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어르고 달래기 (16/33)

15. 어르고 달래기

“이따금 메마른 겨울 산에서 일없이 불이 이는 경우는 몇 번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봄인데 어찌하여 그런 불이 일어났을꼬. 정말 모를 일이야.”

새삼 화산 노파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렇게 둘이 함께 조식을 하였다. 새벽녘에 때아닌 화재로 소란했던 터라 해가 중천에 다가가는 때에야 조식을 마쳤다. 이 자리엔 가재인 청작도 함께 하여 차 시중을 거들며 화산 노파의 질문에 답했다.

새벽에 료가 그렇게 떠나고 부랴부랴 우송과 함께 귀로에 오른 청작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에는 다행히 불길은 잡힌 후였다. 한참 뒤늦은 감이 있으나, 료가 제 거처로 들치는 소리가 유난했던 터라 다른 곳에서도 무언가 변고가 있다 여겨 바깥을 내다보았다가 화재를 알게 된 것이다. 료가 침아를 구해낸 후 세우지에서 정신을 놓은 사이 저택의 화재는 휘가 선두에 서서 낭속들을 지휘해 크게 번지는 일 없이 처리했다. 아는 게 늦었을 뿐 불을 끄는 자체는 싱겁도록 빨랐다.

불이 문제가 아니라 다들 어찌 이런 불이 난단 말인가 하여 뒤숭숭한 밤이었다. 정작 료의 처소에서 홀로 잠들어 있었을 침아는 온데간데없고 말이다. 그러다 침아가 피가 낭자한 료를 반은 업고 반은 끌며 저택에 돌아왔을 때 또 한 번 소동이 났다. 무슨 일인지 물으려도 침아는 다른 이들 손에 료를 넘겨주자마자 실신해 깨어날 줄 몰랐다. 세우지에서 저택까지 료만 한 장정을 저 혼자 힘으로 끌고 오느라 까마득히 지쳤던 것이 당연도 하다.

제반 사정은 청작이 저택에 오면서 반나마 풀렸다. 청작은 휘와 화산 노파가 있는 자리에서만 천리경에 얽힌 일을 말했다. 무엇보다 료가 날아서 저택까지 돌아왔을 것이란 점에 화산 노파는 대단히 고무되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 물어보면서 청작에게 료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음을 맹세까지 하게 시켰다.

아침나절에 겨우 깨어난 침아도 그 말에 힘을 보탰다. 료가 날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자신을 구해내 세우지까지 데려간 것은 틀림없다고 말이다. 다만 어찌하여 불이 났는지는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엉뚱한 불이긴 하나 그 때문에 료가 또 한 번 성장하였다면 기연(奇緣)이라 해야겠지. 불도 불이거니와 침아 고 아이가 은근히 기특하단 말이야. 고것을 구하려고 료가 날기까지 하였단 말이지.”

이미 화재의 문제는 화산 노파의 뇌리에서 뒤로 밀려 있었다. 당장엔 료가 다쳐서 운신을 제대로 못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친 건 어차피 시일이 지나면 나을 만한 경상에 불과했다. 절반은 제 손으로 키운 것이나 진배없는 료가 날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가재인 청작도 마찬가지라 지금 이 저택에서 일없이 웃고 다니는 이가 있다면 바로 이 둘이다.

그 기쁨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 이도 둘이 있을 터인데 그중 하나가 휘였다. 그는 어찌하여 거기에서 불이 났을지 그 있을 법한 경우를 궁리하는데 골똘했다.

“아마도 그 기특한 아이가 무언가 실수를 했겠지요. 할머님 말씀대로 이 봄에 무슨 일로 일없이 불이 나겠습니까? 그리고 서쪽 채는 보통 때도 볕이 잘 들지 않아 공기가 습한 것을요.”

“그럼 너는 설마 그 아이가 부러 불이라도 놓았다 생각하는 것이냐? 저밖에 없는 곳에 불을 질러 무엇 하려고?”

“그 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할머님은 매사에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으십니다. 너무 쉽게 믿으세요. 그러다가 난처한 경우도 꽤 겪으셨으면서.”

말속에 뼈가 있다. 휘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화산 노파도 알고 있기에 쉬 좋은 얼굴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살아온 관록의 힘으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 나는 그렇구나. 이왕이면 다 믿어주는 편이 좋아. 그러다 나중에 속았다는 게 밝혀지고, 배신을 당한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믿지 않고 의심암귀를 키우는 것보다는 속이 덜 문드러지더라 이 말이다.”

“안 그래도 일족에 여자가 적은데 할머님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 몇 백 년 못 가 일족의 여자가 씨가 마르겠습니다.”

말속의 뼈가 더욱 단단해졌다. 화산 노파가 다소 민망하여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청작이 다가와 새로 차를 부어주었다. 분위기를 돌릴 겸 화산 노파가 청작에게 물었다.

“안채는 좀 따뜻해졌는지 모르겠구먼. 아까 들여다보니 영 썰렁하여 말이야.”

“비워둔 시일이 길어 얼마 동안은 그럴 것입니다. 다른 방에도 쉬지 않고 불을 넣게 하고 있으니 냉기도 차차 가시겠지요.”

“휼이 그 아이는 이제 제 본집이 어디인지 모르는 게 아닌가. 혹시 이미 뭇 별장 중에 하나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쓴웃음을 짓고 있는 청작이 화산 노파의 말상대를 하겠거니 하고 휘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화산 노파는 그가 돌아가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회랑으로 걸어 나가면서 뜰 위로 보이는 하늘을 쳐다보던 휘는 얼마간 더 걷다가 문득 아무렇지 않게 새가 되어 날아올랐다. 날갯짓하며 오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에게서 떨어진 깃 두 개가 하늘거리며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 깃털.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깃털도 없는 것이 무슨 새란 말인가.”

힘차게 날갯짓하며 촤악 펼친 날개가 쑤욱 그를 서쪽으로 밀어냈다. 날갯짓 두어 번에 이미 료의 거처가 보이는 상공에 이르렀다.

료의 거처는 안뜰부터 시작해 침소에 이르기까지 불에 타고 심하게 그을려 공중에서 보면 저택의 서쪽에 검은 곰팡이가 핀 것처럼 보였다. 저택에 거주하는 자의 수는 결코 적지 않은데 저리 되도록 몰랐다. 특히 지금은 객으로 머무는 이들이 남서쪽 거처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상한 일이지.”

간밤에 바람이 거의 없어서 연기가 비교적 수직으로 하늘에 올랐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방화를 짐작하게 할 만한 특이한 냄새는 없다. 기름이나 유황을 썼다면 휘나 화산 노파가 못 느꼈을 리 만무하다. 엉뚱한 때, 엉뚱한 곳에 일어난 불. 아니할 말로 누가 저주를 건 것도 아니고.

“저주? 설마.”

누가 있어 그런 저주를 걸겠는가. 료에게 적이 있을 리 없고. 애초에 만나고 다니는 자가 있어야 적이 있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료가 답답하다 못해 어리석을 만큼 이곳에 틀어박혀 사는 조롱 안의 새임을 휘도 잘 알고 있다.

료가 아니면 우송? 침아? 생각해 볼 거리도 없다. 그렇게 웃다가 휘의 머리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음침한 녀석이…….”

청작의 말을 들었을 때 먼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같은 혜양군 내로 나가면서 료가 굳이 천리경까지 가지고 갔다는 자체부터가 휘는 우스웠다. 매일같이 붙어 지내면서 무어 그리 애절한 마음이 있어 집에 남은 침아를 거울로라도 보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기실 그냥 같이 데리고 갔으면 되는 일 아닌가? 료가 일부러 침아를 떼어놓고 가야 할 사정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는 휘로서는 오해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실은 그것이 그럴듯한 핑계라면? 작심하고 이번 일을 꾸민 것이 료였다고 하면? 거기서 휘의 생각이 막혔다. 그렇게까지 해서 료가 얻을 것이 없지 않은가?

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공중을 한 바퀴 휘돌아 불탄 자리 한쪽에 먼지가 일지 않게 조심히 착륙했다.

원래 있던 창은 형체도 없고, 기와마저 내려앉도록 무너진 료의 침소 서쪽 벽을 보면서 휘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슬쩍슬쩍 발을 움직여 벽으로 다가갔다. 간신히 형체나마 유지하고 있는 벽을 또 물끄러미 보다가 발로 툭 차보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벽을 긁고 부스러기가 얼마쯤 떨어질 뿐이다. 이번엔 날갯죽지로 퉁 밀어 보았다. 제법 힘을 실어서. 하지만 또 부스러기가 흘러내리는데 그친다. 벽은 육안으로 봐도 두꺼울 뿐 아니라 실제로도 튼튼했다.

단단히 벼르는 기척으로 뒤로 몇 발짝 물러나서는 날개를 펼치며 기세를 높였다. 그리고 뛰어볼까 하는 찰나, 휘는 정신을 차렸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겐가, 자신은. 저 벽 따위를 바수어 무엇을 증명하겠다고?

“쳇!”

못마땅한 혀 차는 소리에 이어 인간으로 둔갑하였다. 어깨에 묻은 검댕을 털면서 휘는 무너진 벽을 쏘아보았다.

“기력 하나는 쓸 만한가 보지. 그 종에 그 주인, 끼리끼리 잘도 만났군.”

애꿎은 우송과 쌍으로 묶어 비아냥거렸다. 청작의 말도 썩 미덥지 않았다. 날아왔는지 뛰어왔는지 알게 무언가, 보지도 못했는데.

그렇다고 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볼일이 없기를 바랐다.

막 태어났을 때의 료의 모습을 본 이후로 휘는 료에 대한 기대치를 아예 갖고 있지 않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갓난 료를 보고 은연중에 어른들이 이대로 죽이는 걸로 결정하기를 바랐었으나 화산 노파는 아이가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우리의 일족임에 분명하다고 못을 박았다. 일족의 가장 큰어른이 그리 말하니 휘의 아비 휼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깊은 동굴 하나를 찾아 묶어놓고 양식이나 끊이지 않게 함이 어떠냐고 휘가 반항하듯 의견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료는 태어난 후 이십 년 가까이 서쪽 제 거처에서만 지냈다. 그러는 동안 청작과 늙은 두견새 할멈 하나가 료의 시중을 들었다. 연금되다시피 한 그를 찾는 다른 이는 화산 노파가 거의 유일했다.

이십 년이 지나서야 료가 둔갑술을 숨 쉬듯 자연스레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야 화산 노파가 료의 손을 잡고 집 안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휘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나 보고 온 이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여쁜 소녀 같다고 하는 말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하여 근 이십 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을 때 휘는 또 크게 실망했다. 어미를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제 아비를 닮았겠군. 밉살스러운 것.”

형이라 하는 이가 혐오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던진 말에 료는 새파랗게 질려 화산 노파의 등 뒤로 숨었었다. 화산 노파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으나 차마 휘를 야단치지는 못했다. 휘가 성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때 이래 흘러간 세월이 사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휘는 여전히 료를 처음 봤던 그날의 싫은 기분이 누그러들지 않았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료만큼은 한결같이 싫었다. 낳아준 어미를 얼마쯤이라도 닮았다면 어여삐 여겨보려 노력이라도 했을 테지만.

청작이 감격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로 료가 첫 비행을 하였다고 말했을 때에도 반가운 마음이라곤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런 꼴로 날다가 인간들 눈에라도 띄었으면 볼만했을 텐데, 하는 비뚤어진 생각으로 쓴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괴조가 나타났으니 나라에 변고가 있지 않겠느냐며, 또 인간들의 세계에선 흉흉한 소문이 돌았을 터인데.

심기가 불편한 것을 감추지 않고 찌뿌듯한 표정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그는 뜰에서 별안간 누군가의 기척을 보고 흠칫하였다.

“여기서 뭘 하는 게냐?”

난리라도 난 듯 엉망이 된 뜰에 웅크리고 있는 이는 침아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선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꾸뻑하며 인사를 했다.

“살릴 수 있을 만한 게 있는지 살펴보는 중입니다.”

“료는 어쩌고?”

“깊이 주무시는 걸 보고 잠깐 건너왔지요.”

그러면서 고개를 든 침아가 휘의 얼굴을 똑바로 보다가 생긋 웃었다. 간밤에 죽다 살아난 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상쾌한 미소다. 평범한 인간의 계집들과는 다른 줄 알고 있었으나 이만하면 그 회복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머리를 다쳐 눈이 안 보여도 나을 때 되면 낫겠지 하는 태도도 참 별나다 했지만…….

“별 진귀한 것도 없던데 뭐 굳이 불탄 자리에서 구해낼 것이 있다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찬가지로 주위를 돌아보면서 침아가 말했다.

“불탄 자리니까 더욱 구해 내야지요. 그 무서운 일을 겪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단순히 보기 싫다는 이유로 아예 내버리는 것은 아니 될 말입니다.”

“강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이지.”

“운이란 것도 흐름입니다. 또 이제까지 맡아 길러온 책임이 있는데 아직 살 수 있는 것을 내버린다면 제 주인께도 죄스런 일이지요.”

그리 말하는 침아의 표정이 유난히 부드러웠다. 제 주인에 대한 태도가 나긋한 것쯤은 몸종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제 간밤의 일도 있고 보니 뭔가 더럭 고깝게 느껴져 휘가 빈정거렸다.

“퍽 감격스러울 만도 하지. 몸종 하나를 구해 내겠다고 제 머리를 다 깨어가며 벽을 깨부수는 주인이 달리 또 있겠느냐?”

그 말투에 침아가 대답하는 소리가 사뭇 싸늘했다.

“예, 퍽이나 감격스럽습니다. 제 주인께서 그 형님 되시는 분과는 달라도 한참 달라서 다행히 제가 살아서 오늘 해 지는 것도 보겠지요.”

다른 계집이었으면 휘가 한 번 웃고 넘어갔을 약한 도발이다. 하지만 이 아이에겐 그게 통하지 않았다. 마음에 쏙 들 만큼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 신경이 쓰이니 참으로 별스런 노릇이다.

“불이 난 걸 알았으면 큰 소리를 내어 집안 가솔들을 깨웠어야지. 그런 식으로 벽을 깨부수며 요란을 떨 것은 또 무어냐? 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료가 객기를 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잘못하여 아예 지붕이 내려앉았으면 너 따위는 그대로 깔려 죽었을 게다.”

“죽지 않았잖습니까.”

오히려 침아가 그의 도발을 비웃고 있다. 가당치도 않은 어린것이 그를 태연히 무시하는 그 시큰둥한 태도에 자신이 번번이 휘말려가는 걸 휘도 인식은 하고 있다.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료는 그런 위험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해. 어리고 무모하다는 뜻이다.”

침아는 고개를 갸웃하게 기울여 휘를 보다가 말했다.

“어리고 무모하다는 뜻이 순수하다는 뜻과 일맥하는 것이라면 저는 그런 것이 좋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큰도련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그러다 지붕이 내려앉았다고 해도 아마 제 주인은 제 몸을 덮어서라도 절 구해 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저따위’를 그 정도로 아껴주시지요.”

웃으면서 건네는 말투는 몹시도 사근사근하나 가시가 돋아 있다. 미간을 찡그리며 침아를 보던 휘는 문득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침아의 오른쪽 눈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너 눈이…….”

“아, 이거요?”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휘와 눈을 마주쳐 오는데 그 시선이 정확했다.

“제대로 보이는 게로구나.”

“예, 실은 새벽에 그 소동 중에 알았습니다만.”

“흥. 네 주인의 눈물겨운 구조에 받은 감동이 모두 눈으로 몰려가 터졌나 보구나. 은혜롭기도 하지.”

“글쎄요, 저는 저 때문에 다친 주인님이 어떤지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발로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주인이 다치니 때마침 알아서 나아주는 눈이라, 그것 참 편리하기도 하구나? 야시 구경 다녀오던 배에서는 다들 멀쩡한데 혼자 강물에 빠져 실종되질 않나, 마침 료가 며칠 자릴 비운 사이에 전에 없던 화재가 일어나질 않나. 어째 네게는 참 기구한 일이 몰려든다 싶지 않으냐?”

“그러게나 말이지요. 올해 들어 갑자기 일이 자꾸 터지니 인간들 말로 액년(厄年)이 아닌가 싶어 걱정 중입니다.”

“그래 혹시 이번 사고로 놀라 유실되었다는 기억이 되돌아온 것은 아니냐?”

“안타깝게도 그것까지는 아니 되었습니다. 돌아오면 제 주인님 다음으로 큰도련님께도 어떻게든 알려드릴 테니 너무 조바심치지 마십시오. 여러모로 걱정해 주시는 건 대단히 감사합니다.”

생긋생긋 웃는 모습이 시큰둥한 태도보다 훨씬 더 기분이 나쁠 수 있다는 것을 휘는 깨달았다. 불쾌함을 제대로 감출 수 없는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너, 나를 싫어하는 게지?”

“예?”

말해 놓고 보니 지나치게 유치한 소리라 도로 주워 담고 싶었으나 휘는 내친김에 확 손을 뻗어 침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 주위에 너처럼 나를 기분 나쁘게 대하는 계집은 없다. 무어냐, 대체? 무얼 믿고 그리 오만하게 굴어? 네 주인이 걸핏하면 네 앞에서 내 흉이라도 늘어놓는 게냐?”

“……제가 큰도련님은 머리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지요?”

싸늘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침아의 말이 이어졌다.

“제 태도가 기분이 나빴다면 아마 관심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아무래도 좋은 이를 대하면서 건성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건성인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도 내 모를 것 같으냐?”

그 말에 침아가 아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건성이면 어떻고 싫어하는 거면 어떻습니까. 제가 큰도련님을 모시는 몸종도 아닌데. 큰도련님은 어리지 않고 무모하지 않으신지는 몰라도 퍽 자잘한 일에 구애받는 편이신가 봅니다. 그리 살면 삶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침아가 제 팔을 거두어가려 했지만 휘는 호락호락 놓아주지 않았다. 침아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하시자는 건지요? 제 주인이 잠든 사이 몰래 나온 터라 계속 이러고 섰을 짬은 없습니다.”

“네가 료만 섬기는 몸종이란 것은 잘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이리 방자한 것이 설명이 되진 않아. 내가 료와 어떤 관계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지요. 큰도련님께선 우리 작은도련님을 싫어하시지요. 다쳐서 누워 계신 동생분, 저택이 너무 넓어서 못 찾아오실 정도로요.”

정곡을 찔렸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나,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그 앞에서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라 휘는 당황했다.

“찾아갈 생각이었다. 다친 곳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였으나 망설인 게다. 그 녀석이야말로 날 보면 심사가 틀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다친 사람 놀리러 왔다는 오해나 살 것 아니냐.”

말을 해놓고 보니 제 귀에도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리고 거기엔 침아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찾아오는 시늉이라도 하심이 어떠십니까? 문밖에서 돌아가게 되신다고 해도 와주었다는 사실이 바뀌진 않을 것입니다.”

“문밖에서 돌아오게 될 걸 뭣 하러 가겠느냐.”

“뭐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 대신 아무쪼록 큰도련님도 제 태도를 내버려두십시오. 아는 척도 말아주셔요. 다쳐서 누워 계신 제 주인님, 괜한 일로 심기를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침아가 팔을 빼려 했다. 휘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기분에서 그녀와 잠시라도 더 말을 하려고 수작을 걸었다.

“료가 이리 나온다면 어떤 식으로 하여 벗어나겠느냐?”

무슨 엉뚱한 소릴까 하는 표정으로 침아가 그를 본다.

“듣자하니 강파르기 짝이 없는 네 주인을 너는 순한 양 다루듯 한다고 하더구나. 보여다오. 그걸 보여주면 군말 없이 보내주지. 문병이란 것도 가고 말이다.”

“별걸 다 궁금해 하십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숨을 한 번 쉬고 침아는 빙긋 웃으며 휘에게 성큼 다가섰다. 몸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침아가 휘의 가슴팍을 손으로 누르며 칭얼거렸다.

“침아가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제 팔 좀 놓아주셔요. 놓아주시면 오늘 하루는 측간도 안 가고 주인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겠습니다. 네? 네에?”

애교 섞인 말에 이어 얼굴을 들이미는 서슬에 휘가 그만 뒤로 물러나며 팔을 놓고 말았다. 침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좀 수준이 낮긴 해도 그만하면 낭창거리지 않았습니까? 큰도련님, 개만 주인을 알아보는 게 아니라 사람도 주인을 알아본다는 걸 이제 아셨지요?”

그러면서 침아가 빙글 돌아서더니 천 주머니에 골라 담은 살아남은 화초들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돌아보며 물었다.

“제가 드린 제비꽃 반지는 버리셨습니까?”

휘가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처소 서탁에 놓여 있을 것이다. 청소를 하러 온 시녀에게 치우지 말라 어제도 말한 바 있다.

“여기 하나 남아 있던 꽃은 가망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큰도련님께 둘 다 드릴 걸 그랬지요. 하나라도 드려서 차라리 다행인 건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 침아가 탄식하듯 혼잣말을 했다.

“노란 제비꽃을 또 어찌 구하나. 좋은 것이라 손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 쉬 손에 들어오지 않아 더 좋은 건지……. 도통 모르겠네.”

멀어져가며 침아가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려왔다. 저번 날 아침에 부르던 그 노래였다.

휘는 문득 궁금해졌다. 노래의 남자가 기다리는 그 여자, 과연 남자를 만나러 왔을까? 치마를 걷고 냇물을 건너서? 남자는 비가 와서 냇물이 분 것보다 올 듯 말 듯한 그 여자의 마음에 더 애가 타는 것이 아닐까?

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저 아이……. 내게 수작을 걸고 있음이야.”

청작이 당분간 못 쓰게 된 료의 서쪽 거처를 대신할 곳으로 고른 곳은 저택의 동쪽 채였다. 이른바 안채로 불리는 동쪽 채는 큰 주인 휼의 거처이나 정작 휼이 제 거처를 내버려두고 돌아오지 않는지는 십 년이 넘었다.

닷새마다 한 번씩 소제를 해온 거처는 그럭저럭 깨끗했고, 또 아침에 부랴부랴 낭속들을 시켜 소제도 하였으나 십 년 동안 산 자의 기운이 없었던 곳이라 썰렁한 느낌은 감출 길이 없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창문을 모조리 열어 모처럼 햇볕을 가득 통하게 해놓아도 온기가 도는 정도가 사뭇 느렸다.

그 느린 순환의 흐름이 가장 안쪽 침소까지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 이미 갈무리해서 넣어두었던 화로가 다시 세상 구경을 하였다. 이글이글 붉은 숯불이 피어오르는 화로를 사면의 구석마다 놓고 이부자리 근처에도 하나 놓았다. 방에 불을 지피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료는 허전한 느낌에 시달리다 눈을 떴다. 설깬 잠의 와중에도 무엇이 문제인지는 금세 알았다. 침아가 없다. 얼마쯤 기다려 보다가 이름을 불렀다. 돌아오는 기척이 암만해도 없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긴 마루를 지나 뜰로 나왔더니 싸리비를 쥔 우송이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꼬대마저 옹알옹알하고 앉았으니 침아가 오는지 가는지 알 턱이 없었다.

한바탕 야단이 났다.

고개를 까딱까딱거리며 즐거이 돌아오던 침아가 웬 소 죽어가는 소리에 움찔 놀라 달려와 봤더니 료는 노발대발에 우송은 어째선지 싸리비로 제 몸을 때리며 잘못했다고 빌고 있었다.

“뭣들 하십니까?”

홀연히 나타난 침아가 그리 물었더니 료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우송은 입술을 실룩실룩하다가 돌연 싸리비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요 쥐만 한 것아!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산다, 못 살아!”

“아니 제가 또 뭘 어쨌다고……. 어디 가세요? 우송 아저씨, 우송 아저씨?”

만사 싫다는 듯이 겅중겅중 뛰어가 버리는 거인을 침아가 불러보았지만 우송은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 커다란 눈이 물기로 자글자글해져서는.

침아가 마루에 서 있는 료를 보며 물었다.

“아저씬 어째 저러십니까? 주인님은 왜 또 나와 계세요?”

료는 잔뜩 찌푸린 미간에 힘을 주며 침아를 쏘아보다가 물었다.

“어딜 다녀오는 게냐?”

“아, 저희들 거처에 좀.”

“거긴 무엇 하러 가?”

“뜰에 있는 나무랑 화초들이 어찌 되었나 가보았습니다. 모조리 못 쓰게 되지는 않았어요. 나무 중에서도 몇 그루는 그을음만 심했지 뿌리 쪽은 괜찮으니 차차 살펴주면 잘 살 것 같고요. 그리고 이건 당장에 옮겨 심어야 살 것 같아서 가져왔지요. 살릴 수 있는데 제가 무심해서 죽는다면 가엾잖습니까.”

품에 안은 주머니를 보여주려는 침아의 행동에 료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여전히 미간이 풀리지 않은 료가 말했다.

“너는 눈이 좀 나았다 싶으니 또 제멋대로가 되는구나. 게서 죽을 뻔하고는 거길 이 아침부터 가고 싶더란 말이냐?”

“아침이 아닌데요. 벌써 해가 중천을 넘어…….”

“시끄럽다. 군소리 그만하고 네 할 일부터 제대로 해.”

그러면서 료가 휙 돌아섰다. 얼마쯤 걸어가다가 침아가 제꺽 따라오는 기색이 없자 더욱 성이 나서 돌아왔다. 침아는 품에 안은 주머니를 뜰 구석에 내려놓고 주섬주섬 흙 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뭣 하고 있는 게야!”

료가 소리를 지르자 침아가 별로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것 좀 옮겨 심고 들어가겠습니다. 오래 안 걸립니다.”

빤히 심기 불편한 얼굴을 봤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호미로 땅을 파기 시작하는 침아의 모습에 료는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당장 그만두고 들어오지 못……콜록, 콜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는 게 문득 가슴이 결려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이 시작되자 양쪽 어깨며 등까지 결려 료는 서 있기가 버거웠다. 어찌어찌 겨우 기둥을 잡고 섰는데 그제야 호미를 내던지고 온 침아가 신도 벗지 않고 올라와 료를 부축했다.

“아이참, 아프신 분이 왜 큰 소리는 지르고 야단이세요!”

“네가 소리를 지르게……만들지 않았……쿨럭!”

제대로 말도 못 이으면서도 쏘아보는 시선 하나는 뜨겁기 그지없다.

“예, 예, 침아가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구요, 주인님. 그리 쳐다보시면 침아가 녹겠어요. 아이 뜨거워라. 홍홍홍.”

“웃음이……나오느냐, 지금?”

“그럼 저라도 웃어야지 이 상황에서 제가 울면 뭐가 됩니까? 주인님은 화내시고 우송 아저씨는 토라지시고. 저라도 웃어야 쑥대밭이 안 되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할 말이 없다기보다는 기가 차서 료가 허, 하고 웃고 만다.

“자요, 주인님. 햇볕도 좋은데 잠시만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얼른 저것들 심고 손 씻고 와서 우리 주인님 모시고 방으로 돌아가지요.”

료를 앉혀놓고 도로 일어서려는 침아의 팔을 료가 못 가게 붙든다. 침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웃었다.

“그 잠시도 못 기다려서 보채시는 건 아니시지요?”

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료는 불퉁한 목소리로 가렸다.

“누가 누구한테 보채? 네 녀석은 말로만 잘못했다 하지 기어코 네 뜻대로 하고 말지 않느냐? 내 당장 그만두고 들어오라 했거늘.”

“잠시면 됩니다, 아주 잠시. 제가 얼른 저것들 뿌리만 땅에 묻어주고 돌아오겠습니다. 아침에 물 한 바가지면 살릴 수 있는 마른 못의 붕어를 눈앞에 두고 오늘 저녁엔 큰 비가 온다더라 해보았자 무슨 소용입니까? 제가 지금 주인님 따라 들어갔다가 저녁에 나와서 저것들이 말라죽었으면 펑펑 울어버릴 것입니다. 그게 보고 싶으십니까?”

그 말재간에 밀려 료는 침아의 팔을 뿌리치듯이 놓아주었다. 미간에 지은 주름이 아주 굳어지게 생겼다.

“말라죽을 붕어가 불쌍해 봐주는 거지 네가 우는 게 보기 싫어 그러는 것은 아니다.”

“아이구, 우리 착하신 주인님.”

침아가 상그레 눈웃음을 남기고 타박타박 마당으로 뛰어갔다. 놀림을 당한 것이 분명하나 그것이 싫지 않으니 부러 화를 내는 것도 열없다.

침아의 말대로 따스한 볕이 드는 마루에 앉아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료는 침아가 꼼지락거리며 새로운 거처에 온 첫날 제 영역을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담 아래의 텅 빈 화단에 조르륵 몇 포기의 화초를 심어놓고는 땅을 다독거리며 침아가 잘 크라고 일일이 말을 걸어주었다. 그 말 참 정성스럽게 길기도 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가슴이 뻐근하여 료는 미간을 찌푸렸다. 간밤엔 경황이 없어 아픈 줄도 몰랐으나 얼마쯤 자고 일어났더니 여기저기 욱신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아직 목욕조차 못하였으니 아마도 몰골이 형편없을 것이다. 청작이 몸을 닦아주고 상처를 싸매고 옷도 갈아입긴 하였으나 그래도 혹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어 료는 제 몸을 킁킁거렸다. 여기저기 붙인 고약 냄새가 하도 짙어 머리만 아파졌다. 침아가 손을 털며 일어서는 걸 보고 료가 말을 건넸다.

“나 좀 일으켜다오.”

“어? 잠시만요, 저 손 씻고 물만 좀 떠오면 됩니다.”

“나도 손이 씻고 싶어 그런다. 어허, 뭘 하고 섰어?”

언성을 좀 높였더니 침아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와 그가 섬돌에 내려서는 것을 거들었다. 료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하고 상체를 붙잡아 부축하다가 료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침아가 물었다.

“아프십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시겠습니까?”

“참을 만하다.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우송 아저씨가 오시면 좋을 텐데. 불러 볼까요? 우송……!”

침아가 크게 우송의 이름을 부르려 하자 대번에 료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어쩌라고? 꼴사납게 걔한테 업혀서 손 씻으러 가란 소리냐?”

손에 가로막힌 입술을 침아가 들썩거렸지만 료는 계속 그녀의 입을 누르고서 다짐을 시켰다.

“조용히 하는 거다. 알겠지?”

가만히 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료가 손을 놓아주기 무섭게 침아가 말했다.

“그렇지만 걸으실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시면 보는 제가 다 아픈데……읍.”

다시 입이 봉쇄되었다. 료는 좀 더 고압적이 되었다.

“백 보를 걷기 전까지 한마디도 하지 마. 한마디라도 하면, 확 잡아먹어 버릴 테다.”

침아가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손을 놓아도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잠자코 료를 부축하면서 걸었다. 료는 딱히 그럴 생각이 아니었건만 걸으면서 저도 모르게 속으로 걸음 수를 세고 있었다.

‘아흔여덟, 아흔아홉, 일백……. 응?’

백 보를 걸었다. 그러고도 뒤꼍에 있는 우물가까지 가는 동안 침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우물에서 네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자 침아가 료를 부축한 팔을 풀더니 료를 거기 두고 우물의 덮개를 옆으로 밀고 두레박을 내려 물을 퍼 올렸다. 근처에 있던 놋쇠 대야부터 씻었다. 제 손도 대충 씻은 후 대야에 깨끗한 물을 새로 담았다. 그것을 들고 와서 그의 허리 높이로 받쳐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씻으라는 소리다.

“뭘 굳이 이렇게까지 하느냐? 내가 허리조차 굽히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침아의 손에서 대야를 뺏어 우물가로 가서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으읏”하고 자그맣게 신음을 하며 어깨를 눌렀다. 그러고 웅크리고 있는 료의 곁으로 달려온 침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입술을 꼭 다물고. 료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선 침아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백 보는 진작 지났다. 아직까지 벙어리 시늉을 하면 어째?”

침아는 혀만 쏙 빼물더니 대야를 두고 료와 마주앉아 료의 두 손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속에서도 따스하게 열이 나는 그녀의 손에 잡힌 손이 그리 시리지 않다. 늘 이렇게 이 아이가 씻겨주면 좋겠구나, 하고 멍하니 료가 생각했다.

건듯 불어온 바람에 침아의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자 말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료에게 흘러왔다. 료가 문득 중얼거렸다.

“나는 네 냄새가 너무 좋구나.”

힐끗 료를 쳐다보더니 침아는 잠자코 그의 손만 씻겨주었다. 그러나 그 손길이 조금 느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 료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일차로 물을 버리고 일어난 침아가 새 물을 떠와서 대야에 부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손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손을 주는 척하다가 대야 속에서 침아의 양손을 거머쥐며 손목을 꽉 잡았다.

“또 못된 버릇이 도진 게냐? 벙어리 시늉을 할 참이야?”

꼭 다문 입술을 하고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료를 쳐다보는 침아의 표정이 천진하기 짝이 없다. 답답하여 쏘아보았지만 보는 사이에 기분이 달라졌다. 다시금 침아의 뒤쪽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그를 기분 좋게 하는 향기가 둘 사이의 공간을 채웠다. 아깝다. 그 향이 료에게 와서 머물지 못하고 이내 흩어져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

손에 쥐어진 침아의 가냘픈 손목을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맥박이 빠르게 뛴다. 평상시의 맥박의 속도를 알고 있는데, 지금은 훨씬 빠르다.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몸은 알고 있다고 말해 온다. 그의 심정을.

료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그 거리가 반 뼘도 안 되게 좁혀졌을 때 침아가 문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그 말씀, 안 드렸지요.”

“무슨 말?”

고개를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료는 그저 침아에게 입맞춤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말하지 않고 넘기면 뻔뻔하다고 타박하셨겠지요.”

“안 했을 거다. 당연한 일을 했는데 무슨.”

“무엇이 당연합니까?”

“내가 내 것을 구했지 않으냐. 네가 살아서 기쁠 이가 나 말고 누가 있다고.”

“제가 기쁘지요. 제 목숨인데.”

“네 목숨 같은 게 아니야. 넌,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뜻대로라는 걸 아직도 모르느냐?”

침아가 피식 웃으며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 본 날에 묻어버리라고 할 땐 언제고.”

“그때부터 네 목숨이 내 것이었다는 게지.”

“우송 아저씨가 얼어붙은 세우지 한복판에 던진 일도 있는데.”

“살려주었지 않으냐. 바로 이 몸이. 그랬더니 너는 내게 반말지거리를 퍼부었지.”

“치, 다 죽게 생겼는데 존댓말 찾고 있겠습니까?”

“그래놓고도 분이 안 풀려서 삼 년이나 벙어리 시늉을 하였어.”

“다 지난 일을 가지고 꽁해 있지 마셔요.”

“너야말로 다 지난 일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 않느냐.”

“기어이 절 이겨 먹어야 성이 풀리신다 이겁니까?”

“너야말로 주인을 이겨 먹으려는 그 버릇은 언제 고칠 참이냐?”

“누구 때문인데요.”

“나 때문이냐?”

“몰라 물으십니까?”

그러면서 침아가 혀를 빼물고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흔들었다. 어찌 이리 어릴까, 하고 쳐다보던 료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져 주마. 네 뜻이 정 그러하다니 내가 져 주마. 너 말고 누가 있어 내 앞에서 이리 깐죽깐죽 재롱을 떨겠느냐?”

크게 웃었더니 머리가 좀 지끈거려 료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살짝 찡그린 그의 얼굴을 보던 침아가, 청작이 닦는다고 닦았지만 조금 남아 있는 피얼룩을 그의 귀밑머리에서 닦아주면서 말했다.

“다음엔 그리하지 마세요.”

“무엇을?”

“만에 하나 제게 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해도 말입니다, 주인님께서 이리까지 하실 일은 아니십니다. 아셨지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느냐? 왜, 네 눈엔 많이 다친 걸로 보이나 보지? 별거 아니다. 청작이며 우송이 호들갑을 떨어 그렇지 며칠이면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고.”

아무렇지 않아져야 한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며칠도 길다.

“너 하나 구하는 걸로 내가 목숨이라도 건 줄 아느냐? 이 몸은 너 같은 약한 인간과는 달라. 괜한 생각 마라.”

거들먹거리며 허세를 떠는 료의 모습에 침아가 빙긋 웃었다.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감추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랑은 다르십니다. 잊지 마세요. 저는 한갓 인간일 뿐이라는 걸요.”

그 유난한 강조가 료의 심기를 거슬렀다. 아무래도 미리 무언가의 포석을 깔아놓는 말임을 눈치챈 것이다.

다소 싸늘한 눈으로 침아를 쏘아보듯 하던 료는 아무런 예고 없이 와락 침아의 얼굴을 잡아당겨 입술을 포갰다. 그녀가 앞으로 쏠리면서 대야의 물이 얼마쯤 엎질러졌고,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몸짓에 남은 물도 쏟아졌다. 거치적거리는 것을 옆으로 치워버리는 료의 손짓에 대야가 돌바닥에서 구르는 소리가 요란도 했다.

그 시끄러운 소리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료는 침아와 약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품을 벗어나려 하는 계집과 붙잡고 있으려는 사내의 싸움은 힘에 밀린 계집이 차디찬 돌바닥에 미끄러지며 끝이 났다.

“괜찮으냐?”

가까스로 침아의 머리가 돌에 부딪치는 것은 료가 손으로 막아주었다. 그러는 서슬에 다친 곳이 한꺼번에 욱신거리는 동통을 일으켰지만 료는 신음소리조차 낼 겨를도 없이 침아가 멀쩡한지부터 살폈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침아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처음처럼 뺨을 때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뭐?”

“편하게 살려고 아양을 부렸는데 편한 게 편한 것이 아니게 되었으니, 제가 제 발등을 찍어야 합니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냐? 머리에 충격이라도 간 것은 아니겠지? 눈이 다 보이게 됐다더니 아주 나은 게 아닌 거라면…….”

걱정스레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료의 눈길을 본 침아가 갑자기 자신의 왼쪽 머리카락을 옆으로 젖히면서 말했다.

“보세요, 제가 늘 가리고 있어 잊으신 거라면 좀 보십시오. 처음 보셨을 때 절더러 말씀하셨잖아요. 흉측하다고. 전 여전히 이렇게 흉측한 걸 달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을……여태 신경 쓰고 있었단 말이냐?”

깜짝 놀라 료가 물었다. 곧이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때는 내가 부러 네게 더 못되게 굴었던 것이다. 내게 다 지난 일을 가지고 꽁해 있지 말라 하더니 너야말로 그런 것에 연연하다니, 못 쓰겠구나.”

달래듯 말하면서 일으키려는데 침아는 누운 채로 버텼다. 얼굴을 홱 돌려 왼쪽 얼굴을 그가 보지 않을 수 없게끔 해놓고 야멸치게도 말했다.

“저야 제 얼굴을 보고 사는 게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저를 보는 입장에서는 불편할까 싶어 가리고 다녔던 것이지 창피해서 가리고 다녔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걸 넘어 아예 주인님께서 망각하고 계신 듯하니 앞으로는 가리지 않고 내어놓고 다녀야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료는 잠시 이해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야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닫고 료는 측은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런 짓을 한다고 하여 내가 너를 멀리할 성싶으냐?”

침아는 아무 말도 없었다. 료는 손을 들어 침아의 왼쪽 얼굴을, 특히나 화상을 입은 부위를 어루만졌다. 그 차가운 손에 침아가 흠칫하였으나 어차피 피할 곳도 없는 상황이었다. 계속, 계속 어루만지다가 그가 다시 물었다.

“이런 흉터가 있어서 내 너를 더 아낀다 하면 어쩌겠느냐?”

“그런 걸 보통 연민이라 하지 않습니까?”

“아예 아니라 하진 않겠다. 하지만 아주 그것만도 아니다.”

아무래도 자세가 불편하여 조금씩 숨이 거칠어졌다. 침아가 고개를 돌리더니 료의 얼굴이 부쩍 창백해진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따라 료도 자세를 고쳤다. 침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런 데서 고작 이런 일로 노닥거린다는 것이 우습습니다. 그만 하고 방으로 돌아가서 쉬셔야지요.”

부축하는 손을 잡고 료도 일어나긴 했으나 걸음은 떼지 않았다.

“그리 가볍게 말하지 마라. 너, 내게 나이는 대체 어디로 먹었냐고 놀렸었지? 네 기준으로 보자면 그럭저럭 오래 산 편이다. 그리 살면서 누군가를 여자로 의식한 적은 네가 처음이다. 그렇기에 내 딴엔 퍽 노력하고 있는 것이야. 아니 할 말로 네 뜻과 관계없이 널 무작정 취하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한들 누가 날 지탄하겠느냐? 네가? 이미 내 것인 주제에 어찌 주인을 거역할 참이냐?”

침아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또 한숨을 쉬었다.

“주인님은 너무 단조롭게 살아오셨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세상 유람을 좀 다녀보심이 어떠실지요? 우선 몸부터 조리하신 후에 우송 아저씨와 함께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러 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한 십 년 계획으로 말입니다.”

“지금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지?”

“아예 아니라 하진 않겠습니다.”

료가 한 말을 흉내 내면서 침아가 빙긋 웃었다. 무어라 말하려는데 침아가 문득 부르르 떨었다. 그제야 침아의 옷이 꽤 젖었고 머리도 헝클어진 것이 료는 신경 쓰였다. 연기를 꽤 들이마셔 실신까지 했던 것에 비해 오늘의 침아는 놀랍도록 멀쩡하지만 몸에 무리가 간 것은 분명할 것이다. 거기에 또 한 가지 보탤 수는 없어 료는 방으로 돌아가기로 작심했다.

둘 다 묵묵히 마당을 가로질러가 이윽고 마루에 올라섰다. 볕을 받아 따스하게 데워진 나무를 밟아 걸어가면서 료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단조롭게 살아왔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는 일이다. 거기에 이렇다 할 불만도 없었다. 크게 지루하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너도 알겠지만 난 추위를 심하게 타고 날이 추워지면 따뜻한 곳에서 꼼짝 않고 있는 걸로도 충분히 기꺼워하는 녀석이니 말이다.”

“너무 기꺼워해서 탈이지요.”

지난 몇 년간 함께 겪은 겨울을 떠올리며 침아가 투덜거렸다. 어떤 때에는 며칠이고 간에 료가 누워서 일어나려 수를 안 해서 내내 베개 노릇을 하던 침아가 허리가 아파 앓아누운 적도 있다. 료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앞으론 내 달리 살아볼까 생각 중이다. 겨울에 틀어박히는 것은 조금 줄여보도록 하고, 날이 따뜻한 동안에는 여기저기 산수 구경도 다니고.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눌러앉아 내 둥지를 만들어야지.”

“……분가(分家)를 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언제쯤…….”

“어렵게 헤아리고 말 것 있느냐. 당장에 올해가 되어도 좋지.”

그 말에 침아의 눈이 한층 커졌다. 방으로 향하는 료의 얼굴엔 패기가 넘쳤다. 침아 앞에서 허세를 부려본 것이 아니라 정말로 당장 올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젯밤 다급한 김이었다고는 하나 마침내 제대로 나는 것에 성공한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스스로를, 무늬만 새인 날 수 없는―혹은 날아서는 안 되는―자라고 생각해 거듭해서 굳혀오던 강박에서 간신히 풀려났다. 날 수 있는 새는 독립을 하는 것이 자연의 생리이다. 그의 일족은 굳이 그런 혹독한 일정에 맞추어 살지 않아도 되지만 료에게 독립이란 것은 이미 오래된 비밀스런 꿈이었다.

방에 들어선 뒤 료는 먼저 이부자리에 앉아 한숨 돌렸고 침아는 옷을 갈아입고 왔다. 머리를 새로 빗은 침아는 아까 제가 한 말대로 화상 흔적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침아가 그의 환부에 고약을 갈고 다시 깨끗한 천으로 동여매주는 동안 료는 그런 침아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시선을 한사코 무시하는 것이 조금은 귀엽기도 했다.

“자, 다 되었습니다. 이제 누워서 눈 좀 붙이셔요.”

버릴 것을 챙겨 일어서려는 침아를 료는 못 가게 붙들었다.

“나중에 해라. 내 졸리구나.”

“밖에 이것만 내어놓고 올 것이니…….”

“내 졸리다 하였지.”

언성을 좀 높였더니 침아가 소반을 되도록 멀리 밀어두고선 그의 오른편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베개입니까, 죽부인입니까?”

“오늘은 그냥 나란히 눕는 걸로 하자.”

침아의 손을 쓸어 만지며 료는 방금 전에 언성을 높였던 것을 만회하려는 듯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너도 제대로 쉬어 두어야지. 지금 멀쩡한 것만 너무 믿지 말고. 말썽이던 눈이 보인다는 것도 반갑긴 하다만 네가 혹여 크게 놀라서 아픈 것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닐지 난 걱정이야. 일단 푹 자고, 다시 일어나서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내게 말해 주어야 한다.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침아를 보며 료가 빙그레 웃었다.

“자, 베개나 하나 더 찾아오렴. 여긴 아버지의 침소이니 여분의 베개가 있을 게다.”

잠자코 베개를 찾으러 일어서던 침아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인님은 아주 상냥한 짝을 얻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료가 웃고만 있자 침아가 거듭 강조했다.

“주인님께 어울릴 만큼 어여쁘고도 몹시 상냥한 짝이요. 주인님이 중요시 여겼던 것처럼 솔직하기도 해야겠구요.”

“그래서 너는 그렇지 않다?”

“예, 안타깝게도 전 해당 사항이 하나뿐입니다.”

“솔직함밖에 없다 이거냐? 그거면 됐다.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야?”

“셋 다 갖춘 이를 얻으셔야지요. 주인님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료는 속으론 우스웠지만 짐짓 목소리를 험하게 냈다.

“너, 그런 말로 꼬드겨놓고 나 자는 틈에 또 밖에 나가 어슬렁거릴 생각인가 보지? 어서 베개나 찾아오도록 해.”

침아가 곁방에 들어가 베개를 찾아서 돌아와 누우려 했는데 료가 불쑥 그녀의 댕기 한쪽을 풀어냈다. 어리둥절하여 쳐다보니 그는 그걸 가지고 자신과 침아의 손목 한쪽을 한데 묶었다.

“풀려는 시늉만 해도 내 금세 일어날 테니까.”

둘의 손목을 한데 묶은 붉은 댕기를 멀뚱히 보는 침아에게 료가 또 불현듯 입술을 겹쳐왔다. 입술이 닿기 무섭게 고개를 모로 돌려 침아가 피하였으나 료는 침아의 허리를 담빡 끌어당기며 품에 꼭 안고 포갠 입술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다.

뻐근거리는 몸의 통증조차 침아의 감미로운 입술을 맛보는 즐거움을 방해하지 못했다. 품 안의 침아가 바르작거리며 버둥거리는 것이 밉고도 사랑스러우니 대체 어떤 기분인지 제 마음도 알지 못하겠다.

“얌전히 좀 있어.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다는 것은 말뿐이더냐?”

그렇게까지 말해서야 간신히 침아가 얌전해졌다. 사뭇 부드럽게 입맞춤을 거듭하였으나 눈을 꼭 감고서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는 침아의 태도에 무언가 시들해지고 말았다.

“무서우냐? 내 다른 짓은 하지 않아. 오늘은…….”

다독거리면서 눕게 했다. 침아는 아무 말도 없이 이불을 끌어와 머리끝까지 덮었다. 료는 곤혹스러운 심경이 되었으나 이내 옆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댕기로 묶여 있는 손목을 움직여 침아의 손을 꼭 쥐었다. 마주 잡아올 리는 없었지만 그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만으로 료는 만족했다.

너른 방 안을 떠도는 다사로운 햇살 속에 눈을 감으며 료가 중얼거렸다.

“내 눈엔 네가 어여쁘단다. 그리고 가끔씩은 상냥하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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