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화유(花遊)
본의는 아니었으나 한낮부터 멱을 감게 된 둘이다. 료는 목욕을 하고 나면 한 시진 정도는 푹 자야 기력을 온전히 회복하기 때문에 저택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당연히 침아는 죽부인 신세가 되어 료의 품에서 오지 않는 잠을 자는 척하였다. 하지만 허물벗기가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곤한 일인지 료가 금세 세상모르게 잠이 든 까닭에 침아는 오래지 않아 료의 품에서 살짝 빠져나왔다.
그길로 침아는 부엌으로 향했다. 빈 물동이 안을 들여다보자 거기엔 꽃다발이 하나도 아니고 네 개가 들어 있다. 세 개는 아까 료가 허물벗기를 하는 동안 물에서 나온 침아가 몸을 말릴 장소를 찾다가 햇빛 잘 드는 쪽에서 발견한 야생화들로 만든 것이다. 그 꽃들 옆으로 노란 제비꽃 다발도 얌전히 놓여 있다. 서늘한 동이 안에서 꽃은 여전히 싱싱했다.
침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 꽃들을 모두 꺼내 안았다.
“한 바퀴 돌고 올까나.”
가장 먼저 그녀는 화산 노파에게 갔다. 객청 밖에서 시녀를 만나 물으니 화산 노파는 가진과 함께 한창 저포놀이를 하는 중이라 했다. 떠들썩한 웃음소리, 특히나 가진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밝게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침아는 들어가 방해하는 대신 들고 온 꽃다발 중 두 개를 건넸다.
“웬 꽃이지?”
“저희 주인님께서 그야말로 씻은 듯이 나으셨거든요. 이젠 어디로든 훨훨 날아가실 수 있답니다.”
“아……그래.”
시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녀 역시 아까 료가 날아온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이 저택의 대개의 자들이 그러하듯이 시녀는 료의 본 모습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오늘에서야 보게 된 료의 본체에 시녀도 뒷걸음질을 쳤었다. 소매로 가린 얼굴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굳이 이를 것도 없다.
“제가 너무도 기쁜 마음에 그간 문병 와 주셨던 것에 이런 하잘 것 없는 답례라도 하려고 왔습니다. 향기로운 것들만 꺾어 만들었으니 오수를 주무실 때라도 머리맡에 두시면 기분이 나쁘진 않으실 거예요. 화산 어르신과 가진 아씨께 대신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잘 것 없다고는 했으나 꽃다발을 꾸민 솜씨 자체는 썩 빼어났다. 시녀가 꽃다발을 쳐다보면서 알겠다고 대답하고 돌아서려는데 침아가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가선 아씨께서는 어찌하여 먼저 돌아가셨습니까?”
“글쎄……. 몸이 좀 미령해 보이시더라.”
놀러 왔을 땐 멀쩡했던 가선이 료의 모습을 보고 비위가 상해 돌아가는 것 같더라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니 그만하면 상냥했다. 아랫것들끼리는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곱게 자란 분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않으냐며 수다를 떨었지만 적어도 료를 모시는 침아 앞에서 말하지 않을 분별 정도는 있었다.
“그럼 그리로 가봐야겠어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꾸벅 고개를 숙여 절하고 뛰어가는 침아에게 웬만하면 거긴 가지 말지, 하고 말해 주려다 시녀는 어깨만 으쓱하면서 돌아섰다.
두 번째 목적지에서 여러 시종 중 하나에게 가선 아씨를 보러 왔다고 말을 전한 뒤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정이 마루로 나왔다. 침아를 보는 그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아씨께서는 기분이 좋지 않아 쉬고 계십니다.”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해 딱딱하게 대꾸하는 그에게 침아는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꽃다발을 보였다.
“꼭 만나서 직접 전하란 분부를 듣고 왔는데요.”
노란 꽃다발과 야생화 꽃다발. 정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어떤 분이 보내셨단 말입니까?”
“어……여기서 말해도 되나?”
침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듣는 귀가 여럿이다.
“아무려나 상관없으려나요, 보내신 분에 대해 말하자면…….”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아, 그래도 되나요? 그럼 기꺼이.”
마지못한 정의 말에 침아는 천진하게 웃으며 섬돌로 올라섰다.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침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치는 일을 반복하더니 결국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씨는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침아는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콧노래를 이어갔다. 꽃다발의 향기를 맡기도 하면서 딴청을 부리던 그녀가 역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 모시는 분, 도통 고마워할 줄 모르는 응석받이가 되는 것도 이상치는 않네.”
“평상시의 상냥한 모습이 아주 거짓은 아닙니다.”
“비슷한 자들에게는 잘한다? 나도 그런 말은 하지. 근데 그거 아나?”
“무엇을 말입니까?”
“인간을 일러 잔인하다고 하는 건 먹지도 않을 거면서 지들끼리 같은 인간을 죽이고 핍박하기 때문이잖아? 하물며 당신 주인은 난새잖아. 그 어여쁜 분이 ‘거슬리니까 죽여야지’ 하는 게 난 무지하게 소름 끼치는데. 당신 눈엔 귀엽나봐?”
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두루미도 겉보기만큼 온화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지. 상종하지 말아야지. 이후로는.”
가선이 머무는 방에 가까워지자 정은 침아를 세워놓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그녀가 들어가게끔 했다.
보료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가선은 겉옷을 가져와 어깨에 걸쳤을 뿐 자다 깬 듯한 모습이었다. 이가 보일락 말락 하게 웃으면서 어서 오라고 말을 건네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침아는 하마터면 쓴웃음을 지을 뻔했다.
“다소 미령하시다 들었는데 이것이 와서 곤한 잠을 깨워드렸나 봅니다.”
“괜찮다. 그리 깊이 잠든 것도 아니었어.”
둘은 서로 한 치도 지지 않을 만큼 능숙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뜻 없는 이야길 주고받았다.
“이리 노리개도 주셨는데 이제껏 주인의 일에 경황이 없어 보답다운 보답도 못하였습니다. 다른 솜씨는 없으나 떡이라면 좀 만들 줄 아니 며칠 내로 자실만한 것으로 약간 마련해 보겠습니다.”
침아는 오늘 처음 옷깃에 내어 단 마노 노리개를 보이며 그리 말했다. 뒤에 서 있던 정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음식을 보내온다는 소리가 마치 그에게 경고하는 소리 같았다.
“나는 찰진 건 그리 잘 먹질 못해서…….”
“아, 바다 건너 분이시지요, 참. 그러면 전병으로 준비를 해야 하나. 제가 전병을 좋아하긴 하는데 만드는 솜씨가 보잘것없습니다. 음, 어쨌든 유념하고 만들겠습니다. 아씨께 드린다는 핑계로 제가 좀 먹을 욕심이니 아무쪼록 눈 감아 주셔요.”
모종의 비밀이라도 맺는 듯 눈을 찡긋하며 웃는 침아를 보고 가선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네 손에 든 그것은…….”
가선이 먼저 용건을 물어오도록 부러 다른 소리를 길게 늘어놓았던 침아는 그제야 아 참, 하는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보았다.
“이게 가장 중요한 용건인데, 제 정신 좀 보셔요.”
머리를 두드리는 시늉을 하더니 침아가 슬쩍 정을 돌아보았다. 정을 꺼리는 눈치라 가선이 말했다.
“정이는 신경 쓸 것 없다. 입이 무거운 아이야.”
“하오나 약속이 그렇지 않은데…….”
계속 주저하자 가선이 고개를 들어 정에게 나가 있으란 눈짓을 했다. 정은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선이 재차 턱짓을 했지만 정은 요지부동이었다. 침아가 묘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가 둘만 남겨놓고 나가려들 턱이 없었다.
“정아, 너는 나가 있도록 해.”
그렇게 가선이 말로써 못을 박자 정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문밖에 서서 바짝 귀를 대고 안의 상황에 온 신경을 곧추세웠다.
침아는 무릎걸음으로 가선에게 다가가 귀를 빌려달라는 몸짓을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잠자코 고개를 돌려주는 가선에게 침아가 속삭였다.
“큰도련님께서 아씨께 주라 하신 것입니다.”
“응? 그분이?”
가선도 겨우 들을 정도로 작은 침아의 목소리와 달리 가선의 반문은 꽤 컸다. 침아는 쉬잇,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대면서 노란 제비꽃 다발을 가선에게 주었다. 이어서 자신이 만들어온 야생화 꽃다발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걸 받기는 아침에 받았는데 달랑 그것 하나만 들고 오자니 남의 눈이 꺼려져서 말이지요. 분명히 전해 드렸으니 이제 한시름 덜었네요.”
노란 꽃을 보는 가선의 얼굴엔 처녀다운 홍조가 퍼졌지만 침아를 보는 눈에 의구심은 남아 있었다. 가선 역시 이젠 속삭이듯 물어왔다.
“그분이 왜 너를 통해 이런 것을 보내온단 말이지? 너는 왜 이런 심부름을 하고?”
“제가 예전에 그분께 진 빚이 있어서요.”
“빚?”
“빙판에 넘어져서 머리가 깨져 죽을 뻔한 것을 감쪽같이 고쳐 주셨었지요. 3년도 전의 일이데 말이죠. 그러니 제가 섣불리 떠들고 다니지 않을 거라 믿으셨겠지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일이니까…….”
“조심스럽다니? 무어가?”
가선이 떠보듯이 질문을 던지자 침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문가를 의식하며 가선에게 귀엣말을 했다.
“가진 아씨 귀에 들어가면 일이 난처해지지 않겠습니까. 혼담의 상대는 언니분인데 큰도련님이 마음에 두신 분은 정작…….”
가선은 비로소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그럼 내게만 이 꽃을 보내신 거란 말이구나.”
“따로 보내신 것도 있지요.”
“또 무엇을?”
침아는 이번에도 가선에게 귓속말을 했다. 몇 마디 짧은 말에 가선의 뺨에 한 겹, 두 겹 홍조가 거듭 되었다. 침아의 오른쪽 눈이 야릇하게 반짝였다.
세 번째 목적지를 향해 침아는 달음박질을 쳤다. 이번 상대는 과연 저택 내에 있기나 할지 근심이다.
“어딜 그리 뛰어가는 게냐?”
“어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인간들의 속담은 바로 이런 경우를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침아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뱅글 돌아서며 활짝 웃었다.
높은 오동나무 가지에 앉아 서책을 보다가 침아를 발견한 휘는 불러 세운 소리에 침아가 그리 웃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흐응, 하고 웃었다. 아침에 새침하게 돌아서던 높은 콧대가 지금은 좀 죽은 모양이지 하면서.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듯이 사뿐하게 바닥에 뛰어내린 그의 앞으로 침아가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야생화 꽃다발을 대뜸 내밀었다.
“내게 주려고?”
침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걸 주려고 날 찾아다녔단 말이냐?”
또 끄덕 고개만 주억거렸다. 휘는 꽃다발을 받는 것을 잠시 미룬 채 뒷짐을 지고 물었다.
“내가 이 꽃다발에 대해 또 보답을 하면 어쩌려고?”
침아는 고개만 갸웃했다.
“그러면 너도 또 보답을 할 참이냐?”
갸웃갸웃, 고개를 가지고 놀면서 침아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말은 부러 하지 않는 모양이다. 역시 하는 짓이 퍽 맹랑하고도 앙큼하다. 이 아이와 있으면서 료가 달라진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꽃다발을 받는 척 손을 내밀면서 휘는 침아의 손등을 가벼이 쓸어 만졌다. 당연히 짐짓 뒤로 뺄 줄 알았는데 침아는 자신의 손등을 희롱하는 휘의 손을 보고만 있었다.
요것 봐라? 휘는 입술을 말아 올리며 슬며시 침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왜 이리 고분고분하지? 못 먹을 걸 먹었나?”
침아는 다가온 그의 얼굴에 꽃다발을 밀듯이 건넸다. 어쩔 수 없이 꽃을 받아 쥔 그에게서 이미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 침아가 물었다.
“제 월궁가(月宮歌) 마저 듣고 싶으십니까?”
“월궁가……. 아, 달로 달아난 그 요녀에 대한 이야기 말이렷다?”
가만히 읊조린 휘가 어렵지 않게 기억을 해내자 침아는 상그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억하지 못하시면 그만이다 했는데.”
“기억 못할 것은 또 무어냐. 나더러 바보 바보 해대니 내가 참으로 바보인 줄 아는 것이야?”
침아는 그 말엔 대꾸하지 않고 짐짓 딴청을 부렸다.
“오늘같이 만월인 밤에는 삼경(三更) 무렵 그 누대에서 보는 달빛이 그만이랍니다.”
“그래?”
휘는 소박한 꽃다발을 들여다보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런 밤에 료는 네가 혼자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둔단 말이냐?”
“평상시라면 그렇지 않으나 오늘은 제 주인이 퍽 곤하신 모양이더이다.”
짐작 가는 이유가 있으니 침아의 말이 엉뚱하지 않다. 료가 허물을 뒤집어쓴 꼴로 화산 노파의 객청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미 휘의 귀에 들어온 후이다. 그 객기에 기가 차하고, 다른 무리들 앞에서 그 못난 추형을 보였을 것에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던 휘였다.
탈피를 끝낸 뱀들은 곧잘 기력이 쇠하여 방심 상태가 되는 법이다. 뱀은 아니나 뱀과 겹치는 버릇을 몇 가지 지닌 료라면 오늘 곤하게 늘어져 있을 것이 상상이 간다.
그 아이의 추태가 아주 나쁘지만도 않을 때가 있구나 싶어 휘는 쓴웃음을 지었다. 꽃다발 너머로 침아를 보면서 속으로 의아해하기도 했다. 저 아인, 저리도 커다란 흠집이 보이는데 어찌하여 자꾸 수작을 걸고 싶어질까?
“내 생각해 보지.”
그 말엔 굳이 대꾸치 않고 침아가 나붓이 절을 하고선 돌아섰다. 총총히 걷다가 이내 타박타박 소리를 내면서 달려서 그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휘는 다시금 오동나무 그늘에 깃들어 서책을 펼치다가 눈을 들어 아래쪽에 펼쳐지는 풍경 속에서 침아의 모습을 찾았다. 담황색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팔랑거리며 가는 것이 꽤 어여쁘다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 옷 속에 감추어진 몸이 그보다 훨씬 고운 빛깔임을 알고 있다.
“……삼경(三更)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풀리는 일 앞에서 그는 얼마쯤 조소했다. 그가 마음먹어 얻지 못했던 여자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조차 아니었기에 그는 금세 침아의 일을 잊고 서책의 내용에 빠져들었다.
바야흐로 삼경이 다가와 휘가 누대에 나섰을 때 사방은 적요했다. 료가 머무는 동쪽 채에 불빛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는 얼마쯤 웃었다.
피리라도 불까하고 꺼내다가 공연히 자는 이를 깨우면 안 되겠지 하면서 도로 넣었다. 잠시 난간에 기대앉아 달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의 말마따나 만월의 달은 어여쁘기도 하였다.
바스락거리며 치맛자락을 끌고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을 들었음에도 휘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자가 계단을 마저 오르는 것을 기다렸다가 휘가 중얼거렸다.
“달빛이 퍽 좋구나.”
힐끗 곁눈질하였을 때 노란 제비꽃 다발을 품에 들고 고개를 숙인 계집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치맛자락이 보기가 좋았다.
“여기까지 와서 내외를 하자는 것이냐?”
장난스레 말을 걸며 부러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더니 계집이 마음을 먹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 꽃, 마음에 들었던 게지?”
“……예.”
수줍은 목소리에 슬며시 웃던 휘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껴 계집을 돌아보았다. 그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은 뜻밖에도 가선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의아해하며 난간에서 손을 떼는데 가선이 사박거리며 그에게 또 한 걸음 다가왔다.
“예 오는 것이 옳은 일인지 종일토록 생각하였으나……시각이 다가오니 저절로 발이 이쪽으로 향하더이다.”
사뭇 떨리는 목소리하며 조심스럽게 교태를 담은 몸짓은 휘에겐 뜻하는 바가 너무도 명료했다. 휘가 잠자코 있자 가선이 고개를 들어 두 눈에 휘를 담았다. 추파가 일렁이는 그 눈길에 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제 발로 오는 미녀를 내칠 이유야 없지.’
지극히 그다운 생각과 함께 아름다운 눈매에도 미소를 담아 휘가 슥 손을 내밀었다. 손에 잡힌 가선의 손을 가벼이 당겼더니 가선은 속절없이 그의 품에 안겨 들어왔다. 노란 꽃다발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꿩 대신 닭……. 아니 인간 대신 난새인가?’
일이 어찌 돌아갔는지는 날이 밝으면 알아봐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능숙한 손길로 가선의 얼굴을 감싸며 입술을 겹쳐오는 휘를 보며 가선이 눈을 감았다. 천천히 싸늘한 바닥 위로 가선을 눕히는 휘의 등 뒤로 달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료와 침아는 이미 세우지에 나와 있었다. 우송이 한 발 앞서 세우지에 작은 배를 가져다 띄운 참이었다. 못 가장자리에 딱 배를 묶어두기 알맞게 서 있는 입석에 밧줄을 단단히 걸어놓고 제가 먼저 배에 올라가 어디 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바지런한 우송이 삿자리며 화로도 미리 가져다두었고, 보자기를 씌운 소반도 몇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비파를 등에 지고 깃옷만 두 벌 품에 안고 온 침아는 어리둥절해했다.
“뭐가 이리 바리바리 많습니까? 저희만 구경하는 게 아닌 모양이지요?”
조용히 소곤거리며 묻자 료가 힐끗 내려다보고는 깃옷을 달라 손을 내밀었다. 침아가 재빨리 그의 어깨에 깃옷을 걸쳐주는 사이 료가 말했다.
“우리만 할 거다.”
“셋이서 노는데 뭘 이리 요란하게.”
우송도 함께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굳이 고쳐주지 않았다. 료는 어깨만 으쓱했다.
“죽다 살아나지 않았느냐. 조금 흥겹게 보내도 무에 대수야?”
“그건 또 그렇습니다. 아, 오징어 같은 게 있으면 화로에 구워먹으면 참말 좋겠습니다만.”
“오징어는 없고 마른 생선이라면 좀 챙겨보라 했다. 구워 먹든지.”
“어머나, 그건 또 좋군요.”
대번에 반색을 하며 침아가 웃는다. 료는 퍽 희한한 미각이라고 생각하며 침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빤히 쳐다보았다. 침아가 아직 입지 않은 깃옷을 슬쩍 방패로 삼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 공연히 뜸 들이지 마시고.”
“넌 대체 어느 쪽인 게냐?”
“뭐, 뭐가 말씀이십니까?”
“꽃은 꽃대로 주워 먹질 않나, 오징어는 오징어라고 환장을 하지. 너무 취향이 극단을 오간다고 생각지 않으냐?”
“꽃은 꽃대로 맛있고 오징어는 오징어대로 맛있습니다! 꽃은 그 계절마다 먹을 수 있는 게 달라 그 나름대로 별미고, 오징어는……오징어는, 하아, 먹고 싶어요.”
주륵 고인 침을 삼키며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침아를 보고 료는 툭 이마를 밀며 놀려댔다.
“애구나, 애야.”
“그러는 주인님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거 하나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것도 없으신 분이 제 심정을 어찌 아신다고.”
“있다.”
“뭔데요?”
“전갈.”
“히익!”
침아가 팔짝 뛰어서 옆으로 거의 두 걸음쯤 비켜섰다. 료는 씩 웃으면서 침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너 전갈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그 딱딱한 껍질을 씹을 때 오독오독 씹히는 소리 한 번 들어볼 테냐? 내 청작에게 말해서 내일 당장이라도 전갈 좀 구해 오라고 시켜야겠다. 네게도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마.”
“그리 고우신 얼굴로 그런 흉악한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다!”
침아는 들고 있던 깃옷을 휙 던져 료의 얼굴을 덮어버리곤 냅다 우송에게 달려갔다. 깃옷을 옆으로 제치면서 료가 히죽 웃었다.
“음. 앞으론 전갈을 좀 상비했다가 저 녀석 혼낼 때 써먹어야겠어. 맛있는 것도 먹고 저 녀석도 골려주고.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기 아닌가?”
배에 올라타면서 침아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우송이 돌아보았다.
“벌써 타게? 저기 복숭아나무 아래에 자리를 펴는 건 어쩌고?”
“흥. 주인님 혼자 꽃구경하라지요. 아저씨, 우리 둘이서 배 타고 나가요. 화로에 마른 생선 구워먹으면 좋겠지?”
“아서라, 너는 몰라도 나는 헤엄치는 거 그리 안 좋아한다.”
“무슨 헤엄을 치재요, 오밤중에? 배 타자니까 딴말하신다.”
“너랑 둘이 배 타고 희희낙락하는 꼴을 주인님이 잘도 보시겠다. 깊은 곳에 갈 때를 기다렸다 보란 듯이 뒤집어 버리시겠지. 너 때문에 나까지 그게 무슨 꼴이냐?”
“설마.”
“내기할 테냐?”
“응.”
당돌하게도 짧은 말로 침아가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우송은 그런 버릇없음도 이젠 당연하게 여겨 양손을 내저었다.
“아유, 관둬라. 내가 졌다고 하고 물러나련다.”
“아저씨도 참. 우리 주인님 성격 빤히 아시면서 뭘 그리 무서무서 하시오? 으름장 놓고 뭐라 해보았자 돌아서면 속으로 미안해하시는 게 빤하구만.”
“그래서 너도 기어오르는데 나까지 그러란 말이냐? 둘 다 그러면 우리 주인님 복장 터져 폭발하신다. 너 하나 모시고 사는 것도 불쌍하기 짝이 없는데. 쯧쯧.”
“모시고 살긴 누굴. 흥, 이상한 소리를 하셔.”
곱게 우송을 흘겨보고선 달을 올려다보면서 침아는 들뜬 얼굴로 몸을 까딱까딱했다.
“아저씨, 내 노래 하나 불러줄까?”
“그것도 관둬라. 니 노래 내가 얻어들었다간 또 한 소리 듣는다.”
“피이. 겁쟁이. 덩치 큰 겁쟁이 검은 소에 대해 노래 하나 지어야겠어.”
“으이구, 하여간에 요 암여우 같은 것. 매를 버는구나, 벌어.”
그러면서 우송이 슬쩍 침아의 머리에 꿀밤을 주는 시늉만 하였는데 멀리서 버럭 료가 소리쳤다.
“우송아, 그놈의 배에서 언제까지 꾸물댈 참이야?”
그 소리에 우송과 침아 둘 다 끔쩍 놀랐다. 얼굴을 마주하면서 우송이 울상이 되어 푸념했다.
“봐라, 안 보는 것처럼 하면서 다 보고 있다니까. 내가 너 때리는 줄은 귀신같이 아셔가지고. 진짜로 때린 것도 아닌데.”
“내가 미안하게 됐소.”
툭툭 우송의 자라 껍질같이 큰 손을 두드려 주었을 뿐인데 우송은 그마저 기겁을 하며 손을 뺐다. 그러면서 어서 주인님 곁으로 돌아가라 침아에게 성화다.
침아는 마지못해 배를 떠나 료가 서 있는 곳으로 왔다. 그녀를 보는 료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침아는 새침한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할 일을 찾았다.
조용하지만 빠르게 복숭아나무 아래의 딱 맞춤한 자리에 두 겹의 삿자리를 깔고 그 위에 화로며 방석, 소반을 비롯해 주안(酒案)을 펼쳤다. 소반에 있는 마른 생선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침아는 언뜻 고개를 돌리다 술주전자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것은.”
침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료가 빙긋 웃었다.
“매화주란다. 순하다 하더라.”
“흐음.”
다시금 침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삿자리 밖에 조르르 늘어선 소반에 똑같은 술병이 또 하나 있음을 확인했다. 옥빛의 청자주병은 어여쁘지만 앙증맞도록 작다. 그녀는 근심스런 표정이다.
“이걸로 우송 아저씨 목이나 적실 수 있나요.”
이미 우송의 주탐(酒貪)에 대해서는 빠삭하다. 료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안 그래도 돌아가면 우송이 술 한 말 받을 수 있게 준비해 두라 일렀다.”
“돌아가면이요?”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았지만 료는 그저 가벼이 웃고는 준비가 다 된 삿자리 위로 신을 벗고 올라섰다. 나무에 바짝 기대듯이 놓인 방석에 다가가 털썩 앉은 료가 풍광을 조망하더니 아직 멀뚱히 서 있는 침아를 보면서 자신의 왼편 대각선에 놓인 방석을 두드렸다.
“뭐 하느냐? 와서 앉지.”
침아는 배에 있는 우송 쪽을 보았다. 우송은 뭍으로 나와 기지개를 한 번 펴더니 어슬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세우지 쪽을 보고 있던 료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머리를 한 번 숙이고는 그대로 저택 쪽으로 걸어간다.
“우송 아저씨는 보내셔요?”
침아의 질문에 료는 왼쪽 눈썹만 한 번 치켜세우고 만다. 보다시피 가고 있지 않냐는 뜻이다. 침아는 아직 삿자리에 오를 생각도 안 하면서 물었다.
“같이 놀자고 하시지. 내심 서운할 텐데.”
“돌아가서 준비된 술 한 동이 보면 서운이고 뭐고 없을 거다.”
“그치만.”
“그치만이고 뭐고, 넌 또 내 말을 안 들을 작정이냐? 와서 앉아. 두 번이나 말했다.”
약간 노여운 기색을 보였더니 그때서야 침아가 삿자리에 올라와 방석에 앉았다. 시틋한 표정에 아랫입술을 얼마쯤 내밀고 있다.
“그 표정 한 번 고약타.”
“속으론 욕하면서 겉으론 생글거리면 그게 더 싫으실 걸요?”
“그 말은 네가 지금 속으로 내 욕을 하고 있다 이 소리냐?”
“어머. 말이 그렇게 되나? 염려 마세요, 아주 못 들을 욕은 아니에요.”
“내 어처구니가 없어서.”
료가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았지만 침아는 샐쭉 웃더니 이내 화로의 숯을 한 번 뒤적거리고는 마른 생선이 담긴 소반으로 돌아앉았다. 심각한 판별 끝에 침아의 손에 들린 것은 황태였다.
“아쉬우나마 이거라도. 밤도 있는데 구워드릴까요?”
화로에 황태 한 마리를 온전히 다 올려놓는 걸 보고 료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한 마리를 다 먹을 참이냐?”
“맛있으면 먹어 보지요.”
“너 오징어를 두 마리나 먹고 탈이 난 일은 생각하지 않느냐?”
“그 맛있는 걸 먹고 왜 탈이 나요. 잘만……. 근데 제가 언제 오징어를 두 마리나 먹었지요? 이 집 와서 오징어 구경도 못해본 것 같은데.”
아차 하며 침아가 재빨리 말을 바꾸는 것을 료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료가 한숨을 쉬었다.
“야시에 갔던 날 밤에 그런 일이 있었다. 아직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영 기억을 못 하려나.”
“제가 꼭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별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료가 가만히 시선을 들어 세우지의 물빛을 보았다. 머리 위로는 만개한 꽃을 진 복숭아 나뭇가지가 일산처럼 가리고 있고 시야 앞으로는 세우지의 잔잔한 수면이 별빛을 받아 청백색으로 일렁거렸다. 구름 한 점 없이 공활한 하늘의 남쪽에는 보름달이 유난히도 맑았다.
“……좋은 때로구나.”
“봄이니까요.”
그러면서 침아는 잊지 않고 황태를 뒤집었다. 벌써부터 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를 내는 황태 때문에 료의 감상은 중도에 파장이 났다. 힐끗 침아를 돌아보며 힐난하듯 말을 던졌다.
“봄이고 뭐고, 지금 네 머릿속엔 이건 언제 익나, 하는 생각뿐인 게지?”
“당연히 그렇지요. 너무 익으면 타서 맛이 없습니다. 뭐든 중도가 중요한 법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공부자(孔夫子)에 대한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논어고 중용이고 간에 재미없고 싫어요.”
묻지도 않은 말을 분명하게 못을 박고는 침아는 단정하게 앉아서 화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얼굴에 ‘내 황태, 어서 익어라’라고 크게 적혀 있는 것 같아서 료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왜 저리 웃나 하는 표정으로 침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료는 주안에 다가앉으며 옥색의 잔을 들었다. 침아 쪽으로 그것을 내밀며 말했다.
“한 잔 따라보련?”
묻고는 있지만 다분히 그리하라는 명령이다. 침아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술병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술병 아래도 조심스레 받쳤다. 다소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는 것도 앉은 것도 아닌 묘한 자세로 침아가 료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끝으로 갈수록 가느다래지는 부리를 통해 술은 감질나도록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러나 술이 흘러 잔을 채우는 소리가 꽤 듣기가 좋았다.
“그만. 술이 넘겠다.”
“어머, 찰찰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만.”
료가 주의를 준 덕분에 술은 넘치기 일보직전에서 그쳤다. 한 방울이라도 흘리는 게 아쉬워서 료는 지극히 조심히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잔 끝에 닿은 입술을 통해 맑은 술은 천천히, 완벽하게 그의 입으로 부어졌다. 옆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침아가 물었다.
“맛있습니까? 그리 아껴서 뭘 드시는 모습 처음 봅니다.”
료가 빙긋 웃었다.
“네 앞에서 술을 먹는 게 처음이다.”
“그랬던가요?”
“뭐냐, 그 심드렁한 반응은.”
“계집 좋아하는 사내들은 술도 좋아하더이다. 술에 취하면 계집이 더욱더 미녀로 보인다나 뭐라나.”
“누가 그런 소릴 하던?”
바로 날이 선 목소리로 추궁하듯 묻자 침아가 생긋 웃으며 료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제가 만났을 사내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전 주인 말씀입니다. 아재는 글쎄 자기 죽으면 술을 가득 채운 동이에 넣어서 땅속에 묻으라 공공연히 말하고는 했답니다. 계집을 껴묻으라고 안 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요.”
“흥. 개 주제에 무슨 술을 그리 밝힌단 말이냐.”
툴툴대며 이번엔 빠르게 술을 비우는 료를 보고 침아는 히죽이 웃고만 있다. 료가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너무 빨리 드시지 않습니까? 안주도 좀 드시지요.”
“나 말고 너.”
“예?”
“네가 받으란 소리다. 자.”
술잔을 침아 앞에 내려놓고 침아의 손에서 술주전자를 빼앗아 들었다. 턱짓으로 어서 잔을 들라고 명령했지만 침아는 어리둥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뭘 하느냐, 받으래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서 훔쳐 먹지는 않은 게로구나. 우송이 녀석은 그런 일이 곧잘 있지. 자, 내가 주는 술이니 받아라. 이제 너도 술을 마셔볼 나이가 아니더냐?”
“저는 썩…….”
침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뒤로 얼마쯤 물러앉기까지 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겁을 내는 것 같아서 료의 얼굴에 놀랍다는 뜻이 퍼졌다.
“뭘 그리 저어하느냐? 그냥 술일 뿐인데.”
“내키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료가 그녀의 위팔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한 번 마셔본 적도 없다면서 어찌 내키는지 안 내키는지를 알아? 너, 해보지도 않은 일에 겁을 내다니, 그리 겁쟁이었더냐?”
“놀리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사양할래요.”
그가 알던 침아 같지 않았다. 술 자체를 몹시 경계하여 자그맣게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모로 돌리는 것이 정말 싫은 기색이다.
싫다는 것을 굳이 먹이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 잔도 받아주지 않음은 아쉽다. 그래서 료는 달래는 듯이 부드럽게 침아의 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받아서 입술만 적시는 정도로 어떠냐? 내 친히 한 잔 주려 했는데 그리 싫다고 내빼니 손이 다 부끄럽구나.”
“……정히 그리 말씀하시니 한 잔, 받기만 하겠습니다.”
한숨과 함께 잔을 들어 올린 침아에게 료는 기쁜 낯으로 술을 따라 주었다. 잔잔히 흐르는 계곡물 소리 같은 술 따르는 소리에 금세 침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가져와서 향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가 살짝 입술을 댔다.
“따뜻하네요?”
“나는 술은 좀 뜨거운 게 좋더구나. 어떠냐, 그리 싫지도 않지?”
“글쎄요, 잘은……. 좀 씁쓸하긴 한데.”
아직 모르겠다는 듯이 침아는 잔을 더 기울여 입에 머금을 만큼 삼켰다. 묘한 표정이 되었다. 찔끔찔끔 마시는 양을 늘려 갔다.
“매화향이 나는 것도 같고…….”
그러면서 아예 잔을 다 기울여 탈탈 털다시피 한다.
“과연. 술은 따뜻해도 차와는 다르군요.”
고개를 끄덕끄덕. 혼자 뭔가 심취해서 말한다.
지켜보던 료는 웃음을 삼키며 슬쩍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더 마시면 차이를 알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겠지요? 뭐 이왕 한 잔 마셨는데 두 잔인들 어떻겠습니까?”
침아는 갑자기 호탕해져서는 두 손으로 쥔 잔을 료에게 내밀었다. 료가 가득히 부어주어 비취빛으로 반짝이는 술을 들여다보던 침아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꽃 하나 따주셔요.”
“꽃을?”
또 꽃을 안주로 먹으려 저러나 하면서 료는 일어서서 손에 닿는 복사꽃 한 떨기를 취해 침아에게 내밀었다. 침아는 그것을 코에 대고 향기를 맡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술잔에 떨어뜨렸다. 활짝 핀 분홍빛 꽃이 술잔에서 빙그르르 돈다.
“보셔요.”
“무슨 장난이냐?”
침아가 료 보라고 내민 술잔을 보고 료가 의아해하며 묻자 침아가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삐쭉였다.
“장난이 아니에요. 이리하면 매화꽃이랑 복사꽃이 혼인하는 것이지요.”
“호오?”
“그렇지, 그것이 빠지면 안 되지.”
뭔가 또 생각이 났다는 듯이 침아가 삿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맨발로 풀밭으로 나서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술잔을 들여다보길 반복했다. 엉겁결에 료가 따라 일어섰다.
“뭘 하는 게냐?”
“중신아비요. 혼인을 둘이서만 하면 야합이 되지 않습니까. 아, 되었다, 되었어!”
문득 멈춰선 침아가 활짝 웃더니 이어서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옆으로 간 료가 물었다.
“뭐가 또 됐다는 것이고?”
“달이 비치고 있잖아요. 복사꽃이랑 매화꽃이 혼인하는데 달이 중신을 서주었습니다. 이걸로 만사는 형통합니다. 자, 너희들은 다음 생에서도 서로 만나 은애하며 살지니.”
술잔에 비친 달을 보면서 침아가 그리 말하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너희의 연이 이 생에선 이것뿐이구나. 어찌하겠느냐. 올해는 다 갔으니 다음 해에 다시 만나 환락을 누릴 일이다.”
쯧쯧, 하고 한숨을 쉬더니 침아는 술잔을 입에 대고 쭈욱 단번에 삼켰다. 술과 함께 복사꽃도 사라졌다. 빈 잔을 달에게 보이며 침아가 말했다.
“네 공이 컸다. 너도 한 잔 받을 테냐?”
“……아쉽게도 달은 네게 술을 받아 마실 입이 없으니, 그 술 내게나 줌이 어떠하냐?”
“응? 주인님도 복사꽃이랑 매화꽃 혼인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꼭 그 둘을 혼인을 시켜야겠다면 어쩌겠느냐.”
“기필코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어여쁜 것끼리 짝을 지어주면 좋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다 좋으니 저리 가서 놀자.”
맨발인 침아를 가볍게 안아 올려 료가 펼쳐진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엔 굳이 따로 앉지도 않았다. 료는 제자리에 앉으면서 침아를 자신의 품 안에 두어 앉혔다. 어찌 이리 앉느냐 물어오기 전에 료는 재빨리 침아에게 술을 쳐주었다.
“또 꽃을 따주랴?”
“으응. 꽃이 알아서 떨어져주면 좋을 텐데.”
“어렵지 않지.”
고개를 든 료가 스윽 팔을 젖히며 손가락을 좌악 펼쳤다 움켜쥐는 시늉을 하자 미풍조차 없던 들판에 복숭아나무 위로만 쏴아아 바람이 일어났다. 팔랑팔랑 꽃이 나부끼며 그 아래에 앉은 둘 위로 떨어져 내린다. 그중 하나가 운 좋게도 침아의 잔에 빠져들었으니 침아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료를 돌아보고 웃었다.
“어여쁘지 않습니까?”
“어여쁘구나.”
침아가 말하는 어여쁨과 료가 말하는 어여쁨의 주체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침아는 잔을 다 비우고 나른하게 들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더 뜨거우면 더 맛있을까요?”
가늘게 뜬 눈으로 잔을 보면서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료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럼 저 주전자의 술은 뜨겁게 데워 마시자꾸나. 우선 이건 그냥 마시기로 하고…….”
그러면서 료는 술 한 잔을 또 따라주었다. 침아는 전혀 마다하는 기색 없이 잔을 가져와 입에 댔다. 료는 따로 준비해온 청동 술주전자를 화로에 올리면서 아까까지 침아가 그렇게 집중해 있던 황태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이미 한쪽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중이었던 황태는 냄새도 고약했건만 이제야 그 냄새를 깨달았으니 우스운 노릇이다.
일어서서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료는 소매를 몇 번 흔들어 공기 중에 떠도는 그 퀴퀴한 냄새를 실어갈 바람을 적당히 불러왔다. 불어가는 바람에 세우지 수면이 잘게 반짝이는 모습이 또 하나의 장관이었다. 세우지에 가라앉은 달이 부서졌다 합쳐지고 부서졌다 합쳐지면서 금빛으로 아른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료는 진짜 달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대가 중신아비란 말이지…….”
힐끗 침아를 돌아보자 침아는 제 손으로 술병을 들어 자작을 하고 있었다. 이거야 원, 처음에 아니 마신다 하던 그 소심한 아이는 어디로 가고 꾼이 될 기질이 다분한 아이가 저기 앉아 있는가. 식탐뿐 아니라 주탐까지 우송을 따라가는가 싶어 료는 실소를 했다. 그런 자들이 모이는 것이 제 팔자인가보다 하면서.
“너만 마실 참이냐? 내게도 주어야지.”
“드려야지요, 드려야지요.”
자리로 돌아가며 핀잔을 주었더니 침아가 술잔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째서 잔이 하나뿐입니까? 제 입은 입으로 치지 않으셨지요?”
“허, 아니 마신다고 내빼던 주제에 그 무슨 강짜냐?”
“그건 이미 지난 일 아닙니까? 그런 건 좀 잊어버리세요. 소심한 사내는 멋이 없어요.”
손가락을 흔들며 그를 나무라던 침아가 별수 없이 저 마시던 것을 다 비우고 거기에 술을 부었다. 주안상에 떨어진 꽃 하나를 들어 담그고서 잔을 눈썹보다 높이 들어서 료에게 주는데 술이 넘칠락 말락 했다.
“자, 거안제미(擧案齊眉)를 행하옵니다.”
“이거야 원 황송해서 어찌 마시겠느냐?”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언제는 침아가 주인님을 모시는 데 있어 소홀했습니까?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왕 하는 거 사이좋게 잘 지내면서, 밥값 노릇은 하는 몸종이 되어야지 하고 열심히 했다구요. 여기서 더 어떻게 잘합니까?”
그리 골을 내더니 료에게 주려던 술을 제가 다 마셔버렸다. 료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왼팔로 침아의 허리를 감싸 지그시 자신에게 당기며 몸을 밀착시켰는데도 침아는 신경 쓰는 기색이 없다. 또르륵 술을 따르곤 몸을 돌려 그 잔을 료에게 내밀었다.
“복사꽃은?”
“아참, 아참.”
배시시 웃더니 침아가 꽃을 주워 잔에 담았다. 그리고 내미는 술잔을 료는 직접 들지 않고 고개만 기울여 후룩 마셨다. 꽃이 바닥에 남자 침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같이 드셨어야 하는데.”
술잔을 뒤집어 탈탈 털어 끝내 침아가 꽃까지 마셔버렸다. 료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 이번엔 실수하지 않으마. 다시 따라다오.”
“잠시만 기다리셔요.”
두 번째 시도에서도 료는 손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침아는 침아대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직접 술잔을 기울여주며 료가 마시기 편하게 했다.
“옳지, 옳지. 꽃까지 함께. 네, 잘하셨어요! 이리 마시니 훨씬 괜찮지요?”
“맛은 모르겠고 재미는 있구나.”
“재미가 맛이고 맛이 재미지요, 그게 뭐 구별할 거립니까.”
“참나, 오늘 술 처음 마신다는 녀석이 마치 주당처럼 말을 하는구나.”
“……어머, 그러게요. 그럼 안 되는데. 히끅.”
눈을 동그랗게 뜬 침아가 재빨리 앞으로 돌아앉는데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침아는 취기가 오르는지 손부채질을 하면서 무언가를 찾았다.
“물은 안 가져 왔나요? 어쩐지 머리도 어질어질하고, 히끅.”
“술로 사레가 들렸으면서 어찌 물을 찾느냐?”
술병을 가져와 잔을 채운 료는 반 잔 정도를 제 입에 머금고는 침아의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겹쳤다. 당장에 침아가 몸을 굳히며 뒤로 몸을 빼는 것을 료는 그녀의 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면서 오히려 더 끌어당겨 제 입 안의 것을 그녀가 삼키게 만들었다.
“하아, 왜 이리 짓궂게……. 아!”
술을 넘기는 걸 확인하고 입술을 떼자 침아가 찌푸린 얼굴로 투정했다. 하지만 료는 바로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도로 입술을 겹쳤다. 침아의 버둥거림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자세도 그렇고 힘에 있어서도 불리한 침아가 결국 료의 막무가내에 밀렸다.
기어코 그가 입으로 옮겨주는 술을 삼킨 침아는 료가 고개를 들었을 때 뜻 모를 한숨을 쉬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료가 중얼거렸다.
“보렴. 이제 네 숨결이 편해졌구나.”
“다만 제 걱정이 되어 그러셨단 말씀이십니까? ……너무하십니다.”
료를 밀쳐내면서 침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보았자 제 손바닥 안이니 굳이 붙잡지 않고 료는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술이 순하니 그야말로 물처럼 넘기기가 쉽다. 향이 좋고 안 좋고가 그리 중요했던 적은 없으나 오늘부터는 중요해질 듯하다. 료는 제 근처에 떨어진 복사꽃 한 떨기를 손수 주워 술잔에 띄워 마셨다. 거푸 세 잔을 기울이자 술병이 비었다.
화로에 올려둔 술주전자에서 김이 나는 것이 보였다. 국자로 떠서 술병을 채우면서 그 뜨거운 기를 조금은 식혔다. 술병과 술잔을 들고 일어서면서 료가 침아를 불렀다.
“어디에 가려고 그러느냐?”
“오지 마셔요, 저 혼자 놀 겁니다!”
저만치 멀어진 침아가 골이 난 목소리로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 앙칼진 태도에도 실실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취기가 도는 모양이라고 자각하면서 료는 거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뛰어 침아의 뒤에 이르러 덥석 왼팔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자, 우리 배나 타면서 놀자꾸나.”
“아이참, 취하셨습니까?”
“그건 네 이야기겠지? 뒤에서 보니 걷는 모습이 갈팡질팡하니 춤을 추는 줄 알았구나.”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래, 그럼 그렇다고 하자.”
“정말로 취하지 않았다니까요?”
“그 말을 믿을 테니, 그럼 네가 노를 저을 테냐?”
“까짓것 젓지요. 응? 근데 노라. 노야? 노야 어디 있니…….”
묶어둔 배에 이르러 안에 내려주었더니 있지도 않은 노를 찾아 침아가 사방을 둘러보느라 바쁘다. 료는 입석에 묶어둔 줄을 풀면서 침아가 취해가는 것도 참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배에 오른 료는 뒤쪽에 차분히 자리를 잡고선 왼팔을 펼치며 사뿐히 날갯짓하듯 흔들었다. 그러자 뒤로부터 바람이 밀려오면서 수면이 흔들렸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자 침아가 어리둥절하여 “응? 응?” 하면서 귀여운 소리를 냈다.
“노는 그만 찾고 이리 오렴. 내 춥구나.”
료가 침아에게 손을 내밀자 침아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배에 탈 거면 화로부터 가져오자 하셨어야지요. 그나저나 암만 봐도 노가 없는데.”
“노 따윈 애초부터 없다. 이리 오래도. 나를 위해 최선을 다 한다고 부르짖던 훌륭한 몸종은 또 어디로 간 게야?”
“주인님이 짓궂게 구시면 그 몸종도 짓궂어지게 마련입니다. 위에서 부은 물은 아래로 흐르게 마련이라지요?”
새침하게 쏘아붙이면서도 침아는 결국 료에게 다가왔다. 깃옷으로 그녀를 감싸 품에 꼭 안으며 료는 부러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리 추우십니까?”
“응. 춥다. 술을 마시면 몸이 좀 따스해지겠지?”
“그렇다고들 하지요. 자아, 훌륭한 몸종이 주인님께 한 잔 올리지요.”
“흠. 따끈하니 괜찮은데? 자, 훌륭한 몸종. 주인이 상으로 술 한 잔 내려주마.”
“어머, 정말 따뜻하니까 한결 맛있어요.”
그렇게 둘은 몇 번이고 한 잔으로 술을 나누었다. 너무도 달다는 듯이 술을 마시는 침아의 표정이 하도 행복해 보여 료는 그녀가 술을 넘기길 기다렸다가 그 술을 빼앗듯이 입술을 겹쳐오곤 했다. 처음에는 밀쳐내던 침아는 주흥이 오르자 장난스런 마음이 일어 웃어댈 뿐 료의 행동에 이렇다 할 투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료가 머리를 뒤로 하며 배에 기대어 누웠다. 다시 술잔을 채우려던 침아에게서 술병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고선 그것에 손을 뻗는 침아를 끌어당겨 제 몸을 덮게 했다.
“아아, 우리 금아는 따뜻하기도 하구나.”
“금아란 이름 싫다니까요.”
후훗하며 웃더니 침아는 그의 왼편에 자리를 잡아 료의 팔을 베개 삼아 등을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으로 팔을 쓸어 만지며 료는 달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침아의 얼굴을 보았다. 늘 차가운 그의 몸과 달리 그녀에게 향한 눈에는 지금 화로 안에서 이글거리고 있을 숯조차 비견하지 못할 뜨거움이 가득했다. 그것이 넘칠 정도라 료는 조바심을 내며 침아의 얼굴이며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주인님…….”
가만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던 침아가 나지막하게 그를 불러왔다.
“그만 하란 소리라면 듣지 않는다.”
“주인님 곁에 저만 한 계집아이가 머문 적은 제가 처음이지요?”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다.”
그의 대답은 사실이다. 고운 여자가 몇 몸종으로 붙어 있었던 적은 있었다. 다만 침아가 아니었다. 료는 그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럼 새로 어여쁘고 심성도 착한 아이를 하나 들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뭐 하러? 필요도 없는데.”
“아니에요, 필요해요. 새 아이를 얻으시고 몇 년 옆에 두시면 그 아이에게도 정이 가실 겁니다. 인간이 아닌 여자 중에서 골라서…….”
“필요 없대도.”
“겁이 나십니까? 그 아이에게도 정이 갈까 봐?”
슬쩍 머리를 들면서 료가 짐짓 미간을 찡그렸다.
“단지 네가 내 곁에 몇 년 머물렀다는 이유로 이러는 줄 아느냐?”
침아는 달에서 눈을 거두지 않으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중얼거렸다.
“알고 보면 주인님이 외로움을 타시기 때문이지요. 곁에 머물면서, 주인님께 함빡 정을 줄 수 있는 계집이라면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주인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주인님은 어여뻐요. 꽃처럼……. 저 달처럼……. 그러니 오래오래 변치 않을 고운 이를 찾으심이 옳습니다.”
료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침아의 눈에 어린 서글픈 기색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다시 머리를 누이며 다만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끌어당겼다.
인간인 스스로의 일을 걱정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어라 말한들 당장엔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 근심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녹여줄 수 있다고 료는 믿었다. 내내 함께할 테니까.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빨라 서글퍼질 때가 와도 료는 변치 않고 그녀를 아끼리란 믿음이 있었다.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내 너를 만났으니 다른 이는 필요치 않다.”
“다른 인연이 생기면, 옛 인연은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사내의 정은 특히나 그렇다 하더군요.”
“그리하여 변할 정도의 정은,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었다 해야겠지. 누군가를 연모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 게다.”
“저를……연모라도 하십니까?”
침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료는 읽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대고 손으로 덮으며 그가 물었다.
“어떠한 것 같으냐?”
자그마한 침아의 손 밑에서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이 춤을 추었다. 침아는 눈을 감으며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스워요. 하긴 주인님은 어리시니까…….”
그 대답이 엉뚱해서 료는 웃음이 났다. 다른 이는 몰라도 침아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데.
“그래, 우리 둘 다 아직은 어리구나. 그러니 피차 사이좋게 어른이 되어보기로 하자.”
웃음 섞인 그의 중얼거림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료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을 보았다.
쏟아질 듯 환한 둥근 달이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따라왔다. 료가 부르지 않은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복사꽃이 한차례 흩날렸다. 조용했던 침아가 세우지 위를 맴돌며 바람에 실려 가는 그 꽃잎을 보며 나지막이 탄식했다. 료는 달과 꽃, 그리고 침아의 존재에 취하여 한숨을 쉬었다.
꽃비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이제 달빛만이 온전히 그들의 시야를 채운 지 한참. 료는 문득 침아를 돌아보며 계속 가슴을 채우고 있던 말을 쏟아냈다.
“이 밤에 너를 품고 싶구나.”
눈을 감고 있던 침아가 희미하게 고개를 젓더니 머리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완곡한 거절의 의사에 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몸을 일으켰고 주먹을 쥐면서 흔들린 마음을 정돈했다. 달을 올려다보며 호흡을 가다듬고서 머리맡에 있던 술병을 가져와 한 잔 따라 마셨다. 차게 식었으나 술은 술이었다. 다시 한 잔을 따라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침아를 보았다. 입에 술을 반을 털어 넣고 그는 침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겹쳐진 입술을 통해 들어오는 술을 그녀가 큰 저항 없이 삼켰다. 마저 남은 반을 마시기 전에 료가 중얼거렸다.
“방금 네가 마신 술이 합환주였다. 네 말대로 저 달이 중신을 선 셈이지.”
침아는 눈을 뜨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겨우 눈을 떴으나 이미 료는 그녀의 곁에 도로 누운 뒤였다.
“저는…….”
침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주인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마음을, 모릅니다. 그러니 제발…….”
가냘픈 고백에 료는 웃으면서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덮었다.
“내게 배우렴. 내 얼마든지 가르쳐줄 터이니.”
“하지만 저는…….”
“쉬잇. 우리가 소란하다고 달이 흉보겠구나.”
그리 말하며 료는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부드럽게 물결에 실려 세우지 위를 맴도는 배 안에 취기의 휘장이 두터이 드리워졌다.
달이 두어 뼘쯤 옆으로 흘러갔을 때 료는 몸을 일으키곤 물가로 배가 흘러가게 했다. 침아는 그가 흔드는 손길에 가물거리는 눈을 뜨고 일어났으나 금세 그에게 스르륵 기대어 왔다. 더는 깨우려 노력하지 않고 료는 침아를 두 팔로 안아 들고 저택으로 향했다.
실제로 날 수 있게 되면서 그는 전보다 훨씬 가볍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담이 보이는 곳에서 훌쩍 뛰어올라 기왓장을 밟는 듯 마는 듯하며 아래로 내려설 때의 모습은 휘와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을 만큼 우아했다.
임시로 쓰고 있는 동쪽 거처에 이르자 달빛에 젖은 빈 마당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문득 울렁거려 료는 품에 있는 침아의 정수리에 입술을 대었다. 마당을 지나며 료는 마지막으로 달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까지 그를 따라온 달이 청아하게 반짝거리는 것에 재차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미리 일러둔 대로 화로의 숯들이 은근하게 타고 있는 방은 훈훈하였다. 금색 비단 요 위에 침아를 눕히고 료는 심호흡을 하고서 그녀의 머리댕기를 풀었다. 오른쪽 귓가에 꽂혀 있는 자석영 머리꽂이를 뽑는 료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취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욱 뜨거운 볼을 만지며 입맞춤을 하자 침아가 나른한 숨과 함께 그에게서 돌아누웠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손을 대던 료는 거기에도 입술을 대려다가 뭔가를 떠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문갑을 열고 그는 무언가를 찾아냈다. 다시 침아의 곁으로 돌아와 료는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을 폈다. 거기엔 곱게 윤이 나는 비취색 옥가락지가 놓여 있다. 그 한 쌍을 침아의 왼손을 들어 살며시 끼워주었다. 검지에 다소 큰듯하여 중지에 끼워주니 딱 맞았다.
“급하게 구하려 보니 이런 것이 고작이었다.”
무엇이라도 좋았다. 료는 침아에게 정인의 표시가 될 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 청작에게 심부름시키기도 싫고, 청작에게 돈을 받는 것도 싫고, 꼭 제 손으로, 제 힘으로 구해야지 했다. 그래서 느닷없는 약재 장사에 나선 것이었다. 진귀한 것이라고 한다면 야시에 가서 찾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 화조절의 야시는 지났다. 이 세계의 야시는 계절에 한 번 정도가 고작이라 다음 야시는 5월이나 되어야 열릴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이미 그의 마음이 급했다. 인간들의 저자에 나가 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골라온 것이 이 가락지 한 쌍이다.
“홍옥을 골라올 걸 그랬나?”
끼워주고 보니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다른 하나가 아쉽다. 그래서 생각했다. 다음엔 검지에 맞는 홍옥 가락지를 구해 주어야지.
“네가 원하는 건 다 갖게 해주마, 내 귀여운 아이야.”
침아의 손을 들어 손가락이며 가락지 위에 차례차례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돌리려 하였을 때, 침아가 베개에 얼굴을 숨기려는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실은 깨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모른 척하면서 료는 깃옷을 벗어 옆으로 던졌다. 부러 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이윽고 료가 침아의 옷고름에 손을 대었을 때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싫습니다.”
가냘픈 목소리에는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손을 잡은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료는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아 눕히며 물었다.
“무서우냐?”
침아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목소리에서도 달아나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볼을 감싸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료가 나지막하게, 그러나 좀 더 분명하게 채근했다.
“말해 보렴, 침아야. 내가 무서우냐? 내가 네게 나쁜 일을 할 성싶어?”
어렴풋이 뜨인 눈으로 침아가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하게 고개를 젓는 것을 료는 확인했다. 그를 바라보는 눈이 젖어 있어 금세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료는 까닭도 없이 안타까워졌다. 무엇이 그리도 이 아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다 걷어내 줄 텐데. 다만 그것이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료는 쉬 물러날 수 없었다. 료는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싫으냐?”
침아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어지러이 숨을 내쉬었다.
“……어찌하면 싫어할 수가 있는지요.”
차라리 싫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탄하는 듯한 말이었다. 그 연약한 말에 매달려 료는 침아를 함빡 끌어안았다.
“그럼 되었다. 너는 계속 술에 취해 있는 것이라 생각하려무나. 술에 취해서 기묘한 꿈을 꾸는 것으로 생각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좋은 꿈이 되게 해주마. 깨고 나서도 꾸고 싶은 꿈……. 그러니 침아야, 내 귀여운 아이야, 나를 밀어내지 말아다오.”
사뭇 절절한 속삭임에 침아의 몽롱했던 눈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어찌 저 같은 것에게, 제가 대체 무엇을 했다고 이토록…….”
그녀의 중얼거림은 입술을 겹쳐오는 료에 의해 끊어졌다. 거듭거듭 그녀의 입술을 촉촉하게 물어오던 입술이 가쁜 숨결 속에서 말했다.
“그리 말하지 마라. 네가 그리 말하면, 널 연모하는 나는 무엇이 되느냐?”
“……아아.”
탄식 끝에 침아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빠르게 말했다.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말,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취해서, 술에 너무 취해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입니다. 여기 있는 저는 꿈입니다. 저는 지금 꿈을 꾸고 있습니다.”
칭얼거리면서 떼를 쓰는 듯한 침아의 모습에 료는 웃음을 흘렸다.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으니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 틀림없다.
침아의 옷고름을 풀어내며 료가 중얼거렸다.
“그래, 너는 꿈을 꾸고 있는 게다.”
사락사락 벗겨내는 옷이 하나씩 이부자리의 옆으로 밀려났다. 료의 옷가지에 겹쳐서 침아의 옷가지가 쌓여간다. 그 고운 비단들의 빛깔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분홍빛으로 물든 침아의 살갗에 견줄 수는 없다.
이미 몇 번이고 침아의 나신을 눈에 담은 적이 있건만 이제 새삼 눈앞에 드러난 옥 같은 몸을 보며 료는 가벼운 황홀경마저 느꼈다. 그 따뜻하고 향기로운 몸과 가득 밀착하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아찔함에 료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로지 침아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품 안에 그녀가 있는데도 마치 허상을 안고 있는 것 같아 매 찰나 그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미칠 듯한 기분이었다.
침아가 힘겹게 내쉬는 숨소리가 귀에 닿은 건 그의 생각보다 더 오래 지나서였다. 으스러져라 꼭 안고 있던 팔을 풀었을 때 침아는 몇 차례 깊은 호흡을 했고 반쯤 뜬 눈으로 그를 보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미안, 아프게 하지 않으마. 어, 아니,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마.”
“……괜찮아요. 어차피 이건 꿈이니까. 저뿐만 아니라 주인님도 꾸는 꿈이에요…….”
당황한 그를 다독이듯이 건네 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다사로웠다. 료는 침아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입술을 겹치며 되도록 상냥하게, 살며시 몸을 포갰다.
그를 보고 부드럽다고 감탄했던 침아의 말을 료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나 부드러운 꽃과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것에서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을까. 입술에서 시작해 가냘픈 몸의 그 모든 곳에 입술을 겹칠 때마다 그녀 안에 담겨 있는 향기가 배어나오는 듯해 료는 또 다른 황홀경으로 하염없이 함몰되어 갔다.
“어찌 이리 고우냐……. 어찌 이리……. 어찌 이다지도 사랑스럽단 말이냐.”
침아의 손가락 끝, 발가락 끝에 이르기까지 입술로 훔쳐내고서 목덜미로 거슬러 올라와 살결에 깃든 젖은 향기에 얼굴을 묻으며 료는 탄식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침아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숨결을 고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뽀얀 가슴이 가쁘게 들썩이는 모습을 새삼스레 눈에 담으며 료는 저도 모르게 웃으며 뺨을 붉혔다. 제 가슴만 뛰는 줄 알았지 침아도 그러는 줄은 미처 몰랐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훑으면서 료는 그녀의 귓바퀴에서부터 천천히 입술을 대어갔다. 화상 부위조차 지나치지 않는 그의 입맞춤에 침아가 처음으로 그를 밀어내려 손을 들었다. 그 왼손을 붙잡아 머리 옆으로 덮어 눌렀다. 손가락을 겹쳐 지그시 움켜쥐자 손에 익지 않은 가락지의 감촉이 유난히 또렷한 가운데 료는 침아의 왼쪽 얼굴에 더욱 느리고 부드러운 입맞춤을 해나갔다.
입술에 이르기 전에 료는 그녀의 다물린 입술을 손으로 벌렸다.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겹치면서 혀를 밀어 넣었다. 세우지에서 나누었던 매화주의 맛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그럼에도 비할 데 없는 달콤함이 그를 맞이한다. 침마저 향긋한 침아가 이상한 것인지, 그렇게 느끼는 자신이 이상한 것인지 느낄 겨를도 없이 기갈이 든 것처럼 그녀의 입속을 헤집고 빨아들였다. 극도로 소리 내는 걸 두려워하는 듯이 보이던 침아가 앓는 듯한 신음을 냈다.
“아…….”
료가 잠시 입술을 떼고 숨을 고를 때 침아가 내쉰 탄식은 길었다. 반쯤 뜨인 눈이 몽롱하게 흔들렸다. 못내 붉게 상기된 뺨 위로 눈가마저 장밋빛으로 물들고, 새까만 눈은 이슬을 머금어 아련도 했다. 몸속 깊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숨결에 습기가 가득 배인 것처럼 그에게 겹쳐진 따스한 몸도 한 꺼풀 이슬 장막을 걸친 듯이 매끈거렸다. 그 기분 좋은 촉감은, 평소에 비해 분명 더 뜨거워진 체열과 함께 료의 숨을 더 거칠게 부추겼다.
손이 두 개뿐이란 것이, 겹쳐질 수 있는 몸의 면적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닿고 싶다는 갈망에 떠밀려 온갖 방법으로 침아를 휘감아 껴안고 만져가는 료의 머릿속에 기껏 눈으로 보아둔 일전의 수업 장면이 깜박깜박 점멸하며 스쳐가기도 했다. 하지만 침착하게 무언가를 시도할 만한 자제력은 물론 한숨 돌리고 생각해볼 만한 여유도 지금의 료에겐 없었다.
숨 가쁘게, 그저 눈앞의 하얗고 뜨거운 침아의 육신에 어쩔 줄 몰라 허덕거리며 료는 어지럼증 비슷한 감각에 빠졌다. 어쩌면 꿈일까, 이것은. 깨어보면 자신이 꿈결에 그리고 만 아주 농염한 환상이었다고 얼굴을 붉히게 될까.
이윽고 료의 손이 그녀의 다리를 옆으로 벌리며 달아오른 그의 몸을 밀어붙여 왔지만 침아의 눈에는 그것이 어떤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빛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침아는 이 밤에 겪어야 할 가장 생경한 일 앞에서 놀란 눈을 감지도 못했다.
“아, 아……. 싫어…….”
전에 없이 뜨거운 숨결과 촉촉한 입술의 유희, 땀에 젖어 미끈거리는 료의 몸이 불러일으키는 감촉이 마치 붉은 안개처럼 그녀를 휩쓸어 아득함의 나락에 머리끝까지 잠겨 있다가 마침내 안개 너머의 존재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두려움에 질려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침아를 끌어안으며 료는 부드럽게, 하지만 가슴이 조이도록 간절히 속삭였다.
“너를 연모한다……. 내 사랑스런 아이야. 내 것이 되어다오. 침아야, 내 귀여운 침아야.”
몇 번이고 거듭하여 반복하는 말의 주술. 료는 그것이 분명한 형체를 지니고 침아에게 녹아드는 것을 보았다. 안쓰러울 정도로 삽시간에 뻣뻣해졌던 그녀가 이름을 불러주며 연정을 호소하는 몇 마디에 눈빛이 흔들렸고 온몸을 굳게 했던 긴장도 점차 몸에서 빠져나갔다.
“받아주렴. 내 몸도, 마음도……. 내 이리 네 모든 것이 간절한 것처럼, 너도 나를 그리 간절히 생각해 주려무나.”
한없이 상냥한 귀엣말에 침아는 오히려 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눈을 꼭 감으며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료의 등을 두 팔로 감싸 안아왔다.
“……마셔요. 아무 말씀도, 제발…….”
그러면서 침아가 먼저 그에게 입술을 겹쳐왔다. 그 놀라운 일에 료의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그쳤다.
헐떡이며 침아를 껴안는 몸짓은 이제 사뭇 거칠고도 조급해졌다. 잔잔히 흐르던 물결이 느닷없는 절벽을 만나 폭포가 되어 떨어지듯이 료는 세찬 물결을 일으키며 그녀 안으로 잠식해 들어갔다. 료가 격하게 밀고 들어올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 바르르 떨면서도 침아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버티길 거듭했다.
마침내 침아의 안,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가장 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료가 그녀를 바스러뜨릴 듯 힘주어 안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짐승의 것 같은 거친 숨결이 신호가 된 것처럼 침아는 가냘픈 신음과 함께 축 늘어졌다.
금빛 보료 위에 점점이 붉은 꽃잎이 졌다. 료의 눈길이 거기에 미치려면 아직은 멀었다.
그는 새로운 날갯짓을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방이 고요한, 아직은 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