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단조(丹鳥)
무언가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셨습니까?”
마치 먼 곳, 어쩌면 물속 깊은 곳에 있는 누군가가 묻는 것처럼 목소리가 번져온다.
“……보셨습니까?”
“무엇을 말이야?”
잠결에 물으면서 가벼이 미간을 찡그렸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직도 희미하다.
“……말입니다. 못 보셨습니까?”
좀 더 뚜렷해진 목소리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도통 그 앞의 말이 잘 들리질 않았다.
“뭘 못 봤느냐 묻는데…….”
“꽃신 말입니다, 아씨. 못 보셨습니까?”
“꽃신?”
대체 무슨 소리지 하면서 어렵게 눈을 뜨는데 바로 눈앞에 누군가의 눈이 반짝였다. 한쪽 눈.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 눈 아래의 주사를 삼킨 듯 붉은 입술이 그녀에게 물어왔다.
“제 꽃신 말입니다. 못 보셨습니까?”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마침내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무슨 꽃신을 찾는지 깨달았다.
“꺄아아아아악!”
가선은 비명을 질렀다.
몸서리를 치면서 땀에 젖은 몸을 일으킨 가선은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명을 지르던 입을 틀어막으면서 진정해, 진정해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황망히 방 속 어둠을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인 것은 그때였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어둠 속을 날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정아, 정아! 정아아!”
“아씨!”
이미 그녀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정이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저거, 저거! 저것을 죽여!”
“무엇을……?”
어리둥절해하면서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본 정도 이내 방 안을 부유하는 반짝이는 빛의 홀씨를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그 역시 쭈뼛하여 그의 품을 파고든 가선을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하니……그 아이의 혼령인가?
그런 생각이 든 것을 마냥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두려움에 질려 이성을 잃고 어서 죽이라고 소리치는 가선보다 정 쪽이 더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는 우선 몸을 일으켜 등잔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어두웠던 불이 살아나면서 점차 방이 환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날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아씨, 그저 반딧불이입니다.”
“반딧불이?”
“예. 세우지……쪽에서 흘러온 것일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의심했다. 세우지에는 반딧불이가 살지 않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물은 맑지만 반딧불이의 유충은 전혀 본 바가 없다.
오히려 반딧불이를 본 곳이라면…….
가선은 정의 허리를 꼭 잡아 매달리며 고개를 저었다.
“꿈을 꿨다, 정아. 내가 몹쓸 꿈을 꾸었어.”
“무슨 꿈이셨습니까?”
“몹쓸 꿈이었어. 아주 몹쓸 꿈. 제발 저것을 죽이든지 날려버리든지 해!”
가선의 말에 정은 일어나 창문을 열고는 부채를 들어 반딧불이를 쫓았다. 아무렇지 않게 창을 지나 어두운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반딧불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정은 창문을 닫았다. 돌아보니 가선은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는 종잡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몹쓸 일이야. 감히, 그런 천한 것 따위가 감히…….”
다가간 정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주무셔야지요. 제가 곁에 있어드리겠습니다.”
“언니는?”
고개를 든 가선이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십니다.”
“왜 못 깨어나지? 벌써 하루도 지났는데. 그 술, 그렇게까지 독한 술도 아니었어. 오늘 밤 자고 나면 깨겠지? 그렇지, 정아?”
“깨실 겁니다. 아씨, 주무세요.”
“자고 싶지 않아, 정아. 자기 싫어. 정아, 언니가 깨면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뭔가 께름칙해.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 어제……어제 돌아오면서 아무래도 우리가 몹쓸 걸 데려온 것 같아. 그 신을 주워 와서 그래. 신은 제 주인한테 있는데 왜, 왜 나한테 와서 찾아? 안 그래, 정아?”
횡설수설하는 가선의 말 속에서 정은 그녀가 꾸었다는 꿈의 대충을 그려볼 수 있었다. 어째서 ‘누군가’가 신을 찾으러 가선에게 왔는지 정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인데 가선은 한사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주무셔야 해요, 아씨. 자, 물을 드시고…….”
그가 주는 대로 자리끼를 마시긴 하였으나 정이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나려 하자 가선이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가지 마! 여기 있어, 여기 있어야 해.”
“가지 않습니다. 방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게요.”
“아니야, 안 돼. 또 그 아이가 올 거야. 불도 꺼선 안 돼.”
그에게 완강히 매달려 가선은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덜 이를 부딪치며 떨었다. 그야말로 어린아이였다. 가선을 내려다보는 정의 눈빛이 미묘했다. 안쓰러워하는 듯이, 경멸하는 듯이, 그리고 혹은 기뻐하는 듯이…….
“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불도 켜두지요. 나쁜 꿈을 꾸시면 깨워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아씨, 주무세요.”
가선의 등을 다독이면서 정의 생각은 이틀 전 오전으로 흘러갔다.
이틀 전, 즉 답청을 나가기로 한 중오절(重五節) 사시 무렵, 바로 이곳 가선의 침소의 이부자리를 차지한 이는 다른 사내였다.
한창 면경을 보며 머리를 단장하던 가선은 제 고운 얼굴이 비치는 거울 너머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오늘 밤이지요?”
아직 이부자리에 누워 나른하게 졸린 얼굴을 하고 있던 휘가 고개를 들었다. 가선을 보며 가까이 오라 손짓을 하자 가선은 면경 앞을 떠나 휘에게 다가가 고분하게 그 품에 안겼다. 얇은 속옷 위의 가선의 등을 쓰다듬으며 휘가 말했다.
“두려우면 그만둘까? 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지.”
“두렵긴 하오나…….”
말끝을 떨어뜨리며 휘를 올려다본 가선은 약한 한숨과 함께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공자님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하오리다.”
물끄러미 가선을 내려다보며 휘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산목숨을 해치는 일인데, 너는 정말 내가 무섭지 않으냐?”
“하오나 모두가 동생분을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이 아니옵니까? 하물며 지혜로우신 화산 어르신께서도 뜻하신 바이옵니다.”
“나는 문득 생각하니 그 아이 일이 가엾구나.”
“작은 공자님이요?”
그 천진한 물음에 휘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료야, 결국엔 잊겠지. 침아 말이다. 그 어린것이 무슨 영문으로 당하는 일인지도 모르고 비명에 갈 것이니 사뭇 마음이 무거워.”
“굳이 원망할 이를 찾자면, 그 아인 료 공자님을 원망해야겠지요. 또, 결국 근원을 따지자면 그 아이의 과욕이 불러온 일이 아닙니까?”
대꾸하는 가선의 눈에 묘한 표독스러움이 떠올랐다. 쌀쌀한 말투에 휘는 짐짓 눈을 크게 떴다. 가선은 계속 말했다.
“인간의 몸을 하고서 짐새와 같은 고귀한 일족의 총애를 받는 것으로 모자라 감히 정실의 자리를 원한 것이 어찌 료 공자님의 뜻만 있었겠습니까? 제 분수를 알아 소실에 그쳤다면 어찌 화산 어르신께서 주살의 뜻을 비치셨겠느냔 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죽임을 당할 큰일인가 싶어서. 그 아이도 좋아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아닐 텐데. 무릇 사내란 계집이 고우면 무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다. 애초에 화산 할머님이 그 아일 내게 주었다면 지금 료의 자리에 있는 것은 나였을 수도 있어.”
“공자님은 동생분과는 다르시지요.”
“무엇이 말이냐?”
“공자님이야말로 진정으로 늠름한 짐새가 아니십니까? 완전무결하도록 고결하신 분께서 설사 인간의 아이에게 정이 깊었다 한들 그 한계를 몰라 화를 자초하셨겠나이까?”
결국 외관의 차이인가. 휘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그는 제 아름다움을 당연히 여기고 있으나 어린 난조의 말에는 슬쩍 반감이 일었다. 하물며 침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본디 료에게 마음을 두어 훼방꾼이 될 침아를 강물에 내던지기까지 했다는 당사자가 이제는 이토록 천연덕스럽게 휘를 두둔하고 나오는 것이 사뭇 우스웠다.
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마음이 옮겨가는 것은 휘도 마찬가지였으나, 이제 다른 이가 그러는 것을 면전에서 보자니 그 마음 참으로 가볍고도 간사하구나 싶다. 제 허물은 보지 못하고 다른 이의 허물만 속되다 여기고 있는 셈이다.
계집이 고우면 사내는 무엇이라도 해준다 하였던가. 바로 그가 지금 그랬다. 고운 계집이라 여기는 침아를 위해 능란하리만치 태연히 가선을 농락하고 있다. 고이 아끼던 것도 한 번 흠을 인지하면 철저히 정이 식고 마는 그의 버릇은 계집을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 내게 이리 간살을 떨고 있으나 나보다 더 수려하다 싶은 자가 나타나 추파를 던지면 그땐 또 그자를 추앙하여 나를 태연히 멸시할 계집이다.’
돈독하다 들었던 피붙이 간의 정에도 불구하고 제 언니의 혼담 상대인 휘에게 망설임 없이 안겨온 것도 맹랑하기 짝이 없다.
그가 그리 싸늘한 생각을 품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가선은 휘의 가슴을 쓰다듬다가 머뭇머뭇 운을 떼었다.
“저어, 계속 이리 머물렀다만 가실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저희들 일을 분명히 매듭을 지어야 할 터인데. 언니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차마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안타까우니…….”
“음. 어차피 내일부터 한 며칠 병을 핑계로 누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의 가벼운 말에 가선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휘는 그녀의 매끄러운 뺨을 무심히 매만지며 말했다.
“오늘 밤 크게 놀라 실신할 것인데, 당연히 한 며칠 앓아누워야겠지. 아니 그러하냐?”
“그거야 물론…….”
“동생에게 우환이 생겼는데 형이란 자가 물정 모르고 이제 혼사를 치르겠다는 소리를 꺼내는 것도 말이 아니고. 게다가 상대가 첫째도 아니고 둘째 아씨니까. 그러니 뒷일은 차차 생각하자꾸나. 알겠지?”
가선은 떨떠름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휘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춰주고 빙긋 웃어주자 가선이 다시금 천진하게 물어왔다.
“아파 누워 있는 동안 매일 찾아와 주실 거지요?”
휘는 웃으며 가선을 보료 위로 눕히고는 옷고름을 풀면서 희롱하였다.
“그리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운우지락을 즐겨볼까?”
부끄러운 듯 미소하며 가선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뻔한 행동에도 마음이 일지 않았고, 이제는 구석구석 다 알아버린 나신을 대하여도 역시 마음이 일지 않았다. 고작 한 달하고도 보름 사이 십여 차례 찾아와 몸을 섞은 것만으로 흥미가 뚝 떨어져버린 여체라니, 한심하구나 하면서 휘는 제 손으로 욕망을 일깨워 방사를 치렀다.
이윽고 누워서 그를 전송하는 가선을 뒤로 하고 휘는 그녀의 처소를 나왔다. 복도 구석에서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망을 지키고 있던 정이 한쪽 무릎을 세워 일어나면서 인사를 해왔다. 거의 보는 척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친 휘는 쪽마루로 향하여 가볍게 몸을 솟구쳐 이내 정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깊은 밤이면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가 해가 환히 날 때에 이슬 마르듯이 사라지는 남자가 가버린 하늘을 정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아. 정아!”
이내 귓가에 그의 주인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아씨. 갑니다.”
가선의 방문을 연 그는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서 잠자코 방의 창문부터 열었다. 기분을 돋워준다는 뜻으로 얼마 전부터 가선이 태우게 한 향냄새가 쿡쿡 머리를 자극하였다. 그 향냄새에 가려져 있는 방사의 흔적을 정은 나무인 듯, 돌인 듯 모른 체하며 이부자리 위에 아찔하도록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가선에게 갈아입을 옷을 건넸다.
“몸이 나른해서 걸어갈 힘이 없을 것 같아. 욕간까지는 네가 업어줘.”
바스락거리는 옷 스치는 소리에도 정은 눈을 내리깐 채 속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으며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바깥 날씨는 좋으니?”
“화창하여 구름 한 점 없습니다.”
“음. 밤에는 구름이 좀 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가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가 머리를 좀 빗겨달라고 주문했다. 면경을 가져다 그녀 앞에 놓고 뒤에 앉아 머리를 빗겨주면서 정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아씨, 오늘 밤 일은 아무래도…….’
“참, 나 달거리 할 때가 다가오지?”
그녀의 물음에 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선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이번엔 아마 달거리가 없을 것 같아.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야. 그러면 휘 공자님께서도 혼사를 서두르지 않으실 수 없겠지. 언니가 얼마나 놀랄까? 설마 울지는 않겠지? 그보다 어머니께서 야단치실까? 나 아버지는 안 무서운데 어머니가 크게 화내실 것 같아서 무서워.”
가선의 재잘거림은 즐거움으로 화사하기까지 했다.
‘그만두시는 게 좋습니다. 아씨, 오늘 밤 일은 아무래도……덫인 것 같습니다. 휘 공자님을 믿지 마세요. 거기다 그 인간의 아이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정은 몇 번이나 내뱉으려 한다. 그때 가선이 정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곧 있으면 내가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될 거야. 그럼 네게 저 못생긴 가재 자리를 줄게. 청작인지 뭔지 하는 그 영감, 그 인간 계집에게 작은 마님이라는 소릴 했다니까, 글쎄!”
“……감사합니다.”
의미 없는 감사의 말을 토하는 그의 시야 끝에 가선이 아무렇게나 벗어서 옆으로 밀어둔 속옷가지가 있었다. 정은 제 말을 영영 삼켜버렸다.
그것이 이틀 전 일이다. 필경 주인에게 해가 될 결정임을 알면서도 만류의 말조차 내뱉지 않은 것. 당장 내일 후회할 것임을 알면서도 차라리 후회하자 해버린 것. 그것은 유난히도 차갑기만 한 복도에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하며 제 안에 침잠했던 사내의 아주 미약한 복수였는지도 모른다.
묵인의 죄는 우선은 달지만, 쓴맛이 남는다. 아까 놓아준 반딧불이의 모습이 좀처럼 정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 아이는 어찌 된 것일까.’
일전에 은호강에서 그런 일을 벌이고도 악몽조차 꾸지 않고 잘 잤던 가선이 이제 흉몽을 꾸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번에 가선이 흉몽을 꾼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그 피 묻은 꽃신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거슬리는 못생긴 벌레를 땅에 묻어버리면 그걸로 아예 없어지는 줄 아는 어린아이 같은 분이다. 침아를 물에 던져버렸을 때도 그런 발상의 연장선이었다. 보기 싫은 걸 눈에서 치웠다는 것으로 그저 좋았던 것이다.
이번에 가선은 그 뒤의 일을 보았다. 피 묻은 꽃신. 버려진 머리꽂이. 찢겨진 버선, 치마의 조각. 그리고 몸의 일부분으로 사료되는―휘는 그것을 살핀 뒤 인간의 다리로 보인다고 말했다―것을 칭칭 동여맨 천 사이로 배어나오던 검붉은 피.
무언가를 해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처음으로 제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놀라 실신하는 척만 하려 했던 가선이 그런 것들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정말로 두려움에 질려서.
돌아오면서 의식을 잃고 있던 내내 헛소리를 내뱉는 것을 정은 혀를 깨물까 걱정이라는 이유로 재갈을 입에 물려 남이 듣지 못하게끔 했다. 다행히 저택에 돌아와 깨어난 가선은 여느 때의 침착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제 흉몽을 꾸었다. 가선이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인지 혹은 정말로 잘못된 그 아이가 꿈에 나타나는 것인지 정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월인산에서 벌어진 그 흉사는 정이 생각해 두었던 것과 발상 자체가 아주 흡사하다. 가선이 정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휘에게 전해 벌인 일이 아닐까 정은 짐작하고 있다. 다만 가선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침아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 머리꽂이란 미끼에 낚여 거꾸로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을 때, 이미 정은 그러한 흉계도 털어놓았었다.
‘네 주인을 어찌할지는 생각해 보는 중이야.’
정을 매달았던 밧줄을 끊어내고 싸늘히 내려다보던 침아의 시선을, 그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주인의 벌을 나눠 받고 싶으냐?’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이 눈으로 그러하다 대답했던 정에게 침아는 미소를 던졌다.
‘네 몫도 생각해 주지. 고대하도록 해.’
예사 인간이 아니다. 아예, 인간 따위가 아닐지도 몰라. 돌아서서 멀어져가는 침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단순히 급습을 받아 거꾸로 매달려 겁박을 당한 공포심에 그리 생각한 것이 아니다. 오묘한 빛깔로 반짝이던 눈. 그 안의 헤아릴 수 없었던 깊이. 분명히 그녀의 안에는 십육 년 같은 짧은 시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자가 호환(虎患) 따위로 목숨을 잃는다는 게 가능할까? 그리 호락호락하게, 얌전히 덫에 잡혔을까?
“아씨, 가선 아씨, 아직 아니 주무십니까?”
“무슨 일이오?”
문득 방문 밖에서 가선을 찾는 기척이 있어 정이 대신 대답했다. 가진을 모시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진 아씨께서 막 깨셔서 가선 아씨를 찾고 계십니다.”
“언니가?”
조용해져서 얼핏 잠이 든 줄 알았던 가선이 퍼뜩 눈을 떴다. 몸도 가누지 못할 지경으로 떨던 것도 이젠 괜찮아졌는지 그녀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이 겉옷을 찾아 걸쳐주었다.
“아아, 다행이다. 아무렴, 깰 줄 알았어. 언니에게 나쁜 일이 생길 리 없잖아. 그치, 정아?”
눈물까지 훔치며 기뻐하였다. 이럴 때의 가선은 솔직하고 선하다. 한 번 욕심을 낸 일 앞에서는 앞뒤를 재지 않고 잔혹해지기까지 하는 그 맹목 너머에는 제 주위의 자들을 아끼고 배려할 줄 아는 선량함이란 것도 존재했다. 정이 차마 그녀를 놓지 못하는 이유였다.
늘 높은 곳을 좋아하는 가진이 고른 대로 누마루 가까이 있는 방으로 급하게 걸음을 하였을 때 가진은 시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언니!”
기쁘게 부르며 달려들듯이 다가가는 동생을 보는 가진의 얼굴이 유난히도 해쓱하였다. 가선이 언니의 손을 잡으려 제 손을 뻗었을 때 가진이 슬쩍 손을 이불 밑으로 감추는 것을 정은 보았다.
“다들 나가 있어.”
항상 명랑하기만 한 가진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다른 이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가선이 어리둥절하여 가진의 얼굴을 보려 하며 물었다.
“언니, 왜 그래요? 아직 몸이 안 좋아요?”
가선이 가진의 이마에 손을 대려 했을 때 가진은 더욱 분명하게 얼굴을 돌렸다. 피했다. 가진은 가선의 눈을 외면한 채 방 안에 있던 이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물러가 있어. 제 방으로들 돌아가. 부를 일이 있으면 내가 찾겠다.”
가선처럼 다른 이들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으나, 눈짓으로만 수런거리며 그들은 이내 방을 떠났다. 정도 그들과 함께 일어서려 했는데 가진이 너는 남아 있으라고 말했다.
잠잘 때 말고는 한시도 혼자일 때가 없는, 그래서 고요함과는 내내 인연이 없던 가진 주변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진은 등잔의 심지가 타 내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도 묵묵히 방 안의 한 점만 응시했다. 그 이상한 침묵은 가진의 심각한 모습을 이해 못한 가선의 질문으로 깨졌다.
“언니, 혹시 나쁜 꿈이라도 꾸신 거예요?”
“너…….”
가진이 동생을 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또 얼마간 침묵했다.
“네, 언니. 말씀하세요.”
“너 왜 그랬니?”
“예? 무얼 왜 그래요?”
천진한 가선의 반문과 달리 뒤쪽에 앉아 있던 정은 쭈뼛 목덜미에 한기가 들었다. 그때, 가진이 눈을 떴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말이었구나.
“그 아이한테 왜 그랬어?”
“언니, 무슨 말씀을……. 혹시 시녀 애들이 떠드는 소리에 나쁜 꿈이라도―.”
흔들리는 눈빛을 그런 말로 덮으려던 가선의 팔목을 가진이 움켜잡았다.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는 가진의 눈매가 전에 없는 싸늘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언니가 동생을 향해 물었다.
“살려달라고, 네게 매달리는 그 애한테, 너, 왜 그랬니?”
가진이, 보았다. 보고야 만 것이다.
중오절 밤. 느닷없는 두 마리의 범이 뒤쪽의 일행을 덮쳐왔을 때, 놀라 기겁하여 도망치는 새들 사이에서 정은 수레를 향해 뛰었었다. 대취하여 거의 의식이 없던 가진을 부축하여 내리던 가선이 정에게 가진을 업으라고 시켰다. 그리고 떠나려 한 순간 침아가 가선을 향해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필사적으로 붙잡는 그 손을 가선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뿌리치고 떨궈냈다.
‘놓아라, 더러운 것!’
날아오르면서 가선은 끝내 모진 소리를 한마디 더 하였다.
‘예서 필경 네가 죽고야 말 것이다.’
그런 계획이었구나. 정은 가선이 휘에게 자신이 그 아이를 단단히 붙잡아둘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말의 저의를 그 순간 명확히 이해했다. 애초에 수레를 두 채만 준비하여 침아를 한 수레에 들인 일도, 가진을 부러 취하게 한 일도 이 순간을 위한 계획이었다.
땅을 뒤로 하며 날아오르던 정은 수레 밖으로 비척비척 걸어 나오던 침아의 망연한 눈빛을 보았다. 순간 돌아가려 몸을 돌리는 정을 향해 가선은 아니 오고 무엇을 하느냐 다그쳤다.
‘하오나, 아씨, 저 아이 저리 두면…….’
‘모른 척해. 짐새 일족의 일이야! 네까짓 게 감히 훼방을 놓을 참이야?’
그리 쏘아붙이고 더 멀리 날아가던 가선의 날갯짓에서 후련한 기색을 읽었다. 망설였으나 결국 정은 가선을 택했다. 쏟아지는 환멸감을 떨치듯 정은 가선을 따라 날았다.
이제 가선의 뒷모습에서 그날 밤 혼란 속에 본 후련한 기색은 찾을 수 없다.
생전 처음 보는 언니의 냉엄한 얼굴을 대하여 떨리고 있는 주인의 작은 어깨에서 또 한 번 달아나고자 정은 눈을 감았다.
“제가 전 주인의 아래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월인산 일대를 넘어가야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감히 홀로 산을 넘지 않는다 합니다. 몇 날 며칠이고 기다리다 마침내 그 수가 열은 되어야 오를 엄두를 내지요. 그것도 동틀 무렵부터 올라 참을 먹을 틈조차 두지 않고 부지런히 산행을 하여 저물 무렵엔 기필코 산을 벗어나려 한대요. 왜인지 아십니까?”
“왜인데?”
“거기엔 호랑이가 있거든요. 사람 고기에 맛을 들인 호랑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관아에선 잡는 이들에게 많은 포상금을 준다고 했지만 잡으러 들어갔던 난다 긴다 하는 사냥꾼들이 하나같이 돌아오지 않으니 이제 와선 감히 나서는 자조차 없다 합니다. 벌써 기십 년 된 이야기라고 했어요.”
“기십 년이라……. 반은 영물이 되어가는 녀석들일까?”
“모르지요. 어쨌든 그 호랑이들이 있어 전 주인은 말 안 듣는 애들더러 곧잘 호랑이 밥으로 줘버린다고 겁을 주곤 했어요. 실제로 준 적은 없지만 늘 통했지요.”
그런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다. 침아가 샘에서 물을 뜨는 사이 휘와 주고받은 이야기였다.
며칠 후 오후에 화산 노파의 객청에 난씨 자매와 휘가 모여 담소를 나누던 때에 중오절에 답청 갈 만한 곳을 말해 보라던 화산 노파에게 휘는 여러 평범한 곳을 내밀었고 가선이 월인산 이야기를 꺼냈다. 화산 노파는 월인산이라면 료가 질색을 할 것이라며 제쳐두려 했지만 휘가 가선을 두둔하여 오히려 그럴수록 월인산에 가야겠다며 웃었다. 나쁜 기억이 있었던 곳을 이제 좋은 기억으로 덮으면 료의 편벽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더는 일이 되지 않겠느냐며. 화산 노파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비황대가 무난히도 목적지가 된 것을 보면.
호랑이에 대해 미리 화산 노파가 알았다 해도 그리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 산에 인간의 살을 즐기는 호랑이가 있다 한들 어찌 감히 그 우둔한 네발짐승이 영물인 짐새의 그림자길을 덮치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누군가 틈을 만들어 그 우둔한 것들을 유인하지 않았음에야.
틈…….
거기엔 틈이 있었다. 그리고 틈을 넘어온 두 흉물은 마침내 제 깜냥으로 가능했던 사냥감을 물고 갔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 일행 중에서 ‘유일한 사냥감’이었다. 화산 노파는 일의 배후에 사악한 의도가 있었음을 통감했다.
“내 일찍이 그것을 의심하긴 하였으나……어찌 그런 짓을 했을까 하였다. 아무런 문제없이 곱게 자랐을 것이 어찌하여……어찌하여. 아아, 이제 다만 바라는 것은 료가 모르고 넘어가는 것일 뿐이구나.”
충격으로 자리에 누웠던 화산 노파는 곁을 물리친 채 휘에게 그런 한탄을 했다. 누구라고 콕 짚어 지목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은연중에 뜻하는 자가 가선임을 깨닫고 휘는 속으로 조심스레 마음을 갈무리했다.
“크게 놀라시어 공연한 의심을 하시는 것이 아닐지요. 알고 보니 그 범들은 이미 오십 년도 넘게 월인산이며 성인산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합니다. 그간 해한 인간들의 수도 헤아릴 수 없다지요. 그러는 와중에 악한 기운이 쌓여 귀물이 되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같이 있던 자들을 의심하시다니 할머님답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에둘러 감싸보는 휘에게 화산 노파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잘못된 그 아이도 언젠가 내게 료를 가진과 짝 지우라 말한 적이 있다. 묘하게 필사적이라 그리도 가진이 마음에 들었나 하고 웃고 넘겼지만 그게 아니라 둘째가 꺼림칙했던 게야. 물에 빠진 기억을 잃었다 한 것도 어쩌면 그 아이가 몸을 사렸던 게 아닐까 싶어. 료의 성정을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고하면 큰일이 되겠구나 싶었던 게지. 그 아이, 그토록 어린데 이따금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물소리가 나곤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라도 속에 감춘 듯이.”
그러다 고개를 든 화산 노파가 휘에게 물었다.
“그 동굴에서 본 것이 정말로…….”
그녀의 눈에 깃든 의혹을 헤아리며 휘는 부러 덤덤히 말했다.
“아니었다면 료가 저리 있겠습니까?”
“……그래.”
말끝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진한 점에 꺼림칙해하는 것을 휘는 예민하게 감지했다. 가져온 탕제를 들어 화산 노파에게 직접 건네며 휘가 부드럽게 말했다.
“할머님, 적이 놀라시어 아직 기운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이 탕제를 드시고 푹 주무십시오. 제 말대로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쉬셔야 합니다.”
“하지만 나보다 료가…….”
“료는 어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할머니께서 기운이 온전해지셔야 료도 돌보지요. 어서요, 할머님.”
휘의 설득에 화산 노파는 탕제를 겨우 들이켰다. 잠시 앉아 있다 졸음을 느꼈는지 몸을 눕히는 그녀를 휘가 도왔다.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가 물었다.
“……료는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
“아까 들여다보고 제가 몽혼향을 충분히 태우게 했습니다. 지금쯤은 설사 료가 주작이라 해도 자고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잘했다.”
눈을 감는 화산 노파를 지켜본 후 휘는 휘장을 쳐주고 방을 나서려 했다. 문에 손을 대던 그에게 이미 잠든 줄 알았던 화산 노파가 말해 왔다.
“휘야. 섬이를 생각해라. 료는, 섬이의 일점혈육이다.”
말없이 휘는 나가려 했다. 그의 머리 뒤로 가느다란 중얼거림이 따라왔다.
“료 안에는 섬이가 살아 있어. 눈을 뜨려무나, 휘야…….”
문을 닫는 휘의 손이 살며시 떨렸다.
화산 노파를 자못 어리석다 내심 폄하하였던 것을 그는 부정치 않는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 이번 일로 나마저 의심하시는 것인지?
아니다. 설마. 휘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떼었다.
화산 노파의 탕제에 별다른 수작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료의 방에 피워두게 한 몽혼향을 이미 화산 노파의 침실에 있는 수반에 풀어둔 지도 꽤 되었다. 주작이라 하여도 잠들 것이라 하였던 것은 화산 노파의 경우를 말함이었다.
몽혼향을 쓰면 어떠하냐는 발상은 가선의 머리에서 나왔다. 아주 적은 양의 가루를 물에 풀어 머리맡에 놓는 것만으로도 물이 마르면서 밤새 취한 듯이 잘 수 있는 향이다. 태우면 효과는 더더욱 빠르다. 다만 물에 풀 때와 달리 매캐한 냄새가 남아 오래간다.
제 어미가 잠을 잘 이루지 못할 때 곧잘 쓰곤 해서 그녀도 퍽 익숙하다 한 몽혼향에 대해 들을 때, 휘의 생각은 지난번 화재로 향했다. 화재가 있던 밤에, 비록 서쪽 채가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저택 안의 자들이 그토록 오래 몰랐던 것에는 역시…….
―절 강물에 밀어 넣었던 것으로 부족해 그 아씨는 다만 제가 휘 도련님께 제비꽃 반지를 드린 일이 고까워, 저를 한 줌 연기로 만들 생각까지 품으셨지요. 저는 그날 밤 화산 어르신이 보내신 별식이라면서 누군가에게 음식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먹고는 세상모르고 자다가 놀란 넋이 될 뻔했어요. 두려운 분입니다, 두려운 분이에요. 휘 도련님께서 제게 주신 그 제비꽃 다발을 어찌 제 뜻으로 그분께 드렸겠습니까?
처음 침아가 그에게 가선의 일을 털어놓았을 때는 의혹이 더 컸다. 아무리 계집이 독하기로서니 단순한 미물도 아니고 서로 얼굴을 대하며 말을 나눠온 상대를 고작 질투를 이유로 죽이고자 한단 말인가? 하물며 그간 보아온 가선의 행동은 제 언니에 비해 제법 현숙해 보이기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그가 의심하는 것까지 꿰뚫어 본 침아가 말했었다.
―일을 꾸미실 때, 그 아씨께 도움을 청해 보시지요. 말리실 것 같습니까? 아니오, 처음엔 놀라실지 몰라도 설마 저를 동정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이미 제 여자가 되었으니 일단 말이야 못해볼 것 없다는 기분으로 휘는 가선에게 말을 꺼냈었다. 휘가 꾸미는 일을 마치 화산 노파가 배후에서 사주했다는 듯이. 가선은 물론 놀랐다. 그 인자해 보이는 화산 어르신이 료 몰래 침아를 내칠 뜻을 비쳤다고 말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너무도 빨리 가선은 수긍했다. 인간이 짐새 일족의 정실 자리에 오르는 것은 두고두고 흉이 될 일이니 화산 어르신이 진정 료를 아낀다면 그리할 수밖에 없을 거라 두둔하기까지 하였다.
솔직히 휘는 침아가 이리저리하라 일러 주었을 때 아녀자의 머리에서나 나올 어설픈 계책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한들, 해치기까지 해야 하느냐 물어올 줄 알았건만 가선은 그것조차 묻지 않았다.
“월인산 일대에 인육에 맛을 들인 호랑이가 둘 산다는구나.”
그가 그런 언질을 주었을 때에도 가선이 궁금해 한 것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저희 시종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겠지요? 누가 다치면 안 되는데.”
자기편이라 여기는 이에게는 자비롭기까지 할 수 있으나 그 밖의 자에겐 뜻밖으로 가혹해질 수 있는 여자였다. 세상에는 더러 그런 자들이 있다. 그런 여자의 울타리 안쪽에 있어 다행이다 싶었을 리 없다. 정이 뚝 떨어졌다. 지혜로워 보였으나 얄팍한 겉모습뿐이었다. 상냥해 보였으나 모진 짓을 앞두고도 근심하는 기색조차 없다.
아름다운 데다가 착하고 현명하기까지 한 여자는 드물고도 드물다. 그래서 새삼 휘는 섬이가 그리워졌다.
섬(蟾). 계집에게 너무 좋은 이름을 주어선 안 된다는 이유로 아비 휼은 딸에게 두꺼비란 뜻의 ‘섬’을 지어 주었다. 아비의 뜻은 반대로 들어맞았는지 섬이는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고운 계집아이로 자랐다.
예쁜 누이. 착한 누이. 총명한 누이. 비록 낳아준 어머니는 달랐으나 휘는 하나뿐인 제 누이를 몹시도 아꼈다. 그 아이는 또 얼마나 오라비를 따랐던가.
삼십 년도 못 살고 그리 허망하게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혼인도 안 한 것이 출산 도중에 죽었다. 명나라에 가 있다가 천만뜻밖의 소식을 듣고 돌아온 휘가 한 달여간 망연해 있다 괴로움을 떨치고자 또 훌쩍 떠난 사이 집에 있던 아비 휼에게 한 사내가 찾아왔었다 한다.
무섭도록 아름다웠다는 그 사내는 섬이와 제 아이를 찾았다. 둘 다 죽었다고 청작이 말하였을 때 ‘그런가…….’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조마경(照魔鏡)으로 들여다본 사내는 검은 교룡(蛟龍)이었다. 두 개의 뿔을 가진 그 사내의 위용에 두려움을 느껴 저택에선 누구도 그 사내를 쫓지 않았다.
감히 주작이 되기를 꿈꾸며 정진을 하면서도 홍진의 미련을 떨치지 못해 걸핏하면 세상을 밟고 나서는 제 한심한 아비의 무능함에 휘가 그때처럼 치를 떤 적도 없을 것이다. 또한 섬에게 연모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화산 노파도 원망했다. 그 어린것의 순진한 말만 믿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내인지 알아낸 후에 무슨 방법을 써서든 관계를 끊어놓았어야 했다.
어여뻤던 누이는 부정하게도 이무기와 야합을 하여 새끼를 낳았다. 그 상대가 설사 인간이었다고 해도 웃음거리가 되기 족했을 것인데 이무기였다니,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은 섬이가 뭇 존재들의 입에 웃음거리로 오르내리게 둘 수 없어 그 사실을 최대한 덮어서 이제 사실을 아는 자는 이 저택 내에도 거의 없다.
하물며 료조차 모르는 일이다. 료는 다만 제가 아비로 알고 있는 휼이 밖에서 만나 정을 주었던 여자에게 이무기의 피가 흘러 그 형질이 새삼 발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정작 어미인 섬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누이라고만 안다.
섬이는 어린 시절 병으로 죽은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아마도 세상에 료가 없었다면 언젠가는 아예 그것을 사실로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료는 살아남았고 이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제 모습을 드러내어 날기까지 하면서 과거를 끄집어낸다.
아아, 그 어여쁜 애가 그런 괴물을 낳았다니. 하물며 섬이가 그 애 안에 살아 있다고? 휘는 고소를 머금었다.
부러 발길을 돌려 이미 보고 온 료를 다시 보러 갔다. 동쪽 채에 들어 방까지 이르는 동안 누군가 내다보는 기척조차 없었다.
방문을 열기 전부터 휘는 소맷자락을 들어 얼굴, 특히 코를 감쌌다. 안으로 들어서니 우송이 몽혼향에 반쯤 취하여서도 자지 않으려고 제 다리를 날붙이로 쿡쿡 찌르며 버티고 있었다.
“큰도련님……. 오셨습니까?”
아까 왔다 간 것도 잊은 듯 멍한 우송의 인사에 슬쩍 고개만 까딱여주고선 료를 보았다. 료를 잠재우기 위해 저택 안의 전부를 잠재우고도 남을 몽혼향을 가득 태운 방에서는 그 매캐한 냄새로도 가릴 수 없는 지독한 악취가 났다. 제 손으로 난도질한 범의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있는 료의 깃털이 없는 시커먼 형체가 휘에겐 더더욱 흉측하게만 보였다.
밤새 산을 뒤지다 동틀 무렵 수컷 호랑이의 짝이었던 암컷이 사는 동굴을 발견해 휘와 다른 시종 몇이 들어갔을 때, 이미 김이 오르는 피웅덩이 속에 료가 앉아 있었다. 짐승의 뼈를 비롯한 그간 범들이 해친 인골의 탑이 쌓여 있던 동굴의 한쪽 끝에서 료가 온전히 발견한 것은 아직도 끝에는 꽃이 수놓인 댕기를 물고 있는 머리채 약간이었다. 동굴 안에 굴러다니던 본디 무엇이었을지 모를 고깃덩어리들을 비롯해 범을 찢어 아직 소화되지 않은 대량의 먹이를 확인했으나 거기에서 료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야, 여기에 없어. 그 아이는 여기에 없어.”
동굴 속에 울리는 료의 목소리는 반은 미친 듯하였다. 료를 데리고 나가려고 시종들 몇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료가 시뻘건 눈을 부릅뜨며 아직도 피를 뚝뚝 흘리는 부리를 벌려 울부짖었다. 시종들은 기겁을 하여 달아나다가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쳐 크게 다치기까지 했다.
귀기가 돌았다. 순간이나마 휘조차 피안개가 넘실거리는 그 눈을 보고 위압당하여 꼼짝할 수 없었다. 성장한 료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위화감도 엄청났다. 영물까지는 아니었다고 하나 반백 년 넘게 산 호랑이를 형체조차 짐작할 수 없게 갈가리 찢어 놓는 것은 설사 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동굴에서 료를 보면서, 료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란 것을 휘는 직감했다. 피웅덩이에서 오르고 있는 줄 알았던 김도 보는 사이에 료의 몸에서 비롯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를 다쳤는지 찾아볼 엄두조차 안 나는 몸이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쉴 때마다 료의 주위로 아지랑이가 일었다. 그 붉은 기운이 대체 무엇인지는 휘의 식견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이제껏 그 비슷한 것조차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과연 료와 본격적으로 붙는다면 승자가 자신이 될 것인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료를 동굴에서 데리고 나가는 일이 수월치 않아질 것을 깨달은 휘는 이미 저만치 달아나 있던 시종들에게 화산 노파를 불러오게 시켰었다.
화산 노파는 놀랍도록 침착하게 대처했다. 료에게 다가가자 그녀도 못 알아보는 듯 료는 날카로운 발톱을 땅에 갈면서 날개를 퍼덕여 위협하고 나섰으나 화산 노파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다가가더니 동굴을 한 번 돌아보고 말했다.
“여기에 그 아이가 없구나. 그런데 예서 뭘 하고 있느냐? 나가서 찾아봐야지.”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서서 동굴을 나갔다. 가다가 돌아보면서 손짓했다.
“어서. 침아를 아니 데려갈 참이냐? 료야, 가자꾸나. 침아가 기다리겠어.”
휘는 그런 눈속임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휘가 뻔히 보는 앞에서 료는 화산 노파를 따라 동굴을 나섰다. 부리에, 댕기를 드리운 까만 머리채를 물고서.
화산 노파가 료를 유인하고 휘가 그 뒤를 따라가다가 마침내 주술을 써서 료의 몸을 결박했다. 쉽지 않았다. 속았다는 것을 안 순간 료는 발광에 가깝게 버둥거렸고 휘가 자신했던 주술도 하마터면 깨어질 뻔했다. 화산 노파가 힘을 보태어 료를 한층 작게 만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깨어졌을 것이다. 작게 만든 료의 머리에 산을 뒤지다 발견한 침아의 옷을 덮어주자 거짓말처럼 료는 움직임을 그쳤다. 그것을 화산 노파가 품에 안고서 다시 저택까지 데려왔다.
돌아온 뒤 제 방에 데려다 놓은 후로 료는 침아의 옷가지 속에 몸을 묻고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있다. 누군가 다가가려 하면 그것이 설사 우송이나 화산 노파라고 해도 살기를 드러낸다.
다만 그러다 자해를 할까 두려워 우송은 료가 허용하는 가장 가까운 거리인 방문 앞에 앉아 주인을 지키고 있다. 이제 몽혼향을 써서 어쨌든 료가 잠이 들었으니 저도 좀 자두는 것이 좋을 텐데 한사코 버티고 있는 것이다.
축 늘어진 료의 머리 아래로 꽃신의 한쪽 끝이 삐죽이 보였다. 혹 그것마저 누가 가져갈까 봐 제 몸으로 깔고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만하면 측은하다 할까?’
하지만 코를 누르고 있는 휘의 표정은 여전히 신랄했다.
‘너는 고작 몇 년 가까이 두었던 계집의 일로 이리 추태를 부리고 있지. 나는 삼십 년 가까이 보아왔던 누이를 잃었다. 네놈 때문에. 괴로우냐? 아직도 멀었다. 더, 더 괴로워해라, 못난 것. 어차피 좀 괴로워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
소리만 내지 않을 뿐, 마음으로 쏟아내는 저주였다.
휘는 휙 몸을 돌려 더는 맨 정신으로 있기 힘든 역한 냄새가 나는 곳을 벗어났다. 우송은 그가 나가는 것도 몰랐다.
냄새가 옷에 배어 북쪽 채에 들러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시중을 받고 있는데 가선이 보내서 왔다는 시종 하나가 그에게 잠깐 들러주셨으면 한다는 가선의 말을 전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가보겠다고 말해 시종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옷을 다 입고 밖으로 나온 그는 남서쪽 채로는 향하지 않았다. 부러 제대로 성장(盛裝)을 하였기에 나는 대신 말에 올라 휘는 저택을 벗어났다.
한 시진쯤 동북쪽으로 말을 달렸다. 운몽산에서 월인산까지 인간들이 도보로 걸어간다고 할 때 택할 만한 길. 딱 중간 정도 왔다 싶은 곳에 산이라고는 부르기 힘든 야트막한 언덕 하나가 있고 온통 녹나무가 우거진 수풀 속에 사람들 눈에 쉬 띄지 않는 정자가 하나 있다.
그 정자가 실은 숲에 숨겨진 작은 저택으로 가는 비밀 문 역할을 한다. 아마도 전란이 일어나면 몸을 숨길 용도로 인간들 중 누군가가 공들여 만든 것일 텐데 버려진 채로 이미 몇 백 년이 흘러 어렵지 않게 휘와 같은 다른 세계의 주민의 것이 되었다.
정자의 문을 지나 제법 넓은 땅굴을 통과해 그가 찾던 저택에 이르렀다. 빽빽한 수풀 사이로 보이는 저택의 붉은 문 앞에 등이 걸려 있었다. 휘가 헛기침을 하자 얼마 안 되어 안에서 두견새 하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도련님, 오늘도 아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일 년의 태반을 외유로 보내는 휘가 밖에서만 쓰는 시종 중 하나였다.
“아씨는?”
“내내 기다리시다 지루하셨던지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혹 어디 아프다거나 하진 않지?”
“말씀을 통 안 하셔서,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 모신 뒤로 물 말고는 아무것도 입에 대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래?”
말도 안 하고 먹지도 않는다? 약간은 놀라서 고개를 갸웃하고는 휘가 본채의 마루로 올라섰다. 방이라고 해봐야 다섯 칸이 고작인 작은 집이다. 그중 가장 안쪽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둠 속에 하얗게 떠 보이는 이부자리가 보였다.
엎드려 잠든 여자의 짧은 머리가 이채롭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다가앉은 휘가 머리칼을 젖히며 여자의 왼쪽 얼굴을 바라보았다. 곱다. 빙긋 웃으며 거기에 손을 대려 한 순간 여자가 말했다.
“만지면 환상이 깨지지 않습니까. 어차피 눈속임에 불과한 것인데요.”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고 휘가 나무라듯 말했다.
“일찍 잔다더니.”
“하루 종일 잤던 터라 이젠 자다 말다 합니다.”
“내 어떤지 걱정이 되어 이 시각에 말을 타고 예까지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을 셈이냐?”
그제야 여자는 두 손으로 베개를 밀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부스스하게 짧아진 머리카락 때문에 소년 같다고 말하기에는 어둠 속에 보이는 흰 얼굴과 붉은 입술이 사뭇 요염했다.
원래 고왔던 오른쪽 얼굴. 그리고 이제 그 오른쪽 얼굴을 겹쳐 찍어낸 것처럼 완벽해 보이는 왼쪽 얼굴 또한 곱다.
여자가 말했듯이 눈속임이다. 휘란 사내는 여자를 제 손에 넣었다 싶은 순간 바로 그 얼굴에 있던 흠을 덮는 것부터 해주었다. 그리하여 여자의 얼굴은 완벽해졌다. 적어도 휘의 눈에는.
“말도 안 하고, 먹지도 않았다 하더니 어쩐지 야윈 듯 보이는 걸?”
슥 손을 내밀어 여자의 턱을 건드리자 여자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품을 한다. 휘가 웃었다.
“내 앞에서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하는 여자를 보게 되다니.”
“후회되십니까?”
연이어 하품을 하면서 여자가 묻는다. 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쩐지 재미있구나. 아무래도 색다른 것에 몹시 목말라 있었던 건지.”
“색다른 것이라. 맞아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제 전 주인은 특이하게도 손이 매운 애첩을 하나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분 애첩들 중에선 미색이 가장 별로인데, 엉덩이를 그렇게나 잘 때린다나요.”
“그런 괴이한……. 그런데 네 전 주인이라고 하면 이제 료가 되어야지?”
거듭하여 머리를 매만지던 여자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만지기 시작하면서 물었다.
“그래서, 제 전 주인은 잘 지내십니까?”
“잘 지낼 턱이 있느냐?”
휘가 즐거운 듯이 말하는 것에 여자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화산 어르신은 옆에 계셔 주시는 거지요?”
“아니. 할머님은 내 생각 이상으로 놀라셨거든. 몽혼향을 써서 주무시게 하고 나왔다. 물론 네 전 주인도 몽혼향 덕에 억지로 몽향에 들었지.”
“흐응.”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고 뱀처럼 웅크리고 있으니 이번 일로 그 녀석의 본성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았다. 그리 멀지 않은 오래전에 인간의 어린 처자를 제물로 받아먹은 뱀들 이야기가 성행을 한 것도 바로 그런 녀석을 본 인간들이 한 소리겠지. 네 옷가지를 모조리 끌어다 깔아놓고 거기 파묻혀 식음도 끊고 있구나.”
“……주무시게만 해주세요. 생시인지 꿈인지, 한 며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시들해지시겠지요.”
덤덤한 외양이 생각보다 태연하였다. 하긴, 제 죽은 흉내를 내어 료 곁을 떠날 작심을 하였던 여자다. 휘에게 오기 위해서. 몇 년간 가까이 있으며 오간 정이 결국 몇 번 마주쳐 말을 섞은 휘에 대한 정보다 못했다 할 것이니 휘는 우쭐함을 느끼는 한편, 료에 대한 측은함의 자리에 아주 약간 추를 옮겼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머리를 만지던 손도 멈추고 도로 이부자리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야겠습니다. 안녕히 가셔요.”
휘는 사뭇 얼떨떨해졌다.
“벌써 가라고?”
“생시인지 꿈인지, 자다 보면 잊을 거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건 료의 경우였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휘를 택하였으나 료에 대한 마음도 아주 허술치는 않았다 호소하고 싶은 겐가? 어쨌든 이 아이답다. 그리고 휘 역시 겉으로든 속으로든 다른 생각에 더 깊이 빠진 여자를 어찌할 마음은 없다.
“과연 얼마나 자야 또 허물을 벗게 될지 모르겠구나. 그 녀석도, 너도.”
“……열흘.”
해본 소리였는데 대답이 나왔다. 아무 말도 않고 있자니 여자가 부연하였다.
“열흘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그분, 주무시게만 해주세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목소리가 유난히도 침울하게 들렸다. 혹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것인가 싶어 언짢아진 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고이 꾸미고 왔으나 과연 그에게 시선이나 얼마 주었는지 알 길이 없다.
무어라 한 마디 하려다가, 아예 관두고서 방을 나왔다. 방문을 크게 열었는데도 돌아보는 기척이 없었다. 성큼성큼 마루를 지나 마당에 내려선 휘가 제 두견 시종에게 이것저것 몇 가지 명령을 내리고선 막 문 쪽으로 가려던 차에 마루에 여자가 나왔다. 비로소 그를 보며 여자가 방긋 웃었다.
“예서 보니 더 고우십니다.”
휘가 불쾌히 여기던 것조차 잊고서 미소했다.
“봐서 사흘 내로 오겠다. 잠은 자도 좋다만 먹는 건 거르지 말고.”
돌아서던 휘가 깜박 잊은 것을 떠올리고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차분히 있을 틈이 없어 아직 네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다시 올 때는 정해 오마.”
“급할 것 없습니다. 다시 오시면, 그때 같이 의논하지요.”
역시 재미난 아이라 여기면서 휘가 문을 나섰다. 두견새가 그 뒤를 따라 땅굴로 들어갔다.
여자는 맨발로 마당에 내려서 작은 뜰 위로 보이는 손바닥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다. 녹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서로 몸을 부대끼며 소곤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스산하게도 들렸다.
말을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휘의 등 뒤 숲에서 휘파람새가 울기 시작했다. 때아닌 휘파람새인가 하며 휘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말을 몰았다. 말발굽 소리가 이내 멀어져간다.
두견새가 주인을 배웅하고 돌아와 문단속을 하는데, 스윽 뒤로 다가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아니, 아직 아니 들어가시고…….”
두견새의 말은 얼마 못 가 끊어지고 문에 기대어 스르륵 쓰러졌다. 제대로 뒤에 선 자의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
여자의 손에 쥐어진 뼈바늘 끝이 사뭇 날카로워 보이는 것은 그것을 내려다보는 여자의 눈빛 때문일 것이다. 두견새를 일으켜 문설주에 기대 앉혀 놓은 뒤 여자는 마루에 가져다 놓았던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며 말했다.
“사흘쯤 그러고 있다고 해서 죽지는 않을 게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니, 날 원망 마라.”
일어선 여자는 문을 열고 땅굴을 지났다. 휘파람새 울음이 끊어질듯 끊어질듯 거듭 이어졌다. 마침내 정자의 바닥에 이르러 문을 열고 위로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앞으로 푸드덕거리며 까만 것이 날아들었다.
“누님!”
여자가 창백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문복아.”
웃는 얼굴이 어린아이 같은 박쥐가 그녀에게 안기려고 뛰어들다가 아직 제 발에 묶고 있던 휘파람새가 놀라 울어대는 걸 보고 아차 했다. 여자가 그것을 풀어주자 휘파람새는 죽다 살아난 것처럼 부리나케 하늘로 날아올라 자취를 감추었다.
“어서 가요, 누님, 어서요.”
문복이 보채듯 말하면서 여자에게 등을 내민다. 작은 박쥐의 등에는 두툼한 꾸러미가 매달려 있다. 우선 박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여자가 말했다.
“고생했다.”
“뭘요, 전혀 무겁지 않았습니다.”
말과 달리 검은 무명으로 감싸인 보따리는 무게가 꽤 된다. 여자는 그것을 품에 안아 들었다.
“입지 않으십니까?”
“나중에.”
“걸어가시려고요?”
“그래 볼까?”
“게까지 걸어가기엔 멀지 않을까요?”
“동트기 전에 떨어질 거야.”
그리 말하면서 여자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퍽 날랜 걸음이었다. 옆에서 문복이 날다가 기다리고 날다가 기다리고 하면서 둘은 어딘가를 향해 떠났다.
여자의 말처럼 아직 온 세상이 밤의 영역에 속해 있을 때에 그들은 이미 목적한 곳에 있었다. 호숫가의 부들 주위로 단조(丹鳥)가 가득하여 딱히 불을 피우지 않았건만 이따금 호수에 생기는 작은 동심원의 무늬까지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지난 이틀간 여자를 기다리느라 잠자는 것조차 잊었던 작은 박쥐는 여자의 무릎에 기대어 달게 잠들어 있다. 여자는 문복의 접힌 날개를 가만히 쓰다듬어주는 손길 위로 두 눈 가득 반딧불이를 바라보았다.
“……열흘이면 잊겠지. 응.”
동이 터올 무렵이 되었는지 하늘 끝이 희붐해진다. 단조의 춤도 낮의 빛과 함께 사라지리라.
여자는 왼손을 펴며 가벼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가 거미가 뿜어낸 실이라도 되는 듯이 반딧불이 하나가 무리를 벗어나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 손에 내려앉은 반딧불이는 홀로 덧없이 암컷을 부를 빛을 뿜어낸다. 문복을 쓰다듬어주던 오른손을 들어 여자는 반딧불이를 제 두 손안에 가두었다. 그 손 위로 입술을 대면서 눈을 감고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영영 이별입니다, 주인님.’
먹빛 바다에 몸을 누이고 있던 료에게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도, 어쩐지 먼 목소리. 눈을 떴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려 애를 썼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없이 누군가가 그에게 걸어와 앞에 다가앉았다. 그자의 뒤로부터 부옇게 후광이 비쳐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어 료는 눈을 찌푸렸다.
‘정해진 인연의 박하기가 이 정도였으니, 크게 미련치 마소서.’
무심하고도 서늘한, 동시에 가여워하는 듯한 목소리.
‘아니다, 침아야, 그렇지 않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잊으세요. 붙잡고 계셔도 저는 떠납니다. 잊으세요, 이제 영영 이별입니다.’
‘못 간다. 혼령이 되었다면, 그 혼령이라도 내 곁에 있어라.’
그에겐 느껴지지 않는 바람이라도 불었을까, 앞에 있는 모습조차도 흔들거리며 서서히 희미해져간다. 가냘픈 목소리가 끝을 고한다.
‘그 몸, 보중하소서. 아무쪼록 오래오래…….’
‘가지 마라, 침아야, 가지 마.’
애원하였다. 허나…….
“가지 마라!”
소리쳐 부르며 허상을 잡으려 하였으나 부질없게도 현실로 끌려나왔다. 커다란 방 안에 회색 안개처럼 차 있는 몽혼향 연기 너머로 무언가 부연 꼬리를 끌면서 나는 것이 있었다.
취한 듯 이리저리 오가던 그것이 료의 근처에서 툭하고 떨어졌다. 독한 향냄새에 미물조차 맥을 추지 못했다.
파르르, 파르르 날개를 떠는 반딧불이를 알아본 료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말로……이젠 어디에도 없는 것이냐.”
붉은 눈물이 꽃신 한쪽에 떨어져 부서졌다.
손 사이로 퍼져 나오던 반딧불이의 빛이 마침내 사그라졌다. 여자가 손을 펴자 그 안에는 반딧불이의 날개 하나도 없다.
문득 툭하니 빈 손바닥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여자는 제 눈을 만지며 어리둥절해 한다. 어찌하여 우는 걸까. 어찌하여…….
고개를 흔들고는 자고 있던 문복의 머리를 조심스레 옆으로 내려두고 일어섰다. 보퉁이를 가져와 풀었다. 안에 든 걸 꺼내는 중에도 뺨을 타고 쉼 없이 이슬이 흘러내렸다.
입고 있던 의복을 모두 벗고 보퉁이에서 꺼낸 것을 손에 들고 여자는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따뜻한 여자의 무릎 대신 밤중에 이슬 내린 풀 위가 싸늘하기도 하고, 물 첨벙거리는 소리가 예민한 귀를 자극하여 문복은 언뜻 눈을 떴다. 눈이 부셨다. 이미 반쯤 돋아난 해가 호수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어디 머리를 가릴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문복은 마침내 호수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눈이 부셔 찌푸렸던 작은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뜨면서 문복은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결코 노랫소리로는 들리지 않는 박쥐의 괴성.
그 소리에 호수에서 멱을 감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내가 깨우고 말았니? 기왕 일어난 거 너도 멱이나 감을래?”
목까지 잠겼던 몸을 일으키며 서는 순간 여자의 옥 같은 등 뒤로 돋아난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좌르르 이슬을 털었다.
4년이 넘어서야 주인을 되찾은 날개는 여전히 희었다.
눈보다도 더, 배꽃보다도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