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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고 (12/33)

11. 경고

며칠 몹시도 햇살 좋은 날이 이어진 끝에 이날은 새벽부터 보슬비가 오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엔 깨끗하게 개일 터이니 미루지 말고 저자에 나가야겠다. 올해엔 날이 일찍 풀려서 비가 꽤 잦을 테니까.”

창밖 하늘을 보며 료가 그렇게 말하자 머리를 빗고 있던 침아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건 좋은 비이지요?”

“비에 좋고 나쁨이 있더냐?”

“봄에 찬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머잖아 기근이 들 징조가 아닙니까. 배를 곯다가 죽을 뻔했던 제게 그런 비는 나쁜 비입니다.”

“응? 그런 일이 있었더냐?”

“예. 그 기억은 워낙 강렬해서 잊혀지지도 않았나 봅니다.”

어릴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 침아가 굶어 죽을 뻔했다는 말을 하니 료에게는 자못 흥미로웠다. 곱게 빗은 머리채를 가볍게 털듯이 흔들어보는 침아 곁으로 가면서 료가 물었다.

“그때가 몇 살쯤 되는 것 같은데?”

“그것까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얌전히 내려앉는 머리카락이 등을 덮었다. 그 머리카락을 보며 료는 새삼 둘이 함께 보낸 시간을 의식했다. 처음 보았을 땐 어깨에도 닿지 않던 그 더벅머리가 어느새 이렇게 자랐다. 고작 4년이 약간 넘었을 뿐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침아가 오고 나서 자신이 한 번의 성장을 했기 때문인지 훨씬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낸 듯한 기분이다. 내내 그의 방이었던 이곳이 침아가 없었을 때는 어떠했는지도 잘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침아는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오른쪽부터 땋기 시작했다. 땋은 머리끝에 물릴 댕기를 찾아 침아가 손을 뻗었는데 그것을 료가 슬쩍 발로 밟아 끌어왔다. 더듬더듬 거리며 바닥을 쓸던 침아가 이윽고 료의 장난을 눈치 채고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주인님께선 제가 눈이 이리되어서 아주 신이 나신 게지요?”

“신이 나다니, 또 엉뚱한 소리로 주인을 매도하는 게냐?”

“그런 게 아니면 주세요, 제 댕기.”

“댕기? 그거라면 저기 얌전히 있는데 왜?”

료는 바닥에서 주운 댕기를 침아의 왼편 뒤에 슥 던져놓고는 태연히 발뺌을 했다.

“저기 어디요?”

“어디긴 어디야. 여기.”

더듬거리는 침아의 손을 료가 잡아서 댕기를 잡게 했다. 침아는 그걸 꼭 쥐고선 볼멘소리를 했다.

“제가 이쪽에 두지 않았거든요? 항상 오른쪽에 두고 머리를 묶는데 이게 발이 달려 여기까지 왔단 말씀이세요?”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대체 내가 이런 걸 숨기고 말고 할 장난을 할 이유가 뭐라고.”

“그럴 이유가 없으시니 한심하단 말이에요.”

“이 녀석이 귀까지 잘못됐나. 내 그런 적 없다고, 맹세한다.”

침아의 귀를 잡아당겨 또박또박 말해 주니 부루퉁한 표정이던 침아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료의 얼굴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간지럽게 왜 귀에 바람을 불고 그러세요.”

“네가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그렇지. 이제 좀 들리긴 하느냐?”

“들려요, 들려요. 아이참, 간지러워요.”

앉은 채로 그를 피해 달아나는 침아를 료는 기어코 따라가면서 자꾸만 귀찮게 굴었다. 왼쪽은 그렇지 않은데 오른쪽 귀가 유독 약한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웃다가 결국 녹초가 되어 침아가 괴로운 기색까지 짓자 그제야 료가 심했나 하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보세요, 이렇게 걸핏하면 짓궂게 구시면서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떼시지.”

“방금 전엔 내가 과했다. 자, 어찌 화를 풀어줄까?”

“뭘 하시는 거예요? 내려주세요.”

침아가 쏘아붙이자 료는 멋쩍게 웃으면서 침아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서쪽 창문 앞에 내려놓은 뒤에 빗을 가져와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빗겨주려 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주셔요, 그러지 마시고.”

“이 정도라도 해야 화를 풀 것 아니냐?”

“화내지 않겠습니다. 주인이 몸종의 머리를 빗겨주는 것은 무슨 경우랍니까? 누가 보면 웃어요.”

“누가 본다고? 여기는 내 처소이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든 내 마음이지.”

그러면서 료는 태연히 침아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했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와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이 가볍게 일렁이다 그쳤다. 침아가 손수 만든 화장수를 발라 빗어낸 새카만 머리카락에서 화사한 꽃향기가 일었다.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럽게 빗겨지는 머리카락이 어쩐지 아쉬울 정도다.

“어디 내가 한 번 머리를 땋아주랴?”

“예? 됐습니다. 그건 진짜 제가 할게요.”

“이럴 땐 그리 해주시면 고맙지요, 라고 하는 거다.”

“정작 그리 말하면 또 주인님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한다고 하실 거면서.”

“그도 그렇구나. 하하하.”

부러 료는 더 낭랑하게 웃으면서 침아가 더는 못 말리게 수를 두었다. 머리를 땋기 시작하면서 그가 말했다.

“볼 때도 생각했지만 참으로 머리숱이 많구나.”

“예. 가끔은 귀찮습니다. 전에는 짧아서 좋았는데. 아, 말이 나온 김에 주인님, 저 머리를 자르고 싶은데요.”

“새는 깃이 풍성해야 아름다운 거다. 인간의 암컷에게도 그런 이치가 통하는 것 아니냐?”

“굳이 아름다움에 연연하지는 않습니다만……. 보시다시피 그런 말을 쓸 입장은 아니잖아요.”

머리를 땋는 일은 간단했지만 댕기로 묶는 일에서 료는 헤맸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침아가 땋은 머리를 앞으로 가져가 스스로 댕기를 드렸다. 료는 남은 다른 쪽 머리를 땋으면서 말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구나. 또 말하지만, 네 가치를 판단하는 건 내 몫이니까 네가 주제넘게 끼어들지 마라. 난 이렇게 새까맣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퍽 마음에 드니까 한 올이라도 네 멋대로 잘랐다가는 후환을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예, 예. 제 몸뚱이에 붙은 것이지만 주인님이 원하신다니 어찌 거역하겠나이까.”

툴툴거리는 침아의 말에 피식 웃고서 료는 진지하게 덧붙였다.

“그래, 잊지 마라. 네 몸에 붙은 터럭 하나까지도 다 내 것이다. 내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것이야.”

“너무 자신하지 마세요. 어느 날 불현듯 운몽산 기슭에서 산삼을 발견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무슨 소리지? 산삼을 발견하면 뭐가 어찌 된다는 거냐?”

“어쩌기는요. 저기 어디지, 아, 벽란도이던가? 하여간 아주아주 큰 저자에 가서 제일 좋은 값을 쳐주는 사람한테 팔아서 돈을 벌 거예요. 그 돈으로 속량을 하고 남은 돈으로 제 점포를 열어 상인이 되겠습니다!”

“허……. 네가 무슨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냐?”

“뭐든지 좋지만 먹는 장사도 좋겠지요. 하지만 주점 같은 건 몹쓸 사내들이 꼬일까 봐 싫고, 쌀장사가 어떨까 싶어요. 배를 곯지 않을 거란 점에서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돈이 있다손 쳐도 저 같은 문외한이 갑자기 점포를 여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지요. 큰 점포를 가진 상단에 들어가 궂은 일부터 차근차근 몇 해는 배워야 하겠지 하고 각오하고 있어요.”

“각오를 해?”

듣자 듣자 하니 가관이다. 오늘 느닷없이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전에도 종종 이런 생각을 했나 싶어 료는 정색을 했다. 홱 머리를 잡아당겼더니 침아가 아야, 하고 소리를 냈다.

“굳이 속량까지 해서 장사나 하고 살겠다는 게 네 꿈이냐? 배를 곯을 일을 걱정하는 걸 보니 우습기 짝이 없구나. 꿈을 깨서 미안한데, 운몽산에 산삼 따위는 없다. 그런 게 있었으면 내 진즉 캐서 약재로 삼았을 게다.”

“하아, 그렇습니까. 그럼 산삼은 됐고, 세우지에서 진주라도 찾아야 할까요.”

“멍청하긴. 세우지가 바다냐? 진주가 나게?”

“그럼 계곡물에서 사금이라도.”

“백 년을 물질을 해봐라. 사금파리 하나도 얻을 일 없다.”

“돌을 깨고 다닐까요. 광맥을 발견할 줄 어찌 압니까.”

“네 눈에 띌 만한 광맥이 우송이 눈에 이제껏 안 보이고 잘도 숨어 있었구나.”

모조리 퇴짜를 맞은 끝에 침아가 홱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주인님,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 없으십니까?”

료는 한숨을 쉬었다. 이 아이는 조금이 아니라 좀 많이 커야겠구나 생각하면서.

미시(未時)가 지났을 무렵 화산 노파가 심부름꾼을 보내 함께 쌍륙(雙六)이나 할 겸 놀러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여전히 안개처럼 비가 내리는 길을 료는 우산을 들고 걸어갔다.

평소라면 이 정도 비는 대수롭지 않게 맞고 갔거나 그도 아니면 우송이 쩔쩔매면서 기름 먹인 비옷을 펼쳐들고 주인의 머리 위를 가리느라 분주하든가 했을 것이다. 오늘은 그 둘 다 아니다.

평소와 달라진 이유는, 첫째로 우송이 없다. 우송은 날을 잡고 마구간에서 집 안의 마구며 수레를 전부 손보고 있는 터라 오늘은 빨라도 날이 저물 무렵에나 주인 앞에 얼굴을 비출 것이다. 둘째로 옆에 침아가 있다. 어차피 가보았자 해드릴 수 있는 일도 없고 하니 방에 남아 비파 연습을 하겠다고 침아가 주저하는 것을, 너 혼자 재미나게 놀라고 둘 것 같으냐 하면서 기어코 데려가는 길이다.

화산 노파가 머무는 객청이 가까워지자 관현(管絃) 소리가 한층 또렷해졌다. 난씨 자매가 먼저 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보렴. 여자들만 모인 곳에 내가 혼자 가서 어쩔 뻔했느냐?”

쿡 침아의 옆구리를 치면서 료가 투덜거리자 침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들만 모인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듣자하니 가진 아씨의 시녀들은 금을 타고 남자 시종들은 피리를 분다고 하던데요.”

“남장을 하고 있다 뿐이지, 사내라는 보장은 없다.”

“아하! 그런 경우를 예상 못했습니다. 남장이라……. 하필 이럴 때 눈이 보이지 않다니. 으음.”

놀라워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침아에게 료가 불쑥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게냐?”

“아, 늘 음식을 날라주시는 자명 아주머니가……. 잠시만요, 주인님이야말로 그런 건 어찌 물으십니까?”

“왜 묻느냐니? 물어서 안 될 걸 물었느냐?”

“묻는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져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의도가 불순하다니, 이 녀석이 주인더러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대답하기 곤란하니 그렇게 윽박지르면서 콩 머리를 쥐어박았다. 침아가 머리를 감싸며 칭얼거렸다.

“주인님, 한 가지만 하십시오!”

“무슨 한 가지?”

“저더러 솔직하라고 하신 말씀이 유효합니까, 아니면 귀에 달짝지근한 말이 듣고 싶으신 겁니까? 저는 계속 솔직하게 말하는데 이렇게 걸핏하면 야단을 듣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침아도 꿈틀하는 거 한 번 보여드려요?”

“……아주 패기가 만만하구나.”

저 우송도 흉내 내지 못할 배짱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알고 있을까? 우송이 그러면 조금쯤 뜨끔할 수도 있겠지만, 침아가 이리 발끈하고 나서 보았자……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치밀어오를 뿐이었다. 료는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참다가 마침 시야에 보이는 게 있어 말했다.

“과연, 지렁이도 제 말을 하니 나타나는구나. 네 발 앞에 지렁이가 있어.”

“앗, 밟으면 안 되는데, 어디요?”

“거기 오른발 앞이 아니라, 거기 왼발에서 반 자쯤, 오, 그래 제대로 밟게 생겼구나.”

“꺄아, 안 밟게 좀 해봐요!”

그러면서 침아가 깡충깡충 뛰는 모습에 료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저것도 비 오는 날이라 좋다고 밖에 나왔을 텐데 하필 밟혀서 죽으면 불쌍하잖아요, 꺄아, 어떡해, 뭔가 방금 밟힌 것 같아! 밟았어요? 제가 방금 밟은 거예요?”

제 치맛자락을 밟고 지렁이를 밟았냐고 사색이 되어 묻는 모습에 료는 웃느라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주인님! 웃는 건 나중에 좀 하시구요. 에그, 밟혔으면 불쌍해서 어째.”

침아가 시무룩해져서 아래를 내려다보지만 검은 천을 둘러놓은 눈에 무언가 보일 리 없으니 한숨만 푹 쉬었다. 료는 무서운 천적을 눈앞에 두고도 태평스럽게 제 갈 길을 가는 지렁이를 보면서 그러니 미물이구나 하며 겨우 웃음을 진정시켰다. 우산을 오른손에 고쳐 잡고 왼팔을 뻗어 침아의 허리를 감싸 훌쩍 들어 올렸다.

“다행히 밟히지 않고 잘 가고 있다. 자, 내 이리 널 들어주면 네 말대로 날 좋다고 놀러 나온 지렁이들을 밟을 걱정은 없겠구나. 그렇지?”

“지렁이들……이란 말씀은, 보이는 것이 그리도 많습니까?”

“글쎄, 어떨 성싶으냐? 그냥 네 발로 걸어가든가. 어차피 네 발에 밟혀 죽는다 해도 날이 좋아지면 개미들 밥은 되지 않겠느냐?”

침아는 턱에 손을 대고 퍽 심각하게 생각을 하나 싶더니 마침내 말했다.

“제 발로 가겠습니다.”

“그러려무나.”

도로 내려주었다. 그러자 침아가 료의 왼팔을 두 손으로 잡고 바짝 붙어왔다. 떨어뜨리려고 해도 소용없다는 듯이 힘을 주면서 침아가 말했다.

“지렁이가 없는 길로 걸어가 주셔요.”

호오. 그런 걸 생각해 보고 있었던 거군. 료는 싱긋 웃었다. 이쪽도 그에게 썩 나쁜 경우는 아니었다. 진지하게 그가 대꾸했다.

“애써 보마.”

그리하여 료는 멀쩡히 길을 가다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갈팡질팡 갈지자를 그리기도 하면서 이 때아닌 산책을 즐겼다. 침아가 온통 발치에 신경을 쓰느라 반 넋을 뺏긴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그에게 밀착해 오는 몸에서 오는 온기라든가, 또 자연스레 그의 팔에 겹쳐지는 가슴이라든가…….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훼방꾼이 보여 료는 장난기를 거두었다.

“료 공자님, 어르신께 가시는 길이시옵니까?”

“예. 쌍륙이나 놀자며 부르시어…….”

같은 이유로 초대되어 가는 게 틀림없는 가선과 마주쳤다. 정이 들고 있는 새빨간 해당화 빛깔의 우산 아래 엷은 복숭앗빛의 당의(唐衣)를 어깨가 드러나도록 걸치고 있는 가선의 모습에 료는 시선을 아예 그 뒤에 있는 정에게 두었다. 가까워지자 무언가 자욱한 향내가 났다. 그의 코에 익숙하지 않은 짙은 향기는 자극적이었으나 그에겐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런 기분을 겨우 내색하지 않는 것에 성공한 료에게 가선이 방긋이 웃으며 말해 왔다.

“어르신께서 지난 며칠간 저희 자매와 함께 하시면서 힘에 부치신다 하셨지요. 져드리려고 언니와 꽤 여러모로 머리를 썼는데도 그런 꾀를 내면 번번이 어른을 놀리지 말라시며 알아채버리시는 터라. 벼르신다 싶더니 오늘은 지원군을 부르셨나 봅니다.”

“제가 과연 지원군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쌍륙이라 하면 번번이 이 아이에게도 지는 것을요.”

료의 눈길이 침아의 얼굴로 향하자 가선도 힐끗 침아를 보고선 그에게 물었다.

“시녀 아이가 주사위 운이 좋은 모양이지요?”

“주사위 운도 그렇고……놀이가 일단 ‘노름’이 되면 무섭게 운이 좋아지는 특이한 녀석입니다.”

그 말에 가만있을 수 없어 침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집중을 해서 그렇습니다. 아랫것의 푼돈을 기를 쓰고 빼앗아 가려드는 주인을 상대하다 보면 세상없이 집중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뭔가 재물이 걸려야 놀이가 재미있다고 살살 꼬드긴 것이 꼭 네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런 말을 했다는 기억이 도통 나지 않습니다만…….”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에 봉착하자 침아는 시치미를 떼며 슬그머니 딴청을 피웠다. 그런 침아를 다시금 유심히 쳐다보는 가선의 눈에 자수정 머리꽂이가 들어왔다. 안광이 한순간 날카로워졌으나 가선은 다음 순간 웃었다.

“야시에서 저랑 놓고 겨루던 머리꽂이가 이 아이 차지가 되었군요. 정말 아차 하는 순간에 빼앗기고 말았지요. 과연 네가 운이 좋긴 하구나. 안목 있는 주인님을 둔 것도 그렇고.”

“어, 그러셨습니까? 제가 공연한 걸 사달라고 해서…….”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에 침아가 머쓱한 손길로 오른쪽 귀 위에 꽂아놓은 머리꽂이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아침 료가 그녀의 머리를 땋아주고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하면서 마침내 꺼낸 물건이었다.

머리를 땋는 기회에 그것을 준 건 좋았으나, 침아가 웬 거냐고 묻는 소리에 료는 네가 사달라고 졸라댄 거였다고 핑계를 대고 말았다. 침아는 의아해했다. 제가 이런 걸 사달랬다고 정말 사주셨단 말입니까? 하면서. 거기서 료의 거짓말은 한층 더 나갔다. 그 전날 밤 바둑을 둬서 내가 진 끝에 그리되었노라고. 그제야 침아가 수긍을 했다. 그리고 머리꽂이를 한참이나 만져보면서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거짓말은 했으나, 어디까지나 침아를 위해서 좋은 거짓말이었다고 료는 지금 이 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수정 머리꽂이는 침아에게 대단히 잘 어울리기도 했다. 머리꽂이로서도 이런 여자에게―료의 시선은 온갖 수식(首飾)이 난립한 가선의 화려한 머리로 향했다―가는 것보다 침아의 머리를 장식하는 편이 월등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말이죠, 내기 바둑에서 제가 주인님을 이기는 바람에 주인님께서 어쩔 수 없이 사셨던 거래요. 주인님께서도 종종 말씀하시지만 제가 가끔 그렇게 주인님 머리 꼭대기에 오르는 고양이처럼 주제를 모르고 설치거든요.”

침아가 그런 변명을 하는 것을 가선은 온화하게 보이는 얼굴로 듣고 있었다. 료는 맞는 소리긴 한데, 그런 소릴 이 여자 앞에서 늘어놓을 이유가 없다고 여겨 침아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침아가 한 술 더 떠 머리꽂이를 뽑아들었다.

“아직도 마음에 드시면 드릴까요? 제게 귀한 노리개도 보내주셨는데…….”

“호호. 아무리 탐이 나도 그래서야 쓰나. 모처럼 주인님이 주신 것이니 네가 아껴서 써주어야지. 주인님의 마음도 있잖니?”

가선이 거절하는 말에 한시름 놓으면서 료는 침아를 구박했다.

“너는 정말로 주제를 모르는구나. 저만한 지체의 분이 남이 써 버린 머리꽂이 따위를 받아서 기뻐할 리가 있겠느냐?”

본심은 이러했다. 감히, 이 몸이 선물해 준 것으로, 뭐하는 짓이냐!

침아는 말로 표현되는 소리만 알아들은 모양이다.

“아, 그도 그렇겠군요. 뭔가 답례를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더니.”

냉큼 침아의 손에서 머리꽂이를 가져와 도로 원래 자리에 꽂아주고는 료는 가선에게 딱딱하게 말했다.

“할머님이 오래 기다리시겠습니다. 서둘러 가지요.”

“예, 먼저…….”

길을 양보해 주는 가선의 손짓에 료는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기민한 눈치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침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질책했다.

“아씨가 양보한다고 먼저 가시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무슨 첩첩산중 오솔길 걸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길도 넓은데 양보하고 말고가 뭐냐? 걸음이 빠른 쪽이 앞서가는 거지.”

“쯧쯧. 진짜 궁금해서 묻는데요, 주인님은 나이를 어디로 드신 겁니까?”

“너야말로 해가 갈수록 간이 배 밖으로 나오려고 기를 쓰는구나.”

마찬가지로 혀를 차는 료의 대꾸에 침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예, 이렇게 한 십 년만 더 살면 뱃속에 간밖에 없어서 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이 이 모양이어서야 눈도 못 감고 죽겠네요. 주인님, 저는 그렇다 치고 여성분에게는 조금만 더 상냥해지시면 어떻겠습니까?”

“뭐 하러?”

“그야 존중을 하는 의미로…….”

“왜?”

“어, 왜냐고 물으신다면, 여성은……어미가 되지 않습니까?”

“암컷이 어미가 되고 수컷이 아비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음양의 이치인데 네 뜻대로라면 수컷은 어미가 못되니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게로구나.”

“아니요, 그게 그런 뜻이 아닌데 말이지요.”

“게다가 저 낭자는 지금 포태를 한 걸로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아닙니다, 제가 공연한 소릴 했습니다. 이런 이야길 꺼낸 제가 바보이지요.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에휴우.”

이야기는 그렇게 결론이 났다. 한숨을 쉬는 침아를 보면서 료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얼마쯤 간격을 두고 뒤따라가면서 가선은 앞서 가는 둘의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인간의 계집아이는 그렇다 치고, 료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챌 법도 하건만 한 번 무심히 돌아보는 법도 없이 화산 노파가 묵는 객청으로 가는 길 내내 오직 옆의 아이에게만 시선을 주었다.

“아씨.”

문득 정이 가선의 소맷자락을 흔들어 가선은 자신이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었음을 알았다. 정이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의 손에 명주수건을 들려주었다. 가선은 다시 소맷자락 속으로 두 손을 감추었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걸음을 유지하면서 긴 소맷자락 속에서는 새하얀 명주수건을 잡아 비틀었다. 정말은 수건을 찢고 싶은 것을 찢을 때 나는 소리를 염려해 참고 있다.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을 때 뭐든 찢고 부수는 것이 가선의 값비싼 버릇이었다.

이윽고 객청에 이르렀다. 아직 날이 어둡지 않은데도 활짝 열린 문들 사이로 붉은빛이 환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화산 노파와 가진은 팔각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가진의 시녀 둘이 칠현금을 타는 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악기가 잠잠하여 조용하다 싶었다.

“어서들 오렴. 오, 가선낭과 함께 오는 모양이구나?”

침아가 댓돌에서 신을 벗으면서 조금 지체하느라 벌어졌던 간격이 도로 좁혀져 함께 들어오는 이들이 화산 노파에게는 어울려 온 것처럼 보였다. 료가 또 쌀쌀맞은 소리를 무심하게 내뱉기 전에 침아가 대답했다.

“예, 오는 길에 가선 아씨를 뵈었습니다. 물론 제가 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요. 저는 여전히 안 보입니다.”

뜬금없이 우습지도 않은 말을 횡설수설하는 것에 료가 낯을 찡그렸지만, 그게 누군가에겐 통했는지 가진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인간 중에 광대 노릇을 하는 것들이 있다더니 네게도 그런 피가 흐르는가 보구나? 어르신, 익살꾼을 곁에 두고 살면 가끔 지루하다 싶을 때 퍽 좋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것을 한둘 사들일까 봐요. 전에 가선이 야시에 갈 때 따라가 보는 건데.”

“여기서 더 수행원을 늘릴 셈이란 말인가?”

화산 노파의 슬쩍 비꼬는 말에도 가진은 진지했다.

“다들 노래하고 춤추는 재주밖에 없는 걸요. 절 웃기는 재주가 있는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기 너, 이름이……하여간에 사람의 아이야, 네 전 주인에게 그런 상품도 있었니?”

“그런 용도의 아이는 없었지만, 원하신다면 그런 아이를 구해 주실 수는 있을 겁니다. 세상엔 없어져도 찾는 이가 전혀 없는 인간의 아이가 퍽도 많으니까요.”

“아아, 가여운 일이구나. 인간들은 어찌해서 낳아서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그리 많이도 낳는 걸까? 아이를 몇씩이나 낳는 인간의 암컷으로 태어나는 것은 정말로 못할 짓이야! 그러고 보니 사람의 아이, 너는 그 무서운 종족의 짐을 덜었으니 정말로 운이 좋구나.”

가진의 화제 전환은 너무 빨라서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침아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두 번째로 운이 좋다는 말씀을 듣는 걸 보니 제가 참말 운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응? 첫 번째는 누구였는데?”

“가선 아씨께서 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좋은 주인을 만났다고요. 그래서 저도 좋은 주인님에 어울리는 좋은 시녀가 되겠다고 새삼 다짐을……. 아, 주인님, 아직 서계십니까? 어서 앉을 것을…….”

“아직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 참 고맙구나.”

그제야 비로소 주인 생각이 났는지 챙겨주는 시늉을 하는 침아를 보고 료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뭐든 재밌는 일로 만드는 재주가 각별한 가진이 또 크게 깔깔거리며 웃었고 그 웃음은 화산 노파와 가선에게까지 번졌다. 눈도 안 보이는 시녀가 주인의 의자를 찾아 허둥지둥하는 것이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었다. 침아는 기민하게도 익살꾼 역을 자청해 한층 더 호들갑스럽게 의자를 찾느라 야단법석을 떨어 좌중을 웃겼다.

다만 료가 그 웃음의 물결에 끼지 않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탁자를 둘러싼 빈 의자가 둘뿐이니 이대로라면 침아는 다른 하인 무리들처럼 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는 문가에 시립해 있던 집안 하인 중 하나에게 손짓을 해 의자든 방석이든 더 내어오라 일렀다.

하인이 의자와 방석을 모두 가져왔을 때 이미 가선은 자리를 잡고 앉은 후였다. 하나 남은 자리에 앉기 전에 료는 침아를 자신 가까이에 놓은 의자에 앉히는 일부터 했다.

“서 있어도 되는데.”

“괜히 다른 이들에게 걸리적거리고 싶으냐?”

그 말에 침아가 군소리 없이 의자에 앉았다. 가진이 오른편에 앉은 가선의 손등을 흔들면서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렴, 료 공자님은 참으로 다정하시지?”

“저는 야시에서 뵐 때부터 그리 생각했는걸요. 저 고운 머리꽂이도 료 공자님의 선물이랍니다.”

가선의 말에 화산 노파가 유심히 침아를 바라보았다.

“호오, 료 네가 그런 걸 다 주었더냐?”

료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침아는 방금 전에 까불던 것과는 달리 얌전히 무릎에 두 손을 모으고 없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좌중의 시선은 그녀의 머리에 모여 있었다.

“그래, 곱구나. 그런데 주는 건 둘째 치고 네가 저런 걸 사는 모습이 통 상상이 되지 않는구나. 숫기 없는 녀석이 어찌 여자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을꼬?”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답니다.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 혼이 났지요.”

“응?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가선의 말에 화산 노파가 관심을 보였다. “실은…….”하고 운을 떼는 가선의 말을 끊듯이 료가 헛기침을 했다.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쌍륙을 놀자시기에 온 건데 입방아에 오르는 게 주된 일이라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여자들 대중없는 수다로도 버거운데.”

“저런 저런. 이 녀석이 이리도 멋없는 녀석이야. 여전히 어릴 때처럼 툴툴거릴 줄이나 알지. 숙녀에게 어찌 대해야 할지 통 알기를 하나.”

료의 말에 얼굴을 붉히고 입을 다문 가선을 위로하듯 화산 노파가 료를 나무랐다. 료 뒤의 의자에 앉아 있던 침아가 바로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진이 그것을 보고 또 웃었다.

“저 아이도 그렇다고 동의하는 모양인데요? 반 첩실이 인정하는 거라면 뭐 할 말 다한 거죠. 료 공자님이 보기와는 다르게 숙맥이신 게 나는 퍽 귀엽던데. 호호홋.”

가진의 빠른 수다에 료와 침아 모두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료가 못마땅함을 표정으로만 드러내는 것과 달리 침아는 말로 표현했다.

“반 첩실 같은 거 아닙니다. 저는 그저 몸종일 뿐이에요.”

“응? 괜찮아, 허물 삼는 거 아니니까. 우리에게도 터울이 꽤 지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몸종 하나를 퍽 귀여워한단다. 나중에 정실을 들일 때가 되면 그 아이도 정식으로 소실 대접을 받게 될 거야. 지금은 그냥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긴 한데, 다 아는 사실을 없는 척한다고 해서 없어지니? 정실이 먼저든 소실이 먼저든 정실은 정실이고 소실은 소실인 거지.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해. 아니, 많이 이상해. 어차피 자연스러운 음양의 끌림일 뿐인데.”

자신의 동생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주 기정사실처럼 못을 박았다. 침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무어라 반박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가선이 웃으며 언니의 말에 보조를 맞추었다.

“어차피 공자님의 건즐(巾櫛)을 받들어 모시는 입장이니 반은 첩이란 말이 틀리지도 않지 않느냐. 공자님과 혼인을 하게 될 규수 역시 네 일을 이해 못할 정도로 용렬하지는 않을 게다.”

장소도 그렇고 이야기의 흐름상 침아가 강하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부인할 경황이 아니었다. 주인들의 대화에 너무 끼어드는 것도 경우가 아니다. 침아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 한숨을 쉬면서 답답한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자단목을 깎아 만든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던 료는 힐끗 그런 침아를 쳐다보았다. 뺨이 붉어져서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것이 머쓱해하는 것도 같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어쩐지 흐뭇해졌다. 그런 기색을 감추려고 부러 크게 헛기침을 하였다.

“정말 놀리시는 건 그쯤 하시고 놀이나 시작하지요. 선후를 정해야 할 것인데, 먼저 주사위를 던지시겠습니까?”

“어머, 그 전에 편부터 나누어야지요.”

가진이 탁자에 다가앉으며 의욕을 보였다. 료가 어리둥절해했다.

“편은 이미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저와 할머님이 한편이고, 두 분께서 또 한편이시니.”

“그리 나누어 버리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어르신, 주사위를 저마다 한 번씩 던져서 높은 숫자가 나오는 둘이 한편, 낮은 숫자가 나오는 둘이 한편으로 가르지요.”

“흠. 자네 생각이 좋은 듯싶구먼.”

“좋아요, 그럼 말을 꺼낸 김에 솔선해서 제가 먼저! 어멋, 3과 5! 8이라니 어중간한 숫자네? 자, 어르신 차례입니다.”

“어디. 이런……1하고 2라니 턱없는 숫자가 나왔군.”

계속 수다만 떤다 싶더니 편 가르기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가선과 료는 동시에 주사위를 던졌다. 숫자의 합은 가선이 8, 료가 10이다. 이미 화산 노파와 료가 한편이 될 가능성은 멀어진 가운데 가선과 가진이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가진이 5, 가선이 7이 나왔다.

“좋아요, 신진과 구진의 다툼이 되었군요. 이왕 하는 놀이, 즐겁게 해보자구요. 그럼 우리 무엇을 걸고 할까요?”

“좋을 대로 말해 보아.”

이미 가진의 활력에 푹 빠진 화산 노파는 그저 웃으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료는 안 그래도 가선과 같은 편이 된 것이 떨떠름한 상황에 내기까지 걸리자 더욱 의욕이 가셔서 잠자코 있었다.

“진 편이 이긴 편을 위해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은 어떨까요?”

“할머니를 생각하셔야지요. 할머니께서 그런 일을 어찌하신다고…….”

“호오, 료 이 녀석 무조건 너희 쪽이 이길 거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냐? 길고 짧은 건 대어 봐야 알지.”

“아닙니다, 할머니.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어떤 뜻이든 간에. 나는 가진낭의 뜻에 찬성이다. 우리가 지면 춤은 가진낭이 추고 내가 노래를 맡지. 너는 너희 편 일이나 걱정하도록 해.”

“에…….”

료는 자기편을 들 줄 알았던 화산 노파가 그리 나오자 당황했다. 만에 하나 질 경우를 생각해 보니 얼굴색이 어두워질 정도였다.

“곤란합니다. 다른 것을 걸지요.”

“곤란해 하시는 게 료 공자님뿐이네요. 삼 대 일로 그리하는 걸로 낙찰입니다.”

가진의 낭랑한 목소리에 료는 가선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런 조건이 괜찮으신 겁니까?”

“어머, 료 공자님, 우리 가선이의 솜씨를 모르시는군요. 춤은 물론 노래도 아주 잘한답니다. 저는 산만하고 의욕만 넘쳐서 제 흥에 놀기 마련이지만 가선이는 정말 제대로 배워서 춤추는 모습도 그림 같고 노래를 하면 바다가 멈추고 산이 돌아볼 정도라지요.”

“언니가 과장을 하는 거예요. 그 정도는 아니랍니다.”

“료야, 걱정은 너 하나만 해야 할 게다. 나도 본 바가 있어 말하는데 가선낭은 내 생전에 다시 볼까 싶은 재녀란다.”

가선은 수줍어하며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가진과 화산 노파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녀의 솜씨를 칭찬했다. 료는 난감해하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질 경우엔 침아에게 대신 노래를 시키지요. 그것은 허락해 주십시오.”

“세상에! 어르신께서도 직접 노래를 하시겠다는데 새파랗게 젊으신 분이 못 하겠다 빼시는 겁니까? 어르신, 이런 법도 있나요?”

“없지. 암, 없고 말고.”

호들갑스런 가진과 거기에 장단을 맞추는 화산 노파는 합이 착착 맞았다.

“저는 정말로 노래며 춤에 재주가 없습니다. 비파도 간신히 타는 처지인데 무슨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보고 싶으시기에…….”

“왜요, 재미나겠네요, 주인님. 기왕이면 춤을 추심이 어떠실지요?”

조용히 있던 침아가 그렇게 말해 오자 가진이 눈을 빛냈다.

“저 아이가 저런 말을 하는 거 보면 료 공자님이 사실은 춤을 퍽 잘 추시는 거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춤 같은 거 이 아이 앞에서 춰 본 역사가 없습니다. 넌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료가 인상을 쓰며 침아를 쳐다보자 침아가 밝게 말했다.

“어차피 주인님이야 처음 추시는 춤 잘 출 리 없으니 못 본다 해서 아쉬울 것은 없지만 가선 아씨께선 노래나 춤 둘 다 잘하신다지 않습니까. 춤은 보지 못해도 아씨의 노랫소리는 듣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주인이 곤경에 처하건 말건 저는 저에게 이로운 길을 취하겠다는 욕심이다. 얄밉기 짝이 없어서 료가 콩, 머리를 쥐어박았다. 침아가 입술을 비죽였다.

“아이참, 둘 다 싫으시면 이기시면 될 거 아닙니까. 왜 애꿎은 저한테 화풀이시래요. 속 좁으신 거 대놓고 자랑하십니까?”

“너 정말 돌아가서 두고 보자.”

보는 눈만 없었다면, 하고 이를 갈면서 료가 돌아앉았다. 가진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화산 노파에게 귓속말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

“어린 분이라 그런지 참으로 해맑군요, 둘째 공자님은.”

“그것을 볼 줄 알다니 자네의 안목도 적이 높구먼.”

다 들리는 귓속말에 료는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게다가 뒤에서 침아가 킥킥대며 웃기까지 했다. 다시금 돌아가기만 하면 단단히 두고 보자 작심했다.

가진의 편이 선공이 되었다. 화산 노파가 주사위를 던졌고 처음부터 12가 나왔다.

“처음부터 쌍륙이에요! 궁으로, 어서 궁으로!”

가진이 몸을 일으켜 나무판 위의 말을 이동했다. 가선이 주사위를 료에게 주었다. 먼저 하라는 그녀의 눈빛에 료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던졌다.

“쌍륙!”

굴러가다 멈춘 두 개의 주사위 눈을 보고 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치고 말았다. 한순간의 정적. 그것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침아의 웃음소리였다.

“하하하하하, 우리 주인님 쌍륙 나왔다고 좋아서 일어나신 거 맞죠? 하하하, 춤 안 추시려고 아주 목숨 거셨어. 아하하, 아하하하하!”

그것을 신호로 다른 이들 모두가 웃기 시작했다. 료는 조용히 앉았다. 창백한 얼굴에 속절없이 홍조를 드러내며 거듭 다짐했다.

침아. 너 이 녀석, 두고 보자.

결의의 힘인지 운이 좋은 침아가 있어서였는지 하여간 오늘 세 번의 놀이 모두 이겨서 료는 쑥스러운 꼴을 보이는 일만은 모면했다. 놀이가 파하고 다들 돌아간 뒤 료와 침아가 화산 노파와 저녁까지 함께 들었다. 비도 그쳤고 해서 그만 일어서려는데, 화산 노파는 료에게 침아를 잠시 두고 가라 일렀다. 료가 왜 그러시느냐 묻자 화산 노파는 침아의 옷 마름질 때문이라고 이유를 댔다. 안 그래도 야시에서 샀던 비단으로 침아의 옷을 지어주는 일로 가재인 청작에게 쓸 만한 시녀를 찾아 달라 한 참이었다.

“그 일은 청작에게 말을 해두었는데요.”

“그래. 청작에게 듣자하니 내게 보내온 시녀 중 하나가 여자 옷도 잘 짓는다는구나. 저 북쪽에 있는 것들의 옷도 꽤 자주 지은 아이란다.”

“흠. 그렇다면야…….”

북쪽 후원에는 휘를 모시는 여자들이 머물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떠난 여자도 있고 들어온 여자도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료는 아무래도 관심은 없다. 다만 그 여자들의 입성 하나는 늘 화사하다는 걸 알고 있다.

“기다렸다가 끝나면 데려가지요.”

“왜? 옷 마름질하는 걸 구경할 참인가 보지?”

“발가벗고 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료와는 달리 눈이 보이지 않는 침아는 목소리만 듣고도 뭔가를 더 빨리 알아챘다. 침아가 말했다.

“어쩌면 그리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대충 입어 버릇해서 그렇지 여자들 옷은 좀 복잡합니다.”

“그래. 대충 입은 건 사실이지. 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어서 퍽 답답해 보이는 걸 모르겠느냐? 치수를 제대로 재어 지어야지, 아직도 자라는 아이인데.”

화산 노파가 침아의 옷을 가리키며 말하자 료는 마땅히 할 말이 없어 눈만 깜박거렸다. 그러다 슬쩍 인상을 썼다.

“정말로 그렇게까지……꼭 다 그렇게……?”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으냐? 얼굴이 벌게져서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할머니, 제 얼굴이 어디 가요?”

“어머, 주인님. 엉큼하셔라.”

“아, 아니다. 할머니가 괜한 말씀을 하시는 게다, 내 얼굴은 멀쩡하다고.”

변명이 아니라 참이었지만 말하다 보니 조금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짓궂은 화산 노파 때문에 수세에 몰린 료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먼저 일어났다.

“그럼 먼저 돌아갈 테니, 일이 다 끝나면 누군가 붙여서 보내주십시오.”

그리 해주겠다는 화산 노파의 말을 듣고 결국 료가 밤 인사를 올리고는 머뭇거리며 물러갔다.

“저 녀석 아주 간 게 아니라 중간쯤에서 기다리고 있을 작정인가 보다. 서성거리고 있을 게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구나.”

옷을 마름질할 시녀가 들어와 침아에게 겉옷을 벗게 하고선 여기저기 치수를 재어 기록하는 동안 화산 노파가 차를 마시며 그런 말을 했다. 침아가 변명하듯 말했다.

“제가 눈이 이리되어 걱정하시는 거지요. 처음 이 댁에 왔을 때 어르신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저분은 퍽 상냥하십니다. 자기 것에게는.”

“그래. 내 말이 맞지?”

화산 노파는 온화하게 웃었다. 잠시 동안 방 안엔 작은 화로에 올려놓은 놋쇠 주전자의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만이 유난스레 들렸다.

“다 마쳤습니다.”

옷 치수를 다 잰 시녀의 말에 화산 노파가 고개를 들더니 침아에게 옷을 마저 벗으라 일렀다. 침아와 시녀 모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대충 겉옷만 몇 벌 해주고 말 일이 아니야. 그간 네 일을 챙겨준 여자가 아무래도 없었던 듯하니 오늘 세심히 해두어야겠다. 뭘 멍하니 서 있누? 여자들만 있는 곳에서 부끄럼을 타느냐? 아니면 평소에 잘 씻지 않는 모양이지?”

“예 온 이후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목욕을 꼭 하고 있습니다. 명색이 베개인데 퀴퀴한 냄새가 나면 안 되니까요.”

“그럼 되었구나. 자, 어서. 뭣하면 속속곳은 입고 있어도 좋다.”

결국 침아가 적삼이며 단속곳에 고쟁이까지 주섬주섬 벗었다. 속속곳 하나를 남기고 오도카니 서 있는 그녀를 보는 화산 노파의 눈이 적이 흡족한 빛을 띠었다. 목과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팔다리 하며 잘록한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선들이 나긋나긋하도록 가냘프다. 탐스럽다 싶을 만큼 부풀어 있는 가슴은 모양새도 봉긋하니 예뻤다. 거기다 피부색은 어쩌면 저리도 고울까. 새하얀가 싶으면 은은하게 분홍빛이 돌아 요염하리만치 붉은 입술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비록 자신과는 다른 종이긴 하나 아름다움을 대하는 느낌은 비슷했다.

“정말로 얼굴에 남은 화상, 그 하나가 없었다면 너는 인간 세상의 어떤 사내라도 후려낼 만한 미희가 되었지 싶구나.”

“그게……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 할 일은 아니죠?”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역시나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화산 노파는 이 아이는 처음에 살 때부터 어딘가 세상사에 달관한 듯한 기벽이 있었지 하면서 웃음 지었다.

“그래. 어차피 내 감상일 뿐이고, 네가 세상에 나갈 일이 있을 리도 만무하니 말이다. 그리고 료에겐 네가 천하절색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겠지.”

침아는 추운지 부르르 떨면서 어깨를 움츠리고 팔을 문질렀다. 그 전에 화산 노파가 시녀에게 눈짓했다.

“그 나이에 아직 배두렁이 하나 변변찮게 없어서야 쓰겠느냐. 속에 입는 것이라고 허술히 생각하지 말고 이번에 마련해 주는 걸 제대로 챙겨 입도록 해라.”

머쓱해하면서도 침아는 시녀가 가슴이며 허리 등을 실로 재어보는 것도 묵묵히 참았다. 옷을 입어도 좋다는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훌렁훌렁 입는 모습이 꼭 사내애 같았다. 화산 노파는 후훗 하고 웃으면서 침아에게 줄 차 한 잔을 따랐다. 시녀가 물러가고 방에 둘만 남았을 때 화산 노파가 침아를 자신의 옆자리로 데려와 앉히고 차를 마시게 했다.

“자, 또 한 가지 내가 가르쳐야 할 것이 있구나. 배울 준비가 되었느냐?”

“말씀만 하십시오. 침아는 상당히 명민하다고 자부합니다. 적어도 우송 아저씨에겐 뒤지지 않습니다.”

화산 노파는 과연 자신이 이 말을 할 시기인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찬 이슬을 맞으며 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료를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화산 노파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침아의 입가에 담뿍 담겨 있던 미소가 조금씩, 조금씩 엷어져 갔다.

화산 노파의 예상이 그대로 맞았다. 화산 노파가 길잡이로 붙여준 시녀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개회나무 옆을 지나갈 때 나뭇가지에 앉아 줄곧 기다리고 있던 료가 사뿐히 지상에 내려앉았다.

“이제 되었다. 너는 그만 돌아가 보거라.”

그의 말에 시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료는 침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비 온 끝이라 그런지 공기가 춥구나.”

확실히 어깨에 둘러진 료의 팔이 여느 때보다 차다. 한데서 계속 기다려서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침아는 고개만 갸웃하고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왜 이리 조용한 게냐?”

“이럴 때도 있어야지요.”

“네 전적을 생각하면 네가 아무 말도 않고 있으면 이 녀석이 또? 싶어진단 말이다.”

“눈도 안 보이는데 말까지 끊으면 그야말로 식충이가 되겠지요.”

그리 말하고선 침아가 문득 웃었다.

“기억나십니까? 전에 충아로 개명하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암, 기억하지. 내가 너처럼 머리를 다친 적이 있더냐?”

“다친다 해도 저처럼 되시진 않겠지요.”

“그렇게 다칠 일부터가 없겠지. 정말 너는 어쩌자고 강물에 빠져서는.”

이 아이를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불과 얼마 전이라는 게 료는 믿기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답답했던 기분을. 그 먹먹했던 기분을. 제대로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앉은 채로 눈을 붙였다가 퍼뜩 눈을 떠 보면 곁에 아무도 없어 어리둥절해하곤 했다. 그 어둠. 온기 없는 방. 추위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추위는…….

“어쩌자고 빠졌을까요. 모르지요, 지금 저는 약한 인간에 불과하니 주인님께는 별것 아닌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을 수도 있고.”

키득 웃은 침아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에 두르고 있던 검은 천을 풀었다. 하늘을 보고 싶은 듯 잔뜩 인상을 쓰면서 응시했다. 비가 그친 하늘은 어느덧 맑게 개어 푸르른 어둠이 끝이 없었다. 무수히 반짝이는 별의 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침아의 목소리는 불현듯 나지막해졌다.

“아니면 전조일까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주인님 앞에 나타났듯이, 또 어느 날 그렇게 휙 하니 주인님 앞에서 사라질 신세라는 뜻의. 그도 아니면…….”

차가운 손이 날카로운 아픔을 남기면서 침아의 목을 움켜잡았다. 한순간 숨을 쉴 수 없게 된 상황에 얼어붙었다가 막 벌어지려 하는 그녀의 입술을 기묘하리만치 부드럽고도 서늘한 어떤 것이 강렬한 힘을 실어 덮어 눌렀다.

그 부드러운 것은 살아 움직였다.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침아의 붉은 입술에 맞물려 격하게 요동치는 그것은 짙은 자색의 빛깔과는 달리 온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맞닿은 침아의 입술 위에서 그것은 뜨거움에 가까워져 갔다. 그것이 문득 탐욕스러운 움직임을 그치고 속삭였다.

“방금 나는 널 죽일 수도 있었다.”

침아는 침묵했다.

“인간은 아주 짧은 시간만이라도 숨을 쉬지 못하면 죽게 마련이지.”

분명히 그렇다.

“굳이 목을 부러뜨리지 않더라도 이 가느다란 것을 적절히 건드려 죽일 수 있는 방법도 알아. 급소라고 하는 것, 말이지.”

그 또한 그렇다. 거기까지 가지 않고 다만 조르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도 있다. 그리고 료는 한 손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침아는, 방금 전에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료에게 향한 침아의 무기력한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보였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왜?’라는 어리둥절함이다. 료가 대답했다.

“널 찾은 기쁨이 퍽 컸기 때문에 경고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지 뭐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침아야, 내 귀여운 아이야.”

보드라운 부름과 함께 또 한 번 그것이 그녀의 입술을 삼킬 듯이 훑었다. 그것의 정체가 료의 입술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침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감기지 않고 커다랗게 떠 있는 그녀의 눈 위의 눈썹을 어루만지며 료가 중얼거렸다.

“날 배신하지 마라. 꿈에서라도. 알겠느냐?”

“무슨…….”

침아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고 경직됐던 얼굴에 경련이 일듯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경고를 이리 무섭게 하십니까? 한낱 몸종에 불과한 것한테 배신을 당해 봤자지. 방금 진짜 오금이 저려서 오줌을 지릴 뻔했습니다. 이크, 오줌이라니, 제가 무슨 말을,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주인님. 비밀이요, 비……밀.”

침아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쉿 하고 표시를 하는 것을 료가 떼어냈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이번에는 살며시 포갠 후, 오래오래 떼지 않았다. 침아의 목을 쥐고 있던 손도 부드럽게 풀려 그녀의 머리를 받친 모습이 되었다. 다른 손은 침아의 몸을 끌어당겨 그의 품으로 데려갔다.

료의 품속에서 퍽 오랫동안 침아는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한참 만에 그 눈이 깜박인다 싶을 때 그녀가 미약한 반항을 했다. 머리를 저으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료는 입술을 떼었지만 그녀가 품에서 벗어나게 두지도 않았다.

“너는 내게 한낱 몸종 같은 게 아니다.”

“주인님, 이러시지 마세요. 저 침아입니다, 걸핏하면 주인님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하는 못된 하룻강아지 침아라고요. 주인님, 들어보세요, 제가 눈치가 빨라서 아는데요, 지금 이 댁에서 머무는 난씨 댁 아씨 중에서 둘째 아씨는 틀림없이 주인님을 흠모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화산 어르신 역시…….”

료가 그녀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한 일 년쯤 더 자라게 허락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가 빙긋이 웃더니 그녀의 귀에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내가 잠깐 바깥 구경을 하고 돌아온다 하였지. 짧으면 이틀, 길면 사나흘쯤 걸릴지 모른다. 돌아오는 그 밤에, 내 너를 품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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