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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면(裏面) (17/33)

16. 이면(裏面)

마루의 볕 좋은 곳에 앉아 침아는 머리를 빗으며 말리고 있었다. 수없이 빗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빛을 받는 곳마다 진주가루라도 뿌린 듯 반짝이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왔다. 내리깔고 있는 속눈썹 아래의 표정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도 하고 근심이 있는 듯도 하였다.

어쨌든 무언가에 깊이 정신이 팔린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화산 노파는 헛기침을 또 한 번 했다. 그럼에도 침아는 하염없이 빗질만 했다.

“얘 침아야, 어디에 혼을 팔아먹기라도 한 게냐?”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침아가 퍼뜩 눈을 깜박거리며 앞을 보았다. 화산 노파를 보고서도 잠시 멍한 표정이다가 뒤늦게 마루에서 내려섰다.

“오셨습니까.”

“그래. 머리를 감은 모양이지?”

“예. 괜스레 아직도 연기 냄새가 밴 것 같아서.”

“오늘 난씨 자매네들도 큰 목욕을 하느라 바쁘다 하던데, 넌 그나마 인간이니 그런 고충은 없어 좋겠구나.”

큰 목욕이라 함은 침아도 알고 있다. 인간으로 둔갑하여 지내는 것이 하도 자연스러워 종종 잊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 그녀의 주위에 있는 자들은 인간은 아니다. 때문에 대개 달포에 한 번쯤은 본 모습으로 돌아가 몸을 씻는데 그것을 일러 큰 목욕이라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인간의 모습으로 하는 목욕만으로는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인지, 나름의 의식인지는 침아도 물은 바가 없다.

료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믐 무렵이 그가 큰 목욕을 하는 때인데 늘 우송이 시중을 도맡아 한다. 이 집에 오고 얼마 안 되어 저도 도울까요, 하고 우송에게 물었었는데 우송은 딱 잘라서 네가 할 일이 없다고만 했다.

앞으로 모은 두 손에 쥔 빗을 만지작거리던 침아가 중얼거렸다.

“저희 작은 주인님도 어서 나으셔서 큰 목욕을 한 번 하셔야 할 텐데요. 깔끔한 걸 몹시 좋아하시는데.”

“며칠 뒤면 할 수 있겠지. 그러고 보니 료 목욕 시중은 누가 하느냐?”

“우송 아저씨가 계속 해오고 계십니다.”

“네가 해보겠다고 한 적은 있고?”

“예.”

화산 노파는 잠시 침아를 응시하다가 물었다.

“혹 이번에 료의 진짜 모습을 보았느냐?”

“못 보았습니다.”

“보고 싶지 않으냐?”

침아는 어깨만 으쓱했다. 미묘한 반응에 화산 노파가 웃었다.

“나는 보고 싶구나. 말로만 듣는 걸로는 부족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보여달라 보채는 것은 낫살이나 먹어서 체통 없는 짓 같아 걱정이다. 네가 한 번 꾀어보지 않을 테냐?”

침아는 또 어깨만 으쓱했다.

“싫어?”

빗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을 멈추더니 고개를 든 침아가 엉뚱한 걸 물었다.

“난씨네 둘째 아씨를 저희 주인님과 짝지어줄 요량이시지요?”

“과연 눈치가 빠르구나. 혹 료도 알고 있는 게냐?”

화산 노파가 목소리를 낮추어 묻자 침아도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저희 주인님이야 뭐, 그런 일엔 관심이 없으시지요. 그 비슷한 생각도 못 하신다는데 제 목숨이라도 걸겠습니다.”

“하기야 그럴 테지.”

그것이 료라고 생각하면서도 화산 노파는 한숨을 쉬었다. 침아는 다시금 빗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이미 완전히 말이 오간 일입니까?”

“무어가, 혼사일 말이냐?”

“예.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데 실은 속으로 혼사 준비가 착착 진행된다거나 그런 것인지 궁금해서 여쭙는 말입니다.”

“무어 그리 급한 일이 있다고 서두르겠느냐. 당사자들 마음이 없는 혼사를 강요할 뜻은 없으니 차차 서로 보는 것이 순서지. 눈에 들면 마음에도 드는 것은 자고로 크게 변함없는 진리더구나.”

그렇게 말해 주던 화산 노파의 생각이 언뜻 어떤 점에 가 미쳤다. 침아의 안색을 새삼스레 살피다가 그녀가 물었다.

“료가 혼인을 할 일을 혹시 근심하는 게냐?”

빗을 만지작거리던 침아의 손이 또 딱 멈춘다. 다시 좀 더 빠르게 빗살을 툭툭 건드리면서 침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맞지 않느냐. 안주인이 들어올 일이 내심 신경 쓰이는가 보구나?”

아무리 어려도 암컷은 암컷이거니 하면서 옅은 웃음이 눈가에 퍼졌다. 하지만 그 근심으로 료를 흔들리게 하는 것은 좌시할 수 없다. 살아온 햇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순진한 그 아이, 이제 갓 정을 준 인간의 암컷 때문에 제 배필이 될 수도 있는 이를 배척하고 나선다면 난감한 일이다.

그만한 사리분별이야 료가 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바로 그런 식의 낙관적인 기대를 누군가에게 주었다가 호되게 배반당했던 것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어제의 사뭇 쌀쌀했던 휘의 모습을 떠올리며 화산 노파는 조금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

“료가 널 아끼는 마음이 자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 일을 가지고 엉뚱한 생각을 품는 것은 아니 될 말이다. 료는 네가 스러져 백골이 한 줌 흙으로 화할 무렵에도 살아서 이 세상을 대하고 있을 아이이다. 그 아이가 수명을 다할 무렵엔 아마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네 이름도 기억 못할 게야. 내 말이 이해가 가느냐?”

침아는 고개를 끄덕이나 싶더니 이내 가로저었다. 화산 노파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침아가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한 채로 입을 들썩이기에,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려 보았다.

“저희 주인님은 어르신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도 정이 깊으신 분입니다. 오백 년을 살면 오백 년 후에도, 천 년을 살면 천 년 후에도 이 보잘것없는 녀석 일을 기억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

화산 노파를 똑바로 쳐다보며 침아가 물었다.

“어르신도 주술을 쓸 줄 아시지요. 기억을 묻어두는 주술 같은 건 모르십니까?”

“알면 그걸 료에게 쓰라 이 말이냐? 너는 참 별난 생각에 재주가 있구나.”

엄하게 굴려던 것도 잊고 화산 노파는 웃고 말았다. 이리 엉뚱한 점도 료가 이 아이를 아끼는 이유가 될 것이다. 침아는 그래도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건 모르십니까? 하긴 그렇게 편한 주술이 있을 리 없나요. 애초에 편한 길을 찾아 꼼수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또 묘한 말과 함께 침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난씨네 첫째 아씨가 저희 주인님을 싫지 않게 여기시는 것 같던데, 그분이랑 짝을 지어주시면 안 되십니까? 저희 주인님께 시집오시겠다 말씀도 하셨는데.”

“응? 그럼 둘째 아씨는 휘에게 주라 이 소리냐?”

“예. 제 보기엔 첫째 아씨가 저희 주인께 훨씬 더 잘 어울리십니다. 저희 주인님 아직 성격 강파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끔 아주아주 음침해지시기 때문에 첫째 아씨 같은 분이 정말로, 정말로 필요합니다. 상냥하고, 어여쁘고, 솔직하신 분이요. 첫째 아씨로 해주십시오. 예?”

침아는 화산 노파의 팔에 매달리며 손까지 잡아 흔들었다. 말하는 표정이 단순히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님을 화산 노파도 알 수 있었다. 화산 노파는 어리둥절하여 눈을 끔벅이다가 말했다.

“글쎄다. 둘이 서로 좋아하여 죽어도 짝이 되겠다고 하면 몰라도……. 자매를 데려오면서 언니를 동생에게 동생을 형에게 맺어주는 것은 모양새가 우습지 않으냐.”

“별 잡다한 것에 치여 사는 인간 세상도 아닌데 모양새야 조금 이상하면 어떻습니까. 말씀 좀 해주셔요, 어르신. 아니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바람기 많으신 큰도련님보다야 저희 주인님이 백 배는 나으시지요.”

“아니, 아니……. 당최 네 말을 따라갈 수가 없구나. 너는 그리도 가진낭이 마음에 들었나 보지? 그게 아주 네 생각이냐?”

혹시 거기에 료의 뜻이 얼마쯤 바탕이 되나 싶어 물었는데 침아는 울상을 지었다.

“제 주인께선 엄한 데 정신이 팔려 계시느라 자기 앞가림도 못하십니다. 아직 어린 탓이겠지만.”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의아해하던 화산 노파는 언뜻 침아가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따라서 돌아보았다. 침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서 깨셨나 봅니다. 얼추 탕제 드실 시각이니 데워와야겠습니다. 어르신이 먼저 들어가셔서 침아가 놀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빗을 머리 한편에 꽂더니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부엌 쪽으로 내달리는 침아의 뒷모습에서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촐싹거려도 계집다운 태를 감출 수는 없었다.

다시 마루 우측을 바라보면서 화산 노파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희미하게 침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고. 나이를 먹으니 귀도 영 예전만 못하다. 그래도 인간보다야 청력은 나을 터인데, 그 아이 귀가 참 밝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르는 시종 없이 홀로 온 화산 노파가 댓돌을 밟고 마루에 올라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료가 모퉁이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과 마주쳤다. 찌푸렸던 얼굴이 화산 노파를 보자 바로 풀렸다.

“할머니, 절 보러 오셨습니까?”

“아파서 끙끙대는 꼴 구경 좀 하려고 왔지.”

“전혀 끙끙대지 않습니다. 상처도 벌써 많이 아물었다구요.”

분명 어젯밤에 와서 보고 갔을 때보다 더 좋아졌음을 화산 노파도 알 수 있었다. 본디 어릴 때부터 속병이 들면 비실거리긴 하였으나 겉으로 난 상처는 놀랍도록 회복이 빨랐다. 찬찬히 살피면서 화산 노파는 놀리듯이 말했다.

“그런 녀석이 바로 전까지 뚱한 표정인 걸 내 똑똑히 보았다만.”

대번에 료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그거야, 제 베개 때문이지요.”

“침아? 침아가 왜?”

“또 할 일을 팽개치고 도망갔습니다. 분명히 다섯 번 불러서 올 거리 안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음. 오면서 마주쳤지. 탕제를 준비하러 간다더라.”

“그건 그 녀석 일이 아닙니다. 우송이 어련히 알아서 준비해 놓을 거라고요. 틈만 나면 달아날 궁리나 하고. 내 아주 낫기만 해봐라.”

단호한 얼굴로 료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산 노파가 웃으며 만류했다.

“때리진 말거라. 그러다 또 몇 년 목소리도 못 들을라.”

“때리다니요, 그런 일 안 합니다. 그 몸에 어디 때릴 데가 있다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료가 화산 노파에겐 신기해 보였다.

“어느 틈에 네 그리 점잖아졌느냐? 또 며칠 새 부쩍 자란 느낌이로구나.”

“자라기는요, 별로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아, 할머니, 괜찮으시면 마루로 나갔으면 하는데요. 계속 잤더니 어쩐지 몸이 노자근합니다.”

“그럼 그러자꾸나.”

료가 권하는 대로 화산 노파는 대청마루의 절반쯤 볕이 드는 자리에 앉았다. 머리 위로는 그늘이 지고 몸 아래쪽으로 햇볕이 돌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몸에 따스한 기운이 차올랐다.

일단은 이번에 인간의 저자에 나가 며칠 장사를 했던 경험담을 듣고 있었지만 화산 노파는 청작도 말해 주지 않는 다른 일정이 심히 궁금했다. 장사는 방편일 뿐 료에게 더 큰 목적이 있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화산 노파를 깍듯이 큰어른으로서 존경하는 청작이건만 작은 주인과의 비밀은 굳건히 지켰다. 굳이 캐내려 들면 캐낼 수도 있을 터이나,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거라 생각해 참았다.

“참, 경황이 없어 청작도 잊고 있는 모양인데요, 할머니 드리려고 골동품상에게서 자그마한 걸 하나 샀습니다. 날개 모양의 금제 머리꽂이인데 가야란 나라의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잘 볼 줄 몰라서 청작에게 확인을 시켰는데 맞다고 하더군요. 그런 걸 좋아하시는 거 맞지요?”

“좋아하다마다. 그런데 무슨 날도 아닌데 그런 걸 왜 샀누?”

“이번엔 순전히 제 힘으로 돈이란 걸 벌어 봤거든요. 얼마나 벌릴지는 대중이 없었지만 어쨌든 제게 필요한 것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우송이 녀석 고생이 반이고 또 청작 아저씨가 수고한 게 반이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제가 했다는 자체에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퍽 재미있었습니다.”

“돈을 버는 게 재미있었어?”

“예. 일가를 꾸리는 가주가 되려면 식솔을 도모할 방법 몇 가지는 생각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들의 저자는 독특하더군요. 사고파는 물목이 그렇게나 다양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저 도주공이나 여불위(도주공과 여불위는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에 활약한 거상(巨商)들.) 흉내를 내어 만금을 굴리는 장사치 흉내를 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했지요.”

“네가 장사치가 되겠다 그 소리냐?”

어안이 벙벙하여 화산 노파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하지만 료는 진지했다.

“기왕이면 여러 나라를 오가는 큰 장사를 해야겠지요. 한 십 년쯤 계획하여 구경삼아, 놀이삼아 그러고 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침아는 제가 너무 단조롭게 산다고 우물 안 개구리란 소리까지 했습니다. 지아비 된 자가 처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사는 건 창피한 노릇이지요. 안 그래도 제 머리 꼭대기에 오르지 못해 안달인 아이인데. 제가 나이를 헛으로 먹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든 보여주어야겠어요.”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더니 휙 고개를 돌려 중문 쪽을 살폈다. 지금껏 몇 번이고 반복했던 그 행동이 침아를 기다리는 것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산 노파는 방금 전에 료가 한 말에서 더욱 그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그 아이의 지아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료가 화산 노파를 보더니 머쓱한 듯 시선을 떨구며 귀를 만졌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내 이미 네가 그 아이를 달리 보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료의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퍼졌다. 헛기침을 하는 료를 보며 화산 노파는 문득 어조를 바꾸었다.

“그렇지만 지아비에 처라는 말은 좀 과하구나.”

다시금 료가 화산 노파를 보았다. 그의 입매가 긴장하여 굳어진 것을 보며 화산 노파가 말했다.

“곁에서 모시는 몸종 아이를 건드리는 것쯤 누가 무어라 하겠느냐. 휼이도 그렇고 휘도 그런 식으로 이성에 눈을 떴을 게다. 그런 이들을 일일이 소실 대접을 하였으면 이 저택의 많은 방도 아마 모자랄 것이야.”

“할머니, 저는…….”

“게다가 그 아이는 인간이다. 너무 정을 쏟으면 그리 멀지 않은 때에 네 가슴에 큰 생채기가 생길 게다.”

료는 다시 마루로 시선을 떨구었다. 가부좌를 튼 다리의 무릎 위에 얹혀진 주먹이 꼭 쥐어져 풀릴 줄을 몰랐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인간이니 덧없을 만큼 빨리 죽겠지요.”

그렇게 운을 뗀 료가 고개를 들어 창백한 시선을 화산 노파에게 던졌다.

“그 덧없는 시간을 최대한 붙들어 함께 해볼 작정입니다. 즐거이 살 것입니다. 그 아이와 함께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가 늙음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아느냐? 료야, 너는 너무도 어리다. 침아는 그른 소릴 하지 않았어. 너는 아직 우물 안 개구리요, 조롱 안의 새일 따름이다. 오래 살아온 이 할미의 말을 들어라. 생의 주기가 다른 이들이 함께 하는 것은 피차에게 못할 짓이다.”

“상관없습니다, 그런 것은.”

“너는 그런 소릴 할 수 있다. 하지만 침아는 무슨 죄이냐? 계집으로서 자신은 늙어 가는데 변함없이 젊은 사내를 보고 사는 것이 끔찍한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네가 어찌 알겠어?”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미리부터 훗날의 고통을 생각하여 겁을 먹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아플지도 모르지요, 언젠가는. 하지만 그때까지 즐거운 일을 잔뜩 만들어 줄 것입니다.”

화산 노파를 응시하는 두 눈에 담긴 열렬함하며, 이미 한두 번 해본 생각이 아닌 듯 확고한 어조까지. 불과 몇 해 전까지 고만고만한 권태에 젖어 살아 있으면서도 반은 무덤에 발을 담그고 사는 것처럼 눈빛이 잠들어 있던 싸늘한 아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그리도 그 아이를…….”

아연하여 중얼거리는 화산 노파의 말에 문득 료가 미소 지었다.

“할머니가 침아를 두고 가시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그 아이가 비를 흠뻑 맞은 일이 있습니다. 밖에서 저를 기다리다 그랬지요. 그 일로 앓아누웠던 그 애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앞으론 채울 일만 있겠구나. 그랬더니 침아가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뭐라 하더냐?”

“할머니 말씀이 맞았다고, 제가 상냥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랬습니다. 자신은 운이 좋다고.”

가만히 료를 응시하는 화산 노파의 시선 속에서 료가 환하게 웃었다.

“그 말을 들었던 밤에 심장 속에서 무언가가 마구 뛰어다니는 것 같아 통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 이러지 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전 그저 기뻐서 들떴던 거였지 뭡니까.”

아아, 그때 제대로 된 기쁨을 느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던 거구나. 그때의 자그마했던 료를 떠올리며 화산 노파는 측은한 눈빛을 감추었다. 료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나가서 일을 보는 중에 또 누군가가 침아를 일컬어 그러더군요. ‘운 좋은 그 아가씨.’ 기뻤습니다. 이번엔 기쁜 걸 알아서 더 기뻤습니다. 저는, 침아에게만큼은 좋은 운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 허나…….”

“한 가지 더 들어주십시오, 할머니.”

료는 어디까지나 공손하게 부탁했다. 그 의젓한 태도에 화산 노파는 한숨을 쉬며 더 말해 보란 듯이 손짓을 했다.

“침아가 제 삶에 들어온 후에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빛깔이 얼마나 풍부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빛깔?”

“이 마루의 옹이, 제 손가락이 닿으면서 생기는 그림자의 빛깔, 지금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햇살이 닿아 어룽지는 수없이 많은 빛깔, 저기 저 기둥에도, 저 처마에도 그리고 그 너머의 하늘에도……세상엔 이렇게나 많은 빛깔이 있다는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보아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침아가 오기 전의 제 삶을 떠올리면 온통 흑백입니다. 오로지 먹만을 써서 그려낸 그림 같다고나 할까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료는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화조절에 돌아오는 뱃길에서 침아가 사라졌을 때, 제 세상이 또 먹그림으로 바뀌더이다. 저는 말입니다, 할머니, 그런 텅 빈 세계는 더는 싫습니다.”

“료…….”

“근심은 내려두세요, 할머니. 할머니께서 주신 보석이 제게는 너무도 소중합니다. 그것을 아끼며 제가 행복해하는 것을 할머니께서도 보고 싶으시지 않으십니까?”

화산 노파는 거의 망연하여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열심히 제 마음을 호소하는 료가 수십 년 전 누군가와 어찌 이리도 겹쳐 보이는가.

닮지 않은 줄 알았다. 하지만 닮았다.

‘섬아, 섬아……. 네가 이 아이 안에 살아 있는 것이냐?’

문득 바람이 불어왔는지 처마 끝에 달린 새 모양의 풍경이 차랑거리며 울렸다. 그 맑은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침아가 타닥타닥 달려오다가 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엇, 왜들 여기 나와 계십……으아앗!”

돌부리도 없건만 헛발질을 하여 발이 꼬인 침아가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소반에 받쳐 왔던 탕제가 담긴 대접이며 다과가 담긴 접시가 쏟아지고 난리가 났다.

“침아야!”

맨발로 달려 내려간 료가 부리나케 침아를 일으키면서 물었다.

“괜찮으냐? 데이진 않았어?”

“괜찮습니다만, 약이……아야야.”

무릎을 땅에 대고 일어서려던 침아가 앓는 소리를 하자 료가 대뜸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흰 속곳의 무릎 부분이 벌게서 걷어 보니 양쪽 무릎이 다 까져서 피가 철철 난다.

“이 바보 녀석 같으니, 나이가 몇인데 걷는 거 하나 제대로 못해서 피를 다 보고……. 뭐냐? 왜 또 우는 건데?”

“피가…….”

아픈 건 둘째 치고 피 보고 우는 것이 꼭 어린애다. 그보다 저고리 여기저기 갈색 얼룩이 생긴 게 탕제를 뒤집어쓰기도 한 모양이다. 수건을 꺼내 얼굴이며 머리를 닦아주면서 료가 물었다.

“정말로 데인 곳은 없어? 머리도 젖었는데, 안 뜨거웠느냐?”

도리도리 고개를 젓더니 침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 소반이며 접시, 대접을 챙겼다.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그건 우송이 할 일이니까 그냥 둬. 공연히 설레발을 치더니 그 꼴이 뭐냐. 이리 와. 우물가로 가서 상처부터 씻자.”

“제가 알아서 씻으러 갈래요. 어르신, 다과를 못 내와서 죄송해요.”

꾸벅 허리를 숙여 사죄를 하고선 료가 또 무어라 하기 전에 냉큼 중문 쪽으로 뛰었다. 그러다 휙 뒤를 돌아보았다.

“시간 좀 걸려요. 늦게 돌아온다고 뭐라지 마세요.”

타박타박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얼마쯤 들려왔다. 료는 평소면 당장에 따라갔을 것을 화산 노파가 있어 어름거리며 망설였다.

“데였는데 말로만 괜찮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별것도 아닌데 울기까지 하고.”

가봐도 좋다는 소리를 화산 노파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자코 말없이 있었더니 료가 못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중문 쪽을 힐금거리며 도로 마루로 향했다. 댓돌에서 발을 털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그리 깔끔한 걸 좋아하는 아이가 대충 턴 발로 마루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네 마음은 잘 알겠다.”

툭 하니 화산 노파가 말을 던지자 료가 떨떠름한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란 거, 너만 그리 유난한 거 아닌지 모르겠구나.”

“……침아는 아직 어려서.”

“열여섯이면 과히 어린 나이도 아니지. 인간의 기준으로는. 더구나 너보다 아까 저 아이를 먼저 보았는데 내게 그런 부탁을 하더구나.”

“부탁이요?”

“저 난씨 자매 중에서 언니 쪽이랑 널 맺어주면 안 되느냐 사정을 하더라.”

“예?”

료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들은 말을 임의로 옮기는 것은 내키지 않으나 료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화산 노파가 보기엔 료 혼자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정작 침아는 료의 그런 태도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닐지. 아까 침아의 묘했던 말이며 태도도 그리 생각하니 이해가 가는 것이다.

“첫째 아씨 같은 분이 네게 어울린다 하더라. 정말로 필요하다고 강조도 하였었지. 정확히는 상냥하고, 어여쁘고, 솔직해서라고 했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료는 한가득 찌푸린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다가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화산 노파는 반문했다.

“무엇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냐? 두 난씨 낭자는 어느 쪽이든 내 조카손자들의 배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만한 나이대의 건강한 암컷 난조가 지천에 널린 줄 아느냐?”

“할머니, 분명히 혼사는 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첫째 갑년을 넘긴 것이 몇 년 되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남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 참으로 딱하구나. 어련히 알아서 눈치를 채겠거니 했는데 그야말로 깜깜절벽이야. 너는 어찌 보면 침아보다도 더 어리다.”

부러 더 신랄하게 말했다. 짐짓 발끈하여 성을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료는 차분했다. 물끄러미 화산 노파를 쳐다보다가 빙긋 웃더니 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모른 척 해드릴 생각이었는데.”

료의 말에 화산 노파가 놀랄 차례였다. 료는 심드렁하게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야시에서 그 둘째인가 하는 낭자를 마주쳤을 때부터 뭔가 미심쩍다 싶었습니다. 뭐 정확히 어떤 심중으로 하신 일인지는 궁금치 않습니다. 할머니께서 되지도 않을 희망을 품으신 것이 한편으론 우습고 한편으론 가엾기도 하여 끝내 시치미를 뗄 작정이었습니다만 침아까지 거기 동조를 한다고 하니 이러다 더 우스운 꼴이 나기 전에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료가 마루에 두 손을 대며 고개를 숙였다.

“제게 그런 희망은 품지 마세요, 할머니. 저는 휘와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료, 너는 누가 뭐래도 우리 일족이다. 네겐 날개가 있고, 이제 마침내 날기까지 하지 않았느냐.”

“예, 날았습니다, 마침내.”

순순히 인정하는 말투에는 별다른 감회가 없었다. 남의 일을 말하듯이 냉랭함마저 느껴졌다. 그런 료가 고개를 들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 제 후사가 생긴다고 하면 과연 그 아인 날 수나 있을까요?”

화산 노파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료가 거듭 물었다.

“제게서 날개가 없는 자식이 비롯된다면 그때도 저를 일족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되었다, 그만두어라.”

화산 노파가 이마를 짚었다. 료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일어나 화산 노파의 곁으로 가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정한 손길로 화산 노파의 마른 어깨를 지그시 잡으며 료가 말했다.

“할머니, 왜 저 같은 걸 거두어 길렀냐 하는 원망은 더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엔 가슴을 뛰게 하는 일도 있고, 잠들었다 눈뜰 일이 기대되는 나날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고 싶어졌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제 편이 되어 주세요. 예?”

부드럽게 어깨를 잡아 흔들자 화산 노파가 곁눈으로 료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안 어울리게 무슨 어리광이냐?”

“누구한테 배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료의 웃음이, 꼭 그 누구처럼 천진하였다.

침아는 주방에 소반을 가져다 놓고서 치맛자락이 휙휙 날리도록 빠른 걸음으로 뒤로 돌아가 우물가에서 벅벅 얼굴을 씻었다. 그러는 중에도 귓전을 맴도는 료의 말에서 빠져나오느라 끙끙댔다.

하필 탕제를 들고 돌아왔을 때 료가 침아의 일을 화제로 올리는 바람에 바로 나가지 못하고 주춤하고 말았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그가 화산 노파에게 털어놓는 속마음을 상당 부분 들어버렸다. 그 내용이, 그 어조가 침아에게는 무거웠다. 버거웠다. 어째선지 눈물이 날 정도로.

풍경 소리가 났을 때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괜스레 까불며 들어가다 실수로 넘어지는 척해서 탕제를 엎질렀다. 그렇게 작은 소란을 피워 그 자리에서 달아났지만, 아직도 침아의 눈빛은 어두웠다. 문득 대야에 물을 가득 부어 얼굴을 담그곤 대야를 쥔 양손이 바들바들 떨릴 때까지 숨을 참았다.

“푸우!”

숨의 한계치에서 고개를 젖히곤 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얼굴의 물기를 훔쳤다. 간신히 어두운 눈빛이 가신 대신 날카로운 빛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순진해 빠져선……!”

더럭 짜증을 내면서 공연히 대야의 물을 튀겼다. 그리곤 일어나서 다시 빠른 걸음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언제라도 료가 침소로 돌아올까 싶어 곁방 문을 열어놓고 귀도 열어놓은 채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무릎 다친 것을 씻는 걸 잊었다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머리를 대충 땋고 나서 또 바람이 일게 총총히 곁방을 나섰다.

어딘가로 급히 향하는 중에 멀리서 걸어오는 우송을 발견했다. 다행히 우송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에 신경이 팔려 있어서 침아를 보지는 못했다. 우송의 눈에 띄지 않도록 담장에 바싹 붙어 허리를 굽혀 걸었다.

남쪽, 화산 노파가 머무는 객청이 보이는 곳에서는 드러내놓고 뛰어갔다. 그리하여 그녀가 다다른 곳은 남서쪽, 난씨 자매와 그 가솔들이 머무는 거처였다. 오늘 큰 목욕일을 맞아 여자들은 대부분 목욕간에 들어 있을 터라고 짐작했던 것이 대충 들어맞았다.

마당은 한산했고, 풍악 소리도 그쳐 고요했다. 작은 정자 주위의 햇볕 좋은 곳에 사내 여럿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으나 침아는 일단 그쪽은 피했다. 혼자 있는 자가 아주 없나 싶어 다소 마음이 조급해졌는데 다행히 측간이라도 가는지 걸음새가 다소 우스꽝스러운 사내 하나를 발견했다.

“저기, 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응? 아, 사람의 아이인가.”

돌아본 사내는 침아를 보고는 곧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미안하게도 전혀 사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침아는 방긋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곤 아까 옷을 갈아입으며 부랴부랴 준비한 작은 보따리 하나를 슬쩍 내보이며 말했다.

“가선 아씨께 드릴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가선 아씨는 오늘 큰 목욕일이라지요?”

“응. 끝나려면 한참 멀었지.”

“그럼 늘 같이 다니시는 시종분이라도 뵙고 드려야 하는데……. 그 함자가 뭐라더라…….”

“아, 정이 녀석 말인가?”

“아, 예. 바로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부러 어수룩한 티를 내며 어름거렸더니 사내가 딱하다는 듯이 알려주었다.

“그분도 목욕간에 가 계십니까?”

“에이, 아무리 그 녀석이래도 어찌 거기까지 들어갔겠어? 정이라면 나간 지 한참 됐을 걸?”

“나가셨어요? 저택에 안 계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물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또 저 뒤의 못에 가 어슬렁거리고 있겠지. 음. 그럼…….”

사내는 신호가 왔던지 배를 움켜쥐며 침아의 감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히 가던 길을 재촉했다. 멀어지는 사내를 보다 돌아서는 침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녀의 목적지는 세우지로 정해졌다. 저택을 나서며 보는 이가 없음을 면밀히 확인한 후에야 보따리를 끌러 저고리의 소매 속에 무언가를 감추었다. 그리고 머리에 꽂고 있던 자석영 머리꽂이를 쑥 빼더니 파란 보자기 천으로 둘둘 쌌다.

다시 경쾌하게 걸음을 옮겨 세우지에 다다라가던 침아는 언뜻 본 하늘에서 너울너울 춤추고 있는 흰 두루미를 보았다. 정이 틀림없다. 잠시 침아의 걸음이 늦춰졌다.

“저 새는 춤 출 때가 퍽 우아하단 말이지.”

여느 때 같았으면 좀 더 구경을 했을 것이나 오늘은 그럴 짬이 없었다. 침아는 부러 발소리를 더 또렷이 내면서 걸음을 옮겼다. 못 위를 날며 춤을 추던 두루미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이내 하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세우지를 향해 가던 그녀의 반대편에서 곧 정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기름한 얼굴에 표정이랄 것이 없어도 눈빛이 수심에 싸인 듯 보이는 자. 방금 전까지 자유롭게 춤을 추던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침아는 간격이 가까워졌을 때 불쑥 물었다.

“저 때문에 좋은 시간을 방해받으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말을 걸어올 줄 몰랐던지 대답하는 정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언뜻 침아를 쳐다보았지만 눈이 마주치자 스윽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했다. 그대로 옆으로 지나쳐가려는 것을 침아가 발랄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가선 아씨를 모시는 정 님이시지요?”

“아……. 예.”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정은 침아가 화조절날 밤의 일을 기억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리 생긴 분이셨구나. 제가 이제야 눈이 환하게 보이게 되어서 새로 만나게 된 분 같네요.”

“눈이 나으셨습니까?”

“예, 불이 나서 크게 놀랐더니 대신 눈이 번쩍 뜨였지요.”

“다치신 곳도 없는 듯하고 눈도 나으셨다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어조에 힘은 없었으나 건성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다만 시선은 마주하지 않는다. 침아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일전에 가선 아씨 편에 보내주신 음식은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요. 경황이 없어서 답례를 한다는 것이 아직이네요.”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정은 반대편으로 가면서 말을 하는 침아 때문에 발이 묶였다.

“답례를 바란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상황에 무슨 그런 일을 걱정하시는지.”

“저희 주인님께선 놀랍도록 빨리 낫고 계신답니다. 이틀 후면 과연 다친 일이 있었냐 싶을 거예요. 근심하실 일은 없다고 가선 아씨께도 말씀드려 주세요.”

계속 세우지로 걸어가면서 침아가 말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정이 침아의 뒤를 따르며 온 길을 되돌아갔다.

“안 그래도 내일쯤엔 저희 아씨도 가진 아씨와 함께 료 공자님을 뵈러 가실 것 같습니다. 바로 찾아뵙는 것은 예가 아닌 듯하여.”

“있지요, 두루미는 정말로 천 년을 살면 깃털이 푸르게 되나요?”

아주 뜬금없는 화제 변화에 정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침아가 점점 더 빨라지는 걸음을 옮기면서 재잘댔다.

“인간들 사이에선 그런 말이 있거든요. 천 년을 산 학은 청학(靑鶴)이 되고, 또 거기서 천 년을 살면 현학(玄鶴)이 된다고. 과연 어떻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 주위에 천 년까지 산 일족은 없습니다.”

“없나요? 아예?”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를 일이지요. 제가 아는 일족이라고 해봐야 열을 넘기지 않고 그들과도 자주 만나는 형편은 아닙니다. 세상은 아주 넓다 하니 어딘가에 청학도 있고 현학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 넓은 세상을 두루 돌아보지 않은 뒤에야 어찌 없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찾아보고 싶으십니까? 여건이 허락하면?”

“글쎄요. 당분간은 힘들겠지요.”

정의 담담한 말에 침아가 쯧쯧 혀를 찼다.

“주인에게 얽매어 힘들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하여 날개를 가진 자들이면서 누구를 모시고 말고 하는지. 제게 날개가 있다 하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하고 살지 않을 텐데요. 싫다 싶어지면 그대로 훌쩍 날아가고 말 겁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세요?”

살며시 뒤를 돌아본 침아가 생긋 웃었다.

“기분 나쁘시라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고깝게 들렸다면 죄송해요.”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가만히 정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세우지 가장자리의 길을 걷고 있었다. 침아는 자귀나무를 보고는 길에서 벗어나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햇살이 좋은 날이라 잎이 펼쳐져 있는 자귀나무의 이파리 하나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이번 불 때문에 저희 뜰에 있는 자귀나무가 다 죽게 생겼답니다. 작년에 꽃이 적게 피어서 올해에는 꽤 많이 필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말이지요. 이제 꽃은커녕 제발 살아만 달라고 부탁해야 할 처지가 되었네요.”

정은 나무 바깥쪽에 서서 자귀나무를 찬찬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세우지 쪽으로 돌렸다. 침아가 계속 들고 있던 작은 뭉치를 화제로 푼 것은 그때이다.

“참, 이것을 가선 아씨께 드릴까 하여 일부러 정 님을 찾아온 것이랍니다.”

정이 다시 그녀를 보았다. 침아는 손에 쥔 뭉치를 정에게 보이기만 할 뿐 구태여 가져다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정이 별수 없이 나무 그늘로 들어오며 그녀에게 물었다.

“무엇입니까?”

침아가 뭉치를 풀었다. 파란 보자기가 풀리자 그 안쪽에서 반짝거리는 것은 자석영 머리꽂이였다. 정은 잠시 후 미간을 찡그렸다.

“이것은 침아 님의 수식(首飾)이 아닙니까? 료 공자님께서 침아 님께 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예, 저번에 주신 호박 노리개를 그냥 받아만 두자니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딱 두 번 쓴 것이에요. 이번 불길 속에서도 이것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답니다. 제게 가선 아씨께 드릴만한 것은 이것뿐이라.”

침아가 두 손에 올린 머리장식을 내밀었으나 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넣어두고 침아 님께서 쓰십시오. 이런 걸 들고 가보았자 제 주인은 난감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쪽 주인께서도 좋은 낯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저희 주인님은 제가 알아 할 것이니 우선 아씨께 드리기나 해주셔요.”

한사코 내미는 것을 정이 마다하다가 머리꽂이가 그만 땅에 떨어져 풀숲으로 굴렀다. 침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진 것을 보고 정은 난처함에 눈을 깜박거렸다.

정은 몸을 굽혀 풀을 헤치며 머리꽂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막 그것을 발견했을 때 갑자기 머리 뒤쪽에서 따끔, 하고 무언가가 쏘는 느낌이 들었다. 목을 부여잡으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몸은 스르륵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침아는 쓰러진 정의 눈꺼풀을 한 번 손으로 열어보고는 아주 의식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씩 웃었다. 그러고선 왼손에 쥔 뼈바늘을 정의 옷자락으로 썩썩 닦은 후에 반짇고리에 넣어 가슴춤에 숨겼다. 다음으로 오른쪽 소매를 뒤적였다. 거기에서 나온 것은 삼으로 꼰 밧줄이다. 빠른 손놀림으로 올가미를 만들고는 풀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 밧줄을 뱅글뱅글 돌리며 침아가 중얼거렸다.

“자, 연습이다, 연습.”

얼굴에 물벼락을 맞으면서 정은 정신을 되찾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거리더니 한참 만에 초점이 맞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인 세상이 어째 이상했다.

“어이, 우리 이야기를 좀 해보자고.”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정이 멍해 있었더니 말을 한 자가 웅크려 앉으면서 그의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깨어났잖아. 대답을 해야지. 응?”

그 얼굴을 보고 뒤늦게 정은 사태를 깨달았다. 자신의 세상이 뒤집혀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도 앞에 있는 이 인간의 암컷 때문일 것이다.

침아는 자기 머리에 꽂은 자석영 머리꽂이를 만지작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준대도 네가 안 받을 줄 알았어. 옥신각신하다가 떨어뜨리면 미안해서라도 주워주겠지 했지. 냉큼 받아버렸으면 그때는 좀 난감했을 텐데. 그치?”

정은 어찌어찌 고개를 들어 자신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확인했다.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삼나무 가지에 내걸린 밧줄 끝의 올가미가 그의 두 발목을 단단히 죈 채로. 정은 다소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침아에게 물었다.

“……혼자?”

목소리가 가득 잠긴 정의 물음에 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은 혼자 해야지. 너, 가벼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사내라 무게가 꽤 나가더구나. 내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무겁지 않았을까 싶어.”

“왜 이런 일을.”

“왜?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침아는 턱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뒤집어져서 보고 있기 때문일까, 정은 침아가 이제까지와 다르게 보였다. 무엇보다……이렇게 차가운 눈을 한 아이였나?

그 차가운 눈을 그대로 둔 채 침아가 입꼬리만 움직여 씩 웃었다.

“나한테 왜냐고 묻다니 참으로 뻔뻔스럽군. 하긴, 네 녀석도 그렇게 말했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고 살지는 않는다고. 그래서 생각했어. 그 주인에 그 하인. 사정 봐줄 필요 없다고.”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몹시도 힘들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머리에 피가 몰려 점차 머릿속이 어찔어찔해지는 것은 분명했다. 정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무슨 마음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라? 또 이유를 물어? 너 바보야?”

휙 일어선 침아가 다리를 들어 그의 등을 발로 밀었다. 몸이 대롱대롱 흔들리기 시작하자 현기증까지 일었다. 그러다 침아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진동을 멈추게 했다. 허리를 숙여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침아가 웃었다.

“찔리는 것이 있을 텐데? 죄 없는 자를 모살하려 한 주제에 네가 감히 어째서냐 이유를 물어?”

“무슨 말인지…….”

정은 속으론 흠칫하였으나 당장엔 부정하려 하였다. 침아가 대번에 쫙 뺨을 갈겼다. 돌아갔던 얼굴을 돌려 눈을 마주보며 침아가 말했다.

“발뺌하지 마. 네 대답하는 꼬락서니에 따라서 네 주인까지 황천에 보내고 싶어질 수도 있어.”

“정말로 무슨 소릴 하는……크읏!”

또다시 손이 날아왔다. 연달아 세 번. 계집의 작은 손이라고 해도 매섭기로는 사정이 없었다. 몸의 아픔보다 이어서 들려오는 침아의 목소리에 정의 등줄기에 소름이 내달렸다.

“날 물귀신으로 만들고자 한 네 주인이나, 날 불귀신으로 만들고자 한 네놈이나 곱지 않긴 매한가지야. 그래도 네놈은 주인이 시켜서 그 짓을 했을 거라 여겨 불쌍하게는 여기고 있었는데, 뭐라 했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는 않는다?”

“……기억이, 기억이 돌아온 게요?”

정은 오로지 그 일이 두려워 목소리가 떨렸다.

“기억? 아아, 그때 배에서 있었던 일?”

침아가 김빠지는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잊었던 적도 없는데.”

붉게 피가 몰려가는 정의 얼굴이 더욱 제 빛깔을 잃었다. 그는 뻑뻑한 눈으로 침아를 보려고 애쓰다가 물었다.

“그럼 어째서 기억하지 못하는 척을…….”

“귀찮아서.”

정은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침아는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실은 저 여자가 절 죽이려고 배에서 내던졌습니다, 했다고 쳐. 너네 아씨가 예, 제가 그랬어요 하고 인정이나 했을까? 나 기억 잃은 줄 알고 있는 너네 아씨 태도 가관이더라. 나한테 그깟 노리개 하나 던져 주면서 위로하는 꼴에 어디 가서 크게 웃지도 못하고 참느라 꽤 욕봤어. 네 가증스럽도록 선량한 아씨는 그렇다 치자. 내 주인님은? 내 생각에 내 말을 무조건 믿어줄 만큼 순진한 분은 그분뿐이거든. 너네 아씨가 날 죽이려고 했다고 하면, 아, 그랬구나 하고 믿으실 거란 소리야. 그러고 그냥 있을 분이 아니지. 내 대신 앙갚음을 하겠다고 나섰겠지. 내 주인님, 아주 착한데 제 편 아닌 사람들한텐 좀 냉혹할 수도 있거든. 우송 아저씨도 주인님 일이 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고. 어때? 그러면 일이 영 복잡해지겠지? 자칫하다 난리가 나는 거지.”

침아는 상상만으로도 머리 아프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한숨과 함께 정을 내려다보았다.

“나 하나 입 다물면 조용할 일이고 그렇다고 어쩌다 물에 빠졌는지 꾸며내는 것도 번거로워서 아예 잊은 척하였지. 내 이제 네 주인의 성정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나름대로 조심하면 무슨 일이야 있겠냐 했고. 그런데 설마하니 내 주인이 사는 저택에 들어서까지 나를 죽이려 할 줄이야.”

“그 일은…….”

“그렇지. 그날 밤에 보내준 별식은 잘 먹었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인간들 말이 있는데, 그거 알고 그런 거야?”

정은 입을 다물었다. 시치미를 떼기엔 너무 멀리 왔다. 하물며 굳이 부정하고픈 의욕도 없었다. 거꾸로 매달린 지금 상황이 어쩐지 우스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고작 인간의 아이에게. 게다가 이 아이는 이미 모든 것을 훤히 꿰고 있지 않은가.

얼마쯤 정은 실제로 웃었던 모양이다. 침아가 머리카락을 놓더니 다시 웅크려 앉고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네 주인 말이다, 혹시 짐승 죽이는데 무슨 희열 같은 거 느끼는 취향이니? 난씨 일족들 핏줄이 그래? 나는 사람들이 하도 상서로운 새, 상서로운 새 해서 난새들은 몹시 고상한 새인 줄 알았는데.”

“그런 분이 아닙니다. 다만 성정이 몹시 심약하신데, 어쩌다 한 가지 생각을 하면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참척하는 것이 유난하신 터라…….”

“그래서 왜 꼭 날 죽여야 하겠다는 건데?”

“……연적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시는 거지요.”

“아이고, 두 번만 심약했다간 백주에 날 난도질도 하겠군.”

기가 막혀 혀를 차면서 침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시간을 꽤 지체하였다. 더 끌다가는 료가 침아를 찾아오라고 우송만 못살게 들볶을 것이다. 침아는 머리꽂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정의 앞을 바장거렸다.

“한 번은 없던 일로 봐주었어. 두 번째 일도, 봐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게 해코지한 자들에게 일일이 앙갚음을 하는 주의는 아니거든. 그냥 안 보고 말면 그뿐이야. 천착한 자들과 얽히는 건, 내 이미 말했듯이 귀찮은 건 둘째 치고 더러워서 말이지. 세상에 어여쁘고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에 내가 정신을 쏟아야겠어. 하지만 내가 더러워서 무시하고 있을 일만은 아니더구나. 까딱하다간 그것이 내 주인과 혼약을 하게 생겼잖아.”

우뚝 멈춰 서며 침아가 정을 쏘아보았다.

“그 천착한 것이 감히 내 주인에게 가당키나 해?”

분위기가 또 일변했다. 지금껏 어딘가 느긋했던 공기가 가시고 침아는 몹시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내 주인은 네놈의 주인 따위보다 백 배, 천 배는 나은 반려를 맞아야 해. 하물며 너희 주종이 놓은 덫에 내 주인이 공연한 해를 입었어. 나는 내가 입은 해는 잊을 수 있어도 내 주인이 그리 다쳐 흘린 피는 생각할 때마다 분해서 신경질이 나. 그의 상처가 가벼운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 지금과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면 너희 주종도 사이좋게 황천길을 밟고 있었을 테니까.”

쏘아보는 눈길이 등이 쭈뼛하도록 서늘했다. 정은 묵중한 머리로 생각을 해보려고 애썼다. 대체 이 인간의 아이는 무얼까? 이제 갓 스물도 못 채운 인간의 계집이 어떻게 이런 분위기, 저런 눈빛을 가지고 있을까? 세상이 뒤집혀 있어서 심하게 과장된 풍경을 보는 것인지……. 정은 정신을 차려 보려고 머리를 내저었다.

그 행동에 침아가 빙긋이 웃었다.

“왜, 내가 그리 못할 거란 말이 하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네 주인에게 말할 때의 목소리를 알아.”

그 묘한 말에 정의 입이 다물어졌다. 침아는 자석영 머리꽂이를 만지작거리며 불현듯 온화한 웃음을 눈에 담았다.

“눈이 안 보이다 보니 더 잘 듣게 되는 게 사실이더군. 아, 눈이 거의 안 보였던 건 정말이거든. 겪어보니까 목소리에도 빛깔이랄 게 있었어. 나는 아직 뚜렷한 몇몇 빛깔만 볼 뿐이긴 한데, 네 목소리에선 그 뚜렷한 색 중 하나를 보았지.”

스윽 정을 바라보는 눈길에 웃음의 여운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인을 사모한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걸 말리지 못해서야 쓰나.”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정의 얼굴이었으나 그 당황한 기색은 손에 잡힐 듯 뚜렷했다. 차마 아니란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들썩였다.

“뭐든지 해주고 싶어 하는 심정은 갸륵하게 생각해. 그렇기에 순서를 바꾸었어. 실은 네 주인을 이렇게 거꾸로 매달 생각을 했거든. 올가미를 다리가 아닌 목에 씌우는 상상도 했고. 나, 닭 목 비틀어 죽이는 데에 나름 일가견이 있어. 실은 목을 비트는 것보다 바늘을 쓰는 재주가 더 좋지만.”

이런 순간에도 정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어떻게든 가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나를 죽여서 분이 풀리겠다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대신 가선 아씨만큼은 그냥 두십시오. 흉계는 오로지 제가 꾸몄습니다. 어디 멀리 데려가서 산짐승에게 당하게 하려는 계획도 꾸몄었는데 마침 료 공자님이 며칠 출타한 틈을 타 저택 내에서 일을 저지른 겁니다. 당신을 깊이 재워둘 생각에 음식을 보낸 것도 내가 준비한 일이고 물론 불을 놓는 일 역시 내가…….”

“음. 갸륵해, 갸륵해. 그렇지만 너 하나 죽여서 무슨 분이 풀리겠어. 내 주인님께 시집올 게 너는 아니잖아?”

“그 점도……크게 염려치 않아도 될 겁니다.”

“무슨 소리지?”

“가선 아씨의 마음이 다른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 말에 침아의 얼굴에 천진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정이 메마른 입을 억지로 축이며 말을 이었다.

“료 공자님이 안 계신 며칠간, 돌아오신 휘 공자님과 어울리시면서 급격히 마음이…….”

“어머나. 그랬구나. 어쩐지 이상타 했는데. 내 귀를 좀 더 믿을 걸.”

침아는 입술을 가리고 쿡쿡 웃다가 문득 얼굴을 찌푸리며 정을 쏘아보았다.

“지금 네 마음을 바꾸자고 아무렇게나 해보는 소리 아니야? 네 주인의 마음이 바뀌었다면서 내게는 대체 왜 또 그런 짓을 해?”

“마찬가지 이유였습니다.”

“뭐가 마찬가지란 거야? 내 주인이 아니라 큰도련님 일이라며?”

“지난 며칠간 가선 아씨의 눈은 휘 공자님을 쫓았지요. 그리고 휘 공자님의 눈길은……열에 여덟은 당신, 침아 님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입니다.”

침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표정해지는 얼굴 속에서 또르륵 눈을 굴리며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스윽 치켜 올라가는 눈썹과 함께 침아가 중얼거렸다.

“……그랬나?”

<기담: 야행유녀(夜行遊女),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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