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천 년, 새는 날아가고……
들고 오는 사이에 물동이 표면에 차가운 눈물이 송송 맺히도록 시린 샘물을 항아리에 부었다. 세 번째의 물이었으니 오늘의 물 긷는 일은 끝이 났다.
침아는 빈 동이를 안은 채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동이를 쳐다보면서 괜스레 한 번 쓰다듬고서는 항아리 옆에 내려놓았다. 일어서서는 항아리의 물을 들여다보며 다시금 멍한 눈빛이 되었다. 한숨이 흘렀다.
마침내 그녀는 소반을 준비하여 정성스레 닦았고 료에게 올릴 잔에 물을 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끊어온 원추리 이파리를 꺼냈다.
삼 촌(寸) 정도 길이로 끊어온 원추리 잎을 거기서 또 반을 끊어서 침아는 입에 넣었다. 그걸 천천히 씹으며 나머지 반을 잔 위에 띄우기 전에 몇 번이나 주저했다. 하지만 결국엔 띄웠다.
“……열흘.”
옥 같은 고운 손가락으로 물을 가벼이 휘저으며 침아는 중얼거렸다.
“천 년의 연정도 이 물과 함께 마르리라.”
잔을 들여다보는 침아의 눈동자가 문득 흐려졌다. 긴 속눈썹을 타고 이슬이 배어나왔으나 그 한 방울을 훔쳐내는 손길 뒤에 그녀는 언제 그랬냐 싶게 미소를 머금었다.
소반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침아는 조심히 덮어둔 물 잔은 한쪽으로 치워놓고 이부자리 쪽을 쳐다보았다. 세상모르고 곤히 잠든 료를 바라보다가 이내 침아는 입고 있던 옷을 주섬주섬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친 것 없이 침아는 따스한 이부자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를 위해 비워진 료의 품에 안기며, 잠시 그의 차가운 체온에 가벼이 떨었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침아는 손가락으로 이마며 눈썹, 코, 인중, 입술 등을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듯 따라갔다.
“내게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고 침아는 료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료는 따스하게 품을 채워오는 그녀를 잠결에도 꼭 껴안아주었다. 후훗, 하고 침아가 웃었다. 장난스런 미소에 이어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입술을 깨물듯이 제 입술로 덮었다.
쪽쪽 소리가 나게 거듭되는 입맞춤에 깊게 잠들었던 료에게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바르르 료의 속눈썹이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도 침아는 당돌한 애무를 그치지 않았다. 료의 등을 쓸어 만지던 그녀의 손 중 하나가 그의 아랫도리로 내려갔다.
“……으응?”
잠의 언저리에서 헤매던 료가 결국 그녀의 공격에 현실로 끌려나왔다. 하지만 바로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어리둥절한 눈을 가늘게 깜박였다.
그 어리둥절함도, 이어질 그의 당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했다.
“치, 침아야,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이른 아침입니다, 주인님. 더 주무셔야 하나요? 피곤하셔요?”
침아는 생긋거리며 웃고 있지만 료는 웃을 경황이 아니다. 료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나 하고 생각하며 눈을 세차게 깜박이다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몸의 감각 때문에 슬며시 이불을 걷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안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본 그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침아를 밀어낼 뻔했다.
“아니, 침아야, 그러니까, 네가, 네가 지금……네가, 그것을, 그것을…….”
우송이라면 어떨지 모르나, 료는 차마 제 입으로 제 양물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정작 그의 양물을 손으로 만지고 있는 침아는 너무도 당당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이게 몹시 단단해졌는데요. 피곤해서 더 주무시고 싶은 게 아니시라면 절 품어주시면 좋을 텐데요.”
“어? 어……. 어, 그게, 내가 늦잠을 잤느냐?”
침아의 행동에 놀라고, 침아의 요구에 더 놀라 얼떨떨해진 료는 아무래도 상황을 믿을 수 없어 창가 쪽을 쳐다보았다.
“아니오, 아직 이른 아침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저는 막 물을 떠왔구요, 이부자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더 주무시고 싶으신 거라면, 말구요.”
그러면서 침아가 그의 양물에서 손을 거두는 것을 료는 번개처럼 빠르게 막았다. 믿기지 않는 상황이라 하였지,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라 한 것이 아니다. 침아의 작은 손이 제 양물을 감싸고 있는 상황 자체는 아찔하도록 좋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온몸에 빠르게 피를 뿜어내는지 훅하고 열기가 일어났다.
“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목소리가 잠결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탁해졌다. 그런 그를 보며 침아가 그제야 아주 약간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오후에는 답청을 나가지 않습니까.”
“……아. 그랬지.”
화산 노파가 답청을 나가자 한 날이 오늘이다. 저 난씨 자매의 일행을 비롯해 휘까지 동참하는 답청 따위 그는 빠졌으면 원이 없겠는데 순전히 화산 노파의 얼굴을 보아 함께 가겠다고 해놓았다. 그 장소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월인산 일대를 돌아본다 한다. 화조절에 야시에 갔다가 침아를 잃어버린 사건이 여전히 찝찝한 료에게 월인산과 은호강은 보고도 본 척하고 싶지 않은 장소이건만. 게다가 갈 때는 물길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니 말이다.
당장에 싫은 얼굴을 하는 료를 보고 침아가 웃으면서 그의 뺨에 쪽 입술을 대었다.
“얼굴에 ‘아이, 싫어라.’하고 써놓으셨네. 어찌 이리 순진하시담?”
“너, 너, 진짜 왜 자꾸 이러느냐?”
당황하여 료가 큰 소리를 냈더니 침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싫으셔요? 치, 자기는 늘 저 좋을 대로 내 몸을 마음대로 하면서…….”
토라진 듯한 침아의 목소리에 료는 퍼뜩 놀라 그녀의 등을 끌어당기며 달래주었다.
“싫어서 그런 것이겠느냐? 놀라서 그렇지.”
“아무리 놀라셨어도 그렇지. 저는 뭐 얼굴이 소가죽처럼 두꺼운 줄 아십니까? 무지 부끄러운 것도 참고 씩씩하게 굴고 있는데.”
“그래, 내가 잘못했다. 화내지 마라, 내 귀여운 아이야. 응?”
사뭇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료는 침아의 귓가며 볼에 입맞춤을 했다.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침아가 얼마 안 가 웃으면서 료에게 같은 방식으로 거리낌 없이 입맞춤을 해왔다.
료는 못내 즐거우면서도 역시 얼떨떨함이 다 가시지는 않았다. 그래서 뭔가 탐색하는 눈초리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수상하구나. 말해 보렴. 너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아니냐? 그래서 미리 이렇게 포석을 깔아 내가 화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지?”
“에그, 참. 말씀드렸잖아요, 주인님. 오늘은 답청을 나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오다가다 하다 보면 내일 동튼 후에나 돌아오게 생겼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침아는 답답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다가 불쑥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오늘 밤 분을 지금 해주시면 어떨까 하고.”
아직도 멀뚱히 침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료는 뒤늦게 그녀가 말하는 바를 명확히 깨닫고 온몸으로 웃었다. 다만 소리를 내지 않으며. 침아를 꼭 껴안고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그녀의 몸을 흔들면서 료가 말했다.
“좋으냐, 침아야?”
“좋긴요, 갑자기 얄미워지려고 합니다.”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보렴.”
그녀를 보료 위에 눕히고 내려다보면서 료는 젖은 눈길을 그녀에게 쏟아 부었다. 완연히 잠긴 목소리가 그녀의 대답을 채근했다.
“내가 안아주는 것이 좋은 것이야?”
“…….”
“바로 얼마 전까지……그런 건 모른다고 도망치려고만 하더니. 이제는……조금 알 것 같으냐?”
침아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래?”
료의 눈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침아는 그런 그를 위로하려는 듯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그래도 저는 주인님이 귀엽다고 생각해요.”
“뭐?”
“나쁜 뜻이 아니니까 얼굴 찡그리지 마세요. 정말로 귀여워서, 천 년쯤 함께 살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으니까요.”
못할 것 있느냐, 그리 살자꾸나.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료의 눈에 희미하게 비애가 차올랐다. 그의 뺨을 만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아아,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지금 이 모습으로 언제까지고 그대로 살게 할 수는 없을까.
그 안타까운 욕심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료를 바라보며 침아는 엷게 웃었다. 천천히 중얼거렸다.
“료. 안아줘요, 마치 오늘이…….”
료의 눈이 그녀의 눈을 향해 계속 말하라고 말했다. 침아가 그 뜻대로 했다.
“오늘이 천 년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피식, 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음 순간 침아의 얼굴을 붙잡아 입술을 겹치면서 료는 침아에게로 허물어졌다. 이미 침아의 손으로 인해 터질 듯이 흥분한 그의 중심이 침아의 여린 몸 안으로 격렬히 파고들었다. 충격의 탄성과 함께 신음하는 침아의 안으로 부러 몇 번이고 양물을 완전히 뺐다가 거칠게 다시 넣어 그녀가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새된 소리를 삼키려 침아가 손으로 제 입을 가리는 것을 보고 료는 그녀의 두 팔을 붙잡아 머리 위로 올려 한 손으로 결박하듯 눌렀다. 달싹이는 침아의 몸짓을 무시하고 료는 침아의 얼굴만 바라보면서 완급조절 따윈 아예 모르는 자처럼 거세게, 더욱 강하게 짓눌러갔다.
막 시작한 처음부터 마지막에 다다른 듯한 강도에 침아는 입술을 꼭 깨물고 끙끙대다가 결국엔 그를 보며 애원했다.
“이, 이런 식은……이런 식은 싫어요.”
“훗.”
몸을 섞는 내내 보여준 적 없는 짓궂은 미소가 또 료의 얼굴을 채웠다. 침아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올려 얼굴을 움켜쥐며 료가 말했다.
“그러니 어휘 선택을 제대로 했어야 할 것 아니냐.”
침아의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 나서 그의 자줏빛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내일 따윈 없다는 뜻이니까.”
그 말에 이어 료는 침아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꿰뚫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헉하고 신음하는 그녀에게 료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너는 내 품 안에서 죽어야지.”
감겨 있던 침아의 눈이 퍼뜩 뜨였다. 마주친 료의 눈은 웃고 있었다.
짓궂은 미소 대신, 만년설이라도 녹일 듯이 상냥한 원래의 미소와 함께 그는 꽉 누르고 있던 침아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지만 둘이 이런 일을 하다가 죽으면 뒷일이 좀 남세스럽겠구나. 하긴, 죽어서 그런 일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까?”
침아의 경직되었던 얼굴에 가까스로 미소가 돌아왔다.
“……아, 이러고서 죽기는 싫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귀신이 되면 어쩌나요.”
료는 빙그레 웃었고 침아에게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왔다.
“좀 아팠지? 이제부턴 그리 안 하마. 그러니 너도 앞으론 괜한 소리 마. 마지막이니 뭐니 괘씸한 소리를 할 때마다, 호되게 혼내줄 테다.”
과연 그 말을 지켜 료는 훨씬 상냥하게 그녀를 품었다. 그의 무게 때문에 답답할 그녀를 안아 들더니 앉은 채로 몸을 섞으며 오가는 가쁜 호흡을 쫓아가려는 듯이 입맞춤을 거듭했다.
료 딴엔 잔잔하게 일으키는 물결에도 불구하고 몸 깊은 곳에서 떠나지 않고 하염없이 고동치는 그의 존재 자체가 침아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그의 어깨를 붙잡고 내뱉는 그녀의 숨결이 점차 기진해져 갔다.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하고 침아의 허리를 잡은 손을 더 빠르게 움직이며 그녀의 입 안을 혀로 헤집고 있는데 침아가 뿌리치듯 그의 얼굴을 밀어내더니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아, 아흐으…….”
교성. 그 야릇한 소리와 함께 촉촉하게 땀이 배어 오른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완연히 흐트러진 표정. 무엇보다 그의 양물을 머금고 있는 곳이 몇 번이나 수축을 거듭했다.
며칠 전부터 잠들 무렵이 다 되어 가까스로 한 번씩 보여줄까 말까 한 그런 반응을 오늘 침아는 벌써 보여주었다. 하지만 거기에 제대로 놀랄 겨를도 없이 그의 몸 역시 그녀에게 끌려들어가듯 뜨겁게 긴장했다. 허리가 꼿꼿해지며 본능적으로 침아의 하반신을 당기던 손을 료는 의지의 힘으로 멈춰야 했다. 이 아이 안에는 안 돼.
다급히 빠져나가려 하는 그의 움직임에 침아의 몽롱했던 표정이 달라졌다. 고개를 든 그녀가 그의 양물을 다시 제 안으로 끌어들였다. 료가 괴로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침아가 마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안에서 나가지 마요.”
“침아야.”
“나가지 마요.”
료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겹치기 직전의 거리에서 침아가 속삭였다.
“료, 내게 씨를 뿌려줘요. 당신을 전부 받아들이고 싶어.”
“안 돼, 침아야. 말했지 않으냐. 그리했다가 만약…….”
“만약 같은 건 안 일어나게 하면 되잖아요. 나, 여기 오기 전에 지내던 곳에서 다른 계집애들이 하는 얘길 들었어요. 아이를 포태하지 못하게 하는 약도 있다고 들었어. 당신이 걱정하는 게 그것뿐이라면 내게 그런 약을 먹게 하면 되잖아요. 응?”
“하지만 그런 약은 네 몸에…….”
“료. 제발.”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 당신이라는 호칭.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하는 목소리. 강하다고 생각했던 의지의 힘도 그런 것들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그리고……너무도 강렬한 유혹이었다. 사내로서 제 여자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갈망을 다른 무엇과 비교할까?
몸을 안고자 욕망하는 것은 이어지고 싶다는 바램. 누구보다 가까이, 어느 누구도 범접 못 할 서로의 가장 깊은 부분을 나누며 둘이지만 하나라는 마음의 믿음을 충족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그 여자의 몸에 제 씨를 남기고 싶은 것은 수컷으로서의 순수한 본능이었다.
“아니야. 안 돼, 그래선……. 그래선 안 돼.”
그 본능을 다시금 의지로 물리치면서 료는 침아를 밀어내려 했다. 침아는 료를 휘감은 두 팔에 이어 그의 허리를 감은 다리를 단단히 옥죄어오며 온몸으로 그에게 밀착했다. 귀에 댄 그녀의 입술이 너무도 부드럽게, 뿌리칠 수 없는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료……. 나를 연모하지요?”
“연모해.”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그 아득함을 넘어 침아의 속삭임이 하늘 저 끝에서 들려왔다.
“나도 당신이 좋아요.”
“……침아야.”
“당신을 줘요. 단 한 번이라도……좋아.”
그녀의 꽃 같은 입술이 료의 입술을 머금어왔다. 부드럽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를 넣어 그의 혀를 감싸왔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진득한 감미. 그 끈적한 희롱 속에서 침아가 거듭하여 속삭였다.
“이대로……이대로 내 안에서……. 료.”
파스슥, 보료 위로 두 몸뚱이가 허물어졌다. 침아를 으스러뜨릴 듯 부둥켜안고서 료는 맹렬하게 몸을 떨었다.
“흣, 으……으읏.”
벅찬 신음을 토해 내면서 료의 시야가 새하얗게 부서져간다. 탄성을 삼키는 침아의 눈이 금빛으로 흔들렸다.
실로 뜨겁게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둘의 마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서로에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전에 없이 기진한 낯으로 숨을 고르던 료가 마침내 침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뺨을 감쌌다. 너무 소중해서 차마 힘을 줄 수도 없다는 듯이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그가 속삭였다.
“……어쩌면 좋으냐. 나는 네가 너무도 좋구나. 이 좋은 심정을 연모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 도저히 보여줄 방법을 모르겠으니 이러다 내가 미치겠다.”
침아는 온화하게 웃었다. 아름다운 눈이 말갛게 젖어 금세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눈으로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본디 달은 만월에 이를 때, 미치도록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지요.”
더할 곳이 없이 찬 달은, 기우는 일밖에 없다. 그리 말하고픈 그녀의 기분이 료에게 흘러들어왔다. 그녀의 안타까운 기분을 문득 아프도록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전부를 감싸 안은 것처럼, 그녀의 불안을 감싸는 것은 제 몫이라고 료는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 우리의 하늘엔 평생 만월이 따라다니겠구나.”
료의 밝은 미소에 침아는 쿡, 웃음 지었다. 고운 눈매 끝으로 이슬이 구슬 되어 흘러내렸다. 활짝 웃고 있는데 영롱한 구슬은 자꾸만 솟아났다.
“내 고운 주인님. 어찌할거나. 이리도 순진하셔서…….”
그 눈물을 핥아주며 료가 말했다.
“어쩌긴. 나만 이리 고생할 수 없으니, 너도 겪어봐야지. 내 언젠가, 네게서 내가 좋아서 미치겠다는 소리를 듣고 말 테다.”
맑게 가라앉았던 둘 사이의 공기가 어느덧 기운을 차린 료의 몸짓으로 아련하게 그 빛깔을 바꾸어갔다. 훨씬 더 매끄러워진 침아의 안에서 료의 비행은 더욱 능숙하고, 더욱 농염해졌다. 물 위로 내려앉는 새처럼 우아한가 싶다가도 또 금세 물방울을 흩뜨리며 힘차게 날갯짓하여 하늘로 비상하니, 침아는 자신만의 감상 따위에 빠져 있을 여유를 완전히 잃었다.
“연모한다. 내 너를 연모한다. 침아야, 내 귀여운 아이야.”
“나도……나도 당신이 좋아. 료……. 료……!”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방사의 끝에 침아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맥조차 희미해졌다. 그에 비해 료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빨리 기력을 회복하여 목이 마른지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 앉았다. 그가 물을 찾는 것을 알고 침아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니다, 누워 있어. 내 알아서 마시마.”
“아닙니다. 저도 이젠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던 침아가 스르륵 쓰러지는 것을 료가 가벼이 받아냈다. 흐늘거리는 침아를 보고 료는 갓 익은 살구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유두를 손으로 희롱하며 놀려댔다.
“괜찮긴. 이래서야 답청도 못 가겠는 걸? 차라리 잘 됐다. 네 아픈 걸 핑계 대고 우리는 달게 잠이나 자자꾸나. 답청이 다 무어냐? 둘이서 훨씬 더 즐겁게 놀면 되지.”
“……정말 어린애 같아.”
그를 흘겨보는 그녀의 눈길조차 터무니없이 요염하여 료는 대뜸 입술을 맞추었다. 또 그녀의 아랫도리로 향하여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오는 료의 손길에 침아는 어찔함을 느꼈으나 주먹을 질끈 쥐면서 다소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아……아파요, 주인님. 그곳이 타는 듯이 아파서 더는…….”
“이런, 그리 아프냐?”
퍼뜩 놀라 손짓을 멈추고 침아의 몸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 침아는 얼굴을 붉히며 아랫도리를 감추고 몸을 돌렸다. 료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부끄러워할 때냐? 내가 봐야겠다. 혹시 내가 네 안에 파정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아이참, 하루가 지났습니까, 이틀이 지났습니까? 제가 벌써 아기씨라도 뱄을까 봐서요? 짐새는 뭐 하루에 애를 배고 이튿날에 알이라도 낳습니까?”
“어……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머쓱해하는 그를 보며 겨우 기력을 되찾은 침아는 이부자리를 벗어나 조심스레 옷을 걸쳐 입었다. 머리를 정돈하여 묶고서 그녀는 소반에 받쳐둔 물잔을 가져와 료에게 내밀었다.
“드소서.”
물잔을 받으며 료는 투덜거렸다.
“네가 깍듯해지니 재미가 없다.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맹랑하게 구는 모습은 잠자리 한정이냐?”
“아무 때나 당신 당신 해대면 약발이 떨어지잖아요.”
“약발이 떨어져? 허, 하여간에 맹랑하기는.”
툭 그녀의 뺨을 건드리고 물을 마시려던 료는 거기 띄워진 원추리 잎사귀를 보면서 문득 화산 노파의 말을 떠올렸다. 한 번은 건너뛰라던 할머니의 말씀이 묘하게 귓가에 맺혔다.
“어서 드셔요. 목 마르실 텐데.”
“너도 그렇잖으냐. 너부터 마시련?”
재촉하는 침아에게 잔을 내밀자 침아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제가 맹랑하기로서니 지아비 드시라고 올린 물까지 탐내겠어요? 저는 알아서 가서 마시지요.”
그 말에 료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가서 물을 더 떠오너라. 나도 이 물만으론 부족할 듯싶어.”
“예.”
대답은 했지만 침아는 잠자코 앉아 료를 지켜보고 있다. 료가 손짓을 했다.
“어서 다녀오래도?”
침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길을 아래로 깔았다.
“알겠습니다, 금세 다녀올게요.”
이내 몸을 일으키긴 하였으나 잠깐 얼굴에 스친 그녀의 묘한 표정이 료의 뇌리에 남았다. 방을 나서던 침아가 문간에서 그를 한 번 돌아보았다. 료는 이미 물을 마시는 듯이 잔을 입에 댄 채 싱긋 눈으로 웃었다. 침아도 생긋 웃고선 나가서 문을 닫았다. 탁 하고 자그마한 소리로 문이 닫히는 것이 유난히도 여운이 길었다. 료는 약간 머금었던 물을 잔에 뱉은 뒤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예민한 귀로 충분히 확인한 후에 그는 일어서서 옷을 걸치고 창을 열었다. 환한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 쪽빛의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물잔의 원추리 잎사귀를 꺼낸 뒤 물을 창밖의 세죽 위에 부었다.
“할머님과의 약속이니까. 미안하구나.”
빈 잔에 원추리 잎사귀를 넣어 소반에 돌려놓으며 료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때 이미 부엌에 들어섰던 침아는 부뚜막 근처에 앉아 노자근한 몸 이곳저곳을 주물렀다.
“……마셨겠지?”
확실히 보지 못한 것이 떨떠름하여 표정이 개운치 못했다. 얼마간 구름 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언뜻 다리 사이가 척척해지는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안 돼.”
다시 웅크려 앉으면서 침아는 제 아랫배를 조심스레 감쌌다.
“애써 받았는데…….”
눈을 감고서 열심히 작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침아는 무언가를 빌었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오늘은 예 나와 있네?”
“아, 자명 아주머니. 오셨어요?”
늘 음식을 가져다주는 여자가 들어온 걸 보고 침아가 몸을 일으켰다. 다리 사이에 바짝 힘을 주어 걷느라 몸짓이 좀 어색하다.
“오늘 답청에 나간다지? 날씨도 아주 좋은데 얼마나 좋겠어. 아니, 좋으시겠어요, 작은 마님.”
“아이참, 그렇게 부르시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조금 비꼬듯이 말투를 바꾸어오는 여자를 향해 침아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저으며 웃었다.
“아침 반찬은 뭐예요, 아주머니? 맛있는 걸 잔뜩 먹고 싶어요.”
달게 물부터 마시고 료에게 가져갈 물을 뜨면서 침아는 여자의 소쿠리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명랑하였다.
아니, 어쩌면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명랑하였을지 모른다.
신시(申時:오후 3시에서 5시) 중반 무렵 저택을 나선 일행이 그림자길을 골라 산을 다 내려갔을 즈음 강변 위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뱃전에 모인 이들은 두 편, 혹은 세 편으로 나뉘어 쌍륙이며 저포놀이를 했다.
강물이 부드럽게 물결치는 가운데 꽤 오래 지평선에 머물러 있던 해가 자취를 감추고 강물 저 앞쪽으로부터 자욱이 남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그때쯤 시종들이 분주히 배를 오가며 등을 걸고 다녔다. 아름다운 꽃의 형상을 본뜬 지등(紙燈)이 사방에 내걸려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할 것 없이 다채롭게 빛나니 그 모습을 먼 하늘에서 보면 오색으로 반짝이는 신묘한 물고기가 강을 헤엄쳐가는 듯하였다.
뱃전에 있는 이들에겐 이것이 그리 신기할 것도 없는지 다들 심상하게 놀이에 푹 빠져 있었으나 침아는 눈을 빛내며 지등을 올려다보느라 도무지 쌍륙 따윈 뒷전이었다. 놀이에 재주가 없는 료는 화산 노파에겐 도움이 되지 않아 화산 노파 혼자 분투를 하였으나 결국 쌍륙은 휘와 난씨 자매의 승리가 되었다.
벌칙으로 술이 등장했다. 화산 노파는 능숙하게 잔을 비웠으나 침아는 고개만 도리도리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살짝 속이 불편하거든요. 거기다 술은 정말로 약해서…….”
“대신 이 아이 몫까지 제가 마시겠습니다.”
료가 당장 그녀 앞으로 온 잔을 받으려 하였으나 가진이 그래선 안 된다고 딴죽을 걸었다.
“벌칙으로 마시는 술을 다른 이가 대신 마셔주다니, 괘씸한 일이지요. 정히 대신 마시고 싶으시다면, 벌칙에 또 벌칙. 세 배를 마시는 겁니다!”
“세 배라니, 너무 하십니다. 두 배까지만 해주셔요.”
침아가 난감해하며 졸라댔으나 가진은 엄한 얼굴로 손을 뻗더니 옆에 있던 휘와 가선을 돌아보며 제 편에 동참시켰다. 휘가 실실 웃으면서 나섰다.
“가진 낭자의 말씀이 옳지요. 벌칙을 받으면서 요령을 부리다니 괘씸한 일입니다. 세 배 정도는 되어야지요.”
“아무래도 언니와 휘 공자님 말씀이 이번엔 옳은 듯하군요.”
가선까지 그리 나오자 침아는 화산 노파를 향해 사정을 하려 했다. 먼저 선수를 친 쪽은 가진이었다.
“어르신! 놀이는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해야지요. 설마 제 편의 일이라고 작은 공자님 내외분 편을 드실 거라면 이 가진, 무척 실망할 것입니다!”
“아니, 아니. 나는 이미 내 술을 마시지 않았나. 그리고 물론, 편법을 쓰는 자라면 얼마쯤 손해를 감수해야지. 우리 료가 술이 강한지 할미는 잘 모르겠구나. 어떠한고?”
그러니까 화산 노파의 말인즉슨, 세 배로 마시란 소리다. 료는 걱정스런 표정인 침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그럭저럭 마십니다. 우송만 한 술고래는 아니지만.”
노느니 염불한다고 배 아래에 내려가 노를 젓고 있었을 우송은 아마 귀가 간지러웠을 것이다. 료는 침아 몫에서 늘어난 술 세 잔과 자신의 벌칙 술 한 잔을 마셨다.
“자, 다음으론 무엇으로 겨루시겠습니까?”
술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머나, 그 기세 참으로 마음에 쏙 듭니다! 작은 공자님, 그리 보지 않았는데 의외로 화통하시네요!”
박수 치며 건네는 가진의 말처럼 료는 이제 다른 이들 앞에서 무작정 뒷전만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편을 나누어 겨루는 상황에서 저편의 중심은 휘였다. 침아가 보는 앞에서 마냥 휘의 편에게 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겨나 그는 꽤 진지하게 승부욕에 불타는 중이다.
“음, 쌍륙도 좋고 저포도 좋은데 몸을 좀 움직여 보는 것도 재미나지 않을까? 투호 생각이 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가능합니다! 얼마든지요! 얘들아, 투호 준비를 해오렴.”
난조 아씨들이 놀러 다니기 위해―특히 가진이 놀러 다니기 위해서―만들어진 배에는 무엇이든 놀 만한 것은 찾으면 뚝딱이다.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떨어진 곳에서 금을 뜯거나 하며 악기 연주를 하던 시녀들 몇이 가진의 명령에 재빨리 일어나 화살이며 투호 항아리 등을 내어 왔다.
하지만 이번 놀이도 일방적으로 휘의 편이 유리했다. 투호라면 자면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난씨 자매나 휘와 달리 료와 침아는 아예 그 비슷한 것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선수를 양보하여 어찌하는 것인지 대충 짐작한 료는 하면 할수록 그 실력이 좋아졌으나 침아가 영 맥을 못 추었다. 심지어 화산 노파는 가선보다도 실력이 좋았는데 말이다.
또 승부는 료의 편이 벌칙주를 받는 것으로 판가름 났다. 료가 여덟 잔째의 술을 마셨다. 마시는 그보다 그를 보고 있는 침아의 낯빛이 더 안 좋다.
그런 침아를 다소 고까운 심경으로 바라보던 휘가 료에게 말했다.
“이리 번번이 이기기만 해서야 재미가 없지 않으냐. 다음엔 우리 쪽도 술맛이나 보게 그쪽에서 이길 만한 걸 말해 보거라. 침아가 저리 표정이 굳어진 걸 보니 괜히 이겨놓고도 마음이 좋지 않아.”
료는 전 같았으면 당장 발끈하여 주위에 다른 이가 있건 말건 휘에게 누구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고 따지고 들었을 텐데 이번엔 분명 불쾌한 눈빛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자코 한 호흡 쉬었다. 그러더니 침아의 어깨를 가벼이 쥐었다 놓으며 말했다.
“들었지? 형님께서 저런 걱정을 해주시는구나. 이번엔 뭘 하든 꼭 이겨보자. 할머니, 이기는 겁니다. 아셨지요?”
웃고 있다. 꾸며낸 미소라고 해도 그만하면 충분히 훌륭했다. 전에 없던 일이라 여기며 화산 노파는 흡족한 기분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이번엔 꼭 우리가 이겨서 저쪽 편 애들에게 술을 먹여주자꾸나. 침아야, 네가 행운을 발휘할 때다. 알겠지?”
화산 노파의 말에 침아는 말없이 웃으며 수긍하였다.
저포놀이를 벌였다. 기세가 단단히 오른 게 도움이 됐는지, 아니면 침아의 행운이 발휘되었는지 주사위는 중요한 순간 료의 편에게 좋은 숫자를 주었고 일찌감치 적을 따돌리며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입궁!”
말을 궁으로 넣으면서 화산 노파가 즐겁게 소리치는 순간 이미 주위 시종들이 휘와 가진, 가선을 위한 술을 따르고 있었다. 가선이 술을 약간 입에 머금더니 난색을 표하며 독해서 마시지 못하겠노라 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그쪽도 벌칙의 벌칙을 받겠다는 것이지? 자, 그 벌칙, 둘 중 누가 받을 셈이냐?”
휘와 가진이 서로를 보았고 휘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만류하는 듯한 손짓과 함께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 우아한 걸음보다 더 빨리 가진이 부채를 휘두르며 손을 들었다.
“사내가 꼭 계집의 술을 대신 마셔야 한다는 것은 식상합니다! 저, 가진이 제 금 같은 동생을 대신하여 벌주를 마시지요.”
“언니, 그러지 마세요, 술도 그리 세지 않으시면서 취하면 어쩌시려고…….”
가선이 가진의 팔을 붙잡으며 말렸으나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아니야, 나 정도면 술이 센 거지. 이런 술이라면 열 잔, 스무 잔을 마셔도 끄떡도 안 할 거라구. 내가 네 대신 오늘 벌주는 다 마실 테니까 이 언니만 믿어. 자, 자, 뭣 하느냐. 술을 따라.”
더 말리고 말 것도 없이 가진은 시종들을 재촉했고 석 잔 술을 후딱 해치워 버렸다. 입술을 훔치며 그녀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 즐거운 자리여서 그런지 그 술 참 맛도 좋다. 자, 그럼 여러분, 또 다음 놀이로 넘어가 보시자구요!”
그 화통한 외침에 다들 이끌려가듯이 유쾌하게 웃음 짓는 속에서 가선은 힐끗 휘를 쳐다보았다. 휘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한편에서도 둘이 또 편을 지어 승패를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자는 없었다. 이제 그들이 계속 지기로 작정하였다는 것도 역시 아는 것은 그들뿐. 멀찌감치에서 놀이판을 지켜보는 정의 일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그리 놀면서 어느덧 아주 어두워진 하늘에 총총히 별이 나타났다. 지등이 발하는 환한 불빛 때문에 그 별빛에 주목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침아가 이따금 고개를 들어 지등을 보고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던 침아는 번번이 옆에 있는 료를 볼 때마다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멀미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잠시 뒤쪽에 가서 바람을 좀 쐴게요.”
료에게 귀엣말로 그리 말하고 자리를 뜨려는 그녀를 따라 료도 일어섰다. 다시 저쪽 편이 져서 벌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할머니, 침아가 몸이 좀 불편한 모양입니다.”
“그래, 그래. 알겠다. 우리끼리 놀고 있을 테니 네 금쪽같은 처, 잘 돌봐주렴.”
애들 어르듯이 놀리는 화산 노파의 말투였으나 료는 볼에 홍조를 띄우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침아의 어깨를 감싸 안듯이 하며 배의 뒷전으로 향했다.
스무 잔이나 술을 마시면서 제 말과 달리 얼큰히 술에 취한 가진이 딸꾹질을 하는 것을 가선이 멈추게 하려고 물을 마시게끔 돕는 사이 휘가 화산 노파에게 오며 료는 어디를 가는 것이냐 물었다. 화산 노파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침아가 멀미를 한다는구나. 모르지, 또. 료가 그리 말하라고 시켰을지도.”
다소 엉큼한 내용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나이 든 자의 특권일 것이다. 휘는 그리 맑지 않은 표정이 되어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 둘이 저리 어울리는 것이 할머님 마음에 차십니까?”
“응? 차지 않을 건 또 무언고?”
“료를 유난히 아끼시는 줄 알았는데요. 훗날이 빤히 보이는 일인데 어찌 강경히 말리시지 않습니까?”
화산 노파는 가만히 웃음 짓더니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인간의 아이가 들어오고 료가 많이 성장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거면 됐다. 훗날의 일을 미리 근심할 것은 무어냐. 지금 료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나는 퍽 좋구나. 아무렴, 좋고말고.”
좋게만 생각하고자 마음먹었다. 좋게, 좋게. 료가 웃고, 료가 살아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게끔 해줄 수 있다 한다면 설사 침아가 인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못한 것이라 해도 감수할 것이라 생각했다.
어리광만 받아주면 아이를 망친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가 어리광을 부릴 때의 이야기이다. 료는 애초에 어리광을 부리는 일조차 없었던 아이다. 이제 훌쩍 큰 그가 간절히 원하는 이와 행복하다 하는데 무슨 이유로 그것을 막아선단 말인가? 막지 않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줄 것이다. 비록 이제 료가 자신에게 도와달라 할 만한 일은 없을 듯하지만.
그저 흐뭇하게, 마치 부처처럼 웃는 화산 노파에게서 휘는 시선을 거두었다. 어쩐지 심장 근처가 따끔거렸다. 이제 일어날 일에 대한 가책 따위, 느낀 적 없었는데.
배 뒷전에 이르자, 앞쪽에서 노는 이들의 모습은 중앙의 선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침아는 료의 가슴에 의지해 반은 눕고, 반은 앉은 듯한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갈 월인산 큰 봉우리 이름이 무어라 하였지요?”
“비황대(飛凰臺).”
“흐응. 황(凰)이란 말은 봉황새의 암컷을 말하는 것이었지요?”
“그래.”
“수컷인 봉(鳳)을 찾아 날아간 것일까요?”
“글쎄. 어땠을까? 수컷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달아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럼 수컷은 암컷을 쫓아가고?”
“얼마나 못났기에 암컷이 달아났겠느냐. 하긴 제 못난 줄 아는 녀석이었으면 암컷이 달아나지도 않았으려나. 응? 어쩌다 이런 소리를 하게 되었지?”
“비황대 이야기를 하면서요.”
침아는 빙긋이 웃은 뒤 저택에서 나올 때부터 내내 품에 들고 있던 파란 비단공의 자수 부분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말했다.
“주인님.”
“응?”
“제가 애초에 저 난씨네 아씨들처럼 귀하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그랬지요.”
“무슨 소리냐, 또.”
“아마 그랬으면 저 가진 아씨랑 비슷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주인님을 만나서, 한눈에 반하는 거죠. 와, 엄청 예쁜 아이네, 그러면서. 전 예쁜 게 정말 좋거든요.”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나한테 반해라. 한눈에.”
불쑥 그녀의 얼굴을 돌리고 터무니없이 진지하게 명령하는 말에 침아는 히죽 웃었다. 장난스럽게 그의 얼굴을 밀쳐내며 그녀가 말했다.
“눈 하나가 더 생긴다면 생각해 보지요.”
그러곤 내내 말없이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월 오일 밤의 따스한 대기 속에서 료는 그 기분 좋은 침묵을 즐겼다.
이윽고 월인산이 목전에 나타나면서 강변에 배를 대고 일행은 수레와 말로 옮겨 탔다. 길잡이로 나선 시종의 뒤를 키 큰 우송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눈을 번득이며 따랐다. 화산 노파와 휘, 료를 태운 수레가 그 다음, 그 뒤로 난씨 자매와 침아를 태운 수레가 따르고 그 외의 낭속들이 걸어서 길을 올랐다. 말을 탄 시종들이 두루 수레의 옆을 맡고 맨 뒤를 호종하는 모습은 아름답게 꾸며진 수레와 함께 귀한 분들의 행렬을 자못 엄숙하게까지 보이게 했다.
다만 마주칠 이가 거의 없는 그림자길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볼 이도 없으니 호젓하기만 했다. 그 호젓한 길을 장식하는 것은 말발굽 소리와 수레바퀴 소리, 그리고 적당히 나지막하게 흐르는 비파 소리였다.
차차 경사가 심해지고 길이 점점 좁아져가면서 행렬의 머리와 꼬리 사이의 길이도 길게 늘어났다. 걸어 올라가는 이들의 숨찬 기색이 쌓이면서 풍악 소리도 가뭇없이 그쳤다.
료는 수레에 함께 오르지 못한 침아 생각에 빈번히 고개가 뒤쪽으로 향하곤 했다. 애초에 수레 세 대를 준비했으면 한 수레에 둘씩 올라 료는 침아와 동승했을 일인데 굳이 그렇게 나누어 탈 의미가 있냐며 휘가 일축해 버렸던 것이다.
화산 노파도 제 수레에 형제를 함께 타게 할 생각에 휘의 뜻에 힘을 실어준 바 있다. 이때가 아니면 또 무슨 기회를 타서 둘을 나란히 앉히고 가겠는가?
화산 노파가 말을 꺼내어 산길을 오르는 동안 휘와 료는 봄과 여름에 어울리는 시구 대결을 하며 고모할머니의 귀를 즐겁게 해드리고 있었다. 오가는 말투가 여전히 냉랭하기가 이를 데 없지만 그런 냉랭한 정이라도 자꾸 쌓여야 달리 물꼬를 틀 일이 있을 것이다. 이러다 료가 분가라도 할라치면 이대로 영영 둘의 사이는 남보다 못할 서먹함 그대로 고착화되고 말 것이니 그래서야 애초에 둘을 ‘형제’로 매듭지은 보람이 없다.
“이리 너희 둘이 의젓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과연 핏줄은 핏줄이로다. 내 언제 너희 둘을 화산으로 불러내 벗들에게 조카 자랑을 좀 하여야겠어. 설마 이 할미가 부르는 것을 다른 볼일이 있어 바쁘다고 괄시하지는 않겠지?”
“어찌 그러겠습니까, 열 일이 있어도 제쳐두고 갈 것입니다.”
“마땅히 할머니의 부름에 따를 것이니 그런 걱정 마십시오.”
휘와 료가 즉각 대꾸하는 모습에 화산 노파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둘의 손을 한 번씩 가볍게 건드렸다.
“세월이 긴 것 같으나 백 년, 이백 년은 금세 지나간다. 그때쯤이면 이 할미도 별빛 미치지 않는 곳에서 날개를 쉬고 있겠지. 너희들이 당당히 일족의 어른 대접을 받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벌써부터 아쉽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쉿. 휘야, 그리고 료야. 하늘 아래 뭇 생기 가진 것들 중에서 오로지 너희 둘이 형제로 맺어진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거라. 료. 형을 공경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정은 먼저 받고 나서야 돌려주는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네게 잘하는 이에게만 잘할 것이라는 옹졸한 생각으로는 너는 언제까지고 좁은 조롱 안을 노니는 작은 새에 불과할 것이야. 휘야, 다만 몇 각이라도 이르게 태어난 자로서의 아량을 길러라. 싫은 점 하나 때문에 다른 좋은 점을 보려들지 않는 네 까다로운 성정은 익히 안다만 그 모난 성정 다듬을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네 필히 언젠가 그리 버린 것으로 인해 크게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귀에 아플만 한 소리는 거의 하지 않고, 하물며 어찌어찌 살아라 하는 식의 훈계를 해온 적도 없는 화산 노파가 그렇게 분명하게 둘에게 일침을 놓자 휘와 료는 거북한 표정이 되어 잠자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둘 사이의 벽은 단단하고, 그것이 눈 녹듯 풀리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다만 일단은 말을 꺼낸 것에 의의를 두었다. 귀찮고 싫게 들렸을지는 모르나 진심으로 걱정하여 건넨 말이었다. 이 둘이 세월을 더 보내고 문득 살아온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더불어 생각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때가 아주 먼 훗날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화산 노파는 오른편의 대나무주렴을 걷어 올렸다.
“아아, 단조가 저리도 아름답구나. 역시 여름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내다본 바깥 풍경 속에 밤의 놀이 행렬을 따라 단조(丹鳥), 즉 반딧불이가 줄을 지어 따르고 있었다. 휘와 료도 발 너머의 반딧불이를 내다보며 수레 안의 어색했던 공기는 조금씩 흩어졌다.
침아도 저 반딧불이를 보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료는 뒤에서 오고 있을 수레에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바퀴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료는 반대쪽 문을 열고 머리를 빼고 뒤를 보았다. 바로 뒤를 따르고 있어야 할 수레가 보이지 않고 대신 걸어서 따르는 시녀들 몇이 보였다.
“아씨들의 수레는 어찌 되었느냐?”
그중 하나를 손짓하여 불러 물으니 시녀가 대답하길 가진 아씨가 중도에 속이 크게 좋지 않아 잠시 수레를 세우고 내렸다 하였다.
“가선낭 말이 옳았어. 가진낭은 바라는 만큼 술이 세지는 않은 모양이야. 료야, 너는 어딘가 미진하다거나 하진 않느냐?”
“저는 그다지……. 그리 독한 술도 아니었는걸요.”
걱정하는 화산 노파를 안심시킨 뒤 료가 다시 시녀에게 물었다.
“아씨들의 수레가 멈춘 것이 오래되었느냐?”
“한 식경도 채 되지 않은 듯싶습니다만…….”
“산 공기가 맑으니 가진낭도 잠시 걸으며 바람을 쐬면 크게 탈은 없을 게야. 침아도 배에서 내릴 때엔 꽤 편해졌다 하지 않았니?”
화산 노파의 말에 료는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으나 이미 멀리 떨어져 수레를 호종하는 이들의 불빛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사뭇 불안하였다. 귀를 기울여도 이렇다 할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내려서 가보아야겠습니다.”
“호종하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얼 그리 걱정이냐? 꼭 누가 네 작은 새를 물고 가기라도 할까 봐 벌벌 떠는 것 같아 우습구나.”
“침아가 정말로 새였다고 한다면 이리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휘가 슬며시 비꼬는 말에 료는 화를 눅잦히며 싸늘히 내뱉었다. 둘이 험악해지기 전에 화산 노파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래, 료야. 네 말대로 한 번 가보는 게 좋겠다. 만사에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것이 무에…….”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산 아래쪽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올라왔다. 느닷없는 비명소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한바탕 이어지는 것에 수레 안의 이들이 모두 놀라 바깥을 내다보았다.
산 아래쪽 수풀이 요란스레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큰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올랐다. 어리둥절하여 보는 사이 그 새들이 자신들과 함께 온 이들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경황망조하여 제 본체를 되찾아 필사적으로 날아오르는 그들의 모습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대체 이 무슨……?”
휘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퍼뜩 료는 침아 생각을 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새들이 놀라 무작정 땅을 떠날 정도라면 그 아이는 어찌하고 있단 말인가?
“……침아야!”
수레에서 구를 듯이 뛰어내리는 료의 귀에, 다음 순간 온 산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커다란 포효가 들려왔다. 우웅― 하고 초목이 떨 정도로 쩌렁거리는 그 소리에 이 자리에 선 자들의 움직임도 일시에 얼어붙었다.
“범입니다!”
우송이 앞에서 뛰어오면서 소리쳤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듯 커다란 그조차도 호랑이의 울부짖음을 듣고서는 이가 딱딱 마주치게 떨고 있었다. 소의 본성에 박힌 호랑이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에 공황상태에 빠진 것이다. 료가 일갈했다.
“우송! 창을 들어! 고작해야 저것도 네발 달린 사냥감일 뿐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리를 지켜라!”
당장에 모습을 바꾸어 날아오르려는 그를 큰 날개가 후려치듯이 밀쳐냈다. 생각도 못한 공격에 료는 풀숲으로 거의 내던져지다시피 했다. 이미 짐새로 모습을 바꾼 휘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야말로 정신 차려. 할머님을 혼자 둘 작정이냐? 오로지 제 계집 생각밖에 없다니, 한심하군.”
그리고 휘는 몸을 돌려 산 아래로 빠르게 날아갔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다가온 우송이 일으키는 손을 뿌리치며 료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욱신거렸다.
“료야, 나는 괜찮으니 너도 가보거라.”
수레에서 내려선 화산 노파의 말에 료는 아주 잠깐 주저하는 빛을 보였다. 우송이 단단히 고쳐 든 창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놈이 호랑이든 뭐든 오기만 하면 단번에 때려눕히겠습니다. 가십시오, 주인님. 가서 마님을 데려오세요.”
료가 그제야 아주 안심하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달려가는 얼굴에 고통스런 빛이 번졌지만 신음조차 내지 않으며 마침내 새가 되어 땅을 박차 올랐다. 아아, 좀 더 나는 연습을 하는 건데. 앞으로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을 줄 알고 침아와 노는 것에만 지나치게 열중하였던 것이 료는 순간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그의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피비린내가 훅 날아와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여유도 없어졌다. 지독한 노린내로 뒤덮인 뜨거운 혈향의 정체는 얼마 안 가 보게 된 쓰러진 호랑이의 것으로 드러났다. 목덜미와 뱃가죽에 남은 날카로운 발톱자국에서 피를 뿜어대는 호랑이는 이미 눈을 치뜨고 죽어 있었다. 짐새의 발톱에 당했으니 당연한 결과. 사방에 호랑이 발자국 천지였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서 쓰러져 있는 말들과 부서져 주저앉은 수레가 보였다.
“침아야!”
수레 옆 땅에 거의 고꾸라지듯 내려서며 그녀를 찾았지만 수레 안에 침아는 없었다. 엉망이 된 수레 안에 덜렁하니 남은 꽃신 한쪽을 보고 료는 소름이 쭉 끼쳤다. 침아의 신이었다.
“침아야, 침아야! 어디 있느냐?”
수풀을 헤쳐 나가는데 오히려 짐새의 커다란 몸이 방해가 되었다. 호랑이의 피냄새가 너무도 강해 침아의 향기를 붙잡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방을 헤집으며 료는 목이 쉬도록 침아를 불러 젖혔으나 돌아오는 소리가 없었다.
그때 서쪽에서 새 날갯짓 하는 소리가 들려와 료는 휙 돌아보았다. 커다란 새 하나와 그에 비하면 작은 새가 둘, 그리고 커다란 새의 발톱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침아야……!”
휘가 침아를 들고 돌아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무리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커다란 검은 새는 휘였고, 그 옆을 나는 붉은 새와 흰 두루미는 난조 가선과 그녀의 시종 정이었다. 그리고 휘가 붙잡고 있는 것은 의식을 잃은 가진이었다.
“침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함께 계셨지 않습니까?”
료의 물음에 가선은 황망해하며 대답했다.
“저는 언니를 데리고 달아나기 급급했던 터라……미처 그 아이의 일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이들은요? 다른 이들을 불러 모으세요! 그중에 누구라도 침아를 데려갔겠지요!”
그 말에 정이 하늘을 향해 뚜루루, 뚜루루 하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시간이 걸리긴 하였으나 마침내 놀라 흩어졌던 새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돌아오는 모습만 보고도 료는 짐작했다. 이들 중에 침아의 행방을 아는 자가 있을 리 없다.
호랑이는 죽어 자빠져 있는데 침아는 온데간데없다. 하늘로 꺼질 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없는 녀석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고 소리치는 료에게 아직 어안이 벙벙해 있던 시녀 중의 하나가 손을 들며 물었다.
“두 마리 다 죽었나이까?”
“두 마리?”
휘와 료가 동시에 소리쳐 물었다. 휘가 죽인 것은 한 마리였다. 시녀가 넋이 반 나간 듯 겁에 질린 눈으로 말했다.
“제가 달아나면서 본 것은 틀림없이 암수 두 마리였나이다.”
정적이 흘렀다. 료의 시야에서 아까 본 꽃신 한쪽이 아련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내 사방을 둘러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무조건 날아올랐다. 뒤이어 휘가 료와 반대쪽으로 날아올랐다.
비황대 가는 길에만 그치지 않고 너른 월인산 전 지역을 거의 샅샅이 훑어갔다. 반달도 되지 못한 가느다란 달이 구름 뒤에서 나왔을 때, 먹황새 중 하나가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계곡 물가에서 발견했다. 자석영 머리꽂이였다.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게걸스레 모여들어 먹이를 물어뜯던 스라소니 몇 마리를 보고 쫓아냈다. 형체를 알 수 없게 변한 붉은 덩이의 근처에는 갈가리 찢긴 하얀 천과 피 묻은 신 한 짝이 나뒹굴고 있었다.
수레에 남겨진 꽃신의 짝.
달이 다시금 구름에 가려져 신을 내려다보는 료의 얼굴도 가려졌다. 물정 모르는 반딧불이가 한없이 주위를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