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칠백 년째의 오후
“주인님, 물입니다.”
“바지런도 하다. 매일같이 자다 말고 샘에 다녀오는 게 지겹지도 않으냐?”
잠에서 깬 료에게 침아가 소반에 올린 잔을 건넸다. 오늘도 물에 든 원추리 잎사귀를 불어가며 그 물을 마시고 나서 료가 물었다. 침아는 생긋이 웃었다.
“지겹긴요. 그나마 제 손으로 올리는 음식이라곤 이게 고작인데요. 아, 오늘은 날 잡아 떡이라도 만들까 봐요.”
“우송이 녀석 좋다고 메를 잡겠군.”
“음. 떡을 하면 뭘 하나. 우리만 먹고 말 게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도 돌려야 할 터인데.”
“보나마나 인절미 아니냐? 네가 그거 말고 뭘 할 줄 안다고?”
“어머, 그 말씀, 인절미를 대단히 우습게 여기시는군요.”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니라 보니까 별 대단찮을 것도 없는 간단한……. 내 실언을 했다.”
파르르 쏘아보는 시선에 료가 목소리를 낮추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앙칼진 침아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호호홋. 그리 간단한 일, 오늘은 주인님께서 거들어주시면 일도 아니겠네요. 어서 조반 준비를 하고 떡 만들 준비를 할 생각에 침아는 좋아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거들라니? 날더러 뭘 하라고?”
“뭘 하기는요, 메를 잡으시면 되지요.”
“날더러 떡을 치라 이 소리냐?”
“왜요, 설마 못 한다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시죠?”
“못 한다는 게 아니라 뭐 하러 내가. 우송이 녀석은 뒀다 어디에 쓰려고?”
“잘 만든 떡 맛볼 때 쓰면 되지요. 우송 아저씨는 뭐 매번 힘만 쓰라고 태어난 줄 아십니까?”
“이 녀석, 날 뭐라고 생각하는 게야?”
“뭐긴요, 오늘 난생처음으로 떡메 잡고 힘자랑하실 제 낭군이지요. 괜찮습니다. 주인님 말씀대로 별것도 아닌 일인데요, 뭐.”
생글생글 웃고 있는 걸 보니 절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다. 료는 공연히 놀려먹었지 하고 약간은 후회하면서 그런 일은 안 한다고 딱 잡아떼 버릴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떡을 칠 때의 그 광경이 퍽 좋아보였지 싶다. 우송이 메를 열심히 치고 침아는 떡판 위의 떡에 물을 뿌리고 치기 좋게 돌려놓으며 착착 합이 맞는 모습을 마루에 앉아 구경만 해왔던 료였다. 이만 하면 됐나 하며 떡을 뜯어 침아와 우송이 맛을 보는 걸 볼 때면 낄 자리 없는 그는 심기가 불편해졌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 그 광경 속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인가. 그림을 그려보고선 흥, 까짓것 무에 어렵겠냐 싶어 료는 호기롭게 말했다.
“그래, 생전에 그런 일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쁠 것 없지. 부인이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도 남편 된 도리일 것이고.”
과하게 생색을 내는 말에 침아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 웃었다. 료가 발끈했다.
“뭐냐, 그 웃음은? 내 기꺼이 도와준다 하는데 감히 웃어?”
“어쩐지 제가……. 아니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쩐지 뭐? 왜 내 얼굴을 보고 말을 끊느냐? 말해라. 당장 말하지 못해?”
팔을 잡아당겨 다그쳤더니 침아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성내지 않는다 하시면 말씀드리지요.”
“웃을 만한 일이면 어찌 성을 내겠느냐?”
“흠, 그러니까 꼬마 신랑한테 시집가서 신랑을 키우면서 사는 부인들이 인간 세상에는 더러 있는데, 어쩐지 그 부인들 기분이 이해가 돼서요. 생각해 보셔요. 요만한 꼬마 신랑이 몇 살이나 연상인 부인 앞에서 그래도 남편이랍시고 가냘픈 목소리에 힘주어서 어른 흉내를 내는 걸요. 신랑도 신랑이지만 그런 걸 보고 사는 부인도 참 인내심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그래도 예전의 주인님처럼 예쁜 신랑이라고 한다면 참는 게 썩 어렵지만도 않을 테지만 세상엔 그렇게까지 예쁜 남자애들은 별로…….”
한창 즐거이 말하던 침아는 문득 바뀐 료의 표정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밀며 잔과 소반을 챙겨 일어서려 했다.
“소세하실 물부터 가져오겠습니다. 어젯밤 먹은 게 부실했나, 왜 이리 배가 고프지.”
재빨리 돌아앉았으나 땋아 내린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는 손이 있어 일어서지 못했다. 뒤에서 어서 돌아보란 듯이 머리를 슥슥 잡아당기는 바람에 침아가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돌렸다. 료가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뜬 눈으로 웃어 보이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요새 기력 회복에 좋은 탕약을 너무 마신 모양이다. 이따가 약방문을 다시 써야겠다.”
“이제 겨우 이레째 먹고 있는데 벌써 효험이 있을 리가요. 오히려 속이 허한지 어지럼증이 간혹 든답니다.”
“저런.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럼 이리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지. 자자, 다시 눕자꾸나.”
“다시 눕다니요, 어서 조반을 든 다음에 떡 만들 채비를…….”
“이제 겨우 해가 중천인데 무슨 걱정이냐? 한숨 자고 일어나도 기껏해야 해질녘밖에 안 된다.”
기어코 침아를 도로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진지하기 짝이 없다. 이러니 꼬마 신랑 소리를 하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침아는 겉으로는 애교스럽게 저자세로 나갔다.
“저 조금도 졸리지 않습니다, 주인님. 아까 꼬마 신랑 이야기는 웃자고 해본 말인데 이리 성을 내시면 쓰나요? 성내지 않는다고 하셔놓고선.”
“그래. 나는 웃자고 한 소리조차 소화 못 시키는 속 좁은 지아비다.”
“아니, 어찌 또 그리 말씀을…….”
“그래도 다행이지? 내 처가 다행히도 인내심이 아주 많은 것 같으니 말이야. 자, 우리 부인. 착하게 참아주시는 겁니다.”
“주인님, 그리 꽁해 계시지 마시고, 마음을 푸셔요. 저기 주인님, 이런 일은 제발 어두울 때에만……. 어머, 어머머, 거긴 안 돼요.”
재잘재잘, 재잘재잘 한낮부터 다툼을 빙자한 놀이를 즐긴 둘은 이내 이불 속에서 운우지락에 빠져들었다. 바로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이리 가져왔습니다.”
미시 끝 무렵 화산 노파의 객청에 들른 료가 소반 그득히 담아온 인절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화산 노파는 소반에 담긴 떡과 료를 번갈아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네가, 떡을 만들었다고?”
“인절미입니다.”
명칭을 강조한다. 화산 노파가 콩이며 팥고물이 묻은 떡을 보고만 있자 료는 어쩐지 안달을 하면서 말했다.
“침아가 그러는데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 최고라고 했습니다. 저는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 것은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한 것 같습니다. 한 번 맛을 보셔도 괜찮을 성싶습니다.”
말은 의젓한데 표정이며 온몸에 드러난 뜻은 ‘할머니, 제가 만든 떡 좀 드시라니까요? 어서요, 뭘 하세요?’였다.
화산 노파는 다 컸나 싶더니 또 이리 재롱을 부리는 조카손자의 모습에 단전에 힘을 주어 웃음을 참으며 권하는 대로 떡을 하나 집어 들었다. 오물오물 절반을 갓 삼키기 무섭게 료가 물었다.
“어떠십니까?”
“어떻긴. 먹을 만하다.”
부러 평이하게 말했더니 료가 대번에 실망한 기색이다. 슬쩍 떡 하나를 집으면서 료가 구시렁거렸다.
“오늘 건 진짜 잘 됐다고 했는데.”
“그러니 먹을 만하다 하지 않았니?”
“예, 뭐. 아, 할머님께서 떡을 원래 안 좋아하셨던가요?”
“네가 언제 내가 뭘 좋아하는지 관심이나 있었더냐?”
“할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제가 하늘 아래 지극하게 생각하는 이가 몇이나 되는지 빤히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휘라면 듣기 좋게 눙쳤으련만 료는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점이 아직 어리고, 어리기 때문에 보기가 좋다. 이런 무구함이 앞으로도 다듬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건 화산 노파의 욕심이겠지만.
“맛있다. 정말로 맛이 좋구나.”
놀렸던 것을 보상하려는 듯이 화산 노파는 거듭 강조하여 떡을 칭찬했다. 료는 물끄러미 화산 노파를 쳐다보다가 이내 수줍은 기색을 띠며 웃었다.
“입에 맞으실 줄 알았습니다.”
잠시 가져온 인절미를 나누어 먹었다. 아무 말도 없이 떡만 먹으며 마주 앉아 있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료 기분 좋으라고 자꾸만 떡을 집어 들었더니 료가 적당한 선에서 직접 차를 따라주면서 맛있게 드셨다는 것 믿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차를 마시면서 화산 노파는 이제 침아의 솜씨 칭찬을 할 차례인가 했다.
“침아 그 아인 떡도 잘 만드는구나.”
“이것만 잘합니다. 부엌일도 그렇고, 바느질 같은 것도 소질하고는 담을 쌓았지요.”
“노래도 잘하고 비파도 잘 타지 않니.”
“노는 것에 재주가 있는 게 큰 장점이 되나요.”
“그만하면 예쁘고 옷맵시도 좋지.”
“그 나이에 그 정도도 아니어서야.”
허. 불출 소리를 안 들으려고 기를 쓰는지, 웬일로 료가 제 입으로 자꾸 침아 흉을 본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런 게 아니라 화산 노파에게 다른 칭찬을 더 끌어내려는 수작이 아닌가? 화산 노파는 시치미를 뚝 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하긴 네 말도 옳다. 예쁘게 보려고 해서 예쁜 것이지, 저 난씨 자매에 비하면 옥밭을 지키는 돌멩이처럼 별 볼 일 없지.”
그 말에 역시나 대뜸 료의 입술이 가늘어졌다. 뭐라 말하려다가 그래도 화산 노파가 윗사람이라고 참는지 료는 일없이 인절미만 꾸역꾸역 몇 개나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화산 노파는 저러다 얹히면 어쩌누 싶으면서도 또 한 번 슬쩍 놀렸다.
“할미 맛보라고 가져온 떡 네가 다 먹고 가겠구나. 하지만 빨리 먹는 편이 낫겠지. 이런 떡 촉촉한 기가 가시고 나면 그나마 있는 맛도 뚝 떨어질 테니.”
“……이 떡은 며칠쯤 두고 먹어도 맛만 좋습, 쿨럭, 쿨럭!”
결국 료는 못마땅한 얼굴로 불평 한 마디 하려다 떡에 사레가 들렸다. 시녀들이 뛰어와 료의 등을 두들겨 주고 화산 노파는 어서 떡부터 뱉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료는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도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선 기어코 떡을 다 삼키고야 말았다.
“원 그게 뭐라고 그걸 기어코 다 먹고 있누? 누가 보면 떡에 환장한 줄 알겠구나. 뭣들하고 섰어? 찬물이라도 한 사발 가져와야 할 것 아니냐?”
눈물이 나도록 기침을 했던 료가 잠시 힘이 쭉 빠져서 멍해 있었다. 화산 노파의 호령에 시녀가 물을 가져왔고 사발 가득한 물을 료는 얼마쯤 마시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내려놓았다.
“맛이 없습니다.”
“응?”
희한한 소리를 한다 싶어 화산 노파가 대접의 물을 약간 마셨다. 늘 마시는 이 집의 물맛 그대로였다.
“인절미를 먹고 난 뒤끝이라 그렇겠지.”
“아니에요, 정말로 이 물은 맛이 없습니다, 할머님. 이 저택 우물물이 맛이 별로더라고요. 좀 시금털털한 뒷맛이 있습니다.”
“그래? 딱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만. 그런데 네 언제부터 그리 물맛에 일가견이 생긴 것이냐?”
“세우지 뒤쪽 숲에 샘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 물이 맛이 좋아요. 처음엔 잘 모르겠더니 자꾸 마시다 보니 확실히 그 맛이 좋습니다. 일가견이라면 저보다는 침아한테 있겠지요. 그 아이가 자다 말고 일어나 물을 뜨러 다녀오거든요.”
그러니까 말은 역시 침아 자랑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인간의 아이는 료를 저 없으면 못 살게 만들어 놓았나 보다. 하물며 물맛으로까지 길을 들였다 하니.
“호오, 꽤 가상한 일을 하는구나.”
“할머님께서도 예서 지내실 때에는 그 물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청작에게 미리 말한다는 걸 자꾸 잊다가 이제서야 생각했습니다.”
“청작에게 굳이 말할 것은 무어냐? 날 그리 생각해 준다면 침아에게 너희 쓸 물을 뜰 때 내 물도 좀 길어다 주라 하면 되지.”
“어……하지만 그래서야 물 뜨다가 잠이 다 깨고 말 텐데요. 그 샘, 물이 솟아나오는 수준이 더디기 짝이 없거든요.”
“그리 걱정이면 네가 같이 가서 옆에서 어깨라도 빌려주지 그러느냐? 물이 알맞게 찰 동안 눈이나 좀 붙이라고. 이럴 게 아니라, 네가 이름을 바꾸어야겠다. 베개였던 아이랑 인연을 맺었으니, 너도 이제부터 침료라 부르는 게 어떠하냐?”
“예?”
대놓고 놀리는 소리에 화산 노파 주위의 시녀들이 고개를 돌리며 킥킥거렸다. 료가 매섭게 쏘아보는 시선에 시녀들이 뜨끔하여 발 밖으로 총총히 물러나긴 하였으나 나가면서도 서로의 어깨며 팔을 두드리며 웃는 기척을 료가 모를 리 없다.
“할머님께서도 참. 침료가 뭡니까, 침료가.”
내가 무슨 소리를 했냐는 듯이 차를 후후 불어가며 마시던 화산 노파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언제 네게 해로운 소리를 하더냐. 그 아이가 찬 이슬 밟고 물 뜨러 다니는 게 걱정이 될듯하여 같이 가게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었더니, 싫다면 관두려무나.”
“세우지 뒤면 저택에서 지척인데 걱정은 무슨…….”
“요새 저택에 든 자 중에 사내가 몇이나 되는지 내 잘 기억은 안 난다만. 개중에 바지런한 아침 새들도 더러 있지, 아마? 아침이면 세우지에서 멱이나 안 감는지 모르겠구나.”
난씨네 자매의 시종들을 넌지시 가리킨 말에 료가 눈썹에 힘을 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안 그래도 저 역시 한 번은 따라가 볼까 했습니다. 원추리를 어디서 뜯는지도 궁금했었고…….”
“원추리? 그건 무슨 이야긴고?”
“아, 제가 잠에서 깨면 침아가 꼭 물을 한 잔 올려주는데요, 요즘 들어 조금 운치 있는 장난을 하거든요. 빨리 마시다 체하지 마시라면서 원추리 이파리를 띄워서 준답니다.”
료는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갔다.
“그렇다고 할머니, 제가 어린것처럼 허겁지겁 물을 마시는 것도 아니에요. 그 아인 가끔 그렇게 엉뚱한 장난을 치는데, 제가 잠자코 받아주는 것이지요.”
“원추리 이파리를 물에…….”
화산 노파는 잠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숙이며 찻잔을 내려다보면서 가만히 찻잔 부리를 엄지로 만졌다. 독성이 있다면 있는 식물이지만 료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독성이 료에게 아무 해가 없다는 것도 침아라면 알 것이다. 그들의 일족이 무엇인가. 짐새다. 완전히 자란 짐새는 살무사의 독으로도 해할 수 없다. 적어도 이쪽 대륙을 통틀어 독으로는 적수가 없는 존재이다.
화산 노파도 그런 일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원추리는 달리 부르는 이름이 망우초(忘憂草)라는 것이 언뜻 신경이 쓰였다. 망우초. 근심을 잊게 하는 풀이란 뜻이다. 화산 노파는 원추리꽃이 만개했을 무렵에 얽힌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옛날에, 혼자 속을 끓이다 삼키고 만 자그마한 실연의 기억. 그때 그녀는 밤마다 원추리꽃을 베개맡에 놓고 자며 한 가지를 빌었었다.
‘오늘은 어제의 절반만큼 좋아하고…….’
연정의 크기를 실제로 가늠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게 말로 속박하여 연정을 덜어본 것이다. 보름날부터 그믐날까지 계속된 그 작은 주술은 효력을 발휘했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어설픈 마음이었던 거지만.
아직 원추리꽃이 필 시기는 아니다. 원추리 잎만으론 별 의미도 없다. 하지만 주술에서 중요한 것은 속박 짓는 ‘말’과 ‘진심’의 위력이다. 그 침아를 생각하면 별스럽게 반응하는 자신이 우습다 싶지만 그래도 화산 노파는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 물을 올려준 지는 얼마나 되었니? 그 왜, 원추리 이파리 말이다. 매일같이 띄워주느냐?”
“돌아와서 한증(寒症)으로 이틀간 앓아누웠다 깬 뒤로는 매일이지요. 며칠이나 되었지? 오늘로 이레째인가? 어찌 그런 걸 궁금해 하시는지요?”
“왜 궁금하긴 별나다 싶어서 그렇지. 내가 발견했지만, 참 별난 아이 아니냐?”
“별나지요, 별나요. 하하하, 이젠 당연하지 하지만요.”
마냥 즐겁게 웃더니 료는 아까 그 고생을 하고도 또 인절미를 집어 들어 맛있다고 얼굴에 온통 드러내며 먹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그냥 보기만 해도 아깝지만은 화산 노파는 어른이다 보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그 아이를 처로 받아들일 작정이냐?”
“작정인 게 아니라 이미 제 처입니다.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씀만 올리라고 부탁했는데요.”
청작은 그런 임무를 받아 저택을 비운 지 꽤 됐다.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종작없이 저 가고 싶은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버릇이 있는 휼을 찾으려면 청작이 고생깨나 할 것이다.
“제대로 된 단계를 너무 무시하는 것도 좋지 않다, 료야.”
“음양의 화합에 이런저런 단계는 다 요식행위입니다. 태초의 혼돈이 하늘하고 바다로 갈라질 때 대체 누가 있어 그 둘을 나누는 단계를 감독했다 합니까?”
사뭇 반항적인 신진이다. 물론 그 활기는 보기 좋다. 게다가 자신은 정실은 얻지 않는다며 딱 잘라 말하던 전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제 침아가 제 처라고 우기는 모습이 자못 귀엽기까지 했다.
외유에서 돌아와서 이틀 동안 침아가 아파서 저도 혼을 쏙 빼놓고 있더니 낫기 무섭게 침아를 데리고 화산 노파에게 문안을 와 제 처의 절 받으시라 하고는 이제 절값으로 덕담을 해주시라고 득의양양하게 졸라대던 그때부터 화산 노파는 료가 너무도 귀여워 부정적인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침아가 인간이라 그런 일에 구애를 받는 듯해서 나름대로 중신아비도 세웠습니다. 거리낄 것 따윈 없어요.”
“응? 그래, 중신아비가 있었더냐? 설마 우송이라 하지는 않겠지?”
“설마 우송이겠습니까? 적어도 만고불변의 존재는 되어야 중신아비 자격이 있지요.”
“만고불변까지야……. 허헛. 그래, 그 대단한 분이 뉘신고?”
“달입니다. 그날 밤 본 보름달이 제가 보아온 중에 가장 빛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 제 기분이겠거니 하지만, 뭐 기분이라도 어딥니까?”
방싯 웃더니 료는 천연덕스레 인절미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고물이 묻은 입술을 툭툭 터는 고운 얼굴은 맑고도 그늘이라곤 없다. 화산 노파는 어쩐지 기운이 빠져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우송이라 둘러댈 것이지…….”
“그 어린것한테 중신을 서달라는 건 아무리 저라도 못할 짓입니다.”
“그래서 입도 없는 달한테 중신을 서 달라 강짜를 부렸누?”
“강짜 따윈 부리지 않았어요. 마음으로 정중히 청했습니다.”
료는 너무도 진지하게 대꾸했다. 아아, 이 어린 걸 어쩔꼬, 하며 화산 노파는 다시금 한숨이다. 하지만 생각하자니 웃음이 나왔다.
“만에 하나 휼이가 그런 혼인은 인정 못한다고 답을 해오면 어쩔 셈이냐?”
“그거야말로 설마이지요. 아버님께서 자신의 일이 아닌 일에 관심을 가지실 리 없잖습니까?”
“자식의 일이다. 난씨 가문과의 혼사는 나 혼자 추진하는 줄 알았더냐?”
“아버님의 벗을 통해 말이 오간 것 아닙니까. 벗이 그리하자 하니 한 것이지 아버님께선 휘 형님의 두 번째 갑년이 오는지 가는지도 몰랐을 분입니다.”
사실이다. 청작이 말은 했을 것이나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 분명하다. 휘의 아비 휼은 그런 사내다.
그것이 료의 일이 되면 어떨까. 역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겠지. 인간을 처로 맞아? 얼마나 예쁜 아이길래? 하고 물어올지는 모르겠다.
화산 노파는 이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도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 되어버린다. 자포자기는 아니다. 다만 료가 이리도 밝은 모습을 그녀가 이제껏 본 적이 없기에 적정선에서 단념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소실로 두어도 그 아이, 크게 불만을 내지는 않았을 텐데. 설마 첩은 싫다고 제 입으로 말하더냐?”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료를 설득해 보려 했다. 료는 입을 헹구려고 물을 마시곤 미간을 찡그리며 사발을 멀찍이 밀어 놓았다.
“제가 그리 해주고 싶어 그럽니다. 어차피 비워둘 자리인 정실이란 자리, 그 애에게 주는 것쯤 무에 어렵겠습니까?”
“그 애는 너보다 훨씬 일찍…….”
“압니다. 그래서 살아보려고요.”
화산 노파가 하려는 말을 가로막듯이 료가 싱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살면서 정이 더 깊어질지 어느 순간 빛바랠지는 아직은 모를 일이지요. 더욱 도타워질 거라 믿고는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 기이한 하늘의 뜻으로 환생이란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 아이를 다시 찾기를 바랄 수도 있고 혹은…….”
말끝을 흐리며 료는 창살 너머의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하려다 삼킨 말이 무엇인지 화산 노파는 궁금했다. 설마, 하고 떠오른 것이 있긴 하였으나 말 그대로 설마, 였다. 그 꺼림칙한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젓고선 화산 노파가 말했다.
“답청 이야기나 하자꾸나. 침아 그 아이, 놀러 갈 생각에 벌써부터 들떠 있던데.”
“아아, 그냥 그 애는 밖에 놀러 다니는 자체가 좋은 거예요. 새로운 나무며 꽃을 보면 그게 그리 마냥 좋은 모양입니다. 애도 아닌데 무슨 기운이 그리도 왕성한지 모르겠습니다.”
사흘 후, 중오절3) 날로 예정을 잡은 답청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이윽고 료가 저녁을 들 때 침아와 함께 건너오겠다고 하고 일어서는 것을 화산 노파는 잠시 불러 세웠다.
“그 원추리 잎을 띄운 물이란 거 말이다. 내일도 준다면 재주껏 건너뛰어 보거라.”
“예?”
“마시는 척하고 아니 마실 방법을 찾아보란 뜻이다. 그 아이에겐 굳이 이야기 꺼낼 건 없고.”
료의 의아한 눈에는 어째서 그래야 하냐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화산 노파가 별달리 이유를 말하지 않자 료도 잠자코 어깨를 들썩이며 큰 숨을 내쉬고는 선뜻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할머니, 그건 아셔야 해요. 그 아인 제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알고 있다.”
화산 노파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료도 따라서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진하지만 속이 깊다. 어쩌면 속이 그토록 깊기에 누구보다도 순수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는 화산 노파에게 료는 웃는 얼굴로 저녁에 오겠다고 말하며 돌아갔다.
잠깐 떨어져 있었다고 그새 그 아이가 보고 싶어지기라도 했는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빠른 료를 창살 너머로 내다보며 화산 노파는 중얼거렸다.
“때로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하는 일이 정작 당사자에겐 다를 수도 있어…….”
그러다 안쪽으로 돌아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필경 내 공연한 오지랖이었을 것이야. 아무렴, 그 아이가 료에게 주박을 걸 이유가 없지.”
다시 탁자 있는 곳으로 간 화산 노파는 아직 꽤 남은 인절미 접시를 내려다보며 하나를 들어 맛을 보았다. 퍽 맛이 좋았다. 둘이 사이좋게 떡도 만들고. 정말로 어린것들은 하는 짓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화산 노파는 웃었다.
료가 화산 노파에게 떡을 드리러 간 사이 침아는 남서쪽 난씨 자매의 거처에 갔다. 이제 그런 일을 그녀가 직접 하고 다닐 것 없다며 료가 우송에게 다른 시종을 불러오라 시키는 것을 침아는 이번만이라면서 료를 달래고 제가 직접 갔다. 청작이 오면 당장에 그녀에게 시녀를 붙여주겠다는 소리에 며칠이나 쓰려고 그러느냐 가볍게 면박을 주었다. 침아의 말이 나름 옳았다. 일단은 청작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료는 침아와 본격적인 여행길에 오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둘만의 여행길. 젊은 오누이처럼, 혹은 젊은 형제간처럼, 혹은 젊은 부부간처럼 서로에게 의지해 세상을 구경하고 다니는 길은 아마도 재미날 것이다.
잠시 료가 그리는 꿈을 저도 그려보면서 침아는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무심코 걸음도 멈추고 있었는데, 햇볕이 뜨거워 언뜻 정신을 차렸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백은색의 해가 유난히 쨍하다. 날은 확실히 여름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어느새 오월 초이틀인가.”
답청을 간다는 음력 오월 오일까지는 사흘. 보름이 돌아오기까지는 열사흘이 남았다.
볕 속에 서 있지만 침아의 눈에는 그늘이 서렸다.
입술 끝을 말아 올려 억지 미소를 짓고 이어서 눈에도 살풋 웃음기를 더하고서 침아는 다시 걸어갔다.
뜰에 나와서 한담을 나누는 이들은 가선을 모시는 시녀들 몇이었다. 가진은 지난 이틀간, 저택에만 있는 게 답답하다며 제 시종들을 데리고 휙하니 어딘가로 날아갔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돌아온 터라 아직도 세상모르고 잔다고 하였다.
가선은 누마루에 올라 서책을 보고 있다는 소리에 침아는 뒤꼍으로 돌아갔다. 어딘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얼마 안 가 책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가 그녀를 인도했다. 정의 목소리임을 단박에 알아본 침아는 발소리를 조심하여 걸어가면서 그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침아가 누마루에 다 오르도록 두 주종은 세상모르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독서삼매경인 자는 정일 것이고, 가선은 아마도 정의 목소리와 부채질에 빠져 있었다 할 것이다.
책을 읽는 한편 다른 손으론 가선에게 가만가만 부채질을 해주는 정의 곁에서 가선은 사방침에 기대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따금 정의 낭랑한 음송에 맞추어 까딱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통해 드러났다.
방해하기 곤란할 만큼 친밀한 공기다. 침아는 특히나 정을 곤혹스런 눈으로 응시하다가 가져온 떡을 내려다보고는 쓰게 웃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책장을 넘기며 무심코 고개를 들다 침아를 발견한 정이 먼저 알은 체를 해주었다. 침아는 상그레 웃으면서 활기차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기로 오면 뵐 수 있다고 시녀분들이 말해 주셨어요. 《묵자》를 읽고 계십니까? 제 주인께서도 여러 번 읽어주신 글인데, 반갑네요.”
일어나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가선이 온화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직도 주인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겐가? 이제부터는 달리 부르셔야지.”
원래 침아에게 하대하던 것을 반공대로 옮겨간 것이 능숙도 했다. 벌써 제 동서라도 되었다 여기는 건가 하고 속으로 조소하면서도 침아는 어렵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낯빛을 지었다.
“워낙 버릇이 되어 그렇습니다. 오늘 떡을 좀 만들어 보았습니다. 변변찮은 솜씨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인절미 정도입니다. 제 솜씨보다, 오늘 메를 잡아주신 분이 제 주인……, 저희 나리시니 별미로 여기셔도 좋을 것입니다.”
“메를 잡다니, 내가 제대로 아는 게 맞나? 메라면, 그 떡메 말하는 것 아닌가?”
가선이 정을 돌아보며 묻자 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씨. 떡을 치는 그 메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어머, 료 공자님께서 직접 그 메를…….”
하도 의외인지 가선은 그만 본심을 드러내며 풋, 하고 경멸하듯 웃고 만다. 침아는 눈을 내리깔고 못 본 척하였고 가선도 정이 옆에서 부채를 건네는 것을 받고 약간은 뜨끔하며 얼굴을 가리고 웃음소리를 삼켰다.
“작은도련님이 다정하다 하신 언니 말씀이 참으로 옳아. 하지만 자네도 참 대단도 하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인으로 모시던 분의 당당한 처가 되시지 않으셨나? 또 며칠 만에 지아비께서 자네가 떡 하는 수고를 아까워하여 떡메까지 잡아주시고. 어떤 식으로 극진히 모셨기에 그처럼 아낌을 받으시는지 고향에 있는 오경이도 사뭇 궁금해 하겠어. 아, 오경이라고 내 고향에 있는 남동생을 모시는 몸종이라네.”
굳이 고깝게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충분히 고까운 내용이었으나 침아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다만 천진하게 물었다.
“오경이라는 분은 새이십니까?”
“오경이는 금계 일족이지.”
“금계라면 퍽이나 고우시겠습니다.”
“아주 어여뻐.”
“성격은 좋으시고요?”
“착하지, 말수도 적고. 심성이 약해서 잘 놀라고 잘 우는데 남동생은 그게 몹시 예쁜 모양이야.”
“그럼 굳이 제게서 배울 게 아니라 그 도련님 성품에 달린 일이겠습니다. 착한데다 어여쁘기까지 한 새라 하니, 그 주인 되는 분이 저희 나리 발톱만큼만 성실하셔도 평생 좋은 짝이 되어주시겠지요.”
부채 너머로 가선이 뜨악한 눈빛이 되었다.
“발톱만큼?”
“저는 성품도 별로고 어여쁘다고는 말할 수 없고, 하물며 인간이지요. 그런데도 이리 아낌을 받는 것은 오로지 저희 나리가 지극히 상냥하시기 때문이니까요. 세상에 저희 나리만큼 상냥한 사내가 달리 몇이 있을지,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글거리는 침아를 보며 가선은 반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왜 당장 이 저택 안에만 보아도 달리 계시지 않는가.”
“이 저택 안에요? 아씨께서 그리 장담하시는 걸 보면 잘 아는 분이실 테고……아, 그렇구나.”
그러면서 침아는 고개를 갸웃하였다가 정을 돌아보았다.
“몹시 상냥하신 모양이지요?”
정은 느닷없이 자신에게 향한 말에 눈을 깜박이며 난감해했다. 가선이 머리를 내저었다.
“휘 공자님 말일세.”
“큰도련님이요?”
가선과 달리 침아는 벌린 입을 가릴 생각도 않고 아하하,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그분이야 상냥하신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다정하신 거지요. 북쪽 후원에 계신 여자분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제 마당에 온갖 꽃을 다 가지고 싶어 하는 사내가 어느 꽃인들 살뜰히 보살필 수 있겠습니까?”
가선은 할 말을 잃었다. 침아는 언뜻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그러니 저희 나리가 다정하다는 말씀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희 나리는 어디까지나 ‘상냥’하신 분이랍니다. 가진 아씨께도 언제 한 번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그러더니 생글 웃고는 떡이 담긴 소반을 살짝 더 앞으로 밀었다.
“감히 바라건대, 드시는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만. 제가 만든 것이라면 아니 드시고 아랫것들에게 내리셔도 좋으나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나리의 공도 들어간 것이라서.”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에 정이 움찔하였다. 그 교묘한 화재가 났던 밤에 그가 동쪽 채로 심부름을 보낸 여자에게 몇 번이고 주의를 준 말이었다. 반드시 먹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괜찮다면 제가 먼저 먹어보겠습니다. 아씨께선 다소 비위가 약하시어 쉬 음식을 드시지 못하는 터라.”
정이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서자 침아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손을 뻗어 권했다.
“얼마든지요. 그런데 아씨를 위해 음식 맛도 챙겨주시는군요. 아까 대답은 않으셨으나 정 님도 상냥한 사내 범주에 넣어도 충분하겠습니다, 아씨.”
가선이 굳이 입을 열 가치를 못 느껴 미소만 짓는 가운데 정이 인절미를 들어 천천히 맛을 보았다. 그냥 떡이었다. 차지고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꽤 일품인. 정이 가선에게 말했다.
“드셔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니까요. 아, 하나만 드시지 마시고, 하나 더 드세요. 아씨도 어서. 저번에 아씨께서 만들어주신 화전이며 유밀과를 제가 얼마나 잘 먹었는데요. 자, 자, 변변찮은 솜씨라고 겸손은 떨었으나 제가 실은 이걸 잘 만든다니까요.”
끝내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침아가 덥석 인절미를 집어 베어 먹으며 제 솜씨에 도취해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정도 비로소 안심이 되어 하나를 더 집었고, 가선에게 눈으로 권유하자 가선도 마지못해 떡을 하나 들었다. 먹어보니 과연 맛이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가선은 침아가 보는 가운데 떡을 세 조각 들었다.
잘 먹겠다는 그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침아는 빈손을 나풀거리며 누마루를 내려갔다. 위가 잠잠하다 했는데 다시 정의 음송(吟誦)이 시작되었다.
《묵자》라. 철부지 주인에게 그런 책을 읽어주는 정의 노력에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며 침아는 걸음을 옮겼다. 정의 나지막한 듣기 좋은 목소리도 멀어지고 다시 햇볕 속을 지나며 침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꽃을 솎으려 해도 비바람을 가려준 울타리가 탄식할까 근심이네.”
다른 나비와 희롱하는 꼴을 보면 그 마음, 모질게 돌아설 법도 하다 생각했는데. 혹시라도 침아가 먹을 것에 무슨 수작을 부렸을까 가선의 안위를 근심하는 마음이 빤히 읽혀 보기가 안쓰러웠다.
정말 가선을 해치려고 들자면 제 몸을 희생해도 기꺼워할 자. 그리 죽기를 원한다면 그건 그의 사정이다. 하지만, 그가 죽는다고 가선이 그 마음을 알아주기나 하랴?
지극한 마음.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의 그런 마음을 다치는 일만은 않고 살리라 믿었으나……. 이래저래 미안할 일을 만드는 것인가 싶어 침아는 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정말로 단순한 것만을 원하는데, 어찌하여 그 길에 걸리는 것이 자꾸 나타날까? 상황이 문제인가, 그것이 보이는 자신의 눈이 문제인가?
침아는 알 수가 없어 재삼 한숨이다.
인연을 짓는 거미라는 것이 있다 한다면, 그 거미, 어린 암컷이 아닐까 한다. 저 가선처럼 철없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휘젓고 다니는.
“벌써부터 해 떨어지라고 그리도 한숨을 쉬어대는 거냐?”
툭 하니 던져대는 여유로운 말투에 침아는 속으로 뜨끔하여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붕 위에 앉은 채로 휘가 부채를 부치면서 웃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구나.”
그러면서 뭔가를 오물오물 먹는다. 침아는 부러 표정을 풀지 않고 어조까지 무겁게 끌고 갔다.
“……보내드린 인절미를 드시고 계십니까?”
“그래. 우송이 가져왔더구나. 기왕이면 네가 오지 그랬느냐?”
침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아서서 걸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해본 소리다. 그렇게 했다간 료가 눈에 쌍심지를 켰겠지.”
거의 소리조차 없었는데 어느새 휘는 그녀의 옆을 걷고 있었다. 떡을 마저 먹더니 입술을 할짝거리며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맛이 꽤 좋다. 나는 입에 들어가는 걸 잘 만드는 암컷도 좋아하지.”
“잘하는 건 그것 하나입니다.”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냐?”
“매번 그 하나만 드시다 보면 그런 소리도 안 나오시겠지요. 또 인절미냐? 네가 잘하는 거라고 해봤자……타령이나 하시겠지요.”
“하하, 료가 그런 소리를 했나 보구나? 뭐 성격이 유들유들한 것과는 거리가 머니 입 꾸밈 소리엔 재주가 없긴 하겠지. 그런 재미없는 녀석이랑 살면서도 아직 재치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네가 참 대견하긴 하다.”
툭,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침아는 바로 옆으로 떨어져 걸었다. 시선도 마주하지 않고 대꾸조차 없다. 휘가 미끄러지듯 빠른 움직임으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어냐, 새삼 긴장하긴.”
“아무나 오가는 길입니다. 이리 무턱대고 말을 걸어오시면 곤란합니다.”
“료? 그 녀석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내 백 보 밖에서 듣고 말해 주지.”
“제 주인 발자국 소리를 알기나 하십니까?”
“모를 것 같으냐?”
“예, 그리 보입니다. 조금도 미덥지 않아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휘를 쏘아 보았으나 휘는 오히려 웃었다. 웃으며 침아의 턱을 들어 눈을 맞춰왔다.
“겨우 열여섯 살 계집애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도 괘씸하질 않으니, 네 재주가 참 각별하다. 그 목소리에 마력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역시……이 좋은 향기에 내 넋이 반쯤 나가 뭐든 용서해 주고픈 마음이 드는 것일까?”
휘가 침아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이며 향을 들이마시는 모습에 침아는 손을 들어 그를 밀쳐내려 했다. 그 손목을 휘가 잡았다. 꽉 쥔 손목에서 전해져 오는 맥박이 거세기 짝이 없다. 붉어진 그녀의 볼이며 유난히 반짝이는 눈을 보며 휘가 중얼거렸다.
“몸은 이리 솔직하면서, 말로는 모난 소리를 하는 게 버릇이 들면 곤란한데. 하긴 이제 곧 네가 날 미더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겠지.”
그녀의 반응을 강렬한 끌림의 반증이라 해석한 것이 틀림없다. 침아는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문득 요염하게도 눈웃음쳤다.
“답청에서 돌아오면 제 주인은 절 데리고 떠나실 겁니다. 그러면 저도 그것을 제 운명이라 여기고 살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제 주인을 퍽 좋아하거든요. 지난 외유 동안에 조금 더 좋아진 것 같고요.”
반짝이는 눈은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맹금으로서의 사냥 본능이 끓으며 휘의 질투심을 부채질했다.
“과연 어리구나. 살을 섞은 자에게 생기는 친밀함과 연정도 구분 못하는 걸 보니.”
“연정은 제 주인이 제 몫까지 넘치게 가지고 있는 걸요.”
야릇한 말투에 또 욱할 뻔했던 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춘사(春思)에 얽힌 일이라면 이미 살아온 햇수에 육박할 만큼 이골이 나게 겪어온 그가 어찌 갓 꽃봉오리를 틔운 열여섯 인간의 계집에게 매번 무너진단 말인가? 너무 끌려가는 것은 좋지 않다. 슬슬 중심을 이쪽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휘는 잡고 있던 침아의 팔을 다소 쌀쌀맞게 놓았다.
“네 묘한 장난기도 슬슬 재미가 없구나. 아무래도 나 역시 생각을 달리 해봐야겠다.”
침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찌하나 보려고 휘가 먼 곳을 보고 섰는데 침아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꾸벅 인사만 하고 다시 제 갈 길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저리 맹랑한……!”
이 또한 저 아이의 줄다리기 장난인가 싶어 버티고 있자니 침아는 그대로 멀어져 갔다. 햇살을 받은 노란 저고리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 마치 휘를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배짱이냐? 네 정말 이젠 둘 중 아무라도 좋다 생각이라도 하는 게냐?”
달려간 휘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비트니 침아는 눈을 내리깐 채로 침착하기 짝이 없게 말했다.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만, 그 기회 놓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은 하루에도 백 번도 넘게 합니다. 머리로 옳은 짓이 아니라 하는데 마음만 움직여 이러는 것이 나쁘다는 생각도 백 번도 넘게 합니다. 그러니……멋대로 하셔요.”
힐끗 그를 올려다보는 침아의 눈에 원망이 서렸다.
“이러니 미덥지 못할 밖에요.”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을 홱 뿌리치고 침아가 달려갔다. 휘는 동요했다.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천부적인 자질을 갖춘 게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침아를 돌아보며 휘가 소리쳐 불렀다.
“침아야!”
저만치 달려가던 침아가 멈칫하며 섰다. 빠르게 그 뒤를 따라가면서 휘가 말했다.
“이미 낭자에게는 이야기를 해놓았다. 그 목적지도 그 아이 입에서 나왔어. 네 그런데도 나를…….”
휘가 말을 미처 다 하지 못한 것은 침아가 뒤를 돌아보며 그만두라는 신호를 뚜렷하게 보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거의 가까워졌던 휘는 반대쪽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를 보고 속으로 뜨끔했다.
료가 오고 있었다. 백 보 밖에서라도 발자국을 알아듣겠노라 한 휘의 말은 과연 허언이었다.
“예서 무얼 하는 게냐? 휘 형님과 네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더냐?”
침아의 곁으로 다가온 료는 휘를 쳐다보면서 질문은 침아에게 했다. 그녀에게는 들려준 바 없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였다.
“우송 아저씨 편에 큰도련님께 보내드린 인절미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잘 받아서 드셨다고.”
침아, 생각보다 배짱이 두둑했다. 생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료에게 둘러대는 모습에 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내가 언뜻 들은 이야기는 그렇지 않았어.”
여전히 휘를 쏘아보면서 료는 침아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새삼 생각하지만 성격 고약한 녀석이라 여기며 휘는 부채를 펴서 유유히 부채질을 했다. 침아만 한 배짱이 그에게는 없을 리 없다.
“무슨 이야길 들으셨는데요? 그리고 저는 여기 있거든요? 제대로 절 보시면서 말씀을 하셔야지요.”
하지만 그렇게 묻는 침아의 배짱이 한 수 위라는 것에 휘도 동의했다.
“무슨 이야기긴, 낭자에게 이미 이야기를 하였다고……무슨 짓이냐?”
말하는 료의 입을 침아가 덥석 틀어막는 바람에 료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움켜잡았다. 침아는 그에게 바짝 다가서며 속삭였다.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다만 다른 곳에서. 어, 근데 이건 무엇입니까?”
침아가 휘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눈알을 굴리더니 료가 손에 들고 있던 낯선 것을 보고 화제를 바꾸었다. 료의 손에는 금술이 달린 파란 비단으로 싼 공이 들려 있었다.
“보는 대로 놀이공이다. 날이 조금 습해지니 창고의 물건들을 바람에 말린다고 내어놓았더구나. 지나다 보니 눈에 띄어 가져왔다. 내 어릴 적에 몇 번 가지고 논 적이 있는 것이라.”
그리 말한 료가 휘를 보며 그제야 아는 체를 했다.
“형님께도 아주 낯설지 않은 물건이실 텐데요.”
“나? 나는 이런 공을 가지고 논 적이 없다만.”
힐끗 공을 쳐다본 휘는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이 부채를 접더니 침아를 보며 말했다.
“아무튼 인절미는 잘 먹었다. 앞으로도 종종 부탁한다, 아이야.”
툭 머리를 두드려주려는 것을 야멸치게 밀쳐내는 손이 있었다. 료가 날이 새파랗게 돋아난 게 보이지 않을까 싶은 말투로 딱딱댔다.
“주변에 듣는 귀가 없으십니까? 이 아인 제 처가 되었습니다.”
“아. 너 혼자 그리 우기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허락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
“흥. 그처럼 경우가 바른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네가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왜 나를 탓하느냐? 아아, 날이 참 좋다. 오늘은 뉘와 함께 풍월을 읊어 볼까나?”
능청맞게도 말끝을 잡아 빼면서 휘는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다가 훌쩍 지붕으로 솟구치더니 이내 료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료는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침아를 돌아보며 서슬 퍼런 눈을 빛냈다.
“저자와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대체 무어냐?”
“돌아가는 길인데 불쑥 지붕에서 뛰어내리시는 걸 어찌 피합니까? 저는 날래긴 하지만 지붕은 못 걸어 다닙니다.”
침아는 파란 공을 이리저리 쳐다보고 땅에 튀겨보기도 하면서 말했다. 료는 약이 바짝 났는데 그녀는 태평하기 짝이 없어 더 화가 나 료가 그 공을 빼앗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물었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침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료에게 가까이 오란 시늉을 하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가선 아씨 이야기였습니다.”
“가선? 첫째?”
“아니요, 둘째. 아직도 이름을 못 외우셨습니까?”
“그러니까 관심이 없대도. 아무튼 그건 왜?”
침아는 더더욱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큰도련님께서 그 아씨와 밤이슬을 밟으셨습니다.”
“밤이슬?”
돌려 말했으나 알아듣지 못한다. 침아는 아예 그의 귀에 입술을 대고 이러쿵저러쿵 말했다. 그제야 료가 으응?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혼담은 첫째랑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니 말이지요. 가진 아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이신데.”
“둘째란 여자 맹랑도 하군. 언니 짝이 될지도 모르는 자와 무슨 짓을……. 그런데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게야?”
“물 뜨러 다니던 중에 두 분이 몰래 만나는 것을 보고 말았지 뭡니까. 안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큰도련님 눈치가 보통이셔야 말이지요.”
“나 참. 그러니까 혼자 어두울 때 나다니지 말랬지 않느냐.”
혀를 찬 료가 그녀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침아는 몹시 아프단 듯이 머리를 감싸며 그에게서 공을 도로 가져갔다.
“누가 그런 걸 보자고 물 뜨러 다녔습니까. 근데 더 문제는 큰도련님이 둘째 아씨랑 그런 일을 하시고도 혼사 생각은 없으시다는 겁니다. 정실은 첫째 아씨로 할까 그러고 계시지 뭐예요.”
“충분히 그럴 만한 녀석이다.”
“그래서야 첫째 아씨가 불쌍하지요. 몇 번 뵙지는 못했으나 첫째 아씨 품성이 가볍긴 해도 둘째 아씨에 비해서 월등히 나으십니다. 둘째 아씨만 해도 보세요. 빤히 언니를 두고 같은 저택 안에서 대체……. 아아, 그래서 제가 화산 어르신께 첫째 아씨를 주인님 짝으로 맺어 달라 부탁드렸건만. 아야, 왜요, 또?”
또 머리에 꿀밤을 맞은 침아가 울상이 되었다. 료는 딱 부러지게 못을 박았다.
“애초에 그 자매 따위 눈여겨본 적도 없다. 내 짝은 너야.”
침아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볼 뿐이다. 료는 너무 세게 때렸나 싶어 그녀의 머리를 문질러주다가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다른 녀석들 일 따위 알게 무어냐. 괜스레 그런 일에 코 빠뜨리고 다니지 말거라. 앞으론 휘가 치근대도 피해. 아예 소리쳐서 날 불러라. 알겠지?”
“아하하, 정말 그러면 그 모습 작히 우습겠습니다.”
“아니면 정말 내 팔에 끈이라도 매어 묶고 다니랴?”
“에그, 그런 건 싫습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침아가 공을 내려다보더니 다시 호기심을 보였다.
“이 공은 무슨 공인데 큰도련님도 아실 거라 하셨습니까?”
“아. 내가 어릴 때 어떤 여자한테 받은 거다. 북쪽 후원에 잠깐 머물다 간 인간 여자였지.”
“인간……여자? 그때가 정확히 언제쯤인데요?”
“글쎄. 내가 아직 물색 모르는 애였을 때니 사십 년 가까이 된 일일까.”
“이름이……이름이 어찌 되는 여자였습니까?”
“그런 건 기억나지 않아. 언젠가 네게 말한 적 있지 않나? 아주 잠깐 머무르는 사이에 말라 죽어가던 여자가 하나 있었다고. 휘가 그렇다니까. 감언이설로 꾀어다 놓고 아니다 싶으니 또 돌려다 놓았겠지. 지금은 이미 죽었겠구나.”
침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공을 들여다보던 침아는 그 공의 금술 부근을 감싼 파란 비단에 금실로 수놓인 글자를 발견했다. 완(婉).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불현듯 현기증을 느껴 침아는 곁에 있던 료의 품에 기대섰고 료가 의아해할 틈도 없이 그를 꽉 끌어안았다.
“주인님, 저 해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어쩐지 목소리가 떨려 침아는 웃음을 짓기가 힘들었다. 료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데?”
“날고 싶어요, 주인님이랑.”
“날아?”
고개를 든 침아가 료를 향해 웃었다.
“날아요, 우리.”
곧 세우지 일대를 거슬러 운몽산의 안개 낀 산봉우리 주변을 나는 커다란 검은 새가 있었다. 아직 환한 낮, 인간들의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니 한 건 아니지만 료는 침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커다란 짐새의 거친 날갯짓 소리도 그렇고, 높은 상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 무서울 법도 하건만 그의 발톱에 몸을 맡기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침아의 입에서는 즐거움 가득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빨라요, 주인님, 정말 빨라요!”
“아, 미안. 무서우냐?”
“아니오, 좋다구요! 주인님, 구름 위로 날아가 봐요, 구름 위로요!”
“숨쉬기가 힘들어지면 말해라!”
겁은 료가 내고, 정작 침아는 시종일관 웃고 떠드느라 바빴다. 오죽하면 료가 불평을 다 했다.
“누가 보면 네가 새고, 내가 인간인 줄 알겠다!”
“그러면 안 되죠! 주인님은 무거워서 제가 데리고 못 날아요!”
하여간 엉뚱한 소리를 하는 데는 두 손 두 발 들었다. 얼마쯤 날다 보니 료도 즐거워져서 더 멀리 날아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하늘 위의 공기는 아래와는 또 다르다. 찬 공기를 쐬어 또 침아가 아플까 더럭 겁이 난 료가 아래로 내려가자 침아는 좀 더 날자며 성화였다.
“안 돼,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그럼 내일 또?”
“너 하는 거 봐서!”
“아하하하하, 잘할게요! 세상에 온통 주인님 하나뿐인 것처럼 잘할게요!”
“그거야 당연한 소리잖아!”
면박과 함께 료는 세우지를 기착지로 삼아 내려갔다. 속도를 낮추는 선회의 동작 한 번 없이 쭈욱 미끄러지며 세우지로 거의 덤벼들듯이 빠져들었다. 굉장한 물보라가 일어나면서 햇살을 받는 부분에 크게 무지개가 어렸다.
그러나 그것을 미처 둘은 보지 못했다.
깊고 푸른 물속에서 료는 침아를 껴안아 입술을 겹쳤다. 그녀의 숨이 거북해질 만하면 료가 제 숨을 나누어 주면서 이어지는,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마침내 물 밖으로 둘의 머리가 솟구쳤을 때 료는 침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내일은 좀 더 멀리 데려가 주마.”
“오늘 하는 걸 봐서라면서요?”
“아주, 잘하고 있어.”
그러면서 료가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침아가 뒤늦게 아차 하며 숨을 삼키려 했을 때 료는 이미 그녀를 안은 채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무지개가 아른아른, 둘의 근처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지만 결국 둘에겐 시선 한 번 받지 못했다.
침아의 백 년 같은 하루가 시작된 일곱 번째 날.
칠백 년째의 오후가 뜨겁게, 세우지의 물속에서 흩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