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우야(雨夜) (28/33)

27. 우야(雨夜)

수이산 곰발바위 위로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머잖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연화의 곡소리가 불러온 비인 양,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가늘고도 끊임없었다.

휘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수이산까지 오는 동안 비의 조짐은 없었다. 비가 내릴 것이었으면 짐새인 자신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비구름에 곡을 하는 연화의 모습이 한층 두렵게 느껴졌다. 료가 제 마음을 하늘에 투사해 때아닌 토우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연화도 그런 것인가 하였다. 고획조가 비를 불러온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런 일에 오래 매달려 의심할 경황이 없었다. 등에 대어진 부목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뻣뻣하게 조여 오는 밧줄은 휘의 목을 압박해 폐에 들어올 공기를 조금씩, 조금씩 줄여갔다. 연화는 그가 굶어 죽길 바라는 식으로 말하였으나, 이대로라면 며칠 못 가 기색(氣塞)으로 호흡곤란을 일으키리라.

녹나무 잎사귀가 비를 막아 휘에게 떨어지는 비 자체는 얼마 없었다. 휘는 침착하자고 속으로 되뇌며 이 난국을 타개할 묘안이 없을지 머리를 짜내었다. 평소 들고남을 분명하게 밝히고 다녔다면 며칠 못 가 그의 부재를 괴이하게 여긴 누군가가 찾으려 시도를 했을 테지만, 연화도 말한 대로 그는 분방하도록 자유롭게 나다녔다. 몇 달, 혹은 몇 년이 가도 의아해하는 이 하나 없을지도 모른다.

사력을 다해 마음으로 호소할 이가 누가 있는가. 아버지 휼? 화산 할머님? 자신의 후원에 가져다 놓은 어여쁜 꽃들?

별안간 그는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아아, 그렇구나. 나는 이대로 죽으면 정말로 진정으로 통곡해줄 이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 길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백이십 년의 생애가 홀연히 그의 머릿속에서 출렁거리며 큰 물결처럼 흘러갔다.

그와 함께 생을 다 하고 황천에의 길마저 같이 가고 싶다 호소하던 아름다운 이들은 이제 어디에 있는가? 없다. 그가 가벼이 손 내밀어 취할 수 있었던 꽃은 숱하게 많았다. 저마다 다르고도 끝에 가서는 다 비슷하게 느껴지던 그 꽃들을 잠시 즐기다 시들기 전에 내버렸다. 그 어떤 꽃이든 즐기는 그 순간에는 열정을 품었노라, 스스럼없이 지껄였지만 그것은 다만 스스로 취하고자 하였던 풍류에 불과했다. 그의 열정은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싸늘한 정이었다.

그런 싸늘한 정이 지금 그에게 돌아와 마지막 길을 보여주고 있다.

홀로. 오로지 홀로.

죽게 될지도 모르는 자리에서 미치도록 그리운 이조차 없다. 그를 잃어 진심으로 통곡할 자가 없다는 말은, 뒤집어보면 이제 그가 두고 갈 일에 가슴이 조이도록 안타까운 존재도 없다는 소리였다.

내가 없으면 너는 어찌 될까. 누가 나처럼 너를 은애하여 네 고단한 밤을 지켜줄까. 가엾다, 가엾다. 내가 없을 네가 가엾다.

아아……. 그런 생각을 품어 볼 만큼 마음을 기울였던 이가 없다. 상대가 없었음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하지 않은 것이다. 언제나 휘에게 있어 연애는, 자신이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과연 그는 진정 연모라 할 만한 것을 했던가.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당신의 다정함은 박정함과 같다 한 연화의 말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정의 이유로 이제 원한을 사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어찌……죽었느냐, 완아는?”

홀연히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가칫한 목소리를 쥐어짜며 물었다.

“병으로 죽었느냐?”

뚝, 연화의 곡이 그쳤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며 대답했다.

“상사병에 죽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

“나를 그토록 은애하였단 말이지? 그 아이가 나를.”

“모르겠다, 그런 것이 은애인지 무엇인지. 나는 그것도 병이 아닌가 싶어. 날 거둬준 분처럼, 그 애도 이미 반은 미쳤던 것인지도 모르고.”

“많이 괴로워하였느냐?”

연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휘를 보았다. 휘가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채근하듯 물었다.

“그 아이, 가는 모습을 보았을 거 아니냐. 완아가……괴로워하였느냐?”

“편히 갔던 괴롭게 갔던 이제 와 그게 네게 무슨 소용이지?”

“괴롭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와 소용은 없다고 해도 괴로웠다면……용서를 빌고 싶어.”

연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에 젖은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표정이 떠올랐다. 언젠가 휘가 노란 제비꽃 다발을 덥석 내밀었을 때처럼 그를 보는 얼굴에 여러 감정이 뒤엉켜 떠올랐다. 다 사라진 자리엔 하나만 남았다. 경멸에 찬 조소였다.

“죽음을 모면해 보려고 수작을 부리다니. 구차하구나.”

“뭐라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용서를 빌고 싶다. 네게가 아니라 완아에게 말이다. 네가 그것을 가로막을 작정이냐?”

강한 불신 너머에서 속으론 그 말을 가늠해 보고 있음이 연화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드러났다. 그녀는 돌무덤을 쳐다보았고, 묵묵히 그러고 서 있다가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줄곧 위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녀의 날개가 서서히 옆으로 펼쳐지면서 몸에 맺힌 이슬을 털어내듯이 한 번 펄럭였고, 두 번 펄럭이자 무덤의 동쪽으로 물러난 후였다.

“완아가 왔다.”

“……?”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휘를 힐끗 본 연화가 팔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아니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것은 곰발바위였다. 빗속에서 까맣게 젖은 바위를 쳐다보던 휘는 곧 그 바위 끝으로 스물스물 다가오는 푸른 그림자를 보았다.

“뭐냐, 저것은…….”

“보이는 대로다.”

그 짤막한 대답만으로는 휘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짐새의 탁월한 시력에도 불구하고 바위 끝에 멈추어 일렁이는 푸른 덩어리는 그 정체를 모를 묘한 것이었다.

그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안 연화가 탄식했다.

“보이지도 않는 것에게 네 어찌 용서를 빈단 말이냐.”

“……완아?”

그는 실로 경악에 차서 물었고, 대답이 없는 연화에게서 다시 푸른 덩어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동그래진 눈에 비쳐진 시야에서 푸른 덩어리 속에 붉게 맺혀가는 형상이 있었다.

“……완아!”

붉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의 모습. 창백한 여자의 얼굴 속에서 핏기 없는 입술이 벌어지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휘는 제 알던 여자가 정말 귀신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완아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는 말을 연화가 했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있으랴 하여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아니, 환영이라 해도 저것은, 저것은…….

맙소사, 설마 저기서 뛰어내리려는 작정은……!

“그러지 마라!”

절로 그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여자는 추락했다. 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가 잠시 후 사뭇 두려워하며 여자가 어찌 되었는지 돌아보았다. 돌무덤이 있던 자리 위에 떨어진 여자는 처참하게도 팔다리를 움직이며 꿈틀거렸다. 입술을 깨물며 휘는 다시 외면했다.

“보고 싶지 않으냐? 그럼 들어라. 이 아이가 말하는 것을.”

연화가 냉랭하게 명령했다. 휘는 손이 자유롭기만 했다면 두 귀를 가렸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을 들으란 것인지, 무서우면서도 듣고 싶었으니 어떤 마음의 발로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휘……. 주휘……. 휘 님……. 제 낭군이시여.”

당장이라도 꺼질 듯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는 휘를 찾고 있었다. 거기 배인 간절한 염원은 설사 땅에 뿌리박힌 나무라 해도 돌아보게 만들었으리라. 휘도 그랬다. 보고야 말았다.

여자는 하늘을 보는 모습으로 떨어져 있었다. 움직이는 오른팔이 무언가를 그리며 들리려다 말고 들리려다 말았다. 얼마나 그러면서 휘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을까.

연화가 여자에게 다가섰다.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불렀다.

“완아야.”

“언니, 연화 언니.”

여자가 대답한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야.”

“날 좀, 나를 좀 죽여줘요.”

“넌 이미 죽었어.”

“태워줘요, 언니. 죽어서, 재가 되어서 날아갈 수 있게.”

“그자에게 말이냐? 완아야, 우리 예쁜 완아야, 제발 오늘은 내 목소리를 들어. 내가 그자를 데려왔단다. 휘를 데려왔어.”

연화의 목소리에 어린 처절함도 한으로 끓었으나, 부서진 여자의 모습은 항상 그래 왔듯이 마지막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 번만, 꼭 한 번만 다시 만나길 바랐건만……. 휘 님…….”

“가지 마, 완아야, 가지 마! 내 그자를 데려왔어! 보이지 않느냐? 저기, 저기 그자가 있단 말이야! 그자가 왔어, 저기 주휘가 있다고!”

연화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붉은 여자의 형체가 서서히 흐릿해져간다.

휘는 이것이 바로 완아의 최후였음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비로소 완아의 모습을 완전히 기억해 냈다. 아아, 그 아이. 곰발바위 위에서 그를 전송하며 한없이 손을 흔들던 그 아이. 눈물조차 비추지 않으면서 활짝 웃고 있었는데. 울기라도 하면 한 번 돌아가 안아줄까 하였으나 마지막 모습이 너무도 씩씩해서 고개를 돌리며 이제 저 아이도 얼마 안 가 나를 잊겠구나 하였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게 아니었어. 나는 대체, 나는 대체 네 무엇을 보았단 말이냐……!

“……완아야, 완아야, 내가 왔다. 휘가 왔어, 널 만나러 왔다. 제발 나를 보고 가라, 완아야!”

주르륵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아끼던 누이 섬을 잃은 이래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휘의 시야가 눈물로 가득 차 완아의 모습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연화는 다시 돌무덤으로 돌아온 자리를 보고 고개를 젖히며 탄식했다.

“소용없는 일이었나.”

긴 한숨을 내쉬는 동안 빗발이 더욱 강해졌다. 얼굴에 찬비를 맞던 연화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 휘를 보았다. 스윽 날갯짓하여 휘의 앞으로 다가온 연화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게 굳어 있었다.

“내 순진하게도 네가 오면 완아가 널 알아보고 기뻐할 줄 알았다. 헛꿈을 꾸었구나. 이제 나는 저 아이를 어떻게 구천에서 거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허망하지만 너를 죽여 완아와 합장하는 것으로라도 저 아이 한을 달래는 수밖에.”

휘는 연화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완아가 계속 저리하고 있었느냐?”

“밤이면 푸른 아지랑이가 되어 저 바위에서 널 기다렸고, 비 오는 날이면 방금 네가 목도한 것처럼 죽음을 반복했지. 날 원망해도 좋다. 귀신이 되어 날 저주해도 좋다. 대신 완아는 원망 마라.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저 아이, 저 가여운 완아를 제발 저 지긋지긋한 업(業)에서…….”

목이 메어 연화는 말을 놓쳤다. 그녀가 휘의 등 뒤로 돌아가 받쳐두었던 부목을 쳐다보았다. 다짐은 굳었으나 막상 산목숨을 아주 해하려 하니 손이 떨려 들 수가 없었다.

“완아야, 내 곧 네 낭군을 네게 보내주마…….”

제 맹세를 거듭하며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휘는 놀랍도록 덤덤했다. 뚝뚝 눈물을 흘리던 눈을 감고 마지막을 기다리듯이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연화가 부목에 손을 대었을 때, 한 줄기 광풍이 불어와 연화와 휘의 얼굴을 때렸다.

무슨 바람이 갑자기― 라고 생각하며 연화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어렵사리 눈을 뜨려 했다.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문득 사람의 목소리로 들린 것은 그때였다.

“……언니, 연화 언니.”

차게 식어가던 연화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또?

휘가 신음했다.

“완아가……. 저기 완아가…….”

그의 말에 연화는 놀란 눈을 돌려 휘가 보고 있는 것을 눈에 담았다. 큰 바람에 돌무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일어섰다. 돌이 굴러가고 휘청거리는 걸음마다 붉은 옷자락 사이로 바람이 나부꼈다.

자박, 자박 걸음을 떼어놓는 여자의 얼굴을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휘감고 있다가 바람이 불면서 제풀에 드러내었다. 완아였다. 정말로 완아가, 생전의 그 고운 얼굴을 하고 그들을 향해 오고 있다.

“……그리 마셔요. 그 순한 연화 언니가 어찌 산목숨을 해치겠다고.”

오랜 세월 묻혀서 갈피갈피 썩어 내렸던 비단옷이 갓 지은 옷처럼 윤이 났다. 완아의 주변으로는 비조차 피해가는 듯이 보였고, 화사한 빛에 감싸인 완아는 살았을 적보다도 고와 보였다.

“……정말로 완아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어 연화는 거듭 제 눈을 의심하다가 마침내 완아를 향해 다가갔다. 손을 뻗었으나, 만지면 자취 없이 사라질 신기루라도 될까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 연화의 손을 완아가 손을 내밀어 잡았다.

아아, 그 차가움.

료의 차가운 몸에 길들여진 연화이건만, 그것과는 비견할 수 없는 진정한 냉기가 거기 있었다. 형체를 지니고 나타났지만 그녀가 이승의 자가 아님을 연화의 몸이 깨닫고 사뭇 거세게 떨었다.

“용서해요, 언니. 내내 보면서도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바보짓을 되풀이하는 것 말고는…….”

“보았어? 내가 여기서 하는 일, 전부 보았어?”

“풀에도 깃들고, 나무에도 깃들면서…….”

그리고 완아가 마침내 휘를 보았다.

“휘 님…….”

휘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실 줄 알았어요.”

그녀가 웃었다. 귀여운 얼굴 가득 수줍게 웃으며 그녀가 휘에게 다가섰다. 연화는 제 손을 놓고 가는 완아의 모습을 멍하게 볼 뿐이다.

“언젠가 제게 오실 걸, 완아는 알았어요. 기다렸답니다, 휘 님. 제 낭군님…….”

“……완아야.”

겨우 휘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완아는 차가운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형용할 수 없는 그리운 빛이 가득했다.

“이 고운 모습, 하루도 잊지 않고, 완아는 기다렸답니다.”

완아가 연화를 돌아보았다.

“연화 언니, 휘 님을 풀어주세요. 이분은 짐새예요. 하늘을 날기 위해 태어난 분이에요. 이렇게 고역을 치르시는 것은 얼마나 가여운 일인가요.”

“나는 네가……. 네가 외로워할 테니 함께 하게 해주려고……. 이 사내 때문에 그리 험하게 죽었으니 이제라도 함께…….”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연화를 향해 완아가 고운 미소를 지었다.

“제 명이 그것밖에 안 되었던 거지요. 제가 바라는 건 오로지……한 번 만나는 것이었을 뿐이에요.”

휘를 돌아보며 완아는 그 고운 미소 그대로 말했다.

“이리 뵈었으니 되었어요. 되었어요, 저는……. 부디 이분을 풀어주셔요. 이분이 잘못되는 것을 추호도 바라지 않아요.”

미소 지은 완아의 얼굴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거기에 있는 것은 오로지 재회의 기쁨이었다. 휘는 눈을 떼지 못하고 완아를 보았다. 그렇게 한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둘을 지켜보던 연화가 마침내 훌쩍 날아올라 녹나무 가지에 묶었던 밧줄을 끊었다. 연화의 머리칼을 섞어 엮은 주술의 도구가 부질없이 제 명을 다 했다.

휘는 맥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숙여진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의 앞으로 완아가 다가앉았다. 차가운 손이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연화가 느낀 그 차가움을 그도 느꼈으리라. 그는 통한에 젖은 눈으로 완아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간 연화가 묶인 팔도 풀어주었다. 붉게 그려져 있던 원의 한 구석을 손으로 문대 지웠다.

주술은 완전히 깨어졌다. 그러나 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완아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또 눈물이 솟았다. 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어찌 우십니까.”

“미안하다, 완아야. 내가 네게 참으로 못할 짓을…….”

완아의 손이 그의 눈물을 닦아냈다. 차갑고 차가운 손. 이 손의 냉기를 이제 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가야 할 시간이에요. 휘 님.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다시 한 번만 제게 저 하늘을 보여주셔요.”

“하늘을……?”

“날다가 떠나고 싶어요. 제 비록 날개는 없지만 날면서 죽기를 원하였나이다…….”

완아의 말을 듣고 있던 연화는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비로소 그 뜻을 깨달았다. 그 옛날 그녀가 그러했듯이 완아도 죽을 자리를 그리 고른 것은 날고자 하는 뜻이었구나. 어찌 그녀가 그것을 몰랐단 말인가.

휘가 몸을 일으켰다. 아지랑이가 일어났고, 이윽고 검푸른 깃털이 찬란한 짐새의 큰 몸집으로 인해 낮은 곳에 위치한 녹나무 가지 몇 개가 부러졌다. 그가 완아를 향해 등을 보이며 앉았다. 완아는 연화를 돌아보며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아 연화는 완아가 새의 등에 타는 것을 도왔다. 손의 형체는 또렷하나, 무게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몸에 새삼 연화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득해졌다. 연화를 바라보는 완아의 얼굴은 사십여 년 전 그녀가 알던 것보다 더 어렸다. 언젯적 모습일까. 휘가 기억하는 열아홉의 모습?

“미안해요, 연화 언니.”

완아의 사과에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전 날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 마지막을 언니가 보게 되리란 것까진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런 걸 보게 해서……정말로 미안해요.”

거듭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진정 마지막이라면 할 말이 있을 것이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눈으로 완아의 얼굴 한 번 더 담고, 눈빛 한 번 더 받고 싶었다. 속절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완아의 차가운 손이 서글프고 서글펐다.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요. 생의 마지막에, 언니가 곁에 있어서 쓸쓸하지 않았어요. 내내 행복했어요, 연화 언니.”

완아가 웃었다. 연화도 웃으려고는 했다. 그녀를 남겨놓고 휘의 등에 올라 이제 휘와 함께 날아가는 완아를 향해 웃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것이 성공했을까?

밤하늘로 천천히 날아가는 검은 새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는데, 빗발이 자꾸만 세져서 연화는 제대로 눈조차 뜨기가 힘들다. 완아가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것도 같은데.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 일도 못했다. 완아의 붉은 옷이 점이 되더니, 이내 검은 새조차 아주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연화는 그대로 서서 완아가 가버린 하늘을 보았다.

비가 오는 반경은 그리 넓지 않았다. 수이산 자락을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맑은 하늘과 둥글어져 가는 달이 보였다.

“다시 태어나면 노란 제비꽃이 되겠다고 했어요, 휘 님.”

완아가 너무도 가벼워 아직 거기 있는지 돌아보는 게 두려웠던 휘에게 조용했던 완아가 그렇게 말했다.

“……연화에게 그리 약속했느냐?”

“언니를 위해서 꽃이 되었다가……그러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때는 휘 님, 당신 곁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누군가로…….”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져 갔다. 돌아보려는 휘에게 그러지 말라고 완아가 말했다.

“연모하였습니다, 휘 님. 당신을 만난 것이 제 일생의 의미…….”

더 멀어진 목소리. 마지막으로 그녀가 웃었다. 낭랑하다 싶은 밝은 웃음 끝에 그녀가 속삭이는 듯했다.

“달이 어찌 저리 밝을까요…….”

휘는 가까워져 가는 달을 보았다. 하얀 구름에 가려지고 있었다. 그 달을 향해 날갯짓하는 그의 등 위에서 죽어서도 놓지 못한 강렬한 염원에, 알 수 없는 힘이 숨결을 불어넣어 잠시 되살아났던 썩은 옷가지와 백골이 덧없이 부서져 내렸다. 높은 하늘의 한 줄기 바람이 그 세월의 먼지를 훑어 휩쓸어갔다.

너무도 순식간이다. 기다림은 그토록 길었는데, 만남은 그것뿐.

이제야 겨우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휘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이가 있었던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귀신이었고, 그마저도 사라졌다.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완아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해 주어야 할 이를 알아보지 못했던 검은 새가 눈을 감자 붉은 눈물이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는 피눈물이 지상에 닿아 산을 태우고 호수를 죽였다. 유독한 연기와 긴 그림자를 남긴 채 검은 새는 달이 미치지 않을 곳을 찾아 날았다.

어둠. 인과의 이치란 것이 있다면, 이제 그가 그녀를 기다려야 할 어둠의 세월은 훨씬 더 깊고, 길 것이다.

휘가 상상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는 어둠 속에 연화가 서 있었다.

그녀는 돌무덤 앞으로 갔다. 묻어야 할 것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그냥 돌무더기에 불과한 것들 앞에 다가앉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못 하였구나.”

돌 하나를 손에 들어 괜스레 만져보았다.

“여기서 계속 보았다면 알겠지. 내가 널…….”

차가운 뺨으로 뜨거운 물기운이 섞였다. 다 끝났다는 실감이 나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널 얼마나 원망했는지, 알지? 너 그리 모질게 죽어서도 아니고, 귀신이 되어서도 아니야. 네가 나한테 가르쳐준 것 때문이야.”

움츠린 어깨가 가늘게 떨려온다. 추웠다.

“너는 내게 외로움을 가르쳐주었지.”

두 손을 들어 어깨를 감싸고 날개를 잔뜩 기울여 비를 막았지만 추위는 떨칠 수가 없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제 다시 한 번 이름을 잃었음을.

완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그녀는 얼마나 자유로웠던가. 홀로 세상을 떠돌며 때가 되면 바뀌는 계절이 그녀의 몸을 바람처럼 훑고 지나가는 걸 만끽하면서도 미처 쓸쓸함을 깨우칠 일은 없었다. 겨울이 오면 이따금 자신도 알 수 없는 무거운 기분에 사로잡혀 익숙한 세상을 낯선 곳인 양 바라본 적도 있었으나, 마냥 사색에 잠겨 있는 걸로 추위가 해결되고 배고픔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다른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일도 잊고 말았다.

완아를 만나면서 그녀는 주위에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배웠다. 그리고 저 자신도 이름을 가졌다. 홀로 지내는 동안 인간이라기보다 새, 어쩌면 하나의 정령 같은 것이 되어 갔던 그녀가 완아로 인해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흰 원숭이를 만나서 몇 가지 주술을 배우게 되었을 때, 그녀는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완아가 내게 건 것도 바로 이런 주술이 아니었는가 하고. 의도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완아가 한 일은 주술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없던 그녀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거듭하여 불러주며 감정을 불어넣었다. 설사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 한 포기 풀이나 나무였다고 해도 완아를 향해 기울었을 것이다. 하물며 인간이었다. 백지가 먹물을 빨아들이듯이 그녀는 완아의 정을 가슴에 채웠다.

미처 몰랐다. 완아가 죽고 난 뒤에야, 자신의 가슴을 채운 완아가 너무 커서 망연해졌다. 처음, 완아가 죽었을 때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십 년 동안 휘가 오길 기다렸던 것은 핑계였다. 다만 그녀는 수이산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완아는 없었지만 매일같이 완아의 무덤에 말을 했다. 십 년을, 대답 없는 무덤을 바라보다 지쳐서 떠났다.

전처럼 세상을 유랑했지만, 이제 무엇을 보아도 어딘가가 허전했다. 잠자코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엔 귓가에 불지도 않는 바람소리가 났다. 그것이 자신의 가슴에서 부는 소리임을 그녀는 아주 늦게 깨달았다.

외로웠다. 외로움이 사무쳐 마침내 눈물로 터졌다. 그녀는 완아가 보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연화가 되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완아가 그녀를 불러주며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 긴 기다림이 오늘 끝이 났다. 완아를 보았지만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완아를 간절히 쳐다보았지만, 완아의 두 눈은 휘에게 향해 있었다. 완아는 일생을 걸어 연모한 이를 만나 행복해 하고 있었다. 말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보고 싶었어, 완아야. 나, 네가 보고 싶었어.”

이제 백골도 없는 빈 무덤에 가슴에 맺힌 말을 쏟아내며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완아가 소망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됐다. 더는 귀신이 되어 이 자릴 떠돌지 않아도 되니 됐다. 완아의 한은 풀어졌다. 그러니 내 원통함도 끝이다.

나 역시 보지 않았는가. 완아가 웃어주는 걸. 듣지 않았는가. 연화 언니라 불러주는 낭랑한 목소리를. 더 무엇을 바라 이 자리에서 울어야 하는가.

다 끝났다. 그러니 이젠 아무것도 없는 나로 돌아가자.

“아니다, 그래도 문복이가 날 기다리고 있지.”

위후의 집에서 박쥐 문복이 밤이 되면 저택 앞에 있는 큰 느티나무에 올라 두 눈을 반짝거리며 기다릴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 조금 가슴에 훈기가 돌았다. 돌을 내려놓고 비실거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돌아서서 얼마 못 걸어가 앞으로 쓰러졌다. 맥없이 풀린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는데 배두렁이 위로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다. 그녀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삼실로 만든 허술한 목걸이에 꿰인 것은 료가 준 비취가락지였다. 신고 있던 신도 버리고 머리꽂이는 물론, 죽음을 더 확신하도록 머리채까지 끊어 버리고 왔지만 이것은 차마 내버리지 못했다. 가지고 있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료는 결국 그녀의 일을 잊을 테니까…….

“료.”

한 번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가까스로 억눌렀던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료. 료.”

애써 생각지 않았던,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한꺼번에 사무쳐 왔다. 울음소리를 삼키며 그녀는 잠시 그 폭풍 같은 감정에 몸을 맡기고 흐느꼈다.

그도 그녀를 그리워할까? 완아가 죽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보고 싶어서 마음이 갈라지고 사는 것이 꿈같을까?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가 아는 서투른 주술에 모든 진심을 담아 그녀의 일을 잊기를 빌었던 것이다.

바란 대로 잊어가는 것일까? 그녀가 행한 서투른 주술은 정말로 그이의 마음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을까?

어째선지 그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얼굴조차 아득하여 사뭇 오래전에 본 것만 같다. 가락지를 손에 쥐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를 잊지 말아요. 아니야, 잊어. 잊지 마요. 아니야, 아니야……. 잊어요. 잊어요. 다시는 가지 않을 테니까. 정말로 다시는…….”

한때 귀여워했던 아이. 가엾게 죽은 아이. 그녀가 원했던 대로 그의 마음이 지워지고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의 기억도 흐려져, 처음 마음을 주었던 여자는 인간이었다는 정도로 밖에 남지 않는다고 해도 원망할 수 없다.

그가 연모한 그녀는 거짓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환멸스러울까. 또 얼마나 상처 입을까. 이대로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여 그의 안에서 묻혀주는 것이 좋다.

가락지를 옷 속으로 밀어 넣고 그녀는 일어섰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날아올랐다. 한 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돌무덤. 곰발바위와 낡은 움막.

다시 오게 될까? 언젠가는.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일 것이다.

그녀는 떠날 것이다. 문복과 함께 흰 원숭이가 사는 섬으로. 이제 그녀는 그의 종이라도 되어 빚을 갚아야 한다.

높이 날아 하늘에 더 다가갔다. 그녀는 미처 몰랐으나 날고 있는 그녀를 따라 비구름이 따라왔다. 멀리서 보면 그녀가 비구름 모양을 한 연을 끌고 가는 듯이 보였을 것이다.

오랜 시간 바랐던 일은 끝냈으나, 착잡한 마음은 당장엔 씻을 길이 없었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날개를 나부껴가던 그녀의 앞쪽에서 불현듯 우렛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하늘엔 온통 검은 구름이 깔려 있다. 그 사이로 언뜻 번개가 쳤고, 그 환한 불빛에 그녀는 아차 하며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번개의 환한 빛으로 일시에 사방이 밝아진 짧은 순간, 뭔가 붉은 것을 본 듯한 잔상이 남았다.

번개의 불빛이 가시자 사방은 또 캄캄해졌다. 우르릉하고 구름 너머에서 하늘이 신음했다. 생각만큼 반응이 빠르지 못해서 너무 환한 빛을 보고만 그녀는 얼마 동안 눈이 침침했다. 잠시 제자리에서 나는 동안 방향 감각조차 잃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세를 읽으려 했지만 퍽 높이 올라왔던 터라 그리 여의치 않았다. 얼굴의 물기를 훔치며 그녀는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자신의 날갯소리가 유난히 크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얼마 후였다. 굵은 빗줄기가 소리를 얼마쯤 삼키고 있을 텐데도 날개 나부끼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별났다. 깃이 너무 젖어 날기가 힘든 거라면 어딘가에서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날개를 활짝 편 채 몸을 숨길 곳이 있는지 살폈다.

펄럭, 펄럭.

그녀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전에 들려온 날갯짓하는 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뭔가 커다란 새가 근처에 있다. 아마도 위쪽에. 그녀는 아까 번개의 불빛에 본 붉은 잔광을 떠올렸다. 새였구나.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 새가 날아가길 기다렸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어서…….

그러나 그 새의 날갯짓 소리는 거듭하여 들려왔다. 간격이 길다. 한 번 날아서 많은 공기를 날개에 품을 수 있는, 굉장히 큰 새가 분명하다. 그 새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각오를 다졌다. 사람의 마을이든 어디든 우선 내려가야겠다. 제자리에 머무를 정도로 잘게 움직이던 날개를 크게 펼치며 그녀는 빠르게 아래로 낙하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날개가 한층 무거워졌다. 그래도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날았다. 비가 올 때 이런 식으로 나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그것이 자신이 날아본 가장 빠른 속도란 것은 날면서도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의 바로 위에서 따라오는 더 크고, 빠른 새가 있다는 것도 확신했다.

뭐지? 날 사냥감이라 착각한 매라도 되나? 돌아보면 안 된다. 쫓기는 동물이 저지르는 가장 멍청한 실수가 뒤를 돌아보며 당황하여 제 속도를 흩뜨리는 일이다. 그녀는 언젠가 우송에게 들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상황이 되자 대체 무엇에게 쫓기는 것인가 하는 무서운 호기심을 막을 수가 없었다. 참느라고 애를 썼다. 하지만 결국엔 힐끗 돌아보고야 말았다.

검다. 온통 먹빛의 검은 새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붉은 눈이…….

“료?”

다시금 돌아보며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너무도 당황하여 가까스로 고개만 돌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리가 먹통이 되고, 몸은 숨 쉬는 법, 나는 법까지 망각한 채 나무토막처럼 굳었다. 완전히 균형을 잃고, 그녀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것보다 그렇게 추락하는 편이 빨랐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숲 속이었다. 전나무 이파리며 잔가지를 부러뜨려가면서 마침내 땅바닥에 나뒹굴게 되었을 때, 고통스러움조차 뒷전이고 정신만 번쩍 들었다.

본능적으로 날개로 몸을 감쌌던지 일어서는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무작정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몸을 감춰야 했다. 멍청하게 그의 이름을 말하고 마는 실수를 했지만 빗속에서 그 목소리가 그에게 들렸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물며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침아에게 날개가 있다니. 믿을 수 없는 것을 볼 경우 때로 눈은 머리를 배반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거기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그녀는 미친 듯이 나무 사이를 헤치며 달려갔다.

뒤쪽에서 와지끈 소리와 함께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료가 내려왔다. 그 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그녀는 힐끗 뒤를 보았다. 다치지 않았기를. 다쳤다 해도 크게 다친 게 아니기를. 제발. 제발.

기도라도 하듯이 바라며 달려가는 그녀의 등 뒤로 창을 찌르는 듯한 목소리가 숲에 퍼졌다.

“서!”

맹수의 포효가 때로 그리하듯이 그녀가 발을 디딘 땅이 부르르 떨렸다.

“거기 서!”

한순간 그 말에 붙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다시 발을 떼었는지, 다시 달리기 시작했는지 그녀도 설명할 수 없다.

“서! 서라고! 침아야―!”

이름을 불렸을 때 또 한 번 몸이 뒤로 잡아당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무언가 차올랐으나 꽉 누르면서 그녀는 달렸다. 사라져야 한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달아나야 한다. 그가 본 것이 헛것이었다고 믿게 해야 한다. 이제 와서, 자신이 어떤 얼굴로 그를……다시 본단 말인가!

추격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정말로 혼신을 다해서, 죽을힘을 내어서 달아나고 있었으나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료는 타고난 사냥꾼이라는 점이었다. 비록 이곳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 낯선 땅이라고 해도 산 속인 이상, 숲에 들어선 이상 그가 잡기로 결심한 것을 놓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달려가느라 발에 밟힌 풀의 풋내, 너무 급해 접는 것조차 잊은 날개에 부딪쳐 생채기가 생긴 나무들의 진액 냄새. 무엇보다 그녀가 사력을 다할수록 토해 내는 숨결을 비롯한 체취는 강렬해졌다. 마치 한밤중에 등불을 들고 달려가는 형국으로 료에게는 그녀가 지나간 길의 잔상이 또렷이 보였다.

그는 몇 번이고 멈추라고 소리쳤다. 이름을 부른 것도 수차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리석은 도주를 계속했다. 료는 쫓아가 붙잡는다는 생각 말고, 모든 것을 그쳤다. 그러나 온몸에 요동치는 격렬한 감정은 미친 듯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왜? 왜? 대체 왜 그런 거냐……? 왜!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은 자꾸만 좁혀지는 게 분명한데, 숲이 끝나는 자리에 이르고 말았다. 앞을 내다보니 바위산이 펼쳐지고 있다. 드문드문 나무로 짐작되는 것이 보이긴 했으나 거기에 몸을 숨긴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됐다. 방향을 꺾어서 다시 숲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을 때, 그녀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뛰어가던 그녀는 무언가를 보고 급히 날아올랐다. 안으로 움푹 패인 어두운 구멍 같은 것을 언뜻 보았다. 하나가 아니라 여기저기 그런 구멍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자 아직 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날아서 도망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느꼈다. 숨어야 한다. 저것이 그녀가 바란 대로 동굴이라면…….

그녀가 마침내 그중 하나의 입구에 다다랐다.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이다. 어쩌면 숲을 벗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방향을 돌릴지도 모른다. 제발 그래주길 바라면서 그녀는 굴 안쪽의 어둠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일말의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뒤꿈치를 들고 격해진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토록 주의했음에도, 무언가 다른 것이 소리를 냈다. 작은 쥐떼가 웅성대는 듯한 소란. 쭈뼛 소름이 끼쳐 휙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에 천장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작은 짐승들의 눈이 보였다.

박쥐. 그렇지만 그들은 꽃의 달콤한 꿀 먹는 걸 가장 좋아하는 문복과는 달랐다. 하필이면 다른 짐승의 피 마시길 즐기는 박쥐 무리가 쉬는 동굴을 택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져 망연해진 그녀 앞에서 박쥐들은 침입자가 홀로 있는 것을 보았고, 찬찬히 살핀 끝에 그중 하나가 날개를 펼쳐 그녀를 향해 날아들면서 다른 것들 역시 빠르게 동조했다.

동굴 밖으로 나가든가 이 지독한 무리의 공격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날개로 몸 앞쪽을 감싸며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위협하듯 그녀의 위를 날기 시작한 박쥐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비로소 흰 원숭이를 떠올렸다. 자신의 왼쪽 눈 위를 덮으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위후 님, 제 눈이 보이는 곳에 계신다면 아무쪼록…….”

그러나 그녀의 요청은 너무 늦었다. 머리 뒤쪽에서 한차례 써늘한 바람이 불었다. 비가 들치는 그 바람 속에 날갯짓하는 커다란 새의 그림자가 있었다. 짐새가 동굴 안쪽을 향해 날카롭게 울부짖자 박쥐들이 일거에 멈추었다가 다음 순간, 우르르 동굴 밖으로 몰려나갔다. 작아도 수백에 가까운 새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바람에 그녀는 그만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몸을 일으키며 돌아본 동굴 입구에 하늘로 흩어져 가는 새까만 점들 사이로 큰 그림자가 이곳을 보고 있었다. 새빨간 두 눈이 순간 커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어느새 큰 새는 동굴 입구에 발을 내렸다. 머리를 낮추어 가까스로 들어올 만한 입구. 대신 안쪽은 천장이 훌쩍 높아진다. 료는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저벅저벅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넋을 놓고 있던 그녀가 불현듯 일어나 동굴 안쪽으로 뛰었다. 어딘가에 밖으로 향하는 다른 출구가 있을지 몰랐다. 실제로 그런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찾아낼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또다시 달아나는 그녀를 보고 노하여 소리를 지르며 그가 짓쳐들었다. 그의 발톱에 날개가 붙들린 순간 그녀는 더는 가지 못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료의 발톱은 그녀를 짓눌러 내리다 그녀의 날개를 찢어버리려는 듯이 잡아당겼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날개옷으로 돌리면 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으로 눈앞이 새까매졌다.

“왜! 대체, 대체 이것이 다 무어냐! 네게 왜 이런 게 있어! 왜! 왜!”

피를 토하듯 부르짖는 그의 목소리가 동굴에 부딪혀 음산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는 지독한 고통에 압도당했다.

“그만, 그……제발, 아, 아아아아!”

실제로 날개의 어딘가가 잘못되었는지 격통은 끝없이 이어졌다. 몸과 이어진 날개옷을 억지로 벗으려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제는 알았다. 날개가 되었을 때의 날개옷은 정말로 그녀의 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억지로 떼어내는 것은 팔다리를 찢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녀는 무참히 괴로워하다가, 그만 그대로 까무러쳤다. 그녀의 한쪽 날개를 망가뜨린 게 분명해졌을 때, 노여움으로 들끓던 료의 머리가 아주 조금 진정되었다. 그제야 침아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료는 발톱을 떼고 옆으로 비켜섰다. 거친 숨이 가라앉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약간만 마음을 풀면 다시 미칠 듯한 노기가 그를 삼켜 무슨 짓이든 저지르고 말리라.

비가 오는 하늘에서 그를 향해 날아오는 하얀 새를 보았을 때, 그리고 그 날개를 지닌 여자가 그의 이름을 불러 침아임을 확신한 순간, 그의 놀라움은 오로지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환희로 이어졌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는 그녀의 눈에 떠오른 공포의 감정을 보았다. 그것이 수이산까지 날아오는 내내 들끓고 있던 광포한 무언가를 불러내 불을 질렀다. 기쁨조차 집어삼키는 노여움. 가슴을 채운 감정이 너무 커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폭풍 같은 감정을 어떤 방향으로 폭발시켜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망연해졌던 그의 앞에서 침아가 뒤를 돌아 달아났다. 아래로, 아래로.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료는 온전히 노여움에 자신을 내주었다.

그녀를 쫓아 낙하를 시작하는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로지 하나. 잡아서 죽이고 말겠다는 것이었다.

네가 정말로 나를 배신했던 거구나.

네가 나를, 네가 나를……네가, 네가!

지금 쓰러진 침아를 보면서도 료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죽이고 싶다. 이대로 죽여서, 다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다. 차라리 그녀가 범에게 당해 죽었다는 끔찍한 슬픔에 익사해 죽고 말지, 이런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다 죽이고 싶었다. 침아가 그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덮을 수 있다면 휘이건, 그 난새이건 간에, 설사 그것이 침아라 해도 다시 죽여 없애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도 죽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다. 침아를 따라서. 더는 그녀가 추운 곳에서 방황하지 않게 그가 따라가 줄 생각이었다.

뚝, 눈물이 떨어졌다. 피의 색깔을 띤 그 붉은 눈물이 돌에 떨어져 연기를 피워 올리며 돌조차 부식되었다.

덜덜덜 떨리는 몸을 가누며 료는 뒷걸음질 쳤다. 몸이 동굴 벽에 닿아 멈출 때까지. 그대로 웅크려 앉았다. 날개 속에 머리를 숙여 묻고 료는 끙끙대며 울었다.

어째서 이리되었나. 도대체 내가 놓친 게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그녀가 저런 모습으로, 나는 이런 모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죽어서 널 다시 만날 생각으로 웃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네가 내 가슴을 또다시 찢어놓았다. 전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왜. 왜? 대체 왜.

대답을 들을까? 아니면 이대로 죽일까?

료는 그 두 길을 앞에 놓고 미친 듯이 번민하다가 머리를 들었다. 붉게 번진 시야에 하얀 날개에 감싸여 쓰러진 침아의 모습이 너무도 작게 보였다.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갈가리 찢긴 가슴의 핏빛 덩어리들을 헤치며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커다랗게 놓여 있던 무언가가 부상했다.

“침아야…….”

거의 넋이 나간 듯이 비틀거리며 료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손이 필요했기에, 어느샌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낯설기만 한 흰 날개를 헤치며 까만 머리칼에 감싸인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떨린 것은, 그것이 실제임을 믿지 못하는 얼마간의 불안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그의 손끝에 침아의 얼굴이 닿았다. 매끄러운 피부. 눈썹. 눈. 코. 입술. 아무리 만져도 사라지지 않는 분명한 현실 속의 존재였다.

그녀의 몸을 제대로 보기 위해 앞으로 돌렸다. 흉터가 없는 깨끗한 왼쪽 얼굴이 낯설어 손을 대었을 때, 흉터의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눈가림이다. 휘의 손길이 닿았음인가?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또 다른 격통이 가슴을 휩쓸었다. 그자와 무슨 짓을 했느냐? 너는 정말 그자를…….

덥석 그녀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 조르려 했다. 그러나 그 가느다란 목에 힘을 넣어 조르는 순간 퍼뜩 놀라 손을 뗐다. 료는 제 두 손을 내려다보고 다시 침아의 얼굴을 보았다.

으드득 입술을 깨물며 료는 땅을 내려쳤다. 손이 깨지고 피가 터져 나왔지만 거기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오로지 침아에게 못 박혀 있었다.

“죽이고 싶다.”

음산한 마음의 핏덩어리가 말이 되어 흘러나왔다.

“널 죽여 버릴 테다.”

저 자신을 설득하듯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몸은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료는 침아에게 고개를 기울인 채 얼굴과 목, 어깨와 팔을 만져보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녀 위로 허물어졌다. 품에 안았다. 꼭 껴안은 몸은 그가 아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알고 있는 그녀의 몸이었다.

처음엔 사뭇 차가웠으나 가득 밀착하여 안고 있는 사이 점차 따스하게 그를 데워왔다. 체취는 물론 가느다란 숨결에도 향기를 지닌 침아, 바로 그의 여자였다. 죽지 않았다. 살아 있다. 정말로 살아서, 이렇게 다시 그의 품에…….

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얼굴에 쉴 새 없이 뺨을 비볐다. 눈, 코, 입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입술을 대며 죽도록 그리웠던 제 여자가 살아 있음을 매 순간 확인했다. 그녀의 입술을 덮어 그대로 뜯어먹을 듯이 사납게 훑어냈다. 입술을 벌려 뜨거운 혀를 탐하면서 그의 입맞춤은 더욱 포악해졌다.

까무러쳤던 그녀가 억지로 현실로 끌려나올 정도로 거친 애무가 퍼부어졌다.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사내를 머잖아 알아보았다.

“……료.”

“닥쳐.”

힘겹게 그를 부르는 소리에, 료는 잠시 멈칫했다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내려다보는 눈빛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감정으로 번득였다.

“료, 내가…….”

경고를 무시하고 말하려 했던 그녀의 입을 료가 손으로 틀어막았다. 음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채웠다.

“한마디도 지껄이지 마.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손을 치운 자리에 료의 입술이 다가와 거칠게 입술을 덮었다. 받는 이는 물론 하는 쪽도 고통스러운 입맞춤이 거듭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금의 이 현실이 꿈이 아님을 계속 확인하고자 하는 료의 마음을 그녀가 모른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앞의 일을 외면하기 위해 차라리 다시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감을 자격조차 없다. 그 상냥했던 료를 이렇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였다.

눈을 떴다. 료를 보았다. 그녀를 품을 때면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처럼 행복해하던 그가 사뭇 괴로운 얼굴로 가쁜 숨에 허덕이고 있었다. 아직 입맞춤뿐인데. 애무뿐인데도.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료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구겨졌다. 눈이 일그러지며 순간 뿌옇게 젖어들었다. 소리쳤다.

“보지 마! 그 흉측한 눈으로 날 보지 말란 말이야!”

그 말은 차라리 그녀에게 구원이었다. 눈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다.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침아를 보던 료는 얼굴을 붙잡아 도로 자신에게 향하게 했다. 눈을 마주할 수는 없어도, 외면하는 것은 더 참을 수 없었다. 작은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 제 손아귀에서 터뜨릴 것처럼 꽉 움켜쥐고서 료는 광기어린 입맞춤을 퍼부었다.

“죽여 버릴 테다.”

입술을 떼어 숨을 삼키는 그 짧은 순간마다, 료는 그 말을 반복했다. 침아의 눈꺼풀이 그때마다 바르르 떨렸다.

죽이겠다는 소리가, 어째서 그녀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리는 걸까. 이름을 불러주며 연모한다고 거듭 속삭이는 말을 들을 때면 종래엔 온 마음이 떨려 머릿속이 아득해졌던 것처럼 그의 무서운 위협이 또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널 죽여 버릴 거야.”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는 말과 함께 그가 그녀 안으로 짓쳐들어왔다. 이미 그를 받아들일 각오를 한 몸이었지만 조금의 절제도 없는 그의 격렬한 들이침에 머리끝까지 쩡, 하고 울리는 충격을 받아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토해 냈다. 그 소리를 들었지만 료의 움직임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받친 팔을 더 강하게 제게로 끌어당기며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 없는 짐승처럼 몰아쳤다.

그녀의 신음이 흐느낌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가, 참으려고 노력하면서 약해진다 싶으면 료의 몸짓은 더욱 격해지길 반복했다.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제가 봉해 놓은 그녀의 입에서 지금 그에게 안기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울 소리가 나오길 바란 것이다.

그러한 그의 마음을 그녀가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어렵게 깨달았을 땐 그녀가 거의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료의 목에 두 팔을 걸어 그를 안았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료가 멈칫했고 이어지는 움직임도 확연히 느려졌다. 그녀는 생각하는 걸 그치고 그가 일으키는 거센 물결에 흔들리는 배처럼 자신을 놓은 채 가냘픈 신음을 계속했다.

“소용없어, 이래도.”

위협이라기엔 사뭇 떨리는 료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눈을 떴다. 그를 보면서 그의 경고를 거듭 어겼다.

“내가 이러고 싶은 거예요. 당신은 당신 좋을 대로 해요.”

아예 움직임을 그치고 료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비수처럼 번득이는 눈빛 속에 그의 손이 그녀의 목을 쥐었다.

“말뿐인 줄 알지?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희미하게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좋을 대로, 하라니까?”

머리를 들며 그에게 입맞춤하려 하였을 때, 등 뒤의 날갯죽지가 타는 듯이 아파왔다. 비로소 그녀는 날개를 옷으로 돌릴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면서 그녀는 료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상냥했다. 하염없이 상냥하게 그의 차가운 입술을 녹여갔다.

그와 헤어진 후, 홀로 있을 때조차 생각지 않으려 한 비밀스런 꿈이 이루어졌다. 한 번만 더 료를 만나 숨 막히도록 그에게 안기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이. 얼마나, 얼마나 이러고 싶었던가.

그 감격의 마음을 담은 입맞춤. 그것이 전해졌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상냥한 입맞춤은 얼마 못 가서 료의 굶주린 듯한 애무에 삼켜졌다. 다시 료는 세찬 급류 속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그녀는 기꺼이 그 급류에 몸을 맡겼다.

언젠가 강물에 빠져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놀리던 때의 절박함도 이렇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곤해 죽을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더 료를 느끼고 싶어서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제 몸을 쪄 누르는 그의 등을 그녀도 꽉 껴안고 두 다리도 그에게 휘감아 붙였다. 료만이 아니라 자신 역시 그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보이려 생각나는 것은 다 했다.

애증에 들끓는 눈빛처럼 료의 몸짓은 순간순간 그 뜻이 달라졌다. 오로지 괴롭히려는 듯이 포악 일변으로 치닫다가도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면 부드러워지고 더할 나위 없는 애련의 눈길로 그녀를 녹일 듯이 바라보다가 또 그런 저 자신에 진저리를 내면서 그녀를 깨물고 할퀴고 짓이겨댔다. 다시 저에 의해 붉은 생채기가 남은 살결을 어루만지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다 문득 숨 쉬는 것도 보기 싫어져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자신의 눈을 원망하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숨 쉬는 모습이 보고 싶어 허겁지겁 손을 떼고 그녀의 입가에 귀를 대고 가쁜 숨소리를 확인하고는 젖어드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도 그녀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기라도 할라치면 성을 내며 손을 뿌리치고 아예 상반신을 일으켰지만 얼마 못 가 몸을 내던지듯 그녀를 부둥켜안으며 얼굴을 포개어 정신없이 뺨을 비비고 귀를 빨고 입술을 빨고 머리칼을 씹어댔다.

증오라는 밀물이 가득 찼다가 빠지기 무섭게 애정의 해일이 들이닥쳐 그를 익사할 지경으로 몰아댔다. 연모한다, 아아, 너를 연모한다. 그 말이 하고 싶어 목구멍까지 솟구쳐 나오려는 것을 쓰게 삼켜 가슴으로 내려 보내는 짓이 반복될 때면 고개를 쳐들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죽여 버릴 테다!”

그야말로 미친 자의 몸부림이었다.

밀어닥치는 감정의 홍수로 범벅인 그 육신의 광기를 제 작은 몸으로 받아내던 그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지 못하고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득히 깊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함몰감이 그녀를 덮쳤다. 아주 암흑이 찾아오기 전에, 그녀는 어렴풋하게 느꼈다. 료가 그녀 안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거듭거듭, 뜨거운 흔적을 남기면서 료는 크게 신음했다.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에서 들려왔다.

“침아야, 침아야……. 아아, 침아야.”

그래요, 그게 내 이름이야. 다시 그게 내 이름이야.

그녀, 침아는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사방이 칠흑이었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바깥 하늘이 제법 환한 것을 알게 되었다. 창은 닫혀 있지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퍽 희다. 하긴 이 움막은 문이 동쪽을 보고 나 있으니…….

거기까지 생각하던 침아가 퍼뜩 놀라 몸을 일으키다가 나무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안 그래도 온몸이 아픈데, 이 실수로 그야말로 사방이 욱신거렸다. 몸을 웅크리고 팔다리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아픈 곳을 주무르던 그녀는 어느 순간 제 몸을 덮고 있어야 할 중요한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날개옷. 날개옷이 없다.

“무얼 찾아?”

제 등을 돌아보고 침상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들려온 목소리. 침아는 다시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간에 서 있는 검은 형체를 보았다. 료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꿈이……아니었다.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믿을 수 없어졌다. 이곳은 틀림없는 수이산 속 움막이다. 어떻게 둘이 이 움막에 와 있는 것일까. 침아는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눈에 들어온 풍경은 비비기 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완아가 쓰던 침상에 기대어 료를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료. 어떻게…….”

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깥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걷힌 하늘은 투명하도록 맑은 푸른빛을 불러 모으고 있다.

“비가 그쳤다.”

덤덤한 중얼거림. 잠시 후 거기에 짤막한 말을 보탰다.

“보름달을 볼 수 있겠지.”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왼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침아 쪽으로 보인다.

“돌려받고 싶으냐?”

그녀의 날개옷. 침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료의 싸늘한 눈이 반짝였다. 입술이 미소 짓듯이 휘어졌다.

“찾으러 와.”

그가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 문간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침아는 몸을 일으켜 급히 쫓아나갔다.

“잠깐만요, 잠시만……!”

달려 나간 침아는 큰 날개를 나부끼며 비상하는 검은 새의 뒷모습을 보았다.

“료!”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힐끗 새가 뒤를 돌아본다. 그의 부리에 날개옷이 물려 있는 것이 보였다. 막 떠오르는 햇살 속에 날개옷이 새하얗게 나풀거렸다.

그러나 침아의 눈을 채운 것은 그녀를 돌아보는 새의 붉은 눈이다.

세상에 다시없을 심홍의 보석이 말갛게 일렁거리다 마침내 뚝, 한 방울의 영액을 남기고 아주 멀어져 갔다.

한참 만에 침아는 걸음을 옮겨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을 향해 갔다.

검은 곰발바위의 붉은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그녀의 손만 한 크기의 패인 자국이 생겼다. 새까만 암석 중에서 그곳만 붉었다. 그것은 녹이 슨 쇳빛이다. 이 돌에 그 어떤 기운이 있었다면, 이 흔적이 생길 때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돌을 대신해, 침아가 뒤늦게 제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자신이 그의 가슴에 남긴 상처. 그것이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침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냥 날 죽이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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