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귀로(歸路)
이튿날은 참으로 따스한 봄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해가 비춰주는 지상은 선명한 연둣빛 속에 알록달록 꽃들이 지천이었다.
귀로에 오른 료는 야트막한 산길을 골라 늑장에 가깝게 천천히 길을 갔다. 그림자길을 가는 것이 아닌 터라 이따금 산에 사는 인간들과 마주치곤 하였다. 그럴 때면 인간들은 산중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행렬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며 알아서 슬슬 거리를 두기 바빴다.
흔히 보기 힘든 검은 소가 이끄는 귤색 발이 드리워진 여자용 수레와, 앞서 가는 잿빛 말에 타고 있는 아리땁기 짝이 없는 귀공자는 산중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의 일행처럼 보였다. 료의 일행이 멀어지기 무섭게 저분들은 왕실 사람들이 아니냐면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어렵잖게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산에는 녹림(綠林)의 무리도 있다. 하지만 그림자길이 아니더라도 료가 그런 자들과 마주치는 길을 갈 리는 만무하다. 우송과 둘이서만이라면 부러 덫에 들어가는 호랑이 시늉도 해보겠지만 말이다.
든든히 조반을 먹고 출발한 이래 이따금 수레 안에서는 비파 타는 소리가 흘러나오곤 했었다. 비파를 타지 않을 때면 재잘대며 수다를 떨거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해가 정남쪽에 올랐다가 기울기 시작한 무렵에는 수레 안이 내내 조용했다. 슬쩍 들여다보았더니 비파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든 침아를 볼 수 있었다.
“팔자 한 번 좋은 녀석입니다.”
“별것이 다 부러운가 보구나.”
우송의 느릿한 말에 료가 핀잔을 던졌더니 우송이 되새김질을 하다 말고 말했다.
“어디에 가서 이 녀석이 이리 좋은 주인을 만나겠습니까. 고마운 줄 알면 주인님 말씀을 더 잘 들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과연 얌전한 게 얼마나 갈지.”
“굳이 얌전해져야 할 것은 또 뭐냐. 너는 너답게, 이 녀석은 이 녀석답게 변하지 않는 게 좋다, 나는.”
“이 녀석이랑 저랑 한데 싸잡아 말씀하시는 것이 어째 제 귀에 좋게 들리질 않습니다. 제가 이 녀석만 한 사고뭉치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지, 물론. 실언이다. 어느 모로 보나 우송 네가 더 낫다. 인간의 계집아이는 손이 많이 가서 영 성가시구나.”
료가 유난히 침아를 챙겨주는 것 같았는지 저 우송이 질투를 다 한다. 이럴 때 냉큼 우송의 편을 들어줄 만한 관록쯤은 료에게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 주인님께서 애틋하게 여기시는 것 아닙니까.”
“헛. 네놈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는 말에 료가 당황하였으나 표 내지 않으려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주인님 성정에 그간 이 녀석에게는 거의 한없이 무르다 못해 그 왜, 인간들이 믿는 부처나 다름없지 않았습니까? 속 좁은 것이 꽁해서 말문을 닫고 심통을 부려도 결국 참고 봐주시는 걸 보면서 이놈도 아아, 그렇구나 했습니다. 이번 일만 해도, 며칠 전만 해도 이 녀석이 달아났다고 노발대발, 잡기만 하면 요절을 낼 것처럼 구시더니 얼굴을 보기 무섭게 언제 성을 냈냐 싶게 눈은 왜 그러느냐, 울지 마라 하며 달래느라 안절부절못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눈이 저리되어 한층 애지중지해 주실 텐데 눈꼴이 시어 어찌 보나 했습니다.”
“그 몸집에 안 어울리게 속 좁은 소리를 늘어놓는구나.”
“속이 좁다고 매도하실 일도 아닙니다. 어쨌든 둘 다 똑같이 주인님 시중을 드는 하인 노릇 하러 들어온 것 아닙니까?”
“일단은 그렇지. 허나 그 쓰임이 다른 것을 어찌하라고.”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어중간하게 동급이라 여겨지는 것은 둘 다 못 할 일입니다. 차라리 얼른 이 꼬마를 첩으로 들이시면 제가 작은 아씨로 모실 것 아닙니까? 이건 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하릴없이 이놈만 속 좁은 놈 취급을 받고 있으니……. 나이는 대체 어디로 자시는 건지.”
“원 오늘따라 못 하는 소리가……. 오다가 뭘 잘못 먹기라도 하였느냐?”
료는 당황하다 못해 얼굴까지 붉어졌다. 되레 성을 내며 돌아보았더니 우송이 눈을 끔벅거리며 되새김질을 했다. 큼지막한 까만 눈이 게슴츠레하게 감길락 말락 한 것이 아닌 게 아니라 어딘가 이상했다.
“너, 졸린 거 아니냐?”
“졸리기는요. 밤새 푹 잘만 잤습니다.”
그러나 말끝에 우송은 입을 쩍 벌리며 크게 하품을 했다.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이맛살을 찌푸리던 료는 우송이 푸르르 입을 떠는 것을 보고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까 산 아래에서 주막에 들렀을 때 나 모르게 뭘 먹은 게지?”
“제가 여물 말고 또 뭘 먹었다고 그러십니까?”
“아니야, 아니야. 여물만 먹은 녀석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 네 녀석, 또 술을 몰래 훔쳐 먹은 게로구나!”
이번엔 우송이 정곡을 찔렸다. 붕붕 머리를 저으며 시치미를 떼 보던 우송은 료가 뿔을 잡으면서 거짓말을 하는 녀석은 내다 팔아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결국엔 실토했다.
“겨우 입이나 축였을 뿐입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여물도 다 시들어 빠진 풀에 언제 찐 것인지 맛도 징그럽게도 없었지 무업니까. 근처에 탁주 항아리가 있기에 그저 아주 조금, 배나 채우자 하고 마셨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 이놈은 멀쩡합니다.”
멀쩡하다고 우기는 놈의 무릎이 후들후들거린다. 이러다 덜컥 우송이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기라도 하면 수레에 타고 있을 침아가 놀라서 깰 것이다.
하여간에 평소에도 잘 먹는 녀석이긴 하지만 소가 되었을 때의 우송의 식탐은 대단하다. 특히 술만 보면 환장을 한다. 주막에 들렀으면서 입가심으로 탁주 한 동이도 챙겨주지 않았으니 자신의 불찰이라고 생각하면서 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차피 천천히 가는 거, 잠시 쉬었다 가자꾸나.”
“소인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놈은 멀쩡하다고 하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그리 멀쩡하면 주인이 명령하는 것도 잘 들리겠구나. 한숨 자라. 왜, 또 내 말에 대거리라도 하려느냐?”
“대거리라니요, 이놈은 그런 방자한 짓거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짓은 여기, 이 맹랑한 녀석이나 하는 것이지요.”
그랬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요 몇 년 사이에 우송은 침아에게 급속히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하던 녀석이 술기운이 있다 쳐도 평소에 없던 수다까지 떨어대고 말이다.
“그래, 너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만 말하고 잠이나 자거라.”
“아무렴요, 주인님께서 그리 명령하신다면 이 우송, 즉시 자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료가 수레의 문을 열어 침아를 조심스레 안아서 내렸다. 길에서 벗어나 옆의 풀숲 그늘로 들어간 우송은 늘어지게 하품 한 번을 하고는 느릿느릿 발을 굽혀 잠이 들었다. 누군가 보면 그 소 희한하게 사람처럼 잔다, 할 것이다. 그것도 금세 코까지 골면서. 드르렁드르렁 요란하게 울리는 우송의 코골이 소리를 피해 료는 침아를 양 팔로 안아 든 채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내내 달게 자던 침아는 코골이 소리에 그만 잠이 깨었다.
“천둥……. 비가 오려고…….”
잠결에 그렇게 중얼거리는 침아에게 료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송이 코 고는 소리다. 몹시 졸려 보여서 잠시 쉬라고 했다.”
눈을 비비면서 위를 올려다본 침아는 이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때문에 우송 아저씨까지 고생이시네요. 아, 주인님. 내려주세요. 걸을 수 있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상황을 안 침아의 말에 료는 쉴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걸을 수 있는 것은 안다. 다만 이편이 빠르지 않느냐. 아, 저기에서 쉬면 좋겠다.”
도토리나무 아래 맞춤한 자리를 찾은 료가 침아를 안은 그대로 앉아보고는 괜찮다 싶자 왼편에 침아를 앉게 했다.
“자리가 혹 서늘하진 않으냐?”
“서늘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침아가 료의 팔을 잡고선 싱긋 웃었다.
“많이 움직이신 게 보람이 없지만도 않습니다. 주인님 손에 꽤 훈기가 돌지 않습니까.”
“흐응. 그래도 이리 종일 길에서 보내는 일은 사양이다.”
“왜요, 저는 무척 즐겁습니다.”
“수레 안에서 편히 오는 녀석이 할 법한 소리구나.”
“그럼 다음번엔 주인님께서 수레에 타시고 제가 말을 타겠습니다. 실은 말을 타보고 싶었습니다.”
“흥. 누굴 고생시키려고.”
눈도 보이지 않는 녀석이,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간밤에 본 우는 모습이 이젠 멀게만 느껴질 정도로 침아는 평소의 기운찬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나무에 기대앉은 료의 곁에서 료의 손을 토닥토닥 만지던 침아는 갑자기 목을 늘여 빼고 왼쪽 양지바른 곳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미하게 붕붕거리는 소리가 나요, 주인님.”
“벌이 있나 보지.”
“아아, 그러고 보니 향긋한 냄새가 잔뜩 납니다.”
“글쎄다. 잘 모르겠는데.”
“아니에요, 향긋한 냄새에 벌이 나는 걸 보면 근처에 꽃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주인님, 저는 보이지 않으니까 주인님께서 좀 찾아보세요.”
“내가 아주 상전을 모시고 사는구나.”
부루퉁한 말에 이어 료가 침아가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향기를 낼 만한 것들이 보였다. 하얀 조팝나무가 퍽 무성하였고 드문드문 제비꽃도 여럿 피어 있었다.
“꽃이 피어 있다. 벌도 그럭저럭 있어.”
“무슨 꽃입니까?”
“조팝나무꽃, 제비꽃, 조금 멀리에 진달래도 보이고…….”
“어머나, 제비꽃. 혹시 노란색 제비꽃도 있나요?”
“노란색? 글쎄, 노란 건……아, 노란 게 보이긴 하는데 제비꽃이려나?”
“노란 게 있어요? 주인님, 주인님, 저 거기로 데려다 주세요.”
“뭘 하려고?”
“노란색 제비꽃이면 뿌리째 캐서 집에 가져가려고요. 앞뜰에 심어두고 보겠습니다.”
“집 부근에 노란 제비꽃이 없느냐?”
“없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곳까지는 다 살펴보았는데 흰색하고 보라색뿐이었어요. 저는 노란색 제비꽃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처음 듣는 소리다. 제비꽃이면 제비꽃이지 색이 무슨 상관이냐 싶었지만 료는 잠자코 침아의 팔을 잡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조팝나무가 늘어선 곳을 지나는 동안 침아는 이 향기 좀 보라며, 료의 팔을 흔들었다. 료는 시큰둥하게 그래, 그래 하면서 건성으로 대꾸했다.
“집 뒤로 틀림없이 산수유나무도 있지 않던가?”
거기서도 노란 꽃이 핀다는 소리다. 침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는 또 다릅니다. 꼭 노란 제비꽃이어야 해요.”
그리고 제비꽃 군락. 보라색 꽃 사이로 용케 두 포기의 노란 제비꽃이 있었다. 침아는 가까이 앉게 해달라고 하더니 허리춤에서 수건을 꺼냈다. 조심스레 꽃을 이리저리 만지다 땅을 더듬거리는 걸 보고 료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해주마.”
“손에 흙이 묻으실 텐데.”
“하나면 되지?”
“하나면 됩니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살살 캐주세요. 아……. 혹시 둘이 친구라서 따로 떨어뜨려 놓으며 쓸쓸해할까요?”
“제비꽃 주제에 무슨 친구가 있느냐.”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세상만사를 다 안다고 자부하십니까?”
“알았다. 그럼 둘 다 캐 주랴?”
“둘 다 캐 가면 이 산에 노란 제비꽃이 없어졌다고 산신님이 노할지도 모르는데…….”
“제비꽃 따위로 노할 정도면 그건 산신이 아니라 조무래기다.”
“그럴까요?”
그런 소릴 주고받으면서 료는 마침내 노란 제비꽃 두 송이를 뿌리째 캐내었다. 흙덩이가 바스러지지 않게 수건으로 감싸서는 침아에게 주자 침아가 환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예쁘게 인사했다.
“다른 여러 꽃들로 화환을 만들면서 이 제비꽃으로는 반지를 만들어 꼈던 생각이 납니다. 제비꽃을 반지꽃이라고도 부르는 거 알고 계세요? 참 예뻤는데 금세 시들어 버려서 괜한 짓을 했구나, 후회했어요. 아무리 예뻐도 역시 꽃은 꺾어버리면 안 돼요. 이것도 가는 길에 시들지 않아야 할 텐데.”
“우선 그늘에 두는 편이 좋겠다.”
료가 다시 넘겨받은 뭉치를 그늘에 놓아두었다. 침아는 진달래는 어디 있느냐면서 그에게 데려가 달라고 졸라댔다. 그녀를 데리고 진달래 군락을 향해 걸어가면서 가만히 료는 침아의 맨손을 보았다. 장신구라고는 전혀 없는 하얀 맨손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료의 눈엔 어여쁘다.
‘제비꽃 반지인가.’
그런 소릴 하는 걸 보면 역시 꾸미고 싶은가 보지, 하면서 료는 침아의 얼굴을 보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그의 팔을 잡고 걷는 것이 불안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교태스럽다. 만약 여기서 그가 홱 그녀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면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 오도 가도 못 하고 발을 동동 구를 것이다. 또 어린애처럼 울고 마려나.
심술궂은 생각에 료는 쿡쿡 웃었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침아가 고개를 돌리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선 짐짓 걸음을 빨리 했다. 침아가 놀랐는지 그의 팔을 잡는 손에 힘이 들어왔다.
“진달래꽃이다.”
“와아. 활짝 피어 있습니까?”
“음. 볕이 잘 드는 쪽은 활짝 피어 있는 편이고 그 위쪽으로는 아직 봉오리만 머금고 있는 것도 꽤 있구나.”
진달래 무리 앞에 앉은 침아는 조심스럽게 향을 맡거나 하면서 재잘거렸다.
“진달래도 참 좋습니다.”
“네가 싫어하는 꽃이 있긴 하느냐?”
“왜 없을까 봐서요.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이를테면 계관화라던가요. 생긴 것이 좀 징그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박태기나무꽃도 싫습니다. 그걸 먹었다가 한참 배앓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약간 독성이 있든가 그럴 게다. 그런데 애초에 꽃은 왜 주워 먹고 탈이 나고 그러느냐?”
“왜긴요, 맛있어 보이니까 먹었지요. 나뭇가지에 잔뜩 꽃이 영근 것이 꼭 분홍색 밥풀이 잔뜩 달라붙은 것으로 보였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침아가 진달래꽃 하나를 따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료가 혀를 찼다.
“또, 또 꽃을 주워 먹고 저런다.”
“괜찮습니다. 진달래꽃은 배탈 같은 걸로 복수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두 개, 세 개 쉬지 않고 입에 넣더니 꿀꺽 삼키고는 환하게 웃었다.
“끝 맛이 달아서 참 좋습니다. 꿀이 들어 있거든요. 주인님도 한 번 드셔 보세요. 자요.”
침아가 꽃을 내미는 것을 료는 멀뚱히 쳐다보면서 슬쩍 걸음을 옮겨 자리를 바꾸었다. 침아의 오른쪽에 서 있다가 왼쪽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침아는 오른쪽을 향해 꽃을 내밀고 있었다.
“안 드십니까? 그럼 제가 먹습니다.”
손에 든 진달래 꽃송이를 입에 막 가져가는데 료가 냉큼 가로챘다. 료의 입술이 침아의 손가락을 훑으며 지나가면서 둘의 이마가 살짝 부딪혔다. 침아가 놀라서 뒤로 파스슥 주저앉았다.
“뭐예요, 주인님, 안 보이는 사람을 놀리시깁니까?”
침아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료는 입 안에 든 진달래꽃을 거의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
“꿀이 있다면서.”
“있지요. 달지 않습니까?”
“전혀 모르겠다.”
침아는 고개를 갸웃했고 이내 다시 진달래꽃을 땄다. 꽃받침을 떼어낸 꽃을 거꾸로 해서는 료에게 내밀었다.
“이 끝 부분만 쪽 하고 빨아 드셔 보세요. 틀림없이 달 겁니다.”
료는 시키는 대로 했다. 아주 약간, 혀끝에 단맛이 퍼지긴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부루퉁하게 말했다.
“이런 걸 백 날 먹어봤자 뭐 하느냐. 꿀 한 동이를 사서 한 숟가락 먹느니만 못하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어찌 진달래꽃 한 송이를 꿀 한 숟가락과 비교하십니까? 꿀이 얼마나 비싼 건데요. 하여간 팔자가 좋으신 분입니다.”
“흥. 그까짓 꿀 하나 때문에 팔자타령은. 이제 그만 먹어라. 진짜 탈이라도 날라.”
“괜찮다고 해도 걱정이십니다.”
“그럼 예 두고 갈 테니 원 없이 실컷 먹어라.”
벌떡 일어나 걸어가 버리는 료의 움직임에 침아가 당황해서 일어섰다.
“주인님, 주인님 같이 가요.”
침아가 쫓아오는 모습에 슬며시 장난기가 발한 료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훌쩍 근처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거의 무게가 없는 듯이 가벼운 그의 움직임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얼마쯤 나다가 사위가 고요해졌다. 지켜보고 있자니 침아는 몇 걸음 걷다가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두리번거렸다.
“주인님…….”
오도카니 서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침아가 유난히도 연약해 보였다.
“침아가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장난치지 마세요.”
말하는 목소리에도 얼마쯤 불안함이 실렸다. 료는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침아는 계속 기다리다가 이윽고 왔던 방향을 되짚어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용케도 방향을 아는구나 싶었는데 향기를 따라간 모양이다. 진한 향기를 내뿜는 조팝나무 앞에 이르러서 침아는 다시금 두리번거리다가 그대로 웅크리고 앉았다. 두 손으로 그러안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쩌나 보자 하고 지켜보기만 하던 료의 눈이 가늘어졌다. 훌쩍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작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그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는구나. 이래서야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이란 말인가.
아직 치기 어린 젊음 탓에 자존심이 상한다. 안쓰러운 마음을 부러 누르면서 침아를 좀 더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문득 목덜미가 서늘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꿈틀거리는 털이 숭숭 난 흑갈색 애벌레가 감히 그의 목을 기어가고 있었다.
“……으아앗!”
질겁을 하면서 벌레를 떼어내던 료는 깜빡 균형을 잃고 나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굉장한 소리가 났다. 침아가 그 소리에 발딱 일어나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주인님? 꺄앗!”
달려오다가 막 몸을 일으키던 료의 몸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얼굴로 땅을 받기 전에 가까스로 료가 침아의 상체를 붙잡아 주었다. 치맛자락이 뒤집어지고 야단났지만 침아는 더듬대며 료를 확인하기 바빴다.
“어디 다치신 건 아니지요?”
그녀의 손이 료의 얼굴에 닿았다. 여기저기 만져대는 그 따뜻한 손 아래에서 료가 웃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내가 그 꼴이 됐다.”
“나무에서 떨어지셨습니까? 어쩌다가요?”
“그게……내가 생각보다 무거워진 모양이지.”
송충이 때문이란 소리는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다. 침아가 갑자기 찰싹 그의 어깻죽지를 때렸다.
“침아한테 못된 장난이나 치시니까 그렇지요.”
“어쭈, 네놈이 이젠 날 때리기까지 하느냐? 요 잔망스러운 것 같으니.”
“아니요, 아니요, 누가 때렸다고 그러십니까? 살짝 밀친 것뿐인데, 꺄아, 주인님, 답답해요, 답답합니다.”
료는 팔 안에 갇힌 침아의 허리를 꽉 조여 가며 짓궂게 물었다.
“이래도 바른말을 하지 않을 테냐? 살짝 밀쳤을 뿐이라고?”
달아나려고 침아는 버둥거렸지만 그녀의 가는 허리를 죈 그의 팔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목덜미를 비롯해 얼굴까지 새빨갛게 되어서도 침아는 료를 이겨보겠다고 용을 쓴다.
“아이참, 자기가 떨어져놓곤 민망하니까 괜한 날 잡는 것 좀 봐.”
“어쭈, 이젠 말까지 짧구나? 그야말로 하극상이로다!”
말은 그리해도 료는 기가 막혀하는 게 아니라 실실 웃고 있다. 하지만 점차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어 갔다. 버둥거리느라 땀이 나서 그런 건지 침아의 체취가 짙어졌다. 근처에 있는 조팝나무꽃이 발하는 그저 달달하기만 한 냄새와 달리 묘하게 자극적인 구석이 있는 은근한 향이다.
“네 어미가 어쩌면 너를 꽃 더미 속에서 포태했을까?”
“예?”
그 엉뚱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침아의 입술이 료의 뺨에 스쳤다. 그 부위가 불이라도 이는 듯이 뜨거워졌다. 료는 무언가 생각하고 말 겨를도 없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침아를 바닥으로 밀어 짓누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침아가 잘못했어요. 사실은 때린 것 맞습니다. 눈도 안 보이는 저한테 심술부리시는 게 얄미워서 그랬습니다. 잘못했어요. 항복이에요.”
아마 그녀를 내려다보는 료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면 그리 태평한 사과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료는 울렁증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허기가 져서 그는 그대로 침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주인님?”
있는 그대로로도 홍화 연지를 찍어 바른 것처럼 붉은 침아의 입술을 응시하는 료의 눈에 힘이 실렸다.
“또 아무 말씀도 안 하시깁니까? 잘못했다구요, 침아가. 심술부리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무릎 꿇고 빌라 하시면 빌게요.”
“……앞으론 말 잘 듣는다고 약속하는 거지?”
가까스로 입을 연 료는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목소리에 긴장했다.
“물론이지요. 침아는 항상 주인님 말씀을 잘 듣습니다.”
“퍽도 그런 소리를 뻔뻔스레……. 하여간 하극상은 용납 못해.”
“하극상 따위는 꿈꾸지 않아요.”
말은 그러면서 침아가 쿡쿡 웃었다. 료도 피식 웃었다. 아쉬운 눈빛을 가라앉히며 료가 몸을 일으켰다. 침아의 손을 잡아 일어나게 해주면서 그가 말했다.
“어디 과연 그런지, 집에 가서 보자.”
우송의 낮잠이 꽤 길어져 다시 길을 나선 그들이 마침내 운몽산 저택 앞에 당도한 것은 이미 땅거미가 내린지 한참 되어서였다.
우송이 멍에를 벗어던지고 기지개를 켜는 사이 료는 침아가 수레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비파를 등에 지고 수건에 싸온 제비꽃을 소중하게 안고 내린 침아는 눈은 보이지 않지만 짐작껏 고개를 돌려 집을 마주보고서 말했다.
“이제야 집에 왔네요. 배가 고파요, 주인님.”
당장에 그런 소리부터 하는 걸 보면 참 어리지 싶어 침아를 보는 료의 눈빛이 묘해졌다.
“하마터면 못 볼 뻔한 집인데 감격해서 울지는 않느냐?”
“그런 건 속으로 삼키는 거지요. 누굴 울보로 보십니까? 그리고 아직 집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침아는 오른쪽 눈을 만지작거렸다. 갑사비단으로 만든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 걱정하는 기색이 없어보인다 했더니 실은 그렇지도 않나 보다.
료는 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휘에게 부탁하면 금세 나을 종류의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도움을 청하지 않기로 했다.
“방심하면 그냥 두고 가버릴 거니까 안 놓치게 내 옆에 잘 따라붙어서 다녀.”
“예, 예.”
한숨을 쉬면서 침아는 료의 팔에 올린 손에 지그시 힘을 더했다.
부르지 않아도 이미 그들이 오는 걸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문을 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왔습니다. 잘들 지내셨지요?”
쌍둥이 시녀가 동시에 입을 맞추어 인사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침아는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료는 시큰둥하게 지나친 후에 핀잔을 던졌다.
“너한테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쓸데없는 바지런을 떠느냐.”
“그래도 반가운 걸요.”
“이 집에서 널 반길 이가 나 말고 누가 있다고.”
“우송 아저씨도 있지요. 반가워하셨어요.”
“내가 반가워했으니 그 녀석도 반가워한 거다.”
“예, 그래요. 주인님이랑 우송 아저씨는 한 쌍인 걸 잊었네요.”
“한 쌍이라니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기분 나쁜 소리라니. 우송 아저씨가 들으면 상처 받으실 걸요.”
다행히 우송이 근처에 없다. 수레며 말을 치워두러 간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는 침아에게 료는 불퉁하게 말했다.
“그 커다란 놈이 상처는 무슨. 그 소리가 더 기분 나쁘다.”
“어머, 우송 아저씨가 얼마나 여린 분인데요. 제 부탁에 노란 제비꽃도 열심히 찾아주셨는데.”
“노란 제비꽃이라니? 그건 내가 찾아주었잖아.”
정확히는 있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지만.
“오늘 말고요. 이제까지 그래 주셨다고요. 우송 아저씨가 저보다는 더 멀리 다니시잖아요. 봄이 오면 잊지 않고 꼭 찾아보마 하셨지요. 작년에는 아무리 찾아도 그런 게 없다며 노란 제비꽃이 세상에 있긴 하느냐 골을 내셨더랬죠.”
“나 모르게 그런 소린 언제 주고받은 게야?”
침아는 웃고 료는 심통을 냈다. 일단은 옷이나 갈아입을 생각으로 료의 거처가 있는 서쪽 뜰로 향하는데 중문을 지나가기 전에 차랑차랑 패옥 소리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일행과 마주쳤다.
옆에 등롱을 든 시종 둘을 거느린 가진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금수를 놓은 비취색 옷은 화사하기만 했다.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해 오는 가진에게 료는 일단 마주 인사를 했다.
“그 아이가 애타게 찾으시던 시녀인가 봅니다.”
애타느니 마느니 그런 소리를 굳이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하는 가진 때문에 료는 슬쩍 눈가를 붉혔다. 무뚝뚝하게 료가 대꾸했다.
“예. 어쨌든 찾긴 하였습니다.”
“이름이 침아라 했던가요. 어디……. 어머, 어째서 이 아이는 눈을 가리고 있나요?”
뭐가 그리 궁금한지 가진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잠자코 료의 팔을 잡고 있는 침아의 눈가리개를 만지려 하자 료가 슥 물러섰다. 침아도 덩달아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물에 빠졌을 때 사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나 보지요?”
“차차 낫게 될 것입니다.”
“가엾어라. 보이지 않으면 오죽 답답할까. 그 왜, 인간들 사이에도 의원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산 밑의 마을에 나가 의원에게 보여 보시지요?”
괜한 간섭이다 싶었지만 어쨌든 걱정해 주는 것을 고깝게 볼 것은 없다. 료는 희미하게 웃으며 되도록 부드럽게 대답하려고 했다.
“차도가 없으면 그것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화산 어르신이 갔던 일이 어떻게 됐는지 퍽 궁금해 하고 계십니다. 아직 저녁도 들지 않고 기다리고 계세요. 어서 건너오시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옷만 갈아입고 가겠다고 말씀해 주시지요. 아무래도 오는 동안 먼지를 좀 썼을 터라.”
“예, 그럼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서 건너오셔야 해요. 화산 어르신이 식사를 하지 않으시니 저도 아직 저녁 전이랍니다. 어머, 너 무얼 들고 있니? 노란 제비꽃이네? 예쁘다. 두 송이나 있네? 하나만 주지 않을래?”
가진의 말에 침아가 당황하여 료에게 고개를 돌렸다. 료가 나서서 거절했다.
“뜰에 심으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퍽 오랫동안 찾던 것이라 드리지 못하는 점, 아무쪼록 이해해 주시지요.”
“아, 그러셨군요. 예, 이왕이면 뜰에 심고 두고두고 보는 편이 좋겠지요. 혹시 잘 자란다면 나중에 씨라도 조금 나누어 주세요. 근데 제비꽃에 씨가 있던가?”
조금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가진이 유쾌하게 대꾸했다. 이어 또 다른 것에서 가진의 눈이 반짝였다.
“비파를 매고 있네요, 이 아이. 얘, 너 비파는 잘 타니? 노래는 잘해? 통 말이 없으니 목소리가 궁금하구나.”
“저는…….”
침아가 무어라 말을 꺼내는 것을 료가 싹둑 자르며 대꾸했다.
“남 앞에서 피로할 만한 실력은 못 됩니다. 할머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니 서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겠군요.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예, 어서 그러셔야지요. 저도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이따 보자, 얘야.”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손을 흔들어보이곤 가진이 뒤돌아섰다. 돌아서기 무섭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살랑살랑 춤추듯 멀어져갔다. 너무 밝아서 종잡을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료는 더는 말을 안 섞어도 된다는 안도의 뜻에서 한숨을 쉬었다.
“저분이 오면서 말씀하신 그 손님이신 거지요?”
“그래. 손님이시다.”
중문을 지나 걸어가면서도 침아는 얼마쯤 뒤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자매라고 하셨는데 어느 쪽 분이십니까?”
“어, 그게……언니 쪽이겠지?”
“언니인지 동생인지 구분도 못하십니까, 주인님? 두 분이 그리 닮으셨나요?”
“닮았나?”
영 무성의한 반응에 침아가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었다.
“설마 눈앞에 두고도 누가 누구지 그러고 계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나름대로 구별은 된다. 쉴 새 없이 시끄러운 쪽이 언니고 가끔 시끄러운 쪽이 동생이야.”
“어쩌면 그리도 설명을 못 하시나요. 누군가가 주인님께 침아는 어떤 아이입니까, 하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실 겁니까?”
“음. 걸핏하면 주인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드는 버릇없는 하룻강아지라오, 라고 하지.”
“어머, 제가 언제.”
그러면서 침아가 료의 옆구리를 찔렀다. 사위가 조용해서인지 툭 치는 소리가 별나게도 크게 들렸다. 료의 입술 가장자리가 실룩 움직였다.
“이놈이 또 주인을 쳐?”
달아나고 싶어도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이미 고양이 앞의 쥐다. 침아는 료가 으르렁대자마자 덥석 그의 팔에 매달리며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이번엔 무릎 꿇고 빌게요. 이 노란 제비꽃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세요.”
그러면서 진짜로 주저앉은 침아가 노란 제비꽃으로 제 얼굴을 방패처럼 가렸다. 그 약삭빠른 행동에 료가 혀를 찼다.
“봐주는 것도 두 번이다. 또 한 번 그러면 정말 뜨거운 맛을 보여줄 테니까.”
금세 고개를 들더니 침아가 헤헷 하며 웃었다.
“봐주실 줄 알았어요. 아얏, 아파라.”
그냥 넘어가는 게 아무래도 약이 올라서 료는 콩 하고 꿀밤을 때렸다. 엄살을 떤 침아가 발딱 일어나 료의 팔을 잡고 흥얼거렸다. 그러다 정색을 하고 물었다.
“제 비파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씀 진담이십니까?”
이윽고 옷을 갈아입고 둘은 화산 노파가 머무는 남쪽 내원으로 향했다. 중문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던 푸른 옷의 시동이 그들을 보고는 발 빠르게 달려가 소식을 전해 그들이 내원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푸짐하게 저녁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화산 노파는 침아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진과 마찬가지로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했지만 말이다. 화산 노파 곁에는 두 자매 중 가진만 있었다. 동생인 가선은 몸이 좋지 않아 일찍 들어가서 쉰다고 했다고 료가 묻지도 않은 소리를 가진이 재잘댔다.
오늘은 특별히 화산 노파의 허락을 얻어 침아도 그들의 상 한쪽에 자리를 차지했다. 따로 시중을 드는 하녀가 침아 옆에 있었지만 식사하는 내내 료가 살뜰히 챙기는 바람에 그 하녀는 번번이 할 일을 뺏겼다.
식사하는 틈틈이 침아는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묻는 화산 노파의 질문에 대답했다. 들을 만큼 들었다 싶자 화산 노파는 입을 다물었지만 가진이 이것저것 묻는 게 많아 침아의 식사 속도는 더뎠다. 료가 자세한 이야기는 차라도 들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냐며 가진의 질문을 차단했다. 화산 노파도 그러는 게 좋겠다며 료의 편을 들어주어 가진의 입이 겨우 조용해졌다.
마침내 저녁을 다 들고 상이 치워졌다. 하녀들이 연꽃차를 내온 것은 한 식경쯤 후의 일이다. 그 짧은 동안에도 가진의 시녀들은 비파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주인을 즐겁게 해주는데 여념이 없었다. 가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너울너울 춤까지 추었다. 료는 과연 이런 여자를 휘가 정실로 맞아들일 것인지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은 눈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겠으나,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으니 다행이라 여겨야겠구나. 눈이야 료도 있고, 뭣하면 휘도 있으니 언제든 나을 수 있겠지.”
“두 분께 그런 재주가 있습니까, 어르신?”
차를 마시며 화산 노파가 한 말에 가진이 관심을 보였다.
“아, 자네에게 아직 말을 안 했던가. 료도 그렇고 휘도 의술이란 것에 퍽 관심이 많다네. 휘는 언젠가 세상에 괴질이 크게 돌 때 의원 행세를 하면서 인간들을 도와주러 다닌 적도 있다네. 알게 모르게 꽤 자주 그러는 것 같더군.”
“어쩌면. 그분은 참 자비롭기도 하군요.”
료의 심사가 썩 좋지 않았다. 질투가 아니라, 휘가 어떤 뜻으로 그런 일을 하고 다녔는지 알기 때문이다. 변덕도 변덕이거니와, 자신이 머무는 곳 주변에서 인간들이 떼죽음을 하면 공기며 물이 영 못 쓰게 되고 덩달아 그들의 먹잇감조차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가 크게 차지했다. 그 이유로 운몽산 주변에는 큰 전염병이 맥을 못 쓴다. 제대로 된 천적도 없는 주제에 수가 지나치게 많은 인간들. 어쭙잖게 영리하긴 하나 또 죽을 때는 너무 쉽게 죽어버리는 모순적인 존재들. 우리 같은 자들이 이따금 세상을 보살펴줘야 한다면서 웃던 휘에게 과연 자비라는 말이 어울릴까.
또 한편으로 료가 못하는 일이라도 휘는 할 수 있다는 식의 화산 노파의 말에도 심기가 상했다. 전처럼 머리를 굽혀 그에게 부탁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료는 침아를 돌아보면서 이대로 영영 이 아이가 앞을 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시중을 들어줄 시녀를 한둘쯤 붙여줄 생각도 있다. 우선은 내일 일어나서 차차 상황을 봐야겠지 하면서 료는 습관적으로 침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불편했던 심기가 그 작은 행동에 눈 녹듯이 풀어졌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화산 노파가 침아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역시 알 수 없는 노릇이구나. 가선낭의 말처럼 무엇에 홀리기라도 했을꼬. 멀쩡히 가던 배에서 강물에 빠진 데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텐데.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그저 궁금해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구나.”
“머리를 다치면 기억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역시 인간이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저희한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겠죠, 어르신?”
마치 기억을 잃을 기회가 없어서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진이 물었다. 화산 노파는 그저 웃기만 하고 이내 침아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런 와중에 전 주인에게 구조를 받았다 하니 보통 인연이 아니구나. 료야, 제대로 사례는 하고 왔느냐?”
“예.”
대답은 그리하였으나 말끝이 미진하다. 위후는 한사코 사례금을 거절했다. 밥 몇 끼 먹여 보내는 것에 무슨 사례냐며 그럴 돈으로 차라리 침아에게 예쁜 옷이나 노리개 하나라도 사주라는 말까지 했다. 그 말에 기분이 나쁜 것을 료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었다. 그자가 무슨 자격으로 침아의 옷이며 장신구 따위를 신경 쓴단 말인가. 안 그래도 고운 옷을 지어주겠다는 생각을 했던 차인데 이래서야 꼭 그자의 말을 듣고 선심을 쓰는 꼴이 되지 않았는가.
불쾌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자는 불쾌하다. 앞으로 다시 보지 않을 거라는 점만이 그 불쾌함을 조금쯤은 누그러뜨린다.
화산 노파는 료의 그런 기색조차 읽어냈다. 너무도 투명하여 그 속이 훤히 읽히는 아이라고 생각하며 슬며시 찻잔을 기울이며 웃음도 삼켰다. 오히려……. 화산 노파는 찻잔을 들여다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것은 저 인간의 아이인가?
이번에 침아를 찾는데 료만 보낼 게 아니라 자신도 따라갈 것을 그랬다고 화산 노파는 생각했다. 승냥이를 찾는데 노력은 보탰으나―이를테면 그녀가 쉽게 부리는 한가한 새들의 눈을 좀 빌리는 식으로―여차하면 모진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조카손자를 옆에서 보는 것은 꺼려져 함께 가려던 뜻을 꺾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아쉽다. 그 승냥이를 다시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공연히 뒷맛이 텁텁한 이 느낌은 가셨을 것이다.
혈통이 좋다라…….’
예전에 가볍게 흘려 넘겼던 그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뇌리를 오락가락한다. 화산 노파는 시선을 들어 침아를 보았다. 정신을 집중해 찬찬히. 흔하디흔한 인간의 기운밖에 없다. 의미 없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가 이내 분위기를 바꾸어 침아에게 온화하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눈이 안 보여서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겠구나. 내가 당분간 예 머물 참이니 내 옆에 와 있으련? 내 수발을 드는 것들이 여럿이니 너 하나쯤 건사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게다. 침아야, 그리하련?”
침아는 무어라 입을 들썩이려다가 힐끗 료의 눈치를 살폈다. 제 주인이 누군지 아는 종복다운 태도였다. 그리해도 되겠느냐고 묻고 싶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도 않고 료가 대신 대답했다.
“공연히 할머니께 짐만 될 것입니다. 그냥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별도로 시중들 아이가 있어야 할 텐데. 청작에게 내 말을 해두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당분간은 전처럼 지내보겠습니다. 정 불편하면 제가 청작에게 말을 하지요.”
시녀를 따로 달라 할까 하는 생각을 방금 전까지 했으나 당장 내일부터 처소에 낯선 것들이 출입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전혀 내키지 않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기까지 했다.
“아무도 필요 없다니, 그럼 료 네가 시중을 들어줄 참이냐?”
화산 노파가 놀리듯이 한 말에 료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얼른 낫게 해야겠지요.”
시중을 들어주겠다는 소리다. 화산 노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옆에 있던 가진이 발그레한 뺨에 미소를 가득 담으며 말했다.
“어쩜, 작은 공자님께서는 그 아이를 끔찍히도 아끼시는군요. 아랫것에게 그리 잘 대해 주시는 걸 보면 좋은 부군이 되실 게 틀림없어요. 형님 되시는 분께서 작은 공자님의 절반만큼만 다정하시면 좋겠어요. 그럼 냉큼 혼약을 해달라고 조를 텐데. 아아, 가선이는 운이 좋구나.”
가진의 솔직하기 짝이 없는 말에 료는 적잖이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어째서 그녀의 말 속에 동생의 이름이 나오는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여자가 있는 자리에서 대화를 길게 하는 것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료는 이미 텅 빈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시간이 늦었고 하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건너가서 푹 쉬도록 해라.”
료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침아에게도 화산 노파는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 후에 상냥하게 덧붙였다.
“네가 다시 돌아와서 기쁘구나, 침아야.”
침아의 붉은 입술이 생긋하며 완벽한 호를 그렸다.
“저도 참으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