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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관심과 변심 (13/33)

12. 관심과 변심

서쪽으로 난 창가에도 느릿느릿 아침빛이 퍼질 무렵 방을 나서는 료를 침아는 배웅하지 않았다. 꼼짝하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료가 말했다.

“다녀오마. 얌전히 지내야 한다.”

고르게 들려오는 숨소리만이 대답으로 돌아왔지만 료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침아의 볼에 입술을 대었다. 스륵 손끝으로 볼을 쓰다듬고선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지 하면서 료가 마침내 따스한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는 료의 발걸음이 너무도 조용해서 옷 스치는 소리가 희미해지자 사위가 한없이 고요해졌다. 방 안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좀 더 분명해져 이부자리까지 옅게 번져왔을 때이다.

스르륵 몸을 일으킨 침아는 잠시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버겁도록 풍성한 칠흑의 머리카락을 젖히며 고개를 살짝 들면서 입술을 벌렸다.

“하아…….”

나른한 한숨에 이어 눈이 뜨였다. 몽롱함과는 거리가 먼, 몹시도 곤해 보이는 눈빛. 하얀 얼굴이 어딘가 까칠하다. 다시 내쉬는 한숨이 얼마 안 가 하품으로 변해 버린다.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만지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만져서 아픈 부근을 중심으로 자줏빛 멍이 뚜렷했다.

“사내란…….”

퍽 싸늘한 응얼거림을 입에 담으며 전후좌우로 목을 까딱여보던 침아는 문득 옷섶을 끌어올려 킁킁 댔다.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옷고름을 풀고 속적삼을 벗어 던졌다. 속치마며 단속곳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이제 살겠다는 듯 손부채질을 하면서 이불마저 발치로 밀어버리고 침아는 다시 베개에 누웠다.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 된 베개 위를 부러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돌아눕다가 마침내는 지난 몇 년간 이골이 난대로 엎드려 누웠다.

“몹쓸 버릇이 들었어.”

고작 4년 만에. 혀를 차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깊이 숨을 들이쉬며 들썩이던 어깨가 잠시 멈칫했다. 베개에서 얼굴을 들고선 얼마쯤 그대로 있었다. 빛이 길들지 않은 눈이 머문 곳은 베개 위이다. 툭툭 베개를 두드려보고 다시 누웠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도로 일어나며 베개를 저 멀리 던지듯 밀쳐냈다. 아무렇게나 던졌으나 용케도 옷을 벗어 던져둔 곳으로 굴러갔다.

오도카니 앉은 채로 침아는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한숨을 쉬었다. 아까까지의 졸음에 겨운 노자근한 한숨과는 좀 달랐다. 의기소침하게 떨구어진 어깨만큼이나 자꾸 수그러드는 고개 때문에 머리카락 끝이 사르륵 요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다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침아는 들어 올린 자신의 팔에 코를 대며 킁킁거렸다. 왼팔에 그치지 않고 오른팔까지, 더 나아가 허리를 굽혀 다리의 살갗까지 냄새를 확인했다.

“으아아아아아앗!”

뭔가에 잔뜩 수가 틀린 어린 꼬마라도 되는 것처럼 침아는 두 발을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머리도 사정없이 흔드는 모습이 흡사 난데없는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사람 같았다.

그런 괴상한 짓을 하다 하다 기운이 곤하여 풀썩 옆으로 기울어졌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서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가 맹수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가냘픈 인간의 그것이었다.

“아아……싫어, 싫어. 여기저기 온통 그 녀석 냄새뿐이야.”

꽉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눈앞의 어둠 속에 회색 점들이 일렁거렸다. 현기증인가? 그럴 만도 하지 하며 침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숨을 골라가던 침아는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았다.

빛의 여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원래도 아주 장님이 된 것은 아니어서 낮과 밤의 확실한 명암의 차이 정도는 느낄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다시 일어나 앉은 뒤 침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을 덮고 있던 더껑이를 한 겹, 한 겹 걷어내는 것처럼 주변의 윤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중심 부분은 흐릿하지만 시야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보이는 부분이 더 늘어난 것도 인지할 수 있다.

나아가는 모양이다. 아주 극적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것처럼 낫는 것은 아니어도 이게 시간이 지나면 낫기는 할 일인가 보다.

침아는 오늘 아침에 깬 이후 처음으로 웃었다.

“그자에게 또 빚을 질 일은 피했군. 역시 어떤 일에서든 참을성을 유지하는 게 좋은 거라니까.”

일어서서 침아는 아주 어렴풋한 시각에 의지해 창가로 걸어갔다. 고리를 잡아 양쪽으로 창을 잡아당기자 또 한 번 그녀를 둘러싼 세상의 밝기가 상승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막, 도막 보이는 하늘의 푸른 자리를 보아 참으로 고운 날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침아의 얼굴에 아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창가에서 몸을 돌린 침아가 방에 딸린 곁방들 중 하나로 뛰어 들어갔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챙겨 입고 머리도 빗는 둥 마는 둥 하고 땋았다. 거추장스럽도록 늘어진 대나무발들을 마구 헤치며 방을 달려 나가는 침아의 얼굴에 더 이상 우울한 기색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처소에 없다?”

찻잔에서 눈을 돌리며 화산 노파는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침아를 찾으러 보낸 시녀가 막 돌아와 침아가 처소에 없다고 알린 참이다.

아침나절에 료가 집을 나서면서 침아를 잘 챙겨달라고 화산 노파에게 부탁하고 갔다. 동틀 무렵에야 자 버릇하는 료에게 맞추어 침아도 해가 중천에 올 무렵에나 일어나 생활한다는 것을 알기에 슬슬 아침이나 챙겨 먹일까 하고 시녀를 보냈던 것인데 허탕을 치고 온 것이다.

“그 눈을 하고 혼자 다닐 만한 곳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테고. 료의 거처란 것이 워낙 미로 같지 않더냐. 좀 잘 찾아보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다 눈으로 확인했고 들어오지 말라 명하신 곳은 피하되 크게 소리를 내어 불렀습니다. 작정을 하고 숨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그 안에 있다면 충분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오지 않았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화산 노파가 다시 시녀를 보며 물었다.

“그래, 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 곳이 몇 곳이나 되지?”

“주무시는 방과 옷과 이불 등을 보관하는 곁방 두 곳 빼고는 전부라고 보면 되십니다.”

“이런. 침아가 그 넓은 곳을 혼자 치다꺼리를 했으니 그간 심심하게 지낼 일은 없었겠구나.”

웃고 있는 화산 노파에게 물러가려던 시녀가 머뭇거리다 말을 올렸다.

“정확한 것은 아니나 빙고(氷庫)를 다녀오던 어멈 하나가 말하길 오시(午時) 조금 못 되었을 즈음에 누군가 북서쪽 일각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게 그 아이가 아닐까 합니다만…….”

“응? 그럼 그 아이가 혼자 바깥엘 나갔다는 소리냐?”

화산 노파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확인하자 시녀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한 것이지, 그 아이를 본 것은 아니랍니다.”

“그럼 누구 다른 자이겠지, 아무렴 앞도 잘 안 보이는 것이 혼자 무엇하러 바깥 걸음을 해. 되었다. 워낙 집이 넓으니 굳이 찾자고 드는 것도 일이겠구나. 씻으러 갔을 수도 있고 측간에 갔을 수도 있는 일이지. 우선은 내버려두고 신시(申時)쯤에나 한 번 더 건너가 보도록 해라.”

손을 저어 시녀를 물리고서 화산 노파는 마저 차를 마셨다. 오늘은 난씨 자매 둘도 아직 건너오기 전이다. 모처럼 한가롭기도 하고 료의 부탁도 있는 김에 침아를 불러다 말벗이나 삼고자 했는데 당장엔 헛물을 켠 셈이다.

“한데 그 녀석, 눈에 밟힐 터인데 아까워서 어찌 두고 갔을꼬?”

문득 그런 생각에 화산 노파는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생각은 아침에 료를 봤을 때도 언뜻 했다. 인간들의 저자에 나가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체격으로 우송에게 주술을 걸어달라는 료의 부탁에 그게 뭐 어려운 일이랴 싶어 흔쾌히 들어주었는데 정작 진짜 인간인 침아는 데려가지 않는구나 싶어 의아했던 것이다. 그 아이는 어쩌고 둘이만 가느냐 했더니 료는 데려가 보았자 짐만 된다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럼 짐이 되지 않게 작은 새로 바꾸어주랴 하고 물었는데도 료는 요지부동,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만 했다.

료가 자리를 비운 틈에 넌지시 우송에게 무슨 속인지 아느냐 물었더니 우송은 당분간 침아에게 바깥출입을 안 시키실 생각이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화산 노파도 속으로 그렇구나 했다.

모처럼 야시에 데리고 나갔다 생긴 일에 학을 떼었다고 해야 할까. 인간들 말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더니 딱 료가 그 말대로다. 료에게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화산 노파는 그 어린 마음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한편으로 침아에게는 안 된 일이다. 야시에 간 일도 이 집에 와서 4년이 넘어서, 그것도 화산 노파의 입김에 힘입어 나선 첫 외출이었는데 부정을 타도 단단히 탔으니 말이다.

“그 녀석 성격에 제 방에 연금을 안 시키는 것도 용하다고 해야 할는지…….”

잔잔히 웃음을 흘리며 화산 노파는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랑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몇 걸음 못 가 그만두고 돌아섰다. 기껏 차를 마셨지만 졸음이 밀려오는 것은 막지 못했다. 침상으로 걸어가 걸터앉으며 가벼이 한숨을 쉬었다. 봄이라서 식곤증이 밀려오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늙었을 뿐이다. 화산 노파는 베개를 끌어와 등에 괴어 앉으며 곰곰이 자신이 몇 해를 살았는지 헤아려 보았다. 육백 살이랍시고 근방에 사는 피붙이들이 거의 자리해서 그녀의 탄신연을 축하했던 것도 어언간에 퍽 오래전 일이 되었다. 자신들의 종족은 하늘을 누비는 자들치고는 퍽 장수하는 편이지만 천 년을 넘겨 사는 것은 드물다. 특히 암컷의 수 자체가 극히 적은 만큼 그중에서 천 년 이상을 살아온 존재는 거의 보지 못했다. 자신이 그 예외적인 존재가 될 거라는 희망은 갖고 있지 않다.

이제 한 손 당 네 개로 늘어난 손톱집을 내려다보던 화산 노파는 천천히 그중 하나를 벗겨냈다. 아무리 갈아도 이제 날카로움과도, 흡사 보석과 같은 매끄러움과도 동떨어진 추레한 늙은 새의 발톱처럼 이 손도 볼품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날 수 있는 건 날다가 죽는 게 좋아…….”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고 빙긋이 웃던 화산 노파는 불현듯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자신의 소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들었을까, 이런 말을.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졸음에 겨워서인지 도통 생각해낼 수가 없다.

화산 노파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막 잠에 빠져 들어가다가 언뜻 실눈을 떴다.

“그래, 언젠가 휘가 했던 말이야.”

기억해 냈다는 만족감에 화산 노파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잠들어가던 그녀의 눈이 감긴 채 바르르 떨었다. 그것만이 아닌데. 휘만 그런 소릴 한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그 비슷한 말을……. 누군가가 그리 오래전이 아닌 언젠가, 길 위에서……가벼운 목소리로 바람결에 흘려보내는 말처럼……. 나비를…….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순간이 목전이었으나 바로 거기서 화산 노파의 생각이 끊어졌다. 난씨 자매가 놀러 왔다고 전하러 온 시녀는 딱 그 즈음에 방으로 들어오다가 중얼거렸다.

“어머, 주무시고 계시네?”

약하게 코까지 골면서 낮잠치고는 깊이 잠이 든 화산 노파의 몸 위로 얇은 홑이불을 꺼내 덮어주고는 침상 주변의 휘장을 쳐서 어둑하게 만든 뒤 시녀가 물러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방 안은 혼혼한 어둠에 잠겼다.

“어쩌지요? 어르신께서 오수(午睡)에 드셨습니다.”

시녀가 행랑으로 나오면서 들려주는 말에 가진과 가선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가진이 다시 시녀를 보면서 물었다.

“지내는 동안 낮잠을 주무시는 걸 못 봤는데 혹시 어디가 편찮으신 건 아니고?”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조반도 평소처럼 드셨고 차를 드시면서도 별말씀 없으셨는걸요.”

“어제 잠을 설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노래를 부르신 일이 생각보다 고되셨나? 그런 기색이셨어?”

“아니오, 주무시는 것도 평소와 다를 바 없으셨습니다. 작은도련님께서 돌아가실 때에도 즐거운 기색이셨습니다.”

“그래? 료 공자님께서 언제쯤 돌아가셨는데?”

“해시(亥時) 즈음이었던 걸로……. 아, 그러고 보니…….”

시녀가 말하다 보니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가진이 다그쳐 물었다.

“왜 그래?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면 제대로 말을 해봐. 알아야 걱정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니야.”

“아니오, 딱히 짚이는 일이라곤 할 수 없는데 료 공자님이 먼저 돌아가신 뒤로도 그 시녀가 남아서 잠시 어르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게 한 반 각쯤 되는 시간이었으려나.”

“그 시녀라면, 인간의 아이 말이지?”

“예.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아이가 돌아갈 때 어르신이 바래다주라고 해서 제가 데려다 주었는데 어쩐지 그 아이 표정이 언짢아 보였습니다.”

“그래? 뭐지? 어르신이 그 애를 붙잡아놓고 마구 야단이라도 치셨나? 혹시 그런 기색이었어?”

가선을 향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보이면서 가진은 다시 시녀에게 캐물었다. 시녀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어르신은 주무시기 직전까지 퍽 즐거운 기색이셨어요. 옷을 갈아입혀드릴 때도 저희들더러 가볍게 농담도 하셨는걸요.”

“음? 모르겠네. 이래서는. 물론 어떤 말은 듣는 사람에겐 야단이지만 하는 사람에겐 즐거움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아! 알겠어, 아무튼. 주무시고 계신다니 도리 없이 우리가 돌아가야지. 어르신이 깨시면 우리가 문안드리러 왔었다고 여쭈어줘.”

마지막으로는 제법 의젓하게 할 말을 마치고 가진이 돌아섰다. 몇 걸음 걷기 전에 가선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가진이 속삭여왔다.

“얘, 어떻게 된 일 같니? 짐작 가는 거 없어?”

“언니도 참. 내가 무슨 짐작을 하겠어요.”

“하긴. 내 머리나 네 머리나 거기서 거기지. 아, 혹시 어제 우리가 했던 이야기 때문에 한 소리 들었으려나?”

“우리가 무슨 이야길 했었지요?”

얼마쯤 짐작하는 게 있었지만 가선은 시치미를 떼며 가진이 그 화제를 끌고 나오게 떠넘겼다.

“왜, 우리가 첩실 운운하면서 했던 이야기들 말이야. 기억 안 나?”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나요?”

“원 애도. 정작 기억해야 할 게 누군데 이렇게 먹통이야. 첩실 이야기 나왔을 때 화산 어르신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걸 내 똑똑히 봤거든.”

“그랬어요?”

그때 오로지 료와 침아 쪽에 정신을 쏟느라 그런 건 미처 확인 못했던 가선에게 그것은 귀가 솔깃한 정보였다. 가진은 그들 자매의 향냄새에 이끌려 날아온 나비를 보고 새하얀 단선(團扇)을 팔락거리며 놀아주면서 말했다.

“두 번인가 손톱집으로 탁자도 두드리셨다고. 신경이 쓰이시는 것 같았는데. 내가 보기엔 거슬려 하시는 것도 같았고…….”

“그 말은 이상해요. 들어보니 그 아이를 료 공자님께 선물해 주신 게 화산 어르신이라는데, 료 공자님이 그 애를 아낀다고 하면 어르신이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음. 그것도 그렇지? 아,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말이야, 달리도 생각할 수 있잖아? 오히려 자신이 준 거라서 더 못마땅해 하시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잘 모르겠어요, 왜요?”

“그러니까……음, 책임감을 느끼시는 거란 뜻이지! 가볍게 생각하고 준 선물인데 그것에게 정을 깊이 주는 걸 알고 보니 마땅치 않다, 그런 거야. 아무래도 그 아인 인간이잖아? 인간은 뭐랄까…….”

“우리들과는 격이 맞지 않죠.”

‘비천(卑賤)하다’는 말이 입에 맴도는 것을 가선은 그렇게 순화시켰다. 가진은 단선으로 턱을 툭툭 두드리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잖아. 개중에 간혹 저리 빨리 사그라지기엔 아깝구나 싶은 치들도 몇 있긴 하지만 그런 몇조차도……조생모몰(朝生暮沒)의 운명을 피해갈 수 없는 일인걸! 그처럼 피기 무섭게 시들어가는 자들에게 마음을 깊이 주는 것은 우리 같은 자들에겐 힘든 일이야. 특히나 그것이 첫 마음이 되어 버린다면……. 아아, 알 것 같아. 화산 어르신의 걱정하는 그 마음. 어쩌면 그분도 언젠가 우리처럼 젊었을 적에 인간과 그런 덧없는 사랑을 하셨던 건 아닐까?”

감상에 젖어 결국엔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가진의 말에 가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으레 그러려니 하는 일이라 보조를 맞추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우리로선 그 어른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만 해볼 뿐이지만……. 언니 말씀이 옳아요. 인간의 아이에게 마음을 깊이 주는 것은 당장은 몰라도 그 끝이 그리 좋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 아이가 부질없는 꿈을 품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한숨을 쉬는 가선의 곁에서 가진도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참 가엾지.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도 서럽거늘 사모하는 이는 그대로인데 자신만 쏘아놓은 화살처럼 늙어가야 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아아, 무서워. 무서운 일이야.”

부르르 몸을 떨며 눈물까지 조금 비추는 언니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선은 어루만지듯이 만져주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며 어서 무언가 흥겨운 노래를 좀 불러보라며 재촉했다. 한결같이 다정한 자매의 모습에 뒤따르던 시녀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서는 가선의 재촉대로 노래를 시작했다.

“자아, 언니. 볕이 이리 좋은 날인데 어딘가 나가고 싶지 않아요? 들어보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있다던데 오늘은 거기에 배라도 띄워놓고 놀까요?”

“아, 세우지 말이구나. 내가 안 그래도 그 소릴 듣고 나가볼까 했는데 여기 아랫것들 말이 그곳은 볕도 썩 잘 들지 않아 한낮에도 서늘하다는구나. 그보다 북쪽 후원에 잘 꾸며진 동산이 있다는 소린 들었니? 거기에 작지만 연못도 있대. 오늘은 그쪽에 가서 놀지 않으련?”

“글쎄요, 언니 북쪽 후원이라고 하면…….”

어디에나 입이 재빠른 하녀 한둘은 있기 마련이라 가선도 북쪽 후원에 모인 미녀들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가진이 혹시 모르나 싶어 머뭇거리는 가선에게 가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 내 귀여운 동생 좀 봐. 언니 걱정을 해주는 거야? 아무렴 이 언니가 그런 여자들 때문에 겁이라도 먹겠어? 흥, 난 아직 휘 공자님 얼굴도 보지 못했다고. 혼인을 해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야. 혼인을 안 하고 그냥 돌아가게 된다면 여기까지 와서 주씨네 댁 동산 구경도 못했다 싶어 아쉬울 테니까 실컷 눈요기라도 하고 가는 게 당연하고, 혼인을 하게 된다면 어차피 내가 안주인이 될 집 미리 구경하는 것이 무에 문제겠어? 자, 쓸데없는 걱정 말고 오늘은 그리로 가서 놀자꾸나.”

“언니, 언니는 불편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요?”

“뭐가 말이니? 그 여자들 말이야?”

“네. 겁을 먹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싫지 않으냐 그 소리예요. 나는 역시 싫어요. 만약 언니가 휘 공자님과 혼인을 하게 된다면 그쪽 여자들부터 전부 내보내고 구경을 가도록 해요.”

“전부 내보내라고? 어디로?”

“어디로든 가겠죠. 혹시 앙큼한 마음을 먹은 누군가가 언니에게 텃세라도 부리는 꼴은 절대 안 볼래요. 나중에 잡초가 돋아나서 후회하느니 애초에 땅을 깨끗이 골라놓고 보자는 뜻이에요. 그렇게 해요, 언니. 네?”

가선이 재차 다짐을 해오자 가진은 당장엔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물론 네가 날 걱정해서 해주는 말인 건 알겠는데……. 당장에 그런 걸 걱정할 필요 있겠니? 어쩌면 휘 공자님이 깊이 귀애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옥석을 가리지 않고 섣불리 일을 벌였다가 도리어 내가 곤혹스러워질 수도 있어. 가선아, 이 언니가 그리 미더워 보이지 않는 건 잘 알겠는데 너무 걱정 마. 일단 정실이 되면 지금처럼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살 수 없을 거란 생각은 하고 있어.”

“……알겠어요, 언니. 언니가 그런 마음이라면야.”

웃으면서 가선이 선선히 물러섰지만 내심 퍽 놀랐다. 가진이 다시 동산에 놀러 가자고 권유했지만 그것만은 가선도 고개를 내저었다. 세우지에 가보겠다는 가선과 동산에 가는 가진, 모처럼만에 자매의 뜻이 나뉘어서 둘은 각자의 길로 갔다. 가진 역시 늘 자신을 따라다니던 동생이 오늘은 강경하게 거절하는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늘 노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 틈에 언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저택의 시종 하나를 앞세워 세우지로 향하는 길에 가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산을 들고 옆에서 걷던 정이 잠자코 있자 홱 고개를 돌리며 쏘아붙였다.

“너도 보아서 알 거 아냐. 언니가 무엇 하나 진중하게 생각이란 걸 하는 걸 본 적 있어?”

“본디 큰아씨의 성품이 다정다감하신 편이시잖습니까.”

정의 대꾸에 가선의 목소리가 더 새되게 변했다.

“반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 뜻이야?”

“그런 말이 아니오라…….”

“됐어, 됐다구! 꼴 보기 싫으니 따라오지 마!”

들고 있던 둥근 부채를 찰싹 정의 얼굴에 내던지고서 가선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부채를 주워든 정이 제 옷자락에 닦아 먼지를 떨쳐내고는 앞서가는 주인의 뒤를 어렵지 않게 좇아갔다. 일산이 위로 다가와 그늘이 생기자 가선이 휙 뒤돌아보며 역정을 냈다.

“꼴 보기 싫다고 한 말 못 들었어?”

정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그래서 뒤에서 가지 않습니까, 아씨. 제 꼴이 보기 싫으시면 뒤를 보지 않으시면 될 일이지요.”

“뒤에서 오지도 마! 그림자도 보기 싫어!”

“예, 그림자가 안 보이게 잘 따라가지요.”

“에잇, 뭘 잘했다고 계속 말대꾸를 하는 거야?”

가선은 단단히 골이 난 얼굴로 정에게서 부채를 빼앗아 그걸로 찰싹찰싹 정을 때려댔다. 정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가선을 내려다보다가 힐끗 앞쪽을 보고선 부채를 쥔 가선의 손을 쥐었다.

“아씨, 저는 상관없으나 달리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가선이 조금 진정하는 듯하였으나 붙잡힌 손을 빼내는 동작이 유난히 컸다. 앵돌아서 소맷자락에 손을 감추며 입술을 깨무는 가선의 볼에 잔뜩 홍조가 퍼졌다. 그녀의 걸음이 더더욱 빨라졌다. 달음박질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가선을 가만히 응시하던 정이 이내 큰 보폭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자, 저쪽에 보이는 것이 세우지입니다.”

먼저 길을 가던 저택의 시종이 멈추어 서서 팔을 뻗어 가리킨 곳으로 가선이 눈길을 돌렸다. 작은 연못 정도로 생각했는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빛이 제법 넓었다. 들었을 때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어둡지도 않았다. 못의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흰 꽃들이 점점이 보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배꽃이며 살구꽃들이 퍽 만발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서 작은 정자 하나를 놓으면 좋겠구나. 그렇지 않니, 정아? 어머, 저기 퍽 큰 물고기도 있나봐.”

언제 화를 냈냐 싶게 정에게 말을 하던 가선이 문득 못에서 들려온 첨벙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눈을 빛냈다. 정은 이미 그쪽을 보고 있었다.

“……물고기가 아닙니다.”

정의 중얼거림에 가선이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보았다가 방금 전까지 화를 냈던 걸 기억하고 새침한 표정으로 외면했다. 공연히 부채질을 해가며 못을 쏘아본 그녀의 눈에 다시금 수면에 일어나는 물보라가 보였다.

흩뿌려지는 물방울 사이로 새까맣게 나풀거리는 무언가를 가진 하얀 것이 펄떡였다. 까만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곧 정정했다. 지느러미라고 생각했던 것은 새까만 머리카락이었고, 펄떡거리는 물고기라 생각했던 것은 두 팔을 가진 새하얀 몸이었다.

“교인(鮫人)? 이런 곳에? 교인들은 바다나 큰 강에 사는 거 아니었나?”

그런 말을 중얼거릴 때까지도 가선은 눈에 보이는 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정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말했다.

“교인이 아닙니다. 몰라보시겠습니까? 저것은, 아씨도 아는 아이입니다.”

“내가 알아?”

힐끗 정을 쳐다보고 재빨리 다시 못을 돌아본 가선의 시야에서 그것이 첨벙거리며 물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언뜻 가선은 그것의 새하얀 두 다리도 보았다. 분명 교인은 아니었다.

그것은 잠시 후 모습을 감춘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크게 숨을 들썩이는 그것의 갸름한 어깨 너머로 분명 물고기로 보이는 것의 꼬리가 퍼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대체 저것이 누구지 하며 쳐다보던 가선이 이윽고 중얼거렸다.

“설마 저 아이, 그 사람의 아이인 것이야?”

목소리가 꽤 컸다. 그 소리가 물에서 자맥질하던 ‘그것’에게까지 이르렀을 만큼. 소리가 들려온 곳을 휙 돌아보는 ‘그것’을 보고 가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침아. 그것도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는 침아였다. 바라보는 사이 뒤늦게 침아가 나신이란 것도 깨닫고 가선은 황당해 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정을 보고는 괜스레 자신이 얼굴을 붉혔다.

“대체 저 아이가 저기에서 무엇을 하는 거지?”

“글쎄요, 낚시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낚시? 저 아이는 인간이잖아. 어떤 인간이 저런 식으로 낚시를 한다고 그래? 저래서야 꼭 수달이 따로……. 잠깐, 저 아이 틀림없이 눈이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예, 저도 그리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때 느닷없는 목소리 하나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하. 어쩐지 하는 행동이 좀 이상해 보이더라니, 눈이 안 보여서 그랬군.”

가선과 정은 처음 듣는 목소리에 어리둥절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때 아직까지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저택의 시종이 어딘가를 보고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절했다.

“돌아오셨습니까.”

그 시종이 바라보는 쪽을 올려다본 가선과 정은 편백나무 우듬지에 앉아 있는 어떤 존재를 발견했다. 햇살을 받은 쪽 깃털이 푸르른 비취색으로 반짝이는 매를 닮은 아름다운 새.

“저분은……뉘시지?”

보자마자 흔한 새가 아닌 영물임을 알아본 가선이 물었다. 시종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휘 도련님이십니다.”

“과연.”

그렇게 중얼거리고 몇 번이나 가선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휘가 나무를 떠나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날더니 숲 속 너머로 사라졌다.

“어머, 저리 가시면 안 되는데. 공자님께서 떠나버리신 게냐?”

“그것은 저도 잘…….”

시종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가선은 역시 언니 가진을 무슨 수를 써서든 데려왔어야 하는 거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좀 하지, 언니는 그 북쪽 동산인지 뭔지에 뭐 볼거리가 있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이런 기회를 놓치고 마는 거야.”

“그렇게 분해할 것 없소이다, 낭자. 변덕이 동하여 들러본 것이 아니라 화산 할머님께서 자꾸 오라 부르시어 돌아온 것이니까 말이오.”

그런 말과 함께 사라진 방향과 전혀 반대쪽 숲 속에서 휘가 사람의 모습을 취하여 나타났다. 잠시 가선은 말할 바를 잊었다.

눈앞에 나타난 자는 햇살처럼 아름다운 자였다. 그의 동생인 료의 아름다움도 특별했으나, 휘에겐 료에게서 거의 볼 수 없는 장점 하나가 있었다.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흘려주는 고운 미소가 그것이었다.

온화한 미소하며 자연스레 움직일 때의 거동마저 몹시도 우아해, 주위를 의식할 줄 모르는 료와는 또 달랐다. 그들에게 거의 다가왔을 때 휘가 가선을 향해 가벼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파현에서 오신 자매 중의 한 분……. 주위가 퍽 조용한 걸 보면 언니가 아니라 그 동생분으로 사료되오만.”

“예, 예, 그렇습니다. 제가 동생 가선입니다.”

“이미 알 터이지만, 휘라고 하오. 늦었지만 우리 보잘것없는 장원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해 마지않소.”

“반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 말하고 힐끔 휘를 올려다본 가선은 멍하니 생각했다. 언니는 이런 분과 혼인을 하게 되는 건가…….

이미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가선은 자신과 단짝인 언니의 의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멋진 분. 다른 기준 따위 없다. 딱 보았을 때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멋진 분이 아니면 다 싫다고 하던 언니다. 심지어 그런 이유로 저택 북쪽 후원을 차지하고 있는 뭇 미녀들에 대해서도 가진은 긍정적이었다. 멋진 수컷에게 암컷들이 몰려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고지식한 목석보다는 풍류를 아는 분방한 성품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가선에게 웃음이 가득 담긴 눈빛을 던진 휘가 이내 저택의 시종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 아이는 언제부터 눈이 안 보이게 되었느냐?”

“지난달 보름경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난 보름이라면 화조절……. 음, 꽃한테 못할 짓을 해서 화신(花神)의 노여움이라도 샀단 말이냐?”

자신의 말이 퍽 재미난 듯 웃던 휘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저편에서 물가로 헤엄쳐 나오는 침아가 있었다. 물이 허리 높이쯤 되게 얕아졌을 때 침아는 입에 물고 있던 물고기를 손으로 잡아 앞으로 휙 내던졌다. 땅에 떨어진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쪽을 본 일행들은 거기에 이미 그와 같은 종말을 맞은 물고기가 여럿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침아를 쳐다본 일행 중에 시종과 정은 쑥스러움에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자맥질하는 모습에서 짐작했던 대로 침아는 완전히 나신이었다. 그녀는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물에서 빠져나와 멈춰선 채로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물기를 짜고는 얼굴의 물기를 손으로 훔쳤다. 그러고선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윽고 왼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가는 쪽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활짝 핀 시기는 지나서 꽃이 져가는 그 나무 아래에 그녀가 벗어두고 간 허물처럼 옷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눈이 아주 안 보이는 건 아닌 모양이지?”

불쑥 바로 옆에서 들려온 사내의 목소리에도 침아는 움찔 놀라거나 하지도 않았다. 몸을 굽혀 옷가지를 주워들었지만 어딜 굳이 가리려거나 하지도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입을 열었다.

“화산 어르신께서 몹시 기다리시는 것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모르신다면 이제라도 제게 들으셨으니 저택으로 가보셔요. 남쪽 채에 가시면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는 동안 속속곳을 찾고 배두렁이를 찾았다. 그녀가 막 속속곳부터 걸치려고 하는데 어깨를 만지는 손길이 있었다.

그제야 침아가 그 손의 주인을 향해 스윽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간 하얀 얼굴엔 그 어떤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볼에 감도는 분홍빛은 평소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자연스런 혈기였다. 왜 그러냐는 듯 고개만 갸웃했다.

지금 자신이 나신이란 것을 모르는 바보도 아닐진대 그 앞에서 이런 모습으로 서서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휘는 이 희한한 반응에 눈을 반짝거리며 침아에게 말했다.

“어깨에 뭐가 묻었구나.”

그것을 떼어내는 것처럼 굴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방금 전까지 멱을 감았으니까요.”

“그래? 나는 물고기를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겸사겸사지요. 놀다 보니 재미가 나서.”

방긋 웃는 침아의 모습이 신선하기까지 했다. 도로 고개를 돌리더니 옷을 입는다. 한가로이 속속곳을 다리에 꿰더니 이어서 배두렁이를 앞에 두르고 목에 두른 끈을 뒤에서 묶으려 했다.

“도와주랴?”

이미 손을 내밀면서 휘가 물었다. 침아는 그 손이 닿기 직전에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아니오, 제게 신경 쓰실 것 없으니 그만 가보심이 어떠십니까? 아니면 가선 아씨께서 퍽 이상하게 여기시겠습니다.”

능숙하게 목 뒤의 끈을 묶고 허리 뒤의 끈도 단단히 당겨 묶었다. 탐스러운 가슴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휘는 그의 면전에서 옷을 입는 침아가 당당한 것만큼이나 당당하게 그녀가 옷을 입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물었다.

“여기 다른 자들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이지? 몇이나 되는 줄은 아느냐?”

“글쎄요, 가선 아씨와 그 아씨를 늘 수행하는 시종인 남자, 또 한 명은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아무래도 저택에서 일하시는 분이시겠지요.”

거의 정확한 대답이다. 휘는 불쑥 침아의 얼굴에 거의 닿을 지경으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앞까지 온 휘를 보고 어찌 반응하나 보고자 한 것이다. 침아는 몇 박자 늦게 눈을 약간 찡그리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어느 정도로 보이는 거지?”

“바로 눈앞에 절 놀림거리로 삼고 싶은 한가한 자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정도가 되었습니다.”

다른 옷가지를 챙기려고 옆으로 가려는 그녀 앞을 휘가 다시 막아섰다.

“그리 한가하십니까?”

툭 내뱉는 어조는 평이하지만 상당히 오만불손했다. 휘가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한가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이리 둘이서만 말해본 것이 퍽 오랜만이지 않으냐. 반가워서 그런다.”

“둘만 있는 곳이 아닌데요. 제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아마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시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눈을 세 쌍은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음. 그건 아니구나. 한 쌍은 분명한데, 다른 두 쌍은 체면치레를 하는 중이야. 아직 네 복장이 많이 가볍지 않으냐.”

“그건 묘한 일이군요. 여기서 인간은 저 하나인 걸로 아는데, 어째서 제 복장 따위에 신경을 쓰고들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말이 더 묘하다. 네 말대로 너는 인간인데, 뭇 시선들 앞에서 벌거벗는 데에 불편함이 없단 말이냐? 천지분간 못 하는 어린것도 아니지 않느냐? 아, 물론 인간들의 기준에서 말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적어도 지금 여기 모이신 분들 앞에서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요. 다들 인간이 털 없는 벌거숭이로 태어나는 것쯤은 아시지 않습니까? 한데, 멱을 감고 났더니 추워져서 이제는 옷을 입어야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앞에서 좀 비켜서주시지요, 큰도련님.”

잘 안 보인다고는 하나 그런 말을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했다. 휘는 비켜서는 대신에 침아의 옷가지를 직접 들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가려는데 한쪽 손목을 잡아 꽉 잡고서 휘가 물었다.

“료 앞에서도 이렇게 태연할 성싶으냐?”

그러자 침아가 눈을 두 번 깜박거리더니 웃었다.

“못 그러겠지요.”

대답한 후에 침아는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못 그런다기보다 그러면 안 될 일이지요. 제 주인께선 퍽 수줍음이 많으신 터라. 대답이 되었습니까?”

일단은 되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들었더니 또 다른 것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마 그 다른 것을 들으면 또 무언가 다른 것이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것들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말을 걸 것을 그랬지, 하며 휘는 힐끗 그가 뒤에 두고 온 자들을 보았다. 여전히 셋 중에서 가선만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시선을 다른 편으로 옮기긴 하였으나 자리를 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이런, 내가 너무 붙잡아버렸구나. 또 공연한 소리가 료 귀에 들어가지 않게 내 저들의 입단속은 해두마. 내 손을 탔다는 이유로 우송이 녀석이 이번엔 널 들어 산 아래로 내던져버리면 어떡하겠느냐.”

휘가 손을 놓아주어 옷가지를 품에 안고 몸을 돌리던 침아가 대꾸했다.

“알고 오셨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우송 아저씨는 주인님 따라서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산 아래로 내던져도 오늘 내일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입단속을 해주신다면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이상 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침아는 자박자박 걸어서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물 기운을 전혀 말리지 않은 몸에 걸쳐 입은 아래 속옷이며 그 위의 훤하게 드러난 등. 어쭙잖게 걸친 얼마 안 되는 천 조각 때문에 더 나신이란 점이 부각되었다.

벌거벗은 여자의 몸이라면 결코 아쉽지 않을 만큼 보아온 휘인데도 침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는 것이 묘하게 어려웠다. 결국 그가 시선을 먼저 거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의 시야의 사각지대로 접어드는 바람에 보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일단은 휘도 돌아섰다. 다시 가선이 있는 곳까지 가서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가선에게 여행길에 불편하신 점은 없었느냐 상냥하게 물었다. 가선 역시 그의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일행의 걸음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았다. 휘의 걸음에 당연하다는 듯 보조를 맞추면서. 그는 그런 존재였다. 어디에서고 중심이 되는.

저택에 돌아간 휘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화산 노파가 머무는 남쪽의 객청이었다. 그녀의 낮잠이 퍽 길어져서 무료하게 기다리는 동안 휘는 화산 노파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 셋에게서 궁금증 몇 가지를 해소시켰다. 침아의 실종에 얽힌 이야기를 그는 꽤 재미나게 들었다. 곱씹어 볼 만한 요소가 여럿이었다.

침아가 강물에 빠진 경위하며, 하필 구해준 이가 우연히도 전 주인이었다는 점, 강물에 빠졌을 때 다쳐서 앞을 못 보게 되었다는 점. 그런데 이런 궁금증들은 애초에 한 가지 난제만 없다면 술술 풀릴 일이 아닌가. 문제의 당사자가 그날 일을 통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 머리를 다쳐 그렇다고는 하는데…….

휘는 의아했다.

어째서 그 인간 아이의 말에 의심을 갖는 자가 없었던 거지? 료는 그리 어리석은 녀석은 아닌데, 다만 그 아이를 되찾아왔다는 걸로 만족하는 건가?

왜 모르는 걸까? 그 아이는 분명히 어딘가가 이상한데.

등에 괸 방석이 배겨서 몇 번 뒤척거리자 뒤쪽에 시립해 있던 시녀들이 재빨리 달려와 방석을 더 가져다 드릴지, 의자를 다른 것으로 가져올지 등등을 물었다. 휘는 새삼스레 그들 셋을 한 번 훑어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고만고만한 어린것들은 다 청작이 자신의 일족 중에서 골라온 아이들이다. 순해 보이지만 사냥을 즐기는 매의 본성을 가진 암컷들.

휘는 그중 하나에겐 아까 들어와서 거절했던 차를 부탁했고, 다른 한 명에겐 어깨를 주물러 달라 부탁했다. 주어진 일이 없는 남은 한 아이는 무엇이라도 시켜달라며 칭얼대듯이 졸라왔다. 휘가 시킬 일이 없다며 곤란한 듯 미소 짓자 그 아이는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다른 아이를 옆으로 밀어내며 그럼 어깨 주무르는 일을 둘이 같이 하겠다며 사서 일을 만들었다. 등 뒤에서 두 아이가 잠시 밉지 않게 옥신각신하는 것을 들으면서 휘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런 것이 그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다. 암컷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는 상냥했다. 제아무리 강파르고 표독스러운 경우라도 그가 곁에 있으면 무언의 뜻을 담은 추파를 던져댔다. 미소와 함께 관심을 담은 말 몇 마디를 건네면 그 성정이 목석같은 이라 해도 그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때로 퍽 경계심이 강한 예도 보기는 했지만 그럴 때 휘가 일부러 무시하며 그 주변의 암컷을 골라 흠뻑 정을 주는 것처럼 굴면 질투로 몸이 달아올라 제 편에서 허물어지기도 했다.

아름다운 자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자라나는 동안 쌓여온 경험들로 인해 이미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특히 저만 못한 존재 때문에 뒤진다는 느낌은 그들에겐 고약한 것이다.

이제 갓 백이십 년을 산 휘 역시 그런 주목의 시선에 길들여져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퍽 즐기는 편이다. 그런 시선은 아무리 많아도 넘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주 가끔 예외가 생기면 불편해진다. 오늘 본 침아의 경우처럼 말이다. 침아는 휘를 대하는 태도가 덤덤하다 못해 쌀쌀맞았다.

탁자 위에 올려둔 오른손으로 투두둑하고 아무 생각 없이 탁자를 두드리면서 휘는 세우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참으로 매끄러웠지.’

새하얀 어깨는 찬물에 있다 나와서인지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싱그러움은 그 때문에 더욱 돋보였다. 침아가 물에서 걸어 나올 때, 보고도 시선을 돌린 다른 자들과 달리 휘는 느긋하게 감상을 즐겼더랬다.

눈요깃거리가 될 만한 몸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지난 몇 년간 또 훌쩍 자라 늘씬한 키에 가슴이며 엉덩이에 부드럽게 살이 붙어 갓 여자가 되어가는 풋내가 났다. 인간은 놀라울 만큼 빨리 성장한다는 것을 침아의 몸에 그려진 굴곡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자라는 게 유독 더뎠던 료가 지난 해에 느닷없이 불쑥 성장한 것도 아마 옆에 있는 그 아이의 영향이었지 싶다.

‘이미 품었을까?’

궁금했다. 아무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본 침아의 태도가 너무 스스럼없었다. 발가벗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데도 그처럼 태연할 수 있는 것은 어린것들의 특징이다.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보는 이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종의 위험을.

그때 화산 노파의 침소 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시녀를 찾는 목소리에 그의 어깨를 주무르던 것 하나가 대답하고는 총총히 달려갔다.

“어르신께서 깨셨나 봅니다.”

“그래, 부르시면 들어가 봐야겠구나. 수고했다.”

어깨를 주물러준 시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놓으며 미소 짓자 시녀는 천만의 말씀이라며 얼굴을 담뿍 붉혔다. 차를 따라주던 아이가 그 아이를 부러운 눈초리로 힐긋 쳐다보았다.

바로 이렇게 음(陰)은 환한 양(陽)에게 반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섭리이다.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무언가가 일그러졌다는 소리지 않은가.

무심히 그에게서 돌아서던 침아의 오른쪽 옆얼굴이 휘의 뇌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옅게 속쌍꺼풀이 진 갸름한 눈매를 감싸고 난 촘촘한 속눈썹은 그 자체로도 먹대로 눈화장을 한 듯하였고 깊은 눈동자는 묘한 호소력이 있었다. 깎아 붙인 듯 작고 어여쁜 코에 이어지는 날렵한 인중하며 그 붉은 입술은 전에도 감탄했던 바였다. 필경 미인이 되리라 짐작했지만, 그것이 들어맞는 것이 이처럼 즐거운 일일 줄은 몰랐다.

실로 고왔다. 아직 덜 여문 가냘픈 몸처럼 앳된 기운이 지금은 강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그 정도로 컸으니 다음 4년 안에는 또 얼마나 자랄 것인가. 봉오리만으로 그토록 좋은 향기를 내는 꽃이 만개한 순간엔 작히 어여쁠까?

아쉬운 것은 그 왼쪽 얼굴. 하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서, 아마도 나중엔 ‘굉장한 아이가 있긴 했는데, 결정적인 흠이 있어 결국 바라던 것은 보지 못했어.’ 따위의 소리나 하게 될 것이다.

“녀석, 이 늙은이가 애걸을 해서야 겨우 코빼기를 비추는구나.”

“할머님, 부르시지 않고요.”

안으로 부를 줄 알았는데 화산 노파가 직접 휘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나왔다.

“별스럽게 졸려서 깜박 잠들고 말았는데 네 녀석이 오려고 그랬나 보지. 좀 걷자꾸나. 오늘 볕이 좋지?”

“볕도 좋고, 유난히 따스하기도 합니다. 오는 길에 세우지에서 멱을 감는 산새도 봤는걸요.”

“그래? 암컷이었나 보구나.”

“어찌 아셨습니까?”

“네 녀석이 암컷이 아니면 쳐다나 봤을라구.”

“아하하하. 분명 그러합니다.”

농을 빌려 그의 못된 버릇을 꼬집는 말이었으나 휘는 구김살 없이 웃으며 선선히 인정하고 말 뿐이다. 다른 이라면 능청스럽게도 보이겠으나 휘는 그마저도 우아하게 보이는 재주가 있었다.

막 회랑으로 나서는 차에 객청 뜰을 밟는 다른 이들의 발소리가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화산 노파는 다시 찾아온 가진과 가선을 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부르러 보낼 참이었는데 수고를 덜었구나.”

휘는 다가오는 열 남짓 되는 방문객들의 맨 앞에 서 있는 가선을 알아보았고, 바로 곁의 가진을 보고서 단번에 그 동생보다 더 높은 점수를 주었다. 화산 노파가 벌써 세 차례 새를 날려 보내 전해준 말대로라면 ‘화통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 일품인 미녀’가 될 것인데 첫눈에 보기에도 활기찬 걸음걸이에 서글서글해 보이는 눈망울이 상당한 매력이었다.

화산 노파와 휘가 회랑에서 뜰로 내려서서 방문객들을 맞았다. 화산 노파의 소개로 가진과 휘가 인사를 주고받았다. 휘를 보면서 가진은 놀랍도록 솔직하게 첫인상을 밝혔다.

“잘생긴 분이란 것은 들어서 아는 바였지만 신랑감에 대한 이야기니 반은 과장이겠지 했는데 오히려 덜어서 말한 거였네요. 방금 가선이가 와서는 얼굴만 보고 반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기에 무슨 말인가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봤으면 정말 얼굴만 보고 반했겠어요! 전 아름다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요! 호호호홋.”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너무도 허물이 없는 신붓감을 보고 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화산 노파를 보았다. 화산 노파는 내가 뭐라더냐 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저택 안에만 있는 것도 답답하고, 어제 비가 왔다 그쳤으니 대숲으로 한 번 나가봄이 어떻겠냐는 화산 노파의 말에 일행은 그쪽으로 산보를 나가게 되었다.

“저희만 갈 것이 아니라 료도 불러서 함께 가는 것이 어떨지요?”

료가 저택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휘가 그리 제안하자 화산 노파가 료는 용무가 있어 아침에 출타한 참이라 했다. 이윽고 저택을 나와 대숲에 들어섰을 때 맑게 불어오는 대숲 사이의 바람을 만끽하며 휘가 말했다.

“료가 제 발로 세상 구경을 나가다니 자못 신기한 일입니다.”

“그 사이 제법 자랐지 않느냐. 너는 자주 봐서 모르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이젠 사내구실을 할 만도 하더구나.”

“그리 자주 보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저야 뭐 툭하면 방랑벽이 도져 여행길에 오르는 버릇이 있고, 집에 있을 때에도 그 녀석과는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마주치면 많이 보았다 하는 수준이지요. 지난해에는 글쎄요, 다 합쳐서 세 번쯤 얼굴을 봤으려나?”

“많아야 둘뿐인 형제간이면서 그렇게도 관심이 없었더냐?”

“관심 이전에 그 녀석은 절 극도로 싫어하는 걸요.”

“가랑비도 오래 맞다 보면 흠뻑 젖는 법이다. 네가 살갑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쌓아왔다면 아직도 그 아이가 네게 반감을 보이겠느냐?”

“저는 제 손을 물어뜯으려 하는 아이는 귀엽지 않아서요. 형이라고 무조건 동생을 귀애할 수는 없잖아요.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하고……. 그리고 할머님, 그런 충고는 우선 저희 아버지께 먼저 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휘가 장난스런 눈으로 화산 노파를 쳐다보자 화산 노파는 두 손 들었다는 뜻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에 내키지 않는 일은 죽어라 피해 다니는 것은 꼭 네 아비와 판박이구나.”

“그렇지만 할머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고, 마음이 다하면 그만두는 그 자체가 우리들 하늘을 나는 자들의 본성에 딱 어울리지 않습니까? 질곡에 얽매어 살아가는 것은 땅에서 사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지요. 제 두 날개에 걸고 전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살진 않겠노라 맹세할 수도 있어요.”

화산 노파는 그들의 뒤에서 따라오던 가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진낭, 이 아이가 이렇다네. 설사 이 녀석과 가정을 꾸린다고 해도 우직한 가장 노릇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우직함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자님의 말씀 자체가 그르다고도 생각하진 않아요. 자유롭게 사는 것은 멋진 일이잖아요?”

백이십 살 된 휘나 갓 구십 세를 넘긴 가진이나 까마득히 어린것들이란 것을 화산 노파는 잊고 있었다. 화산 노파는 쓴웃음을 짓다가 그 옆에 있는 가선을 보고 물었다.

“가선낭,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저는…….”

“눈치 볼 것 없이 솔직히 말해 보게.”

“저희에게 두 날개가 있긴 하지만 때로는 날개를 접고 땅에 내려앉아 쉬라는 뜻으로 두 발도 있습니다. 그 발이 없다면 하늘을 나는 두 날개도 결국엔 무용지물이 되겠지요. 영원히 날기만 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있다는 소릴 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호오…….”

가선을 바라보는 화산 노파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물며 휘조차도 가선을 새삼스런 눈으로 돌아보았다. 가진은 동생의 어깨를 찰싹 치면서 너 어디서 그런 멋진 말을 배운 거냐며 대단하다고 감탄이다. 가선은 가만히 어깨를 움츠리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한쪽은 철이 없다 못해 경박해 보이고, 다른 한쪽은 월등히 심사가 깊어 보이는 극명한 대조였다.

누구도 그 순간 가선의 뒤를 따르는 시종 정이 쓴웃음을 짓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날 밤, 휘는 모처럼 집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릴 그의 뭇 여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훌쩍 하늘로 도약한 그가 날개를 펼치며 한 번의 긴 비행으로 소리 없이 안착한 곳은 저택의 서쪽 깊숙한 곳, 료의 거처의 뜰이 내려다보이는 누대였다.

달빛이 내리쬐는 푸른 뜰은 주인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난간에 팔을 올려놓고 뜰을 내려다본 휘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 사이 퍽 변하였다. 멋없는 나무 몇 그루 있는 것 말고는 황량하기만 하던 뜰이 그 사이 화초와 꽃나무를 들여와 오밀조밀하기도 하였다. 여성의 손길이 닿았음이다. 물론 그럴 능력자는 달리 있지 않다. 그것이 신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리하도록 내버려둔 료가 신기했다.

“할머님 말대로 종종 얼굴을 보고 살 것을 그랬나…….”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난 구경거리를 손 사이로 흘려보낸 느낌이라 아쉽긴 했다. 서로의 행동반경이 거의 겹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그들 형제는 근 십 년 정도는 휘가 말했듯이 일 년에 서너 번쯤 얼굴 볼 일이 있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몇 해 전 겨울에 침아가 다쳤을 때처럼 말을 많이 섞는 것은 그중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때 그 일을 다른 식으로 풀어갔다면 형제가 친해질 만한 기회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침아에게 희롱을 걸었을 뿐인데 우송 녀석에게 시켜 그 아일 얼어붙은 세우지에 던져버렸다는 소릴 전해 들었을 때에는 내심 질리고 말았다.

그리 음습하고, 별 시답지 않은 일에 점착하는 기질이라니. 타고난 부족함에 기인하는 열등감이 그런 식으로 자라나나 싶어 동정할 만도 했지만 애초에 료에 대한 휘의 정 자체가 희박해서 그 정도로 따뜻한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어찌 그리 못났다 싶었다. 그리고 그 못난 꼬마와 어울려 놀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 더는 그쪽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했다. 저런 녀석을 굳이 살리려고 기를 쓴 화산 할머니가 참 가엾게 됐다고. 아니, 화산 할머니 이전에 저런 것을 품는 바람에 덧없이 죽어버린 그 아이의 일이 새삼…….

옛 생각을 더듬어 보는 휘의 귀에 바람결에 실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되어 대충 파악한 대로 가진이 이 밤에 또 연희라도 벌이나 하며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계속 듣는 사이에 그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휘는 다시 새가 되어 하늘을 밟았다.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너울너울 물결을 그리기를 얼마간, 마침내 그는 빠끔히 열려진 둥근 창을 발견했다. 휙 지나치면서 들여다본 창 안쪽은 불빛 한 점이 없이 어둑어둑했다. 그 방이 료의 침소라는 것은 금세 기억해 냈다. 다시 지나치면서 눈에 담은 방 안의 어둠 속에서 하얀 무언가를 발견해 눈에 담으며 창 안이 들여다보이는 야트막한 담의 기와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침아가 보료 위에 앉아 료의 것으로 짐작되는 새하얀 우의를 어깨에 걸친 채 비파를 퉁기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서리 맞아 시든 국화 거들떠보는 이 없고,

얼어 죽은 모란나무 봄을 그려 무엇하리.

연모하는 마음 한 떨기 꽃과도 같았으나

그 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것이라.

미인의 아름다움은 아직 쇠하지 않았건만

군자의 마음에 핀 꽃은 자취조차 흐리구나.

얼어 죽은 모란나무 봄을 그려 무엇하리.

얼어 죽은 모란나무 봄을 그려 무엇하리.

단순한 상사곡이라고 하기엔 반복되는 마지막 대목이 몹시도 처량했다. 비파는 계속 단조로운 가락을 연주하는 가운데 침아는 노래를 멈추고 우수에 잠겨 있다.

어린것이 참으로 처연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하고 휘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 그만 날개를 무심코 퍼덕거리고 말았다. 그 소리가 고요한 밤중 공기를 타고 비파 가락을 덮을 정도로 유난히 크게도 울렸다. 아차 하고 생각하였으나 이미 침아가 움직임을 그치고 창가를 돌아본 후였다.

침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주저 없이 다가왔다. 그가 뭐라 말을 붙일 틈도 없이 쾅, 창문이 닫혔다. 고리 걸리는 소리에 이어 촤르륵 발이 내려갔다.

완전히 그의 앞에서 닫혀버린 창 앞에서 휘는 난생처음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게 어떤 건지 배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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