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동트기 전
운몽산 일대의 하늘 일대가 누르께하게 물드나 싶더니, 연이틀 토우(土雨)가 쏟아졌다.
때아닌 붉은 비는 마치 누군가의 눈물인 듯하였다.
“이번엔 네가 가서, 말씀드려. 모시고 오기 전까지 혼자 돌아올 생각 따위 마. 뭣하고 섰어? 당장 가란 말이야! 당장, 당장!”
초조한 기색으로 방을 오락가락하던 가선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정을 보고는 소리를 쳤다. 그래도 정이 잠자코 있자 가선이 달려들어 그를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이젠 너까지 나를 우습게 보는 거야? 뭘 그리 보는 거야? 어째서 그런 눈을 하는데?”
잠자코 가선을 올려다보는 정의 눈을 대한 가선이 발악을 하면서 그의 뺨을 연거푸 때렸다. 아프지 않았다. 비파 이상 가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본 적 없는 가선의 가느다란 팔은 아무리 용을 써도 정에겐 연약하게만 느껴졌다.
그 팔을 잡아 멈추게 하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정은 그대로 맞아주기만 했다. 제풀에 가선의 화가 풀릴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때리던 가선이 지쳐서 풀썩 그의 앞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배어 나왔다. 바들거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무작정 정의 팔만 잡아 흔들었다.
“가서 휘 공자님을 모셔 와. 내가 뵙고 싶어 한다고, 정말 간절히 뵙고 싶어 한다고 말씀드리란 말이야. 이러다……이러다 정말 언니가 날 버리고 가게 생겼잖아.”
“……모셔 오겠습니다.”
정이 말했다. 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부드럽게 반복했다.
“모셔 오겠습니다, 아씨.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제아무리 못난 짓을 저지르고, 때로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철부지라고 해도 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픈 것을 어찌하겠는가. 마음을 줘버린 것은 자신이니, 그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주고, 또 주는 수밖에.
정의 팔에 기대어 훌쩍거리던 가선은 문득 고개를 들면서 그의 얼굴에 난 생채기를 보았다. 그녀가 때려서 생긴 붉은 흔적들을 보며 또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정아. 아팠지? 미안해.”
“조금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웃음을 남기고 조금 진정되는 가선을 본 뒤에 방을 나섰다. 저리 자신을 걱정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차라리 매일 조금씩 맞았으면 싶은 마음에, 헛웃음이 났다.
밖으로 나서며 우산을 받쳤다. 우산 너머로 바람에 섞인 흙비가 여전히 기세조차 꺾이지 않고 이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씨 일가가 사는 파현 땅에 이런 비가 내리면 인간들은 부정한 짓을 저지른 이가 있어 하늘이 노한 것이라 말한다. 그리하여 산에 올라 제를 올리며 하늘이 노여움을 푸시길 빌곤 한다. 비가 그칠 때까지.
이쪽 인간들은 어찌 대처할까. 누군가 짐작이라도 할까. 부정한 짓을 저지른 이가 인간 속에는 있지 않음을.
“그분, 이무기의 피가 흐른다 했지. 훗날 두려운 존재가 되실지 모르겠구나.”
정은 료의 일을 생각했다. 이 비가 아마도 그의 슬픔이 불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저택의 누구도 그런 말은 꺼내지 않는다.
큰 이무기의 노여움은 반드시 비를 불러온다 들었다. 연치 아직 백도 채우지 못한 자가 이 정도의 흙비를 불러일으킨다 하면 더욱 먼 훗날의 일을 어찌 짐작이나 할까. 하물며 그자는 짐새의 근본도 가지고 있다.
가선은 그의 참모습을 본 뒤 아직 얼마쯤 품고 있던 마음의 조각마저 모두 휘에게 돌렸지만 정은 속으로 자못 감탄했었다. 태어나는 길을 선택할 수만 있었다고 하면 정은 주저 없이 지금의 자신 대신 료와 같이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화옹에게 감히 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이가 이 세상에 없기에, 정은 현실의 자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다. 두루미인 아비와 인간인 어미 사이에 태어나 가선을 모셔야 하는 것이 제 길이다. 그리고 그를 아끼기는 하나 제 짝으로 삼기엔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녀를 온 마음으로 연모한다. 참으로, 참으로 덧없다는 것을 알면서.
마당을 지나가는 동안 빗소리 말고는 듣지 못했다. 큰 비가 와서 집 안에 갇혀 있어야 할 때에 오히려 비를 이겨보겠다고 더 크게 풍악을 울리며 노는 가진이건만, 어제 오늘 악기 소리 한 자락 들은 바 없다.
정은 힐끗 누마루 옆의 2층을 올려다보았다. 문을 모두 내리고 창문도 굳게 닫힌 방들이 마치 가진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다소 경박할지는 모르나 도량이 넓고 화통하기로는 따를 자가 없어 자매의 아비고 어미고 간에 가진이 암컷으로 태어난 것을 한했을 뿐이다. 동생을 아끼기로는 그 부모보다도 더 해 늦게 태어난 남동생이 무릎에 올라 얼굴에 장난을 치고 머리를 잡아당겨도 눈 한 번 찡그린 적이 없었다. 가선에게는 또 얼마나 다정했던가.
둘이 함께 한 형제에게 시집가자고 늘 노래를 해온 것도 가진이었다. 멀리 떨어져 살면 내 소심한 동생은 틀림없이 언니가 보고 싶어 병이 날 거라면서 말이다. 좋은 게 둘 생기면 그중에 더 좋은 것을 동생에게 주고, 동생이 기뻐하니 자신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언니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가진이 가선을 두고 떠날 행장을 꾸렸다. 마침내 지난밤 가선은 가진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결코 자신이 침아를 해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음을 변명하기 위해 그간 남몰래 휘를 제 방에 끌어들였던 일까지 모두 실토했다.
가진은 그 이야기에 오히려 더욱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토우가 그치는 대로 파현으로 돌아간다는 결심은 요지부동.
가선은 거의 한잠도 이루지 못하며 휘에게 몇 번이고 시녀를 보냈지만 휘는 온다는 대답만 해올 뿐 아직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오후부터는 휘에게 보낸 시녀들도 휘를 보지 못했다. 바깥에 나온 시종이 도련님은 몸이 불편하셔서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는 대답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정 역시 북쪽 채에 이르렀을 때 같은 대답을 들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소용없다며 돌아갔다 다시 오라는 시종의 말에 정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몇 번 돌려보내려고 시도하던 시종도 정이 그리 나오자 두 손 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토우가 쏟아지는 뜨락에 서서 정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몸은 이미 흠뻑 젖었고, 우산을 제대로 들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 바람이 윙윙 불어왔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고 있는 게 마음은 편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날이 저물었는지 하늘이 한층 어두워졌다. 음식이 담긴 소반을 들고 움직이는 낭속들이 줄을 이었다. 북쪽 채의 여러 방들에 하나 둘 불이 켜졌고, 언젠가부터는 웃음소리며 음률도 새어 나왔다. 북쪽 채의 주인인 휘가 정말로 몸이 미령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듯이 마음을 내려놓고 정은 기다림을 이어갔다.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정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선 채로 잠이 든 것이냐?”
난간을 두른 2층 마루 끝에 서서 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느라 본 하늘이 아주 어둡다. 비가 눈으로 들어가 훔쳐내는데 휘가 말했다.
“우산을 내어주마. 돌아가라.”
맹렬한 비에 우산은 무용지물이 되어 앙상한 살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그도 이제야 깨달았다. 다만 얼굴에 퍼붓는 비를 피하기 위해 소매를 들어 가리고 정이 말했다.
“아씨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시간이 늦었다. 알 만한 분이 무슨 뜻으로 이 밤에 사내를 오라 하는지 모를 일이구나.”
그 말에 뒤에서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저 사내가 어찌 이리할 수 있는가.
“첫째 아씨께서 당장이라도 파현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하는 바람에 저희 아씨께서 난감해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래? 하필 이리 토우가 내리는 때에 귀로를 잡으시겠다니 골치가 아플 만도 하구나. 하지만 내가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나는 본디 가겠다고 하는 여자를 붙잡는 일에 재주가 없느니라.”
또다시 여자들의 웃음소리. 정은 으드득 이를 깨물었다. 들고 있던 우산을 팽개치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한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것이 주씨 일문의 법도였음을 이제야 알았나이다. 화산 어르신께서 아직 거동을 못하시기에 그리로 가지 않고 이쪽을 택하여 온 것입니다만, 이놈이 잘못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즐거우신 때를 방해한 점, 아무쪼록 너그러이 눈감아 주십시오.”
깊이 절을 한 뒤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리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떼었다. 말에서 암시한 대로 이대로 화산 노파의 객청으로 갈 참이었다. 네놈이 그래도 두고만 보나 보자 하면서 걸어가길 한참, 문득 옆에 누군가 다가서는 기척이 있더니 휘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담 깨나 두둑한 친구로군. 모시는 게 계집이라 해도 사내는 사내라 이건가?”
휘는 화사한 붉은색 유삼(油衫)에 황색 비단 우산까지 받치고 있다. 이미 나올 준비를 했으면서 정을 떠본 것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혀 웃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달리 따르는 시종은 없다.
한쪽은 유유히, 다른 한쪽은 우산조차 없이 초췌한 모습으로 묵묵히 길을 갔다. 저택의 중앙에 있는 큰 오동나무를 지날 때 문득 휘가 말을 꺼냈다.
“그 아이에게 진 빚이 있다지?”
언뜻 무슨 말인가 하여 정이 휘를 쳐다보았다. 휘는 그를 보지 않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침아 말이야. 내게 그러던데. 자네가 그 아이에게 단단히 빚을 진 게 있다고.”
저도 모르게 정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의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휘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내가 하란 말만 하면 빚의 반을 덜어주는 걸로 해주겠댔어.”
“무슨 말을…….”
그제야 정을 보며 휘가 빙긋 웃었다.
“간단해. 그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만 하면 돼. 정말 간단하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멍하니 제 입으로 되뇌어 보던 정이 퍼뜩 고개를 들어 휘에게 물으려 했다.
“실은 침아 님, 살아계신…….”
“쉿.”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샌가 휘의 손이 그의 목을 잡고 있었다. 수려한 미소 속에서 휘가 싸늘하게 속삭였다.
“하란 말만 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느냐?”
기세에 눌렸다. 분하지만, 틀림없는 짐새의 손아귀 속에서 정은 피가 식는 기분이 되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떤 상황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과연 그것이 가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자니 현실의 비바람조차도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광풍이 일었다.
마침내 휘가 가선의 거처를 찾았지만 가선은 없고 대신 기다리던 시녀가 가진 아씨 처소에 올라가 계신다고 말했다. 휘는 거리끼는 기색 없이 바로 그리로 가자고 했고 정은 젖은 옷차림 그대로 가진의 처소까지 모시고 갔다.
“휘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지키던 시녀가 그들을 보고 방에 아뢰자 가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서는 휘를 가선이 울 듯 웃을 듯 묘한 얼굴이 되어 바라보았다. 이제 만사가 해결되리라고 믿는 가선을 차마 오래 볼 수 없어 정은 시선을 돌리며 문 쪽에 시립해 있었다.
가진은 듣는 귀를 꺼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시녀 둘마저도 내보냈다. 그리고 휘가 자리에 앉자 가진이 무거운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가선이 제게 참으로 묘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황망하여 차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으나, 말을 한 이가 제 동생이기에 그것이 사실인가 하고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오로지 한쪽의 이야기만 들어서야 아니 될 일이겠지요. 이왕 공자님께서 오셨으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가선이 제게 한 이야기가 모두 참말입니까?”
부채에 달린 술을 매만지며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휘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는 가선을 쳐다보았다. 가선의 열렬한 시선은 그가 자신을 비호해 줄 것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고 있다.
“저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깊은 우물에 떨어지는 차가운 이슬같이 방 안에 퍼졌다.
“가선낭이 소저에게 했다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부터 듣고자 합니다.”
대번에 가진이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제 입으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에 심히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이다.
“공자님, 이미 모든 것을 언니에게 고하였습니다. 덧붙이고 뺄 것도 없이 모두를…….”
가선이 그리 말하며 휘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려는 것을 가진이 슥 팔을 뻗어 막았다. 전에 없이 차가운 말이 가진의 입에서 떨어졌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네겐 지켜야 할 체통 한 조각도 없느냐?”
그 쌀쌀한 말에 가선이 대번에 굳어져서 그 자리에 움츠러든다. 가진에게 이런 면도 있었든가 하면서 휘가 새삼스레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제 꺾을 가망이 없는 꽃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그녀가 몹시도 귀한 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가진낭이 말씀을 해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동생분의 심사가 몹시 불안해 보이니.”
“……그리하지요.”
요란한 단장이 없으니 설경에 핀 흰 매화를 연상시킬 법한 단아한 미모가 한결 돋보이는 가진의 입에서 이미 휘도 다 아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가진은 곤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내면서 몇 번이고 곤혹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렸으나 그 이야기만큼은 시종일관 일목요연했다. 겉보기와 달리 심지가 반듯하고 강단이 있구나, 하고 휘는 내심 감탄했다.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말미에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쉬더니 휘를 가만히 쏘아보는 가진의 시선을 받으면서 휘는 부채를 접어 툭툭 바닥을 두드렸다.
“요약하자면, 제가 가선낭을 꾀어내 야합을 하였을 뿐 아니라 화산 할머님의 사주를 받아 침아를 해칠 일에까지 끌어들였다 이 말씀이군요.”
눈조차 돌리지 않고, 표정조차 바꾸지 않고 그리 말하는 휘를 보며 가진의 눈에 노기가 차올랐다.
“바로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요.”
휘는 가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가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간절한 가선의 시선을 담담하리만치 오래 마주하다가, 마침내 그가 슬쩍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
휘가 웃었다. 재미나서 웃는 웃음이 아니다. 어안이 벙벙한 일을 맞닥뜨린 자가 할 말을 잃고 내뱉는 종류의 웃음이다.
“당장 가선낭의 말재간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어딘가 크게 미령하신 게 아닌지 걱정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 공자님,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가선이 제 귀를 의심하면서 놀라 묻는 소리에도 휘는 가선 대신 가진을 보며 말했다.
“언니 되시는 가진낭께 여쭙겠습니다. 본디 동생분에게 허언의 습벽이라도 있는 게 아닌지요?”
“허, 허, 허언이라니, 공자님, 공자님, 어찌 그런 말씀을…….”
귀뿐만 아니라 제 머리까지 의심할 지경이 되어 가선은 말에 조리를 잃었다. 그런 동생을 보고 가진은 몹시 얼굴을 붉히며 용케도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제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고 한다면 저는 공자님보다 이 아이 말을 믿을 것입니다.”
“그럼 애초에 제 확인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던 거군요. 그리 믿으십시오. 저는 차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휘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가진이 따라 일어섰다. 가선은 맥이 풀려 일어설 힘조차 없는지 다만 멍하니 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차마 할 말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 일정 부분이라도 사실임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습니까?”
가진의 앙칼진 물음에 휘는 부채로 제 이마를 두드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면전에서 동생분을 보면서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가진낭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너무 황망한 일이라 그저 기가 막힐 뿐입니다. 우선 화산 할머님의 일만 해도……대체 그 자애로우신 분이 어찌 침아를 주살, 그것도 그리 끔찍하게 주살하실 계획을 꾸미셨겠습니까? 설사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다 해도 차라리 인간세계로 돌려보냈으면 돌려보냈지 아무 죄 없는 어린것을 죽인다니 그 무슨 해괴한 발상입니까? 그간 봐오신 것이 있으니 가진낭께 묻겠습니다. 제 고모할머님께서 과연 그리도 독살스런 모계를 꾸밀 분으로 보이셨습니까?”
가진은 입을 열었으나 몇 번 들썩거리기만 했을 뿐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저도 그러실 분으론 보지 않았다는 대답이나 다름없다. 휘는 여유롭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제가 동생분의 처소를 드나들며 만나 왔다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아, 이제 모두 얼크러진 일이 된듯하나, 이 마당에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미 고모할머님께 가진 소저와의 혼담을 긍정적으로 생각 중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아직 소저께서 심사숙고 중이신 듯하여 조심스럽게 물러나 있었을 뿐, 제게 마음이 있다는 뜻을 비쳐 오시면 정식으로 구혼을 할 작정이었지요. 물론 제가 이래저래 여러 꽃 가지로 옮겨 다니길 좋아하는 습벽이 있긴 하나 정실감으로 마음에 둔 여자의 동생까지 건드리는 것은, 차마 못할 짓입니다.”
가진의 얼굴이 복합적인 의미로 더더욱 붉어졌다. 제 동생을 쳐다보자 가선은 반은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생전 처음 언니에게 냉대를 당하며 이틀 밤, 사흘 낮을 속을 끓였으니 기가 상할 대로 상한데다 이제 휘가 천만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가선이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가선은, 제 동생 가선은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물론 그 정도 두둔은 하고 나올 줄 알았다. 그 정도도 하지 않으면 사이좋은 자매라 말하는 것도 거품이었을 것이다. 휘는 자신이 어째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이마를 짚고 생각하는 척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정을 돌아보았다.
“동생분 말대로 제가 처소를 드나들었다고 한다면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하물며 저자는 동생분의 그림자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저자에게 묻지요. 여봐라, 너. 네 주인이 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너는 아느냐?”
정은 참담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방바닥을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마침내 중얼거렸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자 휘가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가진을 돌아보았다.
“저자도 모르게 제가 그림자라도 되어 방에 스며들었다고 하시겠습니까?”
가진이 입술을 깨물었고 다시 가선을 쳐다보다가 이내 소맷자락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그대로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그녀가 한탄했다.
“아아, 아아. 대체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네가 어쩌다, 어쩌다가…….”
한탄 끝에 소매로 머리를 가리고는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여태 어찌어찌 버티다가 이제 모든 게 다 무너져 너무도 기가 차서 뽑아내는 언니의 울음에 멍해 있던 가선이 불현듯 몸을 일으키더니 휘에게 달려와 매달렸다.
“아니지 않습니까, 공자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어찌하여 그런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을 하시는지요? 정아, 정아, 너는 또 어찌 모른다 하느냐? 제대로 말해라, 똑바로 말을 해. 네가 틀림없이 다 보았지 않아? 매번 복도에서 지키고 앉아 있었으면서 이제 와 모른다니, 네가 모른다니!”
자신을 배반한 휘에겐 아직도 매달려 애원하고 웃기도 하면서 정에게는 험하게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정은 모진 마음을 먹었다. 고개를 들어 가선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모르는 일입니다. 아씨, 저는 그런 일은 모릅니다.”
“아니야! 아니야! 왜 그래,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네가 미쳤어, 네놈이 미친 게야! 말해, 제대로 말해, 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해!”
정에게 달려든 가선이 그의 얼굴이며 등이며 할 것 없이 치고 할퀴고 흔들어 밀쳤다. 그리 맞으면서도 정은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모릅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저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하면서 놀라는 표정을 짓던 휘는 언뜻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싶어 가진을 돌아보았다.
가진은 망연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제 동생이 정을 그처럼 때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니, 실제로 그녀가 누군가를 그리 때리는 것도 처음 보았다.
“저 아이가……미쳤구나.”
지금까지 그녀가 알아온 착하고 예쁜 동생이 거기 없었다. 서슴없이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발광을 하는 가선은 가진이 아는 동생이 아니었다. 살려달라며 매달리는 침아를 발로 밀쳐내면서 보였던 그 악귀 같은 얼굴이 거기 있었다. 가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뒤로, 뒤로 물러났다.
그때 문득 휘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진이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휘는 연민을 가득 담은 눈으로 말했다.
“무언가 몹쓸 병에 걸리신 거겠지요. 원래 저런 낭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예, 저런 아이가 아니에요. 우리 가선인 저런 아이가 아니에요…….”
“유감스럽습니다. 이래서야 돌아가신다고 하셔도 말릴 도리가 없군요.”
다독거리듯 가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 휘는 사뭇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가선이 나가는 그를 보고 쫓아 나왔으나 가진이 시종들을 불러들여 그녀를 붙잡게 했다. 가선의 손끝은 휘의 옷자락을 스치지도 못했다. 그는 가선을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법석의 한복판에서 벗어난 휘는 빠르게 걸음을 내딛다가 주위가 조용한 곳에 이르자 처마 아래에 서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고 부채로 툭툭 턱을 두드리면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빚을 어떻게 졌기에……. 아니, 놀라야 할 건 그 아이의 혜안인가? 과연 어디까지 수를 내다본 것일꼬?”
제 입으로 그리 말하면서도 저도 역시 침아가 손끝으로 가지고 노는 장기말임은 모른다. 남에게 떠받들려서 사는 것에만 익숙한 귀하신 분들의 특징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발상 자체가 없다.
밤이 깊었어도 비가 그칠 기미가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휘는 방금 전 일을 들으면 침아가 좋아할 텐데 이래서야 갈 수 없으니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흙비로 시야가 뿌옇던 것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손을 내밀어 보니 손에 닿는 빗줄기는 그저 맑기만 했다.
좋다. 이제 비도 맑아졌고, 내일쯤 해서 아예 그칠 것 같다. 돌아가겠다고 가진이 말한 대로 난씨 자매가 떠나면 지금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저택도 조금은 한갓져질 것이다. 그리고 화산 노파가 료를 데리고 떠나주면 바랄 것이 없겠는데.
동쪽 채가 있는 곳을 생각하며 건너다본 휘는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기왕 나온 김이니 하면서 빗속으로 나섰다.
동쪽 채에 이르는 중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뜰에 이르자 소란은 한층 뚜렷해졌다. 불도 켜지지 않은 건물에서 무언가가 날뛰고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오니 귀신이 법석을 떠는 듯이 느껴졌다.
괜히 왔구나 하면서 역시 그냥 돌아서자 하는데 흡사 마른 우레가 땅에 내리꽂히는 듯한 괴성이 일어났다. 이어서 우지끈하면서 문이든 뭐든 부서지는 게 틀림없는 소리가 났다. 료를 부르는 화산 노파의 목소리가 애처롭도록 높다.
“쳇.”
료야 알 바 아니지만 화산 노파가 혹 심하게 다치는 것은 곤란했다. 비록 평생 잊지 않을 원망도 한 가지 품고 있긴 하나 어린 시절부터 휘를 귀애해 주신 고모할머님인 것마저 잊을 정도는 아니다.
놀란 것을 좀 추스르기 바쁘게 화산 노파가 료의 곁에 있어줘야 한다면서 동쪽 채로 거동을 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다. 료를 약이나 향의 힘을 빌려 잠재우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계속 저리 재우기만 하면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다. 하지만 누가 료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우송이 아무리 충성스럽고 힘이 좋다고 해도 료가 짐새인 지금 본체로 계속 머물러 있는 이상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개죽음하기 딱 알맞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화산 노파이니 료가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 해도 심한 일은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들려오는 소리로 봐서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방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휘는 부서진 문의 잔재가 복도에 이리저리 널린 것을 보았다. 과연.
“료, 제발 부탁이다. 제발, 제발 할미 말 좀 들어다오.”
들어선 방 안은 이틀 전보다 더한 난장이었다. 이불을 있는 대로 끌어다 료의 몸을 덮어 밧줄로 칭칭 동여매고 우송이 그 목을 누르고 앉아 있었고 화산 노파는 부리를 벌리려고 애를 썼으나 통하지 않았다.
“싫다 하면 내버려두세요, 할머님. 한 열흘 먹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잖습니까.”
태평하기까지 한 말을 던지며 휘가 자신이 온 걸 알리자 화산 노파가 그를 힐끗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먹지 않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니 탈이다.”
“무얼 먹기에요? 흠, 있는 거라고 해봤자 그 아이 옷가지에……설마 그 아이 옷을 먹고 손길 닿은 흔적 있는 건 모조리 삼키려고 드나보지요?”
주위를 한 번 돌아보며 농으로 지껄인 소리였는데 대답하는 소리가 없으니 그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화산 노파가 눈을 꼭 감고 있는 료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눈을 뗀 사이에 그 아이 머리꽂이를 삼켰다. 그 날카로운 것이 속에 들어가 어찌 될 줄 알고…….”
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침아의 신도 없고 잘린 머리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이미 삼켜버린 모양이다. 거기다 찢겨진 옷은 물론 속이 드러난 베개도 보이고…….
믿겨지지 않았다. 이 녀석이 머리가 살짝 돌았나 싶어서 료를 내려다보다가 싸늘하게 이죽거렸다.
“그래, 그렇게 다 먹어버리면 기억할 만한 것도 하나도 남지 않게 되겠지. 어서 잊고 싶은 모양이니 말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할머님.”
그 말에 료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불을 머금은 숯처럼 이글거렸다. 휘는 계속 말했다.
“그 아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걸 모두 뱃속에 넣고 보자는 생각이라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그리 먹으면 뱃속에서 천년만년 머물러 있는다든? 진정 끔찍하게 아끼는 계집이었다면 남은 유품, 먼지라도 앉을까 차마 손도 못 댔을 텐데. 지금 네 하는 짓이 범과 다를 게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범이란 소리에 료의 눈이 크게 뜨였고, 다음 순간 방 안에 있는 자들의 귀를 찢어버릴 듯이 커다란 조효가 일어났다. 료가 발버둥치는 서슬에 우송이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갔고 화산 노파도 한쪽 구석으로 떠밀렸다. 그렇지만 휘도 만만치 않았다. 재빨리 모습을 바꾼 휘가 아직 단단한 결박에 매여 있는 료의 몸 위로 내려앉아 발톱으로 먼저 료의 목을 확보했다.
“작작해라, 료. 세상에 제 계집을 잃은 사내가 어디 너 하나라더냐? 그 아이는 어차피 너보다 훨씬 빨리 세상에서 마를 이슬이었다. 그것이 생각보다 더 빨랐다고 해도, 네가 이리 미친 짓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아.”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료의 말에 휘는 하마터면 진심으로 폭소를 할 뻔했다. 그 소리가 료의 입에서 나오다니, 이런, 이런.
“내가 모르는 게, 무어냐, 동생아?”
조소가 담긴 휘의 눈을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응시하며 료가 말했다.
“태어나서, 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어?”
“나보다 더? 료. 세상에 내가 있어야만 소중하게 생각할 자도 생기는 거다. 가장 소중한 건 나여야지.”
료의 눈에 비릿한 웃음이 차올랐다. 고통스럽고 신랄한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그래. 너는 평생 그리 살아. 왜 가는지 모를 길을 한없이 걸어가면서, 평생, 평생 네 그림자나 보고 살아.”
“미친놈. 계집 하나 잃었다고 학자연하는구나. 할머님, 이러다 우리 일족에서 성조(聖鳥)가 나오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해탈을 해서 부처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다시 눈을 감아버린 료는 잠자코 있었으나 화산 노파가 역정을 내었다.
“휘 너는 지금 이 일이 즐거운 게냐? 그리 밖에 못 할 양이면 썩 나가라. 네 도움 따위 필요치 않다.”
“어찌 즐거워서 이러겠습니까? 하도 답답해서 해본 소리입니다.”
우선은 변명을 해두고 휘는 료를 내려다보다가 그럴 듯한 생각을 해냈다.
“차라리 꽃을 먹어라, 료.”
움찔하며 료의 눈이 다시 뜨였다. 휘는 제가 해낸 생각이 만족스러웠다.
“그 머리꽂이라면 침아가 몹시 아끼던 것이 아니냐. 뱃속에 두지 말고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닦아주는 것을 그 아이도 바랄 게다. 그리고 그 아이가 보고 싶으면 비슷한 향이 나는 꽃을 찾아. 그리 좋은 향기가 나는 아이였으니 다시 태어나면 아마 꽃으로 태어날 테니까.”
끔벅끔벅 료의 눈가죽이 움직였다. 휘의 말을 생각해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료는 목을 비틀며 머리를 들었고 힘들게 커억, 커억하고 센 기침을 했다. 한참 만에 어렵사리 자석영 머리꽂이를 토해 냈다. 그것을 쳐다보면서 료가 중얼거렸다.
“등꽃이라면…….”
료가 중얼거린 소리에 우송이 벌떡 일어섰다.
“큰 향나무가 있는 곳에 등꽃 몇 송이가 핀 것을 봤습니다. 주인님, 그리로 가시겠습니까?”
“등꽃…….”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대신 그렇게 가만히 중얼거리는 소리만 반복했다. 우송이 화산 노파를 보자 화산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가 료의 몸에서 비켜났다. 우송은 한결 커다래진 료의 본체를 등에 지고 끙끙대면서도 용케 복도로 나가기 시작했다. 화산 노파가 뒤를 따르고 휘도 어디 어떻게 흘러가나 볼까 하는 심산으로 함께 갔다.
이 저택의 터줏대감을 따지자면 가장 으뜸일 향나무 옆으로 선 느티나무를 타고 올라간 등나무가 정말로 보라색 꽃 몇 개를 드리우고 있었다. 다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서쪽 채 공사를 하며 오가던 우송이 유일하게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풀어다오.”
힘없는 주인의 명령을 우송은 망설임 없이 따랐다. 결박에서 풀려난 료는 스르륵 몸을 일으키면서 어언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화하였다. 화산 노파가 곁에서 우산을 씌워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등나무로 다가간 료가 늘어뜨려진 꽃송이에 손을 대더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향을 깊이 맡았다. 비에 젖긴 했어도 퍽 비슷한 향기가 났다.
“늘 이 향기가 침아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님.”
“그렇구나. 나도 보라색 무언가라고 생각은 했는데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싶더니, 등꽃이었구나. 등꽃이었어.”
“꽃을 먹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침아는.”
“꽃을……?”
어리둥절한 빛이 화산 노파의 눈에 떠올랐다. 언뜻 무슨 생각이 떠오를 뻔했으나 다음 순간 료가 벌이는 일 때문에 화들짝 놀라 잊고 말았다.
“료, 무슨 짓을!”
료의 손이 닿은 곳부터 파스스슥 소리와 함께 등꽃과 등나무 주위로 마치 서리가 내린 듯이 하얗게 얼어붙어 갔다.
“꽃은 사흘이 못 가 시들지 않습니까. 그리 빨리 죽지 말라구요.”
잠시 화산 노파는 말문을 잊었다. 다시 어린애가 된 것처럼 료는 이제 한 가지 생각을 하면 다른 일은 잊고 마는 듯했다.
화산 노파가 살며시 료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도 료는 뿌리치지 않았다. 온통 등꽃에 신경이 쏠려 있는 그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료, 이래서야 꽃이 사흘이 아니라 당장에 얼어 죽겠구나.”
“……죽나요?”
“아무렴. 죽지. 꽃은 추위에 강하지 못하니까. 료, 너도 추운 건 질색이지?”
“예, 싫습니다. 추운 건 싫어요. 바람이 뼛속에 스며드는 것처럼 싸늘한 느낌이 너무도 싫어요. 제 차가운 몸이 싫어요. 그런데 침아는 자기한테는 시원하다면서 제 이런 몸도 쓸모가 있다고 했지요.”
희미하게 웃더니 료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등나무에서 손을 떼자 성에가 퍼져나가던 것도 그치고 이내 빗줄기 속에서 언제 그랬냐 싶게 녹아내렸다.
“제 꼴이 말이 아니군요.”
“조금 엉망이긴 하구나.”
“그래도……부족해요.”
그리 말하는 료가 너무도 침착하게 보였기에 별안간 향나무에 달려들어 머리를 짓찧기 시작할 줄, 화산 노파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다들 얼떨떨하여 우송조차 료가 수차례 자해를 하는 것을 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붙잡았다.
“주인님, 주인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우송의 뜯어말리는 힘조차 이겨내면서 료는 거듭 향나무를 들이받았다.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사방으로 그 피가 튀었다. 화산 노파가 료와 나무 사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왜 이러느냐, 료! 네가 진정 이 할미가 죽는 꼴을 보아야겠느냐?”
“살려고 그럽니다, 할머니. 말리지 마세요……. 살아서 그 애를 보려고 그러는 것이니 제발……제발.”
“네가 지금 죽고자 작심을 한 것이지, 이게 어찌 살려는 짓이란 말이냐?”
속절없는 눈물을 쏟으며 화산 노파는 깨어진 료의 머리를 어쩔 줄 몰라 소매로 닦으려 했다. 료가 그 손을 밀어내면서 파리하게 웃었다.
“이래야 그 애가 못 갑니다.”
“뭐라고?”
“밤에……그 애가 옵니다, 할머니. 반딧불이가 되어 찾아와요.”
우산 아래에서 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헛소리인지?
“영영 이별이라고 말하면서도, 제가 걱정되어 구천을 떠도는 것입니다. 제가 멀쩡한 모습이 된 걸 보면, 이젠 안심이구나 하면서 다시 오지 않을 게 아닙니까. 못 가지요. 그리는 못 가지요……. 제가 고이 보내줄 줄 아십니까.”
피에 젖은 얼굴 속에서 두 눈이 예사롭지 않게 번득이니, 실로 광기다.
“못 간다! 귀신이 되었으면, 내 그 귀신이라도 붙잡아 죽도록 함께 할 것이야, 듣고 있느냐? 침아야, 듣고 있느냐?”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가 껄껄 웃어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몇 번이고 우레를 울리며 빗줄기가 더욱 강해졌다. 화산 노파와 우송은 망연하여 할 말을 잃었고, 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몇 발 뒤로 물러섰다.
거죽은 새의 형상일지 몰라도 그 거죽 아래 강하게 요동치는 본성은 이무기의 그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휘는 본 적이 없는 그 아비 되는 자, 생각 이상으로 걸출한 영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밤, 미친 비바람이 불어 저택이 있는 산 위는 물론 산 아래 마을까지 온통 뒤숭숭하였다. 을씨년스러운 비구름은 흩어질 줄 모르고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어이 하여 이런 모습이십니까?’
그 밤 료의 꿈길에 나타난 침아가 한탄하였다.
“다쳤다.”
‘어리석으십니다. 참으로 어리석으십니다.’
“그걸 이제 알았누? 네 원래 아는 줄 알았다. 다 해본 말이었구나.”
‘마지막 가며 보는 모습이 이런 것이면 사무쳐 어찌하라 이러십니까?’
“어찌하긴. 무심히 가거라. 그럴 수 있으면.”
‘갈 것입니다. 가야 합니다.’
“그리해. 나도 어차피 가야 할 곳이 있구나.”
‘엉뚱한 생각은 마소서.’
“그 동굴이 네 무덤 자리가 되었다. 난 그리로 가련다.”
‘거기에 저는 없습니다. 이미 다 태워져 덧없는 재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럼 거기에 내 재도 더하면 될 일이지. 해로동혈(偕老同穴)이라 하더니, 해로는 못하고 동혈만 하겠구나.”
‘마소서, 마소서. 제발 그리 마소서.’
고개를 숙인 침아가 어깨를 흔들며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바라보던 료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으려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혹 손을 대었다가, 이 꿈이 모두 바스러질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혼백도 눈물을 흘리는구나.”
‘아아, 아아. 인연이 끝났습니다. 어찌하여 모르십니까, 어찌하여 붙들고 계십니까. 저를 이토록 추운 곳에 계속 머물게 하시는 것이 정녕 바라는 바이십니까?’
“그곳이 추우냐?”
‘춥습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는 혼백조차 다시 죽고 말 것입니다.’
“가여운 것.”
주르륵 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꽃도 없고, 추운 곳에서 내 귀여운 아이가 파리하게 시들겠구나. 가여운 것. 가여운 것…….”
‘아아, 료. 료. 그 짧은 인연에 대체 무엇이 있었다고 당신은 이리…….’
저어하던 것조차 잊고 료는 그만 손을 뻗어 침아의 뺨을 감싸려 하였다. 안타까이 그를 바라보며 호소하던 침아의 얼굴이 아스라하게 흔들리나 싶더니 잔영조차 없이 흩어져 버렸다. 부연 빛의 원만이 그 자리에 남아 이내 사위어 간다.
료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머리 위로 칠흑의 어둠 속에 부유하는 희미한 담황색 벌레가 보였다. 어김없이 반딧불이다. 손을 뻗어 그 빛을 천천히 따라갔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오래 머물렀지.”
꿈속에서 흘렸던 눈물이 눈꼬리에 맺혀 있다가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입가에 엷게 미소가 드리워졌다.
“거기가 추워서 어찌하나, 우리 침아…….”
서글픔이 가슴을 채워 한숨으로 새어나왔다. 반딧불이가 날아가는 것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 벌레는 문간에 기대어 지쳐 잠든 우송의 머리끝에 앉았다. 벌레로부터 우송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물끄러미 우송을 쳐다보던 료가 중얼거렸다.
“너랑 사냥을 가야지, 꼭 한 번은.”
잠결에 우송이 코를 킁킁대더니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주인님.”하고 잠꼬대를 했다. 설핏 료가 웃었다.
머리를 돌려 천장을 보고 눕는 료의 눈에서 빠르게 빛이 사라져갔다. 다시금 흑과 백밖에 없는 단조로운 풍경이 되어 버린 세계.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진 세계. 텅 빈 가슴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만히 있어도 괴괴한 바람소리가 그 세계를 채웠다.
그 짧은 인연에 대체 무엇이 있었느냐고 침아는 물었다.
료는 대답하고 싶었다.
‘전부’라고.
호수를 들여다보며 잔뜩 세운 날개 속에 추운 듯 몸을 웅크린 여자 곁으로 문득 반딧불이들이 떼를 이루어 모여들었다. 윙윙거리는 날갯소리가 제법 큰 데도 여자는 돌아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아기야.”
뭉쳐진 반딧불이들의 모습이 어룽어룽해지면서 곧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입을 열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치잇, 하고 혀를 찬 그 형체는 여자가 내려다보는 호수에 바짝 가까이 갔다.
“아기야, 아기야? 이보렴, 아기야. 아이구……. 얘, 침아야?”
눈을 뜨고는 있었으나 잠이라도 든 듯 멍해 있던 여자는 그제야 퍼뜩 놀라며 묘한 형체를 쳐다보았다.
“……언제 오셨습니까?”
눈만 샛노랗고 털은 온통 새하얀 원숭이의 머리만 덜렁 눈앞에 떠 있는데도 여자는 거기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기는 좀 전에 왔는데 저 아둔한 녀석이 잡스런 꿈을 하도 꿔대서 말이다. 머리 한 구석 빌렸다가 멍청한 게 옮을 것 같아 관뒀다. 박쥐라는 건 생긴 것만 못난 게 아니라 도무지 쓸데라곤 없구나.”
잠든 문복의 몸을 빌릴 계획이었는데 잘되지 않은 모양이다. 여자가 빙긋이 웃자 원숭이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듯이.
“너도 이제는 인정을 하는 게로구나.”
“저만하면 많이 똑똑해졌는걸요. 다 위후 님 덕분입니다.”
“욕이냐, 칭찬이냐?”
크게 의심하는 눈으로 원숭이가 흘겨보았다. 여자는 또 웃기만 했다.
원숭이 꼴을 하고 있지만, 그것도 당장에는 반딧불이 숫자가 마땅치 않아 머리만 있긴 하지만 위후가 맞다. 여자의 전 주인 행세를 하던 승냥이. 두 발로 서는 개 흉내를 내는 것을 즐기는 편이고 그 외 다른 뭇 동물 행세를 할 때도 빈번하지만 아주 가끔, 제가 믿는 자 앞에서는 그 가면도 벗는다. 믿는 자, 이를테면 절대로 배반하지 않으리라 여기는 자의 수는 지금은 세 손가락을 꼽으면 끝인데, 그중 하나가 지금 눈앞에 있다.
“단조(丹鳥)로 장난을 치던데, 잘 되더냐?”
위후의 물음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피식 위후가 코웃음 쳤다.
“숨길 수 있을 성싶으냐? 이 몸이 나름 스승인데 말이지.”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
“잠이 오지 않아서 네 죽은 줄 알고 상심한 짐새 도령의 꿈에 나타나 귀신 행세를 한다는 말이지? 잔혹하구나, 그러니 고획조지.”
여자가 울컥했는지 입술을 깨물며 위후를 노려보았다. 휙 일어나 호수를 뒤로 하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녀의 뒤로 둥둥, 원숭이 머리가 따라가면서 미운 말을 골라 했다.
“그리 애틋한 녀석, 차라리 보쌈해 오지?”
“꼭 자기 같은 말씀만 하십니다.”
“왜? 문제는 그 형 놈이지 어린 도령이 무슨 죄냐? 둘이 사이도 안 좋다며? 모른 척하고 일 다 끝난 뒤 데리고 살아. 알게 뭐냐, 네가 말만 안 하면 그만이지.”
“그리 제멋대로 속여먹어도 좋을 분이 아닙니다.”
“분? 분? 턱없이 자연스레 존칭을 쓰는구나.”
“그만하셔요. 놀리는 말씀,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왜, 내 입에 올릴 놀림감으로 삼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게냐?”
“제발!”
여자가 버럭 소리를 치며 멈춰 섰다. 단단하게 굳어가는 입 가장자리와 함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제발, 그쯤 해두세요. 아주 끝난 인연입니다. 제가 여기 이렇게 날개를 달고 있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아주 끝난 인연인 자에게 단조를 날려 해야 할 말이 남았단 말이냐?”
여자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반달을 넘어 다시금 보름을 향해 가는 달을 보면서 그녀가 탄식했다.
“저는 이전의 일로 후회해 본 적도 없고, 앞의 일이 두려워 떨어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자에게는 분명 모진 짓을 했습니다. 그 마음에 남은 생채기, 조금이라도 덜어 어서 아물게 하고 싶은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했으면, 그 도령 도와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거짓 위에 쌓아올린 성이었습니다. 이제 발판을 빼냈으니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지요. 당장의 황망함도 시간이 흐르고 보면 웃어넘길 일이 될 것입니다.”
“너는 네가 하는 말을 믿느냐?”
위후의 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위후의 황금빛 눈이 애잔하다는 듯 가늘어져 있다.
“네가 내게 눈을 묶여 반노예가 된 이유가 무어냐? 한 계집의 죽어서도 놓지 못한 한(恨) 때문이었다. 그 한은 어디에서 왔느냐? 박정한 사내의 정(情) 때문이었지. 한갓 정 때문에 일개 인간도 미쳐서 귀신이 된다. 그럼 그 도령은?”
“……료는 그리되지 않을 겁니다. 그의 곁에는 화산 어르신도 있고, 우송도 있어요.”
“그럼 그 계집은? 옆에 있었던 네가 무엇을 못 해줬기에 그 계집이 그리되었느냐?”
위후의 말은 번번이 정곡을 찔렀다. 여자는 할 말을 잃었다. 멍하니 반은 넋을 놓은 그녀의 앞에서 원숭이의 머리가 오락가락하면서 말했다.
“그냥 보쌈해 오렴. 원래 계집은 거짓말을 잘하라고 혀가 사내보다 더 붉단다. 말재간이 없어 망설이는 거면 이 내가 그럴 듯하게 꾸며주마. 응? 그리고 둘이 사이좋게 내 부하가 되는 것이지. 어떠냐? 어떠냐?”
침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 미안했던지 웃기려고 위후가 자못 익살을 떨었으나 여자는 결국 조금의 미소도 비추지 않았다. 결국 원숭이 머리가 흩어져 다시 반딧불이로 돌아가고 너른 들판에 여자는 혼자 남았다.
어느덧 달도 이울어져 하늘에서 자취를 감추자, 주위가 한밤중보다 한층 어두워졌다. 언제나 동트기 직전에 가장 묵직한 어둠이 깔리는 법이다.
“……애초에 내가 침아인 적이 있었나? 료가 연모한다 한 침아는 솔직하고 때로 상냥해서 그의 눈에 어여쁘게도 보인 인간의 어린 계집이었을 뿐. 나는 이제 이름이 없다. 대신 날개가 있지. 솔직하지도 않고, 상냥하지도 않아. 그렇지만 이토록 어여쁘지 않은가.”
호수에 비친 자신을 보며 침아가 중얼거렸다. 천천히 날개를 나부껴 떠올라 호수의 물을 손으로 흩어가며 둥글게 맴을 그리는 장난을 하였다. 항상 즐거웠던 장난이건만, 아무리 같은 짓을 반복해도 웃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꾸며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호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춤을 추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 잠에서 깬 문복이 그녀를 찾아 나올 때까지.
여자는 녹초가 되었다. 곤해 죽을 지경이지만 배고프다며 칭얼대는 문복을 숲으로 보내 사냥을 해오게 하고 자신은 호수의 물을 들이켰다. 그러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새삼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잠이 든 기억이 아득히 멀다는 사실. 언제인가 더듬어보니,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중오절 오전. 료의 품에서 가볍게 들었던 선잠. 아아, 그 차갑고도 비단같이 매끄러운 살결에 감싸여 자는 것은 퍽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여자는 그 비슷한 무언가가 찾고 싶었다. 문득 생각난 대로 호수에 들어가 날개를 베개 삼아 누워 보았다. 소금기와는 거리가 있는 담수이니 그녀의 몸은 가벼운 날개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차가운 물은 아무런 불만도 표하지 않고 그녀를 받아들여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물속에 가라앉아가면서 올려다본 해가 낮에 뜬 달처럼 서늘해 보였다. 문득 항아(嫦娥)에 대한 노래가 떠올랐다. 예는 결국 항아가 있는 달을 화살로 쏘지 않았다. 그것이 그자의 ‘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내도 있다. 료의 정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히기 전에 여자는 진저리를 내며 물 밖으로 나왔다.
“수이산으로 가자. 이제 일을 다 끝내면 지금까지의 일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을 테다.”
휘가 자신의 비밀 거처에 돌아온 것은 꼭 사흘만의 일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두견새 시종은 문간에 기대어 사흘 동안 자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침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라 했더니 시종은 도통 모르겠다며 머리를 저을 뿐이라 휘는 기가 막혔다.
“그 어린것 하나 못 지키다니 너는 대체 무슨 일을…….”
휘가 텅 빈 방 안을 황당하게 돌아보면서 발로 이부자리를 걷어차는데 무언가가 툭하고 걸리는 게 있었다. 요와 이불 사이에 빠끔히 보이는 것은 접힌 종이였다.
들어서 펼쳐보니 서찰이었다.
―제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아직이시길 바랍니다. 이미 제게 이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으니 말입니다. 제 이름은 연화(燕花)라고 합니다.
“……제비꽃?”
말 그대로 그리 풀이되는 이름에 휘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마저 짧은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제게 이름을 붙여준 이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혹시 아시는 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완아’이지요.
“완아. 완아라.”
의아한 표정으로 그 이름을 입에 담는데, 어째선지 입에 설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분이 계신 곳은 수이산입니다. 제가 먼저 가 있겠습니다.
수이산이란 말에 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이산과 완아. 어렴풋이 무언가가 떠오를 것도 같았다. 어째선지 눈앞에 선한 것은 며칠 전에 료가 들고서 휘에게 이게 뭔지 알지 않느냐고 했던 파란 비단 공이었다.
뭐지, 뭐지 하다가 불현듯 모든 것이 떠오른 순간 휘는 저도 모르게 서찰을 구기며 신음을 삼켰다.
“설마 그 아이가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