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두 가지 눈물
초당의 지붕에 뚝뚝 빗물 듣는 소리가 단조롭다. 그러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이에게는 그것이 자못 고운 노랫가락과도 같이 들렸다.
가물거리던 눈이 점차 맑아지면서 침아는 허름한 벽이며 벌레가 먹은 낡은 기둥을 볼 수 있었다. 곧 그녀는 살짝 고개를 올려 비스듬히 왼편에 위치한 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단정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료의 맨가슴에 기대 있던 머리를 슬며시 들었다. 그의 몸을 반쯤 덮다시피 하고 엎드려 잤던 몸을 조심스레 옆자리의 빈 공간으로 내려놓으려는데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움찔 움직였다. 잠이 깬 줄 알고 침아는 찔끔 놀랐다. 하지만 깼으면 당장 뭐라고 말을 했을 료가 새근새근 숨소리만 내고 있다.
침아는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리면서 더욱 조심스레 같은 시도를 했다. 이번엔 료의 손부터 천천히 옆으로 치우면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침아는 바닥에 깔려 있는 담비 갖옷의 구김을 정리한 뒤 똑바로 위를 보고 누워 희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동안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여기가 무슨 산이라고 료가 말을 해주었던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 지세가 험하고 계곡이 깊어 말을 데리고 오면서 퍽 고생하였다. 깎아지른 듯 험한 절벽에 둘러싸인 곳에서 뜻밖에 버려진 초당을 발견한 것은 막 비가 듣기 시작하던 저물녘이었다. 원래 찾던 것은 동굴이었는데.
큰 비는 아닐 테니 하룻밤 묵은 뒤 계곡 구경을 하자고 한 료의 말대로 둘은 황폐한 초당을 대충 치운 뒤 산 아래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잠자리를 만들어 누웠다. 청작이 챙겨준 담비 갖옷 두 벌이 보료도 되고 이불도 되었으니 나름 선견지명이 있었다 할 것이다.
여느 때보다 일찍 누웠으니, 할 일은 하나뿐. 말에 몸을 싣고 올라온 침아와 달리 료는 내내 걸어 올라와 곤하기도 하였을 텐데 그녀를 갈구하는 몸짓은 기갈이 든 것처럼 뜨겁기만 했다.
침아가 산길을 올라와 몸이 편치 않다며 피로를 크게 과장한 바람에 료가 비로소 잠을 청할 결심을 했다. 그것은 오로지 료를 위한 거짓말이었다. 힐끗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침아는 엷게 웃었다.
“몸 생각도 하셔야지요, 벌써 며칠째입니까.”
나직이 중얼거린 뒤 침아는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처음에 한 며칠 바람이나 쐬자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덧 달이 바뀌어 버렸다. 달이 바뀐 것에 놀랐던 것도 잠시 며칠 전에 보름도 지나갔다. 그게 며칠 전이더라? 엿새? 이레? 아무래도 오늘 밤 달을 봐야 정확히 알 수 있지 싶다. 분명한 것은 저택을 불쑥 떠난 뒤로 한 달여가 훌쩍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길다면 긴 시간인데 그리 오래 나와 있었나 싶어 오히려 의아해지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단순한 일로 채워진 나날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은 인간 세상 구경을 하며 낮 시간을 보냈으나 료가 잠시라도 침아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곱게 보지 않아 결국은 잡아둔 객잔 방에 틀어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믐 무렵 객잔을 떠난 뒤로도 어디를 가던 마찬가지였다. 깨어 있을 땐 몸을 섞고, 배고프면 먹고, 곤하면 자고……그러다 깨면 또……. 그나마 몸이 편했던 때가 중간에 침아의 달거리가 있었던 때이니 말 다했지 싶다.
“시간 참 잘 간다.”
“비가 온다고 전에 없는 짓을 하는구나. 날 옆에 두고 혼잣말이라니.”
새삼 혀를 차보는 침아 옆에서 불쑥 료의 목소리가 들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 소리에 깨셨습니까?”
그리 크게 말했던가 하며 얼떨떨해하는 침아 쪽으로 료가 슥 팔을 뻗었다. 아까 그녀가 애써 빠져나온 그 팔이 다시 침아의 어깨를 그러안아 그에게 끌어당겼고 또 다른 팔이 허리를 붙잡아 올리면서 그녀는 료의 몸을 덮었다. 료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살금살금 고양이 짓을 하기에 소피라도 보러 가는 줄 알고 모른 척하였지.”
애초에 손이 움찔거릴 때 들켰던 모양이다. 침아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주무시지 않고 계셨던 것은 아니지요?”
“잤다. 아주 달게 잘 잤어.”
천천히 료가 눈을 뜨더니 침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이룬 잠을 네게도 얼마쯤 뚝 떼어주고 싶구나. 정말로 달았는데.”
“그리 주무셨다니 다행입니다.”
침아도 빙긋이 웃었다. 서로의 웃는 얼굴을 기분 좋게 바라보는 시간은 사내 쪽이 금세 다른 일에 흥미를 보이는 바람에 깨어졌다.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침아가 야단쳤다.
“이런 건 그만두시고 다시 주무셔요. 아직 바깥이 캄캄합니다.”
“밖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 너, 내가 깨워서 깬 것이 아니라 저절로 깬 것이지 않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나도 저절로 잠이 깼다. 그래도 네가 곤히 자기에 눈이라도 감고 있어본 것인데 네가 알아서 일어나 줬으니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무슨 뜻이긴요. 비가 와서 싸늘해서 깼나 보지요. 이불을 발치에 차 버렸으니 새벽이 되어 추운 게 무에 신기하다고.”
그 말대로 발치까지 밀려 있던 침아 몫의 갖옷을 돌아보고 침아가 손을 뻗으려 하는 것을 벌떡 몸을 일으킨 료가 방해했다. 한 번 호흡이나 할까 말까 한 사이에 침아는 바닥에 깔린 갖옷 위에 눕혀졌고 료는 침아의 갖옷을 펼쳐 등에 두르고서 침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말도 맞다 치자. 그러니 이제부터 열이 날 만한 일을 해볼까?”
“맞다고 치는 게 아니라 제 말이 옳습니다. 그리고 굳이 움직일 것이 아니라 가만히 갖옷을 덮고 있으면 몸은 충분히 따뜻해질 테니, 주인님, 잠시만 제 말을 좀 들으시고……으, 으으응.”
침아의 호소도 소용없이 완강하게 그녀의 안을 채워오는 묵직한 기운에 침아가 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신의 팔에 파고드는 손가락의 힘을 재어보던 료가 가슴을 밀착시켜 내리누르며 그녀의 귓전에 입술을 대고 물었다.
“이젠 아픔이 별로 없는 모양이지?”
귓전을 간지럽힐 때마다 제꺽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이번에도 가쁜 숨과 함께 고개를 틀었다. 따라가면서 료가 다시 물었다.
“어떠냐, 내게 익숙해진 것 같아?”
“그런 것……묻지 마셔요.”
“정말 궁금해서 그런다. 내가 얼마나 조심조심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아느냐?”
“……조심하고 계신다구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침아가 료를 쳐다보았다. 그 황당한 눈빛에 료도 황당해하는 눈으로 맞붙었다.
“아무렴,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데? 내 하고 싶은 대로 막 했다간 이 가느다란 몸이 부서질까 싶어 자제, 또 자제를 하고 있단 말이다.”
“농이시지요?”
“무슨 농? 내가 이런 일로 농을 하여 뭣하느냐?”
“하긴. 농이라도 할 줄 아는 주변머리가 아니지.”
“뭐? 이 녀석,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강파른 성미를 긁어놓을 소리를 했으니 료가 금세 눈에 쌍심지를 켰다. 침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믿기지 않아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자제를 하고 계신다는 말씀이시군요…….”
“정말이래도? 내 언제 네게 거칠게 대한 적이 있더냐?”
너무 당당한 료의 얼굴을 보면서 침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상냥하게 해주시라고 사정하는 말을 족히 서른 번은 넘게 한 느낌이 드는데 꿈속에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아프다는 말을 몇 번 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고요.”
“어……. 어흠, 그건 내가 너를 좀 놀리려 한 것이지 절대 거칠게 하려 그런 게 아니야. 흠, 그러니까 중요한 건 지금이지.”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을 옆으로 밀어놓고 료는 다시금 보채듯 침아에게 물었다.
“이제는 날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해진 것 맞지?”
“어떤 대답을 하든 간에 제 몸이 더 고달파 질 것 같아 아무 말도 못 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주렴. 견딜 만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멋대로 굴지는 않는다고 약속하마. 네 아직 이리 가냘픈데 내가 여기서 더 무엇을 어찌하겠느냐?”
료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진담이라 침아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리 가냘프다고 걱정하는 아이를 매일같이 기진맥진하여 실신할 지경이 되도록 품어댄 자는 누구고 지금 여기서 이리 순진한 얼굴로 말하는 것은 또 누구란 말인가.
천진한 미소는 어린아이와 같으나 역시 본성은 맹수라는 것인지…….
침아는 달관한 듯이 체념어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은 수월해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몹시 버거워요, 아직은. 그러니 주인님, 계속 상냥하게 대해 주세요. 그리 해주실 거죠?”
“그래, 자꾸자꾸 하면서 어서 빨리 더 익숙해지게끔 하자꾸나.”
“제 말은 그게 아니라요, 저기 주인님 혹시 지금…….”
‘버겁다’는 말을 강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료는 ‘계속’이란 말만 귀담아들었나 보다. 혹시 이쪽의 말을 다 알아들었는데도 못 알아들은 척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짓는 그녀에게 료가 입술을 겹쳐오면서 포개어진 몸도 천천히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더 상냥하게 대해 주마. 내 귀여운 처(妻)의 청이니 어찌 아니 들어줄까.”
훈기가 밴 따스한 말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침아는 과장된 동작으로 간지러워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벽의 한 점에 머무른 그녀의 시선이 매우 동요했다. 처? 나더러 처라 하였나?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거기에 혼란이 더 가중되어 침아는 도무지 료의 열정에 따라가지 못했다. 오랜 물결이 급류를 타고 마침내 폭포가 되기 일보 직전에 료가 뜨겁게 신음하며 침아의 안에서 빠져나가 밖에다 사정을 했다.
이제까지 계속 그래왔다. 료는 침아의 안에서 완전히 절정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 매번 사뭇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빼내는 그를 보며 침아는 얼마쯤 냉담하게 생각도 한 바 있다.
‘결국 이 정도가 한계인 거지……. 인간 소실에게 후사 따위 기대하지 않는 거야.’
결국 처니 어쩌니 한 것도 잠자리에서 그녀의 기분을 돋우려고 한 말치레라고 여기며 침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놓고 그리 한숨을 쉬는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
그녀의 심사를 알 리 없는 료는 나른한 미소와 함께 침아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얼굴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입술을 대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한 며칠 돌아본다 하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오래 지체했지. 공연히 걱정하고 있을지 모르니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다. 집에 가면 본격적으로 행장을 꾸려서 여로에 오르자꾸나.”
침아가 말없이 그의 눈을 올려다보니 료가 그녀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때는 훨씬 더 멀리까지 가는 거다. 바다 건너도 좋고, 섬이란 곳도 구경해 보고……. 그러다 지세 좋고 물 좋고 바람 좋다 싶은 곳을 찾으면 거기에 둥지를 틀자꾸나.”
“……둥지요?”
“응. 전에도 말한 적 있지? 내 이제 처를 맞이했으니 일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으냐? 우송은, 잠시 화산 할머니께 맡겨서 비장의 기술을 배우라고 해두고 우리끼리 보금자리 터를 보러 다니는 거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곳을 보고 3년 안에는 아주 결단을 내려야지.”
“저기 주인님, 어찌 저를 자꾸 처라고 부르십니까? 첩이라고 하셔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침아의 말에 료는 잠시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처와 첩은 같은 말이 아니다. 엄연히 그 뜻이 달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처를 첩이라 불러선 안 되는 것이야. 그것도 몰라?”
이번엔 침아가 료를 가만히 올려만 보았다. 료는 그 눈빛을 어루만지듯이 그녀의 눈가를 둥글게 손으로 따라 그리면서 말했다.
“잊었느냐? 우리는 야합을 한 것이 아니다. 내 분명히 달을 중신아비로 삼았다 했거늘.”
“주인님의 마음이 아무리 확고하셔도 저는 한갓 인간이니 어찌 다른 분들의 뜻에…….”
“괜찮다. 다른 자들 따윈 아무래도 좋아. 앞으로 내 더욱 네 몸에 신경 써줄 것이니 한 백 년쯤 즐거이 지내면 되는 것이지.”
“하지만 주인님은 제게…….”
머뭇거리면서 침아는 말끝을 흐렸다. 료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침아가 주저하며 말했다.
“몸을 품으시되 제 안에 씨를 주시지 않는 것은 제게 다른 것을 기대치 않으신다는 뜻이 아닌지요.”
료는 한참 만에 무언의 미소를 지었다. 조금 쓸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의 따스한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눈을 감은 채 보드라운 살갗에서 피어나는 향을 깊이 들이쉬다가 그가 말했다.
“화산 할머니께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나는, 후사 따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존재야. 내 후사가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지 생각하면 사뭇 두렵구나. 기껏 태어났는데 나 같은 모습을 지닐 바에야……. 심지어 나보다도 못한 경우엔…….”
료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떴다.
“설사 그 아이가 다행히도 짐새의 본래 피를 잇게 된다고 해도, 네게 그런 일을 기대할 수 없다. 너는 인간이니까.”
그의 손이 침아의 아랫배 위에 머물렀다.
“어찌 그런 욕망이 없겠느냐. 나도 사내인 것을. 여기에 네가 내 씨를 품게 되어 내 새끼를 낳아주고, 그 새끼가 훌륭한 짐새가 된다면 더는 바랄 것도 없겠지.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꿈이다. 짐새가 인간과의 사이에 새끼를 갖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짐새 쪽이 암컷이기에 가능한 일이야. 인간의 암컷이 짐새의 씨를 품게 되면, 그 암컷은 십중팔구 죽는다.”
침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료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깃털 몇 개만으로도 너희 인간들은 속절없이 죽거늘, 어찌 무사히 포태기간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설사 감당한다고 해도 크게 몸이 상하는 것은 물론 낳는 과정에 필경은 죽고야 말 것이다. 싫구나, 그런 일. 어찌 그런 식으로 상하게 한단 말이냐. 이리 보는 것만으로도 아까운 너를 내 어미 같이 만들지는 않아.”
이어 고개를 든 그는 침아의 얼굴을 보며 엷게 웃었다.
“겁을 먹었느냐? 염려 마라. 그리 위험한 일, 절대 없을 테니. 다만 나와 함께 사이좋게 지내다 가뭇없이 스러져도 족할 만큼 내 충분히 사랑해 주마.”
당장 그 말을 증명하듯 몸을 일으켜 침아를 꼭 안아오는 료를 침아도 잠시 후 그의 등을 안는 것으로 따라갔다. 등을 쓸어 만지는 그녀의 손길이 어쩌면 위로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이튿날 비가 그치고 료는 잠시 먹을 만한 것을 찾아보겠다며 초당을 나섰다. 침아는 초당 근처의 계곡으로 나가 몸을 씻었다. 비는 밤새 내렸지만 내린 양 자체는 얼마 되지 않는지 물살은 그리 세지 않았다.
물가에 늘어선 나무들이 울창한 데다 머리 위 하늘에 구름이 머물러 다소 어둑어둑하였다가 이윽고 구름이 지나가면서 햇살이 나뭇잎을 뚫고 쏟아졌다. 고개를 든 침아는 기지개를 켜면서 다사로운 햇살을 만끽했다. 햇살 속에서 밝게 반짝거리는 눈과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손으로 물을 떠서 몸에 끼얹는 손길이 평소보다 더 꼼꼼했다. 늘 깨끗이 가축을 해온 편이지만 이제 그보다 더 정성스러워진 것은 이 몸을 안을 누군가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이의 지어미가 되어 곱게 곱게 해로하며 살아갈까나.”
흥얼거림과 같은 말에 이어 침아의 손은 가슴을 지나쳐 아랫배 위로 내려갔다. 두 손으로 배를 가만히 덮은 채 생각에 잠겼다.
“료의 아이를 품을 수도 있을 거야. 오래야 걸리겠지만 그가 걱정하듯이 죽지는 않겠지…….”
그러다 문득 장난스럽게 입을 가리며 웃었다. 몸으로 맺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아이를 낳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다 하는지. 쑥스러움에 침아는 애꿎은 물로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다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물속으로 주저앉았다.
오래도록 그러고 있었다. 그녀가 설사 물질에 이골이 난 인간이었다고 해도 지나치도록 긴 시간. 그러한 폐활량 덕분에 일전에 은호강에 빠졌을 때에도 가선의 눈을 피해 먼 곳으로 헤엄쳐 갈 동안 죽지 않고 버텼던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몸을 일으키며 물 밖으로 나와 숨을 들이쉬던 침아는 시야의 끝에 들어온 노란 꽃나무를 보았다. 산수유나무가 양지바른 쪽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이제야 본 것이다.
그 노란 꽃에 침아의 눈빛이 멍해졌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억하게 했다.
―언니. 연화 언니.
―날 좀, 나를 좀 죽여줘요.
아득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함께 침아의 입에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완아야…….”
스산한 바람이라도 불어와 그녀를 휩쓸고 간 듯이 낯빛이 어두워졌다. 망부석이라도 된 듯이 꼼짝 않고 서 있던 그녀가 불현듯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시원하게만 느껴졌던 물이 갑작스레 너무 추워 견딜 수 없었다. 서둘러 물에서 나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손에 생채기가 생긴 것도 모르고 침아는 서둘러 옷을 걸치고 초당으로 뛰어갔다.
료가 꿩이며 산토끼를 잡아서 돌아왔을 때 침아는 담비 갖옷 두 개를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침아야, 무슨 일이냐? 갑자기 왜 이러고 있어?”
창백한 낯빛에 입술조차 푸르스름했다. 손에 생긴 생채기를 보고 핥아주는 그의 혀가 뜨겁다 싶을 만큼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머리카락이며 옷이 흠뻑 젖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료가 야단쳤다.
“계곡물에 또 오래도록 들어가 있었지? 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것이 어찌 그리 물 무서운 줄을 몰라?”
침아는 야단치는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원망에 찬 눈으로 료를 보았다.
‘당신이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잖아. 당신이……. 아아, 그 아이가 원망하고 있나 봐. 내가 약속을 저버릴 줄 아는 거야. 그런 게 아닌데. 나는 다만, 다만 잠시…….’
침아는 료의 품으로 파고들어 꼭 안겼다. 상황이 역전되어 이제 그의 몸이 도리어 따뜻한 지경이었다.
“주인님, 돌아가요. 집으로 돌아가요. 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요.”
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꾸나. 내 불찰이야. 네게서 눈을 떼는 게 아닌데. 자, 침아야 옷을 제대로 입어 보렴. 아무래도 날아가는 길을 택해야겠다. 조금 힘들어도 눈을 꼭 감고 있으렴. 알겠지? 돌아가면 내 금방 몸을 따뜻하게 할 약을……. 침아야, 어찌 우느냐? 그리도 아프냐? 자, 자, 괜찮다. 곧 돌아갈 테니까. 응?”
그의 상냥한 말을 듣고 있던 침아가 돌연 눈물을 터뜨렸다. 료는 더더욱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침아를 토닥토닥 어르기 바빴다. 그런데 침아는 불쑥 느닷없는 말을 했다.
“안아 주셔요.”
“응?”
료가 여며준 갖옷 앞섶을 열고 저고리 고름을 풀면서 침아가 황망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안아 주셔요, 어서요.”
“잠깐만, 침아야, 너는 지금 몸이 심히 좋지 않아서…….”
그녀를 만류하는 료의 손목을 꼭 잡으며 침아가 젖은 눈을 크게 떴다.
“돌아가기 전에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처음으로 그녀가 먼저 자신을 원해 왔다. 그래선 아니 된다고 물리치기엔 이미 머릿속이 얼떨떨하도록 몸이 반응해 버린 후였다.
“……딱 한 번만이다.”
침아가 쥐어준 말을 핑계 삼으며 료는 침아의 입술을 덮쳤고 그대로 둘의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사뭇 오래 돌아보지 않았던 북쪽 후원의 꽃들, 즉 여자들과 함께 동산의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던 휘는 문득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동쪽 하늘을 응시했다.
흰 구름이 점점이 흩어진 파란 하늘 끝에서 이윽고 새까만 점 하나가 나타났다. 그 점은 금세 바둑알만 해졌고, 또다시 주먹만 해졌다.
“빠르군.”
그 시들한 중얼거림에 그와 한 배를 탄 운 좋은 고니 하나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고니의 갸름한 목을 쓰다듬어 주면서 료는 아래로 뚝 하고 떨어지듯 모습을 감춘 그 까만 것에 대해 말했다.
“집 나간 탕아가 돌아왔어.”
잠깐 고개를 갸웃하던 고니와 다른 여자들은 뒤늦게 료의 이야기란 걸 깨닫고 어디요, 어디요? 하면서 하늘을 돌아보기 바빴다.
어여쁘지만 반응이 늦어도 한참 늦은 아둔한 암컷들. 이럴 때 그 아이였다면 도발적인 어구로 냉큼 받아쳤을 텐데.
물론 그가 생각하는 ‘그 아이’는 가선이 아니었다. 가진도 아니었다.
휘는 다시 동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응? 료가 돌아왔어?”
시녀 아이가 금세 물고 온 소식에 반색을 하면서 가진과 저포놀이를 하던 것도 잊고 일어서려던 화산 노파는 가진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에 뜨끔하여 돌아보았다.
“왜 그리 웃나, 자네는?”
“아니 그냥, 마치 혼행길 다녀온 어린 손자를 보러 가는 것처럼 들뜨신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근데 어르신이 제 발로 찾아가시는 건 좀. 어르신께 말씀 올리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제 계집이랑 놀러 가기 바빴던 작은 공자님, 버릇 나빠지시겠습니다.”
“커험, 원 자네야말로 어른을 놀리는 못된 버릇이 있구먼.”
“어머, 놀리려는 게 아니라 어르신 체통을 지켜드리려 한 건데요. 제가 종일토록 웃고 다녀서 잘 때가 되면 배가 당겨서 신경질을 부리는 못된 버릇이 있긴 해도 그 이상 가는 악행은 꿈조차 꾸지 않는답니다.”
진지하게 제 변호를 하는 가진을 보며 화산 노파는 반쯤 일어섰던 것을 그만두고 도로 의자에 엉덩이를 내렸다.
“그리 배가 당길 정도면 웃는 걸 좀 줄여 보지 그런가?”
“재미난 걸 보면 웃음이 나는 걸 어찌 참지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입이 너무 가벼워 큰일이라고도 하시지만. 생각한 걸 죄 입으로 쏟아내지 말라시는데, 생각한 걸 입으로 내지 않으면 어디에 담아 두나요? 생각은 이만큼씩 하면서 말로는 주먹만큼 내보내고 살면 며칠 못 가 속병 날 거예요.”
상상만으로도 이미 병의 조짐이 느껴진다는 듯이 머리를 짚는 가진에게 화산 노파는 손을 저어 보였다.
“어이구, 예 와서 자네까지 아파서야 쓰나. 말을 줄이라고는 내 절대로 말하지 않았으이. 또 자네처럼 속을 다 내보여주는 자도 주위에 있어 나쁠 것 없지.”
“그렇지요? 한데 제 어머니는 저같이 입이 가벼워선 제대로 된 분에게 시집가지 못한다고 야단이랍니다.”
“어쩌면 조만간 그 야단 들을 일 없어질 수도 있겠지?”
화한 노파의 눙치는 말에 가진은 얼굴을 붉히면서 저포놀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말을 참아보려 하는 듯하더니 금세 얼마 못 가 맘을 털어놓고 말았다.
“물론 그리될 수도 있겠지만……아직 휘 공자님 마음을 모르겠는 걸요. 제게 관심이 있으시긴 한 건지. 아무리 멋진 분이라고 해도 제게 마음이 없는 분한테 시집가겠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얼굴도 자주 보고 이야기도 나눌 틈이 있어야 마음도 일어나는 거겠지. 기다려 보게나. 내 조만간에 자리를 한 번 만들지.”
“어머, 연회를 벌리시게요?”
“호홋, 연회까지는 아니고, 그래 한창 봄꽃이 좋을 때이니 좀 멀리 답청이라도 갈까? 료도 돌아오고 하였으니 말이야.”
“답청도 좋지요! 아, 모처럼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네요. 어디로 가든 간에 터를 잡은 뒤엔 훨훨 날아봤으면 좋겠어요. 어머, 그러려면 큰 목욕을 하고 난 뒤여야겠네. 날짜를 너무 촉박하게 잡으시면 아니 되어요, 어르신.”
벌써 들떠서는 손뼉을 치며 웃는 가진의 호들갑에 화산 노파의 마음도 부쩍 즐거워졌다. 그러면서도 료가 금세라도 다녀왔다고 인사하러 올까 싶어 문 쪽을 내다보는 눈길이 분주하다.
그렇지만 어린 조카손자는 저포놀이가 다 끝나도록 들여다보는 기미가 없다. 결국 가진이 돌아가는 걸 보고서 화산 노파가 동쪽 채로 움직였다.
다 가기도 전부터 연기 한 줄기가 동쪽 하늘로 피어오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슨 연기일꼬 하고 의아해 하는데 약재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얼마 안 가 확인했다. 조바심이 일어 다소 걸음을 빨리 하여 가보니 마당에 앉아 약탕기를 보고 있는 우송을 볼 수 있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해오는 우송에게 알아봤다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무슨 약이지? 설마 료가 어디 아프냐?”
“아닙니다. 주인님이 아니라 침아가 아픕니다. 주인님께서 오한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청작은 안에 있느냐?”
“이미 다녀가셨습니다. 아직 주인님이 식사 전이시라 주방에 말을 해야 한다고 급히 가셨지요.”
료의 끼니가 문제가 아니라, 침아에게 먹일 미음이든 죽이든 당장 준비해 오라는 료의 닦달에 쫓겨 가다시피 했다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약방이 그 모양이 되어 변변찮은 약재도 없을 것인데……. 가서 들여다보고 휘에게 말을 꺼내보든가 해야겠구나. 료 성격에 휘에게 선뜻 말을 꺼낼 것 같지도 않고.”
“주인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낫게 하실 겁니다.”
찌푸린 낯으로 말하는 우송을 보아하니 무엇하러 휘에게까지 그런 말을 꺼내느냐는 모종의 반항심이 보였다. 그 주인에 그 종복. 화산 노파는 너그럽게 웃으면서 우송의 부축을 받아 마루에 올랐다.
방 앞에 이르러 헛기침을 하여 기척을 내었건만 안에서 나와 보는 기미가 없었다. 연거푸 두 번 더 큰기침을 했더니 료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아, 할머니.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지금 경황이 없어서…….”
머쓱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료는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고 있는데 아래로 보이는 두 손이 묘하게도 벌겠다.
“침아가 아프다 하던데.”
“예. 찬물에서 놀다가 한기가 스몄나 봅니다.”
“저런. 어린아이 같은 짓을 했구나. 쯧쯧.”
우선 화산 노파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료가 방석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으니 눈앞에 버젓이 있는 것도 아니 보이나 보다. 화산 노파는 제 손으로 방석을 들고 와 이부자리 근처에 앉았다.
눈을 감고 있는 침아는 아닌 게 아니라 창백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대야에 김이 피어오르는 물이 들어 있었는데 료는 거기에 손을 넣어 보더니 화로에 올려두었던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물을 더 부었다. 김이 더 자욱해진 대야의 물에 수건을 넣어 흔든 뒤 뜨거워진 수건의 물기를 적당히 짜고 그것으로 료는 침아를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닦아주었다.
새빨개진 손은 바로 그런 연유였구나 하고 깨닫고 화산 노파는 미소를 지었다. 료가 한층 상냥한 사내가 되었구나 싶었던 것이다.
침아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화산 노파가 말했다.
“땀을 흘리지 않는 것 같은데.”
“아주 조금씩이지만 식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닦아내주어야 한독이 조금이라도 침범치 않겠지요.”
그러면서 료는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제 차가운 몸이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탓도 있다고 자책중인 모양이다. 김이 이글이글 나는 대야의 물을 보고 료의 새빨간 손을 번갈아 보면서 화산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침아를 돌아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마음이 그만큼 뜨거우면 되었지 않으냐. 이 아이, 좋은 지아비를 모시게 되었구나. 이런 일쯤 액때움이라 여겨야지.”
화산 노파의 말에 료는 얼굴을 붉혔다. 침아의 몸을 닦아주는 손만큼이나 붉어진 볼에 까만 속눈썹 그림자를 비치며 료가 탄식했다.
“그런 액때움을 어찌 이 아이가 겪는단 말입니까. 주저하는 아이를 반 을러대듯이 하여 깊은 연을 맺은 것은 저이건만. 차라리 제가 아프고 말지 이 아이가 아픈 건 못 보겠습니다.”
“네 혹……싫다는 아이를 막무가내로 어찌한 것은 아니지?”
슬쩍 떠보듯이 묻자 료가 바로 대답을 못하고 수건을 대야에 넣고 빨래하듯 비볐다. 화산 노파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료를 야단쳤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설마하니 내가 염려하는 바가 참인 게야? 그렇구나. 이 아이가 이리 아픈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한 노릇이지.”
료는 여전히 대꾸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첫날밤과 다음날 아침의 일을 생각하니 자신이 막무가내를 부린 바 없노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게다가 침아는 얼마나 간절하게 그를 뿌리치려 했던가. 다만 그녀를 원하는 료의 간절함이 훨씬 더 집요했을 뿐이다.
말로는 야단을 쳤지만 료가 정말 싫다는 아이를 어찌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 화산 노파는 료가 침울해져서는 죄라도 지은 듯이 어깨를 떨구자 내심 당황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보아하니 침아가 가볍게 앓아누운 걸 가지고 유난히 상심해 기운이 없는 모습이 딱하여 놀려주려 한 것이건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축 처지고 만 것이다.
“원 이 녀석, 어찌 이리 얌전해진 게냐? 농으로 해본 말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이 할미가 무서워 네게 말이라도 하겠느냐?”
“……제 나이가 부끄럽습니다. 이 아이보다 살아도 몇 배는 더 살았는데, 오히려 이 아이가 저보다 더 어른스러웠어요. 할머니 말씀대로 저는 막무가내를 부렸고, 이 아이는 결국 그 막무가내에 져 준 것 같습니다.”
그때 침아의 입술이 문득 달싹였다.
“……아주 싫었으면.”
화산 노파와 료의 눈길이 침아의 얼굴로 향했다. 침아가 오른쪽 눈을 살짝 뜨면서 료를 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아주 싫었으면 져 드리지도 않았어요. 제가 드린 말씀, 그새 잊으셨습니까? 우송 아저씨와 주인님의 차이.”
료가 빙그레 웃었다.
“설마 잊었을까.”
“하나 빠트린 말이 있어요.”
“나중에 해라. 말하는 게 힘들어 보이는구나.”
“괜찮습니다. 어쩐지 한숨 푹 자고 나면 나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말이에요.”
“무슨 이야기인데?”
“……주인님이, 우송 아저씨보다, 천 배는 더, 잘생기셨습니다. 아시겠어요? 천 배라고요. 그 간격은 하늘과 땅 사이보다 멀지요.”
료는 멀뚱히 침아의 얼굴을 보다가 마침내 풋하고 웃었다. 한결 가벼워진 미소였다. 침아는 료에게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화산 노파를 보았다.
“기껏 가르쳐주신 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어르신. 그냥 머릿속이 까맣게 되어버리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걸 가르쳐주는 분이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무척이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는 게 미처 그때는 놀란 마음에…….”
말하다 힘이 다했는지 침아의 눈이 스륵 감겼고 입도 다물어졌다. 다시 색색 밭은 숨을 내쉬며 바르르 떠는 그녀를 보고 료는 급히 뜨겁게 적신 수건으로 몸을 재빨리 닦아주고는 이불을 턱 밑까지 덮어주었다. 아궁이에 있는 대로 불을 지피라고 말한 게 주효했던지 이제 보료 밑 방바닥은 뜨끈뜨끈하게 끓고 있었다. 침아의 숨결이 조금은 편해진 걸 확인한 후 료는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풀고 화산 노파를 보았다.
“그런데 침아가 말하는 소리가 다 무엇입니까? 언제 무엇을 가르쳐주셨는데요?”
“아, 너는 알 것 없다. 여자끼리 나눈 이야기야.”
딱 잘라 말하고 화산 노파는 슬며시 웃었다. 언젠가 옷을 마름질한다는 핑계로 붙잡아둔 밤에 이 까마득히 어린 계집아이에게 남녀의 방사가 무엇인지 시시콜콜 가르쳐주었다고 말하긴 아무래도 머쓱했다. 료의 거동을 보아하니 머잖은 시기에 침아를 품을 것은 자명한데 사내는 물론 계집 역시 숙맥이긴 매일반이라, 둘 중 하나라도 뭘 좀 알아야 하지 싶어 화산 노파가 그 난감한 일에 스승 역을 자청한 것이었다.
문득 고개를 기울여 침아를 들여다보는 화산 노파의 눈빛이 쓸쓸해졌다. 정말 까마득히 어린것인데, 벌써 여자가 되었구나 싶으니 조금은 가엾다. 또 이 홍안이 쏘아놓은 화살 같은 속도로 아차 하는 사이에 시들겠지 하니 더욱 가엾다.
료를 돌아보며 화산 노파는 그의 어깨를 가벼이 쥐었다가 놓았다.
“누군가에게 정을 주었으면 거기 따르는 책임 또한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좋은 시절만 함께 하는 것은 진정한 정이 아니야.”
료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를 실망시키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반짝이는 료의 눈을 보며 화산 노파는 그의 어미를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올곧고 하나에 빠지면 주위는 보지 않고 냅다 질주하는 기질이 있던 아이. 귀여웠던 그 얼굴을 료에게서 찾기는 힘들지만, 그러한 기질만큼은 고스란히 물려줬다.
너무 갑작스럽게 끝을 맞이한 것은, 그 아이의 운이 그만큼이었기 때문. 죽음과 바꾼 아들이 그녀의 존재가 어미란 것조차 모르는 것도 역시 운이 그것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박한 운, 료에게는 물려주지 말았기를 새삼 빌어보며 화산 노파는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침아는 자신이 한 말을 딱 두 밤 만에 지켜냈다. 한숨 잔다는 게 꽤 길어졌지만 잠을 떨치고 눈을 떴을 때는 몸은 물론 머릿속까지 끼끗하게 혼란을 떨쳐낸 후였다. 침아는 맑아진 눈으로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보료 밑 방바닥이 자글자글 끓어 이내 더워서 그대로는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이불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키려던 침아는 무언가를 보고 움칫하였다가 이내 마음먹은 대로 일어나 앉았다.
료를 보았다. 이부자리 옆에 앉은 채 잠이 들어 고개를 불편하겠다 싶게 모로 꺾고 있는 모습이 어여쁘면서도 천진했다.
“옆에 누웠어도 됐으련만…….”
제 몸이 차니 병자에게 해가 되는 것을 저어하여 끝내 같은 이부자리에 들지 않았을 그 마음이 헤아려졌다. 그런 사내다. 침아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 속에 새삼 파도가 일기 전에 침아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고는 이부자리에서 나와 대신 료를 그 자리에 눕게 했다.
“으음…….”
보료에 몸이 뉘어질 때 료가 한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깜박거려 침아는 긴장했다. 눈 위를 손으로 쓸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주무셔요, 주인님. 주무셔요.”
그 말이 들려서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편하게 생각한 것인지 료의 숨결이 평온해지며 다시 곤히 잠들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서려던 침아는 도로 주저앉아 료의 뺨에 손등을 대어 가만가만 비볐다.
“천 년만 함께 살고 지고…….”
그리고 일어났다. 새하얀 속치맛자락이 어둠 속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장단 삼아 침아는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하루를 백 년 삼아 천 년만 함께…….”
조용히 문이 여닫혔다. 료의 잠은 깊었다.
침아는 욕간에서 목욕까지 하고 돌아와 아침 단장을 마치고서 부엌에 가서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어오려고 나섰다. 산등성이에 해가 날 조짐이 보이는 인시(寅時:오전 3시에서 5시) 끝 무렵이었다.
이슬이 내린 길을 밟아가면서 침아는 눈에 띄는 꽃이 있으면 몇 송이 끊어 입에 넣고 맛보았다. 물을 긷는 샘터에서 표주박으로 물을 퍼 담은 뒤 한 번 저택까지 다녀왔다. 두 번째 물 긷기는 더디다. 다녀온 사이에 물이 생각만큼 차오르지 않아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 있던 소나무의 솔잎을 반 주먹쯤 따서 천천히 먹었다.
꽃은 몰라도 솔잎은 생각만큼 먹어지지 않았다. 침아는 아직도 손바닥에 반쯤 남은 솔잎을 난감하게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화식(火食)을 끊기가 맘 같지 않으려나.”
솔잎을 엄지로 헤아려보던 침아는 중지에 끼워진 옥가락지에 눈을 주었다. 그 두툼한 가락지도 엄지로 슬쩍 만져보았다.
일없이 한숨을 쉬고선 뜯어만 놓고 다 먹지 못한 솔잎을 풀숲에 던지려던 침아의 눈에 원추리 잎사귀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에 피는 꽃이니 아직 꽃대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긴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며 침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샘에서 고인 물을 푸기 위해 돌아앉은 침아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오른편에 꽂아둔 머리꽂이를 만졌다. 그러면서 입술을 들썩였다.
“하루를 백 년 삼아 천 년을 함께 살고 지고.”
세 번 샘과 저택을 왕복하는 사이에 이럭저럭 시간이 흘러 사방이 밝아졌다. 다만 세우지로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나 저택까지 흘러오고 있어 아직 저택의 공기는 새벽의 그것처럼 서늘하고도 고요했다.
부엌의 물 항아리에 동이의 물을 부어 놓고 침아는 칠흑 소반에 잔을 내어 샘물을 가득 담았다. 잔의 수면에 닿을락 말락 하게 손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침아가 입속에서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하루.”
손가락 끝에 닿은 물방울을 혀로 핥고서 침아는 소반을 들고 일어섰다. 방으로 돌아가 아까 료가 앉아 있던 자리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단정히 앉아 그가 깨기를 기다렸다. 그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료가 언뜻 눈을 뜬 것은 사시(巳時) 중반에 이르렀을 무렵이다.
“푹 주무셨습니까?”
휘파람새 울음처럼 기분 좋게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료는 고개를 돌렸다. 이미 환해진 방에서 녹의홍상을 걸쳐 입은 침아가 바로 곁에 그림처럼 앉아 그에게 방긋 웃고 있었다.
“……어여쁘구나.”
막 깨어 아직 몽롱한 채로 료는 그리 말하며 침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침아가 마주 잡아 꼭 쥐어주었다. 다시금 평소의 체온을 되찾은 그녀의 손이 따사롭기도 하다.
료는 그저 기분 좋게 웃다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너, 그리 일어나 있어도 되는 게냐?”
“제가 아직도 병자의 행색을 하고 있습니까?”
침아가 그리 물어오자 료는 멀뚱멀뚱 그녀의 모습을 살피고 손도 이 손 저 손 다 만져보고 맥이며 호흡도 살펴본 뒤에 고개를 저었다.
“나았나 보구나.”
“어느 분께서 극진히 간호해 주신 덕분이지요.”
침아는 소반에서 잔을 가져와 료에게 내밀었다.
“자, 일찍 나가서 떠 온 물이랍니다. 쭈욱 마시세요.”
“그래. 응? 이건 뭐냐?”
내려다본 잔에 연두색 나무 이파리가 떠 있다.
“원추리 이파리지요. 사레들리지 않게 천천히 드시라고.”
“원 생전 안 하던 짓을 다하는구나.”
료는 고분고분히 잔을 받아 어렵지 않게 물 한 잔을 다 비워냈다. 그에게서 빈 잔을 받아가는 침아를 쳐다보며 료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참으로 거동할 만한 게냐? 아직 불편한 거면 그리 멀쩡한 척할 필요 없다.”
“멀쩡한 척이 아니라 멀쩡합니다. 참말로요.”
그러자 료가 짐짓 심술궂은 미소와 함께 침아의 팔을 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릎 위에 쓰러진 침아를 내려다보며 료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정도로 멀쩡하다면 내 지어미에게 지아비로서의 의무를 다해야겠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을 덮어 누르며 귀신처럼 빠르게 그녀의 저고리 옷고름을 풀었다. 입 안의 감로를 찾아 휘젓는 혀처럼 속적삼 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손을 침아가 붙잡으며 밀어냈다.
“아니 되셔요.”
“멀쩡하다며?”
“멀쩡한데, 그 일이 왔습니다.”
“그 일? 아……. 벌써.”
달거리를 암시하는 말에 료는 눈에 띄게 낙담했다. 침아는 그 모습이 우스운지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그의 무릎에 머리를 누인 채로 그를 보며 말했다.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여전히 낙담한 료는 말해 보란 뜻을 눈짓으로만 보였다.
“아파서 자는 동안에, 일전에 야시에 갔던 날 일이 떠오른 것 같아요.”
“그래?”
그 말에는 료도 분명히 흥미를 보였다.
“물에 빠졌던 일도 기억이 난 게야?”
“아니요, 거기까지는 아니고. 야시를 돌아다니면서 구경했던 일들은 상당수 기억해 냈어요. 그날 제가 주전부리를 참 많이도 먹었던 모양인데, 맞나요?”
“먹었지. 입이 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말이야.”
그때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난다는 듯 고개를 젓고서 료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 기억이 난 걸 보면 머잖아 그 다음 기억도 나겠구나.”
“무서운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좋은데요, 저는. 돌이켜서 마음만 아플 일은 잊는 게 외려 복이지 않을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만.”
침아가 옷고름을 다시 매는 것을 료가 못내 아쉽다는 눈으로 지켜보는데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근데 저희들 짐은 어찌 챙겨오셨나요?”
“짐?”
“아이참, 까맣게 잊으셨구나. 저자 구경하면서 이것저것 산 것들이요. 제가 매번 챙기는 것 보셨으면서.”
“아, 그 짐. 여전히 거기에 있겠지. 뭐 다른 이의 손을 타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거기라면 그 초당에요? 설마 말도 거기다 아직까지 내버려두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묶어 놓았던가.”
“어머나 불쌍해라, 쫄쫄 굶고 있을 텐데. 혹시 산짐승이라도 나와서 잡아먹혔으면 어쩌나. 뭘 하고 계셔요, 어서 가서 찾아오셔야지요. 저도 이렇게 멀쩡해졌는데.”
“굳이 그래야 하나?”
“굳이가 아니라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아니면 주인님이 그리 말씀하셨다고 우송 아저씨에게 일러야겠어요. 우송 아저씨가 살뜰히 보살핀 말인데 어찌 그리 무심하셔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료를 침아는 어서 다녀오라 부추겼다. 소세 시중을 들고 곁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거들면서 침아는 또 한 가지 청을 했다.
“그리고 저기, 다녀오시면서 뭐 하나만 사다 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뭘 말이냐?”
“오징어를.”
휙 돌아보았더니 침아는 군침을 삼키는지 꿀꺽 소리를 내면서 눈을 유달리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야시 일이 떠올랐다더니 그게 오징어 먹던 일이냐?”
침아는 빙긋 웃더니 입맛을 다시다가 말했다.
“우송 아저씨랑 함께 가실 거지요? 아니면 다시 저만 데리고 가실 건가요?”
“너는……쉬도록 해. 최대한 빨리 다녀올 테니까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방에서 탕약 먹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얌전히, 알겠느냐? 얌전히 말이야.”
“세 번이나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아듣는데.”
“알아듣는다는 녀석이 내가 눈만 떼면 사고를 내느냐?”
“언제 또 눈만 떼면 사고를 냈다고 그러세요. 가만 보면 사내가 참 호들갑스럽기도 하다니까.”
입술을 삐죽거리며 구시렁거린 지나치게 큰 혼잣말에 료가 씩 웃으며 침아의 양쪽 귀를 잡아당겼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리되었느냐, 응?”
“아야야, 아파요, 아파, 아프대두요……으, 으응.”
혼나 보라고 귀를 비틀던 것도 잠시, 료는 침아를 담뿍 끌어안아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곁방의 벽에 떠밀린 침아의 옷을 벗기는 소리가 부스럭부스럭 요란도 했다. 목덜미를 핥는 그의 입술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침아는 그를 만류하기 위해 애썼다.
“주인님, 안 되셔요, 저 그 일을 치르는 중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거기까진 안 할 테니까.”
바짝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침아의 귓가의 솜털이 소르르 일어섰다.
“약속하셨어요, 주인님. 안 하신다고…….”
한숨을 내쉬며 침아는 눈을 감고 료에게 몸을 맡겼다.
료와 우송 일행이 버리고 온 짐을 찾아 떠난 것은 해가 이미 중천을 지나고 난 뒤였다. 막 씻고 나온 듯 말쑥한 그의 모습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침아는 미처 보지 못했다. 료의 목욕시중을 든 것에 이어 그녀 역시 오늘 들어서 두 번째로 목욕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들의 옷을 손질하고 세탁하는 시녀들이 따로 있지만 차마 거기로 보낼 수 없는 지경이 된 몇 점의 옷을 빠느라 바쁘기도 했다.
달거리 때 기분은 우울해져도 그다지 아파서 고생한 기억은 없는데 이번엔 옷을 장대에 너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런 말 믿은 내가 바보야…….”
뒤꼍을 돌아 뜰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두 번은 멈춰 서서 쉬었다 갔다. 달거리가 어떤 건지 한 번 제 몸으로 겪어보길 해야 이런 때 계집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텐데. 대체 발정이 난 사내의 머릿속이 어찌 되어 있는지 침아는 한 번 알아보고 싶었다.
“자고 있을 때 때려주고 말 테다.”
이를 바드득 물면서 침아가 스산하게 웃었다. 뿐만 아니라 눈앞에 료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그 머리에 콩 하고 때리는 연습도 했다. 움켜쥔 그녀의 주먹에 길 가던 료가 재채기나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빨로 무는 시늉에 이어 발로 차는 건 어떨까 하고 왼발 오른발 연습을 하느라 아픈 것도 잊고 뜰에 다다른 침아에게 뒤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침아는 그자를 보기 전에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면서 상그레 웃었다.
“큰도련님.”
담장에 기대어 한창 파릇파릇한 협죽도 잎사귀를 씹고 있던 휘가 역시 싱긋 웃었다.
“네 얼굴을 다시 볼일이 이리도 늦춰질 줄은 미처 몰랐는데.”
“그렇습니까? 요즘처럼 자주 뵙는 일이 드물어 그런 줄도 몰랐습니다.”
담장을 떠나며 협죽도 가지 하나를 끊은 휘는 천천히 침아에게로 걸음을 떼며 그 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의뭉스럽긴. 네 자그마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자꾸만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침아의 바로 앞에 이른 그가 가지 끝에 달린 나뭇잎으로 그녀의 붉은 입술을 슬쩍 훑었다. 침아는 똑바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별것 없습니다. 다만 처지가 처지인지라 생각한 바를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이 한스럽지요. 하고 싶은 일을 단념해야 할 때도 있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단념해야만 하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하기 싫은 일. 무엇을 일컬음일까? 어린것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휘는 신중해져야 했다. 계집을 상대로 신중해져야 할 일이 생기다니, 그 자체로도 신선하긴 하다.
“료가 널 취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느닷없이 달포 넘게 외유를 다녀온 것도 그 소문과 연장선에 있다 들었는데. 어떠냐?”
“좋으실 대로 상상하십시오.”
그리 말하는 침아의 왼손에 옥가락지가 끼워진 걸 휘는 뒤늦게 발견했다. 휘가 다소 경박하게 웃었다.
“빤한 일이구나. 몸을 취하고선 그런 걸 내밀었겠지. 료도 별수 없는 사내고, 너도 별수 없는 계집이로구나.”
침아는 가락지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생각한 바를 전부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는 처지입니다.”
“바라지 않는 걸 억지로 끼고 있기라도 하다는 뜻이냐?”
떠보는 휘의 질문에 침아는 고개를 들더니 다른 질문으로 응수했다.
“큰도련님께서도 신수가 훤하십니다. 즐거이 지내셨던 모양이지요?”
“뉘 덕분에 아주 못 지내지는 않았지.”
휘가 뒷짐을 진 채 침아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뒷짐 진 손에 들린 협죽도 가지 끝을 보는 침아에게 그가 다시 물었다.
“지난달 보름에 누대에 네가 나올 생각이 있긴 했던 거냐?”
침아는 또 질문에 질문으로 대꾸했다.
“큰도련님께선 가선 아씨를 품으셨습니까?”
휘의 걸음이 멈추었다. 침아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발칙하군.”
“품으셨습니까?”
“당연하지 않으냐. 누구와는 달리 그 낭자는 매우 솔직하더구나.”
침아는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감추려 했다. 동시에 아랫입술을 호되게 깨물며 북받치는 감정을 긁어모았다. 걸음을 떼어놓은 것은 그 다음이다.
아무 말 없이 홱 그에게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고 휘는 황당해 하였다.
“몹시 버릇없는 것이로구나. 료가 지나치게 애지중지하여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더니 어디 감히 웃전이 말하는데 그리…….”
다가가 침아의 어깨를 붙잡아 다소 거칠게 돌려세웠을 때, 휘는 침아의 얼굴을 보고선 말끝을 흐렸다. 그를 쏘아보는 크게 떠진 눈에서 툭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무어냐. 네 그리 우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미간을 찡그리며 휘가 혀를 찼다. 계집이 우는 건 하도 봐서 골치 아프고 싫었다. 앵돌아서며 침아가 쌀쌀맞게 말했다.
“약이 올라서요. 그 못된 난새도, 큰도련님도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하, 이것 참. 누가 들으면 꼭 네가 투기를 하는 줄…….”
기가 차서 지껄이던 휘는 이게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침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데 침아가 말도 없이 찰싹 그 손을 때리기까지 했다. 휘가 슬며시 그녀의 앞쪽으로 돌아가 얼굴을 보려 하니 침아는 꼭 그 반대로 몸을 돌리며 우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기를 썼다.
번번이 처신이 어른스러운 여자들만 만나다가 이토록 속이 들여다보이는 짓을 대놓고 하는 어린것을 보니 다소 황당하지만 또 그게 재미있었다. 휘는 그녀의 양 어깨를 뒤에서 감싸며 말했다.
“다짜고짜 화만 내서 쓰겠느냐? 무슨 일인지 말해 주지 않으면 나로서도 알 수가 없지. 자, 아이야, 네 깐깐한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계속 골만 내고 있을 셈이냐?”
“이제 와 백 마디 말이 무슨 소용인지요. 다 늦었고, 돌이킬 수도 없고. 품으셨다는 그 아씨 이 댁 안주인 되실 날이 머지않았는걸요. 저는 주인님 따라서 이곳을 떠나면 그만입니다. 큰도련님께서 몇 년이나 저에 관한 일을 기억하실까요. 저도 아마 그렇게 쉬 잊겠지요. 잊을 겁니다.”
“돌이킬 수는 없을지 몰라도, 다 늦은 일 따위는 없다. 그리고 그 아이, 정실로 들일 요량이었으면 그리 쉽게 안지도 않았어. 그만 울고 말해 보렴. 어찌 된 영문인지 내 심히도 궁금하구나.”
등 뒤에서 재촉해 오는 휘의 말에 눈물을 닦아내는 소맷자락 사이로 침아의 붉은 입술이 살짝이 휘어졌다.
“제 말을 믿겠다고 약조해 주셔요.”
“약조하마.”
너무도 쉽게 나온 사내의 대답. 한 방울만 더. 그리 작심하고 돌아서는 침아에게서 꼭 한 방울의 투명한 이슬이 흘러내렸다. 그 눈을 보며 휘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약조하마.”
바야흐로 새 사냥에 쓰일 단단한 돌이 침아의 수중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