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회상 (26/33)

25. 회상

어림잡아 팔십 년, 어쩌면 구십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기근이 온 나라를 덮쳤던 어느 봄에 배고픔에 지쳐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을 작정을 하고 산을 올랐던 계집아이가 있다. 계집아이의 나이는 여섯 살, 어쩌면 일곱 살. 무엇에 홀린 듯 산으로 향한 계집아이는 절벽 끝 당산나무에 이르렀다.

거기서 금줄을 두른 늙은 소나무의 우듬지에 나신에 가까운 몸을 드러내고 허옇게 센 머리를 풀어헤치고 앉아 있던 어떤 여자를 보았다.

아름다웠다.

황량한 대지에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하는 핏빛의 낙조(落照)를 뒤로 한 새하얀 여인의 자태는 사위스럽도록 고왔다.

또한 여자에게는 회색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천녀天女…….”

계집아이는 절에 가본 기억도 없었고, 불화佛畵를 본 적은 더더욱 없었으나 비천飛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날개옷을 입고 하늘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들 말이다.

아무리 기근이 들어도 감히 아무도 성황신인 나무를 손대려 하지 않아 그 산에서 홀로 푸른빛을 머금고 있던 소나무의 솔잎을 아무렇지 않게 뜯어먹던 여자는 계집아이를 보고는 말을 걸어왔다.

안타깝게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대륙에 사는 자들의 말씨를 썼고 계집아이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미천한 인간이라 하늘세계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여자는 말을 거는 것을 단념한 뒤로는 계집아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잊은 듯이 솔잎만 먹었다. 그러다 여자가 다른 움직임을 보인 것은 하늘 가장자리로 남기가 자욱하게 깔릴 무렵이었다.

나무를 딛고 일어선 여자는 마치 걸어가는 것처럼 허방에 발을 내딛더니 눈 깜빡할 새에 계집아이의 눈에서 사라져 까마득히 아래로 떨어졌다.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아래를 내려다본 계집아이는 잠시 후 넋을 좀 추스르고 열심히 천녀를 불렀다. 그 부름이 끌어올리기라도 한 듯이 여자가 다시 계집아이의 눈앞으로 솟아올랐다.

회색 날개가 느릿느릿 펄럭이는 동안 옥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감싼 하얀 머리카락이 거미줄로 짠 옷이라도 되는 양 여자의 주변에서 나풀거렸다. 천녀, 그 외의 그 무엇으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여자는 희귀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이 계집아이를 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떠나려 하였다.

“데려가 주세요, 천녀 님, 저를……저도 저 하늘로……!”

그 등에 대고 부르짖은 것은 거의 발작과도 같았다.

돌아보는 여자를 보면서 계집아이는 중요한 문제를 깨달았다. 아,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겠구나.

그래서 여자가 문득 날갯짓 한 번 하여 계집아이의 지척까지 이르렀을 때는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말을 잃었다.

여자는 계집아이의 더벅머리를 헤치고 땟물이 흐르는 얼굴을 들여다본 뒤, 아랫도리의 옷을 벗겨 내렸다. 그제야 여자가 살짝 웃는 것 같았다.

고추가 안 달려서. 나중에 알았다. 그것이 달려 있었다면 아무리 어여뻤어도 여자는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으리라. 다른 건 시간과 함께 거의 다 희미해졌는데 고추 안 달린 계집애들을 비웃던 동네 꼬마의 놀림 말만큼은 훗날이 되어서도 기억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계집애였기 때문에 천녀의 선택을 받았으므로.

물론, 여자는 천녀는 아니었다. 하지만 계집애여서 여자의 선택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자는 뼈에 거죽만 남은 삐쩍 마른 계집애를 쉽사리 안아 들고 하늘로, 하늘로 날아갔다.

그렇게 계집애는 죽을 고비를 넘어서 고획조(姑獲鳥)에게 거두어졌다.

하늘과 땅, 하늘과 바다 사이에 존재하는 그 이름도 모를 무수한 정괴(精傀)들 중에 고획조라 불리는 것이 있다. 인간들 말로 날개옷이라 일컫는 우의(羽衣)를 벗고 있을 때에는 평범한 인간, 다만 비범하리만치 아름다운 인간의 여자인데 우의를 걸치면 날개가 돋고 새가 되기도 하는 영물이다.

조화옹의 뜻을 모두 헤아릴 자가 하늘 아래 존재치 않는 것처럼 고획조의 시작도 어디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존재하기에 있다고 알 뿐이다.

고획조라는 명칭은 이 새가 인간의 계집아이를 훔쳐간다는 속설이 있어 붙여진 불쾌한 이름이다. 분명 이 새는 오로지 계집애를 골라 자신의 뒤를 잇게 키우지만 그것이 제 새끼일 수도 있다. 다만 제 새끼라 하더라도 미태(美態)가 제 뜻만 같지 않으면 아비의 손에 맡겨 돌아보지 않으니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자못 독하다 하여 모진 소리를 듣는 까닭이다.

이들은 꽃이며 솔잎, 대나무열매 등을 먹고, 이슬과 달콤한 샘물을 마시는 점에서 거의 화정(花精), 즉 꽃의 정(精)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극으로 치닫는 탐미에의 본능은 서로 질세라 비슷하지만 한쪽은 달밤을 낮으로 여기고 화정은 해 뜨는 낮을 사랑한다.

하지만 화정과 다른 결정적인 것은 고획조는 날개옷을 벗었을 때는 극히 취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날개옷에 동화라도 된 듯이 시력도 청력도 인간의 그것보다 월등히 좋아지긴 하나 그렇다고 제 날개가 돋지는 않는다. 때로 인간들의 눈에 띄어 수모를 겪는 일이 있기에―심지어 어떤 불행한 새는 진晉나라 때, 인간 남자에게 날개옷을 빼앗겨 남자의 처가 되어 세 아이를 낳았다가 훗날 날개옷을 되찾아 하늘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인간들의 기록에까지 남았다―이들이 밤을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깊은 밤, 달빛이 좋을 때를 골라 밤하늘을 너울거리며 노니는 항아와도 같이 아름다운 여자. 그들을 부르는 다른 이름, 야행유녀(夜行遊女)가 지어진 까닭이다.

계집애는 바로 이런 여자의 손에 길러졌다. 아니, 길러졌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훗날 머리가 여물어 생각해 보니 그 여자는 계집애를 만났던 그때 이미 반쯤 미쳐 있었다.

둥지라 할 것도 딱히 정해 놓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동안 계집애의 일을 까맣게 잊고 사라졌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엔 정말로 버려졌구나 생각하면서 계집애가 한겨울에 산속 동굴에서 솔잎과 눈만으로 연명하면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지낸 적도 세 번이나 된다. 여자는 훌쩍 날아갈 때 그러했듯이 어느 날 훌쩍 계집애 앞에 나타나 날개옷을 벗어 계집애에게 던지고 불을 지핀 동굴에서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계집애가 가져온 음식을 먹고 마시며 잠만 잤다.

솔방울을 모아와 불을 지피고, 여자가 먹을 솔잎을 모아오고, 눈을 녹여 마시게 하고, 여자의 머리를 빗겨주고 날개옷을 손질하는 등의 자잘한 일을 계집애는 한 번의 불평도 없이 해나갔다. 칭찬으로 들리는 말 한마디 들은 적 없었다.

여자는 보름날 밤이면 반드시 모습을 감추었고 며칠 후 돌아왔을 때에는 몹시 곤한 듯이 이틀쯤은 잤다.

그렇게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채, 변변찮은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이 같이 보낸 해가 5년쯤 지났다. 다시 돌아온 겨울엔 여자가 계집애를 두고 오래 떠나 있는 일이 없었다.

여자는 그해 들어 많이 아팠다.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때로 한 움큼씩 빠지기도 했고 날개의 색은 더욱더 거뭇거뭇해졌다. 본래 여자의 머리색은 새까맸을 것이고 날개는 눈부시도록 희지 않았을까, 하고 계집애는 상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큰 눈이 내려 그때 머물던 동굴 입구가 거의 막히다시피 한 어느 날이 있었다. 계집애는 입구부터 바깥으로 통하는 길까지 눈을 치우느라 바빴다.

그날 밤, 보름달이 떴다. 종일 누워 있었던 여자는 늘 그랬듯이 동굴을 나서 날아갔다. 돌아오지 않을 줄 알고 잘 준비를 하고 눈을 감고 있던 계집애는 동굴 입구의 문을 밀치는 소리에 놀라 깼다. 토끼나 사슴 같은 건 줄 알았다. 겨울이면 이따금 따뜻한 곳을 찾아 눈먼 짐승들이 찾아들 때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돌아온 것이었다. 여자는 빈손이 아니었다. 들고 온 무언가를 가지고 계집애에게 다가와 어깨에 둘러보았다. 허리에 닿을락 말락 한 길이의 그것은, 한 벌의 짧은 우의(羽衣)였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차는지 고개를 젓더니 여자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 동굴 밖으로 나섰다. 계집애는 여자 뒤를 따라갔다.

보름달이 내리비추는 눈밭 위로 걸어 나간 여자가 문득 그 자리에 앉더니 기괴한 바느질을 시작했다.

쌓인 눈의 빛에 의지해 제 날개의 안쪽에서 아직 빛깔이 어두워지지 않은 깃만을 골라 뽑아냈다. 신중한 손놀림은 느렸지만 눈 위에 쌓이는 깃털 뭉치는 조용히 쌓여갔다. 또 머리카락을 몇 올이고 뽑아 이어 묶었다. 이어서 허리춤의 띠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걸 보니 뼈바늘이었다. 그것으로 여자는 제 팔등을 찔렀다. 피가 솟아났다. 그 피에 적신 머리카락이 실이 되었다. 그것으로 깃털을 꿰어 우의의 아랫단을 이어갔다.

은색 달빛이 땅의 눈 위에 이르러 희푸른 아지랑이가 되어 일어나는 겨울밤에 새하얀 입김을 피우며 그런 괴이한 일을 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계집애의 눈에는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두렵도록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새삼 홀려 계집애는 추운 줄도 모르고, 달이 하늘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도 모르고 그저 여자만을 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동굴 안에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계집애를 안아다 동굴에 뉘어 놓았음을 깨달았다. 불도 여자가 피운 것이었다. 여자는 날개옷을 벗고 있었고, 그녀의 날개옷은 계집애의 몸을 덮고 있었다. 따뜻했다.

모닥불 앞에 웅크려 앉아 잠이 든 여자에게 날개옷을 덮어주려 다가갔던 계집애는 새삼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으나 얼굴에 주름은 거의 없었다. 어린 나이는 아니다. 그냥 인간이었다고 한다면 스물 중반에서 후반 정도쯤. 그러나 그녀가 얼마나 살았을지 계집애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의 얼굴은 처음 만났던 그때에서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으니까.

그 뒤 세 번의 보름달이 떴다 지면서 봄이 되었다.

다시 돌아온 보름에, 여자는 계집애에게 자신이 짓던 깃옷을 입혔다. 그리고 계집애를 데리고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여자를 처음 만났던 곳과 비슷한 절벽에 이르렀을 때 여자가 계집애를 돌아보며 말했다.

“날아라.”

뜻밖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 그것에 놀라고 말 겨를도 없이 여자가 계집애의 팔을 잡아 절벽 아래로 던졌다.

비명, 비명, 비명.

까마득히 저 위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아, 날아서 예까지 와!”

계집애는 두 팔을 미친 듯이 퍼덕거리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럼에도 대체 어느 겨를에 한갓 깃옷일 따름이었던 것이 진짜 날개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불안불안한 첫 비행을 하고 있었다. 두 길쯤 올라갔다가 두 길 훨씬 넘게 떨어지고 또 두 길쯤 올라갔다가 한 길쯤 떨어지길 반복하면서 가까스로 절벽 가장자리까지 갔을 때 여자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날개옷이 살아났으니 야행유녀라 불릴 자격이 있구나.”

계집애는 말을 할 힘조차 없이 쓰러졌다. 그녀를 일으켜 세워 등에 업고 가면서 여자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살아서 해야 할 일은 끝났어.”

자고 일어난 계집애는 마음속으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날개옷을 벗고 입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래도 나는 것은 영 불안하기만 했다. 석 달가량 동굴 근처의 좁은 반경만 다니며 연습을 하는 동안 계집애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날개가 자라고 있었다. 여자가 만들어준 짧고 깃도 그리 풍성하지 않았던 날개옷은 계집애의 몸과 하나가 되면서 새로운 깃이 돋아났다. 그것은 기존의 깃보다 훨씬 더 하얗고 튼튼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선 향기가 났다.

계집애가 자신에게 생긴 경이로운 일에 정신없이 빠져 있는 동안 여자는 자신의 날개옷도 벗어버린 채 산 아래에 술을 사러 다녔다. 살아서 본 마지막 석 달을 여자는 거의 매일같이 술에 빠져 살았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다가오던 어느 햇볕 뜨거운 날에 계집애는 땅거미가 지고 동굴을 나서 다음 날 아침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리까지 갔다가 어딘가의 민가에서 닭이 홰치는 소리에 놀라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아침에도 술을 마시고 있던 여자는 계집애가 동굴 근처에서 급하게 꺾어온 꽃더미를 드시라고 내밀자 석 달 내내 그러했듯이 시큰둥하게 물리쳤다.

“이런 걸 아무리 먹어도 이젠 향기 따위 나지 않아. 새 머리카락도, 새 깃도 나지 않아. 이젠 다 닳아졌어.”

무엇이 닳아졌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가 갔다. 처음 만났을 때 여자에게서 희미하게 풍기던 꽃 내음 같던 체취는 이제 사라졌다. 날개옷을 아예 벗어버린 지 삼 개월 만에 여자의 눈가엔 잔주름이 깊게 자리 잡았다.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술을 마시며 계집애에게 말했다.

“둘 중에 하나만 하렴. 새가 되어 살든가, 인간이 되어 살든가. 둘 다 하고 싶어서 엄벙덤벙하다간 마지막에 나 같은 꼴이 될 거다.”

오월의 보름달이 뜬 밤에 여자는 정갈히 목욕을 하고서는 날개옷을 입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계집애가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다. 하늘을 날면서 날개를 너울거리며 그녀는 항아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했다. 사랑하는 이를 버리고 달로 떠난 여자에 대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노래했다.

달이 산 너머로 사라지고 희붐히 동이 터올 때 여자는 눈물을 지었다. 계집애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계집애가 뒤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말을 했다.

“나중에 수이산이란 곳을 지나게 되거든 전씨 성을 쓰는 이들이 게 사는지 물어보아라. 그리고 아직 산다고 하면 찾아가 상아를 기억하는 이가 있느냐 물어라.”

“상아요?”

“……어떤 어리석은 사내 하나가 나를 그 이름으로 불렀었지.”

“그게 진짜 이름이신가요?”

여자가 계집애를 돌아보더니 웃었다.

“그 사내는 내가 달에서 내려온 줄 알았거든. 제멋대로 그리 불렀지.”

날개가 달린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가 밤하늘에서 내려오는 걸 보았다면 누구든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며 계집애는 웃었다. 여자는 또 말했다.

“그리고 완아가 어찌 되었는지…….”

“그분은 뉘신지요?”

그 물음에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고개를 돌렸고 무턱대고 걷기 시작하면서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차지 않았어. 그날이 그날일 뿐인 지루한 나날. 불과 육 년, 칠 년을 살았는데 몸이 변해가고 얼굴이 변해가고. 아아, 인간은 어찌 그리 빨리 늙는지. 사내의 정도 귀찮기만 하고. 보름달이 뜨면 하늘로, 하늘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뿐……. 인간은 될 수 없었어. 이미 나는 야행유녀니까…….”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계속 걷기만 했다. 계집애는 그 뒤를 따라갔다. 여자가 절벽에 이르러 훌쩍 날아올랐다. 여자의 모습은 푸른 아지랑이 속에서 진회색 깃털을 지닌 진짜 새가 되었다. 한 번 뒤를 돌아보는 일도 없이 날아갔다.

“어찌하면 아예 새로 변할 수 있지?”

계집애는 그것이 궁금해서 여자의 모습이 하늘로 사라진 후로도 한참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아예 해가 나면서 졸음에 겨워 동굴로 돌아갔다.

그것이 여자를 본 마지막이었다.

계집애는 동굴 안쪽에 막대로 표시를 하면서 계속 여자를 기다렸다. 계절이 거듭하여 바뀌면서 또 여름이 왔다. 혼자 맞는 열 번째의 여름. 동그라미 표시 하나가 늘었다.

거의 바뀌지 않은 표시도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키에 맞추어 그어놓은 줄 하나. 일 촌 정도도 자라지 않았다. 목욕을 하러 가는 작은 못의 물을 통해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자라지 않았다. 날개옷을 입은 이래 그녀의 성장은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그럴 나이가 되면 머리카락만 하얗게 세는 것일까?”

떠난 여자는 거의 아무런 지식도 알려준 것이 없다. 준 것은 날개옷 한 벌.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계집애는 어렴풋이 했다.

가을이 돌아오면서 계집애는 떠날 결심을 했다. 이제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홀로 지낸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았던 날개는 꼭 그 키만큼 자라났다. 완벽했다. 순백의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모습을 못에 비춰보면서 스스로 제 모습에 넋을 놓고 있을 때도 있을 정도로. 날갯짓할 때면 향기가 일어날 정도로 체취 역시 사뭇 달콤해졌다. 꽃을 먹으러 나설 때면 나비들은 계집애도 꽃인 줄 알고 진짜 꽃을 버리고 따라오기도 했다.

꽃과 이슬을 먹고 사는 소녀의 얼굴은 하얀 옥처럼 반짝이고 눈동자는 점점 더 맑아져 갔다. 날개와 아름다움, 향기를 얻은 계집애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떠나는 발걸음은 자유로웠고, 즐거웠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넓었다. 갈 곳은 너무도 많았다.

봄의 찬란한 들판, 여름의 시원한 계곡, 가을의 푸른 호수, 겨울의 하얀 산.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서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았다.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경치 구경만 하고 다녀도 지루할 줄 모를 것이라 여기며 거의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산천과 함께 보냈다. 오로지 홀로.

그러다 계집애는 겨울을 나기 위해 올랐던 어느 산에서 풍화된 새의 유골을 보았다. 황새나 두루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제법 큰 골격을 보며 어느덧 잊고 있었던 여자의 일을 떠올렸다. 이미 돌아가셨을까. 시신 정도는 거두어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새의 유골을 지나쳐갔다.

며칠 후 보름달이 떴을 때 계집애는 소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달을 보면서 여자가 불렀던 노래를 읊었다.

“그대의 고운 춤사위 가없이 고와도 덧없고 덧없어라…….”

사뭇 오랜만에 귀로 들은 인간세계의 말.

봄이 되면 수이산이란 곳에 찾아가보자는 생각을 했다.

다음 해의 봄이 돌아왔을 때 계집애는 제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오랜만에 사람들 사는 거리로 내려갔다. 거의 잊고 살다시피 한 말을 끌어내느라 말투는 어눌하고, 생긴 건 앙증맞도록 어여쁜 계집애가 웬 하얀 깃옷을 걸치고서는 사람들을 붙잡고 수이산이 어디냐고 묻고 다니니 친절한 사람도 있었지만 개중엔 더러 못된 생각을 하는 치들이 있어 계집애를 놀라게 하곤 했다.

한 번은 그리로 가는 길이라는 행상들과 동행하였다가 산속에서 끔찍한 일을 당할 뻔도 하였다.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들 중에서도 나쁜 치들은 있었다. 길을 묻는 그녀에게 목이나 축이라며 물을 내주었던 어떤 주막의 여인은 그녀를 정신을 잃게 해 팔아넘길 꿍꿍이였다. 아직도 겉모습으론 열한두 살 정도로 보이는 계집애를 상대로 인두겁을 쓰고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려는 자들을 보니 세상에 정이 똑 떨어졌다.

“더럽구나, 더러워.”

약속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것을 제게 날개옷을 준 여자를 생각해 꾹 참았다.

여름이 다 되어 어찌어찌 겨우 다다른 수이산에서 화전민 부락이 있기에 전씨 성 가진 이들을 찾아보았다. 결국 아는 이들이 없는가 했는데 한 늙은이 하나가 오래전에 전씨 성 가진 심마니 하나가 둘째로 높은 묏부리에 있는 곰발바위 근처 움막에 살았다고 말했다. 얼마나 오래전이냐 물었더니 자기 할아버지 대의 일이란다.

계집애는 퍽 실망했다. 그 여자, 반쯤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지만 시간의 흐름 자체를 아예 잊고 살았나 하면서.

지금은 거기 사는 사람이 없느냐 물었더니 전씨는 아니고 김씨가 산다고 했다. 그 전씨의 딸인가로 해서 이어지는 자손일 거란다.

“몇 해 전에 부모도 역병으로 죽고, 남은 게 또 딸 하나던가 그렇지?”

“선녀처럼 고운 처자가 무섭지도 않나 몰라.”

“몇 년 전이던가 완아가 없어져서 범에 물려간 거 아니냐며 다들 난리도 아니었었지 아마?”

“무탈하게 돌아왔으니 천지신명이 보살핀 게지.”

두런두런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계집애는 솔깃한 이름을 들었다. 완아. 지금 그 움막에 홀로 남아 산나물이나 캐가며 사는 처녀가 있는데 이름을 ‘완아’라고 한다고 했다. 계집애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두 번째 산봉우리에 있다는 움막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낙조가 지도록 산을 뒤진 끝에 발견한 움막 부근에서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서 있는 처녀를 보았을 때, 계집애는 놀라서 사뭇 멍해졌다가 마침내 소리를 내었다.

“저기, 저기, 저기, 상아 님!”

어쩔 줄을 모르고 ‘저기’만 반복하다가 간신히 떠오른 이름을 불렀을 때 처녀가 계집애를 돌아보았다. 머리가 새까맣고 정말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계집애를 거두어준 여자와 닮은 처녀였다.

달려가서 저도 모르게 처녀의 손을 덥석 잡은 계집애는 마주 선 순간 아, 다른 인물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아니네.”

여자의 늘씬했던 키에 비해 처녀는 한 뼘 정도가 작았다. 눈은 새까만 머루색. 게다가 너무도 선하게 웃었다.

“누구니, 넌? 나는 상아가 아니라 완아라고 하는데.”

“알아, 아닌 거.”

“근데 상아라는 이름이 귀에 설지 않구나? 그 이름, 내 증조모님의 어머니 함자이신데 말이야.”

“증조모님의 어머니?”

그간 속세와 유리되어 있었던 거나 다름없던 계집애는 잠시 헷갈려서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무튼 아주 아주 오래전인가?”

“백 년 정도 전 분이니까 아주 오래전이라고 할 수도 있지?”

“으음. 그렇구나.”

실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계집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처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몇 살이지?”

“나? 스물네 살이란다.”

혹시 여자가 죽어서 환생한 것인가 싶어 유심히 쳐다보는데 처녀가 물어왔다.

“그러는 너는 몇 살이니?”

“나는……음. 스물은 넘었고, 스물 다음이, 아마 서른이지? 서른도 넘었고. 서른 다음이……다음이 뭐더라. 어쨌든 너보다는 많아.”

마흔에서 막혀서 계집애는 헤아리는 것을 집어치웠다. 떠올릴 숫자는 쉰이었지만. 처녀는 자신보다 작고 앳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한 계집애를 보며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냥 엉터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실성했다고 손가락질부터 했을 것이다.

가만히 계집애의 고운 얼굴을 들여다보고, 저절로 풍기는 좋은 향기를 맡아보던 처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물었다.

“상아란 분은 하늘에서 온 분이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거든. 우리 어머니 이름도 완아였어. 증조모님 이후로 계속 여자애가 태어나면 이름이 완아가 되어 온 것도 그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랬어.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하고 가셨대. 완아를 보러 올 거라고. 혹시, 너도 하늘에서 왔니?”

계집애는 그 말을 날 수 있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로 선녀님이란 거야?”

“선녀 같은 게 아니라, 나는 야행유녀야.”

그렇게 자랑하듯 말하고는 계집애는 길을 떠난 후 구한 낡은 옷가지로 감추어 두었던 날개옷을 드러냈다. 치렁거리던 우의는 곧 살아서 힘차게 펄럭이는 날개가 되었다. 계집애는 맛보기로 보여주듯이 공중으로 떠서는 천천히 처녀의 주위를 몇 바퀴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날면서 말했다.

“상아 님이 내게 부탁하셨어. 이곳을 지날 일이 있다면, 전씨 성을 가진 이들을 찾아서 상아 님을 기억하는 자가 있는지 물어보라고. 네가 기억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멍하니 계집애를 보면서 처녀가 몇 번이나 탄식했다.

“어릴 땐 아예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분을 만난 뒤로도 반신반의했고. 그런데 정말이었구나. 세상엔 선녀가 있었어.”

“선녀가 아니라 야행유녀라니까. 저 하늘 높이 높이 가봤는데 구름을 아무리 뚫고 지나가도 하늘세상은 못 봤어. 실은 너무 춥고 숨이 막혀서 가다가 말았지만. 아무튼 아직은 선녀가 아니야. 그리고 상아 님도 선녀는 아니었어. 못 만난 지 한참 되긴 했지만 선녀는 못 되셨을 거야. 마지막에 새가 되어 날아가시긴 했는데.”

계집애는 기억나는 말을 최대한 이용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밝혔지만 처녀는 오로지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선녀였어. 내게 정말 선녀의 피가 흘렀어. 당신은 틀림없이 선녀예요.”

“그게 아닌데. 어휴, 나도 몰라.”

처음 여자를 만났을 때의 계집애처럼 그녀를 선녀라고 철석같이 믿는 처녀에게 달리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계집애는 알지 못했다. 멍하니 계집애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처녀의 표정이 우스워서 계집애는 잠시 깔깔거리고는 긴 여행의 끝을 고했다.

“자, 이제 약속을 지켰으니까 난 그만 갈래. 생각나면 꽃 가지고 놀러 올게.”

그리고 떠나가려는 계집애의 발을 처녀가 움켜잡았다.

“안 돼!”

“응? 왜 안 되는데?”

양손으로 계집애의 발을 잡고 못 날아가게 당기는 처녀를 돌아보며 계집애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녀는 애원했다.

“가지 마요, 가지 마세요, 선녀님. 여기서 저랑 같이 그분을 기다려요. 그분이 오면 말씀드려야 하는데, 말뿐이어선 안 되잖아요. 그분께서 선녀님을 보시면 제가 정말 선녀의 후손이란 걸 믿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분이라니, 누구?”

“제 지아비요. 그분도 새거든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새랍니다.”

“응? 그래? 무슨 새야?”

속세에서 유리되어 있었던 계집애의 정신의 나이는 제 몸뚱이가 빚어내는 열한두 살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여행길에 낯선 이를 경계하는 버릇은 몸에 익혔으나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여자와 똑 닮은 모습을 한 처녀의 말에는 한 점의 의구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순수하게 마음을 열어, 보자마자부터 처녀를 믿었다.

“무슨 새인지는……몰라요.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몰라? 지아비라면서? 지아비라면, 음, 그러니까, 신랑각시놀이 할 때 그 신랑이잖아?”

“제게 오실 때엔 늘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어요. 그래도 두 번, 새가 되신 모습을 뵌 적이 있어요. 그리 늠름하고 우아한 새와 견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어요.”

“뭐지? 늠름하고 우아하면 두루미 쪽인가?”

“군계일학이란 말도 그분 앞에선 무색해요. 학이 아무리 많아 봤자 그분 앞에선 닭의 신세가 될 거예요.”

“어, 그래?”

군계일학이란 말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학이 닭으로 보일 지경으로 그자가 크다는 것은 이해했다. 처녀는 계집애를 올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선녀님. 제 움막에 그분의 깃털 하나를 감추어 두었어요. 선녀님이 보시면 알지도 몰라요.”

“알았어. 가보자.”

그래서 따라갔다. 다시 날개를 접어 평범한 옷으로 돌리고 타박타박 걸어서 처녀를 따라 들어간 움막은 허름하지만 깨끗했다. 처녀는 구석에 쌓여 있는 설기 중에서 가장 위의 커다란 것을 끌어내어 열었다. 잘 손질된 고운 적색의 비단치마 사이에 끼워져 있던 깃털 하나를 계집애에게 보여주었다.

“크다.”

계집애의 팔목만 한 길이의 깃털은 과연 컸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새까만 깃털은 아름답기도 했다. 이렇다 할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보고 있자니 어떤 새의 깃인지 궁금해졌다.

“미안, 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새인 것 같아.”

처녀는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에게 깃털을 돌려주고 계집애는 물었다.

“언제 돌아오는데, 그분이란 분은?”

처녀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곧 오세요. 곧. 계절이 바뀌기 전에 오시겠노라 말씀하셨어요.”

“그래? 그럼 얼마 안 걸리겠네.”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바람 가는 대로 흘러가는 게 고작인데, 한 계절쯤 머무르면서 그 예쁘다는 새 한 번 보고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게다가 처녀는 자신을 거둬준 여자와 이렇게나 닮았고. 움막까지 올라오면서 산에 지천으로 핀 여름꽃도 보았다. 먹을거리 문제도 일단은 없다.

“이 근처에 맛있는 물 있어?”

그렇게 물으면서 계집애는 처녀네 움막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 여름을 보내는 동안 처녀는 계집애를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녀님이란 소리를 계집애가 영 듣기 싫어했던 것이다. 또 계집애에겐 이름이란 게 생겼다.

“부르는 이름이 없다니 가엾잖아요, 언니.”

“나는 야행유녀라니까.”

“야행유녀가 세상에 언니 한 명이에요?”

“음. 그건 잘 모르겠어. 아직 다른 야행유녀와 만난 적은 없어.”

“만난 적이 없으니 없다고 생각해요?”

“몰라. 있을 거야. 아마 있을 거야. 단연코 있을 거야.”

상아 님이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라면 세상에 야행유녀는 그녀 하나라는 소리인데 그건 어쩐지 슬퍼서 싫었다. 계집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단연코 있다고 고쳐 말했다. 처녀, 즉 완아와 함께 살면서 그녀의 어휘력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럼 다른 분이랑 구별이 되는 이름이 있어야지요.”

“왜? 없어도 지금껏 잘만 살았는데.”

“제게 필요해요. 나중에 언니가 떠나도 언니를 기억하기 위해 이름을 간직하고 싶어요.”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없으면 기억을 못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의아해하면서도 계집애는 문득 생각했다. 저 자신도 예전에 헤어진 여자의 일을 ‘상아 님’이라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얼마 나누지 않은 대화도 이제 와서는 조금씩 가물거린다. 그나마 또렷한 것은 여자가 부르던 노래와 상아라는 이름.

“좋을 대로 해.”

계집애는 시큰둥하게 작명을 허락해 주었고, 완아는 며칠 동안 고작 이름 하나 짓겠다고 궁리를 하다가 어느 날 그녀를 향해 웃으면서 말해 왔다.

“연화 언니.”

제비꽃이란 뜻에서 제비 연(燕)에 꽃 화(花)를 딴 연화란다. 특히 완아는 노란 제비꽃을 좋아한다면서, 계집애의 성씨를 누를 황(黃)으로 지었다. 붙여 말해서 황연화.

“노란 제비꽃이라. 그리 맛있는 꽃이 아닌데.”

제비꽃은 봄꽃이고 봄에는 꽃이 지천이라 맛있는 꽃만 골라먹기에도 바쁘다. 제비꽃은 늘 찬밥 신세였다. 하지만 완아의 기준은 계집애의 기준과는 달랐다.

“그분이 저 같은 꽃이라고 하셨어요.”

수줍게 말하는 완아의 말에 계집애가 고개를 갸웃했다. 속으로 어디가 닮았지 하면서?

“제가……열아홉 살 되는 해에 문득 제 앞에 그 아리따운 분이 나타났어요. 너무 고운 분이라 처음엔 여우가 둔갑이라도 했지 싶어서 무조건 달아나기 바빴어요. 이런 궁벽한 산중에 그처럼 아름다운 귀공자가 나타나니 저 같은 것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죠.”

“응, 응.”

상아 님을 처음 뵈었을 때의 자신처럼 넋을 놓지 않은 것이 대단했다. 하긴, 그때의 자신은 정말 어린 꼬마였지만.

“말을 걸어도 놀라서 숨기만 하는 답답한 것에게 질릴 만도 한데 그분은 몇 번이고 다시 오셨죠. 그러다 제게 노란 제비꽃을 한 송이 주셨어요. 오는 길에 제비꽃 덤불을 보았는데 흔한 보라색 제비꽃 사이에 홀로 피어 있는 노란 제비꽃이 꼭 너만 같아 꺾어왔다며 제게 꽃을 쥐어주시며 웃으셨죠…….”

이야기하던 완아가 문득 눈물을 흘렸다. 마치 그날의 꽃이라도 보이는 것처럼 빈손을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날 그 순간부터, 제게는 완전히 다른 날이 시작되었어요. 저는 그분을 마음에 품었어요. 그 뒤로 내내 단 한 번도 마음에서 떼어낸 적 없이 품고 살았어요. 노란 제비꽃을 받은 그날, 저는 새로운 완아가 되었답니다.”

계집애가 듣기엔 이름에 대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이야기였다. 꽃은 물론 예쁘지만, 노란 제비꽃 한 송이를 받았다고 어찌 사람이 달라질까?

“그 꽃, 받아서 먹었나 보지?”

그렇게라도 이해해 보려고 물었더니, 완아는 울다가 웃었다.

계집애는 그날부터 연화가 되었다. 완아는 실제의 노란 제비꽃을 받아서 새로운 완아가 되었고, 계집애는 이름뿐인 제비꽃을 받아서 연화가 되었다. 완아가 말한 이야기도 이 비슷한 뜻이 아닌가 하고 계집애, 즉 연화는 생각했다.

이름이란 것도 받고 보니 썩 나쁘지 않았다. 노란 제비꽃의 맛은 둘째 치고, 연화란 소리의 울림 자체는 퍽 고운 것 같았다. 이름이 좋아지니, 그 이름을 불러주는 유일한 이, 완아의 일도 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어느덧 여름도 다 가고 조석으로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돌아왔다. 어째서 그분이 아직이시냐 물었더니 완아는 “곧 오실 거예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완아가 산마루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생긴 게 곰발을 닮았다고 해서 곰발바위라고 부르는 바위 끝에 서서 해 질 무렵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완아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처음 만났을 적부터 완아는 저녁이 되면 밭은기침을 하곤 했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그 기침이 더욱 심해졌다. 때론 밤새 기침을 하느라 잠을 거의 못 이룰 정도였다. 연화는 대나무 열매를 모아 돌아오는 해 질 무렵 곰발바위 끝에 망부석처럼 서서 하늘 가장자리만 올려다보는 완아를 보는 일이 점차 불안해졌다.

어느 날, 대낮부터 바람이 몹시 불었는데 연화는 늘 그랬듯이 대나무 열매를 모으러 나갔다. 유난히 석양이 붉게 지는 걸 보고 돌아오던 연화가 버릇처럼 곰발바위를 올려다보니 완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이리 부니 들어갔나 보다 했지만 움막에 돌아가 보니 완아는 없었다. 설마 하면서 다시 나와 곰발바위로 뛰어갔더니 완아가 쓰러져 있었다.

그날 밤부터 완아는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보였다.

어느덧 새벽이면 서리가 내리더니, 수이산에 첫눈이 왔다. 그래도 해 질 무렵이면 곰발바위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완아 대신, 연화가 나가서 ‘그분’을 기다렸다.

겨우내 움막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완아는 연화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밤중에는 완아의 상태가 괜찮을 때면 불을 돋워놓고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남자가 완아를 제 저택으로 데려갔던 1년 남짓한 시간을 완아는 너무도 소중하게 간직하며 수도 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기엔 아름다운 분들이 여럿 있었지요. 인간은 저 혼자였어요. 다들 그분을 모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자랑스레 생각했어요. 한 번은 후원의 연못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그분이 어떤 노래를 부르니 함께 나온 여자들이 모두 어여쁜 새로 모습을 바꾸는 거예요. 저는 어쩔 줄을 몰라서 바라보기만 했어요. 그분은 저는 그대로도 괜찮다고 하시면서 제 무릎을 베고 새들이 하늘에서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셨지요. 다들 하나같이 아름다운데, 춤도 추고, 노래도 잘하고……. 하지만 제겐 인간치곤 봐줄 만한 얼굴뿐이었어요…….”

완아의 눈빛이 혼탁해졌다.

“그나마 그것도 얼마 못 가 시들 것이 자명한데. 처음엔 계절이 가는 게 두렵다가, 곧 달이 가는 게 무섭고, 다시 하루가 가는 것이 무서워졌지요. 의식하기 시작하자, 세월의 흐름이 너무도 빨라졌어요.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는데 눈가에 작은 주름 하나가 보였어요. 저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 야단을 부려 그분이 곤란한 얼굴을 하시게 만들었어요.”

완아는 기침이 도져 잠시 말을 할 수 없었고 연화가 끓인 물을 주자 그것을 마시고 간신히 기침을 잠재워 침상에 누웠다. 하지 말라는 데도 완아는 계속 말을 했다.

“거기 있는 어떤 여자의 얼굴에도 주름 같은 건 없는데, 저만, 저만 그리되었어요. 연화 언니처럼, 그 여자들의 시간은 거의 멈춰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만 쏘아놓은 화살이라도 되는 양 빠르게, 빠르게 노쇠해 가는 거예요.”

한탄하는 완아를 보다가 연화가 말했다.

“내가 너한테…….”

중도에 말을 끊은 것은, 자신의 경우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자신을 거두었던 여자는 분명히 우의를 일정량 이상 다른 곳에서 만든 후에야 가져와서 연화에게 입혀보았다. 그랬다. 연화는 완아에게 날개옷을 만들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완아가 기다리는 사내가 쉬 오지 않을 거란 것을 받아들인 후였다. 계절이 바뀌기 전에 온다는 완아의 말은 이미 어긋났다.

어쩌면 그자는 ‘여름’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이미 몇 년 전에.

완아 나이 열아홉에 그녀를 제 저택에 데려갔던 남자는 완아가 온통 자신감을 잃고 자신을 원래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자못 슬픈 기색으로 여기에 데려다 주고선 만나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지금 완아는 스물네 살이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 남자는 이제 오지 않는 게 아니냐는 말은, 어쩐지 입 안에서만 맴돌고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면 완아가 울 것이다. 그리고 연화는 완아가 우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라고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완아는 아프고, 완아는 나이를 먹어간다. 그녀의 시간을 멈추어주고 싶어서 연화는 날개옷을 만들 작정을 했다.

보름날 밤이면 움막을 비우고 동틀 무렵 돌아오는 연화를 완아는 움막 밖에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고 있고는 했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코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데 돌아가면 “돌아오셔서 기뻐요, 연화 언니.”라고 말하며 웃었다.

완아는 기다림에 이골이 났으면서도 다시 버려질까 두려워했다. 완아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감정적으로는 한참 미숙했던 연화는 그저 완아를 제 따뜻한 몸으로 꼭 안아주거나 하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다.

‘의(醫)’라는 글자를 배우던 날, 완아는 세상엔 병을 치료하는 의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이미 완아와 함께 지낸 지도 일 년 반가량 된 겨울의 일이다. 완아의 기침은 고질병이었고, 그때쯤엔 평상시의 숨결조차 그렁그렁 끓었다.

의원에게 가자는 연화의 말에 완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분이 보시면 이 정도는 금방 나아요. 그분은 의술에도 능하시거든요.”

“그자가 오기 전에 네가 먼저 죽겠어.”

결국에는 그런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완아가 울 줄 알았는데 울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웃었다.

“오세요.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이번에는 꼭……오실 거예요. 그분이 가실 때 완아의 일 결코 잊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완아는 살아서 그분을 만날 거예요. 계절이 바뀌기 전에…….”

의원에게 갈 꿈조차 꾸지 않는 완아 대신 연화가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 의원을 찾아 데리고 올라왔다. 완아가 끝내 의원에게 얼굴 보이길 거부해 진맥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만 연화가 이러저러하다 설명해준 말에 의지해 의원이 처방해준 약 몇 첩조차 완아는 거부했다.

봄이 돌아왔지만 완아는 병석에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다. 연화가 서툴게 끓여낸 곡기도 거의 먹지 못하는데다 각혈은 더욱 심해져 몸은 나날이 말라갔다.

마음이 급해진 연화는 보름이 돌아오면 제 깃털을 과도하다 싶을 만큼 뽑아내어 옷을 짓느라 제 날개옷도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한 번은 보름에서 이틀이 지났을 때 완아에게 줄 죽을 끓이다가 기절을 하였다. 깨어났더니 완아가 눈물짓고 있었고, 그때부터 완아는 전에 거부했던 탕약을 먹기 시작했으나 인간의 병에는 다스릴 때가 있는 법이란 걸 연화는 몰랐다.

그나마 상황 유지라도 되고 완아가 일어나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연화는 그녀가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음력 3월 보름, 반쯤 지은 날개옷을 감춰두고 가을 무렵엔 가져가서 보여줘야지 하고 움막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화는 노란 제비꽃을 발견했다. 세 송이나 되는 꽃을 꺾어서 자랑스레 움막에 들어선 연화는 침상 아래에 쓰러져 있는 완아를 발견했다.

산길을 뛰어 내려가 의원을 불러왔다. 의원은 진맥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반은 황천길에 든 사람이라며.

하지만 그 의원도 완아의 의지를 우습게 본 것이다. 완아는 근 이틀 만에 정신을 차렸다. 연화를 보고는 찡그린 얼굴이 못나 보인다며 놀리기까지 했다.

기적처럼 깨어났으나, 완아의 병은 다른 의미로 심각해졌다. 그녀는 서서히 과거의 일들을 잊어갔다. 그 사실을 연화가 감추려 해도 스스로 깨우칠 만큼 완아는 총명한 여자였다.

여름에 접어들던 무렵의 어느 날, 완아는 연화를 향해 누구냐고 물었다. 그 하루가 가기 전에 다시 연화를 기억해 내었으나, 완아는 자신이 연화를 잊었다는 사실 자체에 커다란 충격을 입었다. 며칠간 말까지 잃을 정도로.

그때를 기점으로 병증은 무서운 속도로 완아를 파먹어 들어갔다. 새까맣던 머리채가 불과 열흘 만에 온통 새하얗게 세었다.

전에 모시고 있던 여자, 상아를 떠올리며 연화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다가오는 보름에, 어떻게든 날개옷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기침이 조금이라도 그칠 때면 완아는 침상에 누운 채 계속 입술을 들썩였다. 소리 없는 중얼거림은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휘. 주휘. 오직 그자의 이름만을 넋이 나가도록 끊임없이.

비가 몹시도 내리던 열나흗날 밤, 누워서 잠자리에 든 연화에게 완아가 퍽 오랜만에 긴 말을 했다.

“언니, 무서워요. 이젠 차라리 죽었으면 싶은데……이러다 그분을 잊은 뒤에야 죽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워요.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그저, 그분에게 사랑 받았던 기억만큼은 다 가져가고 싶어요. 제가 그분을 사랑했던 기억은 다 가져가고 싶어요. 그게 너무 큰 소원은 아니잖아요. 나……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살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하늘이 내게, 내게 이리도 모질게 벌을 주실까요?”

연화는 말없이 완아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날 밤을 하얗게 새웠다.

그 다음 날엔 다행스럽게도 날이 개었다. 보름달이 뜨는 것을 보고 연화는 완아를 돌아보고는 움막문을 열었다.

“언니, 가요?”

자는 줄 알았던 완아가 그리 묻자 돌아본 연화가 다짐을 했다.

“또 밖에 나와서 기다리면 안 돼. 내 얼른 갔다가 올게.”

“안 기다릴게요. 보름달, 예뻐요?”

“아주 예쁘다. 잠깐 나가서 볼래?”

“나중에. 지금은 졸려요.”

“그래. 나중에 나랑 같이 진짜 예쁜 달을 보러 가자.”

하늘을 날아서 함께, 커다란 달을 보러. 그런 뜻으로 연화가 웃어보이자 완아도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았다.

“달보다 예쁜 걸 요 몇 년 실컷 보고 살았는데요 뭘.”

“그거 혹시 내 이야기야?”

“응. 언니 이야기예요. 연화 언니가 달보다 훨씬 예뻐.”

천진한 마음으로 기뻐하면서도 연화는 새침한 표정으로 혀를 내밀었다.

“네가 아직 어리니까 보는 눈이 없는 거야. 달보다 예쁜 건 세상에 없어.”

다녀오마 하고 연화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움막의 발을 내려둔 창 틈새로 비치는 희미한 불빛을 한 번 돌아보고는 떠났다.

맑은 공기 속에 반딧불이가 무수히 날아 하늘에도 별, 땅에도 별들이 뜬 것 같은 그런 호숫가에서 연화는 옷 짓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마침내 보름달이 다하는 걸 바라보며 옷을 들고 일어선 연화는 돌아가기 위해 날아올랐다가 얼마 못 가서 땅으로 추락했다. 과한 욕심에 조금만, 조금만을 되뇌며 스스로를 혹사시킨 결과 날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가야 하는데.”

완아가 기다릴 텐데. 완아에게 차려줄 아침 걱정을 하면서 연화는 들판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엔, 하늘에 다시 둥근 달이 떠 있었다. 열엿새의 달이었다. 소스라쳐서 일어난 연화는 당장에 다시 날개를 퍼덕였다. 하루를 꼬박 잠들었던 덕분에 기력이 돌아와 날아갈 수 있었다.

“완아야, 배고팠지?”

움막에 들어서기 무섭게 그것부터 물으며 침상을 돌아보았으나 침상은 텅 비어 있었다. 좁다란 움막이며 뒷간까지 다 둘러보았다. 완아는 없었다. 제 발로 일어서는 것조차 힘든 아이가 어디를 갔을까 하면서 밖으로 나와 완아를 찾던 연화는 문득 곰발바위 저 너머에서 휘황하게 빛나는 달에 눈이 갔다.

움막 쪽에서 보니 여전히 보름달로도 보이는 둥근 달. 연화의 발이 저절로 곰발바위로 향했다. 뭔가에 홀린 듯이 바위 끝까지 걸어 나갔다. 시선을 하늘에 둔 채로.

그러다 무언가가 발에 차여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을 보고 연화는 품에 안고 있던 완아 몫의 날개옷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달이 부른 게 아니었다. 연화를 부른 것은 완아가 벗어놓은 고운 당혜였다.

당혜 두 쪽을 손에 쥔 지 한참 만에 연화는 곰발바위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은 홀연히 피어난 커다란 붉은 꽃을 무심히도 비추고 있었다.

연화는 소리조차 지르지 않았다. 아주 조용히 붉은 꽃을 향해 날아갔다.

고이 간직했던 가장 고운 비단옷을 입고 손에 새까만 깃털 하나를 꼭 쥔 채, 처연하게도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완아가 하염없이 입술을 들썩이고 있었다. 휘 님. 휘 님. 마지막 순간까지 그자의 이름을 가져가려고.

“완아야. 내가 돌아왔어.”

완아의 손을 잡았다. 이미 따스한 기운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은 그 손이 얼마나 차가웠던지. 완아는 바로 곁에 있는 연화를 보지 못했다. 눈 또한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완아의 입술이 움직였다.

“언니, 연화 언니.”

“그래, 완아야, 나야.”

“날 좀, 나를 좀 죽여줘요.”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가. 마침내 연화는 품에 안고 있던 날개옷을 들었다. 그것으로 완아의 숨을 끊어놓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날개옷으로 얼굴을 덮으려 하였으나 손이 너무 떨려 못하고 말았다. 두 팔 사이로 흘러내린 옷을 주워드는 그 간단한 일을 못해 신음하는 연화에게 불현듯 몹시도 또렷해진 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워줘요, 언니. 죽어서, 재가 되어서 날아갈 수 있게. 한 번만, 꼭 한 번만 다시 만나길 바랐건만……. 휘 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생애 마지막에 간절히 바란 대로 사내의 이름 하나 가슴에 품고 갔다.

감지 못한 눈에 무정한 달빛이 내리비치는 것을 연화는 밤새워 지켜보았다. 동이 터올 때 날개옷으로 얼굴을 덮어주고 당혜를 신겨 주었다. 태워 달라 했으나 그대로 돌을 날라 무덤을 만들었다.

움막에 돌아갔을 때, 침상의 개켜진 이불 사이에 들어 있던 유서를 발견했다.

―그분은 언젠가 날 수 있는 건 날다가 죽는 게 좋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게 아니라도 누구든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에 멈추어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여인으로서 연모하는 이를 품고 생을 멈추려 해요.

연화 언니, 이건 제 욕심이지만 다만 몇 년이라도 여름이면 이곳에서 지내면서 그분이 오시는지 기다려주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떠나신다고 해도 이해해요.

만약 떠나실 거라면 어리석은 동생을 위해 한 번 울어 주셔요. 그리고 이 못난 동생을 잊어버리세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노란 제비꽃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갈수록 떨리는 글씨에서 연화는 죽는 게 무서웠던 완아의 어린 마음을 보았다. 울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곡(哭)과는 거리가 있었겠지만, 연화는 한 번 울어 사흘을 울었다.

유언을 지켰다. 몇 년의 여름이 아니라 십 년 동안 줄곧 움막을 지키면서 그자를 기다렸다. 완아의 무덤 주변에 온갖 화초를 심어 가꾸며.

그자는 오지 않았다.

노란 제비꽃 핀 봄에 연화는 무덤에 대고 작별을 고했다. 떠나면서 이름도 두고 갔다. 완아가 아닌 다른 누구도 불러줄 이 없는데 이름이 무슨 소용인가.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계집애가 되어 발길 닿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밤을 헤매 다녔다.

그렇게 또 십여 년이 훌쩍 흘렀다.

몇 년 동안의 가뭄도 있었고 그걸 보상이라도 하듯 이태 동안은 큰 홍수 때문에 산야가 신음했다. 역병도 잠잠할 만하면 일어나 짐승과 인간들이 무던히도 죽었다. 계집애는 그런 세상일에 무심했다. 여전히 하늘은 둥글었고 땅은 넓었기 때문에 계속 날아가다 보면 결국 맑은 물이 흐르고 푸른 나무가 울창한 곳을 만나기 마련이었다.

다시 단순하게 살면 그만이었다. 생각하는 걸 그치고 영글었던 머릿속도 텅 비우고. 거의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겨울이 말썽이었다. 계집애가 겨울을 나러 들어간 산에 큰 눈이 와서 온 산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보이는 곳이 온통 하얘지면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피어올랐다. 잠자는 시간을 늘려보았지만 그러면 잠에는 꿈이 쫓아왔다.

머리가 잊고자 하는 일을 마음은 한사코 놓지 않으니, 꿈은 매번 그런 마음이 활개를 치는 곳이었다. 꿈에서는 상아 님이 돌아오기도 했고 완아와 함께 도토리며 밤을 주우러 다니기도 했다. 꿈의 말미에는 곧잘 완아의 무덤을 보았다. 그것은 어떤 때는 황량한 돌무덤이었다가, 어떤 때는 노란 제비꽃에 뒤덮인 꽃무덤이 되었다. 계속 그런 꿈을 꾸는 걸 보니 완아가 쓸쓸해 자신을 부르는가 싶었다.

“한 번 보러 가자.”

생각을 하고, 봄이 오자 움직였다.

살구꽃 만발한 산길을 술 한 병을 들고 올라갔다. 낙조가 내려앉는 가운데 수이산에는 화풍이 가득했다. 산수는 그대로이고, 계집애도 처음 왔을 때와 같은 모습이건만 완아는 없다. 굳이 두 발로 오르는 내내 계집애는 중얼거렸다.

“그 아인 어디 있을까. 돌무덤 속에 있지. 돌무덤 속에는 완아가 있다네.”

그것은 어쩌면 계집애가 처음 지은 서투른 노래였는지도 모른다.

곰발바위 아래의 무덤은 다행스럽게도 그대로 있었다. 다만 주위에 무성한 잡초가 서러웠다. 계집애가 돌볼 때는 꽃이 사시사철 곱게 피었었건만.

술을 무덤에 뿌려주고, 간혹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내는 인간들을 훔쳐보며 기억해둔 것처럼 흉내를 내었다.

“아아, 슬프다. 아아, 슬프구나. 흠향하여라.”

잡초를 뽑아내고 무덤 앞에 머물러 밤을 맞이했다. 사흘 밤낮으로 울어준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으나 십 년 만에 찾아왔으니 사흘 밤은 지키고 가야지 했다.

“바라던 대로 노란 제비꽃으로 태어났니?”

대답하는 이가 없음은 당연했다. 웅크려 앉은 채로 계집애는 잠이 들었다.

언뜻 찬 기운에 몸을 떨며 눈을 떴을 때,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릴 것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던 계집애는 근처에 있던 녹나무 그늘로 피하려고 걸어갔다. 힐끗 뒤를 돌아보며 계집애는 돌무덤에 대고 말했다.

“너는 거기 있어야겠다, 완아야.”

고개를 돌리던 계집애는, 무언가 몹시 꺼림칙한 기분에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본 것은 돌무덤이 아니라 돌무덤 저 위에서 빛나는 푸르스름한 기운이었다. 곰발바위 위쪽에서 무언가 푸른 안개 같은 것이 흔들거리며 움직였다.

계집애의 두 눈이 점차 커졌고, 입은 멍하니 벌어졌다.

흔들거리며 다가오던 푸른 안개가 바위 끝에 섰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버렸다.

“안 돼, 안……!”

입 안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것이 하늘을 날았다.

눈 깜빡할 새에 그것은 돌무덤 위로 떨어졌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으나, 계집애는 추락 순간의 단말마를 들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정작 자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 아아아……! 완아야, 완아야!”

넘어질 듯 구르며 달려갔다. 돌무덤은 자취도 없고, 거기엔 부서져 신음하는 완아만이 있었다.

“……언니, 연화 언니.”

완아가 다시 그녀를 부른다. 오래전 그 목소리 그대로.

이름을 불러주어, 계집애는 다시 연화가 되었다.

“날 좀, 나를 좀 죽여줘요.”

“아아, 아아아! 내가, 내가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내가 더 빨리…….”

그때 결국 말하지 못한 후회를 부르짖으며 연화는 완아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몸은 형상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죽은 이는 죽기 전의 일만을 되풀이했다.

“한 번만, 꼭 한 번만 다시 만나길 바랐건만……. 휘 님…….”

가뭇없이 사라지는 목소리. 정신을 차렸을 때 연화는 돌무덤을 끌어안고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은 차가운 빗줄기뿐이었다.

계집애는 다시 이름을 잃었다.

계집애는 녹나무 그늘 아래 머무르며 두어 달포를 보냈다. 깊은 밤이면, 꼭 비슷한 무렵에 곰발바위 끝을 어른거리는 푸른 아지랑이를 보았다.

그것이 실로 형상을 갖추어 모습을 드러내고, 말까지 한 것은 꼭 일곱 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면 그렇게 완아는 죽어서 죽음을 되풀이했다.

―연화 언니, 나를 좀 죽여줘요.

―한 번만, 꼭 한 번만 다시 만나길 바랐건만. 휘 님.

뼈에 스미고 살에 스미고 골수에 스미는 말들.

십 년간 계집애가 움막에 살면서 완아가 오매불망하던 그분을 기다리고 무덤을 매일같이 찾아주는 동안엔 그림자도 없던 귀기가 이제 형상마저 갖춘 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너는 그토록 쓸쓸해 귀신이 되고 말았는가.

한 가여운 여자의 한(恨)이 갈 곳을 잃고 제 죽은 자리를 맴도는 동안,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여자의 마음에는 원망이 그 형체를 머금었다.

오로지 순수하고 어렸던 계집애의 마음에 서린 어둠은 보름의 달빛조차 씻어주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 있었으나 무엇도 해주지 못하고 놓쳐버린 가여운 여자에 대한 동정이 슬픔 이상의 슬픔이 되어 계집애의 텅 빈 마음을 채웠다.

그것은 마침내 원(寃)이 되었다.

그믐날 밤, 내리는 빗속에서 다시 완아가 처절히 죽어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본 뒤에 계집애는 돌무덤을 파헤쳐 백골이 된 완아의 손에 쥐어진 검은 깃털을 꺼냈다.

“그자를 데려오겠어.”

백골을 향해 약속했다.

“꼭 데려다가 네 옆에 눕게 해줄게. 만나서 함께 가렴.”

무심한 하늘을 대신해 완아의 무덤을 다시 쌓아주고 돌아서며 계집애는 제 마음에 다짐했다. 그자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죽지도 않으리라.

이제 계집애가 세상을 떠도는 이유는 휘라는 새를 찾는 것이 되었다. 인간들은 접할 수 없는 별세계(別世界)의 어둠 속을 떠돌며 그녀는 자신과 닮은,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존재들을 만나 까마득히 넓은 세상에서 이름밖에 모르는 검은 새를 아느냐 물었다.

때론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기도 한 고획조는, 어느 겨울에 인간이 만든 덫에 걸려 죽어가던 박쥐를 한 마리 만났다. 구해내어 제 품에 보듬어 살려낸 그 박쥐는 그녀가 아무리 무시해도 끝내 뒤를 졸졸 따라왔고 결국 그녀에게서 ‘문복’이라는 이름까지 얻어내며 동행이 되었다.

문복이 영험하기로 이름 높은 흰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 계집애의 길을 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숭이를 만나려고 수소문한 끝에 그자의 연락책이라 하는 승냥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름을 위후라고 하는 승냥이와 만나게 된 것은 완아에게 약속을 하고 떠난 지도 어언 다섯 해가 흐른 여름의 보름날이었다. 당시 위후는 야시에서 그 효험을 알 수 없는 술을 팔고 있었다.

처음엔 계집애 따위에겐 눈조차 주지 않았다. 열리는 야시마다 쫓아다니며 매달려 사정하기를 또 오 년. 둘에 한 번은 허탕이라 만난 횟수는 고작 열 번이 될까 했다.

또 허탕을 치고 돌아서던 어느 보름에 바닷길에 서 있던 승냥이 한 마리를 보았다. 찾는 분이 계시다 하는 말에 무조건 승냥이를 따라나선 계집애를 기다리고 있던 곳은 진귀한 고획조 첩을 얻고자 한 여우의 소굴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를 데려온 승냥이도 다른 여우가 둔갑한 것이었다.

같이 사로잡힌 문복을 솥에 삶아 죽인다는 협박에 계집애가 자포자기하여 몸을 내어주려 했던 때에 여우의 소굴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녀를 겁박하던 여우들은 진짜 승냥이들이 나타나 반은 물어 죽이고, 다른 반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 승냥이들이야말로 진짜 위후의 식솔이었다.

전리품으로 얻은 여우의 가산을 싣고 돌아가는 승냥이들의 무리 뒤에서 계집애와 문복은 위후를 만나러 갔다. 위후는 난리통 속에 초췌한 모습이 된 계집애를 보며 그만하면 진심이란 것을 알았으니 기회는 주겠다고 했다.

위후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까마득히 먼 바다에 외따로 떨어진 작은 섬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인형처럼 어여쁘게 꾸민 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흰 원숭이를 만났다.

“찾고 싶은 사내라. 녀석을 만나 어찌하려고?”

“제가 아는 어떤 이의 옆에 무덤 자리를 봐 놓았습니다.”

“복수인가. 시시하군.”

시시하다고 웃었지만 흰 원숭이는 계집애와 계약을 했다. 그가 아주 심심한 때를 골라 시기적절하게 나타나주었다는 이유로. 계약의 징표는 계집애의 왼쪽 눈. 그 고운 얼굴에 섬뜩한 화상 흔적이 생겨났다.

침아가 내민 검은 깃털을 받아든 흰 원숭이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짐새의 것이라 단정했다.

“녀석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십 년 내로 한 번 찾아온다. 그 녀석의 피붙이 중 하나가 너를 녀석에게로 데려갈 게다.”

그리 말하고 흰 원숭이는 위후와 함께 돌아가라 한 뒤 모습을 감추었다. 동자와 교대하듯 나타난 위후가 그녀를 섬에서 데리고 나와 반도의 북쪽에 있는 제 거처로 데려갔다.

이제는 장사의 물목을 인간으로 바꾼 위후 아래에서 계집애는 지금까지 만난 것보다 더 많은 인간 여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계집애를 자신들과 같은 인간인 줄 알고 처음에는 가까이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워했다. 계집애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자라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야시에 나가는 날이면 날개옷을 벗고, 그렇지 않을 때면 걸치고 있던 그녀는 때로 위후의 가기들에게 노래를 배우고 비파를 배웠다. 소질이 박하지 않았는지 얼마 안 가 위후의 명으로 가기들의 수련날이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목상으론 밥값 대신 가기들 시중이나 들라는 것이었는데 정작 그녀에게 일을 시키는 가기는 거의 없었다. 이따금 위후 앞에서 배운 걸 선보였는데 그것이 위후의 양에 찰 때면 위후가 선심 쓰듯이 작은 주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리 몇 년이 나는 듯이 흘렀다.

위후가 실은 승냥이가 아니라, 승냥이로 둔갑한 흰 원숭이란 것은 어느 날 술에 대취해 잠든 위후가 제풀에 변신이 풀어지면서 알게 되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있었던 자가 비파를 타는 계집애 혼자였다. 늘 술이 문제라고 위후는 계집애에게 푸념을 했다. 넌 이런 걸 닮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계집애는 우스웠다. 어쩐지 그녀를 거두어 주었던 여자와 닮은 구석도 있었고, 위후와도 어지간히 정이 든 것이기도 했다.

위후 아래에서 지낸 십여 년 동안 계집애의 정신은 얼마쯤 성장했다. 처음엔 무작정 휘를 찾아내 완아에게 데려간다는 결심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쳤다. 위후의 집에 거하는 다양한 존재들과 부대끼면서, 또 자신을 스승처럼 여기는 문복을 가르쳐가면서 계집애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자가 완아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결국 몸만 데려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계집애는 깨달았다. 완아와의 정을 돌이켜 그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후회해야 했다. 과연 그렇게 만들 수 있을지, 계집애는 걱정스러웠으나 특유의 강단 있는 성격으로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되리라고 태연히 믿었다.

위후의 집에서 또 한 번 봄을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야시에 가게 되던 날, 별다른 예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계집애는 문복에게 위후 님 말씀 잘 듣고 잘 먹고 지내야 한다고 다짐을 받았다. 야단스레 산 아래 길까지 쫓아 나와 그녀를 배웅해 주던 문복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밟혀 ‘혹시 오늘 밤인가?’ 했다.

그렇다. 바로 그 밤이었다. 화산 노파가 열 냥의 금에 계집애를 사들였다. 밤을 새워 짐새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얼굴엔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

먼저 료를 만났다. 그자의 어린 아우.

저택에 있을 때 잠깐 놀아준 적이 있는 휘의 예쁘고 조용한 아우에 대한 이야길 완아에게 들었었던 계집애는 생긴 것과 딴판인 료의 독살스러움에 완아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했지 싶었다. 그래도 거의 개의치 않았다, 처음엔. 단지 료는 휘라는 자의 아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로지 목적하는 바는 단 하나, 휘였다. 애초에 그자의 종이 되길 바랐으나 경로가 살짝 뒤틀린 것쯤 아무래도 좋았다. 기다리면 기회가 올 것이고, 오지 않으면 만들 작정이었다.

그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딴에는 편히 살고자, 위후 아래서 머무는 동안 그의 첩이며 가기들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배운 대로 사내를 구슬리는 애교를 슬쩍슬쩍 써가며 료의 비위를 맞춰주고 살기로 했다. 조금도 예쁘지 않은 이름을 얻었어도 그만. 가당찮은 소유욕에 계집애의 목숨이 제 것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는 오만도 속으로 코웃음 치면 그만.

새로운 환경에도 익숙해졌으나 날개옷 없이 지내는 몇 년 동안, 작은 몸이 자라 빠르게 여인에 가까워져가는 것은 서글프면서도 자못 신기했다. 달거리를 시작했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으나 이제 나도 완아처럼 다 자란 여자의 몸이 되었나 하는 경이로움도 느꼈다.

다만 불안한 것은 그녀를 대하여 달라져가는 료의 시선이었다. 귀찮고 답답해서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던 중에 야시를 다녀오다 그 사고가 났다. 가선이란 그 난새는 계집애에겐 반가운 일을 해준 셈이다. 안 그래도 잠시 료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었던 차에.

그런데 행방을 알기 무섭게 득달같이 료가 달려왔을 때엔, 어쩐지 기뻤다. 눈물은 거짓이었으나 차가운 몸이 그녀를 안아주었을 때 마음을 놓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를 구해 주어 고맙다고 위후에게 인사하는 료 딴엔 의젓하고자 애쓰는 목소리를 들으며 혼자 웃기도 했다. 그 밤, 그의 품에서 그만 푹 잠들었다. 늘 자는 척만 할 뿐, 그가 잠들기 전엔 결코 먼저 잠드는 법이 없었건만.

같이 보낸 그 짧은 시간도 시간이라고 또 정을 느끼고 말았나, 계집애는 망연히 생각했다. 애초에 누군가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배워서는 안 되었다. 이름도 받지 말았어야 했다.

완아에게 이름을 얻어 사는 동안 계집애는 연화가 되었고.

료에게 이름을 얻어 사는 동안 계집애는 침아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시간을 함께 쌓아가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름을 상냥하게 불러주는 자의 목소리를 따르고, 자못 소중한 듯 안아주는 자의 살결 내음을 향기롭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가.

눈 딱 감고 그리도 원하는 몸을 내어주는 것으로 사내의 정을 달래주려 했다. 변덕스런 사내의 정, 갈구하던 것을 얻으면 시들해져 물길을 돌리겠거니 하였다.

아니었다. 료라는 사내는 그 위의 형과는 달랐다. 전혀 달랐다.

계집애는 스스로를 지아비라 칭하며 끊임없이 그녀를 열망하는 사내의 품에서 여자가 되었다. 사내에게 느끼고 만 풋풋한 정은 거듭하여 몸을 섞는 동안 또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가르쳐주겠다고 한 그의 말대로, 그녀는 배워버린 것이다.

그 들뜬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여자는 달아났다.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품어 자신마저 완아를 버리기 전에. 짧으나마 즐거운 꿈을 꾸게 했으니 그의 어린 마음도 큰 미련은 없으리라 여기는 것으로 료의 일은 위안했다.

한 잔의 물로 열흘간 기원도 했잖은가. 잊으리라. 잊으리라. 그도, 나도. 망우초(忘憂草)에 띄운 마음은 진심이었다. 주술은 성공했다.

그러나 무엇을 잊었는가? 날은 거듭하여 지나는데 어찌하여 그는 그러고 있나? 어찌하여 나는 이러고 있나? 대체 그가 내 무엇이었관데?

알 수 없다. 여자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약속을 지킬 날을 목전에 두고, 여자는 원망하고 있다. 완아와 료, 그 둘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세상에 시름이 없는 줄 알고 살아갔을 것을…….

곰발바위에 어린 푸른 안개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기다리는 완아의 한(恨).

완아와 달리 자신은 기다릴 수조차 없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여자는, 한 번 해보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료, 나도 당신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세상엔 있다. 곧 여자는 그의 형을 해치고야 말 것이다. 설사 불구대천의 원수라고는 하지 않는다 해도, 무슨 얼굴로 그를 더 보겠는가. 그런 이유로 혼자서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여자는 천천히 돌아서 움막으로 돌아간다. 그림자가 길게 등 뒤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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