려 마셔요. 위후 님께 진 빚은 꼭 갚을 테니까요. 살아 있는 한은. 아니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갚으러 가지요.”
“나 원. 내가 지금 빚진 거 떼일까 걱정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는 걸 알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항상 그러셨지요. 제가 몹시 잘난 듯이 구는 밉살스런 아이라고 흉을 보시면서도 안 되겠다 싶을 때는 도와주지 않으셨습니까. 제게 아버지가 없긴 하지만, 위후 님을 그 대신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아, 아버지라니! 흥, 너 같이 속 썩이는 딸 같은 거 필요 없다.”
“자식은 무작정 말 잘 듣는 것보다 속 좀 썩이고 애를 먹이는 편이 더 애틋하고 귀엽지요. 제 발로 서서 걷는 아이보다 품 안의 젖먹이에게 한 번이라도 더 눈이 가니 말이에요.”
“누가 또 그런 소릴 하던? 하여간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를 태연하게 제 것인 양 내뱉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지.”
“제가 인간으로 살았으면 이미 흙하고 벗하고 있을 나이입니다. 이 정도 재주도 없이 나이만 먹었겠습니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이 꽤 활기찼다. 노을 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풀 죽고, 고단해 보이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걸, 무슨 안 어울리는 짓이냐 하며 위후는 관둔다. 대신 차나 한 잔 더 내놓으라고 타박하면서 퉁명스레 말했다.
“늙은이의 걱정으로 돌리지 마라. 용서를 비는 건, 훗날로 돌려도 돼. 어차피 시간은 너희에게 충분할 테니까. 지금은 네 새끼한테나 신경 써주는 게 좋겠다.”
“……네?”
침아가 차를 따르다 말고 멍하니 위후를 쳐다보니 찻물이 넘쳐 탁자 위로 줄줄 샜다. 그것을 받아 옆에 내려놓고선 위후가 슥, 턱짓으로 그녀의 배를 가리켰다.
“네 새끼 말이다. 형체야 미약할지 몰라도, 벌써부터 기운 하나는 꽤 있는 녀석이야.”
“아…….”
놀라서 침아는 의자에 앉았다. 제 배를 내려다보다가 가만히 아랫배를 손으로 덮더니 이내 몹시 환하게 웃으며 위후에게 물었다.
“정말로, 정말이지요?”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느냐?”
“세상에. 그랬으면, 하고 바라긴 했는데 실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그리 좋으냐?”
“좋습니다. 좋고 말구요. 제가 료의 아이를 낳아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아아, 그러고 보니 어서 날개옷을 찾아야겠어요.”
침아는 뛸 듯이 기뻐하다가 금세 무언가에 생각이 미쳐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위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포태기간 중에 날개옷을 입고 있으려고? 그러면 시일이 퍽 오래 걸릴 텐데? 인간의 일 년이 고획조인 채로는 삼사십 년쯤 되지 않으냐?”
“오래 걸리는 것은 감수해야지요. 제가 먼저 죽어서야 낳아줄 수도 없잖습니까.”
“네가 왜 죽느냐?”
“료가 그러는데 인간의 여자는 짐새의 후사를 품는 것이 힘들대요. 아기가 모체에 독이 되어 버릴 수 있어 그렇겠지요.”
위후는 곰방대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 말은 틀림없이 옳은 말이다만……너는 괜찮을 거다.”
“물론 저야 날개옷을 입으면 정령에 가까워지니 그런 독기쯤이야 어렵지 않게 배출할 수 있겠지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위후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야. 이번에 네가 낳을 아이는 새가 아니라서 하는 말이다.”
“예?”
침아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곧 눈을 급하게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새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인간도 아니야. 너는 알을 낳을 게다.”
“새도 아니라면서 알을 낳는다니 그게 대체……. 아……!”
마침내 침아는 위후가 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위후는 턱을 괴며 말했다.
“마음을 평안히 갖는 게 좋아. 차츰 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날씨가 궂어지고 비가 오는 일이 생길 게다. 네가 그러는 게 아니라 네 아이가 그리 만들게야.”
침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츰이 아니라, 이미 그런 경험을 갖고 있다. 어젯밤, 그녀는 비가 올 때까지 곡을 하려 한 것이었는데 어리둥절할 정도로 빨리 구름이 몰려들었고 비가 오기 시작했었다. 눈물을 흘리자 비는 훨씬 거세어졌고.
이무기는 비를 불러온다. 그것은 명백한 진리이다.
“이미 네게 묘한 영기가 보여. 해산일이 가까워지면 아마 너 머무르는 자리에 서운(瑞雲)이 나타날 수도 있겠어. 넌 퍽 대단한 것의 어미가 되겠구나.”
“……짐새일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까? 다시, 다시 잘 보셔요.”
그녀의 물음에 위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새냐 뱀이냐, 둘 중의 하나다. 내가 착각을 하겠느냐?”
침아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얼굴이 되어 그를 쳐다보다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순간 거짓말처럼 움막 위쪽 하늘이 그르렁거리며 심상찮게 울었다. 위후는 놀라서 천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보렴. 마음을 평안히 가지래도. 새든 뱀이든, 결국 그 작은도령의 후사인데 왜 눈물 바람이 되려 하느냐?”
“……그가 바라질 않습니다.”
결국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늘의 그르렁거림이 심해지는 것을 흥미롭게 생각하면서 위후는 혀를 찼다.
“물어보지도 않고 어찌 안다고?”
“그는 자신에게서 어떤 후사가 나올지 몰라 정실조차 얻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짐새인 후사를 얻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땐……. 그런데 결국 그의 근심대로…….”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던 료의 어두운 표정을 어찌 잊을까. 이무기와의 혼혈인 자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육십 년이 넘도록 하늘을 나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다. 그런 그에게 태어날 자식이 짐새가 아니라 이무기가 될 것이라 말하는 것은…….
눈물을 훔치고 침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갸웃이 기울인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이윽고 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제가 그를 기만한 죄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아기에게 안쓰러울 일이지요. 어렵게 저를 골라 하늘이 내려주신 아기일 텐데요.”
“그리 생각하는 편이 너희 모자에게 좋겠지.”
모자라는 말에 침아가 위후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들입니까?”
“이크, 이것만은 안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공짜 선심이 너무 컸군.”
“아버지를 닮는다면 아주 어여쁘겠지요.”
언제 울었냐 싶게 행복해하는 미소를 지으니 위후가 쩝 입맛을 다셨다.
“너를 닮는 편이 좀 더 낫지 않으냐?”
“어머, 료를 보셨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문복인 안질이 왔다 하더니, 위후 님은 노안이 왔나 봅니다.”
“뭐? 그런 발칙한 소리를 감히! 내가 노안이 올 때까지 네가 살아나 있을 성싶으냐?”
길길이 뛰는 위후를 보며 침아는 아하하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르렁거리던 하늘도 잠잠해지고 구름은 흩어져 갔다. 참으로 어머니 기분에 민감한 아이가 태어날 징조였다.
날개옷이 없어 운몽산까지 걸어가야 하게 생긴 침아에게 위후는 멧돼지를 선뜻 내주었다. 물론 조랑말로 둔갑시켜서 말이다. 숲에서 끼니를 채우고 돌아온 문복이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길잡이를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겨대서 결국 동행했다.
산길을 내려가는 둘의 모습을 보며 위후는 침아의 눈이 담긴 유리구슬을 품에서 꺼내보고는 중얼거렸다.
“육십 년 묵은 내기 빚도 오늘로 청산인가, 아신.”
위후의 뒤, 나무 그림자가 짙게 진 곳의 어둠이 일렁거리더니 때까치 한 마리가 나무를 떨치고 하늘로 날아갔다. 흥, 하고 위후가 코웃음 쳤다. 그러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머리를 부채로 긁었다.
“자, 나는 또 멧돼지를 어디서 구하나? 고상하지 못하게 걸어갈 수는 없지.”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기지개를 켠 다음 그는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길을 가는 침아와 문복을 따라오는 보름달을 올려다보면 열에 아홉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사정 모르는 문복은 그저 침아와 함께 밤길을 가는 것이 기뻐 맞지 않는 음정으로 노래를 불러 젖히고 있다. 침아는 일견 흐뭇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로 배를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원래는 빌 생각이었다. 위후가 찾아오기 전까지 내내 생각했으나, 역시 비는 것 말고는 답이 없지 싶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필경 자기 손으로 휘를 죽이고 말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다시는 만나선 안 되겠지, 혹 만난다면 형의 복수를 하러 온 료의 손에 죽을 때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원(舊怨)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녀는 비로소 희망이란 걸 품었었다. 앞으론 오로지 마음 가는 대로 하자. 하고 싶은 일만 하자. 그 누가 뻔뻔스럽다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다. 료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빌어보자. 료는 그 집을 떠날 생각이었으니 어디로 가든 따라가게만 해달라고 매달려보자. 료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쏟든 손이 발이 되게 빌든 하여간 뭐든 해서 그에게 용서를 빌 작정이었다. 십 년이 되었든, 백 년이 되었든 곁에 있게만 해준다면 그 어떤 냉대를 당한다 해도 참을 각오였었다.
하지만 위후가 그녀에게 들려준 사실로 인해 그러한 꿈은 내려놓아야 함을 안다. 용서는 빌겠지만, 곁에 있게 해달라고 매달릴 수는 없다. 설사 그가 붙잡는다고 해도 떠나야 한다. 애초에 그랬듯이 둘 사이에 미래는 없는 것이다.
서글픈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으나, 료에게 상처를 안기게 되는 게 자신의 역할인 모양이다. 애초에 그의 연정을 좀 더 능숙하게 뿌리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잘하지 못했다. 사내에게 그처럼 사랑을 받아본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달리 어떤 방식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의 결실을 품었다 하는데,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일이 되어 버렸다. 알게 된다면 그는 그녀를 원망하는 것을 넘어 죽도록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어찌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상처 입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간신히 벗어난 열등감에 그를 다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기껏 마음먹고 그를 위한다고 욕심낸 일이, 그에게 낙인을 찍는 것이 되어 버리다니 참으로 얄궂다고 밖에는…….
쿠르릉, 쿠르릉 머리 위쪽 하늘이 마른 우렛소리를 내서 침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기분을 아이가 느낀다고 위후가 말했으니, 지금 아이는 엄마가 자신을 원망한다고 근심하는 걸까? 배를 쳐다보며 침아는 속으로 말을 걸었다.
‘엄마는 슬픈 게 아니라, 좀 아쉬운 거야. 널 원망하는 게 아니란다. 네가 온 건 기뻐. 정말로 네가 와주길 기원했거든. 다만 네게 아버지를 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네가 아버지 몫까지 힘내서 네가 아버지만큼이나 상냥하고 좋은 남자가 되게 잘 키워줄게.’
그리 말을 걸고 있는데 문복이 느닷없이 그녀의 등에 찰싹 붙어왔다.
“자꾸 천둥이 쳐서 무서워요, 누님.”
“응. 괜찮아, 문복아. 저러다 말 거야. 그치만 문복이가 무서워하니까 더 빨리 가야겠다. 자, 말아. 아니지, 멧돼지야, 힘내서 달리는 거다. 이럇!”
구령에 맞추어 조랑말의 형상을 한 멧돼지가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짝 매달린 침아와 침아의 등을 꼭 잡은 문복은 갑자기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막 웃기 시작했다.
“누님, 이제 무서운 일은 다 끝난 거지요?”
“응? 무서운 일? 아, 없어. 이젠 다 좋아질 거야.”
“그 붉은 개도 더는 안 보고 살아도 되나요?”
“아니. 위후 님이랑은 더 많이 보고 살아야 할 텐데?”
“얼마나요?”
“글쎄, 한 오십 년은 작정해야 할까?”
“끼에엑!”
“길게 잡아서야. 이십 년 내로 빚 갚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문복이도 일할게요, 문복이도 뭐든 한다구요.”
“아이구, 우리 문복이 믿음직해라.”
둘은 그렇게 그간 쌓였던 수다를 떨면서 먼 길을 갔다.
마침내 운몽산의 중턱을 감싼 희뿌연 구름이 눈에 들어왔을 때, 침아는 문복에게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말했다. 하지만 문복은 이제 또 떨어지면 아주 떨어질 거라는 예감이 든다는 둥 하면서 혼자 남지 않으려 기를 썼다. 종국엔 울기까지 하며 칭얼대는 바람에 그대로 뒤에 데리고 산길을 올랐다.
계속 등 뒤에서 쫓아오는 것 같더니 어느새 산 위에 걸린 달이 맑고도 환해 보기가 좋았다. 문복이 눈이 아프다고 해서 두 눈을 감고 있으라고 했는데, 한참 동안 조용하다 싶어 돌아보니 색색 잠이 들어 있었다. 앞쪽으로 돌려 안으면서 침아는 문복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내가 안질에 효험이 있는 약수를 찾아서 우리 문복이 눈을 깨끗이 고쳐줄게. 돌아가면 어디 온천이라도 찾아가서 한 며칠 놀다 오자꾸나. 혼자서 얼마나 쓸쓸했으면 돼지들이랑 놀았을꼬.”
한숨을 쉬면서 앞쪽을 바라보던 침아는 퍼뜩 놀라 말고삐를 죄었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열 발자국도 되지 않는 거리에 료가 서 있었다. 멈춰선 말을 향해 그가 다가왔다.
“그 녀석 이름이 문복이냐?”
침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료의 시선이 그녀의 품에 안긴 문복을 훑었다.
“본 적이 있는 놈이군.”
그 중얼거림에 이어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와 관련된 온갖 것이 다 들춰보면 거짓인 모양이구나.”
담담한 말과 결부된 그의 시선이 너무도 싸늘해 침아는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쓸쓸한 마음에 문복의 작은 귀만 어루만졌다. 그런 그녀의 뜻 없는 행동에 더욱 료의 두 눈이 얼음처럼 빛나는 것을 그녀는 모른다.
“다 두고 따라와.”
그리 말하고 먼저 등을 돌려 걸어가는 료의 등을 침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문복을 깨우지 않고 말에서 내리려고 조심한 뒤 혹 자다가 굴러 떨어질까 싶어 말을 묶은 나무 옆에 제 두루마기를 벗어 자리를 만든 다음 문복을 데려다 뉘었다.
침아가 오는 기척이 없어 돌아본 료는 그 모습을 보고 느닷없이 거센 바람을 일으켜 그녀가 쓰러질 뻔하게 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서는데 이미 옆으로 다가온 료가 그녀의 위팔을 잡더니 사정 보지 않고 무작정 끌고 갔다.
“아, 잠시만요, 그렇게 빨리 걸으시면, 아, 주인님, 제발…….”
보조가 맞지 않아 몇 번이나 고꾸라질 위기를 모면한 침아가 결국 간청하였으나 료는 돌아보지도 않고 싸늘히 내뱉었다.
“나를 아직도 주인님이라 부르다니. 그 승냥이를 아직 못 만났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자가, 화산 할머님께 물건을 돌려받겠다며 제가 받은 값에 열 배를 쳐서 돌려주었다. 하자가 있는 물건을 팔았을 땐 그렇게 제 신용을 지킨다나.”
“……그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이미 만나기는 하였고? 역시 각별한 사이였구나.”
그녀에게 건네는 말의 마디마디에 뼈가 들어 있고 가시가 돋아 있다. 침아는 급작스런 피로감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렇게라도 료와 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기뻤다. 말갛게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이 모습도 오늘이 마지막인가 하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앞서 걷는 료의 얼굴은 그녀의 한숨이 한 번씩 쌓일 때마다 더욱더 창백해졌다. 이리 만난 것이, 너는 전혀 즐겁지 않은 게지. 어쩔 수 없이 날개옷을 찾으러 온 자리,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게지. 그래. 나는 이제야 네가 이따금 먼 곳을 보는 눈빛을 짓곤 하던 걸 이해하는 어리석은 사내니까. 얼마나 귀찮았을까, 나란 존재가. 얼마나, 얼마나 싫었을까.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면서 침아가 신음을 삼키는 게 뚜렷이 들렸다. 모른 척했다. 얼마 못 가서 경사진 길에서 침아가 옷자락을 밟고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의 등을 잡으며 모면하려다가 등에 손을 대자마자 불이라도 닿은 듯 놀라 손을 떼었다. 그제야 료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일으켜 옷자락을 털면서 침아가 고개 숙인 채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무엇이?”
“아……넘어져서 그만.”
이런 때 주인님이 그리 빨리 걸으니 제가 넘어진 게 아니냐며 당당히 따지고 들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쭈뼛거리며 사과를 해온다. 서먹서먹하고도 낯선 그녀의 태도는, 그를 이미 남으로 여기는 듯이 보였다.
견딜 수 없어 확 잡아당겼다.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침아의 눈빛에 료는 저절로 몸이 끌려 얼굴을 기울였다. 한순간 숨결이 거칠어지며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지고 싶다고 가슴이 발악을 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침아에게 들릴 것 같아 료는 사뭇 거칠게 그녀를 뿌리쳤다.
“세우지로 간다.”
여전히 크기만 한 보폭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침아는 종종걸음을 하며 따랐다. 원래의 체력이었다면 전혀 어렵지 않을 일이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허기가 졌다. 이제 자신이 한 목숨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 허기는 꽤 심각하게 느껴졌다. 오르는 길옆으로 소나무가 보이자 료의 눈치를 보아 망설이다가 과감히 솔잎을 한 줌 뜯어냈다. 그리고 막 반을 급히 먹고 다시 반을 입에 넣는데 료가 휙 돌아보았다.
“뭘 하는 게냐?”
“……배가 좀 고파서.”
그녀의 손에 남은 솔잎을 본 료는 의아한 눈빛이었다. 씁쓸히 웃은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참. 너는 다름 아닌 고획조라지. 꽃을 먹는 것은 물론 솔잎도 먹는구나. 한데 내 앞에선 오징어니 인절미니 하면서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했지.”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좋아했는 걸요.”
료는 물끄러미 침아의 눈을 보았다. 침아는 절실하게 말했다.
“감추어야 하는 것이 있는 까닭에 말하지 못한 것이나 둘러댄 것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예, 그건 거짓이었지요. 하지만 그 외의 많은 일들은 솔직했습니다. ……믿어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만, 알고는 계셨으면 싶어요. 함께 하면서 보여드린 제 모습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는 걸.”
크게 떠진 눈동자가 진심임을 호소했으나 료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갈 뿐이었다. 다만, 걸음은 아주 조금 더 느려진 것도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침아는 더는 솔잎을 욕심내지 않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세우지에 이르렀을 때 침아는 주춤하였다. 배가 띄워져 있었다. 배 안에 준비된 주안상이 보였다. 이미 복사꽃이 져버린 것을 제외하면 두 달 전의 보름밤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으나 료가 배에 올라 입석에 묶인 줄을 푸는 것을 보면서 침아도 남은 자리에 올랐다. 그 자리엔 그녀가 곧잘 타던 비파가 놓여 있었다. 곧 배가 세우지 중앙으로 흘러갔다. 비파를 어루만지던 그녀는 자작을 하는 료를 보면서 말없이 곡을 타기 시작했다.
“노래, 해보렴.”
덤덤한 그의 주문에 침아는 급히 부를 만한 노래를 떠올렸으나, 어째선지 그렇게 많이 아는 곡 중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타고 있던 곡의 다음 부분조차 잊어서 손을 놓았다.
그런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료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침아에게 떠오른 것은 생애 처음으로 배운 노래였다.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것은 항아뿐이라고 시인들은 노래하네.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난 그녀는 사랑을 버리고 영원을 얻었나니.
예여, 어리석은 예여, 태양을 떨어뜨리는 재주를 어찌하여 썩히셨나? 속절없이 스러져 감겨가던 눈에 비친 달 보며 아리따운 이와의 봄날을 기억하셨는가?
항아여, 영리한 항아여. 버림받은 사내가 달에는 차마 시위를 겨누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아리따운 항아여.
그대 다시는 그처럼 사랑해줄 이를 얻지 못하리.
광한전 너른 뜰을 밝게 비출 그대의 춤사위, 가없이 고와도 덧없고 덧없어라.
곁들인 음률도 없이 노래하는 그녀를 료가 술잔을 든 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같은 노래를 두 번 되풀이하고 그쳤다. 조금은 쉰 듯한 다사로운 목소리가 그치자 주위에 가득한 여름밤의 공기조차 싸늘하게 느껴졌다.
“예라. 과연 어리석은 사내지.”
술잔을 기울이며, 료가 엷게 웃고는 이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그 예처럼, 널 고이 보내주길 바라서 부른 노래냐?”
마주 본 얼굴에 깃든 웃음이 달빛에 부서질 것처럼 가련해서 침아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너무도 망연한 질문이다. 다만 그 노래가 생각이 났을 뿐, 그런 뜻이 아니었노라 항변하고 싶어 입술이 들썩였다.
하지만 아주 대답하기 전에 침아는 생각했다.
미련을 두어선 안 되지. 이해받고 싶어 해선 안 되지. 눈물 흩뿌리며, 당신이 좋은데도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것이라 호소하러 온 것이 아니지.
그러나 머물고 싶구나. 다만 일 년이라도, 한 달이라도, 다시 열흘이라도 더……. 그럼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이 이만을 공경하고 바라볼 수 있건만.
마주보이는 료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서리면서 달을 감춘 것이다. 침아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저 만월처럼 자신 역시 흰 구름 뒤로 나앉아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열흘이 무슨 소용이고 한 달이 무슨 소용이겠나. 오히려 더 정이 깊어져 떠나기 싫어지면 그때는 또 무슨 핑계를 대어 머물고자 할 겐가? 그쳐야 할 때이다. 둘이서 짜내려가던 모양 좋은 피륙을 칼을 들어 끊어낸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더는 미적대지 말고 해야 할 일만 하자.
“제가…….”
말을 꺼내려 하자 순간 가슴이 콱 막혀 침아는 가슴을 두드렸다. 손바닥으로 누른 곳에 옷 사이로 매어둔 옥가락지의 형체가 느껴졌다. 그를 아주 떠날 작정을 했을 때 그랬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은 위로가 되었다. 적어도 이것은 가지고 갈 수 있다.
아아, 나는 여기에 료와의 기억을 담아간다 하지만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없구나. 한탄을 삼키며 침아는 료를 똑바로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참으로 고약한 년이었지요. 이제 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는지 분별하여 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좋을 대로 여기세요. 속 시커먼 몹쓸 거짓말쟁이라 여기셔도 좋습니다. 다만 당신을 기만하며 보내온 시간을 즐거이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 말씀하셨지요. 제가 당신을 친구처럼 여기고, 호의를 보내오는 것을 느꼈노라고. 그리 느낀 게 아주 거짓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원한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상냥하다고 했던 말도 입꾸밈 소리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상냥하셨고 애틋하셨습니다.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저도 목석은 아니었습니다.”
곱게 말하려 했으나, 가슴에 고인 게 있으니 아무리 태연을 가장해도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침아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엎드려 절했다.
“용서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미안한 짓을 했습니다. 당신의 고운 마음을 그리 무참하게 만든 것도, 마지막에 그 참담한 지경을 보여 애끊게 한 것도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차라리 모질게 끝을 맺어 깨끗하게 이별하면 하루라도 더 빨리 잊으실 수 있을 것이라, 저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서 잊으시길 바라면서도 죄책감에 못 이겨 꿈자리를 빌어 한 마디, 두 마디 건넨 것이 오히려 괴롭게 만들었다면 그 역시 미안하고도 미안합니다. 언젠가 제가 누군가를 갑작스레 잃었을 때, 그렇게 해서라도 꿈에서 만나면 좋겠다고 바란 일이 있어 했던 일일 뿐,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더 아프게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누군가가 완아라는 여자였느냐?”
료의 질문에 침아는 엎드린 채 대답했다.
“네. 완아였습니다. 당신도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지요.”
“……그 여자가 너를 연화라 불렀다 들었다. 황연화. 맞지?”
“맞습니다.”
“고운 이름이다. 그러니 내가 지어준 이름이 양에 찰 리가 없었겠지. 너는 내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이미 많은 걸 가슴에 품고 있었구나.”
그 말만큼은 그대로 덮을 수 없었다. 침아는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진담이었습니다.”
“거짓말이다.”
“아니에요, 저는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연화란 이름이 버젓이 있었어.”
“있었던 적이 있지만, 당신에게 왔을 때엔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이름은 불러주는 이가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완아가 저를 버리고 떠났을 때 제 이름도 거두어 간 것입니다. 저는 아낄 이도, 아껴줄 이도 없이 텅 비었었습니다.”
간절히 호소하는 그녀를 응시하던 료는 시선을 내리깔면서 중얼거렸다.
“그 빈 곳에 내가 채워준 것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이름을 주셨지요.”
료는 쓴웃음을 지으며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 무성의했던 이름이, 결국 나와 같구나. 무의미하고 언제 버려도 좋을 시시한 것이 되었으니. 역시 좋은 이름을 지어줬어야 하는데. 내 다시 이름을 고쳐주마 할 때 마다한 것이 다 뜻이 있었어.”
아닙니다. 이름을 주고 그리 애지중지 아껴주었다면 설사 나무라 해도 혼백이 깃들어 움직이고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물며 저는 이미 마음이 있는 자입니다. 어찌 무의미했겠습니까. 어찌 시시하게만 여겼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싶으나 침아는 삼켰다. 헤어질 마당에 이해를 바라는 것은, 하물며 연민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료에게서 육신을 떼어내기 위해 눈 하나 깜빡 않고 죽음을 가장했던 것이 그의 마음에 큰 동공을 만들었던 것처럼, 이제 침아는 제 가슴에 동공을 담아갈 차례라고 생각했다.
하지 못한 말이 두고두고 한이 되겠지만, 그 한마저도 감미로울지도 모른다. 료는 완아가 아니니, 죽지 않고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지 않겠는가. 좋은 것을 보면 그를 생각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땐 그도 웃을 일이 있길 바라면서 멀리 떨어져서라도 얼마든지 그리워하고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으리라.
언젠가 태어날 그들의 아이는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될 것이다. 이 어미의 이름은 침아란다. 네 아버지가 지어주셨지. 그러면 다시는 이름을 잃을 일이 없을 것이다.
침아는 한껏 힘을 내어 방긋 웃었다.
“믿지 못하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저는 침아란 이름을 퍽 좋아한답니다. 어언간에 저도 모르게 정이 들었어요. 물론 제 아름다움에 딱 들어맞는 이름은 아니지만, 이름은 실제보다 부족한 편이 넘치는 것보다 좋다 하더군요.”
“아름다움?”
료도 피식 웃으며 물었다. 침아는 몸을 일으켜 제 고운 자태가 더욱 드러나게 반듯이 앉았다. 손을 들어 왼쪽 얼굴을 가벼이 쓸어 만졌다.
“이런 눈속임이 아니라 정말 본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만, 지금 보이시는 그대로에서 조금 더 나아지는 정도일 테니까요. 저는 실로 어여쁘답니다. 애초에 생긴 것이 글렀다면 고획조에게 거두어지지도 않았겠지요. 하늘이 제게 주신 가장 좋은 것은 아름다움이지요.”
“본모습이 따로 있다 함은, 왼쪽 얼굴의 흉도 거짓이었다는 거구나.”
“거짓이라기보다는 징표입니다. 위후 님은 뼛속까지 장사꾼이라 계약을 맺는 데에 담보가 필요했고, 그것이 이쪽 눈이었을 뿐입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면 돌려받을 수 있어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료가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내게 솔직하고,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배필로 삼으라 말할 때……네가 가지고 있다고 말한 한 가지는 아름다움이었던 게로구나.”
침아는 말없이 웃었다. 료는 탄식했다.
“거짓말은 아니었군. 다만 내가 멋대로 착각한 거지.”
다시 술을 들이켜고 빈 잔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찌 되는 거지?”
배 주위로 한 줄기 바람이 일었다. 침아는 미소를 붙들고 있기 위해 안간힘을 다 했다. 비파를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억눌린 목소리를 짜냈다.
“길가다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일어나면 되는 거지요. 아니지, 우리는 피차 새이니 하늘을 날다 느닷없는 선풍에 휩쓸려 한바탕 춤을 췄다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인간들 말에 있듯이 남가일몽 같은 것인지…….”
말하다 보니 평온해진 마음을 붙잡고 침아는 또박또박,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표현이든 결과는 같지요. 이제는 지나간 일입니다. 그만 다 내려두고, 각자의 길을 가야지요.”
“……지나간 일. 지나간 일이니 각자의 길을 가자?”
천천히 료가 그 말을 뇌까렸다.
“결국 내게 그 못난 사내, 예처럼 굴라 그 소리구나. 간다는 항아를 붙잡지 말란 경고였어. 너는 참으로 영악하다.”
얼마쯤 온화했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녀를 보는 차가운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지만 술잔을 쥔 료의 손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침아가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그 잔은 파삭 깨어지고 말았다. 혹시 다치지 않았나 싶어 침아는 몸을 들썩였지만 료는 잔이 깨어진 줄도 모르고 침아를 노려볼 따름이다. 침아가 탄식했다.
“그 깨어진 잔을 보십시오. 어찌하면 원래대로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버리시는 것 말고 길은 없습니다. 나무의 가지가 썩어들면 적절한 때를 맞추어 잘라내고 상처를 보호해 주어야 다른 곳까지 그 해가 번지지 않습니다. 상처가 잘 아물면 나무는 기력을 회복해 다음 해에 다른 곳에 새로 연두색 순을 내놓습니다. 당신도 그러셔야지요.”
“새순 따위 필요 없다. 내 한사코 썩은 가지를 붙들고 같이 결딴이 나겠다고 하면 어쩔 테냐?”
“멀리 보세요. 아무쪼록 멀리 보세요. 당신에겐 저 넓은 하늘이 있고, 앞으로 봐야 할 숱한 일월이 있습니다. 고작 저 같은 계집 하나 때문에 신세를 그르치는 것이 정녕 원하시는 바입니까?”
료는 저를 가르치듯이 타이르는 침아의 말에 더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가 알았듯이 어린아이가 아니란 것을 알고는 있으나 감당할 수 없었다. 이제 완전히 그를 남으로 단정 짓고 어서 날개옷을 되찾아 떠나고 싶어서 그를 걱정하는 척 상냥한 말로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이 쪼개질 것 같았다.
가루가 되도록 붙잡고 있던 술잔을 세우지 물결에 뿌리면서 료는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저 자신을 비끄러맸다. 그는 조금도 단념치 못했다. 좋은 말로, 그녀의 마음을 돌려 제 곁에 붙들어 두려는 바람. 정히 안 되면 위협이라도 해서 붙들어 두리라. 하루 밤낮 동안 생각한 것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과거? 지나간 일이니 두고 갈 수 있다. 배신? 잊지는 못해도 잊은 척하며 살 수 있다. 이별? 못한다. 죽어서도 못한 일, 살아서 하랴.
“신세를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면 될 것 아니냐. 내 당장에 널 용서하겠다는 말은 못 한다. 그렇지만, 이해해 보려 노력은 하겠다. 그것도 시간이 걸리겠지.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 그건 네가 감수해라. 정말 미안하다고 여긴다면 행동으로 증명해. 단순히 엎드려 빌면서 미안하다고 몇 번 말하면, 내 마음에 쌓인 앙금이 봄눈처럼 녹을 거라 생각했더냐?”
미안이니 뭐니 공허한 말 따윈 집어치우고 곁에 남아 용서해 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죄를 빌라는 핑계로 앞으로도 함께 하자고 한다. 침아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퉁명한 말로 가장하여 그녀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고마웠다. 어쩌면 이다지도 상냥한 남자일까, 생각했다.
더욱 서러워졌다. 이렇게 상냥한 남자에게 좋은 인연이 아닌 자신이.
‘보렴, 아이야. 이분은 이렇게나 따뜻한 분이란다. 나는 운이 좋았지. 하지만 이분에게 내가 좋은 운이 아니구나. 그래서 함께 할 수 없는 거야.’
혼란스러운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자 더 마주보고 있는 것이 한층 괴로워졌다. 그녀는 떠날 준비를 하였다. 비파를 옆에 놓아두고 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못 차갑게 말했다.
“함께 하는 것은 피차에 고통입니다. 신고(辛苦)를 겪는 것이 저 혼자라면 벌이 되겠지만, 보는 당신마저 괴로워할 것이 벌써 보이는 것을요. 저를 놓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버리시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가증스럽구나. 끝내 날 걱정하는 척하며 기만하는 것이냐?”
“무어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절 버리세요, 그리고 영영 잊으세요.”
료가 짧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침아를 잡아당겼다. 풀썩 앞으로 쓰러지듯 끌려온 몸을 붙잡아 흔들며 료가 낮게 부르짖었다.
“참으로 말로 해서 안 될 것이구나! 그래, 네 고집불통인 것을 내 모르지 않지. 허나 내 이번만은 져주지 않는다. 고이 보내줄 것 같으냐? 어림없는 소리. 당치도 않은 소리!”
“억지로 붙잡아서 무엇이 보고 싶으세요? 당신에게 마음도 없는 계집 몸뚱이라도 빨고 핥으며 살면 만족한단 말씀입니까? 어찌 그리 초라한 생각에 앞뒤 분간을 못하고 날뛰십니까? 참으로 어리십니다……!”
그녀의 눈빛, 말, 그 두 가지가 다시없을 비수가 되어 료를 베었다. 그래도 료는 침아를 붙잡았다. 현기증이 일어 쏟아질 듯한 마음을 붙잡듯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구걸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나를……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더냐? 내가 좋다 했어. 그 끔찍한 날 아침에 내 품에서 내가 좋다고 네가 분명 말했어. 그 말은 진심이라 여겼었다. 거짓이 아니었어. 내가 아무리 못난 녀석이라고 해도 그 말은 틀림없는 진심임을 내가 느꼈단 말이다. 내가 알아. 그런데 이제 와 마음이 없다니, 또 내게 거짓말을 할 참이냐?”
“그때는 진심이었던 거지요.”
“그때는?”
“그 순간엔 좋았었지만 순간이 지나니 시들해지고 만, 그 정도의 마음이었던 겁니다. 완아를 아낀 것만큼 당신이 좋았다면 염치 불고하고 곁에 있게 해달라 매달렸겠지요. 예, 저는 퍽 뻔뻔해서 그러고도 남았을 겁니다.”
“완아만큼이 아니다……? 대체 그 여자가 네게 얼마나 잘했기에? 내가 그 여자보다 무엇을 못했기에, 네 이리 모진 말을 하느냐?”
침아는 씁쓸한 마음을 속으로만 삼켰다.
“그냥 그 아이가 좋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좋게만 느껴지는 자가 세상엔 있더군요. 반면 완아는 휘라는 사내를 마냥 좋아했기에 저와 함께 있어도 그 사내가 그리워 결국 죽고 만 것이고……. 한참 원망하다가 원망해도 소용없는 일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마음이란 건 물과 같아서 내게서 흘러가는 것조차 조절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내게 돌아오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완아는 휘를 좋아했고, 저는 완아를 좋아했고, 이제 당신은 제가 좋다고 하지요. 그렇게 마음 가는 방향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그게 이해가 안 되십니까?”
“물길이라면 돌리면 그만이야. 어차피 죽고 없는 여자 따위!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나만 볼 수 있게 가둬 놓으면 네 마음이란 것, 결국 내게 향하지 않고 배길 것 같으냐?”
후우, 하고 침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구름이 더 짙어졌는지 하늘빛이 한층 어둡다. 희푸른 료의 얼굴에 서린 그늘을 향해 침아는 모질게 못을 박았다.
“저는 조롱 안에서 살 수 없는 새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해보세요. 제 마음이 말라서 바닥이 나는 것을 보여드리지요.”
콰르릉, 하늘이 신음했다. 멀리서 번개가 치는 듯이 환해졌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팽팽히 맞부딪치던 둘의 시선 중에서, 마침내 한쪽의 빛이 사그라졌다.
침아를 붙들고 있던 료의 손이 힘없이 풀어졌다. 망연해진 그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동요하는 것에서 침아는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알겠다. 그런 거구나. 그게 진정 네 뜻이구나…….”
싸늘한 침아의 모습에서 시선을 떨구며 료는 중얼거렸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맥을 놓은 것처럼 웃음을 흘리며 료는 술병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잔을 찾다가, 그러고 보니 아까 제 손으로 바수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병째로 입을 대고 마셨다.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비가 올 것 같구나. 보름인데, 저번 보름과는 천지차이가 아니냐. 바로 이 배에서 합환주를 나누어 마셨는데. 아니지, 내가 억지로 마시게 했었지?”
술병을 내려다보던 료는 고개를 들어 침아를 보았다. 곱고, 아름답다. 아무리 그의 마음을 찢어놓았어도 그에게는 그저 어여쁜, 사랑스러운 여자이다. 침아가 말한 대로, 무슨 짓을 해도 그녀에게 흘러가는 자신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는가 보다. 용서고 뭐고, 다 부질없다. 처음부터 빌었어야 했던 건가. 떠나지 말라고. 버리지 말라고. 난 네가 없으면 숨조차 쉴 수 없으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지금이라도 그래 볼까.
료는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얼마나 더 비참한 말을 들어야 만족하려는 것인가, 자신은.
“헤어지는 마당에, 이별주 한 잔 없어서야 안 될 말이지.”
침아가 그 말에야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료는 술병을 찰랑찰랑 흔들어 보였다.
“잔이 없구나. 그러니 전처럼 마시자.”
술병을 기울여 자신의 목을 적신 뒤, 마저 얼마쯤 입에 머금은 료는 침아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얼굴을 들여다보며 뺨을 한 번 어루만지고 그대로 입술을 포개었다. 입으로 술을 넘겨받던 침아는 퍼뜩 무언가 깨닫고 도리질을 쳤다. 료가 벗어나게 두지 않았다. 버둥거리는 그녀를 무섭도록 담담하게 응시하면서 료는 기어코 제 입 안의 것을 다 넘겼다. 그러고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침아가 술을 삼키며 목울대가 움직였다. 크게 떠진 그녀의 눈이 한 차례 떨리더니 눈이 감기며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버둥거림이 그친 침아에게서 천천히 고개를 드는 료의 입가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제 피였다. 이미 그녀에게 술을 전하기 전에 제 혀를 깨물어 피를 냈다. 그것을 술과 함께 마시게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술병에 담긴 술 자체가 독주였다. 지난 해 여름에 핀 협죽도 꽃으로 담은 술이었다. 그녀에게 마시게 할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료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이 자리에 그 술을 준비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아주 없지 않았다.
끝이 나야 한다면 이번만큼은 료의 손으로…….
그녀의 맥은 벌써 현격히 약해졌다. 료는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댔다. 느려진 고동을 확인하고 얼굴을 돌려 침아를 보았다. 눈물을 손으로 훔쳐 주고서 품에 꼭 안았다.
“침아야……. 우리 함께 죽자꾸나. 다시 태어나면 그땐 꼭 네가 지금의 나처럼 나를 좋아하고, 나는 진저리내며 도망 다녀 봐야겠다.”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고운 이마에 입술을 댔다. 여전히 따뜻하고 향기가 났다. 그에게서 떨어진 눈물이 그녀의 뺨에 닿아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닦아내며 료는 잠든 아이에게 말하듯 소곤거렸다.
“하지만 말이다, 결국엔 내가 널 좋아하게 될 거니까 너는 나처럼 아플 일 없을 거다. 산 채로 심장이 도려내지는 기분 같은 건……너는 겪을 일 없을 거다. 내 귀여운 아이, 내가 어떻게 널 이렇게 아프게 하겠니.”
입술을 대고 뺨을 비비는 동안 눈물이 자꾸 흘러 멈추질 않았다. 너무 좋아하는 그녀의 따뜻한 몸을 거듭거듭 쓸어 만지며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그냥 나랑 살겠다고 하지……. 응? 그 한마디가……그렇게 어려웠느냐? 응? 침아야, 침아야, 말 좀 해보렴.”
가벼이 흔드는 손길에 침아의 손이 툭 떨어졌다. 순간 료의 눈이 멍해졌다. 손을 잡아 쥐어본 손목에서 맥이 거의 잡히지 않았다.
홀연히 료는 잔인한 꿈에서 깨어났다. 배신에 치를 떨며 그렸던 무수한 상상 속에서 그는 몇 번이나 침아를 죽였던가. 하지만 다 꿈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아는. 하지만 이번 꿈은 깨어났건만 그대로였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침아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그녀를 불렀다.
“침아야, 침아야, 눈 떠 보렴.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아, 내가, 내가 무슨 짓을……침아야, 침아야! 아, 그렇지.”
료는 입고 있던 우의를 벗었다. 그 서슬에 품에 있던 그녀의 자석영 머리꽂이가 배에 떨어졌다. 우의 안에 침아의 날개옷을 숨겨놓고 있었다. 그것을 침아의 등에 둘러주면서 그녀를 흔들었다.
“네 옷이다, 어서 입고 날개로 바꿔. 침아야,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침아야, 제발, 제발……. 제발……!”
통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야속하리만치 그녀는 그의 말을 외면했다.
죽이려던 것이 아니었다. 홀로 죽을지언정, 어찌 사랑하는 이를 해한단 말인가. 이 손으로, 어찌 이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이제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망연하여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죽어버린 눈빛에 언뜻 자석영 머리꽂이의 광채가 반사되었다. 료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그저 너를 연모하였는데……. 내 사랑이 네게는 잔혹하였구나. 기실, 네게 나는 괴물이었던 거구나.”
아직 따스하기만 한 침아의 뺨을 만지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댔다. 그리고 그는 머리꽂이를 쥔 손을 높이 쳐들었다.
콰르르릉,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더니, 미친 듯한 폭우가 쏟아졌다. 오월 보름에 때아닌 우박이 섞인 찬비가 내렸다.
그 비가 침아의 앳된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문득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 속눈썹이 몇 번 가물가물거리다가 마침내 그녀가 눈을 떴다.
잠시 아주 깊은 암흑에 잠겼다가, 거세게 튕겨 나온 것처럼 얼떨떨하여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었다. 몸을 때리는 찬 우박의 감촉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비실거리며 고개를 들던 그녀는 왈칵 검은 피를 토했다. 오장이 찢어지기라도 하는 듯이 속이 괴로웠으나, 몇 번이고 피를 토하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시며 정신이 명료해졌다.
힘은 전혀 없었으나, 계속 노력한 끝에 침아는 몸을 일으켰다. 마침내 그녀는 료를 보았다.
“……료!”
쓰러진 그의 왼쪽 가슴에 꽂혀 있는 자석영 머리꽂이가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서 흐려져 가던 그의 눈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반짝 빛을 머금었다.
“……다행이구나. 죽지 않은 게지? 아니면……이것도 꿈이냐?”
“아, 아……. 아아, 말하지 마요, 가만히 있어요, 내가 어떻게든, 어떻게든……. 위후 님! 위후 님, 위후 님! 보고 계세요? 어디 계십니까, 도와주세요, 위후 님! 아, 이걸, 이걸 어째, 이걸 어떻게 하면…….”
어쩔 줄을 모르고 위후를 찾는 침아를 향해 료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잡는 그의 손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오싹 소름이 끼치는 그 냉기는 흡사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침아는 바로 깨달았다. 완아. 아주 잠시 되살아난 완아의 손이 바로 이렇게 차지 않았던가.
“안 돼요, 안 돼요. 료, 이건 안 돼. 이렇게 가면 안 돼.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걱정 마요, 내가 틀림없이 구해줄 분을…….”
“놓아줄게.”
료가 말했다. 그는 웃으려고 했지만 얼굴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그녀를 담아가려는 그의 눈만이 반짝거리면서 입술을 들썩거렸다.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침아에겐 그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괴롭혀서, 미안하다. 못 해준 것이 많아, 미안하다. 웃는 모습, 한 번만 보여다오.”
침아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지금은. 대신 앞으로 많이 보여줄게. 안 떠날게. 나 안 떠날 테니까, 당신 옆에 지긋지긋하도록 붙어 있을 테니까 앞으로 실컷 봐요. 료, 정신 놓지 말고 버텨요. 버티는 거야, 응? 누가 올 거야. 내 전 주인 알죠? 그분이 오시면 이 정도는 아무 문제없이…….”
료가 피를 토했다. 연이어 그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녀의 손을 쥔 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불현듯 그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내가 정말 살아 있었던 건, 너와 함께 한 사 년뿐이었다. 너를 연모했다. 네가 누구이건 이름이 무엇이건 내 마음에 있었던 것은 너다. 너뿐이다. 너를 연모한다. 침아야, 내 귀여운 아이, 나는 너를, 너를…….”
또 한 차례 피를 토하며 그의 말이 끊어졌다.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가 이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를 향해 크게 떠진 눈동자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서히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의 거죽을 취한 몸이 조금씩, 조금씩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빗줄기가 온 산을 가릴 정도로 거세지고, 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새까맣게 모여든 구름 속에서 미친 듯한 번개가 작렬했다.
눈이 멀 듯 환한 빛 사이로 붉게 빛나는 한 쌍의 눈이 구름 너머를 내다보았다.
번개조차 비껴가는 자, 그것은 두 개의 뿔을 가진 커다란 이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