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덫
“어르신, 큰도련님이 오셨습니다.”
“응? 벌써?”
격자문 밖에서 살짝 들여다보며 시녀가 아뢰는 말에 막 세수를 마친 화산 노파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 채 머리도 빗기 전이다.
“예, 조반을 함께 드시려고 오셨답니다. 어르신이 아직 아침 단장 전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돌아오마 하셨습니다.”
“원 이리 일찍부터 뭐가 그리 급해서?”
비록 사시(巳時)가 지났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야행성 습성을 지닌 그들 일족에게는 퍽 이른 시각이다. 화산 노파 역시 나이가 들어 잠이 많이 줄어서 이런 시각에 일어나게 된 것일 뿐, 한창때는 동틀 무렵 잠들어 오시(午時) 경에나 일어나는 것이 당연했었다.
“어쨌든 아침부터 적적할 일은 없겠군. 너희들도 이제야 내 시중을 드는 보람이 있겠구나.”
화산 노파가 얼굴을 닦으며 시중들던 시녀들에게 그리 말하자 모두 얼굴을 붉히면서 장난스럽게 킥킥거렸다. 어제 휘가 오고서부터 불현듯 이 객청에 드나드는 것들의 얼굴에 활력이 넘쳐나는 것을 화산 노파가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자, 대충 이 늙은이 추레함이나 면케 해다오. 그런 후에 가서 찬이라도 몇 가지 더 준비해야지. 휘는 그 잘난 외양만큼이나 혀도 잘났단다. 그 아이 눈이 딱 뜨일 만한 찬이 있다면 필경 누구 솜씨냐고 물을 게다. 너희들이 그럴 복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딱히 누가 나서서 화산 노파에게 종알거리는 아이는 없었지만 저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옷을 갈아입은 후 가벼운 아침 화장을 해주는 시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던 화산 노파가 언뜻 어제 아침 무렵의 일을 기억해 냈다.
“참, 오늘도 그 아이 일을 잊을 뻔했구나. 이래서야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한 내가 뭐가 되누. 자, 너희들 중 하나가……. 여기도 할 일이 있으니 게 보낼 심부름꾼을 찾아오든가.”
당장 누가 갈지를 두고 눈치를 살피는 시녀들의 모습에 화산 노파는 웃음을 삼키며 말을 바꾸었다. 이렇게 그저 행동만 봐도 속마음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어린 시절이 자신에게도 있었을까 하며 화산 노파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화산 노파가 보낸 심부름꾼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미 다른 이가 벌써부터 료의 거처로 걸음을 옮긴 후이다.
마당을 청소하는 낭속들의 부지런한 움직임도 아직 서쪽 채에는 미치지 않았을 무렵이다. 서쪽 채로 통하는 중문이 단단히 닫혀 있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열면서 휘는 길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지난밤 푸르스름한 달빛에 의지해 보았던 뜰을 아침에 보니 또한 신선했다. 아침 햇살이 바로 미치는 곳이 아니라 아주 환하지는 않았지만 이슬이 맺힌 갖가지 화초가 내뿜는 향기가 제법 싱그러웠다.
뜰을 지나는데 노랗게 핀 유채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손에 닿는 대로 툭하고 두어 송이 꺾어 향기를 맡으며 보니 그 옆으로 노란 제비꽃이 보였다.
“퍽 오랜만에 보는 듯한 느낌인데. 그래, 이 꽃도 나름대로는 어여쁜 구석이 있긴 했지. 향기는 볼품없지만.”
어렴풋이 누군가의 얼굴이 가물거리는 것도 같았다. 아마도 그에게 잠시 잠깐 정을 받은 뭇 여자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바로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여자라면 굳이 기억해낼 필요도 없다. 그런 여자는 앞으로도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면서 짐작했던 대로 료의 처소에 들어가는 데에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드나드는 이가 뻔하게 정해져 있는 현실에서 악착같이 문단속을 하고 사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다만 어젯밤 면전에서 창문을 닫아거는 광경을 본 마당이라 처소의 가장 심처에 이르렀을 때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망설임을 비웃으며 휘는 문을 안으로 밀었다.
삐걱거리며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에 휘는 안도했다. 그래도 잠귀가 밝다면 충분히 깨고도 남았을 터. 발을 내딛기 전에 휘는 짐짓 나지막하게 헛기침을 하였다. 혹시 방금 전 문 열리는 소리에 깨었다고 하면 이 기척만 내는 소리도 들을 것이고, 아니 깨고 계속 자고 있다가 놀라 깨는 것이라 하면 자신은 분명 크게 기척을 냈노라 주장할 심산이었다.
겹겹이 처진 발을 조심스럽게 헤쳐 나가는 동안 휘는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세심히 귀 기울였다. 고요했다. 이곳에서 움직이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확신이 강해져 갔다.
“혹 이미 기침한 것인지…….”
그답지 않게 도둑고양이 흉내를 내었는데 방이 텅 비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멋쩍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섣불렀다.
침아는 거기에 있었다.
열 명이 눕는다 해도 여유로울 정도로 커다란 둥그런 담비털 보료에 홀로 누워있는 침아의 모습이 유난히도 작아 보였다. 그녀는 새하얀 료의 깃옷을 이불처럼 걸치고서 자색 비단 베개에 얼굴의 반을 묻고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내쉴 때마다 깃옷 밖으로 드러난 하얀 어깨가 들썩였다가 가라앉았다. 활짝 편 부챗살처럼 펼쳐진 머리카락이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도 어찌나 반짝이는지 휘는 자못 신기하여 좀 더 자세히 볼까 하고 한쪽 무릎을 굽히며 다가앉았다.
머리카락도 머리카락이거니와 가까이 대하자 더욱 또렷해진 향기는 어떠한가. 휘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그다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손을 뻗어 침아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면서 침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오른편을 보고 고개를 돌린 자세를 취하고 있어 오른쪽 얼굴만 고스란히 보였다.
가만히 바라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 어떤 결점도 없다. 침아의 오른쪽 얼굴엔 그 흔한 점 하나조차 없었다. 그걸 확인하니 왼쪽 얼굴의 흠이 더더욱 아쉽지 싶다.
“이렇게 고운 바탕인데 대체 어쩌다가…….”
머리카락을 놓은 손이 자연스럽게 뺨을 어루만졌다. 붉게 혈색이 감도는 뺨은 뜨겁다 싶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리 체열이 높은 아이이니 료가 한사코 침석을 같이 하는 이유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가시지 않는 냉기를 그 녀석은 이 아이를 품어서 녹이는 것일까.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저도 모르게 은근한 뜻을 품고 목덜미로 흘러내려갔을 때, 침아의 눈가가 움칫하더니 퍼뜩 뜨였다.
“……주인님?”
슬쩍 미간을 찡그리며 묻는 목소리에 휘는 다만 입술을 말아 올리며 침묵했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침아가 머리를 들었다. 사르륵 쏟아지는 머리카락 속에서 다시금 그녀가 물었다.
“주인님?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눈으로 확실히 보지 못하면 네 주인조차 구별 못하나 보지?”
조롱하는 듯한 그의 질문에 침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옆에 앉아 있는 이가 휘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침아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예서 무엇 하십니까?”
“나는…….”
입을 열던 휘는 침아의 흐트러진 차림에 시선을 뺏겨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옷을 입고 있긴 하였다. 흡사 매미의 날개라도 되는 양 얇은 속적삼은 그녀의 속살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그 안쪽에 두렁이도 걸치지 않아, 영글어가는 어여쁜 가슴의 형태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침아는 뒤늦게 자신의 차림을 깨달은 듯 황급히 깃옷을 들어 앞쪽을 가렸다. 안 그래도 붉었던 뺨이 더욱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휘는 의외란 듯이 웃었다.
“이제 와서 그리 놀라는 것은 또 무어냐? 어제 내 너의 다 벗은 몸도 보았거늘. 나만 본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건만 태연자약하기만 하더니 지금 이리하는 건 어찌 보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것은 영역의 문제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이 침아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휘가 말했다.
“알아듣게 설명을 해 보아라.”
우선 침아는 무릎걸음으로 뒤로 더 물러난 후 깃옷을 걸쳤다.
“세우지는 오가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그런 곳에서 다 벗고 멱을 감으면서 누가 나타났다고 일일이 비명이나 질러대는 것이 더 우습지 않습니까. 제가 그곳의 주인도 아닌데 말이죠.”
“한마디로 개방된 영역이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곳은 폐쇄된 영역이라 이거군?”
침아가 고개를 똑바로 들어 휘 쪽을 보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정확히 그의 얼굴이 있는 곳을 가늠하더니 말했다.
“큰도련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이곳은 폐쇄된 곳입니다.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제 주인과 저, 그리고 제 주인의 허락을 받은 이여야 합니다. 큰도련님은 그 어떤 경우도 아니시지요. 그러니 나가주십시오.”
그녀가 손을 들어 문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휘의 미소가 깊어졌다. 이리 당당하게 자신더러 나가라고 하니 오히려 더 늑장을 부리고 싶어졌다. 몸을 일으켜 돌아서는 척하다가 빙글 돌아서서 성큼성큼 침아에게 다가가 그녀가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아이야, 나는 딱딱대는 암컷은 좋아하지 않아.”
“그러십니까?”
그것이 뭐 어쨌냐는 듯 심드렁한 그녀의 말투가 묘하게도 자극적이다. 턱을 쥔 손가락을 스윽 움직여 야릇하게 그녀의 턱 아래의 부드러운 살을 쓰다듬으며 휘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암컷이라면 낭창낭창하게 휘감겨드는 맛이 있어야지. 네가 수컷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는구나.”
침아의 입가 한쪽이 위로 슬쩍 치켜 올라갔다.
“큰도련님께선 재미없는 말씀만 하시는군요. 머리가 썩 좋지 않으신 편이신가요?”
“무어라?”
“아무 수컷에게나 휘감겨드는 암컷에게 무슨 매력이 있습니까? 그리고 수컷도 수컷 나름이지요.”
“호오.”
“이것도 알아듣게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표정이며 행간에 담긴 뜻이 재미있다. 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 하라는 반응을 했다. 침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숨을 쉬었다. 또 하나의 몸짓 언어였다.
“수컷이든 암컷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제 눈에 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유로 이곳저곳에 순간의 정을 흘리고 다니는 것처럼 너저분한 일이 없지요. 다정(多情)하다는 말은 제게는 박정(薄情)과 다를 바 없습니다. 딱딱대는 암컷이 싫다 하셨습니까? 그것은 상대가 큰도련님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 말뜻은 상대가 다르면 네 태도도 달라진다는 뜻이렷다?”
“바로 그러합니다.”
“그럼……내가 료가 되지 않는 이상 네 낭창낭창한 태도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게로구나?”
그 말에 침아가 풋 웃음 짓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아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휘가 다시 물었다.
“그 웃음은 어찌 해석해야 하는 것이냐?”
“정말로 머리가 안 좋은 분이십니다. 어찌 제 행동 하나하나에 설명을 해드려야 합니까?”
그 말투하며 곁눈으로 흘겨보는 도발적인 시선이라니! 그에겐 낭창낭창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침아에겐 요부의 자질이 넘실거림을 휘는 확신했다. 마치 누군가와 한창 수작을 주고받을 때처럼 어쩐지 안달이 나서 휘가 그녀의 말을 재촉했다.
“말해 보렴. 어찌하여 웃은 것이야?”
“하필 예로 든 분이 제 주인이라 그렇습니다. 어찌하여 제가 제 주인을 수컷으로 대하여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야……그 녀석은 수컷임이 자명하지 않으냐?”
“알고는 있지만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자, 설명이 되었습니까? 그럼 이제 그만 나가주시지 그러십니까? 잠을 더 자든 옷을 갈아입든 하여야겠습니다만.”
그러면서 침아가 자연스레 그의 손을 깃옷 소매로 밀어냈다. 쌀쌀맞은 말투와 달리 그런 행동 하나하나는 무척이나 교태로웠다.
침아의 새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휘는 문득 자신의 오른손에 여전히 쥐어진 유채꽃을 확인했다. 그것을 툭 침아의 뺨에 대며 말했다.
“잠은 그만 자도록 해. 데리러 온 것이다. 함께 화산 할머님에게 가서 아침을 들자꾸나. 료가 널 보살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갔다 하던데.”
침아가 뺨에 닿은 꽃을 넘겨받았다. 향기로 유채임을 알아보고 빙그레 웃더니 꽃송이로 가만가만 입술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소세 후에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기다리실 요량이십니까?”
“혼자 돌아가려고 예까지 부러 왔겠느냐?”
“퍽 한가하십니다.”
“누구 말처럼 박정하여 그렇구나.”
비꼬는 소리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눙쳤더니 침아가 유채꽃을 보고 그런 것처럼 휘를 향해 빙긋 웃었다. 참으로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진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인간도 있던가 휘는 생각했다.
“정 그러시다면 뜰에 나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오래는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곳은 폐쇄된 영역이 아닌 모양이지?”
나갈 생각 없이 자꾸 말을 건네는 휘에게 침아가 싫은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또 무어라 제가 답하면 이번엔 그 말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실 테지요? 그다지 재미도 없을뿐더러 대꾸해야 하는 이 몸도 성가십니다. 나가는 문이 안 보이는 건 아니시지요?”
다시금 나가는 문을 가리키는 침아에게 휘가 두 손을 들었다.
“오냐, 오냐. 그리 무안을 주는데 버틸 재간이 없구나.”
선선히 발을 내딛으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첫 번째 발을 지나가기 전에 잠시 뒤돌아보았더니 침아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소매로 절반쯤 가리는 시늉을 했어도 벌어진 붉은 입술을 보기엔 충분했다. 그런 무방비 상태의 얼굴도 밉지 않다.
잠시 서 있었더니 그의 발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었던 듯 침아가 문가를 보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어찌 나가지 않고 섰느냐 쏘아붙일 듯한 표정에 휘는 쿡 웃음 지으며 결국 발을 헤치며 방을 나갔다. 문 앞에 이르러 문을 안쪽으로 잡아당기는데 뒤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따운 그 아가씨 오얏나무 숲에서 나를 기다린다 하였다네.
간밤 비에 시내가 불어 못 오실까 근심이네 그 아가씨 어찌 올까.
고운 꽃신 품에 안고 치맛자락만 살짝살짝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못 오실까 근심이네 못 오실까 근심이네 그 아가씨 어찌 올까.
복도에 나선 후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침아가 곁방 중 하나로 들어갔는지 노래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지난밤의 우울한 노래에 비해 아침에 부르는 노래는 퍽 앙큼하기도 하다.
저 아이는 료에게도 저런 노래를 매일같이 불러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부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휘는 복도를 걸어갔다.
뜰에 나선 휘가 유채꽃을 보고 선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윽고 나무 마루를 밟고 오는 침아의 발소리가 들렸다. 신을 신고 뜰로 내려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을 보고 휘가 웃으며 말했다.
“료는 공연한 걱정을 한 듯하구나. 너는 지나치게 편해 보여 도무지 눈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예, 저는 어련히 알아서 잘합니다.”
치맛자락을 정돈해 매무새를 다듬으며 침아가 태연히 대꾸하는 것에 휘는 또 한 번 실소했다.
“너는 겸손이란 말을 모르느냐?”
“압니다.”
“그런데 아는 걸 전혀 써먹지는 않나 보지?”
그제야 침아가 휘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두 번 깜박거렸다. 이윽고 대답했다.
“제 주인님께선 솔직함을 가장 중요시 여깁니다만, 큰도련님은 그게 아니신 모양이지요. 아까 낭창낭창 어쩌고 하신 말씀도 그렇고. 알겠습니다. 맞춰보도록 하지요. 늘 보고 사는 사이도 아닌데.”
“그 소리가 늘 보고 살지 않아 다행이란 말처럼 들리는구나.”
“큰도련님께 어찌 들리는지까지는 제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요.”
맞춰보겠노라 해놓고 대번에 쌀쌀맞은 대꾸를 하는 침아 때문에 휘가 고개를 내젓지 않을 수 없다. 웃음이 나긴 하는데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어오는 그녀에게 휘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주마.”
침아는 그 손을 분명 의식했을 텐데도 그의 넉넉한 소맷자락 끝을 약간 잡는데 그쳤다. 속으로 이 녀석 봐라? 하면서 휘는 침아의 손을 굳이 손에 쥐었다.
“호오, 여전히 이 손 뜨거운 것 좀 보시게. 료 그 녀석, 화산 할머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입이 닳게 해도 부족하겠구나.”
침아는 잠자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기 쪽으로 손을 잡아당길 때 오히려 휘가 강하게 팔을 당기는 바람에 침아가 휘청거렸다. 균형을 잡기 무섭게 침아는 더 분명하게 힘을 주어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 했고 휘는 호락호락 그녀를 풀어주는 아량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말없이 힘겨루기가 반복되었다. 결과는 뻔했다. 침아가 마침내 미간을 찡그리며 손의 주인을 쏘아보자 휘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네 지금 상전의 뜻을 기어코 꺾겠다는 뜻이냐?”
그 말에 대한 침아의 대답이 일품이었다.
“스스로를 제 상전이라고 착각하시는 어리석음을 어쩌면 좋습니까?”
생글, 웃기까지 했다. 휘는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내 너처럼 오만방자한 것을 본 적이 없구나. 내게 암컷을 때리는 데에 취미가 없는 것이 네겐 오죽 다행이냐?”
“때리지 않는 것을 자랑삼아 말씀하십니다만, 힘을 써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금도 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휘가 침아의 손을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이번엔 내가 졌다. 료는 알고 보니 굉장한 것을 키우고 있구나. 아니, 료가 키워서 너 같은 것이 만들어진 걸까?”
침아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다시 침아가 그의 소맷자락 끝을 잡아왔고 둘은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물러났으나 휘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료가 손을 잡아도 방금처럼 질색을 하며 뿌리치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리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아직은? 언젠가는 뿌리칠 수도 있다는 소리냐?”
“상황이 달라진다면 말입니다.”
“어떤 상황이 오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아서라, 또 그 소에게 혼쭐이 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송 아저씨도 아마 잠자코 있을 것입니다. 제 주인께서 혼인을 하시면 당연히 신부 되신 분을 존중하시겠지요.”
신부라는 소리에 별수 없는 암컷이라고 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 정실의 투기를 걱정하는 거였군. 하긴 암컷의 질투는 때로 격렬하긴 하지. 그래도 료가 너 하나 보호하지 못할까?”
“대체 어째서…….”
문득 침아의 목소리에 강렬한 불쾌감이 실려 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침아의 얼굴을 보았다. 냉기를 넘어 혐오라 할 만한 수준의 감정이 오른쪽 눈을 통해 분명하게 뿜어져 나왔다.
“수컷 하나에 암컷 여럿이 매달려 서로 투기 따위를 해야 하는 겁니까? 제 주인이 절 보호해야 할 상황 따윈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애당초 신부가 될 이와 다툴 뜻이 전혀 없습니다.”
남다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면서 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너는 인간이다 보니……. 아니지, 인간들 세상에서도 그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지위가 있고 돈깨나 있는 사내는 축첩을 하기 마련이다. 너희들은 자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주의이지 않던가?”
“그런 일은 저는 모릅니다.”
딱 잘라 대꾸한 침아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어렴풋이 보이는 노란 꽃들을 보면서 엉뚱한 것을 물어왔다.
“화산 어르신께서 꽃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나? 싫어하시진 않을 것 같다만 그건 왜 묻느냐?”
“유채꽃을 좀 꺾어가야겠습니다. 이 꽃은 이 근방에선 쉬 볼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흔하다더군요.”
“좋을 대로 하렴.”
굳이 하지 말라 말리지는 않았다. 침아가 한아름의 꽃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휘가 넌지시 침아의 속을 떠보았다.
“너는 신부 될 이와 다툴 뜻이 없다 하지만, 과연 료도 그리 생각하겠느냐?”
“제 주인께선 제가 원하는 것은 결국에는 다 들어주십니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구나.”
“충분히 답이 됩니다.”
“네가 사내의 욕심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품고 싶은 계집이 있을 때 사내가 계집의 사정 따위를 봐주는 줄 아느냐?”
그 말에 침아가 잠시 손을 놓고 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사내도 사내 나름이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계집도 계집 나름이지요.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뭣하나, 제가 좀 독합니다.”
“후훗, 네 말대로 네 입으로 할 소리는 아니구나. 고작 열대여섯 살 먹은 계집이 그런 소릴 하니 퍽도 무서워 보인다.”
휘가 빈정거리긴 했지만 기분 나쁜 야유까지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까마득히 어린 계집애를 귀엽게 여기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침아는 말없이 유채를 몇 송이 더 꺾은 후에 스윽 주변을 살피나 싶더니 지난번에 산에서 데려온 제비꽃을 찾아냈다. 다가가 앉아 노란 제비꽃이 무사히 크고 있는 것을 손으로 확인하면서 얼마쯤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일 년을 살면 일 년을, 백 년을 살면 백 년을, 천 년을 살면 천 년을 오로지할 반려가 어찌 한 존재에게 여럿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제 사내가 다른 계집에 정신이 팔려 저를 잊는 그런 무참한 일을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내 없이 평생을 살지언정 그런 꼴은 보고 살지 않을 겁니다.”
“어린것답게 꿈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백 년의 시간이 입에 담고 보니 짧은 것 같으냐? 지나보니 짧은 듯도 하지만 살면서는 길었다. 그리고 마음이란 것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기 마련이었다. 천 년? 그 긴 시간을 오로지 한 존재와? 그러다 죽는다면 늙어 죽는 게 아니라 지겨워 죽는 것이겠다.”
코웃음 치는 휘의 말에 침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더니 어쩐지 풀기가 사라진 말투로 물었다.
“백 년도 길고 천 년도 길다 하시면 십 년은 어떠십니까? 다만 십 년을 한 명에게 바치는 것조차 진저리난다 하실 것입니까?”
“십 년이라. 그 역시 길다만. 과연 이 세상에 십 년이나 보고 살아도 첫날처럼 애정이 느껴질 계집이 있기나 할지 의문이구나.”
“참으로 변덕스러운 분이시군요.”
“지루한 걸 못 견디게 타고난 걸 어쩌겠느냐? 날개 달린 것들치고 진중함을 장점으로 삼는 자들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있다 해도 나는 것이 힘에 부칠 만큼 늙은 자들일 뿐이지.”
“제 주인 또한 그러합니다.”
“그거야 그 녀석은 태생부터가…….”
휘는 무심코 내뱉으려던 말을 중도에 깨닫고 그쳤다. 그가 빙긋 웃더니 침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그 녀석이 네게 본모습을 보여주던?”
침아는 고개를 저었다. 휘의 눈이 심술궂게 빛났다.
“그럼 내가 말해 주면 그 녀석에게 도리가 아니구나. 뭐 그 녀석 성격상 네가 늙어 죽도록 입을 안 열 가능성이 농후하다만……. 아, 그보다 먼저 우리가 어떤 종족인지는 알고 있느냐?”
역시 침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조차 몰라? 왜, 우송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단 말이냐?”
침아가 완성한 꽃다발을 품에 안고 일어났다. 왼손에 든 꽃다발 말고 오른손에는 노란 제비꽃이 한 송이 꺾여 있었다.
“누구도 가르쳐준 적 없고, 누구에게도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덤덤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더니 불쑥 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어냐?”
“모르십니까? 제비꽃입니다. 노란 것이 예쁘지요?”
“이것을 내게 준다는 것이냐?”
“예.”
“왜?”
“아까 받은 유채꽃에 대한 답례입니다.”
“그건 네게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머쓱하긴 하였으나 그렇다고 주는 꽃을 마다하지도 않았다. 휘가 제비꽃을 받자 침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이지요.”
“무엇이 그런 것이란 거냐?”
“어쩌다 보니 건넨 꽃 한 송이를 받은 날이 어떤 이에게는 그 전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날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가진 것들에게는, 때로 그런 일도 있어요.”
물끄러미 침아를 쳐다보던 휘가 중얼거렸다.
“너는 참으로 이상한 인간이다.”
침아는 더욱 깊이 웃었다. 유난히도 반짝이는 까만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노란 제비꽃이 참 어여쁘지 않습니까? 저는 이 꽃을 정말로 좋아한답니다. 큰도련님께선 어떠신지요?”
아침을 들고 돌아가는 길도 휘가 침아를 데려다 주었다. 그럴 것 없다는 침아의 거절에도 휘는 미소 띤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다. 먹은 걸 소화시킨다는 이유로 휘가 지름길이 아닌 에둘러 돌아가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침아는 머릿속에 익혀놓지 않은 길을 가느라 휘의 옷자락을 꽉 잡고 신중하게 발을 디뎠다.
그러면서도 휘가 자꾸만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시큰둥하게나마 대꾸할 일이 계속 되었다. 지난 몇 년간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것을 오늘 다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수다스럽고, 무어라 침아가 대답만 하면 웃느라 바쁜 휘를 모르는 자가 봤으면 허우대 멀쩡한 불출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 보기 드문 휘를 옆에 두고도 한결같이 뚱한 표정으로 발치에만 집중하는 침아도 대단한 배짱이었다.
먼저 이들을 발견한 것은 가진 쪽이었다. 가진과 가선 자매는 기침이 늦어 따로 조반을 들고 뒤늦게 화산 노파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막 나선 길이었다.
“어머, 휘 공자님이시네. 어딜 가시는 걸까?”
“곁에 그 아이가 있어요.”
먼저 화사한 자주색 도포를 입은 휘의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가선은 그 곁에 있는 침아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언니를 돌아볼 때의 표정은 달랐다.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인사는 해야겠지요?”
“글쎄, 어차피 이따가 뵙게 되지 않을까?”
“그때는 그때이지요. 왜 그래요, 언니? 답지 않게 수줍음을 타는 거예요?”
“어머, 누가 얌전을 떨어서 그러는 줄 알아? 참나, 공자님! 휘 공자님! 여기요! 네, 저랍니다! 밤새 잘 주무셨어요?”
슬쩍 도발하자 바로 넘어간 가진이 소리 높여 휘를 불렀다. 휘가 돌아보자 치맛자락을 쥐어 들고선 미끄러지듯이 빠르게 그에게 걸어가며 낭랑하게 인사를 건넸다.
가선은 언니를 뒤따르기 전에 재빨리 정에게 물었다.
“내 차림 어딘가 이상하진 않지?”
일산을 쥔 손잡이 너머로 정은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고우십니다.”
정의 확인에도 가선은 옷차림을 재삼 살피고 귀밑머리도 쓸어 만져보고서야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휘에게서 걸음 몇 보를 남긴 곳에 이르자 가선은 아침부터 부산하게 떠들어대는 언니의 행동이 곤혹스럽다는 듯이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한편에 얌전히 섰다. 휘가 화산 노파에게 다녀오는 길이라며 가진과 이야기를 하다가 시선을 가선에게 던졌을 때에도 가선은 짐짓 모르는 것처럼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안색이 어제에 비해 창백하신 듯하오만, 어딘가 불편하신 건 아니오?”
휘가 그리 말을 건네 오자 가선은 뺨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불편한 곳은 없습니다만…….”
“흠. 어제 노을에 비낀 모습을 보아 더 혈색이 있는 걸로 보았나 보구려. 해당화인 줄 알았는데 수선화에 가까우신 모양이오. 발간 해당화가 흐드러지면 외려 창백한 수선화가 정취가 있는 법이지.”
“어머, 아무리 애를 써도 수선화가 될 수 없는 저 같은 경우는 어찌하나요. 억지로 아프라고 며칠 칩거를 해야 하나?”
가진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해쭉거리며 웃느라 바빴다. 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낭자 같은 분은 저 지하 동굴에 연금이 된다고 해도 무언가 재미난 것을 찾아서 웃고 계실 듯하오만. 제아무리 창백해져도 수선화는 못 되겠소이다.”
“야속한 말씀이십니다. 저라고 시도 때도 없이 웃고만 있겠습니까?”
가진이 보란 듯이 웃음을 뚝 그쳤다. 하지만 입술을 뚱하니 내밀고 짓는 심각한 표정도 얼마를 못 가 자취를 감추고 히쭉 웃고 말았다.
“아아, 전 안 되는군요. 그냥 평생 웃고 사는 해당화나 하렵니다. 어머, 내 말이 그리 재미있니? 그러고 보니 너도 나처럼 해당화과로구나. 이 잘 익은 사과 같은 뺨 좀 봐.”
침아는 기척을 되도록 죽이고 있는다는 게, 가진의 재잘대는 목소리에 그만 흐뭇한 미소를 지어 가진의 주의를 끌어버렸다. 가진이 다가와 침아의 뺨을 꼬집듯이 만져보았고 바로 호들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너는 참 따끈따끈하구나? 향기만 좋은 줄 알았더니 어찌 이리 따뜻할까? 아, 난 겨울에 추위를 몹시 타는데 어디서 너 같은 아이 하나만 얻어서 이불 속에 넣고 자면 꼭 좋겠다.”
그러면서 덥석 침아를 끌어안는 바람에 침아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킁킁 냄새를 맡던 가진이 침아에게 또 엉뚱한 걸 물었다.
“혹시 새끼를 낳으면 내게 주지 않으련? 내 암수 가리지 않고 아주 귀여워하면서 죽을 때까지 잘 보살펴 줄게. 응?”
휘는 침아가 어떤 쌀쌀맞은 대꾸를 해줄지 내심 기대했는데 들려오는 침아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낳아서 드리고 싶은데, 제 주인께서 허락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나, 네 주인 말이지. 음. 그것이 난관이로구나.”
생각해 보니 료가 허락을 해줄 리 없구나 싶어 가진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예 내가 네 주인께 시집을 갈까나?”
“어, 그럼 큰도련님은 어쩌시고요?”
“음. 이분께는 내 동생이 시집을 가면 되지. 해당화보다는 수선화가 좋다지 않니.”
침아가 이를 드러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뿐 아니라 손을 들어 가진의 얼굴에 손을 대며 말했다.
“아씨는 참 귀여운 분이시군요. 목소리뿐 아니라 자태도 고우실 텐데 당장 보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그녀의 말에 휘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배까지 끌어안고 웃었다.
“대체 화산 할머님께선 어찌 이런 희한한 것을 구하셨을까. 들으셨소? 이 어린것이 낭자를 보고 귀엽다 칭찬하는 소리 말이오.”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던 가진도 깔깔거리며 휘의 즐거움에 동참했다.
“잘 들었지요, 아무렴요. 아무래도 저는 정말 공자님 동생분께 시집을 가야 할 모양입니다. 휘 공자님은 잘생긴 얼굴뿐이지만 료 공자님께는 이런 재미난 것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어떠냐, 가선아? 네가 휘 공자님께 시집가지 않겠니?”
농과 진담의 경계가 없는 언니이다 보니 가선은 당혹스런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가선이 체통을 지켜야 할지 그들의 웃음에 끼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휘가 가진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꼭 이 아이가 달려야 혼사를 생각해 보겠다 하시면 이 몸에게도 기회를 주심이 어떻겠소? 동생이 돌아오면 내 한 번 머리를 굽혀 사정해 볼 용의도 있소만.”
“어머, 청초한 수선화 앞에서 해당화 따위 알 바 아니라고 하신 분이 어찌 그런 소릴 다 하십니까?”
“귀여운 분께서 이 몸의 뜻을 곡해하셨소이다. 그늘 속 창백한 수선화의 아름다움이 어찌 환한 햇살 속 해당화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겠소이까? 이 몸은 욕심이 많아 그 어느 둘 다 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지요.”
“정말로 욕심꾸러기신가 봅니다. 얄밉기도 하시지.”
생글거리면서 그런 말을 해보았자 다른 의미론 추파일 뿐이다.
침아는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통해 함께 자리한 이들의 기분을 헤아려갔다. 그러다 너무 조용한 것이 신경 쓰여 가선이 서 있는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흐릿한 시야 끄트머리에서 가선의 시선과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자, 바로 시선을 거두긴 하였다.
그때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낭속 하나가 있어 휘에게 인사를 해오자 침아가 기회는 이때란 생각에 휘의 옷자락을 놓고 그 낭속에게 길 안내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데려다 준다 하지 않았느냐.”
“세 분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폐는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만하면 온정은 충분하셨습니다. 아니, 넘치셨지요.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정중했지만, 여전히 쌀쌀맞은 기운이 근저에 깔려 있는 말투로 인사를 마치고 침아는 다른 이와 함께 가버렸다. 돌아서서 가는 모습에서 후련한 기색이 읽혀서 휘는 또 웃었다.
“볼수록 묘한 아이야.”
“유난히 신기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처럼 만난 지 며칠 안 된 것도 아니고 예서 지낸 지 몇 년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가진의 질문에 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물론 그렇소만 실제로 만난 날수를 헤아리자면 그대들과 비교해 더 나을 것도 없소. 저 아이는 워낙에 료가 끼고 도는 통에 말이지. 내 처음에 저 아이를 만났을 때 누대에 홀로 있는 걸 보고 말을 건 바람에, 저 아이가 한겨울에 세우지에 빠져 죽을 뻔하지 않았겠소?”
“예? 말을 걸었을 뿐인데 어찌하여……?”
“사내 녀석의 투기가 그 정도라면 믿으시겠소?”
“투기라면, 작은 공자님께서? 세상에.”
가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휘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어 턱을 만지며 말했다.
“어린 동생과 그런 일로 다투는 것도 형 체면에 할 일이 아니고 해서 이후론 말을 섞은 일조차 거의 없소이다. 지금만 해도 저 아이의 눈을 살펴봐주고 싶긴 한데, 내 멋대로 낫게 했다가 또 무슨 경을 칠지 몰라 내버려두고 있는 형편이니.”
“하지만 저 아이의 눈이 나으면 당장 작은 공자님께도 좋은 일이 아닌가요?”
“그건 그대처럼 귀여운 분의 생각이시지. 저 아이 얼굴 흉터를 보시었소?”
“머리카락으로 잘 가리고 있는 터라 아주 보지는 못하였으나 대충이라면이요.”
“계집애에겐 안 됐다 싶어 처음 보았을 때 고쳐줄까 하고 물었더니 그마저 거절하였지.”
“어찌 그러셨을까요?”
가진의 순진한 질문에 휘는 고개만 갸웃하고 말았다. 나도 그것이 궁금하다는 듯이. 하지만 이미 그의 암시는 전해지기 충분했다. 여태 잠자코 있던 가선이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척 애지중지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로군요. 한창 예쁠 무렵인데 저리 지내는 것을 내버려두다니. 그리 큰 노력이 필요한 일도 아닐 텐데 말지요. 역시 인간의 일이다 보니 료 공자님께서도…….”
자못 가여운 듯이, 하지만 이해 못할 일도 아니란 듯이 말하며 침아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는 가선의 행동에 가진도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눈가를 찡그렸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섣부른 단정은 할 수 없지. 의외로 저 아이도, 료 공자님도 흉터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걸 수도 있잖아? 그런 게 상관없을 정도로 아끼는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을까? 내게 저런 흉터가 있는 건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지만, 있다손 쳐도 개의치 않고 아껴주는 이가 있다면 무척 감격스러울 거야.”
퍽 사려 깊고 상냥한 말이었다. 또 한 번 자매의 뜻이 엇갈렸다. 가진을 보는 휘의 눈빛이 가선에게는 방금 전보다 더 진지해 보였다. 그의 주의를 언니에게서 떼어놓을 만한 것을 찾던 가선에게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꽃은 어쩌다 거기에……?”
“맞다, 맞다. 저도 아까 그걸 보고 묻는다는 걸 깜박했습니다!”
가선의 질문에 가진도 눈을 빛내며 휘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그 손의 중지에 생뚱맞게도 노란 제비꽃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아, 이것이라면…….”
겸연쩍어하기는커녕 자매에게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들어 보이며 휘가 빙긋 웃었다.
“보시다시피 노란 제비꽃이라오.”
“꼭 반지처럼 하고 계시니 이상한 걸요!”
히쭉거리는 가진의 웃음에 휘 역시 웃으며 말했다.
“반지처럼이 아니라 반지라오. 인간의 어린 계집애들은 이 꽃으로 이런 장난을 즐긴다 하면서 시들기 전에 내버리면 이 제비꽃에게 저주 받을 거란 소리도 들었지.”
“어머, 어쩐지 눈에 익다 했는데 역시 그 아이가 준 것이로군요? 어렵게 발견한 것이라며 제가 달라 했을 땐 퇴짜를 놓았는데.”
가진이 다소 약이 오른다는 듯이 말하자 휘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런 일이 있으셨소?”
“정확히는 료 공자님께서 퇴짜를 놓으셨습니다만. 하여간 아쉽군요. 이리 보니 제법 예쁜데……. 오늘은 나가서 제비꽃이라도 찾으며 소일을 할까.”
바로 아쉬움을 털고 제 손으로 제비꽃을 찾을 생각을 하는 가진과 달리 가선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료 공자님께서 돌아오셔서 찾으시면 어쩌려고 둘밖에 없는 것에서 하나를 줘 버렸을까. 어제 일도 그렇고, 인간은 본디 그처럼 당돌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맞소, 당돌하지 그 아인. 그리고 가선낭의 의문에 대답하자면, 그 아이는 인간이라 당돌한 것이 아니라오. 적어도 나는 그 같은 인간을 본 적이 없소.”
단정과 함께 휘가 자신의 노란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하물며 저 비슷한 여자도 본 적이 없지.”
그날 오후 난씨 자매는 저택을 벗어나 남쪽 숲으로 답청을 나갔다. 제비꽃을 찾겠다는 가진의 말은 말에 그치지 않아서 오늘 그녀의 악사들은 악기를 놓아두고 제비꽃 수색에 동참했다. 진두지휘를 하는 가진의 낭랑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가선은 휘적휘적 숲으로 들어갔다. 뒤따르는 정이 몇 번이고 발밑에 주의하시라는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면서 빠르게 걸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무작정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가 피곤해졌던지 가선이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정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앉으며 등을 보였다.
“업히시지요.”
평소라면 당연하다는 듯 업혀올 가선인데,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등에 업히는 무게가 없다. 정이 돌아보았더니 가선이 부루퉁한 얼굴로 땅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씨.”
“시끄러워!”
높은 목청에 정은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정이 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씨?”
“떼어내겠다고 했잖아!”
비로소 가선이 정의 눈을 쳐다보았다. 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을 꺼낸 게 며칠이나 됐냐고 묻는 대신 정은 다른 질문을 했다.
“정확히 누구로부터 떼어내길 바라십니까?”
“그거야…….”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가선이 우물쭈물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저 집에 그것이 있다는 자체가 싫어. 대체 뭐지? 료 공자님도, 휘 공자님도 그따위 인간의 일에 왜 그리 관심을 보이시는 건데? 향기가 조금 유별나다는 것 말고 어디가 어여뻐서? 그 흉측한 흉터는 내 눈에만 보이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인간이야! 고작해야 반백 년 살면 추하게 늙어 죽는 인간이란 말이야.”
“아씨 말씀대로입니다.”
정은 가선의 칭얼거림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향기가 조금 좋을 뿐, 못난 흉터를 가진 보잘것없는 인간입니다. 반백 년에서 고작 얼마쯤 더 살겠지요. 그보다 전에 십 년, 멀게 내다봐도 이십 년 내로는 그 얼굴에 주름도 생기고 쇠해가는 흔적이 생길 것입니다. 어차피 아씨나 공자님들과는 사는 시간대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뭐야?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데?”
“그런 아이에게 아씨가 이토록 신경을 쓰실 것은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게다가, 아씨의 마음은 이미 휘 공자님께 기울지 않으셨습니까?”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지없이 심중을 간파한 정의 말에 가선은 뜨끔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저 자신도 잘 헤아릴 수 없는 심사에서 가선은 찰싹 정의 뺨을 때리며 화를 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가 언니를 제치고 그분을 빼앗기라도 할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하면서 날 만류하는 걸 보니 너 혹시 그 인간의 아이에게 마음이라도 뺏긴 거 아냐?”
맞은 뒤에도 별다른 표정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던 정이 그 말에 가선을 쳐다보았다. 가선은 자신의 입을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물가에서 그 아이를 보고 네가 난처해하는 게 좀 유난하다 싶었지. 정작 같은 새인 아이들을 보고선 눈 하나도 끔쩍 않더니 인간의 암컷에게 구미가 동하다니, 실은 인간으로 살고 싶었던 거 아니야? 네 아비가 그랬듯이 너도 인간 여자를 얻고 싶다면 그렇게 해, 말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 저택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흉측한 아이는 내가 보기 싫어서 곤란해.”
굳게 입을 다물고 가선을 쳐다보던 정이 그녀의 긴말이 끝나자 물었다.
“하실 말씀은 그것뿐이십니까?”
“……더 있어!”
표정만으로는 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선은 헤아릴 수가 없다. 정이 그녀의 수행 시종이 된 것도 서른 해가 넘었건만.
둘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한 저택에 살면서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사이다. 정의 아버지는 가선의 아비의 어린 시절부터의 벗이자 오랜 충복이기도 하다. 그런 관계가 자식들에게도 대물림되기를 바랐지만 가선의 부친은 딸만 둘을 얻었고, 근래에 겨우 아들 하나를 보았다. 그 어린 후사는 정의 형이 보필할 것이다. 서자에, 어미가 인간이기까지 한 정은 이미 예전에 가선을 호종하는 일을 맡았다. 가선의 뜻이 배후에게 크게 작용했던 일로 정이 어떤 심정으로 그녀를 모시게 되었는지 물은 적은 없다.
다만 그는 충직했다. 가선의 뜻을 거스른 일은 거의 없다. 거스른 경우가 있다면 그 뜻대로 했다간 가선에게 명백히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판단하에서였다. 돌이켜보면 그의 판단은 모두 옳았다.
이번 일도 그가 말린다면 듣는 편이 좋을 거라는 걸 가선도 속으로는 알았지만 자꾸만 어깃장을 놓으며 생떼를 쓰고만 있었다.
“네가 떼어내 주겠다고 약속했어. 싫다는 것을 억지로 을러댄 것도 아니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어 못하겠다고 하는 거야?”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할 이유를 도무지…….”
“내가 싫다잖아! 그 아이가 싫어, 나한테도 언니한테도 훼방만 될 거란 느낌이 와. 너는 내 속에 들어와 보지 못해서 모른단 말이야.”
정은 조금 피곤하게 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 산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 답청이든 뭐든 간에 좀 멀리 나갈 핑계를 만들었다가 그 아이가 큰 짐승에게 물려가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겠지요. 그런 연후에 먼 곳으로 데려가 인간 세상으로 돌려보낸다면…….”
“인간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대수겠어? 료 공자님이라면 또 어떻게든 찾아내고야 마실 거야. 그 물에 빠져서도 살아 돌아온 것 좀 봐.”
“……잡아먹힌 것처럼 꾸며놓는다고 하면 어찌 찾을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후환을 근심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키지 않아. 아! 그렇지, 좋은 생각이 났어! 물로 해서 안 됐으니 그 반대로 해보면 어떨까?”
“그 반대라고 하시면.”
“마침 그 아이 반은 장님이나 다름없잖아? 게다가, 정아, 생각해봐. 그것에겐 날개가 없다구.”
활짝 웃으며 정의 손을 흔드는 가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정이 이윽고 대답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음날 밤이 깊어지면서, 일꾼들이 중문을 닫아걸고 다닐 무렵 침아의 처소에 화산 노파의 심부름으로 왔다는 여자 하나가 왔다. 손에는 약밥이 담긴 대접이며 염소 고기를 넣고 끓였다는 갱(羹)이 담긴 오지그릇이 놓인 나무쟁반을 들고 있었다. 전날 점심, 저녁까지 불러다 챙겨주시는 것에 침아가 부담을 느껴 오늘은 한사코 가지 않았더니 이런 것까지 보내온 모양이다.
이미 가볍게 저녁을 해결한 후였지만 가져온 것을 거절하는 것은 무례라고 생각해 감사히 받았다. 심부름 온 여자는 먹는 모습까지 보고 오랬다면서 계속 서서 기다리는 터라 침아는 마지못해 음식을 절반쯤 먹었다. 그제야 여자가 되돌아갔다.
맛은 퍽 좋았지만 과식을 했으니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뜰에 나가 산보를 하면서 소화가 되기를 기다렸지만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무척 노곤해지는 기분과 함께 졸음이 밀려왔다.
“얹혔나?”
방으로 돌아와 침아는 그만 이부자리 속을 파고들었다. 예전엔 이럴 때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아지곤 했었다는 생각이 나서였다.
버릇처럼 베개에 엎드려 눕다가, 이럴 때만이라도 제대로 좀 자자 싶어 돌아누웠다. 하지만 등에 걸리는 것도 없는데 공연히 이리저리 뒤척이다 문득 깨닫고 보니 다시 엎드려 누워 있었다. 침아는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주인님, 저 아픈가 봐요.”
스르륵 눈이 감겼다. 입술은 좀 더 움직였다.
“어서 돌아와서 저 좀 봐주세요.”
말 끝에 피식 입술이 웃는 모양으로 휘어졌다.
“……말로는 귀찮다 하면서 내가 아픈 거 은근히 좋아하는 거 모를 줄 알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잠에 빠져 버렸다.
어느 순간 소스라쳐 깨어났다.
눈을 떴지만 보이는 건 자욱한 어둠뿐인 속에서, 침아는 격렬한 두통을 느꼈다.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누르려 하였으나, 위로 들리던 오른팔이 얼마 못 가 풀썩 이부자리로 떨어졌다. 침아는 두통의 와중에도 의아해했다.
“왜…….”
입을 열었으나, 이번엔 입 안 가득 가칠한 모래라도 삼키고 있는 듯이 따가워 심하게 콜록거렸다. 그러는 동안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에 격통이 밀려왔다.
몸은 마치 누군가 위에 누르고 앉아 짓이겨대는 것처럼 무겁고, 무력했다. 다시 한 번 침아는 팔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이번엔 손가락을 몇 개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오른손에 이어 왼손, 두 발에 이르기까지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 데도 그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화급한 것은 호흡이었다. 내쉬는 숨, 들이마시는 숨, 모두 일일이 의식을 해야만 가능했고 그마저도 점차 빠르고 가빠졌다. 안간힘을 써도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 자체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침아는 깨달았다.
느닷없이 몸에 닥친 격통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도.
눈을 굴렸다. 어둠의 심상찮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방을 채운 어둠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불길한 검은 그림자.
“……연기.”
비로소 방을 채우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실은 연기라는 것을 알았다. 검은 구름이 되어 아래로 켜켜이 쌓인 연기가 침아를 사슬처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얼굴을 얼마쯤 돌렸다. 서쪽에 나 있는 창을 보기 위해서.
붉었다. 까만 어둠의 동심원을 둘러싼 새빨간 반지 같은 붉은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이에 검은 어둠의 원은 점차 작아지고 그 시뻘건 빛무리의 영역이 보다 더 분명하게 침아의 눈에 보였다.
한순간 침아는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저승의 사자가 그녀를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내 무서워했던 대로, 불과 함께 마지막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래된 공포의 한편에서 용케도 머리는 합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이 났어.’
‘불이 난 거야.’
머리에서부터 천천히 전신으로 퍼져가는 두려움.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어째서?’
알 수 없다. 무슨 상황인지,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유추해볼 여유는 단 한 줌도 쥐어짤 수 없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두려움에 전율했다.
‘일어나, 일어나서 달아나.’
머릿속 속삭임은 간절했으나 몸은 그 속삭임을 배신했다. 어떻게 이리되도록 몰랐을까? 대체 무슨 잠을 그리 자다가…….
“그 갱(羹).”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온 목소리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했다.
과식을 하여 얹혔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심부름 왔다던 그 여자.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먹는 걸 보고 오랬다고 재촉하고서, 침아가 먹는 걸 꼼짝도 않고 지켜보았다. 말하는 것이며 거동하는 태도가 묘하게 경직된 것을 느꼈으나 인간 아이에게 먹을 것이나 갖다 바치는 자신의 일이 싫어 그러는 줄 알았다.
불찰, 불찰.
어리석었다. 열여섯 먹은 인간의 계집애나 할 법한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사방이 뜨거운 데도 문득 오한이 찾아들었다. 침아는 눈을 감았다. 쪄 누르는 검은 구름 속에서 그나마 남은 공기를 긁어모으며 몸의 주박을 풀 기(氣)를 다졌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양쪽 귀에 이명(耳鳴)이 웅웅거리며 현기증과 함께 오장이 뒤집히는 듯한 욕지기까지 밀려왔다. 여전히 사지는 얼어붙어 있는데.
‘늦었어, 늦었어, 늦었어.’
이렇게까지 무력할 수 있단 말인가 싶어 비명이 나왔지만 벌린 입에선 꺽꺽대면서 마지막 숨을 그렁거리는 듯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발.’
죽음이 목전이라는 자각이 들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일어났다. 필사의 심정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침아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감은 눈꼬리를 타고 이슬이 반짝거렸다. 입술이 들썩이며 누군가를 불렀지만 아무도, 그녀 자신조차도 들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잠시 동안의 정적.
방 안엔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정적을 뚫고 불현듯 똑, 똑 하고 물방울 듣는 소리가 났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침아의 부드러운 살갗에 닿아 찰팍 흩어지는 붉은 물방울. 그중 하나가 마침내 벌어진 입술 안으로 사라졌다. 연이어 두 방울, 세 방울…….
퍼뜩 침아가 눈을 떴다. 그러는 중에도 붉은 방울 하나가 떨어져 입 안을 적셨다. 침아의 혀가 그것을 핥아 꿀꺽 삼켰다. 비릿한 쇠 냄새를 머금은, 피.
“일곱 방울이나 마시다니. 이 빚을 어떻게 갚을 생각이야, 대체?”
투덜대는 목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크게 떠져 천장을 응시하는 침아의 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다시 투덜거렸다.
“느닷없이 멍청해져서는 말이야. 혹 연애라도 하는 게냐?”
침아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아직 목소리는 낼 수 없었으나 그것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둠 너머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라고? 아니라면서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해?”
침아의 오른쪽 눈이 묘하게 빛났다.
“그것도 몰랐어? 이래서 내가 암컷들한테는 바라는 게 하나뿐인 거야. 예쁜 몸뚱이.”
상황이 위급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다를 늘어놓는 사내의 목소리에 침아의 입술이 얼핏 웃는 모습으로 휘어졌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고, 이어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였다. 서서히 몸에 활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천장 속 어둠에서 불쑥 부채 하나가 나왔다. 침아가 볼 수 있었다고 하면 거기 그려진 춘화(春畵)가 그 어느 때보다 농밀한 수준이라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얀 털로 뒤덮인 다섯 손가락이 부채를 휘휘 젓자 검은 안개구름이 누군가 옆에서 끌어당긴 듯이 좌우로 갈라지며 천장널이 드러났다.
드러난 천장널 중앙에 부채를 쥔 손이 나왔던 기괴한 구멍이 있다. 손이 사라진 자리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두 개 나타났다. 빠끔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호박 색깔의 눈이다. 흡사 고양이의 눈처럼 광채가 돌았다.
끙끙거리길 한참 만에 침아가 일어나 앉았지만 두 발로 설 엄두는 내지 못하고 엉금엉금 손을 움직여 기다가 다시 멈추었다. 주위를 돌아보면서 창문을 찾아내긴 하였으나 방향 감각을 잃은 듯 지친 얼굴만 좌우로 번갈아 돌렸다.
“그 꼬마 무정도 하군. 빤히 눈 하나뿐인 거 알면서 고쳐줄 마음이 없나보지.”
쯧쯧, 혀 차는 소리에 이어 천장널 사이에서 도로 손이 나왔다. 붉은 손바닥에 쥔 무언가를 데구루루 굴리다가 스윽 손을 폈다.
“잠시, 돌려주랴?”
침아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흔들거리는 시야 끝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어떤 것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흡사 커다란 진주에 검은 흑요석을 박아 넣은 듯 반짝거리는 구슬.
그것은 사람의 눈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