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탈피
졸음에 겨운 하품을 하면서 침아는 저택을 나섰다. 품에는 작은 물동이를 안고 있다. 동이 튼 지는 꽤 되었으나 묘시 무렵이 되었어도 저택 안은 조용했다. 저택에 거주하는 아침 새들도 모시는 주인의 무리를 닮아 늦잠꾸러기가 되어서 진시(辰時:오전 7시에서 9시) 끝 무렵이나 되어야 새 하루를 열 것이다.
저택 밖에는 아직 아침 안개가 가시지 않았다. 그 안개는 세우지 쪽으로 걸어갈수록 점차 자욱해졌다. 하지만 깔린 안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새들은 야트막한 물가에서 멱을 감고 아침을 찾느라 분주했다.
곁으로 다가가는 사람의 기척을 보아도 놀라 달아나는 새들은 거의 없었다. 침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네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소매춤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휘익 공중에 흩뿌렸다. 해바라기 씨앗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새들이 한바탕 날개를 휘저으며 몰려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은 보름이란다.”
무언가 신묘한 비밀이라도 되듯이 침아는 새들에게 속닥거렸다. 새들은 해바라기 씨앗을 먹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개중의 어떤 녀석은 고개를 들어 침아를 보며 쫑긋쫑긋 뛰었다.
“당연히 너희들도 알겠지만 말이야. 뭐할 거니, 너희들은? 난 시냇가 정자에 앉아 달 보면서 꽃이나 실컷 먹었으면 좋겠구나. 이맘때는 먹을 만한 꽃이 지천이라 뭘 먹을지도 행복한 고민인데 말이지.”
침아는 활짝 웃으며 생각만 해도 군침 돈다는 듯이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곧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 제 말의 무게에 눌린 양 침아는 오도카니 서 있었다. 새들은 해바라기 씨가 동이 나기 무섭게 다시 후루룩 날아서 세우지로 돌아갔다. 그런 새들을 바라보는 침아의 눈빛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부러운 기색이 차올랐다.
“너희들처럼 사는 건데 그랬어.”
조그마한 중얼거림의 끄트머리는 침아의 입 안에서 삼켜졌다.
“내 어쩌다 그런 인연에 연연해서는…….”
다시 침아는 걸음을 떼놓았다. 축 처진 어깨로 자박자박, 안개 깔린 오솔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전에 없이 작아 보였다.
다섯 번. 꼭 다섯 번을 왕복했다. 갈 때는 빈 동이를 들고 갔다가 올 때는 꽉 찬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왔다. 세우지 너머로 오리(五里)쯤 올라가면 나오는 샘의 물을 길어오는 길이다.
저택의 우물에서 나는 물도 참으로 깨끗한 물이긴 하였으나 끝맛에 약간 쓴 기가 감도는 물이라 침아는 찻물로 쓸 물은 꼭 그 샘에서 길어왔다. 평소에는 하루 한 동이면 족했다. 그래서 보통은 이틀이나 사흘 걸러 한 번씩 다녀오곤 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왔을 때는 거기까지 갈 것도 없었다. 대숲으로 나가 쌓인 눈을 모아 녹인 물로 달인 차는 침아에게 이 산에서 겨울을 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실은 정말로 좋아하는 물은 따로 있지만. 대나무 줄기를 타고 흐르는 이슬. 연잎에 고인 이슬. 머루 잎에 송글송글한 이슬. 하지만 그런 감로를 찾아다니는 즐거움과는 잠시 이별하였다.
“언젠가…….”
샘의 물을 받는 사이 시리게 이슬이 서린 이끼 낀 바위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바위 표면을 핥던 침아는 이크, 하면서 뒤로 물러앉았다. 그리고 샘물을 두 손으로 떠올려 기갈 들린 듯이 마셨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선 침아는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는…….”
끄덕 홀로 고개를 주억거린 뒤 물이 벙벙히 찬 동이를 머리에 얹었다. 지난 사 년간 익힌 것 중에 침아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머리에 얹은 물동이의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어떤 길이든 수월히 가는 바로 이것이다. 이젠 제법 숙성하여 늘씬한 몸으로 스스로는 의도하지 않아도 살랑살랑 궁둥잇짓도 하면서 걷는 모습에서 슬며시 색기가 흘렀다.
“거기 가는 어여쁜 소저에게 물 한 모금 얻어 마셨으면 좋겠구나.”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침아는 깜짝 놀라 발을 헛디딜 뻔하였다. 바로 뒤에서부터 뻗어온 팔이 그녀의 위팔을 잡아준 덕에 넘어지진 않았으나 동이의 물을 얼마쯤 쏟고 말았다.
“이런, 그리 놀랄 줄 몰랐는데. 괜찮으냐?”
바로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침아는 새침한 얼굴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기척도 없이 불쑥 말을 거시면 어찌 안 놀라고 배깁니까? 놓으셔요.”
아직 사내가 잡고 있던 팔을 매몰차게 뿌리치고서 침아는 동이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삼분의 일쯤 되는 물이 쏟아졌다. 미간을 찡그리는 그녀를 보며 만나자마자 무안부터 당한 휘가 속도 없이 껄껄 웃었다.
“보니까 몇 번이나 물을 떠 나르던데. 그만하면 많이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저택에 일꾼이 없느냐? 어쩌다 네가 이 작은 손으로 물을 다 떠 날라? 료 녀석 알고 보니 한심하구나.”
“나를 만하니까 나르는 것이지 무어 아시는 것이 있다고 다짜고짜 주인 험담을 하십니까? 모르시면 국으로 잠자코 계셔요.”
“허어, 그 말투 한 번.”
냉랭한 말투는 흡사 얼어붙은 호수에 눈발이 날리는 것같이 겹겹이 춥다. 물동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면서 어찌하나 고민 중인 침아에게 휘가 물었다.
“다시 떠오려고? 그럼 내가 거들어주마.”
침아는 휘를 쳐다보더니 눈 한 번 깜박일 동안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됐습니다.”
다시 동이를 머리에 얹고 침아가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혼자 걸어가게 두다가 휘가 옆으로 좇아가며 말을 건넸다.
“너, 내가 도와준다니까 안 가기로 작심하였지? 원래는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예.”
떠보려고 한 말에 바로 그런 대답이 돌아오니 휘는 또 한 방 먹었다. 침아가 빠른 걸음으로 몇 걸음 앞선 것을 휘는 성큼성큼 따라잡았다.
“뭐에 쓸 물이기에 이 아침부터 바지런을 떠는지 들어나 보자.”
“마시려고 떠오는 물이지 설마하니 발 씻을 물을 수고롭게 떠오고 있을까요.”
쌀쌀맞다 못해 방자하다. 그러나 이미 귀엽게 보기로 작심한 눈에는 그마저 새침한 것이 다른 계집들과 다른 멋이 있다. 그래도 큰도련님의 체통이 있어 휘는 짐짓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따악 침아의 앞길을 가로막고 섰다.
“고것 말하는 게 독살스럽기도 하구나. 내가 저택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낭속 나부랭이로 보이는 게냐, 네 눈엔?”
침아는 아무 말도 없이 잠시 휘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보란 듯이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입을 열었다.
“제 주인님 탕제에 쓸 물을 떠오는 길입니다. 이 무렵 물이 하루 중에 가장 맑아서 지금 떠오는 것이고, 가는 길에 농땡이 부리다간 물맛이 변할까 저어되어 부지런히 가는 것입니다. 그럼 좀 비켜주시겠나이까, 큰도련님?”
마지막엔 상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 하도 밝아서 꾸민 웃음 같지 않다. 휘는 암컷은 어려도 호락호락하게 보아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특히 이 아이는 더욱더!―뒷짐을 진 채 물었다.
“료가 그리하라 시키던?”
“아니오. 제 주인님은 저택 우물물과 이 물이 무슨 차이가 나는지도 모르실 걸요.”
“오호라, 그러면 네가 이리 이슬 밟고 다니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겠구나?”
다시금 침아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 그런 미끼엔 낚이지 않겠다는 듯 오만한 미소이기도 했다.
휘는 슬쩍 침아에게 다가서며 느릿하게 말했다.
“내 오늘 동생의 문병이나 가서 그 색다른 물맛 한 번 봐야겠다. 네 말대로 료가 정말 모르고 있는지도 확인해볼 겸.”
“좋을 대로 하셔요. 반기는 이는 없겠지만.”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를 비켜가는 침아를 지켜보다 그 뒤를 따르며 휘가 물었다.
“며칠간 내 생각은 나지 않더냐? 솔직히 말해서 네 주인, 말재간은 별로지. 내게 이리 톡톡 쏴대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할 것 같은데 말이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생각이 나고 말고 합니까?”
“나흘 전에 보고 오늘 보는 것인데?”
“그랬던가요?”
“내가 저택에 없는 것도 몰랐느냐?”
“어디 큰도련님께서 집에 안 붙어 계시는 게 하루 이틀 일입니까. 한창 꽃빛 좋은 봄이니 집에 붙어 계시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지요.”
심드렁하면서도 저간에 비난이 깔린 말투였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으면서 휘는 보다 확신하게 되었다. 이 아이, 분명히 내게 모종의 관심이 있음이야. 관심이 있음에도 아울러 경계하는 기색이 만만찮아서 재미있다. 역시 료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는 자구책이겠거니 한다.
“그래, 꼬마야. 한창 꽃빛 좋은 봄이다. 이런 때에 어여쁜 이를 만나러 가는 대신 내가 귀중한 며칠을 온통 이걸 찾아다녔지.”
침아의 눈앞에 불현듯 노란 뭉텅이가 나타났다. 너무 가까워 무엇인지 몰랐으나, 먼저 향기로, 다음으로는 뒤로 반 발짝 물러나면서 정체를 깨달았다.
“……아.”
가냘픈 중얼거림과 함께 침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노란 제비꽃만 모아서 만든 작은 꽃다발이었다. 거기에 저도 모르게 손을 내미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휘가 물었다.
“좋으냐?”
그 목소리에 침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멈추었다. 손가락을 말며 꾹 쥐었다가 물동이의 손잡이를 도로 잡았다.
“왜? 좋으면서 싫은 척하려고? 내 방금 네가 홀딱 빠진 모습을 똑똑히 보았거늘.”
제비꽃 다발을 든 휘가 그녀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뒷걸음질로 걸어가며 싱글거렸다. 침아는 그런 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물동이가 훼방을 놓아 그러지 못했다. 아주 짧은 순간 그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쳐가는 것을 그녀는 고스란히 내보이고 말았다.
맹수인 새답게 빠르고 환한 눈을 가진 휘가 그 찰나의 순간들을 면전에서 보았다. 의아해졌다. 무얼까, 저것은?
환멸, 분노, 회오, 슬픔……. 슬픔.
“무엇이 슬퍼 그러느냐? 이 꽃을 좋아한다 하지 않았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슬프긴 뭐가 슬퍼요?”
그러면서 침아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이 그녀를 배반했다. 아직 갈무리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눈 속에 부유했다.
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돌아가려는 침아의 앞으로 팔을 뻗었다. 침아도 걸음을 그쳤지만 아까처럼 방해 말라며 쏘아대지는 않았다. 조용히 그녀는 휘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았다.
“네게 주려고 가져왔는데, 주지 말까?”
잠시 대답이 없었다. 꽃을 응시하는 침아의 얼굴에 이제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눈빛도 읽히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침아가 웃었다. 갑작스레 꽃망울이 툭 터진 것처럼 환하게.
“전에도 자주 해보신 일이지요? 이런 식으로 수작을 걸면 여자들이 잘 넘어가나요?”
“전에 자주 하기는. 이런 걸 보고 기뻐하는 여자는 아쉽게도 별로 많지 않단다. 기뻐하는 척 해주는 여자는 꽤 되었지만.”
“그럴 리가요. 꽃을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다고.”
“싫어하는 여자는 아직 못 보았지. 하지만 시간을 들여 준비해도 돌아오는 것이 그만 못해. 암컷들은 하나같이 보다 오래가는 선물을 좋아하더구나.”
“그런 여자들만 골라서 만나신 건 아니고요?”
“내가 골라서 만난 건 미녀들뿐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암컷들의 마음은 재물로 움직이더구나.”
휘가 단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침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겉만 아름다운 쭉정이들이었겠지요. 이상한 일이군요. 이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재물이 없으면 암컷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다니.”
“물론 내 외모에서 크게 흔들리긴 하지.”
“백이십 년이면 퍽 긴 시간인데……그렇지 않은 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하셨을 리 없어요. 얼굴보다 마음이 더 곱고 재물보다 꽃을 더 좋아하는 그런 미녀가 정말로 없었나요? 이렇게 꽃다발을 주며 기쁘게 해주었던 이가 단 한 분도 없었어요?”
“글쎄.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휘는 꽃다발을 들여다보았다. 이내 빙긋 웃으며 침아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어찌 그런 것을 궁금하게 여기지? 혹시 네가 바로 그런 미녀라고 말하고 싶은 게냐?”
침아는 한숨을 쉬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관두겠습니다. 한가로우신 장난에 진지하게 대해 봤자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그리 비하를 하고 나올 건 무어냐. 보라고, 널 위해 이런 꽃다발도 만들어오지 않았느냐?”
“받들어 모셔지는 분이 그런 일을 손수 하셨겠습니까. 어느 아랫것이 공연히 일없는 제비꽃만 들쑤시고 다녔겠지요.”
다시금 시들해져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대하는 태도에 휘는 부아가 났다. 얼마쯤은 침아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제비꽃이 무더기로 핀 언덕을 발견하여 그 근처의 소 치는 아이에게 심부름값으로 얼마를 쥐어주어 노란 제비꽃만 취하게 하였다. 그러곤 오랜만에 퍽 매력이 있는 기녀(妓女)를 만나 짧은 환락을 즐기고 돌아오면서 그 꽃다발을 가져온 것이다.
지난 이틀을 함께 보낸 인간의 여자는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동안에도 침아 생각은 곧잘 하였다. 그래, 인간의 여자는 이러했지, 하면서 그 빤한 반응을 나름대로 즐기는 한편으로 빤하지 않은 누군가에 대한 흥미는 더욱 커졌다.
휘는 화를 낼까 하다가 차라리 마음을 바꾸어 스스로를 자조하는 편을 택했다.
“거 봐라. 이런 짓, 해보았자 들인 공만 아까울 따름이라니까. 노란 제비꽃을 좋아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내가 어리석었어.”
쓸쓸한 어조로 한숨까지 가미한 뒤 꽃다발을 툭 옆길에 던졌다. 그러고선 침아의 반대편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불현듯 새가 되어 날아올랐다. 너른 하늘 너머 펼쳐진 산림 속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침아는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잠자코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다가 걸음을 멈추었고 마침내는 반대편으로 되돌아왔다. 휘가 꽃을 버린 곳에 이르러 또 한참 서 있다가 물동이를 내려놓고 꽃다발을 주워들었다. 바라보기를 얼마쯤.
이윽고 침아가 꽃에 코를 묻었다. 향기를 마시면서 조금씩 미소가 얼굴에 차올랐다. 본디 붉은 볼에 더욱 홍조가 피어 홍매화 빛깔이 되었다.
그러다 그녀는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물동이는 머리에 이고 가야 하는데 꽃은 어떻게 들고 간다? 조심스럽게 앉아서 물동이를 먼저 머리에 얹은 다음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꽃다발을 들고 일어섰다. 걸음걸이가 어째 불안불안하다.
그렇게 열 걸음쯤 떼어놓았을까. 침아가 도로 멈춰 서서 물동이를 내렸다. 동이의 물을 옆의 풀숲에 쏟는다. 그리고 거기에 꽃다발을 넣었다.
꽃다발을 넣은 빈 동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며 침아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전에 들었던 연인을 기다리는 사내의 노래. 그 아씨는 여전히 냇물 앞에 서서 갈까 말까 하고 있다.
멀리, 소나무에 앉아 그녀 하는 양을 구경하던 휘가 그럼 그렇지 하며 웃는다.
그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집을 향해 걸어가는 침아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노랫소리는 더욱더 곱기만 했다.
사시(巳時)가 다 지나갈 무렵 료가 깨어났다. 어쩐지 몸이 무겁다 하면서 굼뜨게 일어날 생각도 안 하는 터라 소세도 침아가 시켜주다시피 했다. 조반을 들면서도 눈빛이 몽롱한 채라, 옆에서 지켜보던 침아가 몇 번이고 “드세요, 좀 더 드세요.”라고 말을 해야만 끼니 먹는 걸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가 아프신 건지요? 이 봄에 몸살이라도 나시는 걸까요? 약이 독해서 그러나? 제가 좀 주물러 드릴까요?”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딱히 미열이 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살갗이 까칠하고 눈빛이 탁한 것은 분명했다. 그도 그것이 불편한지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힘을 주어 뜨기도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옷을 내어오렴. 밖에 나가서 좀 걸어야겠다.”
“그러셔요, 오늘 바깥 날씨가 아주 화창하답니다. 봄꽃들이 온통 만발해서 산색이 기가 막혀요.”
“또 어느 참에 그런 건 보고 온 거냐?”
료가 깨어날 땐 틀림없이 품에 있었던 침아가 그런 소릴 하니 대번에 료가 낯을 찌푸렸다. 침아는 혀를 날름 빼물며 옷을 가져오겠다고 달음질쳤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침아를 좇아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료는 아무래도 몸이 무거워 도로 사방침에 기대어 앉았다.
정말 왜 이러지 하면서 료는 별생각 없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문지르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손톱을 세워 긁고 있었다.
무언가가 손톱에 걸려 파스슥 벗겨지는 소리에 료는 흠칫하여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숙여 커다래진 눈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눈앞이 뿌옇다는 느낌이 가시질 않아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옷자락을 펼치며 료는 자신의 가슴을 긁었다. 손톱이 박혔다 긁히면서 살갗을 덮고 있던 무언가가 더껑이 벗겨지듯 일어났다.
“……주인님?”
방으로 돌아오던 침아가 그런 료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약이 너무 독했던 것 아닙니까? 어쩐지 오늘따라 얼굴도 까칠하다 싶더니…….”
“거기 있어!”
다가오는 침아를 향해 료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주인님, 제가 봐 드릴게요.”
“오지 말고 거기 있어!”
옷자락을 여미며 료는 성을 냈다. 침아는 얼마쯤 웃으며 놀리듯 말하였다.
“이제 와서 내외를 하십니까? 괜찮아요, 제가…….”
“게 있으라 하였지! 말을 안 듣는 것도 정도껏 해!”
료가 진심으로 역정을 내자 주변 세간들이 바르르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세간들보다 침아가 훨씬 더 동요했다. 우뚝 멈춰선 침아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그 얼굴을 외면하며 료는 벌떡 일어나 그녀 옆을 지나갔다.
“우송을 찾아서, 세우지로 오라고 전해. 나는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너는 올 것 없다.”
빠른 걸음으로 료가 방을 나섰다. 문이 열렸다가 제대로 닫히지 않고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쿵쿵거리며 마루를 달려 나가는 료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그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게 되고서도 또 얼마가 지났을 때, 침아가 풀썩 주저앉았다.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나 힘이 풀린 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다가 그래도 되지 않자 침아가 방바닥을 내리쳤다.
“뭐야, 이게! 어찌 이러는 건데!”
성을 내는 말끝이 툭 떨어졌다.
“화내는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잠시 그렇게 축 늘어뜨린 어깨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침아가 고개를 들었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자리에서 스륵 일어났다. 다시 침착해진 얼굴로 가져왔던 료의 옷가지를 얌전히 한쪽에 치워두고 방을 나섰다.
우송을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마당으로 내려서는 침아가 언뜻 고개를 들었더니 하늘에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시야에서 그 새가 사라지도록 쳐다보았다.
새가 사라지고 다시 걷기 시작하였을 때 침아는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동쪽 끝에 있는 휼의 거처를 쓰고 있는 바람에 저택을 벗어나는 일조차도 길게만 느껴졌다. 몇몇인가의 낭속들과 마주치기도 하였다. 인사를 해오는 그들을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료는 달렸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춘 것은 딱히 누구를 만나서가 아니었다. 다만 풍악소리에 생각이 미쳤음이다. 그는 멈추어 서서 스윽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남쪽. 화산 노파의 객청에 난씨 자매가 들어 있는가.
어제 오후 자매가 함께 그를 문병 오는 바람에 료는 적잖이 귀찮은 시간을 보내었다. 화산 노파의 의중을 모른 척할 때는 데면데면하게 굴었지만 이제 안다는 것을 밝힌 마당에 자매를 대하는 불편함은 노골적이 되었다.
특히 침아가 두 자매 중에서 가진 쪽을 의식하는 것이 분명해서 더 곤란했다. 그녀가 료와 가진을 맺어 달라고 화산 노파를 졸랐다는 일은 짐짓 모른 척하고 있다. 그 자매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침아 앞에서 거론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같은 경우 그는 침아 보라고 부러 더 자매들을 강퍅하게 대했다. 침아가 중간에서 료의 행동을 변호하려고 애를 쓰는 게 보이면 보일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었다. 마침내는 늘 웃음이 그치지 않는 가진조차 불편한 때에 찾아온 모양인가 보다고 머쓱해하며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들이 간 뒤에 침아는 료를 보며 어찌 그리 괴팍하게 구셨느냐며 다음부터는 그리하지 말라 성화였지만 료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물론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셈이다. 그는 물밑에서 오간 혼담의 존재를 아예 없었던 것으로 묻어버릴 테니까.
료는 옷깃을 꼭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거칠거칠하게 일어난 허물을 더 사정없이 긁었다. 옷 사이로 손을 넣어 어깻죽지도 긁었다. 목덜미에도 불투명한 허물들이 너덜너덜하게 생겼다. 하자고 들자면 얼굴도 손을 댈 것이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다.
막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 전에 할머니가 창피해하시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곧 떨쳐냈다. 그 외의 다른 이들의 눈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침아의 눈만큼은 마음에 걸렸다. 우송만 보내랬는데 그 녀석이 호기심에 따라오면 어쩌지 하면서 료는 눈을 감았다.
흐릿한 저녁 남기가 자욱하게 퍼지듯이 료의 주변으로 검푸른 연기가 일었다. 얄따란 침의가 등을 비집고 일어서는 날개로 인해 속절없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덮은 허물로 인해 시야가 맑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어렸을 때 그토록 노력해도 되지 않던 날갯짓이 한 번 성공한 후로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는 것이 료는 기이했다. 펄럭펄럭 제자리에서 나는 그의 모습을 본 낭속들 몇이 놀라서 묘한 소리를 내다가 삼키는 것을 보았다.
전 같으면 그들의 그런 반응에 수치를 느껴 심하게 동요했을 텐데,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도 신기했다. 료는 기이할 만큼 침착한 마음으로 남쪽, 화산 노파의 객청을 향해 날아갔다.
금세 객청 위 하늘에 이르러 비어 있는 뜰 위를 날게 되었다. 객청으로 음식이 담긴 소반을 들고 가던 시녀 하나가 그를 보고 놀라서 소반을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가 났고, 안에서 무슨 일인가 하고 내다본 시녀도 이윽고 료를 보았다. 그 시녀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키며 급히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곧 활짝 열려 있는 여러 문들로 호기심에 어린 관객들이 몰려나왔다. 그중에 화산 노파와 가진, 가선 자매도 있었다. 비록 흐릿한 시야라고 해도 료는 봐야 할 것은 충분히 보았다. 가진의 헤벌려진 입은 웃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고, 가선은 질겁하여 시종 정의 등 뒤로 숨으려 했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화산 노파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료야, 네 모습이 어찌 그러하냐……?”
료는 제대로 착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긴장하였으나 그럭저럭 잘 땅에 내려앉았다. 얼마쯤 거칠고 큰 소리가 난 것은 개의치 않았다.
“상처가 마침내 나았다는 뜻이지요. 탈피를 하려는 중입니다.”
몸이 바뀌니 목소리조차 바뀌었다. 낮고도 굵은 울림에 나는 이제 이런 목소리를 내는구나 싶어서 신기해하는 료에게 화산 노파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톱집이 그의 날개를 살짝 스쳐갔다.
“그렇구나. 허물……이구나, 이것은.”
“예. 상처 범위가 좀 넓다 싶더니 허물이 생기는군요.”
“너 혼자서 할 수 있겠느냐?”
“우송이 도와주면 충분할 겁니다. 세우지로 가려던 길에 할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나는 것을 보셨으면 하셨지요.”
화산 노파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그 뜻으로 온 것이 아님을 저도 알고 나도 안다. 다른 식으로 찾아와 몰래 보여줄 수도 있었으나 이렇게 백주에, 난씨 자매들이 와 있음을 뻔히 알았을 거면서 당당히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허물벗기 직전의 모습으로.
“그래, 보았으면 하였지. 내가 꼭 보았으면 했다.”
“그럼 보십시오, 할머니. 이제 저는 제법 잘 납니다.”
그러면서 막 날갯짓을 하려는 료에게 가진이 결국 궁금함을 참다못해 물었다.
“저기 료 공자님, 탈피는 웬 말이고, 허물은 다 무업니까? 저는 짐조가 탈피를 한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입니다!”
호기심 많은 그녀의 성격이 처음으로 료의 마음에 든 순간이었다. 료는 천천히 가진을 돌아보며 머리를 갸웃했다.
“아, 아마도 그러시겠지요. 아시는 것이 맞습니다. 저희 일족은 탈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저희 형님을 보셨다면 바로 그 모습이 소저께서 아시는 제대로 된 짐새라고 생각하시면 맞습니다.”
“그럼 작은 공자님께선 어찌하여 이런 모습이십니까?”
“가진낭, 그것은 내가 차차 설명해 줄 터이니…….”
화산 노파가 초조한 기색으로 가진에게 눈짓을 하며 질문을 만류하였으나 료가 더할 나위 없이 산뜻하게 대답해 버렸다.
“제 핏속에 이무기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겠지요.”
“이무기요?”
가진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이 말에는 놀라서 소스라쳤다. 료는 보란 듯이 날개를 양쪽으로 펼쳤다.
“예,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료가 훌쩍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모여 있는 이들의 머리 위에서 한 바퀴 원을 그렸다. 그런 후에 료는 간다는 말도 없이 세우지를 향해 날갯짓했다. 두 번 날아 남쪽 하늘을 벗어났고 세 번 날아 모여 있는 이들의 시야에서 점이 되었다. 얼마 안 가 자취조차 사라졌다.
복잡한 의미의 한숨을 내쉬는 화산 노파의 곁에서 가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이무기라니! 그러고 보니 그쪽도 알을 낳긴 하는구나.”
료는 거동에 무리가 없을 뿐 아니라, 탕제 달이는 일도 이젠 침아에게 내어준 터라 우송은 조석으로 료에게 얼굴을 보이며 문안할 때 말고는 불에 탄 서쪽 거처를 수선하느라 혼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침아가 나타나 료가 그를 찾는다 하자 “정말?”하고 몹시 기쁜 낯을 지었다. 기다리는 곳이 세우지라고 알리자 잠깐 의아한 표정이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으음. 꼬마 너는 돌아가 있어.”하고 말하고는 겅중겅중 달음박질을 쳤다.
뒤에 남은 침아는 잠시 불탄 자리를 둘러보았다. 부지런한 우송의 손에서 을씨년스러웠던 화재의 잔해는 거의 모습을 감춘 후이다. 요 며칠 날씨가 다소 흐렸기에 물로 소제한 자리가 쉬 마르지 않아 아직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오늘처럼 날씨가 포근한 날이 계속 된다면 우송의 부지런함이 더 빠른 시일 내에 빛을 발할 것이다.
침아는 뜰이 있던 자리로 나와 섰다. 뜨락이 쑥대밭이 되었던 첫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제는 그 자리가 퀭하니 황량하였다. 그나마 자귀나무 밑동 하나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뜰을 다시 채우는 것은 의외로 금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침아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쉬 풀리지 않았다.
유채꽃이 만발했던 자리를 돌아보면서 그녀가 스산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난새……. 고이 두자니 배알이 뒤틀리는군.”
거뭇거뭇한 흙은 유채의 뿌리 몇 가닥쯤은 품고 있을지 모르겠다. 큰 화재가 휩쓸고 간 산도 몇 해 뒤에 다시 가보면 예전 그 자리에 꼭 같은 것이 얼마쯤 피어나지 않던가.
“난새로 태어난 것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줄 알고 건방지게…….”
침아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니 살다 보면 얼마쯤 둥글어지겠거니…….
하지만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제 손으로 죽였다 여긴 것이 살아 돌아오는 상황을 만나 퍽 놀랐을 테고, 세상일이라는 게 꼭 저 뜻대로는 돌아가지 않음도 배웠을 테니 이젠 무서워서라도 자중하겠지 했던 침아의 생각이 헛되었음을 이미 목도했다.
오히려 가선은 되풀이해서 그녀를 죽이고자 꾸몄다. 침아도 이쯤 되자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수족이 되어 일을 벌인 정을 잡아 족쳤다. 이를테면 풀을 때려 그 속에 숨어 있는 뱀을 놀라게 할 뜻이었다.
그런 자들이 간혹 있다. 타자에게는 깜짝 놀랄 만큼 잔혹한 짓을 눈 하나 깜빡 않고 서슴없이 저지르는 주제에 제 집안, 제 식솔을 챙기는 일에선 보살이 따로 없을 만큼 자애로운 자들. 상상력이 부족한 것인지, 제 손길 미치는 곳만 다사로우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것인지는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아서 침아도 알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선 가선의 그런 순진한 냉혹이 료와 비슷하다고도 여겼다. 어린 자들 특유의 풋내 나는 오만함.
그렇기에……다시금 봐주었다. 료의 첫인상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사뭇 흐릿해져 이젠 정말 그런 일이 있었든가 하고 의아해질 정도니까. 다른 이에게는 어떨지 딱히 겪어보지 못해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곁에서 침아가 잘만 인도한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다사롭지는 못해도 흉악무도하다는 소리는 듣고 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선 같은 경우도 곁에서 보필하는 이 중에 가장 가까운 정이 중요하다 보았다. 입이 가벼워서 풀어준 즉시 제 주인에게 가서 고자질을 하였든―그럴 자라고는 보이지 않았으나―아니면 그자가 속내가 깊어 침아에게 당한 일을 속으로만 묻든 두 수 모두 침아가 짐작한 수이다. 그만 하면 방어를 겸한 공격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침아가 두 번의 흉계를 꿰고 있는 마당에, 게다가 더는 접근 말라 경고까지 한 마당에 세 번째 흉계를 꾀하는 위험을 누가 되었든 숙지하고 있는 걸로 족했다.
일단 정은 다시는 없을 일이라 맹세하며 그 증거로 몇 가지 해칠 궁리를 했던 것도 제 스스로 실토했다. 이 댁 주인들의 별미라는 독사를 실수로 풀어놓은 것처럼 꾸며 해한다던가, 좀 멀리 나들이를 핑계로 데려갔다가 산짐승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 따위. 귀 기울여 듣긴 하였으나 역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가선 그 어리석은 것이 휘에게 마음이 기울었다는 말이다…….
“푸훗.”
보는 이도 없는데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침아는 은밀히 웃었다. 싸늘한 조소를 흘리던 중에 언젠가 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양두구육이란 말을 아느냐? 그자의 정은 변덕스럽고 덧없는 것이다. 늘어놓는 소리는 그럴싸하고 미소는 꿀과 같은지 몰라도 속에는 독이 있느니라.
침아가 빙판에서 머리를 다쳐 쉬 깨어나지 못했을 때 곁에서 중얼거리던 소리. 들었다. 그 다음 말까지도.
―너도 암컷이니 그자가 손 내밀면 좋다고 가버릴 터이지.
가만히 턱에 손을 댄 채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던 침아가 사뭇 아련한 눈길로 중얼거렸다.
“귀여운 료…….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안타까워하는 듯한 목소리와 달리 입가엔 미소가 퍼졌다.
“그 어린 모습, 참으로 어여뻤는데 다만 몇 년이라도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좋았을 걸. 어째서 자라버리고 말았담…….”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눈을 뜬 침아가 스윽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은 세우지가 있는 쪽 하늘이다.
료가 그녀에게 오지 말라 역정을 내던 모습을 떠올리자 그녀의 눈가에 그늘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이 비슷한 일이 또 있었던가?
작년 이 무렵의 봄에 료는 별다른 이유 없이 며칠 기분이 좋지 않아 누워 지낸 적이 있다. 안색은 물론 눈빛도 탁해져 어디가 아픈 모양이라고 짐작했으나 별달리 약을 챙기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저녁 불쑥 일어난 그가 침아에게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우송을 데리고 밤 산책을 하러 나갔다.
이튿날 동틀 무렵 돌아온 료를 보고 침아는 놀라서 하마터면 말을 안 하기로 했던 것도 잊고 소리를 낼 뻔했었다. 흠뻑 젖은 채로 침아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던 료는 나갈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자라버렸다. 단 하룻밤 사이에 인간들의 나이로 대여섯 살은 훌쩍 자란 듯이.
“설마 또?”
걱정스런 혼잣말에 이어 침아의 발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지 말라고 한 료의 명령은 세우지를 향해 빠르게 달음질치는 걸음과 함께 뒤에 오롯이 놓고 가버린다. 혹시 가보았더니 없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그 걸음은 계속 빨라져 마침내는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하지만 세우지의 물빛이 햇빛에 반사되어 공중에 어른거리는 곳에 다다랐을 때 침아는 발소리를 죽이고 몸을 숨겨야 한다는 분별은 할 수 있었다. 올해 다른 나무에 비해 꽃을 늦게 피운 복사나무가 점점이 흩어져있어 대기 중에 흐르는 달콤한 향내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살금살금 걸었다. 나무에서 나무로 몸을 감춰가며 걷던 침아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허벅지까지 잠길 정도로 세우지에 들어가 있는 우송의 커다란 몸집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스르륵 펼쳐지며 하늘을 찌를 듯한 빛을 뿜는 한 쌍의 날개를 보았다.
아니, 빛을 뿜어냈다는 것은 눈의 착각이었다.
푸른 광택이 날 정도로 짙은 흑빛의 날개는 마치 검은 철로 벼려낸 날붙이처럼 세우지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무수한 반사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날개가 어찌 저리 반짝일 수 있지?
눈을 비비며 거듭 제가 보는 것을 확인하던 침아는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깃털이 없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자리를 채운 것은…….
틀림없는 비늘이다.
커다란 손으로 료의 몸을 덮은 허물을 벗겨가는 우송의 작업은 사뭇 조심스럽고 그 손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섬세하기도 했다. 눈을 감은 채 그 지난한 경과를 인내하고 있던 료는 문득 불어온 미풍에 눈을 떴다.
복사꽃 냄새에 감추어져 있어도 그보다 더 향기로운 누군가의 체취가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료는 한숨을 쉬는 대신 우송에게 말했다.
“우송, 눈을 좀…….”
“거기는 맨 마지막으로 하시지 않습니까?”
“저편 복사나무 뒤에 작은 새가 숨어 있어. 흐리멍덩한 눈으로 대하긴 싫구나. 돌아보진 말고.”
우송이 바로 고개를 뒤로 돌리려다가 료의 말을 듣고 멈추었다. 그가 대신 한숨을 쉬었다.
“그 꼬마, 오지 말라고 했는데.”
“나도 그랬다. 역시 말을 안 들어.”
“지지리도 안 듣지요.”
슬쩍 료의 눈치를 보았으나 의외로 료가 덤덤한 듯하여 우송은 안심하며 료의 두 눈을 가리고 있는 허물을 살살 뜯어냈다.
환한 햇살 아래 한층 투명하여 그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붉은 홍채 속에서 세로로 길게 찢어진 검은 동공이 빛을 받아 더욱 가늘어졌다.
“기왕 하는 김에 머리 부분도 서둘러 정리하겠습니다.”
료는 우송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말의 털을 빗길 때 쓰는 성긴 빗조차 쓰지 못하고 일일이 손으로만 하는 작업이라 서둘러도 더뎠다. 그러면서도 우송은 꼼꼼하기 짝이 없어 대충은 하지 않는다.
“그만. 새가 달아나려고 해.”
우송이 손을 거두자 료는 물 위를 걷는 듯이 날다가 한 번 물속으로 깊숙이 잠겨들었다. 얼마 안 가 커다란 파문을 만들며 수면을 박차 오른 료는 힘찬 날갯짓으로 몸을 털었다.
그 물보라가 기척을 숨기며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침아에게까지 들쳤다. “앗, 차거”하면서 목덜미로 손을 올린 침아는 거기 실제로 묻어 있는 물방울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가 온통 어두워졌다.
침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 어둠의 정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양 날개를 활짝 펼친 료가 그녀 바로 위의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해를 등진 료의 등 뒤로부터 마치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가장자리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을 보았을 때 침아는 움찔했다. 붉다. 잘못 보았나?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위를 응시했을 때 이미 료는 거기에 없었다. 그녀의 앞쪽에서 상당한 무게의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돌아보았더니 료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쳇, 아까는 제대로 내려앉았는데.”
착륙하다가 실수를 좀 해서 발이 미끄러졌다. 다행인 것은 냉큼 일어난 덕분에 침아는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휘둥그레진 침아의 눈을 보면서 료는 일없이 날개를 한 번 퍼덕거렸다. 그대로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침아가 먼저 다가오게끔. 다가오지 않으면……어쩔 수 없다.
침아는 그대로 서 있었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으면서.
료 또한 그랬다.
영겁이 아닌가 싶을 만큼 어색하고도 긴 시간이 흘러갔다. 아무 반응 없이 서 있는 침아의 모습을 보는 것이 료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징그러우냐? 내 모습이 하 끔찍해서 차마 걸음도 뗄 수 없을 지경으로?’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대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거드름을 피웠다.
“내 틀림없이 너는 저택에 있으라 말을…….”
“세상에!”
갑자기 침아가 소리를 질렀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침아야?”
“세상에, 세상에!”
팔짝팔짝 뛰기까지 했다. 어리둥절하여 멀뚱해진 료의 눈앞에서 침아가 맹렬히 달려와 료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료의 본체는 료가 인간의 모습을 취했을 때보다 석 자쯤 컸다.
“이 눈 좀 봐! 어쩌면 이리 예쁠까! 이렇게 예쁜 눈은 본 적이 없어요! 산호 따위는 댈 것도 아니고, 홍옥이 그렇게나 예쁘다던데 꼭 이럴까? 물에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날개 달린 자가 이런 눈을 가지고 있을까?”
붉어질 수만 있다면 료의 뺨이 아마 붉어졌을 것이다. 이어서 침아가 그의 주변을 돌면서 그의 몸에 손을 댔을 때, 그 붉어짐은 더더욱 심해졌을 것이고.
“잉어의 비늘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아니네? 틀림없이 딱딱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부드럽고 차갑고……매끈거려. 어쩌면. 내 뺨보다 더 부드러운 것 같아.”
날개를 매만지던 침아가 불쑥 뺨을 대고 비비적거리는 바람에 료는 몹시 당황했다. 고개를 돌려 침아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는데 날개에 기대어 감촉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던 침아가 불쑥 눈을 떴다. 마치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녀가 거침없이 물어왔다.
“정체가 뭔가요, 주인님은?”
“나는, 짐새다.”
금빛이 도는 새파란 눈테에 감싸인 붉은 눈 속의 동공이 침아를 보는 동안 몹시 커져 새까만 거울처럼 그녀의 모습을 반사했다.
“짐새.”
가만히 중얼거려 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설이 아니라 정말로 있는 새였구나. 그런데 짐새라면 깃털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슨 이야기에서였더라, 아무튼 짐주를 보내 사람을 죽인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짐새의 깃털을 담가 만든 그 술은 세상에 해독약이 없는 독주(毒酒)라고 하면서.”
짐새, 혹은 짐조라 불리는 기이한 새. 인간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은 침아의 말처럼 그 깃털을 취해 만든 짐주의 탓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세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꾸며낸 전설 같은 것이 되고 말았으나,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 오래전 인간 세상에 그런 것이 나돌기도 했다고 들었다.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게다. 짐새에겐 인간에겐 독이 될 게 틀림없는 깃털이 있지. 언젠가 휘를 본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이 본디 우리 일족의 모습이다. 다들 밤하늘처럼 짙푸른 검은 깃털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주인님은…….”
“나는 잡종인 게지. 모르겠느냐? 내 피부를 덮고 있는 것은……뱀에게서나 볼 법한 비늘이란 것을.”
부러 더 료는 ‘뱀’이란 말을 힘주어 하였다. 하지만 침아는 펄쩍 뛰며 물러나는 대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아, 잉어가 아니라 뱀이구나.”
그러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날개를 또 쓰다듬었다. 료는 언젠가 야시에서 침아가 보여준 반응을 기억하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싫지 않으냐? 이리 독이 있는 것은 질색이라면서 무서워하더니.”
“응? 아, 괜찮습니다. 주인님이랑은 말이 통하잖아요.”
“뭐?”
“살무사 같은 것도 그렇고 전갈이나 말벌 같은 것과는 말이 통해야 말이지요. 무슨 이유로 제게 해코지를 할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네들 마음이지. 하지만 주인님은 아니잖아요. 앗, 혹시 만지는 것만으로도 독기운이 퍼지나요? 그렇다면 곤란해요. 아직 비명횡사하기엔 아까운 인생인데…….”
비로소 약간의 두려운 기색으로 물러나려는 침아를 보면서 료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괜찮다. 네겐 다행스럽게도 내 피부는 뱀의 비늘이라 그럴 일은 없다.”
“그건 정말 다행입니다.”
대뜸 도로 다가와 찰싹 침아가 날개에 달라붙었다. 이제는 아주 대놓고 양손으로 쓱쓱 만지면서 그녀가 재잘댔다.
“박쥐도 퍽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주인님은 그 백 배는 더 어여쁘십니다.”
료는 속으로 으응? 하고 인상을 썼다. 어느 모로 보든 괴상망측한 게 박쥐인데 그것이 예쁘다 하면 대체 이 아이의 보는 눈은……. 그보다 박쥐 따위보다 백 배는 예쁘다는 소리가 칭찬인가?
“휘하고 비교하면?”
“음. 일단은 주인님의 승리.”
“일단은?”
“제가 큰도련님은 만져본 적이 없어서 정보가 부족합니다. 나중에 깃털을 만져볼 일이 있다면 합산해서 어느 쪽이 더 미남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단은 이 비단 같은 비늘에, 비슷한 걸 본 적 없을 정도로 어여쁜 눈이 월등합니다. 그러니까 주인님의 승리.”
정말로 기가 막힌다. 료는 부리를 벌려서 침아의 머리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물었다.
“그런 놈을 만지긴 왜 만진단 말이냐. 엉뚱한 일을 벌였다간 봐라, 거꾸로 매달아두고 패줄 테다.”
“어머, 또 말만 그럴싸하게 하시지. 제가 그리 호락호락 당할 줄 아시지요? 냉큼 달아나 버리지 다리는 허투루 달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주인님도 참, 이 귀여운 침아를 어찌 패십니까, 어디 때릴 곳 하나가 있다고. 근데 이 매미허물 같은 것은 무엇인지요? 아, 이제 보니 아까 껍질이 벗겨진 것도 그렇고 탈피 비슷한 걸 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예서 우송 아저씨가 거들어 주시고 계신 거였습니까? 그렇다면 제게도 말씀을 하시지. 기왕이면 제 조막손이라도 더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할 수 있을 텐데.”
료의 위협에 콧방귀는커녕 완벽하게 무시하는 침아를 보면서 료는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의 본체를 보고도 징그러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예쁘다고 야단일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보고 예쁘다고 한 소리가 그렇게 귀에 거슬렸던 것은 꿈에서 겪은 일인 것처럼, 지금 그의 가슴에는 흐뭇한 기쁨이 가득했다.
하찮은 말 한마디로도 어찌 이리 그를 기쁘게 하는 재주가 각별할까. 귀여운 아이. 내 귀여운 아이. 못내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어디 달아나는가, 못 달아나는가 보자.”
부러 으름장을 놓는 소리와 함께 료가 뒤로 몇 발짝 물렀다가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과장된 날갯짓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면서 침아는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 퍼뜩 놀라 소매를 치운 것은 느닷없이 발이 붕 뜨이는 순간이었다.
“꺄아, 주인님, 주인님!”
료의 발톱이 그녀를 움켜잡아 하늘로 데려 올라가고 있었다. 침아가 버둥거리는 것을 보면서 료가 한가로이 말했다.
“왜, 네 두 다리는 허투루 달려 있느냐?”
어디 도망갈 테면 가보란 식의 놀림에도 침아는 버둥거리기 바빴다. 왜냐하면, 심술 맞게도 료가 그녀를 거꾸로 뒤집어서 들고 날았기 때문이다.
“말만 했지 제가 큰도련님을 만진 것도 아닌데, 이리 벌을 미리 받았으니 억울해서라도 큰도련님 만지고 말겠습니다!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마구 만질 거예요!”
“허, 시끄럽긴.”
“두고 보시라니까요, 허튼소리면 제 손에 장을 지져요!”
뒤집혀진 치맛자락을 밀쳐 내가며 떠들어대는 침아를 료는 어디 한 번 혼나 봐라 하면서 세우지 한복판에 떨궈 버렸다.
“으꺄앗!”
떨어지면서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풍덩!
낄낄거리며 우송의 근처로 날아온 료가 수면에 미끄러지듯이 착륙하여 거의 정확하게 우송 앞에 이르렀다.
“자, 남은 일 마저 하자.”
료의 말에도 우송은 입을 헤벌리고 침아가 빠진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고 있다.
“나올 거다.”
“그렇지만 저 아인 약한 인간…….”
걱정하는 우송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치 물속에서 자라라도 밟고 뛰어 오르듯이 침아가 머리를 내밀었다.
“으아아악!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가엾은 아이를 이런 식으로 내동댕이치시다니, 제가 가만있을 줄 아십니까! 오늘 주무실 때 조심하세요! 제가 잠꼬대로 어디를 물지 저도 잘 모른다고요!”
나오기 무섭게 바락바락 패악을 떠는 소리에 우송은 근심스런 표정을 싹 바꾸어 료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 걱정은 마라. 나는 안 물릴 테니까.”
히쭉거리며 웃는 료는 기분이 몹시도 좋았다. 그래서 알고는 있되 묻지는 말아야지 하던 걸 우송에게 물었다.
“그런데 일전에 네 수청을 든 기녀, 마음에 들더냐?”
“푸웃! 아이고, 그걸 어찌, 어찌…….”
자그마하고 웃기 잘하던 인간의 계집과 만리장성을 쌓은 꿈결 같은 하룻밤. 한밤중에 료가 저택으로 날아가 버린 바람에 부랴부랴 떠나느라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헤어져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몽롱한 그 하룻밤의 일을 주인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우송은 삽시간에 온몸이 벌게져서 말조차 제대로 못 이었다.
료는 의뭉스럽게도 태연히 눈만 끔벅이다가 또 물었다.
“좋던?”
“쿨룩, 쿨럭, 쿠울럭!”
기도에 침이라도 들어갔는지 기침소리가 심각도 하다. 료는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어지간히도 좋았나 보구나. 부럽군.”
놀리는 말이 아니었다. 진지했다.
그러면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게 언제냐는 듯 침아는 유유히 헤엄을 치면서 놀고 있었다.
도로 고개를 돌린 료 쪽으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바람에 실린 복사꽃이 료의 눈가를 스치고 갔다. 천천히 료는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지루한 허물벗기도 아주 끝이다 하고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침아는 햇살 잘 드는 곳에 누워 반쯤 졸면서 몸을 말리는 중이었다. 우송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손짓한 다음 료가 그녀에게 다가가 내려다보면서 섰다. 얼굴을 쪼이던 햇빛을 가리자 금세 그걸 알고 침아가 눈을 떴다.
“다 끝났습니까? 근데 안 자라셨네?”
료를 보고는 어쩐지 한숨을 쉬면서 침아가 중얼거렸다.
“상처가 아물어 생긴 허물을 벗은 것뿐이다. 자라지 않아 실망이냐?”
“아니오, 천만다행입니다.”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하는 침아에게 료가 말했다.
“오늘, 보름이지.”
“보름입니다.”
“어두워지면 모처럼 예서 화월 구경이나 할까?”
침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상그레 웃었다.
“그거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