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혼신의 힘
눈을 앞에 두고 침아는 머뭇거렸다.
‘잠시 돌려준다’고 하는 말은 참 그럴싸하지 않은가? 저도 모르게 “그럼 잠시…….”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고 손의 주인이 희미하게 낄낄거리는 것을 들었다. 침아는 인상을 쓰려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웃음에 이어 입을 열었다.
“이럴 때마저 장난이시군요.”
이제 목소리는 거치나마 원하는 대로 나왔다. 아까 부채로 연기를 걷어준 탓도 있다.
“그건 또 어디서 구한 뉘의 것입니까?”
“구할 곳은 많지. 주겠다고 하는 인간이 하 많아서 내 따로 눈알 받는 비서 하나를 두었다는 것을 말해준 적 없나?”
“그처럼 바쁘신 분을 여기까지…….”
나직하게 흘러나오던 침아의 말은 중도에 끊어졌다. 무언가 달각달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서도 현기증에 눈앞이 핑 돌아 이마를 눌렀다. 머리 위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냐, 저 거울은?”
현기증을 버티며 간신히 고개를 든 침아가 말했다.
“돌아가세요, 어서.”
“퍽 희한한 걸 가지고 있지 않으냐?”
사내가 늑장을 부렸다. 또 몹쓸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다.
“가세요, 구해 주신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두 번이야.”
“그래요, 그래.”
“내 피는 아무에게나 주지 않아.”
“안 그래도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낄낄, 알면 됐고. 또 보자, 아기야.”
사라지는 순간까지 장난스러웠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크게 부채로 휘저어주고 간 덕에 잠시 동안 숨은 쉬기 편했다.
방의 동쪽에 있는 문갑 위에 놓인 동경(銅鏡)이 누가 만지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떨면서 흔들리고 있다. 이제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은 침아는 점차 흔들거림이 심해지는 거울 쪽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우여곡절 끝에 벗어난 이부자리에 도로 돌아가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놓고 다시 탁해지는 공기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내 동경이 저절로 일어섰다. 그 동경 중심에 자그마한 황금빛 원이 생겼다. 그것이 점차, 점차 퍼지면서 동경 그 자체가 달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둠속에 뜬 그 달이 방 안을 비추었다.
그 달 너머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해거름 무렵. 혜양군 성내의 관청 및 주요 시설들이 모여 있는 보현가의 꽤 큰 객잔에 료의 일행이 짐을 푼 지도 어느덧 사흘째를 맞는 밤이 돌아오고 있었다.
료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물린 후에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오후에 서책가를 돌면서 새로 구한 서책들을 들춰볼 생각이었지만 그다지 눈길을 끄는 게 없자 금세 옆으로 밀어내고 드러누웠다.
두 팔로 머리를 괴고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또 얼마 못 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하품이 나왔다. 평소라면 활기로 넘칠 무렵인데 지금은 연거푸 하품이나 하다가 눈을 감고 슬슬 졸았다. 깜빡 잠이 들긴 했다. 그러다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머리는 여전히 무겁다. 반대편으로 누워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 든 잠도 오래지 않아 깼다.
“나 원……!”
깊게 잠들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겐 당연한 것이거니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도 최근엔 알게 되었다. 그래서 료는 신경질을 내며 일어나 앉았다.
멍하니, 반은 잠이 든 것 같은 느낌으로 눈을 뜨고 있다가 “그렇지” 하면서 료는 눈을 빛냈다. 오늘 사온 서책을 우송이 되는 대로 쌓아두는 바람에 료가 찾는 것이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어지간해서 깨질 일은 없지만, 우송이라면 또 모를 일이라 료는 그것을 꺼내면서 내심 긴장했다. 다행히도 염소가죽으로 싸놓은 내용물은 멀쩡했다. 조심스럽게 그가 들여다보는 것은 직경이 반 자가 약간 넘는 둥그스름한 청동거울이다. 투박한 거울의 앞면엔 아무 무늬도 없는 대신 뒤를 보면 주사로 휘갈겨 쓴 희미한 ‘천리(天理)’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만든 이의 말장난이다. 천리(千里) 너머를 볼 수 있다는 거울에 붙인 이름이 천리경(天理鏡)이란 것은.
누가 만들었는지는 현재의 주인인 료도 알 수 없으나 이런 물건을 만드는 것이 어떤 종족인지는 알고 있다. 두더지들. 땅속에 사는 종족은 여럿이 있으나 두더지가 보이는 쇠붙이에 대한 집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동경은 그가 살모사 때문에 크게 다쳐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었을 때, 청작이 저택의 지하 창고를 열어 꺼내어다 준 일종의 놀잇감이었다. 지시를 어기고 혼자 제멋대로 야시를 돌아다녔던 료의 잘못이 컸지만 청작은 가재인 자신이 작은도련님에게 눈을 떼어 그런 사고가 났다며 상당히 자책했었다. 그래서 생긴 비밀스런 장난감이다. 본디 아버지가 꽤 큰 값을 주고 구한 것이라는데 휘와 마찬가지로 심히 변덕스러운 분인지라 귀하게 얻은 거울 역시 몇 해를 못 가 관심에서 멀어져 그 뒤론 내내 지하 창고에서 볕 볼 일이 없었다고 했다.
‘허나 도련님께서 가지고 노는 걸 보시면 다시금 흥미를 보이실 지도 모르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도련님?’
청작은 천리경을 주며 그렇게 물어왔고 료는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나이였다. 그것은 료와 청작 사이의 비밀이 되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비밀의 공유자가 늘어났다.
“그걸로 보면 정말 천 리 밖의 것도 볼 수 있습니까?”
거울을 닦는데 지나치게 몰두했던지, 우송이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도록 아예 바깥일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래서 느닷없이 옆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료는 심장이 다 철렁했다. 황급히 거울을 뒤로 감추다가 우송을 보고는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우송이라면 비밀의 공유자가 된 지 오래다.
“그러니까 천리경이지 달리 천리경이겠느냐?”
목소리를 낮추란 수신호를 보내며 말하자 우송도 제 딴엔 작은 목소리로 주절댔다.
“흐음. 신통한 물건이군요. 조마경(照魔鏡)도 그렇고 천리경도 그렇고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 그런 걸 만들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참 이놈은 신기합니다. 두더지들은 땅속에서 그런 것만 생각하고 살까요?”
“내 그런 것까지 무슨 수로 알아? 정히 궁금하면 두더지 신부를 맞지 그러느냐?”
“아이고, 제가 무슨 소리만 하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 이거나 드십시오. 주인님이 통 드시질 않는다고 청작 아저씨가 급하게 구해 오셨습니다.”
다시금 쩌렁쩌렁해진 목소리로 검게 옻칠이 된 찬합을 우송이 료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안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료가 뚜껑을 슬쩍 열어보니 붉은 옻칠이 된 안쪽에 딱딱한 까만 껍질이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결국 이걸 먹게 되나 싶어 료가 웃는데 우송이 주절거렸다.
“뭐 내일이면 주인님께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드실 거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청작 아저씨는 잘 모르시는 일이니까요.”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료가 우송을 쳐다보았다. 우송이 현격히 작아진 체구를 얹어놓은 툇마루를 퉁퉁 두들기면서 말했다.
“꽃 좋아하는 작은 새가 없어서 식욕 부진이신 거 아닙니까. 버릇이란 게 무섭지요. 고 작은 것 하나 없다고 밥맛도 없으시다니 참.”
“듣자 듣자 하니 네놈이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오냐, 그래, 너 말 한 번 잘했다. 상으로 이거라도 좀 먹고 가거라.”
찬합을 열어 한 움큼 쥐어낸 것을 들고 우송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우송은 당장에 툇마루에서 튕겨 일어나며 두 팔을 저었다.
“아이고, 아이고, 그런 걸 이놈이 무슨 수로 먹습니까? 저는 그저 평범한 소대가리일 뿐입니다.”
“평범한 소대가리로 평생을 살아야 쓰겠느냐? 이리 오래도? 설마 먹고 죽기야 하겠느냐?”
“죽습니다, 죽어요. 틀림없이 죽습니다.”
우송은 뒷걸음질 치며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지만 료는 신발까지 꿰어 신고 나와 마침내 우송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체구가 작아지니 이것 참 편리해서 좋다 하면서 료가 빙긋 웃었다.
“아니 죽는다니까? 글쎄 한 번 먹기나 해보래도?”
“죽는다니까요, 아이고.”
“그래서 주인이 하는 말을 끝내 거역하겠다? 우송, 많이도 컸구나?”
료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우송은 찔끔하더니 이내 뻐끔뻐끔 입을 벌렸다. 하지만 곧 죽어도 할 말은 남아 있었다.
“아이구, 침아야. 널 데리고 오는 건데, 널 데리고 오는 건데.”
“여기서 침아는 왜 또 찾느냐?”
“그 아이가 있었다면 주인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못 하게 말렸을 테니까요. 패악을 부리든 난리법석을 피우든 간에 하여간 침아가 졸라대는 건 다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내가?”
“예, 주인님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불알 같은 건 달고 태어나지 않는 건데.”
우송은 나름대로 한스러운 심정을 막판이란 심정으로 쏟아내는 건지는 몰라도, 그 말은 료에게 폭소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네놈이 불……, 흠, 고환 없이 태어났으면 대체 어떤 몰골로……. 풋, 푸흡. 흐하하하하!”
이젠 아무래도 좋다.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광경을 떠올리고 말았다. 료는 우송의 멱살을 놓아주고 툭툭 어깨를 두드려준 뒤 너무 웃어 눈물까지 치밀어 오른 눈을 훔치며 비척비척 돌아섰다. 툇마루에 걸터앉아서도 웃음을 쉬 그치지 못하는 료를 보면서 우송은 제 딴에도 우습다 싶었던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머쓱하여 말을 돌렸다.
“청작 아저씨가 어제랑 같은 시각에 준비를 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래.”
겨우 웃음을 멈춘 료는 얼마쯤 허기를 느꼈다. 우송에게 억지로 먹이려 했던 전갈을 툭툭 분질러 당장 꼬리부터 맛을 보면서 좁은 뜰 위로 보이는 어둑해진 하늘을 보았다.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풀린 것도 같다.
허름한 것은 개의치 않으나 시끄러운 것은 견딜 수 없다고 한 료의 뜻을 청작은 최대한 만족시킨 편이다. 료가 머무는 곳은 밤으로 접어드는 이 시각에도 조용했다. 객잔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기루(妓樓)인 곳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장소가 아닐까 싶다. 손바닥만 한 뜰을 둘러싸고 행랑채 같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들어 있는 손님은 료의 일행들뿐이다.
점심 무렵 일어나 나갔다가 해가 지고서 돌아올 때까지 인간 행세를 하는 것도 첫 하루는 나름 재미도 있었지만 이틀째부터는 시들해졌다. 약재 장사는 둘째 날 일찍 깨끗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유능한 가재인 청작은 장사에도 소질이 있다는 것만 확인했다. 손에 들어온 인간의 화폐가 어느 정도의 액수인지 료는 알 수 없었지만 청작은 흡족해했고 료도 원하는 것을 살 수 있었기에 만족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이후엔 저자 구경이고 뭐고 간에 어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우송의 말대로 료는 식욕도 별로고 잠자리도 마음에 들지 않아 이미 이곳에서 마음이 떴다. 일족들의 피에 흐르는 변덕의 기운이 그에게도 분명 있긴 한 모양이었다. 다만 하루를 더 머물기로 한 것은 료가 다른 목적한 바에 꽤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다.
별미를 남김없이 먹으며 기분이 꽤 좋아진 료는 방으로 돌아가 거울을 마저 닦았다.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동경의 표면을 만지며 잠깐 들여다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직 이르다 싶어 그만두었다.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도 들리기 전이다.
“주인님.”
거울을 생각보다 오래 닦고 있었던지 어느덧 밖에서 우송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울을 잘 갈무리해 두고 방을 나선 료는 우송을 따라 걸음을 떼어놓았다.
고요한 곳을 벗어나 취객들이며 기녀들이 빚어내는 소음이 난무하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 시력이 좋은 것만큼이나 청력도 민감한 료 같은 경우엔 제정신으로 오래는 있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우송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어떤 면에선 호기심도 보였고 말이다.
“우송아.”
“예, 주인님.”
“새벽에는 떠날 터인데, 정말로 그냥 돌아가도 좋으냐?”
“아이구, 이놈은 정말로 괜찮습니다.”
마구 팔을 내저으며 머리까지 젓는 행동이 요란키도 하다. 그 강한 부정에 료는 짐짓 미소 지었다.
“그래,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여자가 따라주는 술 한 번 못 받고 가는 것도 우습지 않으냐. 아까 청작에게 너 기다리는 동안 술이나 쳐줄 기녀 하나 들여보내주라고 말해 놓았으니 그리 알아라.”
“아이구, 술이야 제 손 있는데 제가 따라 마시면 되지 뭐 하러 그런 신경을 쓰셨습니까? 주인님께서도 혼자 드시는데 저 같은 놈이 뭐라고 기, 기녀를 다 옆에 끼고…….”
“뭐긴 뭐냐. 나이 사십에 짝짓기 한 번 못 해본 소대가리지.”
“못 해본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걸로 치면 나이 육십 넘도록 암컷 뒤꽁무니 한 번 쫓아다녀 본 적 없는 어떤 분보다는 낫지요.”
“오호라. 네가 술안주로 아까 마다한 전갈을 좀 받아봐야 입이 제대로 움직일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입이 비뚤어져서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료가 웃으면서 어깨에 팔을 올리자 바로 우송은 무모했던 자신의 주둥아리를 반성했다. 침아의 나쁜 영향이다. 그렇게 우직하고 수더분했던 우송이 불과 사 년 사이에 이 정도로 기어오르게 만들었으니 앞으로 사십 년 후에는 어찌 될지 료는 조금 두렵다.
이윽고 료는 우송을 뒤에 남겨두고 자신을 위해 준비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좌우로 둘 달린 방으로, 그가 들어선 왼쪽 문에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두 겹의 발이 이쪽 벽에서 맞은편 벽까지 드리워져 있다. 일종의 병풍이자 방을 두 개의 공간으로 양분하는 차단막이라 할 수 있다. 발 너머의 넓은 쪽은 등잔을 환하게 켜놓았지만 이쪽은 불빛이 희미한 등롱 하나만 준비해 저편에 있는 자들이 이쪽을 볼 수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다.
이렇게 본디 하나인데 안에서 보자면 두 칸으로 나뉜 희한한 방의 용도는 ‘하는 것보다 보는 걸 즐기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료가 청작에게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었을 때 청작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장담했다. 인간들의 밤의 문화는 기이하도록 다양하다는 것을 료는 이곳에 와서 처음 본 춘화첩이란 것을 보고 충격적으로 배웠다.
이미 준비된 술상 앞에 앉아 자작을 하고서 한 잔 마시기 전에 가볍게 료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발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자신들의 일을 시작했다. 이미 거의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남녀 한 쌍. 바야흐로 그들은 춘화첩의 갖가지 풍경을 그의 앞에서 재현할 것이다.
첫날은 하 거북한 심정을 다스리지 못해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셨었고, 둘째 날은 여전히 떨떠름해서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 번째 날이 되자 료도 제법 면역이 되었다. 게다가 이제 이런 일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끝내자는 결심이 확고하다.
술 한 잔으로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는 곤혹스러운 기분을 누르고 료는 환한 불빛 아래에서 서로 얽혀드는 남녀의 행위를 지켜보았다. 여느 때보다 더 진지한 눈빛으로 그 무엇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듯 열중하였다.
한 차례의 방사가 싱겁게 끝이 났다. 돈을 받고 보여주기 위해 하는 정사에 열정 같은 게 느껴질 리는 만무하다. 그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을 보던 료가 입을 열어 말했다.
“순서 같은 건 개의치 말고 되도록 여자에게 보다 즐거운 쪽을 보여주시면 좋겠소. 보여준 것을 되풀이해도 상관은 없으니, 천천히.”
3일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구경꾼의 목소리가 청아하다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앳된 것에 드러누워 있던 여자가 목을 빼고 이쪽을 보았다. 물론 보이지 않을 것을 알아 료는 담담히 미소 지었다. 살결이 희고 퍽 풍만한 몸집의 여자의 나신을 보아도 그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어여쁜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료는 인간의 벗은 몸에 반응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는 곳이 산이다 보니 봄이면 산짐승들이 교미하는 광경을 볼 만큼 보았다. 인간들의 교미도 그와 비슷하겠지, 하고 생각했으나 막상 실행을 앞두니 무모하다는 걱정이 들었다.
“여자도 여러 종류의 여자가 있지요. 손님께서 생각하시는 여자는 어떤 분이옵니까?”
여자가 당차게도 질문을 해오자 료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아이는…….”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고운 의복이나 머리 장신구보다 제 입에 단맛 있는 것에 더 기뻐하는 사람이랄까.”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그리 말했더니 저편의 여자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사내 또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말괄량이인가 보지요?”
놀리는 말 같아 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다시 말해 왔다.
“자, 그러면 병아리를 낚아채는 솔개 구경부터 시켜드리지요. 얼떨결에 혼을 빼놓지 않으면 엄마 닭 품에 숨어버릴지 몰라요.”
“얼떨결에 혼을……?”
이맛살을 찌푸리며 료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여자가 보다 진지하게 대꾸했다.
“음양의 이치는 자연스레 깨우치게 되는 것이 가장 좋지요. 예쁘게 꾸미고자 하는 욕심은 눈길을 끌고자 하는 사내가 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아직이라면 손님의 마음에 있는 그 여자, 아직 인형놀이에나 어울리는 어린 분이 아니겠습니까?”
인형 같은 걸 가지고 노는 걸 본 적은 없다. 물론 인형 자체가 없으니 못 가지고 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말이 어떤 의미론 그가 생각해 온 것과 일맥하는 것이긴 했다.
“그런 분을 품으려 하신다면 필경 어리둥절해하기 십상이고, 무엇보다 겁을 먹고 울음보를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하긴 사내 중엔 부러 여자를 울려 범하는 기분을 즐기는 이도 더러 있지만…….”
“그런 건 결코 원치 않소.”
겁을 내는 것도, 우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싫다는 것을 억지로 범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권위만으로 몸뚱이를 취할 것이었다면 이런 곳에서 며칠이고 희한한 수업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침아가 인간인 만큼, 인간들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품어주고 싶었다. 그것이 아무쪼록 그 아이에게도 좋은 시간이기를 바랐다. 어서 품어서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그녀가 앞으로도 자신을 상냥한 주인이라고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진실했다.
아니지, 이제 다른 의미로 밤을 함께 하게 된다면 더는 주인과 몸종의 관계가 아닐 것이다. 료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서 발 너머의 여자를 보며 말했다.
“그 아이가…….”
운을 떼었다가 멈추었다. 료는 다시 말했다.
“그녀가 나를 좋은 지아비로 여겨주길 바라오.”
얼마쯤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그녀에게 좋은 지아비가 되어주고 싶소.”
그 부드러운 말에 여자의 눈이 아련하게 흔들렸다. 여자는 뜻 모를 한숨을 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시면 다른 것을 보여드리지요.”
여자는 사내를 돌아보고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잔잔히 웃기도 하는 여자의 말에 사내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남녀의 교접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처럼 하반신을 맞물리는 다양하고도 번잡한 체위에만 치중하는 것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앉은 채로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어루만지고 입술을 나누었다. 이윽고 요 위에 누운 여자를 두고 사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뭇 조심스럽게 애무를 거듭했다.
이따금 사내가 여자의 귓가에 짧은 말을 속삭이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눈을 감은 여자가 가벼이 몸을 떠는 것을 료는 보았다. 발그스레한 훈기가 얼굴부터 시작해 여자의 하얀 몸을 채워가는 것이 마치 물결이 밀려나가는 양 하였다. 일종의 주술 같았으나, 주술의 단어는 단 두 마디뿐이었다.
“연모한다…….”
그중 한 마디를 료는 자신의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말만으로는 감흥이 없었다. 료는 눈을 감고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연모한다.”
감은 눈 속에서 언뜻 침아의 자는 얼굴이 스쳐갔다. 그러자, 무언가가 느껴졌다. 손에 쥔 술잔의 매끄러운 표면을 만지며 료는 또 한 번 같은 심상을 불러왔다.
‘연모한다.’
침아의 귓가에 속삭여 주리라.
그러면 침아가 눈을 떠 나를 보겠지.
귀여운 뺨을 발그레 물들이면서…….
그때, 발 너머의 여자가 낮게 허덕이며 열락에 겨운 한숨을 토해냈다. 그 소리가 료의 감은 눈 속에서 침아의 것으로 뒤바뀌었다.
“……읏.”
불현듯 단전에 밀려오는 뜨거운 기운에 료는 놀라 눈을 떴다. 고개를 숙여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면서 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한 사태를 깨닫자 그는 보는 이도 없건만, 얼굴을 붉히며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발정했다. 오로지 상상만으로.
이런 일도 있는가 싶어 료는 쉴 새 없이 눈을 깜박였다. 급하게 술을 한 잔 따라 마셨지만 홧홧해진 가슴에 불씨를 보탠 격이 되었다.
발 너머의 남녀는 바야흐로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다. 사내가 여자를 채워간다. 여자는 흐느끼는 듯한 교성을 뿜었다. 사내는 육중한 몸으로 여자를 껴안더니 또 귓가에 무어라 무어라 속삭였다. 여자는 흡사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온몸을 떨었고 사내를 마주 안으며 정신을 놓은 것처럼 격하게 신음했다.
처음으로 인간의 남녀에게 자신과 침아의 모습을 겹쳐보던 료는 그러한 반응에 잠시 숨조차 멈추었다. 술상을 옆으로 밀고 좀 더 앞으로 다가앉은 료는 내내 눈을 떼는 일 없이 남녀의 교합을 지켜보았다.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오고서도 꽤 한참 뒤에야 시연은 끝이 났다. 사내가 먼저 일어나 나갔고 여자는 다소 늑장을 부리며 옷을 꿰어 입었다. 료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데, 여자가 저고리를 걸치며 물어왔다.
“흡족하셨습니까?”
료는 마음을 바꾸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도움이 될 것 같소.”
“다행입니다.”
웃고 있는 여자에게 료가 물었다.
“그대는 올해 나이가 몇이오?”
“스물다섯입니다. 이미 퇴기 소리나 듣는 처지라 이런 일이나 하며 입에 풀칠이나 하지요.”
“……스물다섯인가.”
여자의 얼굴을 보니 진하게 했던 분칠이 땀으로 녹아서 그리 깨끗하지 못한 피부며 몇 개인가의 주름이 드러났다. 고작 스물다섯, 한참 어린 나이인데도 인간은 저러한가 싶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 노는 여자들은 스물이면 이미 지는 꽃입니다. 뭇 사내들의 희롱에 단물이 빠질 대로 빠지는 것을 막을 비책이 없습니다. 반가의 여자들처럼 곱게 지내는 분들 중에는 서른이 되어도 십 대의 소녀 같은 분들도 더러 있다고 하지요.”
“으음.”
서른조차도 어리다. 료는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하지만 우선 그 기분은 떨쳐내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까 사내가 계속 반복한 말 중에 연모한다는 말 말고 미금이란 말을 자꾸 하던데 그건 어떤 뜻이오?”
“그것은 제 이름입니다.”
“아……. 이름. 그렇군.”
그건 어떤 주술과 관련 있는 말이냐고 물었으면 부끄러웠겠다 싶어서 료는 헛기침을 했다. 여인과 잠자리를 하면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란 생각을 전혀 못하였던 것이다.
“흠……. 그럴 때 이름을 불러주면 기분이 좋소?”
“당연히 좋습니다. 좋아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손님처럼 곱기까지 하다면 더욱 좋겠지요.”
추파일지도 모르는 말이었으나 료는 무심히 흘려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대도 인간……, 흠, 여자이니 묻겠소만 내가 마음에 둔 이는 나이가 이제 열여섯인데……. 이런 일을 하기엔 너무 어리지나 않을지 모르겠소.”
목소리만으로도 애젊기 짝이 없는 게 훤히 드러나는 도령이 이런 질문을 하자 여자는 웃음을 참지 못해 돌아앉았다. 그러고선 자세를 가다듬어 말했다.
“그 아씨, 달거리는 하고 계신지요?”
“하고 있소.”
작년 이맘때쯤에 시작한 것을 알고 있다. 첫 달거리 때는 그 활달한 아이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우울한 얼굴로 내리 사흘간 방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이따금 까닭 없이 우울한 낯빛일 때가 있다면 바로 달거리를 할 무렵이다.
“그럼 되었습니다. 몸이 이미 어미가 될 준비를 하였다는 뜻이니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다만 이제 갓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가 된 나이이니 조심스럽게 아껴주셔야겠지요.”
그러면서 여자가 다시 발 너머의 료를 보려는 듯 눈길을 던져오며 웃었다.
“아마도 충분히 그러실 분일 테지만.”
료는 조금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그때 여자가 붙잡듯이 말해 왔다.
“손님, 다시 볼일 없는 인연인데 술 한 잔 쳐드리고 싶습니다만.”
료는 어리둥절하게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말했다.
“더럽다 여기지 않으신다면 제 술 한 잔 받고 가시옵소서.”
그 목소리가 어딘지 간절했다. 하지만 료는 머뭇거렸다.
“더럽다 여기는 것은 아니오만……아무래도 그건 곤란하오.”
여자가 가만히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나가려던 료가 마음을 바꾸어 돌아와 술잔을 쥐었다.
“내 아직 내 정인에게서도 술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러오. 대신 고마움의 표시로 내 술이나 한 잔 받으시오.”
술을 따른 하얀 술잔을 대나무발을 살짝 들어 올려 앞으로 밀어주었다. 여자는 검은 도포자락 아래로 보이는 료의 고우면서도 사내다운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가 손을 거둬들인 후에야 다가와 술잔을 들었다. 마시기 전에 웃으며 축원했다.
“좋은 일은 모두 그 아씨를 위해 남겨놓고 싶으신 그 마음이 참으로 다사로우십니다. 아무쪼록 정인께 받을 그 술, 달콤한 합환주가 되기를 기원하나이다. 또 운 좋은 그 아씨, 손님의 지극한 사랑 받으며 만수무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고맙소.”
대답하는 료의 얼굴에 깃든 미소가 참으로 따뜻했다.
이윽고 밖으로 나온 료는 우송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잘 배워서 익히겠다는 뚜렷한 목표 아래 이어진 묘한 수업이 마지막 날 밤에 이르러서야 그 가치를 다했다 싶어 료는 진심으로 만족했다.
한편 마지막에 여자가 그에게 해준 말을 떠올리며 료는 다시금 웃었다.
“그리 운이 좋다는 걸 정작 그 녀석이 알아야 말이지.”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합환주라…….”
아직 술을 마셔본 적 없는 침아 생각에, 처음 마시게 되는 술은 아주 순하고 좋은 술이어야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멈추어 오던 길을 돌아보았다. 팔자 좋은 인간의 객들이 기녀들을 끼고 벌이는 술잔치가 벌어지는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떠들썩한 풍악 소리며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쪽을 물끄러미 보다가 청작을 보러 갔다. 술을 구하는 일은 계획에 없었으니 이제라도 구해야 할 것이므로.
그 여자 덕분에 좋은 걸 또 하나 배웠다면서 료는 미소했다. 인간의 여자는 스물다섯 정도면 세상을 알 만큼 아는 모양이다. 그때쯤에 침아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그때가 너무 빨리 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도 했다.
조용한 제 방으로 돌아오자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어둑한 방에 불조차 켜지 않고 앉았지만 어둠 속에서 심신이 안정되는 것은 그의 본성에 따른 자연스러움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혼자라는 것이다. 아무 말도 않고 잠만 자고 있어도 좋으니 침아가 곁에 있었으면 싶다. 한 번 뜻하지 않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일이 있었더니 이제 다만 며칠 보지 못하는 것도 초조하고 싫증났다.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침아가 있는 곳이 그리워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귀로를 밟자고 하면 청작도 우송도 군소리 없이 따라나서겠지만 어지간히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일까 료는 저어했다. 괜찮다. 이제 반나절 후면 돌아간다. 그쯤이야 하면서도 아까 닦아둔 청동거울이 마치 침아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료가 중얼거렸다.
“그 아이 자는 모습이라도…….”
쓰지 않으면 그만, 어차피 큰 짐은 아니라는 식으로 제 딴엔 합리화를 하며 가져온 천리경이 지난밤에 이어 오늘 밤에도 제 할 일을 해야겠다.
“비춰다오.”
지그시 거울을 바라보며 염(念)을 불어넣기를 얼마쯤…….
청동거울이 살아 있는 것처럼 조금씩 온기를 지니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던 표면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거미줄 같은 무늬가 생겼다. 그 무늬가 눈이 쫓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정교해지면서 조금씩 색이 짙어진다. 마침내 동그란 거울 전부가 황금색으로 반짝이며 들여다보는 료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눈부심에 팔을 들어 넓은 소매로 눈을 가렸다. 그 환한 빛은 돌연 나타난 것처럼 돌연 사그라졌다. 료는 그래도 부신 눈을 몇 번 깜박거린 후 천천히 팔을 내렸다.
이제 거울은 어둡다. 거울 본연의 색보다 더 어둑어둑한 침침함에 료는 빙긋 웃었다.
“그 녀석, 빨리도 자는군.”
이미 사경(四更 : 오전 1시에서 3시)에 가까운 시각은 생각 안 하고 나무라는 듯한 말을 중얼거리며 료는 유심히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천리경은 본디 두 개가 한 쌍을 이룬다. 지금 료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작은 것이고 보다 큰 것은 운몽산 저택, 료의 침소에 있다. 침아는 지난 몇 년간 그 거울을 보면서도 그것이 어떤 용도인지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보지도 않는 거울을 왜 항상 방에 두느냐고 글로 물은 적도 있다. 천리경은 하나로는 쓸모가 없다. 두 개가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할 때, 자신의 짝이 있는 곳을 찾아 비추는 거울이다. 비록 그쪽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고 해도 쓰는 법을 아는 이에게는 그 의미가 충분하다.
료의 얼굴에 깃든 미소가 조금씩 흩어졌다. 아무래도 천리경에 문제가 생겼는지 저편 방이 어두워도 너무 어둡다.
“혹시 그 녀석 거울에 무어라도 씌워 놓았나?”
마치 검은 천이라도 두른 것처럼 유난한 어둠에 거울을 쥔 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좀 더 정신을 집중하여 들여다보던 료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금 전에 창가가 보였다. 깁을 바른 창살 바깥이 어찌 저리 붉은가? 무엇보다 어째서 그 창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울이 다소 흔들릴 수는 있으나 그렇다 해도 너무 심한 진동이다.
그의 조바심이 통하기라도 했는지 창의 모습이 한동안 제대로 보였다. 여전히 그 너머로 핏빛 노을이라도 지는 것처럼 붉은 빛깔은 요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의 눈을 사로잡은 무언가 때문에 더는 창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창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깔린 이부자리 위에 잠든 침아가…….
“깨어 있어.”
침아는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기침을 하는지 몇 번이고 상체가 흔들렸다.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간신히 윗몸을 드나 싶더니 다시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채로 침아는 또 심하게 기침을 했다. 힘없이 내젓는 팔에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이 그녀에게 달려들다가 갈라졌다.
그 기묘한 어둠이 무엇인지, 료는 한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연기?”
핏빛이라 생각했던 창의 붉은빛의 의문도 단박에 풀렸다. 불이다!
“느닷없이 무슨……. 침아야, 일어나, 일어나서 나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깨닫긴 하였으나, 왜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거울로 보이는 광경 속에서 침아가 어서 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소리쳐 보았자 들릴 리 없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나가라고! 일어서야지 어찌 그러고 있어, 이 천치 같은 게!”
목소리가 갈라질 지경으로 소리쳤으나 거울 속의 침아는 이미 지쳐버린 듯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인가 더 기침을 하는 듯 어깨가 들썩이다가 아예 그마저 멎어버렸다.
“침아야……. 침아야!”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그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도련님, 큰 소리를 내시는 것 같아서 와 봤습니다만……,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방 안을 들여다본 청작은 어둠 속에서 망부석처럼 꼼짝도 않고 있는 작은도련님을 몇 번이나 불렀다. 신발도 벗는 둥 마는 둥 하고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가 료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그제야 료가 청작을 돌아보았다. 본디 료가 창백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돌아보는 얼굴이 그 정도가 아니라 숫제 귀기가 흘렀다.
“도련님, 어찌 그러십니까?”
“집에, 불이 난 모양이다.”
“예?”
댕그렁 하고 료의 손에서 거울이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제야 천리경을 알아본 청작의 눈이 커졌다. 료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도련님, 도련님, 어쩌실 생각으로……. 아……!”
천리경 속을 들여다보고는 뒤늦게 작은 주인의 뒤를 따라 일어서는 청작의 귓전에 지독히 거슬리는 소리가 다가와 부딪쳤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앞을 쳐다본 청작은 작은 주인의 검은 도포자락을 찢으며 돋아나는 쇳빛의 뼈들을 보았다. 그 끝이 날카롭다 못해 비수의 번득임을 연상시키는 접혀진 날개가 끼긱, 끼긱 녹슨 검집을 벗어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조금씩 조금씩 옆으로 펼쳐졌다.
뜰로 뛰어내린 료의 모습은 이미 새까만 한 마리의 새였다. 다만 인간들은 그처럼 큰 새를 괴조(怪鳥)라고 부를 것이다.
너무도 오랜만에 본체로 돌아온 료는 바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앞으로 거의 쓰러질 뻔하였다.
“도련님!”
청작이 소리치며 만류하려고 뜰로 내려서는 것을 료가 휙 돌아보았다. 새파란 눈테에 감싸인 타는 듯한 붉은 눈은 아무 말 없이도 청작을 뒤로 물러서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좁은 뜰 안에서 료는 반나마 펼친 날개를 두 번 세 번 거듭 움직이면서 발을 굴렀다. 갈고리발톱에 찍힌 바닥이 깊게 패였다. 그 패인 자국이 하나의 원을 만들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료가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불안한 날갯짓. 뜰이 좁아서 미처 다 펼쳐지지 못한 날개는 위태로웠다. 청작은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당장 눈앞에서 료가 떨어지고 말 것을 상상했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그 비참한 광경을.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하늘로 날아올랐던 검은 새는 바로 다음 순간 지상과의 거리가 세 자가 될까 말까 한 곳까지 떨어졌지만 거기서 다시 한 번 공기를 도약대로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솟았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그치지 않고 거듭하여.
청작은 자신의 눈으로도 겨우 그 형체나 볼 만큼 높이 날아오른 검은 새가 부리를 열어 하늘을 찢을 듯 조효하는 것을 들었다. 흡사 벼락같은 소리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져 꽈르릉 울렸다.
이제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에도 청작은 귀를 막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넋을 놓은 듯 비틀비틀 뜰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새는 그의 시력이 닿을 수 있는 그 어떤 공간에도 없다.
료는, 제 힘으로, 날개를 펼쳐, 날아간 것이다.
청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 것처럼, 웃었다.
“섬이 아씨……. 보셨습니까?”
하늘을 향해 묻는 그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젖어 있었다.
검은 새는 날았다. 한 번 날개를 올렸다 내릴 때마다 쐐애액 바람이 갈라지며 내는 신음이 귓전을 때려왔지만 눈조차 깜박이지 않으며 더 빨리, 더 멀리 날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충분히 나는 데 숙달된 그들의 일족은 한 번 날아 십 리는 갈 수 있다고 들었다. 제대로 날아오른 것도 처음인 료로서는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쫓기는 이유도 있고 해서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더디기만 한 것 같아 미칠 것 같았다. 연습은커녕 제대로 세상 구경도 시켜준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두 날개는 바짝 긴장하여 삐걱삐걱 뼈마디가 요동을 쳤다. 하지만 료는 그 불안함보다 자신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을 때의 일이 훨씬 더 두려웠다.
‘침아야, 침아야, 조금만 기다리렴.’
기백 번 날갯짓을 한 끝에 드디어 운몽산이 목전에 다가왔다.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료는 다시 한 번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막강한 맹금의 울부짖음에 운몽산 일대의 금수들이 일제히 기척을 죽였다.
반짝이는 세우지의 물을 언뜻 본 료는 순간적인 기지로 고도를 낮추어 세우지에 거의 뛰어들듯이 덤벼들었다. 자신의 몸으로 물수제비라도 뜨듯이 료는 온몸을 물에 적시기 무섭게 다시 수면을 차고 올랐다. 세우지를 벗어나자 저택은 그야말로 코앞.
저택의 서쪽, 료의 처소가 위치한 구석진 곳에서 불이 일어난 것이 명백했다. 검은 연기가 오르고 붉은 불길이 뜰의 나무며 기와까지 옮겨 붙어 넘실거리고 있건만, 희한하도록 그 누구도 불이 난 것을 모르는지 저택은 조용하기만 했다.
뜰을 지나쳐 료는 침소의 창을 목표로 향해 날았다. 그가 이대로 들어가기엔 너무도 작은 창이건만 무작정 료는 그 창으로 날아들었다. 머리끝에 닿은 창살, 양 날개에 부딪힌 벽. 창살은 바로 부러졌으나 벽은 균열이 이는 것에 그쳤다. 물러났다가 다시 온몸으로 부딪쳤다. 세 차례 시도 끝에 벽이 무너졌다. 검은 연기를 비롯해 흙먼지를 뒤집어쓴 바람에 침아를 얼른 찾아내질 못했다. 미친 듯이 날갯짓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쓰러져 있는 침아를 발견하기 무섭게 료는 날아가 그녀의 몸을 양 발로 움켜잡았다. 들어왔던 곳으로 빠져나가면서 료는 힐끗 침아를 내려다보았다. 축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날갯짓마저 멈출 뻔했다.
‘늦지 않았어, 나는 늦지 않게 왔다고!’
온갖 힘을 다 끌어 모아 날아올랐다. 매캐한 연기를 헤치고 나와 아주 잠깐 갈 곳을 망설이다가 지금 가야 할 곳이 한 곳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까는 그렇게도 가깝게 느껴졌던 세우지와 저택의 거리가 이번엔 멀기만 했다. 발에 움켜쥔 침아를 떨어뜨릴까 노심초사하는 까닭이 컸다. 겨우 세우지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착륙하는 법 때문에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냥도 서투를 일인데 침아를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함부로 땅에 내려앉을 수가 없었다. 세우지 한 바퀴를 돈 끝에 료는 물을 착륙지로 택했다.
커다란 검은 새가 요동을 치면서 불안하게 물로 뛰어들었다. 완전히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다시 인간의 모습을 취한 료와 그의 팔에 이끌려 나오는 침아였다.
물가로 침아를 올려놓기 무섭게 료는 침아의 호흡과 맥을 살폈다. 호흡은 극히 미약했지만, 맥은 분명 뛰고 있었다.
“침아야, 침아야, 정신 차려 보아라, 정신 차려. 응?”
뺨을 두드려보고 어깨를 흔들기도 했으나 침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료는 세우지의 찬물을 제 입에 담아 침아에게 옮겨 주었다. 물조차 마시지 못할 정도로 의식이 없어 그 일은 느리고도 더뎠다. 그래도 물을 한 모금 마시게 하고 맥이며 호흡을 확인하고 다시 물을 마시게 하는 식으로 같은 과정을 끈질기게 반복했다.
마침내 침아의 입에서 콜록, 하고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늘었던 기침이 심해지면서 마셨던 물을 얼마쯤 토해 내긴 했지만 그 기침이 잦아들었을 때 침아는 자신을 안고 있는 이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주인님?”
“그래, 나다.”
오히려 침아보다 더 잠긴 목소리의 대답과 함께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죽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게 기뻤다. 이 약해빠진 인간의 여자아이가 자신을 향해 다시 말을 해준 것이 너무 기뻐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대체 내 피를 얼마나 말릴 작정이냐…….”
야단이 아니라 하소연을 하는 것 같은 그 말에는 물기를 머금은 웃음마저 감돌았다. 품에 꽉 안았던 침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료가 중얼거렸다.
“또 한 번 이리 내 속을 썩였다가는 그땐 정말, 내 정말로 너를…….”
할 말이 너무 많은데 할 수가 없었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침아의 얼굴이 두 개로 보였다 세 개로 보였다 하더니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료는 의식을 잃었다. 기절이란 것도, 오늘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었다.
침아는 말을 하다 말고 옆으로 기울어지는 료를 붙잡아주려 했으나 오히려 함께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주인님? 주인님, 왜 그러세요?”
그렇게 물으면서 침아는 손으로 료의 얼굴을 더듬었다. 싸늘하게 식은 료의 매끄러운 피부를 덮은 무언가 끈적거리는 것이 손에 닿았다. 대번에 무엇인지 깨닫고 침아는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코 가까이 댔다. 피비린내가 났다. 심각해진 얼굴로 침아는 료의 얼굴이며 머리를 두 손으로 만졌다. 끈적거리는 것이 묻어 있는 범위가 넓다.
침아는 몸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연기 때문에 더 침침하고 따가워진 눈을 지척에 있는 세우지의 물로 씻어냈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하고 고개를 들었다.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있다가 물기가 어느 정도 말라 눈을 뜨는데 버거움이 없어졌을 때, 침아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오른쪽 눈이 보인다. 중앙을 침범하고 있던 거무스름한 둥근 원이 사라졌다. 이미 나아가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은 데에 짐작이 가는 것은 있었다.
‘일곱 방울의 피. 그자는 대체…….’
내심 그자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침아는 일어섰다. 료에게 돌아오던 그녀의 발이 멈추었다. 똑똑히 보게 된 료의 모습에 이번엔 머릿속이 암전이 되었다.
료의 머리를 비롯해 어깨며 팔까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벽을 깨부수며 방으로 들어올 때 그 정도로 거세게 부딪쳤던 것이다.
겨우 침아는 걸음을 떼어놓으며 료에게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한이 드는지 그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침아의 어깨가 처졌다. 천천히 침아는 그 곁에 앉아 료의 몸을 안아 일으켜 힘겹게 제 품으로 감쌌다. 의식이 없는데도 료는 그녀의 따스한 품에 더 파고들려고 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침아가 질끈 눈을 감았다. 보지 않는 편이 더 마음 편하다는 듯이.
“……미안해.”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