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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애지중지 (11/33)

10. 애지중지

누군가가 얼마나 명민한가 하는 정도는 곤경에 처했을 때 제대로 드러나는 법이다. 적어도 이번 일로 인해 료는 침아의 명민함에 대해 기대했던 수치를 높였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아……. 그게 아니면 감각이 좋다고 해야 할까?”

“몸을 잘 쓰는 것 역시 머리가 좋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비록 체격은 보잘것없지만 암컷에게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지요. 으흠.”

우송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째서 이 녀석이 기고만장한 표정이 되었는지 료는 알 수가 없어서 쳐다보았다. 혹시 이 녀석은 스스로가 굉장히 민첩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료는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우송의 흐뭇해하는 표정이 하도 당당해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알고 보면 우송이 여리다고 한 침아의 말에 굳이 구애된 것은 아니다.

다시 료는 뜰을 내다보았다. 해가 저물녘이라 햇볕이 딱 그의 뜰에 알맞게 내리쬐고 있다. 이 시간이 되어서야 햇살을 흠뻑 마시는 뜰의 화초들처럼 침아도 밝은 햇살 아래를 기분 좋게 거닐고 있다.

본디 료의 처소는 서향이라서 볕을 많이 필요로 하는 화초를 심지 않았다. 자귀나무와 목련이 한 그루씩 있었을 뿐이나 침아가 들어오고 그 이듬해부터 침아가 원하는 대로 유채를 비롯해 원추리며 수국, 구절초에 동백 등 여러 화초를 심었다. 괜한 일을 한다며 료가 심드렁하게 반응했었지만 침아는 자신이 잘 키울 거라며 자신만만했었다. 그것은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원래 있던 자귀나무며 목련도 건강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 두 나무가 한결 키가 크고 몸집이 불어난 것은 물론 새로 심은 화초들도 무난히 잘 자라고 있어 사시사철 꽃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딱 지금 노란 꽃이 어여쁘게 핀 유채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침아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귀 옆에 꽂은 노란 유채꽃 두 송이가 앙증맞기도 하다.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고 한다. 침아는 유채꽃이 핀 화단을 지나 노란 제비꽃 앞으로 가서 웅크리고 앉아 이곳으로 옮겨 온 지 이제 갓 나흘이 지난 제비꽃의 잎사귀를 상냥하게 만져주었다.

“아프지 않지? 이곳에도 좋은 친구가 많으니까 잘 살 수 있을 거야.”

말을 걸면서 침아는 제비꽃을 향해 함빡 웃어주었다. 그러고 있는 것이 꼭 눈이 다 보이는 사람 같지만, 전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 침아가 자는 사이 료가 그 눈가리개를 한 번 둘러본 적도 있어서 아는데 그걸 쓰고선 멀쩡한 자도 앞을 보기가 힘들 것이다.

아직 침아의 상태는 호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료가 일단은 탕약을 지어 마시게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양을 위한 의미이다. 물에 빠졌을 때 크게 놀랐을 것을 생각해 보면 한동안은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충분히 심신을 안정시키며 요양을 하게 할 셈이다.

다만 그 요양이란 것이 료가 예상했던 것처럼 얌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침아는 지난 며칠간 행동반경을 꾸준히 넓혀갔다. 구조물을 외우고 걸음 수를 암기하면서 시행착오도 꽤 겪었지만 이제 뜰에도 나와서 어렵지 않게 산책까지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릴없이 노래나 부르며 오락가락하는 걸로 보여도 어느 순간 귀신같이 방향을 바꾸면서 용케 앞가림을 하고 있다. 불안해하며 쳐다보는 료는 내심 입맛이 쓸 지경이다. 어제 이맘때만 해도 네 번은 넘어졌었는데.

료는 머리가 좋다고 칭찬하듯이 말했지만 실은 슬슬 한 번쯤 넘어져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보고 있다. 속 모르는 우송은 약재 말린 것을 다듬어 묶으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이다.

“으샤. 그런데 주인님, 이 많은 약재는 다 어디에다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우송의 질문에 료는 침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우송이 가리킨 건너편 마루에는 봄에 캘 수 있는 갖가지 약용 나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널어져 있다. 료는 지난 며칠간 자신은 저택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지만 우송을 내보내 캘 것들의 물목을 알려주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식으로 지시를 내렸었다. 우송은 제 할 일을 충실히 했고 며칠 만에 료의 뜰에는 각종 풀더미가 탑을 이루었다. 지금까지처럼 날씨가 계속 좋아 말리는데 무리가 없다면 열흘이면 료가 바란 만큼 양이 모일 것이다. 거기에 지난해까지 꾸준히 모아온 다른 약재들을 약실에서 내어온다면 수레 하나는 충분히 채우리라.

“어디에다 쓰긴.”

“이걸 전부 저 아이에게 먹게 할 참은 아니시지요? 그러다 자칫하면 잘못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런 말씀 안 드려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더니 우송이 약의 오남용을 경계하고 있다. 료는 웃음을 삼키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저 많은 걸 인간 하나에게 다 쓰겠느냐? 약실을 채우고 남은 것은 내어다 팔 것이다.”

“판다굽쇼?”

“응. 장사는 재미있지 않더냐.”

우송은 머리를 긁적였다. 횟수를 헤아리자면 네 번, 장사란 것을 해본 적은 있다. 우송이 지금처럼 커다랗게 되기 전. 키가 7척을 넘기기 전까지의 경험이다.

“그렇지만 저렇게 많이는 아니었고, 저도 이렇게나 커버렸는데…….”

“괜찮다. 청작도 데리고 갈 테고, 짐을 실어 나르는 건 어차피 매한가지 아니냐.”

“그 말씀은……저더러 또 소가 되라굽쇼?”

잔뜩 싫은 내색을 해서 료가 놀라고 말았다.

“당연하지. 그 키로 인간들의 저자에 어찌 나가? 야시라면 몰라도. 싫다면 권하지 않으마. 청작과 둘만 가는 것도 문제없지.”

불과 몇 년 전까지 어린 소년의 외양을 띠고 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엄연히 청년에 가까워졌다. 자신만만하게 턱을 쓰다듬는 료에게 우송이 볼멘소리를 했다.

“연로한 청작 아저씨가 어찌 주인님을 지켜드립니까. 저더러 소가 되라면 소가 되어야지요.”

푸념이다. 턱을 괸 채 우송을 보던 료는 뭔가 우송에게도 가고 싶어할 만한 이유를 주고 싶었다.

“장사가 잘되면 네 용채도 두둑이 챙겨주지.”

“이놈이 돈은 있어 어디에 씁니까.”

그러다 우송이 휙 고개를 들고 물었다.

“주인님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신 겁니까? 돈이 필요하신 거라면 청작 님께 얼마든지 달라고 하시면 되시지 않습니까?”

“어……. 내가 언제 돈이 필요하다더냐? 장사가 하고 싶다 했지.”

돈이 필요해서 생각해 본 일이었지만 당장엔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책으로 내렸다. 일없이 책장을 넘기는 료에게 침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시는 겁니까?”

침아는 잠시 자귀나무 그늘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손으로 나무줄기를 확인하고 똑바로 걸어왔다. 그녀가 다가오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료가 대답했다.

“아니. 너는 데려가지 않아.”

“저자에 가신다면서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저자라고 하셨는데.”

“뭐가 됐든 이제 널 데리고 저자 같은 곳엔 가지 않을 게다.”

료의 단호한 말에 우송이 비죽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번엔 또 어떤 바람이 널 채어갈지 모르는 것 아니냐? 바다에 물이 있다면 땅에는 바람이 거세지. 주인님께선 걱정이 되어 못 데려가신다.”

“시답잖게 별소릴 다한다.”

농으로 한 말이었는데 료의 얼굴을 본 우송은 자신이 너무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라리는 료의 눈에 커다란 장정이 어깨를 움츠리고선 향부자 뿌리줄기를 후후 불어댔다.

침아는 다시금 졸라댔다.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송 아저씨가 뱃멀미만 하지 않으면 바로 옆에 계실 텐데 어찌 바람 따위에 날아가겠습니까?”

“안 된다면 안 되는 일이야.”

“우송 아저씨, 굳이 소가 되어 가실 것 없지 않으십니까? 화산 어르신께 말씀드리면 체격을 더 작게 만드는 일쯤 해주시지 않을까요?”

그 말에 우송과 료의 눈이 동시에 침아에게 향했다. 이어서 두 사내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도 있구나. 할머니라면 못 하실 것도 없지.”

“그럼 짐을 실을 수레는…….”

“나귀도 있으니까 어찌 되겠지. 정 걱정이면 역시 네가 건사하든가.”

“물론 제가 건사합지요. 말이든 나귀든 제 말은 착착 잘 알아듣습니다.”

소가 되어 가는 건 곧 죽어도 싫은가 보다. 은근슬쩍 료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받아치는 우송의 솜씨에 침아가 쿡쿡 웃었다. 그러고선 좀 더 간절하게 료에게 물었다.

“정말로 저는 아니 데려가실 겁니까?”

“안 된다고 했다. 백 번 졸라도 소용없어. 이제부터 너희 둘 다 내가 된다, 안 된다 한 번 말하면 그걸로 끝이란 걸 명심해.”

덩달아 우송까지 경고를 받았지만 우송은 자기가 언제는 안 그랬냐는 듯 눈만 껌벅일 뿐이다. 침아는 가만히 어깨를 떨어뜨리더니 손을 뻗어 마루를 확인하고는 한쪽에 앉았다. 치맛자락을 정돈하고서 고개를 들어 잠시 멍하니 그대로 있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적적하기야 하겠지만 정히 안 데려가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그때는 화산 어르신이 계신 곳에나 놀러 갈까.”

이따금 풍악소리가 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올 때면 침아가 관심을 보이곤 했지만 료는 굳이 데려가 준 적이 없다. 손님으로 든 가진 자매가 너무 거리낌 없이 집 안을 휘젓고 다니는 데에 료가 내심 불편해 하는 까닭도 있다.

다시 마루를 뒤로 하고 침아가 뜰로 내려섰다. 양 팔을 뻗고 표지가 될 만한 무언가를 찾느라 허공을 더듬대는 모습을 료는 이마를 가린 손 아래에서 눈동자만 굴려 보고 있다. 시큰둥한 표정이다. 도와주려고 해도 침아는 “혼자 할 수 있어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다.

넘어져 버려라. 소리까진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이 그렇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치 그 말이 날아가 발이라도 건 것처럼 침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료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쏜살같이 달려가 침아를 일으켜 세워주면서 야단치는 료의 얼굴에 미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뭘 하는 게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넘어지기나 하고.”

“아니에요, 방금 전에 틀림없이 뭔가 앞에 있었습니다. 꼭 땅이 불쑥 튀어오른 것처럼……. 뭐였지?”

침아는 손을 뻗어 더듬더듬 자신의 앞길을 막은 무언가를 찾아내려 했지만 도무지 그럴 만한 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침아는 료를 향해 쏘아댔다.

“절 골탕 먹이려고 주인님께서 장난치신 거지요?”

“나 원. 내가 뭐 그리 할 일이 없어서. 우송아, 말해 보아라. 내가 그런 당찮은 수작이나 부리고 있었느냐?”

“주인님은 책을 보고 계셨다. 너 넘어지는 소리에 놀라 뛰어 내려가셨어.”

“봐라, 우송도 저리 말하는데 어디 감히 날 원망을 해?”

“……잘못했어요.”

풀 죽은 목소리로 잘못을 빌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듯 침아는 바닥을 툭툭 발로 밟아보았다. 료는 침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만 하면 충분히 걸었으니 얌전히 앉아 있도록 해.”

“앉아서 할 일이 없잖아요. 우송 아저씨는 일을 하시고 주인님은 책이라도 보시지만 저는 뭘 하나요. 비파도 지금은 흥이 안 나요.”

“내가 책을 읽어주마. 아, 정 그리 지루하면 내 어깨를 주무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책이요? 어떤 걸 보고 계시는 데요?”

금세 기쁜 표정을 짓는 침아를 보면서 료는 그녀가 넘어지느라 빠질락 말락 한 귀 뒤에 꽂은 유채꽃을 정돈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야시에서 산 머리꽂이를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주어야지, 내일은 주어야지 하는 사이 잊고 있었다. 그걸 주면 좋은 낯을 하려나?

막 마루에 오르려는데 담으로 둘러싸인 뜰 동쪽 구석에 있는 일각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 사내의 말소리가 났다.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료는 잠시 멀뚱히 시선을 그쪽에 던지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침아를 재촉해 마루로 올라갔다. 그가 힐끗 우송을 쳐다보며 턱짓을 하자 우송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뉘시오?”

“둘째 아씨를 모시는 시종입니다.”

료가 앉힌 대로 서탁 오른편에 앉은 침아가 료에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둘째 아씨라면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자매님 중에서 동생분 말씀인가요?”

“모르겠다.”

“하여간에 무성의하세요.”

“무성의든 뭐든. 너도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러면서 료는 책을 뒤적거리다가 좀 더 쉬운 책을 읽어줘야 하나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 사이 우송이 뜰로 걸어 나가 손님을 맞이하고는 이내 료에게 돌아오면서 말했다.

“주인님, 이런 걸 보내오셨습니다.”

심부름을 온 이는 가선의 시종 정이었다. 정이 들고 온 찻상의 덮개를 벗겨내니 진달래화전이며 유밀과 등의 먹을거리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진달래화전에서는 희미하게 김도 일고 있었다. 우송에게 받아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준 후 료가 정을 향해 말했다.

“일단 보내주신 것이니 감사히 받겠다마는 굳이 앞으론 이곳까지 신경 써줄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려라. 여기엔 군것질을 취미로 하는 이가 없구나.”

“어머나, 왜요. 맛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먹을 이 한 명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님, 무슨 연유로 보냈는지부터 확인해 보시고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해야지요.”

앞의 말은 크게, 뒤의 말은 소곤거리면서 침아가 말해 왔다. 료는 그러니까 그런 일이 무슨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었지만 떨떠름하게 정에게 물었다.

“어찌 보내온 것이냐?”

“저희 둘째 아씨께서 오늘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손으로 머무는 처지에 괜한 근심을 끼쳐 면목이 없고 해, 변변찮은 솜씨나마 이렇게라도 인사를 드리니 폐를 끼친 점은 아무쪼록 너그럽게 이해해달라 말씀하셨습니다.”

“땅 설고 물 설은 곳에서 몸이 약하다 보면 아파 누울 수도 있는 일이지 무슨 면목에 폐 운운이란 말이냐. 지나치게 심약하신 모양이다, 네 주인은. 왜?”

너무도 솔직하게 제 뜻을 피력하는 료의 옷자락을 옆에 있던 침아가 자꾸만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렸더니 그녀가 귓속말을 했다.

“내내 아프셨다가 일어나셨다는 분에게 그런 말씀은 왜 하십니까.”

“왜? 어차피 내 손님도 아니다. 이런 사과가 구태여 필요하다면 할머니께 하면 그만이지 않느냐?”

“너무 그렇게 무 자르듯 뎅겅뎅겅하지 마세요. 저나 우송 아저씨야 어떤 뜻으로 하는 말씀인지 안다고 해도, 다른 분이 듣기엔 정이 없다 못해 쌀쌀맞지 않겠습니까?”

“무어라고 오해하든 알 바 아니다. 넌 대체 그런 건 왜 신경 쓰느냐?”

“다른 이가 주인님을 오해하는 게 전 싫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다른 이에게 밉보이는 게 정녕 주인님이 바라시는 겁니까?”

“그런 거 바라고 말고도 없어. 나는…….”

속삭이는 침아와 달리 료는 전혀 꺼리는 기색 없이 제 할 말만 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녀의 조바심에 져주기로 했다. 누구에게 밉보인들 무슨 상관이랴, 하는 마음이 료의 본심이지만 침아에게는 그게 좀 중요한 문제인가 보다. 암컷이라 그런지 별 사소한 것에 연연한다고 생각하면서 료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예의를 지켜서, 주인의 안부를 물어보셔야지요. 거동은 괜찮으신지, 음식 장만에 무리를 하신 건 아닌지. 휘 도련님이 계시지 않으니 지금 이 집의 가주(家主)는 주인님 아니십니까.”

“가주는 무슨. 그래, 네 주인께선 거동은 괜찮으시냐? 공연히 이런 걸 장만하시느라 무리하신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정말로 침아가 예를 든 것만 툭툭 묻는 것이 어지간히도 귀찮나 보다. 어쨌든 그런 말을 해주어서 침아는 미소를 지었다. 시종 정이 공손히 대답했다.

“아직 미열이 좀 나시는 편이시지만 일어나 움직이다 보면 낫겠지 하고 계십니다.”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료에게 또 침아가 귓속말을 조곤조곤했다. 료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 말을 다 들었다가 정에게 찬찬히 풀어놓았다.

“낯선 곳이라 조심스러운 마음은 이해가 가는 바이나 크게 아프시기라도 하면 우리가 대접을 잘못하여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병석에서 일어나셨다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만,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 하니 도리어 걱정이구나. 아무쪼록 무리하지 마시고 편히 지내시면서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란다고 전하여라.”

“예,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전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정은 침아를 슬쩍 쳐다보더니 시선을 깔고 료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씨께서 침아 님께 전하라 하신 것이 있습니다.”

료의 눈이 커졌다.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진지한 태도로 그가 그것을 받아 펼쳐보았다. 좋은 향이 배인 종이에 감싸인 것을 보니 마노 장식에 오색 술이 달린 노리개였다. 딱히 감식안은 없어도 꽤 값어치 있어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이것을 왜 침아에게 주라고 하시던?”

“아씨께서는 공연히 자신이 배로 돌아가자고 해 불미스런 일이 벌어졌다고 계속 자책하고 계셨나이다. 이번에 침아 님이 돌아오셨다는 소리에 그제야 크게 시름을 더셨지요. 몸져누우신 것도 그것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짧게 말 몇 마디 나눈 것밖엔 없는 사이이나 침아 님이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기뻐하고 환영하는 뜻으로 이것을 받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흠. 그다지 무사히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료의 불퉁한 소리는 침아가 그의 팔을 꽉 잡는 바람에 그쳤다. 실제로 료는 그 여자가 공연히 나타나 배를 타고 가네 어쩌네 한 바람에 침아한테 그런 일도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곱지 않은 정도를 넘어 벌써부터 악연이라고 단정 지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본인이 그것을 책망하고 있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밉게 보던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자, 네게 주라고 했다는구나. 받을래?”

료는 침아의 손에 노리개를 쥐어주었다. 침아는 동그란 노리개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반질반질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것인지요?”

“싫으면 도로 보내면 되는 거지.”

“싫다기보다는, 그래도 되나 싶어서요. 저는 그분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저 때문에 아프시기까지 했다니 오히려 제가 사죄를 드려야 할 일 같고.”

“별 신경을 다 쓴다. 전에 보아하니 이런 노리개 같은 건 그쪽에는 산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 지천으로 널렸을 게다. 풍족한 이의 호의이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도 될 게다. 그렇지?”

마지막에 묻는 소리는 정에게 던진 말이었다. 정은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제 주인께는 그것 외에도 좋은 노리개가 퍽 많습니다.”

“그럼 염치없지만 감사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대충 가늠해서 침아가 앉은 채로 절을 했다. 정도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절했다. 교육이 잘된 시종이다. 적어도 깍듯함 면에서는 우송이 따라갈 바가 아니다.

정이 물러간 직후 찻상을 둘러싸고 앉아 화전이며 유밀과를 먹게 되었다. 침아는 귀한 아씨가 이런 것도 잘 만든다면서 감탄에 또 감탄이었다. 료는 두어 개 집어 먹다가 너무 달다면서 더는 손대지 않았다. 덕분에 우송과 침아가 퍽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참, 세우지 가는 길에도 진달래가 만발한 곳이 있는데. 거기 진달래도 가득 피었지요?”

“나는 본 기억이 없다.”

“주인님한테 그런 걸 물은 제가 바보지요. 우송 아저씨, 진달래 보셨어요?”

“봤다마다. 거긴 벌써 지려고 할 걸. 대신 그 근처 배나무에 배꽃이 가득 피었더라. 오늘 정오 즈음에 지나며 봤지.”

“어머, 배꽃이 가득 피었다면 얼마나 예쁠까. 보고 싶어라. 작년 이맘때만 해도 한창 그 아래에서 놀았는데. 아, 이즈음이 복사꽃이며 모과꽃도 필 시기인데. 살구꽃도!”

“응, 그것들도 더러 피었지. 복사꽃이 제일 늦겠더라.”

“갑자기 속상해질 것 같아요. 자고 일어나서 눈이 보이면 정말 좋을 텐데.”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도 화전은 잘도 먹는다. 위로랍시고 우송이 유밀과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하필 봄에 눈에 탈이 났으니 안 됐구나. 그래도 내년까지야 가겠니?”

“내년까지 가면 큰일이지요. 그리 오래 밥값도 못하고 살 거면 침아는 여기 있을 수 없어요.”

“괜찮아, 주인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낫게 해주실 거다. 그렇지요?”

둘의 얼굴이 료에게 향했다. 먹을 걸 볼 가득 물고 그러고 있는 것이 전혀 안 닮았는데도 어딘가 닮았지 않나 싶어 료는 웃어버릴 것 같았다. 턱을 괴고 읽지도 않은 책을 팔랑 넘기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밥값을 하고 안 하고는 내가 판단하는 거니까 주제넘게 굴지 마.”

동문서답. 그 교묘한 회피에 우송은 눈만 끔벅거렸다. 침아는 다시 화전을 집어 들었다. 침울해도, 할 일은 하는 씩씩한 아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이 제 주인의 방으로 돌아갔을 때 가선은 시녀 세 명에게 머리를 빗기고 발이며 팔을 주무르게 하고 있었다. 시녀들을 물리고 사방침에 비스듬히 기대어 가선이 물었다.

“그래, 그 아이는 보았어?”

“예, 아씨.”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던?”

“그리 보였습니다. 저를 보고도 아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나이다.”

“앞이 안 보이게 되었다는 것도 참이고?”

“일단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봤더니 뜰을 거닐다 넘어지기도 하여 작은 공자님께 야단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악운이 강한 것이로군. 훗. 인간 따위가 악운이 강해 봤자지.”

일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아 토라진 것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던 가선은 다시 고운 얼굴을 찌푸리며 정에게 물었다.

“여전히 공자님께서 그것을 애지중지하시던?”

“제가 보기엔 그분께선 본디 자기 아랫것에게는 남달리 대하시는 듯합니다. 우송이라는 그 커다란 자도 그렇고 그 아이 일만 해도 굳이 그 아이가 어여뻐서라기보다는…….”

“당연하지, 그 흉하게 생긴 것이 어딜 봐서 어여쁘단 말이야?”

가선은 몹시 불쾌해 하며 그의 말을 중도에 끊어버렸다. 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길게 보시면 아씨께서 당연히 그분의 마음을 얻으실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반백 년을 살면 많이 사는 동물이지 않습니까? 부디 너그럽게 대하시는 것은 어떠실지…….”

“싫어. 내가 이렇게 예쁘고 고운 동안엔 시앗 같은 거에게 내 부군을 뺏기진 않을 거야. 설사 내가 늙어서 못나지고 뒷방 신세가 된다고 해도 나만 못한 것을 시앗으로 들이는 건 두 눈 뜨고 보지 않을 거야. 하물며 인간이라니, 날더러 그 수모를 참으라는 거야? 단 하루도 그리 살기 싫어. 그리 살 바엔 콱 죽어버릴 테야.”

모진 말에 이어 가선은 소매에 얼굴을 묻으며 엎드려버렸다. 정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다가 가선의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이자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씨,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아씨 말씀이 옳아요. 이렇게나 고우신 분인데 낭군의 정을 나눠 갖고 살 이유가 없지요.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가선이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정이 넌 누가 뭐래도 내 편을 들어야 해.”

바싹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에 눈에는 이슬을 머금고 있는 가선을 보며 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선이 다시 보탰다.

“또 한 번 그 아이 편을 들었다간 봐라.”

“예.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제야 가선이 생긋 웃었고 정이 명주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쳐주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이제 안마를 해줘. 다른 애들은 수가 아무리 많아도 너 하나만 못해. 아아, 며칠간 방에만 갇혀 있었더니 온몸이 찌뿌듯해.”

정은 엎드려 누운 주인과 병풍 사이의 공간으로 옮겨가서 안마를 시작했다. 눈을 감고 기분 좋게 그 손길을 만끽하던 가선이 문득 눈을 뜨면서 중얼거렸다.

“나중에라도 그 아이가 기억을 하면 어쩌지?”

“해도 별수 없게 만들면 되겠지요.”

정의 말에 가선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죽일 거야?”

정은 천진한 주인의 말을 못 들은 척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우선은 따로 떨어뜨려 놓아야 할까요.”

“어떻게? 이번처럼 찾아서 데리고 오면 어떡하고.”

“어떻게든. 제가 궁리해 볼 테니 아씨는 마음 놓고 계십시오.”

“흠. 정이 넌 나보다 훨씬 영리하니까. 믿는다.”

“네.”

다시 고개를 돌리는 가선의 풍성한 머리채를 보면서 정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한 갈색 눈 아래의 입술에 쓴웃음이 머물렀다.

“자, 배꽃이다.”

“어머머.”

그날 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침아를 기다리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방문을 들어선 뒤 조심조심 방향과 걸음 수를 염두에 두고 보료에 다가가 앉았을 때 기척이 들리지 않아 없는 줄 알았던 료의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그녀 위에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잠깐 동안 침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흰 속적삼 위로 젖은 머리를 풀고 있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며 옷 곳곳에 배꽃이 자리 잡은 모습이 꽤 볼만했다. 눈가리개를 하지 않은 그녀의 오른쪽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지만 초점이 맞지 않아 공허했다. 이윽고 침아는 조심스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통 꽃, 꽃, 꽃이었다.

“정말로 배꽃이에요?”

“그걸로 내가 거짓말은 해서 무엇하느냐?”

방긋 웃더니 침아가 손에 잡힌 꽃 하나를 만졌다. 다섯 장의 꽃잎과 힘주면 부스러질 듯한 수술들. 어느새 두 손 가득 모인 꽃을 들어 코를 가져다 댔다.

“향기가 너무 좋아요!”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로 좋은 건 아니다.”

“호들갑 떨 만큼 좋은 거래두요. 주인님은 가끔 바보 같지만 오늘은 이 배꽃을 보아서 바보 소리는 하지 않겠어요.”

“이미 두 번이나 한 걸로도 부족하단 말이냐?”

기가 막혀 묻는 료의 말에도 침아는 생글거리며 주위의 배꽃을 모으느라 바빴다. 베개에 팔을 기댄 채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해 보니 료는 자신의 행동이 멋쩍었다.

혼자 목욕을 해도 침아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며칠간 몰래 확인하고서야 오늘 목욕간에 그녀를 혼자 둘 생각이 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세우지로 길을 잡은 료는 침아가 말한 배나무를 발견하기 무섭게 꽃 서리꾼이 되었다.

그러고 있자니 언젠가 공연한 바람으로 매화나무를 못살게 군 기억이 났다. 그날 밤, 꽤 추웠는데도 침아는 여기서 멱을 감았더랬다. 밤하늘 아래 반짝이던 수면을 헤엄쳐가던 새하얀 침아의 모습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쩐지 묘한 기분에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침아보다 먼저 방으로 돌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마저 나무를 흔들어 꽃을 모았다.

그리고 나갈 때보다 더 빨리 집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가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기다렸다. 멀리서 나무 바닥을 밟는 익숙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꼬리라는 게 있었다면 아주 맹렬히 흔들렸을 것이다.

방으로 들어와 보료에 앉은 침아 위로 모아온 배꽃을 뿌려주었다. 놀라는 침아의 얼굴을 볼 기대로 흡사 장난꾸러기 소년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그 모습을 본 료는 함박웃음을 삼켰다. 침아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이것 하나는 좋다 싶었다. 자신은 그녀의 표정을 다 볼 수 있지만 그녀는 볼 수 없다는 점이.

“어쩌다 이런 일을 해주실 생각을 다 하셨대요?”

함빡 웃으면서 침아가 그에게 묻자 료가 대답했다.

“또 자다가 배꽃, 배꽃 그러면서 울까 싶어서 말이다.”

“어머, 저는 자면서 그런 말은 하지 않아요. 울지도 않고요.”

“허. 네가 잠꼬대를 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어찌 네 입으로 하느냐?”

“하지 않으니까 하지요. 저는 잠꼬대는 하지 않습니다.”

“우습구나. 이 내가 그렇다고 말하는데 거기에 토를 달아?”

“주인님은 없는 말을 지어내시는 거겠지요.”

물론 침아가 자면서 운 적은 없다. 그것은 과장이다. 하지만 잠꼬대를 아예 안 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같이 자는 자신이 하는 말인데 저리 매도를 하고 나오니 기가 막혀 료는 발끈했다. 당장 그는 눈앞에 널린 배꽃을 한 줌 집어 침아에게 휙 던졌다.

“그딴 소리를 말이라고 지껄이다니 대체 무얼 믿고 그리 뻔뻔한 게냐?”

“저야 저를 믿지요. 자기가 자신을 못 믿으면 다른 이는 또 어찌 믿습니까?”

“너는 너만 믿는 모양이구나.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걸 보니.”

또 한 줌의 꽃이 날아갔다. 침아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문득 치맛자락에 있던 꽃을 저도 한 줌 집어 들었다. 던지기만 해봐라, 하고 료가 보고 있자니 제풀에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도로 팔을 내렸다. 그렇지만 이내 보란 듯이 앵돌아앉아버렸다.

“허, 누가 네 멋대로 내게 등을 돌려도 좋다던?”

“저는 배꽃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꽃으로 맞는 건 싫습니다.”

토라진 침아의 목소리에 료는 바로 무어라 대꾸하려다가 문득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머뭇거렸다. 방을 밝히는 것은 방문 앞에 있는 사방등 하나. 밤눈이 아주 밝은 료에게 그 불빛은 불필요한 것이나 지금만큼은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었다. 아련한 적황색 불빛을 머금은 침아의 속적삼 사이로 그녀의 몸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가녀린 선. 단것을 퍽 좋아하는 데도 살집이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몸. 그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침아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꼼지락거리는 기척을 들었다. 어깨 너머로 흩어진 머리카락이 들썩였다. 설마 우나? 내가 뭘 했다고 운단 말이야, 하고 료는 당황했으나 일단은 강하게 나갔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을 봐주는 데도 정도가 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 바보가 아닌 걸 어쩝니까? 맞으면 아프단 말이에요.”

침아의 말투가 분명치 못했다. 우물거리는 목소리는 어찌 보면 울먹임과도 비슷하다. 료는 슬쩍 베개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다시 말했다.

“돌아앉아. 좋은 말로 할 때. 이런 꽃을 던져 봤자지, 계집이라고 엄살을 부리는 걸 어디까지 참을 줄 아느냐?”

“엄살 같은 거 아니에요. 아픈 걸 아프다 하지……. 내 몸으로 살아보지도 않고 어찌 안다고.”

“하여간 말 안 듣는 데는 도가 텄구나, 이 녀석!”

결국 말로 구슬리지 못하고 료가 일어섰다. 성큼 걸어가 침아의 어깨를 잡아 돌아앉게 하고서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이건 또 왜 먹느냐?”

침아는 배꽃을 먹고 있었다. 울먹이는 게 아니라 꽃을 먹느라 목소리가 그랬던가 보다.

“맛있으니까요. 주인님은 가끔 정말 바보 같은 거 아세요?”

“이 녀석이 또. 대체 뭐가 맛있다는 게냐? 비린 풀 맛만 나는 걸 가지고. 네가 사슴이냐? 고라니라도 돼?”

“풀 맛이 아니에요. 배꽃은 상큼한 맛이 납니다. 진달래꽃은 달짝지근하고.”

“그러니까 그런 걸 왜 먹느냔 말이다.”

“먹어도 해롭지 않아요. 사람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걸 잘 먹어야 춘궁기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거랍니다. 아, 주인님은 보릿고개가 무언지 모르실 테죠.”

“알고 있다. 그런 것쯤.”

“아는 거하고 몸으로 겪어본 건 다르다니까요.”

손을 내저으면서 침아가 모르면 말을 말라는 식으로 웃더니 또 배꽃을 한 송이 입에 넣었다. 알 수 없다. 꽃을 좋아하는 줄은 알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먹어 버릇하는 걸 보니 당황스럽다.

“전에는 안 먹더니. 혹시 나 몰래 계속 먹어왔던 거냐?”

“아니요, 차로 만드는 게 아닌 이상 꽃을 그대로 먹는 건 오랜만……. 그러고 보니 갑자기 먹어서 놀라신 거구나. 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 왜 먹는 거지? 배가 고파서는 아닌데……마음이 허전해서 그럴까요?”

료에게 물어보았자 료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는 사이 침아는 자문자답을 했다.

“눈이 안 보이니까 이렇게라도 꽃이란 걸 확인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큰일이다, 이러다 어렵게 구한 노란 제비꽃도 부지불식간에 먹어버리면 어쩌지? 주인님, 저 뭔가 할 일이 있어야겠어요. 너무 한가해서 이렇게 꽃이나 주워 먹고…….”

침아의 말은 료의 품에 안기면서 끊어졌다. 료가 자신의 가슴에 품은 침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불안했던 게로구나. 우리 침아가 불안해서 그랬어.”

“저기…….”

“괜찮다. 아무 걱정 마라. 내가 낫게 해줄 테니까. 언제가 되었든 내 손으로 꼭 낫게 해준다고 약속하마. 이렇게 눈이 예쁜데,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가엾어서 안 되지.”

침아의 오른쪽 눈을 살며시 쓸어 만지는 손길에 길게 드리워진 그녀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오른뺨을 감싼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료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것이 네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고 해도 조바심 낼 것 없다. 오후에도 말했지만, 네 가치는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주인인 내가 생각하면 그만이다. 넌 한 가지 일만 잘해도 충분해. 내가 편히 잘 수 있게 해주는 것. 네 이름이 침아인 까닭을 잊었느냐?”

“그렇지만…….”

침아가 입 안에서 무언가를 우물거렸다. 이마가 닿을 정도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료가 물었다.

“그렇지만 뭐?”

“……근간엔 제게 베개 노릇도 시켜주시지 않잖아요.”

료는 놀랐다. 근간엔 분명 그녀를 베개로 삼지는 않았다. 다만 한 베개를 베면서 품에 안고 잤다. 그것을 이 아이는 어찌 생각했단 말인가. 아직도 스스로 그 의미를 헤아려볼 수 없을 만큼 어린것일까?

“혹 제가 몸이 자라서 베개로 삼는 것이 불편하신 것인지요?”

료가 그 물음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침아가 다시 중얼거렸다.

“살이 찌지 않게끔 조심한다고는 했는데 체격이 어느새 달라지고 만 것은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먹는 것을 더 줄인다고 해도 뼈 자체가 예전과는 다르니…….”

이런. 그간 그녀에게 군것질하는 버릇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런 의미였던가. 그러고 보니 야시에서도 그렇고 오늘 화전이며 유밀과를 그렇게 잘 먹는 모습이 희한해 보였던 까닭이 있다. 이제껏 식탐은 우송의 몫이었지 침아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요새 부쩍 먹어댄 것은……그렇다. 그가 침아를 베고 자지 않게 된 뒤로다.

그것을 속으로 고민하면서도 그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고민했을 것을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귀엽게 느껴져 료는 침아를 다시금 꽉 껴안았다. 껴안아서 아기를 어르듯이 가만가만 흔들었다.

“네가 자라버려서, 불편해서 베개로 쓰지 않는 것은 아니야. 다만…….”

료는 움직임을 그치고 침아의 머리카락에 덮인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얇은 옷에 가려진 따스한 등에 멈추었을 때 침아가 가볍게 떠는 기척이 있었다. 차가울 것이다. 그만큼 침아가 따스한 것이고.

“네 쓰임이 좀 더 풍부해졌다고나 할까.”

품에 안은 몸이 사랑스럽다. 가녀리면서도 인간의 암컷답게 부풀어 오른 가슴은 푹신하게 그의 가슴을 채워온다. 매끈한 살결에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난다. 정말로 꽃만 먹고 사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료의 얼굴이 침아의 목덜미에 가서 머물렀다. 보드라운 머리칼에 감싸인 따스한 살결에서 일어나는 향에 료는 취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의 숨결이 간지러웠던지 침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료는 침아를 떠밀어 이불 위에 눕혔다. 놀랐는지 헉 소리를 내며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주인님?”

“요 대신으로 쓰자니 아직은 무리한 일 같고…….”

료의 손이 침아의 얼굴에서 목덜미, 어깨에 이어 옆구리로 내려왔다. 침아의 놀란 표정을 얼마쯤 짓궂게 응시하다가 이내 허리를 감싸 가볍게 안아 들어 도로 품에 품었다. 그리고 이번엔 료가 요 위에 누웠다. 침아의 몸이 그의 몸을 덮는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이불 대신으로 쓰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서. 보렴. 이편이 훨씬 따뜻한 것은 분명하지 않으냐?”

“그렇긴 합니다만……. 이불로 삼기엔 좀 무겁지 않을까요.”

“음. 확실히 내내 덮고 자는 것에는 무리가 있겠지.”

산뜻하게 인정을 하고 료는 침아를 자신의 바로 옆에 눕게 했다.

“그래서 옆에 두고 자는 거다. 적어도 몸의 절반은 따뜻하지 않겠느냐. 머리만 따뜻한 것과 이것. 어느 것이 더 훌륭하냐?”

“아무래도 이편이 더 낫겠지요?”

“그래서 그런 거다. 이해가 되느냐?”

침아는 얼떨떨한 것에 가까운 무표정이었지만 료는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그녀의 등에 팔을 둘러 바싹 끌어당겨 가슴에 안으면서 말했다.

“베개 대신 이불로 삼았으니, 앞으로는 금아라고 불러야 할까 보다. 이불 금(衾) 자, 물론 기억하고 있지?”

“이제 금(今) 자를 위로 하고 옷 의(衣) 자를 아래로 한 글자입니다. 그런 건 너무 쉬워요.”

그러고서 잠시 생각해 보는 기색이더니 침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냥 침아가 좋아요.”

“흠. 승격을 시켜주려고 했더니 네가 마다했다. 잊지 마라.”

“베개에서 이불로 승격해 보았자…….”

무언가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고 침아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퍼뜩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배꽃이요! 요에 눌려서 요가 못 쓰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버려둬. 배꽃을 수놓은 요에서 잤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렇지만…….”

“왜, 못 먹게 되어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냐?”

“그런 거 아닙니다.”

시큰둥한 대꾸에 이어 다시 침아가 조용해졌다. 료는 기분 좋게 침아를 끌어안고 있었다. 서로의 체온이 기분 좋을 정도로 섞였을 즈음 료가 말했다.

“내일은 말을 잘 들으면 세우지에 데리고 가줄 테니까.”

좋다고 팔짝 뛸 줄 알았는데 침아는 조용했다. 의아해서 얼굴을 보니 눈을 감은 침아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무언가 약이 오르는 느낌이다. 료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다가 혹시 자는 게 아닌데 자는 척하는 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침아야?”

이름을 부르면서 얼굴을 가까이했다. 일단 아무 반응도 없었다.

“침아야, 잠든 것이냐?”

두 번째 부름. 무반응. 료는 손을 뻗어 침아의 오른쪽 어깨를 툭 밀었다. 몸이 부드럽게 요 위로 떨어진다. 몸을 일으켜 이제는 위를 보고 누운 자세가 된 침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늘 머리카락으로 가리려고 하는 왼쪽 얼굴이 드러났지만 료에겐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언뜻 생각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신경은 쓰는 모양인데 눈가림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 흉터를 가려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건 아닐까.

거기서 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이 흉터 역시 귀엽게 여기니 상관없는 일이야. 이 아이는 내게만 어여쁘게 보이면 족해.

그 흉터 위를 손으로 만지며 료가 중얼거렸다.

“완벽한 게 다 무어냐. 그런 것, 휘 형님이나 가지라지.”

부드럽게, 부드럽게 침아의 얼굴을 어루만져가는 차가운 손끝. 그보다 더 부드럽고, 조금은 덜 차가운 것이 침아의 얼굴에 닿았다.

겹쳐진 입술.

재빨리 고개를 들며 료는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 홍조가 퍼져나가는 것이 또렷했다.

주춤, 뒤로 물러나려 움직이던 것을 멈춘다. 살그머니 입술을 깨무나 싶더니 다시금 마음을 정하였다. 다가간다. 새까만 나비가 작고 흰 꽃 위에 내려앉듯이.

두 번째 입맞춤은 더 은밀하고, 더 조심스럽고, 더……길었다.

문득 료의 왼손이 옆으로 펼쳐지면서 까만 소맷자락이 저 스스로 팔락 흔들렸다. 방문 앞에 놓여 있던 등롱의 불빛이 가뭇없이 사그라졌다.

편안하게 감싸주는 익숙한 암흑 속에서 료는 둘이라서 가능한 따뜻한 일에 점차 빠져들었다. 따스함을 훔쳐오고, 더 안쪽에 깃든 젖은 기운조차 나누었다. 배꽃이 상큼하다 한 침아의 말에 료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입 안에서는 풀 맛밖에 나지 않던 비린 것도 침아의 것으로 녹아들면 아주 다른 것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떻게 이런 기분 좋은 달콤함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애 안에는.

한 쌍의 야명주와 같은 눈을 빛내면서 료는 잠든 침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 더 자라주렴. 아주 조금만 더 서둘러서, 내 귀여운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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