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넘칠 듯이
“늦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네 하면서 여자가 서성거리다가 저만치 중천을 벗어나 서쪽으로 향하는 해를 보고는 안 되겠다 싶어 안쪽 마당까지 왔다.
“얘, 침아야, 안에 없니?”
료가 알면 싫은 내색을 할 게 분명해 섬돌 근처에도 가지 않고 마당에서만 침아를 불렀다. 여느 때처럼 료의 조식을 준비해 주방에 왔건만 침아는 내다보는 기척조차 없었다. 늦잠이라도 자나? 하면서 여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알아서 챙기러 나오겠지 하면서 손 털고 돌아갔겠지만 근래에는 가재인 청작이 저택에 머물면서 사소하다 싶은 일까지 하나하나 감독하고 있다. 특히 주방에는 뻔질나게 모습을 보인다. 원래는 이쪽 동쪽 채의 주방이 저택 안의 음식을 모두 준비하는 큰 주방이었으나 주인의 부재와 함께 이제는 북쪽 휘의 거처로 옮겨간 큰 주방에 돌아가면 또 그 근엄한 청작이 나타나 각 처소로 들어간 음식들을 일일이 점검할 것임에 틀림없다.
청작이 안 그런 척해도 작은도련님 일에 유난하다는 것은 저택 안에서 모르는 자가 없다. 예전에 료를 모시던 늙은 두견새 할멈이 명이 다한 뒤로 그 자리를 대신했던 시녀들이 어린 주인을 꼬드겨 저택의 작은 안주인 노릇하길 꿈꾸다 료의 손에 반 죽은 꼴로 내쳐졌을 때에도 번번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치워버린 그이다. 그것이 휘의 경우였다면 싫은 소리도 눈 하나 깜빡 않고 했을 것이나 료에게만큼은 관대했다. 제 손으로 키운 정이 있어 응석을 받아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야 괜찮겠지 싶은 작은 태만으로도 지금은 큰 야단을 맞을 위험이 있다. 늦게 돌아갈지언정 제대로 인계를 해주어야지 하면서 여자는 마당의 모퉁이에 앉아 무릎에 올린 팔로 턱을 괴었다.
그러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언뜻 무슨 소리가 나서 가물거리는 눈을 뜨고 보니 마루에 료가 나와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저도 모르게 여자는 얼굴을 좀 붉혔다.
묶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께까지 늘어트리고 있는 료는 하얀 깃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대충 여민 허리춤의 끈 위로는 창백한 가슴의 살결이 그대로 내보였다. 나른한 동작으로 목덜미를 가만가만 주무르는 그의 얼굴이 평소에 비해 불그레하여 그 흐트러진 자태가 두드러지게 요염해 보였다. 막 자다 깬 것처럼 다소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여자를 응시하며 료의 짙은 자줏빛 입술이 들썩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예? 아,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작은도련님?”
여자는 자신이 여태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발딱 일어났다. 료가 한숨을 쉬었다.
“음식을 가져왔느냐 물었다.”
“예, 예, 그리하였습니다. 주방에 가져다두었는데 침아가 통 오는 기척이 없어 예서 기다린다는 것이 그만…….”
“음. 수고스럽겠지만 여기까지 좀 가져다주어야겠다.”
“예?”
여자는 가져오란 말보다 ‘수고스럽겠지만’이라는 덧붙인 말이 의외라 멀뚱히 료를 쳐다보았다. 료는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여자를 보며 잠깐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까지만 가져다주면 돼. 그리고 바쁘지 않으면 욕간에 가서 목욕물도 준비해 놓으면 좋겠구나.”
“그리하겠습니다.”
우선 부엌으로 가서 교자상에 음식을 준비하면서 여자는 제 몫도 아닌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조차 잊고 놀라서 혼잣말을 했다.
“어찌 된 일이지?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저 성마른 꼬마 녀석이 어째 저리 유순하게 나온대?”
교자상을 가져와 마루에 올리는 것을 료는 직접 거들어주기까지 하였다. 상을 훑어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더니 말했다.
“너는 큰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하지?”
“예, 그렇습니다. 아직 잔심부름을 하는 정도긴 하지만…….”
“내 문득 단것이 생각나서 그러는데 이따가 올 때엔 그런 걸 준비해올 수 있겠느냐?”
“뭐든지 분부만 해주시면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단것이 좀 있었으면 싶다. 수정과 같은 것도 좋고, 밤도 좋아하긴 하는데……. 과일도 있으면 내어오고. 그렇지, 유밀과는 꼭 있어야 해. 또 뭐가 있더라. 아! 오징어를, 아니야, 그건 됐어.”
“아……예. 그리 말씀 올리겠습니다.”
생전 처음 그가 찾는 음식이 다 있어 놀랐는데, 하물며 찾는 음식이란 게 애들 같아 여자는 내심 의아해하면서도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료는 직접 상을 들고 일어서면서 여자에게 당부했다.
“이따 올 때는 침아가 나오길 기다리지 말고 여기로 상을 가져다두면 된다. 따로 말이 있기 전까진 그리하는 걸로 알아.”
“예, 알겠습니다. 저기 작은도련님, 그 아이……어디가 아픈 모양이지요?”
그래도 그간 매일 얼굴을 맞대온 것도 정이라고 여자가 침아의 일에 대해 묻자 료는 약간 놀란 눈빛이다가 이윽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내 아는 병이다. 걱정해 주어 고맙구나.”
“무,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저기, 저기 아까 말씀하신 대로 욕간에 가서 일을 봐두고 가겠습니다.”
꾸벅 절을 하고 여자는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황망히 마당을 빠져나갔다. 료가 여느 때와 달라도 너무 달라 좋기는커녕 불안해졌던 것이다.
방 앞까지 돌아온 료가 상을 내려두고 문을 열었다. 널찍한 큰 방의 남향에 위치한 창 아래 이부자리가 여태 그대로이다. 금빛 비단을 누빈 이불을 덮고 있는 침아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베개 주변으로 흩어져 있다. 상을 가지고 들어가 이부자리 근처에 놓고 료는 부드럽게 침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침아야, 일어나렴. 네 목마르다 하지 않았느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어 있던 침아가 먼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이어 느릿느릿 눈을 떴다.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손바닥에 힘을 주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은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자아…….”
료의 손으로 일으켜 앉혀지면서 침아는 흘러내리는 이불을 급히 움켜쥐며 앞을 가렸다. 몽롱했던 눈이 빠르게 전날의 일을 기억하면서 여지없이 낭패의 기색이 차올랐지만 눈을 꽉 감으면서 그 순간을 넘겼다.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있는 침아를 보며 료는 깃옷을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고는 제 손으로 직접 대접에 물을 따라 침아의 입가에 대주었다. 움찔하는 침아에게 료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그냥 물이다.”
침아는 두 손으로 대접을 쥐더니 천천히, 쉬지 않고 대접의 물을 다 비웠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료가 냉큼 주전자를 들고서 채워주었다. 그 물도 마저 깨끗하게 비우고 침아는 살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물 한 번 맛있게도 마시는구나.”
그녀에게서 대접을 받아 료는 그제야 자신의 갈증도 풀어냈다. 방에 준비되어 있던 자리끼는 긴 밤을 보내면서 진즉에 바닥난 바였다. 턱 끝까지 치밀어 오른 갈증에 쫓기면서도 료는 방을 나서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오늘 낮에 침아가 갈증을 호소하며 깨어날 때까지.
“배고프지?”
밖에서 여자를 볼 때 흐릿했던 눈은 거짓이 아니었건만 지금 침아를 보는 눈은 다시없이 반짝이고 있다. 그야말로 눈을 감았다 떼는 수준으로 잠을 잤기에 몹시 곤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침아를 보자 그의 온몸에선 기이할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모르겠습니다.”
정작 몇 시진 눈을 붙인 침아는 한숨도 못 잔 것처럼 가라앉아 있다. 료는 눈길을 줄 생각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더 바투 다가앉아 뒤에서 감싸듯이 안으며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먹어두렴. 이따가는 상에 네가 좋아할 만한 것도 올라올 게다. 과일도 챙겨오랬으니 네 입에 맞을 만한 게 틀림없이 있을 게야.”
침아는 깃옷을 여미면서 그의 품에서 떨어져나갔다.
“제게 그리 신경 쓰지 마시고 주인님부터 식사하세요. 항상 그래 오지 않았…….”
돌아앉아 소매에 팔을 꿰고 허리춤을 묶은 뒤 일어서려다가 희미하게 신음했다. 하는 양을 지켜보던 료가 짓궂은 미소와 함께 그녀의 허리를 팔로 둘러 도로 제 품으로 데려왔다.
“항상 그래 왔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지. 네가 아직도 내 몸종인 줄 아느냐?”
“당연히 저는 주인님의 몸종입니다.”
그 뻣뻣한 말에 료가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한사코 그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침아의 얼굴을 제게 돌려 얼굴을 마주하면서 료가 말했다.
“달이 중신을 섰고, 합환주를 마시고 동침을 하였으니 우리는 이미 혼인을 치른 부부다.”
“야합(野合)입니다.”
침아는 딱 잘라 내뱉었다. 료가 잠시 말문을 잊을 만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주인이 몸종을 건드렸다손 치더라도 누가 그것을 일러 혼인이라 한단 말입니까. 주인님은 너무도 순진하십니다.”
료는 대번에 기분이 상해 미간을 찡그렸으나 이내 그 자리엔 다사로운 미소가 채워졌다. 침아의 뺨을 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네 말대로 내가 순진한 것이라 치자꾸나. 나처럼 순진한 수컷을 지아비로 얻었으니 그 또한 네 복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아.”
“정말로 물정 모르는 말씀만 자꾸 하시고……. 저도 아는 것을 어찌 그리 모르십니까.”
일그러진 눈에 물기가 차올라 침아는 울기라도 할 것 같다. 료는 한숨을 쉬면서 침아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네가 안다는 것은 다른 자들의 이야기겠지. 나는 다르다. 너는 내가 하는 말만 믿고 따르면 돼. 나는 어젯밤의 일을 혼인이라 할 것이다. 다른 누가 무어라 한다고 해도 내가 그리 말하면 그것은 혼인인 게다.”
침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료는 그녀를 더욱 힘주어 안으며 말했다.
“나는 간밤에 주인으로서 몸종을 취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사내였다. 사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욕을 품게 한 계집을 안은 것이다.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여전히 그런 사내일 뿐이다.”
그래도 침아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귀를 막는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료는 입술을 겹쳤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저는 그런 것 모릅니다.”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하는 침아를 보료 위에 쓰러트리며 료는 거듭 입맞춤을 퍼부었다. 피하려는 침아의 몸짓은 완강했다. 취기가 가셔 정신이 명료해졌기 때문일까. 수줍음이 아니라 정말 싫어 그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가 난다기보다 걷잡을 수 없는 좌절감에 휩싸여 료가 물었다.
“이리 거부하는 것은 나 같은 것에게 몸종으로 매인 것은 용납해도, 네 사내로는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냐?”
그 질문에 침아의 버둥거림이 그쳤다. 제 뜻으로는 보지 않으려 피하던 료를 그녀가 먼저 올려다보았다.
서글픈 기운이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고 침아는 눈을 감으면서 몹시 고통스런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오히려 그녀가 그에게 화를 내었다.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 같은 것이라니요.”
“너도 보았지 않으냐, 내 기괴한 형체를.”
“기괴하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손톱만큼이라도 했다면 이 자리에서 벼락을 맞고 죽어도 하늘을 원망치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어제 분명 어여쁘다 말씀드렸는데 그 말이 거짓으로 들리셨는지요?”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었다. 그래서 더욱 료는 확신했었다. 이 애라면 나는 내 존재를 치욕스러워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겠구나.
“……내 어미 되는 이는 나로 인해 죽었다 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침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의 눈을 보며 료는 담담하게 말했다.
“암수가 서로 비슷한 종이 아니면 후손을 생산하는 것은 암컷에게 위험한 일이 되는 법이야. 내 어미는 아직 어렸었고, 그 위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거지. 다만 가까스로 나라는 것을 담은 알은 세상에 내보냈으나 그것을 아버지는 그대로 땅에 묻으라고 했단다.”
“……아.”
놀라서 탄식하는 그녀를 보며 료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2년 가까이 묻힌 채로 있었어. 화산 할머니가 이곳에 들르셨을 때 혹시나 싶어 내가 묻힌 자리를 파보라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거기 묻혀 있을지 모른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로…….”
침아는 입술을 꼭 누른 채 눈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연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뺨을 손등으로 훑으면서 료가 중얼거렸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곧잘 땅에 들어가 자는 것을 좋아했어. 그곳에 있으면 어쩐지 편하고 따뜻한 기분이라. 내 그런 버릇은 너도 한 번 보았지.”
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문득 젖어드는 것을 보며 료가 고개를 저었다.
“날 가엾게 여기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너도 이젠 알아야 하니까. 내가 어쩌면 산 것보다는 죽은 것에 가까운 존재라는 걸. 너도 알다시피 내 몸은 결코 어느 선 이상은 따스해지지 않는다. 자, 이래도 내가 기괴하다 여기지 않느냐?”
“저는…….”
눈을 감았다 뜨는 침아의 눈꼬리를 타고 맑은 이슬이 흘러내렸다.
“기괴함의 기준을 외양에 두지 않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마음이겠지요. 어떤 이는 가벼운 정이 지나쳐 잔혹하고……. 어떤 이는 천진함이 지나쳐 잔혹하고……. 그런 것이 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료가 중얼거렸다.
“너는 이따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먼 세계를 보는 듯한 눈빛을 지을 때가 있어.”
“앞으로 말을 줄이고 자주 울어 버릇해야겠군요. 주인님이 절 신기하게 보시라고.”
조금은 명랑해진 침아의 대꾸에 묵직해졌던 공기가 일거에 흩어져갔다. 료는 침아의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면서 온화하게 말했다.
“울리고 싶지 않다. 나는 네가 늘 웃었으면 좋겠어. 내가 승냥이네 집에서 널 되찾았던 그 밤에 네게 그리 약조했었는데.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났으니 너는 다시는 울 일이 없을 거라고. 그런데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었구나.”
“아니에요, 주인님은 거짓말쟁이 같은 게 아닙니다. 온전히 제가 마음이 갈팡질팡하여 제멋대로 우는 것인데 어찌 주인님 탓이 되겠습니까.”
“그 마음, 나 때문에 갈팡질팡하니 내 탓이지.”
“제 탓입니다. 제발 그리 바보 같은 말씀 마셔요.”
또다시 정말로 화를 낼 기세인 침아에게 료는 기습적으로 입술을 겹쳤다. 침아는 가만히 있었고 료는 그것이 반가워 꽤 오래 입맞춤을 하다가 고개를 들며 속삭였다.
“누가 내게 정성을 다하는지 어떤지는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늘 네가 내게 주는 호의를 느꼈다. 내게 진심으로 호의를 보이는 자는 별로 많지 않다. 화산 할머니나 청작은 그야말로 어린 손자를 대하는 듯한 느낌의 호의였고, 우송은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의 충직함이었지. 내가 네게서 느낀 건 새로운 호의였다. 너는……어쩐지 나를 친구처럼 여기는 게 아닐까 싶더구나.”
료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말로는 건방지다고 야단치면서도 실은 그게 좋았다. 그리 격의 없이 친근하게 구는 자가 처음이라, 몇 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수십 년을 함께 해온 그 누구보다도 내 안에 차지한 자리가 커지고 말았지.”
젖은 숨결 속에서 료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어찌하다 연정으로 변했냐고는 묻지 마라. 잘은 모르지만……그냥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그리되어 있었어.”
쪽, 입술을 겹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방 안에 퍼졌다. 거듭하여 되풀이되는 입맞춤 속에서 침아는 체념하듯이 눈을 감았다. 료는 그런 그녀를 보고는 그녀의 깃옷에 손을 대었다. 허리춤의 매듭이 풀렸다. 마찬가지로 앞섶을 연 료가 천천히 그녀의 위로 몸을 포갰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서늘한 체온보다 늘씬하긴 해도 사내임이 분명한 그 묵직한 무게가 힘들어 침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그리 한숨을 쉴 만한 여유도 없어졌다. 침아가 금세라도 마음이 바뀌어 싫다고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료는 다급하게 몸을 섞기 시작했고 반쯤 체념한 기분으로 견디려 했던 침아는 마침내 힘들게 신음하면서 그에게 간청했다.
“아파요, 주인님, 제발 상냥하게…….”
당황하여 그러겠다고 말하려던 료는 흐트러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퍼뜩 떠오른 대로 말하였다.
“침아야, 내 이름을 불러보렴.”
“네? 으, 으흑…….”
한 번 강하게 짓눌러 침아가 신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뒤 료는 채근했다.
“내 이름. 이름을 불러.”
“어찌 그런 일을……, 흐읏, 그러지 마세요.”
“이름. 내 이름을 잊었느냐?”
“잊을 리 없잖아요, 하지만, 으, 아파, 으흣…….”
“불러다오. 간단하잖아. 더없이 간단한 일이잖아. 응?”
집요하게 계속되는 요구에 침아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료…….”
“날 보면서.”
얼굴을 붙잡아 마주한 채로 료는 그녀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더 이상의 힘겨루기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침아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료.”
료는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중얼거렸다.
“내게 이름이 있어서 이토록 기쁜 때도 있구나.”
“……그것이 그리도 좋아요?”
“그래. 좋아. 좋구나.”
활짝 웃는 료의 눈이 너무도 말갰다. 당장 침아와 몸을 섞고 있는 와중이란 것조차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순수해 보이는 그 웃음에 침아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바로 그가 그녀의 안으로 뻐세게 몰아쳐오며 가녀린 몸을 덮어 눌러 숨 쉬는 것조차 평소의 몇 배는 힘들게 만들고 있다. 겹쳐진 가슴을 들썩이며 뜨겁게 토해 내는 그의 숨결에 휘말려 침아는 평정심이란 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해 내는 것이 점차 어려워졌다.
“지금껏 나는 내 이름 자가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하지만 네가 자꾸 불러준다면 싫어했던 것 이상으로 좋아질지도 모르겠구나. 아아……. 나는 참 무심한 일을 했어. 그나마 내 이름은 화산 할머니께서 정성스레 지어주셨다지만 나는 네게 건성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 말았으니.”
평상시라면 당장에 그렇다고 맞장구칠 침아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땀이 돋아난 그녀의 관자놀이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료가 물었다.
“지금이라도 네게 다른 이름을 지어줄까?”
“지금이야말로 까는 요 신세가 되었으니 이제는 욕아(褥兒)라 부르실 참입니까?”
말투에 힘은 없으나 자못 장난스러운 것이 딱 침아다워서 료는 가슴이 뛰었다.
오늘 깨어난 이래 침아의 기분이 몹시 가라앉아 있는 것을 그 역시 민감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움을 넘어 후회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그 우울한 기색을 한사코 모른 척하며 마침내는 취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 몸을 포개었으나 그녀가 기꺼이 그에게 안긴 것이 아님을 아프도록 선명히 아는 것이다.
침아를 조금이라도 웃게 할 만한 것을 열심히 생각하며 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 다시는 그런 식으로 이름 짓지 않아. 음. 아 자는 전에 네가 말했듯이 어여쁠 아(娥)로 바꾸고 그 앞의 자는……. 아, 완이 어떠하냐? 사랑할 완(玩)도 좋고 어여쁠 완(婉)도 좋지. 완아라고 하면, 어, 왜? 마음에 들지 않아?”
불현듯 침아의 눈동자 속의 까만 동공이 순간적으로나마 확 커지며 낯빛이 바뀌었다. 료가 의아해하며 묻자 침아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글쎄요, 별로 예쁜지 모르겠습니다. 예쁘다가 두 번이나 겹치니 놀리는 말 같기도 하고. 그냥 침아로 살래요. 그나마 몇 년 가지고 살았더니 이름에도 정이 붙었나 봅니다.”
“그래?”
묘하게 무언가가 석연찮았으나 료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피하듯 외면한 그녀의 얼굴을 다시 반듯하게 돌려놓으며 료는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런 성의 없는 이름에도 정이 들었다 하면, 내게는?”
침아는 희미하게 웃고 만다. 료는 정말로 궁금하여 보챘다.
“말해 보렴. 내게는?”
“당연히 정이 들었지요.”
“날 좋아하느냐?”
“아무렴요.”
너무 쉬운 대꾸에 료의 미간에 그림자가 생겼다. 곧 그는 비교 대상을 찾았다.
“우송이는?”
“좋아하지요.”
에잇, 하면서 골이 난 표정이 되어 료는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그 녀석한테 시집가라고 했으면 군소리 없이 그리 갔겠구나.”
“말이 되는 소리를……. 저처럼 작은 것이 어찌 우송 아저씨 짝이 되겠습니까?”
“화산 할머니께서 그 녀석에게 비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래도 사십 년 넘게 살았다고 영기가 아주 없지는 않다고 하시더라. 아직은 혼자서는 벅차도 십 년 내로는 제 체격 하나는 자유자재로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뻐하더구나. 어떠냐, 그 녀석이 네게도 어울릴 만한 체격이 된다는데 구미가 당기느냐?”
침아는 팔을 들어 입을 가리며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이미 반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료가 그래도 화가 난 연기를 해보였다.
“말해 보아. 너한테는 나든 우송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느냐 이 말이다.”
“우송 아저씨에게 저는 아저씨 등에 멋대로 올라탄 몹쓸 꼬마일 뿐일 걸요.”
“우송이 말고 너. 누가 그 녀석 마음이 궁금하다 하였어?”
“궁금하셔야지요. 저를 그리 보낼 생각을 하셨다면.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는 데에 서로의 마음만큼 중요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때서야 료는 누그러든 기색으로 침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 말이 옳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이지. 내 마음은 이미 알 터이고……나는 네 마음속이 정말로 궁금하구나.”
몸을 숙여 다시금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껴안고서 부러 눈길을 마주하지 않은 채로 료가 물었다.
“여태껏 나를……사내로 바라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느냐?”
침아는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천장을 응시했다. 물끄러미, 길게.
료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둘의 서로 다른 숨결이 엇박자를 이루다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비슷해져 갔다. 상대가 들이쉬면 들이쉬고 내쉬면 내쉬고. 둘 중 누군가가 의식해서 맞추려고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우송 아저씨를 좋아합니다.”
마침내 침아가 내놓은 대답은 몹시도 엉뚱한 것이었다. 료가 움찔하며 고개를 드는데, 침아가 담담히 마저 말했다.
“하지만 우송 아저씨와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가 아무리 원하신다고 해도, 싫습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침아는 료의 눈을 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주인님과도 이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주인님을 거역할 수 없어서 안긴 것은 아니에요. 다만……주인님이 그토록 간절하시다면 안겨도 좋을 만큼 주인님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손 안에 들어온 료의 얼굴을 가만가만 어루만지며 침아가 물었다.
“저를 안는 게 좋으십니까?”
료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좋아서, 너를 안는 거다.”
“그렇군요. 저도 주인님이 좋아서, 주인님께 안기는 거니까 우린 서로 같은 이유로 이러고 있는 거네요.”
그 상냥한 말이 료의 마음 어딘가를 붙잡아 나선을 그렸다. 삽시간에 큰 바람이 일어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심장이 온통 두근두근 요동을 쳤다. 그것을 버텨내며 료는 홧홧하도록 붉어진 얼굴로 침아에게 말했다.
“아직 부족해. 한참 부족해. 아니, 앞으로도 까마득히 멀었다.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울 정도는 되었을 때 네 마음이란 것도 인정해 주마.”
“어머. 주인님은 제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울고 싶으신 거군요?”
놀리는 소리였으나 료는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기울여 침아의 입술을 덮기 직전에 그가 말했다.
“나를 울게 만들어 보렴, 내 귀여운 아이야.”
침아가 자명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여자가 두 번째 음식상을 마루에 차려놓고 돌아가는 길에 묘한 소리를 들었다. 그냥 가려다가 계집의 흐느낌 같은 소리가 끊일 만하면 이어지고 끊일 만하면 이어지는 것이 하 수상하여 걸음을 옮기다 보니 소리의 근원지가 욕간 쪽임을 알 수 있었다.
“응? 내 아까 문을 열어 놓고 갔던가? 또 앵무가 날아들었나?”
북쪽 후원의 여자들 사이에는 한창 작고 어여쁜 새를 기르는 것이 유행이 되어 있는데 이따금 마당에 내어놓은 새장이 열려 소동이 나곤 했다. 일전에 한 번 그리 날아온 새가 주방에도 들어와 분탕질을 쳐놓고 간 바람에 소제를 하느라 생고생을 했던 여자는 또 괜한 야단을 들을까 미간을 버썩 찡그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으흑! 으, 으응……!”
욕간 문이 보이는 곳에서 들려온 그 소리에 여자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본능적으로 어떤 소리인지 깨닫고 귀를 쫑긋하여 더욱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니, 그 노력이 전혀 부질없지 않았다.
“참지 말라니까. 그쯤하고 소리를 내.”
사내의 목소리! 게다가 지금 여기 머물고 있는 자들이 누구던가? 여자의 귀는 더더욱 쫑긋이 섰다.
“괜찮대도, 여기에 또 누가 있다고 그리 조심하느냐.”
“……시, 싫어요. 여기, 목소리가 너무 울려서…….”
잠시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계집의 신음소리는 잦아들었다. 아니, 잦아든 게 아니라 물소리에 가려졌다고 봄이 옳겠다.
여자는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놀라서 굳었던 몸이 풀리자 슬금슬금 발소리를 죽여 욕간 벽을 따라갔다. 널문을 대어둔 곳에 왔을 때 짜 맞춘 문과 어리 사이로 존재하는 아주 약간의 틈을 보고 여자는 호기심을 못 이겨 눈을 가져다 댔다. 또르륵 굴러가던 눈에 이윽고 허연 것들이 어리비쳤다.
저도 모르게 여자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 허연 것의 정체는 목욕통 안에서 서로 얽혀 있는 몸뚱이였다. 사내의 널찍한 등 때문에 앞쪽 계집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조바심을 내는 여자의 귀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을, 내 이름을 불러줘, 어서.”
“……료, 으읏.”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주인님, 제발, 아흐, 료, 료…….”
“아아, 귀엽기도 하지. 침아야, 너는 정말로 사랑스럽구나.”
사내의 부드럽다 못해 달 것 같은 목소리와 달리 계집을 안는 몸짓은 박력에 차 있어 품 안의 계집은 금세라도 까무러칠 듯 맥없는 신음을 내고 있었다. 이름을 듣긴 하였으나 평소에 보아온 료와 침아, 두 주종을 생각하니 믿기지가 않아 여자는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싶어 더욱 눈을 부릅떴다.
스윽, 료가 문 쪽을 돌아본 것은 그때였다. 그것도 여자의 눈이 있는 바로 그곳을 쳐다보았다.
‘어이쿠!’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한 것을 겨우 모면하고 여자는 허둥지둥 달아났다.
그 소리가 아주 멀어졌을 때 료는 목욕통을 꼭 붙들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침아를 앞으로 돌려 안았다. 침아가 초점이 풀리다시피 한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물이 어째서 식지를 않는지요.”
“몸이 노자근할 때엔 뜨거운 물에 푹 담그는 게 좋지 않으냐?”
“일부러 그러시는 거지요. 주인님은 몰라도 저는 몸이 익어버릴 것 같습니다.”
“그거야 느낌이 그런 거겠지. 네 몸은 복사꽃 같은 빛깔로 탐스럽기만 하구나. 아아, 네 입술을 보렴. 석류 속이라 해도 이보다 붉을까?”
그러면서 료는 침아가 더는 말을 못 잇게 입술을 겹치며 새로이 몸을 섞기 시작했다. 아까 그들을 본 여자의 일에 언뜻 눈썹을 치켜 올리긴 하였으나 불쾌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여자 입이 가벼워야 할 터인데.’
부러 여자가 올 만한 시각을 계산하여 몸을 씻으러 와서는 침아가 힘들어하는 것도 모른 척하며 퍽 거칠게 행동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일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가 보듬은 그대로 안겨 있는 침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보였다. 매끄러운 등을 닳도록 어루만지는 료의 두 손 중 하나가 길게 뻗어져 스윽 나무 목욕통 안의 물들을 휘저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물부터 새삼스레 더 뜨거워져서는 식어가던 물을 도로 데운다. 그 가벼운 주술을 침아는 미처 헤아리지조차 못했다. 의심은 하였으나 강하게 다그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약간은 미안하다. 하지만 이리 흐늘흐늘해져 있는 모습조차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오로지 그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아기 같지 않은가. 그래서 료는 아주 조금만 더……하고 다짐하면서 잦아들던 움직임에 힘을 실었다. 대신 침아의 귓가에 상냥하게 속삭였다.
“씻고 나가서 점심을 들자꾸나. 너 좋아하는 단것이 맘에 차게 있으면 좋을 텐데. 목욕을 이리 오래할 줄 알았으면 빙차를 가져오게 할 걸 그랬어.”
“아무래도 좋아요. 자고 싶어요. 이대로 잠들면……한나절은 잘 것 같아.”
“그래. 푹 자야지. 업어 가도 모르게 말이야.”
료는 웃었다. 그러면서 언뜻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마음에 들어서 서둘러 실행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둘의 첫 혼욕은 침아가 어지럼증으로 쓰러지는 일 없이 끝났다.
해가 서쪽 하늘에 걸린 상황에서 중식이라니 인간들 기준으로는 이상도 할 일이지만 이 저택에서는 예삿일이다. 너무 곤해서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침아를 료는 아기 다루듯이 손수 떠먹여주면서 배를 채우게 한 뒤 그녀가 내내 바란 대로 잠자리에 눕게 했다. 늘 그랬듯이 베개에 머리를 놓자, 그대로 꿈길이었다.
료는 잠시 그 옆에 팔을 괴고 누웠다.
긴 목욕의 후유증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아직도 식지 않은 침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못 견디겠다는 듯이 쪽쪽 뺨에 입맞춤을 했다. 그러다 퍼뜩 이러다 아예 날이 저물지 하면서 정신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그는 우송이 공사 중인 서쪽 집터로 갔다.
“우송아.”
“엇, 주인님?”
그를 보고 반색을 하며 못생긴 얼굴에 웃음을 짓는 우송에게 오는 김에 챙겨 온 주전부리를 내밀자 그 웃음이 더욱 커졌다.
“방금 점심참 받았는데 이건 또 웬 건지요.”
“설마하니 위가 부족해서 못 먹는다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
“절대 그렇지는 않지요. 히히. 아이고, 유밀과구나.”
침아가 쥐었을 땐 제 얼굴 반만 했던 유밀과가 우송에게는 한입 거리다. 잠깐 맛이나 본다는 느낌으로 우물거렸는데 어느덧 절반을 뚝딱 해치웠다. 남은 절반을 보고 아껴먹을지 그냥 다 먹어버릴지 고민하며 입맛을 다시던 우송이 료에게 물었다.
“근데 설마 지금에야 일어나신 것은 아니지요? 얼굴빛이 유난히 멀끔하신 것이 막 욕간이라도 다녀오신 것 같습니다만.”
“귀신이구나. 지금 일어난 건 아닌데 목욕은 한 지 얼마 안 됐다.”
“그…….”
우송은 물으려다 말고 다시 유밀과를 주워 먹었다. 아예 바닥을 내고서 허리에 줄줄이 차고 있던 호리병으로 목을 축인 뒤에야 다시 질문할 용기를 냈다.
“이제 제가 그 아이를 아씨라 불러야 합니까?”
느닷없이 눈치 빠르게 구는 녀석……이라고 할 일도 아니다. 어제 세우지에 밤놀이 자리를 마련하기 전에 우송에게는 언질을 줬던 것이다. 내일은 늦잠을 잘 예정이니 내가 먼저 찾으러 오기 전에 문안드리러 건너올 것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료를 우송은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만 끄덕하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침아와는 전혀 다르다.
“음, 글쎄. 그건 침아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자. 그 아이가 싫다고 하면 굳이 뭘 바꾸고 말고 할 필요 있겠느냐.”
느긋한 료의 대꾸에 진지한 표정으로 우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히죽 웃고선 몸을 구부려 료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이고, 우리 주인님도 사내가 되셨구먼요. 사내도 다 같은 사내가 아니고 총각도 다 같은 총각이 아니지요. 사내란 모름지기 이것, 이것을 써 본 뒤에야 진정한 수컷으로 거듭나는…….”
음흉한 미소와 함께 우송이 불쑥 툭툭 두드리는 무언가를 보고 료는 기분이 나빠졌다. 다른 사내놈 양물 자리를 보고 기분 좋아하는 사내들도 세상에 있다는 것을 료는 전혀, 눈곱만큼도 이해할 수 없는 부류였으므로. 그래서 아주 제대로 힘을 실어서 우송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놈이 며칠 먼저 계집 구경을 하였다기로 누굴 더벅머리 취급하느냐? 그리고 그게 누구 덕분이었는데? 엉? 엉?”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아이고, 한 번만 봐주십쇼.”
우송이 죽는 소리를 내긴 하는데 얼굴에 실실 웃음이 비어져 나오니 흡사 익살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몸집 커다란 녀석이 그리 안 하던 짓을 하니 엄하게 기선을 제압하려던 료도 그만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놀려라. 멋대로 놀려. 내 기분이 좋으니 화내는 것조차 못할 일이구나.”
“어른이 되셨다는 뜻이구먼요. 암요.”
“시끄러워. 흠. 내 여기 온 것은 한 며칠 밖에 나갔다 온다는 소릴 하려고 들른 게다.”
“어? 밖에 나가신다굽쇼? 또 무슨 볼일로?”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우송에게 료가 웃으며 말했다.
“침아도 데리고 간다.”
“아……. 둘이서만 놀러를 간다는 뜻이지요?”
“서운해 하지 않는 게지?”
눈치 빠르게 알아듣는 우송에게 료가 묻자 우송은 두 손을 내저으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료는 마구간에서 말 한 필 내갈 거라고 말을 하고 이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뒤에서 우송이 머뭇거리듯 말을 해왔다.
“저기, 주인님. 저도 나중에 색시를 얻으면 그, 그렇게…….”
“뭘 그렇게?”
“아니 그러니까 저기 주인님처럼…….”
우송이 꼼지락대며 말하고자 하는 걸 이미 짐작했으면서도 료는 짓궂게 고개를 갸웃하다가 씩 웃었다.
“색시만 얻어라. 열흘이고 한 달이고 간에 네 원껏 휴가를 줄 테니.”
넙데데한 얼굴에 해죽이 웃음 짓는 우송을 뒤로 하고 료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제대로 잔 게 이틀 전임을 생각하면 졸릴 법도 한데 아직 온몸에 활기가 돌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겨도 좋을 만큼 주인님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그 말을 떠올리니 새삼 가슴이 뿌듯해졌다. 일단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노라 이야기했던 그 작은 아이의 마음속에 료라는 이름으로 채워진 자리가 있음을 그는 믿었다. 앞으로 더 많이 채워주고 싶다.
“아, 청작이구나.”
“작은도련님, 화산 어르신께 가시는 길이십니까?”
우연히 마주친 청작을 보고 료는 기꺼운 낯으로 다가갔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자넬 만났으니 됐어. 나 며칠 바깥 구경을 하고 올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예, 작은도련님 뜻이 그러시다면야. 언제 출발하실 계획이십니까? 필요한 건 없으신지요?”
“지금. 딱히 필요한 건 없어. 마구간에 가서 말 한 필 꺼내가려고.”
“이리 갑작스레……. 행선지로 어디를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휘였다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일인데 료에게는 걱정스레 묻는 청작을 보며 료는 기분 나빠하는 대신 빙긋이 웃었다.
“산 아래 인간들 마을에 나갈 생각이야. 날이 밝으면 저자도 둘러보고 어쩌면 전에 들렀던 객점에서 머물 수도 있겠어. 그냥 즉흥적으로 여기저기 둘러볼 거니까 아주 확답은 못해.”
청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나무 망치질 소리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우송은 아직도 저기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저 녀석은 데려가지 않을 거거든.”
“그러시면 종자를 따로 붙여 드리겠습니다. 적당한 아이로 두셋…….”
“아니야, 필요치 않아. 침아를 데려갈 테니까.”
청작은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희미하게 이마에 주름까지 지으며 말했다.
“잔심부름이라면 몰라도 인간의 아이가 어찌 주인님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까?”
“못하지. 그러니 내가 그 아이 안전을 보장해 주어야지.”
마냥 엉뚱하게 들리는 소리에 청작은 어리둥절한 눈빛이 되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데 천 리는 가도 느리게 가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료는 청작에게 슥 고개를 기울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아이, 앞으로 나를 지아비로 모실 거야. 그러니 이젠 인간의 아이니 어쩌니 하는 표현은 곤란해. 물론 다른 이들도 가벼이 대한다면 내가 적잖이 불쾌할 거야.”
뒤늦게 청작은 무언가 확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료는 청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어 말했다.
“화산 할머니께서 찾으시면 알아서 잘 말씀드려줘.”
“작은도련님, 노자를 챙겨 가셔야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지금은 수중에 들고 있는 것이 없어 그러니.”
“전에 쓰고 남은 것이 있는데 그걸로 부족한가?”
“노자란 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사고 싶은 게 생겼는데 돈이 부족하여 못 사게 되는 것은 낭패가 아니겠습니까?”
“그럴 만한 건 없을 걸? 내 전에 보았지만 딱히 눈에 드는 건 거의…….”
“함께 구경하시는 분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그 질문이 적중했다. 료는 당장이라도 마구간으로 가고 싶어 발이 이미 그쪽으로 향했던 것을 돌리고 청작을 보며 인정했다.
“오징어가 보이면 다 쓸어오고 싶어 할지도 몰라. 자네 말이 옳아.”
어째서 오징어를? 청작은 태연하게도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돌아가 계십시오. 제가 겸사겸사 챙겨서 말과 함께 동쪽 일각문 앞으로 가져가겠습니다.”
“너무 거창해지는 건 곤란해. 수레 같은 건 절대 내오지 마. 말 한 필이야. 알겠지?”
재삼 당부하는 료를 떠밀듯이 돌려보냈다. 청작은 곳간으로 걸음을 옮기며 우선 소용이 될 노자의 정도를 헤아리는 한편 자신의 꽉 막힌 눈치를 한탄했다. 어찌 그리 몰랐을까. 인간들 저자에 나가 보석상에 들러 가락지를 사는 것도 보았고, 머물게 된 객점에서 기녀를 불러와 묘한 수업을 배우게끔 제 손으로 주선하였거늘. 하물며 저택에 불이 났다고 날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다만 부리는 몸종의 일을 근심해서라고는 볼 수가 없지 않은가. 일선에서 물러나 은거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늙었구나, 늙어. 그래도 아주 못 쓰게 되기 전에 근심 하나는 덜게 되었구나.”
문득 웃기 시작하였으니 한숨지었다가 혼자 허공에 대고 웃었다가 그 모양새가 요상도 했다. 다행히도 아무도 본 자가 없어서 늙은 송골매로서의 체신을 지켰다.
저녁 길이 쌀쌀하다며 청작이 내어온 고운 담비털 갖옷으로 잠이 든 침아를 푹 감싸 앞에 앉히고 료는 고삐를 잡아당겨 길을 떠났다. 뒤에서 청작은 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로도 한참을 서 있었다.
땅거미가 지고서야 청작이 일각문을 단속하고 동쪽 뜰을 지나 걸어가는데 공중에서 한차례 서늘한 바람이 불더니 커다란 새가 그의 앞에 날아들었다.
“큰도련님.”
휘는 굳이 변모하지 않고 짐새인 그대로 청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서 무엇을 하느냐?”
“작은도련님이 오늘 내내 거동을 하지 않으시는 듯하여 어떠신지 뵙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굳이 거짓말을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어째선지 청작은 저도 모르게 거짓을 고하고 있었다. 휘는 힐끗 동쪽 거처를 쳐다보았다. 안에 불빛이 없으니 괴괴하였다.
“조용하구나. 이른 시각인데.”
“탈피란 것이 생각 이상으로 기력이 많이 쓰이는 일인가 봅니다. 작년 이맘때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석식도 마다하시고 일찍부터 잠자리에 드셨지요.”
“흐응. 침아가 때아닌 옥살이를 하는군.”
반들거리는 휘의 까만 눈을 보며 청작은 속으로 이분이 아랫것들의 이름을 외우시는 분이던가? 하고 의아해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 그나마 청작은 가재라 하여 그 이름 자나마 외우고 있다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침아의 이름이 당연하다는 듯이 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아무 사건도 없이 흘러간 세월이 길었던 모양이다. 세월과 함께 방심을 하여 집 안 구석구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구나 싶어 청작은 당장 내일부터 다른 이들의 보는 눈, 듣는 귀를 빌려올 계획을 했다.
“뭐, 달이 기울면 해가 뜨겠지. 오늘도 달빛이 좋구나.”
그런 말을 남기고 휘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사뭇 느리게 날면서 세우지 쪽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청작은 안심하여 어깨를 들썩였다. 료가 간 방향과 반대쪽이었다.
이왕 이리된 거 화산 어르신께 고하는 것도 내일로 미루자고 생각하면서 청작은 다시 걸음을 떼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휘의 말대로 만월에서 하루가 흘러간 둥그스름한 달이 참 밝기도 하였다. 연정에 휩싸인 젊은 남녀에게는 얼마나 좋은 달인가 하면서 새삼 젊을 적으로 돌아간 듯이 조금 들뜬 기분을 맛보았다.
청작이 저택에서 올려다보는 그 달을 어둑해진 산길을 내려가는 료도 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제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휘영청 밝은 금빛 달이 마치 마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의 품에 기대고 있던 침아가 무어라 잠꼬대를 하는 소리에 료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더워, 꿀을 탄 빙차 한 잔만…….”
아무래도 겨울에나 입는 담비 갖옷을 단단히 둘러준 것이 문제였나 보다. 침아는 시원한 곳을 찾아 바동거렸고 그것이 료의 가슴팍이었던 것 같다. 옷까지 헤치고 맨살에 찰싹 붙어오는 그녀 때문에 료의 볼이 슬며시 붉어지려 했다.
붉은 철쭉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길을 가면서 료는 중얼거렸다.
“어서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꾸나.”
달빛이 저리 좋은데 완상할 여유도 없이 사내는 계집 생각에 애꿎은 말만 자꾸 어서 가라 구령했다. 말이 산을 내달려 간다.
누군가가 넘치는 마음에 푹 빠져 온 세상이 제 것인 줄 아는, 그런 흔한 봄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