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주인찾기
음력 3월이 되자 하늘 아래 거의 모든 곳에 따스한 봄의 손길이 미쳤다. 절기로 청명이 돌아온 날 아침엔 문자 그대로 맑고도 밝은 날씨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충동질하는 듯했다.
“아아, 짝짓기의 계절인가.”
아침 하늘에 사이좋게 날아가는 메추리 두 마리의 지저귐도 평소와 달리 농염하게 들렸다. 소리가 들려오는 하늘 쪽으로 머리를 돌린 침아의 얼굴에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따스함이 피부로 스며드는 느낌을 만끽하던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래, 그래. 한참 좋을 때지. 기껏해야 십 년쯤 사는 녀석들이니 한 해, 한 해가 소중하기 짝이 없겠구나. 즐기려무나, 작은 새들아. 이 몸에게도 나름대로 즐길 거리가 있다지.”
침아의 얼굴이 들판으로 향했다. 들판엔 그야말로 풀 반, 나물 반이다. 이름 없는 작은 들꽃들도 무수히 피어 있다. 지난겨울에 눈도 풍성히 내렸고 봄 들어서 비도 그럭저럭 온 덕에 한 줌의 흙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위엔 보드라운 푸른 것들이 가득했다. 늙은 배롱나무에 기대앉은 침아는 울퉁불퉁한 뿌리 주변의 흙을 빼곡히 채운 풀을 만져보면서 참 좋은 때라고 생각했다.
거의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몇 가지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배고픔에 대한 한도 남아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이 그때는 왜 그리 힘이 들었던가. 그렇게 처절하게 먹을 게 없었던 걸 떠올려보면 흉년이 거듭되는 불운한 시기에 태어났던 모양이다. 산은 풀뿌리조차 찾아볼 수 없이 버석버석한 붉은 흙밖에 없었고 껍질이 벗겨진 나무들은 상처를 보호할 진액을 흘릴 기운조차 없어 을씨년스럽게 서서 말라죽어 갔다.
하도 배가 고픈데 물조차 삼킬 것이 없었던 어떤 날에는 흙을 집어삼켰었다. 미친 듯이 배를 채우고는 얼마 안 가 미친 듯이 토했다. 이러다 피를 토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헛구역질을 하다가 몇 번이고 의식을 잃었었다.
죽나보다. 이제 난 죽나보다. 감각이 없어져가는 몸속에서 쨍하니 맑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런 생각에 골똘했던 기억이 있다.
대체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이렇게 비참하게 살다 갈 거면 벌레 같은 거로 태어났어도 좋았을 텐데. 생각 같은 거 할 필요 없게.
고작해야 예닐곱이나 됐을 어린아이가, 그런 의문을 품었다. 이어서 드는 생각에 두려워져 몸을 떨었다.
이대로 죽으면 귀신이 되지 않을까. 필경 굶어 죽는 것일 테니 아귀(餓鬼)가 되겠구나. 죽어서도 배고파, 배고파하고 중얼대면서 먹을 걸 찾아 헤맨다고 하는 비참한 귀신. 그리되고 싶지는 않으니 달리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목을 매는 것은 어떨까. 아니다. 액귀(縊鬼)가 되면 죽어서도 계속 목을 매는 시늉을 한다지. 그것 또한 할 짓이 아니다. 물에 빠져 죽을까. 한데 빠질 만한 깊은 강은커녕, 코라도 박고 죽을 물 한 모금이 없었다. 굶어 죽는 것만큼은 싫은데 어찌해야 할지 어린것의 머리에 떠오르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희노란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 하 오랜만에 보는 새 한 마리가 참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며 멀어져가는 모습에 더는 움직이지 못할 줄 알았던 몸에 힘이 돌아왔다. 결심을 했다.
날자. 기왕 죽을 거라면, 나도 날아 보면서 죽자.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어린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스쳤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서 땅으로 뛰어내리면서 까치며 참새 시늉을 하면서 놀았었다. 겁이 많아서 그때 결국 자신은 나무 우듬지에는 오르지 못했었다.
“고추도 못 달고 태어난 계집애들은 별수 없지.”
누군가 내뱉은 얄미운 한마디가 아직도 기억이 나서 침아가 웃었다.
그리고 다시 ‘그날’의 일을 더듬어갔다.
침아는 산에 올랐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던지 멀쩡할 때도 숨이 찼을 먼 길을 신들린 듯이 잘도 갔다. 참 긴 길의 끝에 침아가 본 것은 마을 근처 산에 있던 당산나무였다. 절벽 끝에 서 있는 낙락장송은 당산제 때 꼭 한 번 보고서는 그때가 두 번째였다. 성한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산에서 그 소나무만큼은 사뭇 위엄을 떨치며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범해서는 안 된다. 신성한 나무, 수호신 나무니까. 그 금제를 의미하듯 주위에 둘러쳐진 새끼줄과 붉고 푸른 천들을 넘어가서 침아는 나무로 다가갔다.
시원한 그늘에 들어섰을 때, 오싹하면서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경고하는 것처럼. 그 경고를 듣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죽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공허한 웃음을 지으면서 마침내 소나무 줄기에 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에서 침아는 태어나서 본 중에서 가장…….
“멍하니 앉아서 뭐하고 있는 거지?”
불쑥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침아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뭐하긴요. 하늘과 땅의 기운을 마시는 중입니다.”
“흥. 물의 기운이 없으니 아쉽겠군. 저 중앙에 연못이라도 하나 파야 하나.”
위후―그녀의 전 주인의 이름이다―는 기지개와 하품을 동시에 하면서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언덕에 연못 만드는 일을 뒷간에 다녀오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위후의 말에 침아가 웃었다.
“제법 큰 공사가 될 터인데 귀찮아서 어찌하시려고요?”
“그러게나 말이다. 귀찮겠지. 돌아다녀봐서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적당히 하나 옮겨올까나.”
연못을 파는 것보다 다른 곳에 있는 연못을 옮겨올 생각을 한다. 그 엉뚱한 소리에도 침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양과 수질이 땅마다 다르니 잘못 옮겨왔다가는 공연히 이곳에 늪이 생기고 말겠지요.”
“그때는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으면 될 일이야.”
“멀쩡한 연못을 가져와서는 늪으로 갚아주면 혹 그곳에 신이 계실 경우 심기가 불편해지실 겁니다.”
“그때는 싸워 보는 거지. 작은 연못 따위에 이무기가 살 리 만무하고. 난 정말 그네들하고는 상성이 안 맞아.”
위후의 투덜거림에 침아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말로는 이런 소릴 하지만 살다 살다 정말 지루하다 싶은 때가 오면 이자는 이무기한테도 싸움을 걸 것이다. 제 기분이 영 아닐 때엔 그야말로 불땔꾼이 따로 없는 성정은 굳이 침아가 확인하고 말 것도 없다.
다행히도 위후는 침아에게 퍽 관대하다. 그의 기준으로 보아 그를 심심하게 만들지 않는 쪽에 있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일없이 숨만 쉬는 것도 그만하면 됐지 않나? 비파나 타도록 해. 멀쩡히 있는 손 놀리면 벌을 받을 게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무료해졌던지 위후가 비파를 침아에게 떠안겼다. 술대를 찾아 더듬대는데 위후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그것을 찾았다.
“이걸 여기 꽂는 이상한 버릇은 어쩌다 든 것이지?”
“아아, 나름 편리해서 말이지요.”
“주씨네 작은도령께 그런 버릇이 있나?”
“버릇이랄 것도 없지요. 비파는 영 아니고 그나마 잘 다루는 악기는 피리가 고작인데. 그마저도 어쩌다 한 번 타는 수준이라 실력이 쌓이지도 않고.”
“주씨네 작은도령은 피리를 부시는가. 질 수야 없지.”
위후가 소맷자락에서 당피리를 꺼내들었다. 나이로 치자면 료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까마득한 연장자인 주제에 퍽 유치한 경쟁심을 불태운다. 침아는 웃음이 나왔지만 조용히 비파의 다섯 줄을 고르고 술대를 잡았다.
“봄이고 하니 즐거운 곡을 타야겠지요?”
“뭐라도 좋지. 아, 그간 만든 곡이 있을 텐데?”
“몇 개 있긴 하나 대수롭지 못한 것들이라…….”
“그런 소릴 다른 이가 하면 겸손이라고 하겠으나 네가 하면 기만이지.”
“제 마음에 흡족하다면 겸손 같은 것도 부리지 않습니다. 아, 《채화(采華)》를 타보지요.”
이윽고 침아의 비파가 가락을 들려주었다. 느긋하게 눈을 감고 위후가 듣고 있자니 딱 나른한 봄날 뱃놀이를 나가서 들으면 어떨까 싶은 유쾌한 느낌의 곡이었다. 간질간질한 것이 은근슬쩍 던지는 추파와 함께 비단치마를 사락사락 끌며 춤을 추는 기녀의 춤사위 생각도 났다.
“이건 또 무언가. 퍽이나 요염한 곡이 아닌가. 우리 요조한 숙녀께서 잠깐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기에?”
“요염이라니 그 무슨. 듣는 귀가 문제인 거겠지요.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서 떠올린 곡인데.”
침아의 말에 위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위태로운 상황이라 하면?”
“협죽도 꽃을 따면서 지은 곡입니다. 몇 날 며칠이고 꽃을 땄지요.”
“협죽도라 하면……저 아래 남쪽에서나 볼 식물인데. 아니 그보다 그 해로운 꽃은 따서 무엇에 쓰는 것이지?”
“무엇에 쓰긴요. 말려서 차로 마시고 술도 담그지요. 제 어린 주인께선 꽃째 그냥 먹기도 하셨답니다. 저도 그건 못 먹는데.”
“과연. 그 일족이 괜히 경외의 대상이시겠나. 하하, 그 꽃을 먹는다라? 그거 한 번 눈으로 보았으면 싶군. 듣자하니 선녀가 울고 갈 미인이라 하니 말이야.”
“이제는 아름다운 이라고 하면 암수를 가리지 않으시는 모양이지요?”
“다행히 아직은 암컷 쪽이 월등히 좋단 말이야. 자자, 방금 그 곡을 다시 연주하도록 해. 이번엔 이 몸도 합세하여 주지. 그런데 노래는 없나? 가락뿐이야?”
“없습니다. 거기서 제가 한가로이 놀기나 하신 줄 아십니까?”
톡 쏘아붙인 침아가 술대로 현을 긁었다. 위후는 쿡쿡 웃다가 낭랑한 비파의 음이 울려 퍼진 얼마 후 나지막한 곡조와 함께 연주에 동참했다.
합주는 순조롭게 잘 되어갔다. 오늘 처음 들어본 곡을 실수조차 없이 따라 하면서 이따금 변주까지 하는 위후의 솜씨는 나무랄 데 없이 뛰어나 이따금 침아는 위후 쪽으로 고개를 까딱까딱 해보였다. 음률에 있어서는 칭찬에 박하기 짝이 없는 그녀로서는 최고의 찬사에 가까웠다.
고요한 사위 속에 둘이 만들어내는 음률은 놀랍도록 멀리까지 흘러갔다. 마치 그 소리에 이끌린 듯 어언간 들판 위를 나는 새들이 많아진 것이 이상하지만도 않았다. 색색의 날개를 가진 새들 사이로 거무튀튀한 새가 날아와 빙그르르 한 바퀴 돌고는 배롱나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양나무 아래로 가서 날개를 펄럭이다가 자리를 잡았다. 이른 아침에 환한 하늘을 나는 것에는 어울리지 않는 새답게 그늘에 숨은 것이다.
전혀 모르는 것처럼 위후는 피리를 불면서 곡이 끝날 즈음이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또 되돌아가고를 반복했다. 계속 동참해 주던 침아가 마침내 술대를 거두면서 말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야 즐겁지요.”
“그 꽃노래, 마음껏 들을 수 없으니 조바심이 나는 것이지.”
익살스런 표정과 함께 위후가 속닥거렸다. 보기에 따라서 수작을 건다는 식으로도 보이련만 침아는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하여간에 손에 쥐지 못한 것만 아쉽고도 애가 타시지요. 못된 버릇이십니다.”
“내가 못된 것이 아니다. 수컷이라면 다 그런 경향이 있게 마련이야. 수컷은 사냥을 하니까.”
“그거야 네 발 달린 수컷에게 한정된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 네가 아직 어리단 거다. 아직 봐야 할 것도 많고.”
위후의 핀잔에도 침아는 묘한 미소와 함께 비파를 사뭇 다정하게 쓰다듬기만 했다. 다른 곡을 타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우선 그 즐거움은 뒤로 미루면서 위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백양나무 쪽을 건너다보았다.
“두 발 달린 수컷이라고 별수 있는지 보자꾸나.”
그런 말에 이어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날카로운 소리에 침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백양나무 그늘에서 그들을 향해 날아온 검은 새는 배롱나무 주위를 돌며 자리 잡을 곳을 탐색하다가 마침내 침아의 머리 위쪽 가지를 발로 움켜잡고 거꾸로 매달렸다.
“잠도 못 자고 이틀 동안 쉴 새 없이 날았어요. 졸려서 죽겠습니다.”
투덜거리는 가칫한 목소리. 침아가 빙긋 웃으며 아는 체했다.
“문복아.”
문복이라 불린 박쥐는 꾸욱 눈을 감으며 그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스락대는 소리에 침아가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뭘 좀 먹기는 하고?”
“흥, 잠도 못 잤는데 뭘 먹을 참은 있었을라고요. 이놈이 뭘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엇, 눈에, 눈에 왜 그런 걸 두르고 계십니까?”
문복이 놀라서 소리치며 묻자 침아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고운 흑갑사로 만든 띠가 마치 눈가리개를 한 양 둘러져 있었다.
“어중간하게 보이는 바람에 오히려 자꾸 다치는구나. 나을 때까지 차라리 장님 흉내나 내고 있을 참이다.”
“장님이라니! 장님이라니! 아이고 복장 터져!”
문복이 환장할 노릇이라는 듯 마구 날개를 퍼덕이며 요란을 떨었다.
“낫는다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다녀오면 다 나아 있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왜 거짓말을 하세요! 저 같은 놈한테 한 말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얕보셨습니까? 말씀 좀 해보세요, 예? 예?”
“아니, 그러니까 아주 장님이 된 것이 아니라 장님 흉내일 뿐이라고…….”
습격이라도 할 것처럼 사납게 위후를 닦달하는 문복의 맹랑함에 놀랍게도 위후가 쩔쩔매며 진땀을 흘렸다.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소리가 이런 경우겠지 하면서 침아는 빙긋이 웃고 있다.
“웃지만 말고 달래야 할 것 아니냐. 대체 얼마나 멋대로 두었기에 이런 꼴통이 다 생기는지 원?”
발로 툭툭 침아를 차면서 위후가 흉을 보자, 문복의 작은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아니, 이 작은 분을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차십니까, 어찌 그런 못난 발로, 어찌, 어찌!”
그러면서 문복이 머리로 위후의 등이며 어깨를 찧어대는 통에 위후가 기가 막혀서 혀를 차며 문복의 하는 꼴을 구경했다.
“이놈은 그야말로 뱃속에 든 것이 오장이 아니라 일장인 게 틀림없구나. 간밖에 없는 게 분명함이야. 내 진짜 언제 한 번 열어서 확인해야겠느냐?”
으르렁대며 위후가 역정을 내었지만 문복은 간밖에 없다고 오인 받는 녀석답게 겁이 없었다. 할 수 있으면 죽여보든지 하는 식으로 날쌔게도 날면서 위후를 찰싹찰싹 때려댄다. 정말로 위후가 화를 내기 전에 침아가 문복을 불렀다.
“문복아, 그만하고 이리 온.”
비파를 옆으로 내려놓고 자신의 무릎으로 오라고 침아가 손짓하자 아직 분이 안 풀린 문복이 힐끔힐끔 위후와 침아를 번갈아보다가 결국 침아의 따뜻한 손이 부르는 대로 갔다.
무르팍에 얌전히 앉은 문복은 서너 살 정도의 사람의 아이만 하다. 침아는 그런 문복의 날개며 머리를 썩썩 문질러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우리 문복인 용감하지만, 위후 님께는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러다 나 없는 동안 무슨 구박을 받으려고 그러니?”
“그리 구박을 받을 바엔 훌쩍 달아나버리지요.”
“하긴 우리 문복인 혼자서도 잘 살 테지만 말이다. 어여쁜 이를 만나서 새끼 낳고 오순도순 사는 것도 좋겠구나.”
“문복인 그런 거 모릅니다.”
쑥스러운지 날개 사이로 목을 쏙 넣으면서 문복이 웅얼거렸다. 지켜보던 위후가 눈꼴사납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천년만년 누님, 누님 하면서 하늘 보며 찔끔거리는 게 좋다면 누가 말리겠느냐?”
“이놈이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침아한텐 설설 기면서 위후에겐 겁 없이 캬악하고 이빨까지 드러내는 걸 보고 참다못해 위후가 피리로 문복의 머리를 때렸다. 따악! 하고 아주 경쾌한 소리가 난데 이어 문복의 울음보가 터졌다.
“어엉, 누님, 누님, 저 좀 데려가십시오. 여기선 서러워서 못 삽니다, 데려가세요, 이번엔 저도 데려가세요! 어어엉.”
엉엉 우는 사이사이 데려가 달라 조르는 문복을 침아는 말없이 토닥토닥 다독였다. 진심도 진심이지만, 위후에게는 어리광이 도가 지나친 걸로 밖에는 안 보인다. 몇 년 만에 만났다고 그 어리광을 말없이 다 받아주는 침아가 바로 그 어리광을 키운 주범이라고 위후는 생각했다.
참을 만큼 참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위후는 문복의 뒷덜미를 잡아 침아에게서 떼어냈다. 문복의 버둥거림을 보다가 제대로 일갈을 내뱉었다.
“이놈, 그쯤하고 얌전히 굴지 못하겠느냐!”
드르릉, 언덕이 흔들릴 정도로 싸한 기운. 문복이 일거에 버둥거림을 그치며 아주 얌전해졌다. 침아가 웃음을 삼키려고 고개를 숙였다.
“자, 이제 나잇값은 좀 해야지. 내가 하란 일은 어김없이 했으렷다?”
문복이 꽁하고 있자 위후의 목소리가 살기로 바르르 떨렸다.
“내가 달리 보낼 녀석이 없어서 네놈을 보냈느냐? 곧 죽어도 네가 하겠다고 성화를 부려 일을 시켰더니, 여기까지 와서 입이 붙었느냐? 좋다. 나도 생각이 있지. 대신 네놈에게 다시는…….”
“……했습니다. 제대로 했습니다. 알려주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잠도 자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주눅이 들긴 했으나 자신의 임무 완료를 보고하는 문복에게선 자랑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칭찬을 해도 나중에 해줄 생각이다. 위후는 예쁘지 않은 자에겐 기본적으로 가차 없다.
“적어도 열흘은 기다리게 한 게 맞지?”
“그러믄요. 가는 데 이틀 걸렸고, 거기서도 열 밤 세면서 기다렸다가 슬쩍 나타나서 일러주었지요.”
“대가는?”
“아, 보십시오.”
위후는 문복의 다리에 달려 있던 전낭을 들어 한 번 무게를 가늠한 후 그 안을 보았다. 미소가 번졌다. 뒤를 돌아보며 침아에게 말했다.
“널 그 노파에게 팔아넘긴 것보다 후한 값이로구나. 그 어린 도령이 정말로 널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침아는 고개를 숙인 채 이렇다 할 말이 없다. 위후는 전낭을 만지작거리다가 발치를 내려다보면서 왼발을 들더니 바닥에 스윽 동그란 원을 하나 그렸다.
“그럼 이제 ‘주인찾기’를 하자.”
가벼운 중얼거림에 이어 툭 하고 원 안에 전낭을 던졌다. 문복은 튀어나올 것처럼 된 눈으로 전낭이 떨어진 바닥을 응시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태연해 보이던 위후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호오……. 썩어도 준치란 뜻이렷다?”
위후가 몸을 굽히더니 왼쪽 앞발을 원의 경계에 갖다 대었다.
“‘주인찾기’를 하자.”
평온한 목소리. 원 안의 전낭이 부르르 떨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진지하게 쳐다보던 문복이 끼룩, 하고 비웃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위후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시치미를 뗐다. 위후의 왼쪽 윗입술이 들리면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득였다.
“‘주인찾기’를 하자.”
분절된 음성 하나하나마다 힘으로 넘쳐났다. 경계에 닿은 앞발이 땅을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눈에 띄게 붉은 털의 색이 옅어져 갔다. 뭉툭한 승냥이의 앞발 틈새가 조금씩 벌어져가는 것을 지켜보며 문복은 침 한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길어지는 앞발과 날카롭게 자라는 발톱 사이로 바닥의 흙이 미미하게 솟구쳐 올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낭이 떨리고는 있으나 그뿐이다.
그때 옆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침아가 물었다.
“주인의 이름을 알려드려요?”
“필요 없어. 그러면 너무 쉽잖아.”
위후는 코웃음을 치고선 일어서 신경질적으로 소맷자락을 털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다시 몸을 굽혔을 때엔 오른쪽 앞발을 힘껏 땅에 눌렀다. 위후의 구령이 힘찼다.
“자아, 네 주인에게 다다를 눈을 빌려다오!”
한동안은 적적하리만큼 잠잠했다. 문복의 닫힌 목구멍에서 끄륵 끄륵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내 보게 된 광경에 웃음도 쏘옥 들어갔다. 위후가 그린 원의 경계가 새로운 형체를 가지고 들썩이며 땅에서 일어났다. 전낭은 그 반대로 땅으로 쑤욱 꺼져 들어갔다.
공중에 부양한 경계와 실제의 땅 사이에 어른거리며 흙비가 내리는 듯한 풍경이 얼마쯤 이어졌다. 그것이 이윽고 뿌연 안개로 화했다.
그 안개 속에서 먼저 나타난 것은 귀 끝이 하늘로 치켜 올라간 시커먼 소의 얼굴. 위후가 얼굴을 찌푸렸다.
“웬 못난 소가 처음부터 면상을 들이미는 것인지.”
“반인반우의 심복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우송이 보였다면 근처에 주인이 있을 것입니다.”
침아가 하는 말에 위후는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듯 가슴을 쓸었다. 다음으로 가선과 가진이 보였다. 그 아름다운 외모에 위후는 대번에 쩝쩝 입맛을 다셨다.
“호오. 꽤 괜찮은 시녀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너는 용케도 이런 집에서 붙어사는구나. 시녀로 난조(鸞鳥)를 들일 수 있다니 굉장한 사치로다!”
그 말에 침아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난조가 보입니까?”
“보이는데? 둘이나?”
침아가 빙긋이 웃더니 중얼거렸다.
“둘이라. 그 둘 중 하나가 저를 배 밖으로 내던졌답니다.”
“호오. 생긴 것과 달리 힘이 좋았던 게로구나. 썩 보기 좋아 보쌈해 올까 했는데 관둬야겠다.”
위후의 대꾸에 침아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그러는 사이 안개 속에 다른 이가 나타났다. 두 난조의 가까이에서 이야기하던 자는, 붉은빛이 도는 검은 깃으로 감싸여 있다. 붉은 부리 위로 금빛이 섞인 새파란 눈테가 신비로운 기운을 더해 주는 그자의 눈이 문득 이쪽을 향했다. 턱을 치켜들던 그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크, 들킬라.”
위후는 오른 앞발을 떼면서 후 하고 큰 숨을 불었다. 신기루가 증발하듯이 일시에 안개가 걷히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뒤에도 땅 위에 놓인 전낭이 얼마간 달가닥 달가닥거렸다.
“조금 우습게 봤어. 이 늙은 암컷도 세월을 아주 허투루 산 건 아닐 텐데.”
“화산 어르신이 뭔가를 눈치 채셨나요?”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나봐. 그렇지만 그것뿐이지. 이 몸의 주술 너머로 올 이는 저 대륙을 다 뒤집어도 서넛도 되지 않아.”
이야기는 위후의 자기 자랑으로 끝이 났다. 위후와 함께 있다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위후는 전낭을 집어 들어 공중에 내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면서 말했다.
“보고 싶은 건 주씨네 어린 도령이었는데 말이지. 어디, 기다리다 지루해지면 차라리 이 몸이 운몽산으로 내려가 볼까나.”
“……나서지 마세요.”
위후의 장난스런 말에 바로 침아의 반응이 나타났다.
“제가 부탁드린 게 아닌 일은 하지 마세요. 아시겠지만, 그런 약속이었지요.”
눈은 가려져 볼 수 없으나 얇게 다물린 입매가 날카롭다. 위후는 재미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팔짱을 끼었다.
“영문은 알 수 없으나 널 죽이려 했던 난조가 아직 작은도령의 주변에 있다. 돌아가는 건 그렇다 치고 돌아가서 어찌할 셈인데?”
“그 정도 앞가림은 할 테니 걱정은 마세요.”
“흥. 죽을 뻔한 걸 구해 주었더니.”
“그리 간단히 죽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아시겠지만.”
“이번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면 죽는다. 네 지금 그 몸으로는.”
“이번이야 방심했기 때문이지요. 난조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 그리 독살스러울 줄 알았나요. 어쨌든 멋대로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제가 그리 죽어서는 위후 님께도 손해가 아닙니까?”
“큰 손해는 아니지. 담보가 있는데 뭘.”
“그 담보만으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겠지요. 뭐 지루하여 불구덩이에 뛰어들 생각이시라면 모르겠으나.”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군. 예전에 동탁이란 놈 때문에 낙양이 불바다가 되는 바람에 내 꼬리가 살짝 타고 말았었지. 그때는 내가 참 미숙했어. 인간의 수컷은 전쟁을 유난히 좋아하니 또 그런 일이 일어나란 법이 없겠느냐?”
의뭉을 떠는 위후의 말에 침아는 단조롭게 말했다.
“그걸로 만족하신다면 좋을 대로 하시지요. 어차피 만나야 할 이를 만났으니 가장 큰 약속은 지켜진 것이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문복이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다가 소곤거렸다.
“저자랑 아주 인연을 끊는다면 저도 데려가 주시는 거지요?”
위후는 다른 건 둘째 치고 문복의 그 희망에 찬 눈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미 고약한 박쥐 놈을 괴롭히기 위해서라도 침아랑 인연을 끊을 생각이 싹 가셨다.
“그 어린 도령이 과연 얼마나 빨리 올지는 모르겠다만 오늘부터는 밥값을 하도록 해.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곡을 내 가기(歌妓)들에게 가르쳐라. 그리고 오늘 안으로 아까 그 곡에 노랫말을 붙이도록. 박쥐, 네 녀석은 오늘 밤에 불침번을 서야 할 게다.”
어떤 경우에든 실속은 챙길 줄 아는 영민한―다른 말로는 교활한―족속답게 위후는 그런 명령을 내리고 휘적휘적 언덕을 내려갔다. 적잖이 실망해서는 풀이 죽은 문복이 졸린 눈을 끔벅거리는 것을 침아가 품에 안고 재웠다.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박쥐지만 언젠가 두어 달 가까이 침아가 안아서 재웠던 이래로 문복은 사람의 아이처럼 웅크리고도 잘 줄 아는 박쥐가 되었다.
오랜 동무와 함께 봄날 들판에서 한가로이 노랫말이나 떠올리고 있자니 무언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엔 이런 한가로운 생활이 당연한 때도 있었건만…….
‘아주 아주 환했던 때. 너무 환해서 정작 당시엔 잘 몰랐지.’
침아는 눈을 떴다가 도로 감았다. 한쪽뿐인 시야에 익숙해졌던 것처럼 이 어둠에도 곧 익숙해지리라.
과연 그는 언제쯤 올까? 아무쪼록 그간 만들어둔 노래가 바닥나기 전에 와줘야 할 텐데. 어쩌면 남은 평생 위후에게 노래나 만들어주며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침아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침아의 걱정은 섣부른 것이었다. 그녀가 위후의 후원에 모인 가기들에게 세 곡째의 노래를 가르쳐주던 날 정오 무렵 한순간 사방이 어두워질 정도로 시커먼 새떼가 몰려와 후원 위 하늘을 가렸다. 그 새들은 무언가를 찾는 듯이 눈을 빛내며 후원 위를 배회하다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저마다 시끄럽게 울어대며 일제히 물러갔다.
“작은도령의 술법인가? 아니면 그 늙은 암컷인가? 제법 싹수가 있군.”
뜰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본 위후가 재미나다는 듯 말했다.
그날 밤, 땅거미가 지고 얼마 안 되어 “이리 오너라!”를 외치는 우송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집 안을 흔들었다.
아직 불을 제대로 밝히지 않아 저택은 어둠에 잠겨 있었는데 우송이 몇 번 더 세차게 이리 오너라 소리를 외쳐대자 곳곳에 불빛이 일어났다. 중앙 마당에 관솔불이 켜지자 타닥타닥 나무가 타오르며 제법 환해졌다. 이윽고 자그마한 몸집의 몸종 둘이 대문을 열었다.
“어디에서 오신 뉘신지요?”
우송의 몸집에 비하면 발목에 미칠 만큼 작은 자들이 우송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송이 떡 벌어진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저기 운몽산에서 오신 주씨 댁 작은도련님이 이 댁 주인을 뵙고자 하신다고 전해라.”
“어느 분이 주씨 댁 작은도련님이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몸종 하나가 목을 길게 늘여 뺐지만 우송의 커다란 몸집이 가로막고 있어 보이는 게 없다. 우송이 옆으로 비켜서자 그제야 잿빛 말에 탄 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아름다움이 실로 귀기(鬼氣)가 도는 자. 몸종이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주인께선 지금 출타 중이신 터라 만나실 수 없사옵니다.”
“출타? 언제 돌아오시는 것이냐?”
“한 번 출타하시면 짧으면 사나흘에서 길게는 보름도 걸리시곤 하옵니다.”
“허엇. 어느 때에 나가셨느냐?”
“동틀 무렵 일찍 길을 잡았습니다. 이 근처엔 묵을 곳도 마땅치 않고 하니 명자를 주고 가시면 주인께 말씀은 올리겠나이다.”
우송이 똥 씹은 얼굴이 되어 료를 쳐다보았다. 료는 말없이 저택의 안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십니까?”
우송이 질문을 하자 료는 표정조차 바꾸지 않으며 말했다.
“그냥은 못 가지. 우송, 문을 열어라.”
“예!”
큰 소리로 대답하고 주인을 위해 대문을 활짝 연 후 그 옆 담을 넘어 성큼 우송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료가 말에 탄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두 몸종이 얼떨떨한 모습이 되어 이들을 응시하다가 그들이 안으로 향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려 쫓아왔다.
“청하지 않은 분들이 이리 무도하게 나오시는 법은 없습니다. 목이 마르시다면 물은 한 잔 내어드릴 수 있사오니 지금이라도 예를 지키십시오!”
“우송, 시끄럽구나.”
“예!”
주인의 중얼거림에 우송이 발치에 달려드는 생쥐 같은 몸종들을 양손에 하나씩 움켜쥐었다. 그들은 대번에 으르렁거리는 승냥이로 화했다. 발톱이며 이빨로 우송의 손을 할퀴고 물었지만 우송은 모기가 무는 것이냐 하는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날카롭게 울어 젖히자 집 안 곳곳에서 붉은 털의 동족들이 달려왔다. 료와 우송을 둥글게 둘러싸며 경계를 좁혀오는 그들이 얼추 세도 열이 넘는 걸 헤아리고 료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고기 장사나 하는 주제에 부리는 자들이 왜 이리 많으냐. 이게 다 식솔이라 하면 어찌 그 하찮은 일로 배를 채우고 사는지. 실로 무슨 장사를 하는 자인지 내 심히 궁금하구나.”
주인은 겁이 없으나 잿빛 말이 겁을 내어 슬슬 뒷걸음질을 하는 통에 료가 말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눈앞에 늘어선 승냥이들을 매섭게 훑어보는데 문득 뒤쪽에서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이 어찌 된 상황인고? 내 어쩐지 서둘러 돌아오고 싶더라니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구나.”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누군가가 당나귀에서 내리다가 굴러 떨어졌다. 승냥이들 몇이 다시 인간의 모습이 되어 달려 나가 넘어진 자를 부축했다. 위후였다. 얼큰히 술에 취해 걷는 모습조차 위태로운 위후가 안으로 들어오다가 우송을 보고선 말했다.
“허, 그놈 크기도 하다. 어디의 뭐가 변하면 이런 놈이 될꼬?”
게슴츠레한 위후의 눈이 이번엔 료에게 향했다.
“오호, 이 분내 나게 생긴 잘생긴 도령은 또 누구신가? 음? 킁킁, 어디서 만난 적이 있으신가? 냄새가 아주 낯설지도 않은데?”
“운몽산에서 온 주씨네 도령이라 하는 작자올습니다.”
우송의 손아귀에 쥐여진 몸종 하나가 냉큼 대답했다. 위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운몽산? 주씨네 도령? 당최 귀에 선 이름이로고.”
료는 잠자코 위후를 쳐다보던 걸 그치고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우송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옆으로 내려놓고 바짝 그의 뒤를 따랐다. 료가 눈짓 한 번만 던져도 냉큼 위후를 어찌할 것 같은 기세등등한 우송의 모습에 위후를 부축하고 있던 두 승냥이가 본색을 드러내어 으르렁거렸다. 료는 태연하게 위후의 바로 앞에 이르러 공수하며 인사를 했다.
“그대가 인간을 사고파는 장사를 하는 위가라고 알고 있소.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이다. 침아를 데리러 왔소. 내어주시오.”
“침아? 침아라…….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흐릿한 눈으로 그르륵 트림을 하면서 위후가 딴청을 피웠다. 료의 입가에 언뜻 미소 비슷한 것이 번졌다.
“이름은 모를 수 있지. 그대가 내 고모할머니 되시는 분에게 팔았던 아이요. 사 년 전에 금 열 냥에 팔았던 인간의 아이. 혈통이 좋다고 그대가 극구 우겼다지.”
“아아, 다 좋은데 왼쪽 얼굴에 마가 낀 그 아이? 좋은 값에 잘 팔았지. 그런데 그 아이를 왜 여기서 찾으시오, 도령? 내 물건은 진즉 넘겨주었소만?”
“그 물건, 그쪽이 다시 주워간 것을 알고 왔소이다. 공연한 힘자랑은 하고 싶지 않소. 선선히 내어주면 이쪽도 그간 보살펴 준 값은 치르고 가리다.”
“글쎄, 힘자랑을 하건 돈자랑을 하건 개의치 않소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실컷 보기나 할 것 아니겠소이까?”
“흐음.”
료가 간격을 좁히며 위후에게 다가섰다. 불콰한 위후의 얼굴이 료의 맑디맑은 눈에 그대로 비쳐졌다. 바짝 좁혀진 거리에서 위후는 료의 숨결이 닿는 걸 느꼈다. 참으로 사늘하다. 이 녀석은 귀기가 돌도록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실로 귀기가 그 몸까지 채우고 있다. 역시나 그 근본이…….
호기심에 잠깐 압도당했던 위후가 정신을 차린 것은 료가 별안간 그의 목을 잡아왔을 때였다. 목에 휘감기는 손가락은 처음엔 몹시도 부드러워 꽃잎 같았다. 차가운 꽃잎. 하지만 퍼뜩 그의 목덜미를 쭈뼛하게 한 것이 있었다. 목을 부여잡은 손이 딱딱한 껍질로 뒤덮여간다. 쓰르륵 무언가가 돋아나는 소리를 위후는 분명히 들었다. 힐끗 내려다보기도 전에 이미 그는 그것의 정체를 알았다. 새까맣고 긴 갈고리 같은 발톱이 그의 목에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어렵지 않게 그의 피부를 꿰뚫으리라. 설령, 진짜 승냥이의 두꺼운 살가죽이라고 해도.
얼마쯤 베이는 것을 감수하면 충분히 벗어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위후는 료에게 목을 아주 약간이나마 긁히는 것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추호도.
바로 옆의 멋모르는 승냥이 두 녀석이 금방이라도 료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손을 들어 만류한 뒤 위후는 해죽이 웃음 지으며 말을 꺼냈다.
“이보시오, 주씨 도령. 보아하니 연치 얼마 안 된 젊은이 같은데 연장자에게 이리 나오는 법은 어디에서 배웠소? 젊을 때 혈기가 뜨거운 거야 나도 이미 겪어 알고 있소만, 이런 식으로 나와서야 적만 늘리고 말 뿐이란 걸 모르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도 이래서야 도로 쑥 들어가고 말겠소이다.”
히죽히죽 얼굴에 걸린 위후의 웃음에 료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나이가 들어 그리 유들유들해지는 거라면 이 몸은 사양이외다. 본디 내 것인 것을 찾아 퍽 멀리나 떠나온 길이오. 차 한 잔 마시고, 모르겠다는 소리나 들으려고 왔겠소? 예 있는 것을 알고 있소. 내어주시오. 처음부터 그 아이만 내어주었다면 고분고분 돌아갔을 터인데.”
“오, 그 소리는 이제는 고분고분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들리오만?”
여전히 히죽거리는 위후를 보며 료도 미소를 지었다.
“무슨 수작으로 숨겨 두었는지도 궁금해지려고 하는 중이외다.”
“수작은 무슨 수작, 이 몸은 애초에 그런 옛날 물건을 다시 거둔 일이…….”
위후가 뻔뻔스레 말을 받아치고 있는데 산통을 깨듯 나직한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주인님?”
계집의 목소리다. 그리고 료가 반응할 만한 계집의 목소리라면 하나뿐이었다. 그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휙 돌아보았더니, 인간으로 보이는 두 여자가 서 있었다. 그중 오른편에 있던 여자가 앞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주인님이시지요? 목소리가 틀림없이…….”
료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어째서 저 아이가 얼굴에 저런 걸 두르고 있지? 그때 위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누워 있으란 의원 말이 저것 귀엔 말로 안 들렸나…….”
의원? 료는 위후를 놓아주고 침아에게 몸을 돌렸다. 걷다가, 이내 달려갔다. 침아의 앞에 이르러 그녀를 부축해 주고 있던 여자에게서 빼앗듯이 자신의 팔 안으로 데려왔다.
“뭐냐, 이것은? 어째서 눈가리개 같은 걸 하고 있는 거야?”
검은 비단을 휙 벗겨내며 물었다. 침아는 오른쪽 눈을 깜박였지만 그를 보면서도 눈이 부신 듯한 표정만 짓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큰 까만 점이 시야에 가득 차서 보이는 거라곤 아주 약간의 귀퉁이뿐……. 의원 말이 아예 잊어버리고 있으라 하기에 그렇게 가리고 있습니다.”
“보이질 않아? 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침아를 흔들면서 다그치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료가 노려보는 시선에 위후가 목을 주무르면서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쪽 도령께서 잘 아셔야 하지 않소?”
“무어라?”
“이쪽이야말로 묻고 싶은 노릇이오. 이 아이가 대체 무슨 잘못을 그리 크게 했기에 그 험한 물속에 던져버리신 것이오? 왜 보이지 않느냐 물으셨소? 머리를 다쳐 그리되었다고 인간의 의원 나부랭이가 말하더이다. 애초에 머리를 때려서 죽은 줄 알고 내던진 것인지, 아니면 물살에 휩쓸려 다니다 바위에 머리를 찧었던지 간에 하여간 내가 건져냈을 때는 그렇더란 말이지. 날 보더니 아이가 실성한 것처럼 웃더구만. 꼼짝없이 미친 줄 알았지 뭐요.”
“머리를……. 어디 보자.”
료가 황급히 침아의 머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문득 뜨거운 물기가 료의 손을 적셨다. 침아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을 꼭 잡으며 침아가 물었다.
“저 말씀이 옳습니까? 침아가 무엇을 잘못했더이까? 그래서 침아를 버리신 것입니까? 그러셨습니까, 주인님?”
료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내저었다. 침아의 양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버렸단 말이냐. 배를 타고 가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은 너였으면서 어째서 내게 너를 버렸다는 소릴 하느냐? 나야말로 묻고 싶은 일이다. 대체 어쩌다 강물에 휩쓸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냐?”
“배를……탔었습니까? 제가요? 언제요?”
“언제라니 야시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잠깐만, 너 설마 야시에 간 일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 네가 화산 할머니께 가자고 조르지 않았더냐? 그래서 월인산에서 있었던 야시에…….”
침아는 잠자코 있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 입술을 들썩였다.
“화산 어르신을 본 것은 기억납니다. 낮잠을 자다가 문득 깨어 보니 화산 어르신이 거기 서 계셨지요. 인사를 드리고서……시중을 들어드린다고 건너갔는데……그 뒤로는……. 그 뒤로는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를 쓰다가 침아는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두통을 참는 듯 끙끙대는 침아의 어깨에 위후가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자. 그리 애쓸 것 없다고 말하지 않았니. 기억이 안 나려면 죽을 때까지 먹통일 것이고 기억나려면 당장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날 거다. 그 의원 놈이 그래도 돌팔이는 아니라고 들었다.”
침아를 살뜰히 다독여주면서 위후가 료를 보았다. 료의 시선이 빠르게 위후의 손과 위후의 얼굴을 훑었다. 위후는 태연자약했다.
“보시다시피, 이것의 눈이 이렇게 되었소만. 이미 팔아버린 물건이고, 이제 와서 환불을 해주는 것도 내 원칙에는 맞지 않는 일이지만 어쩌겠소? 이 지경이 된 걸 내가 구한 걸 보면 아무래도 내 전생에 이 녀석이랑 뭔가로 얽혔지 싶소. 혹 데려가서 천덕꾸러기로 남겨둘 셈이라면 손 털고 가시오. 내가 받았던 금액의 반분, 아니 이왕 쓰는 거 전액 돌려드리리다. 아니면 내 다른 상품을 보시겠소? 그 금액이면 괜찮은 것으로 대여섯쯤 데려가도 좋소. 몇 년 사이에 나도 상품의 질이 꽤 향상이 되었단 말이지.”
료는 노골적으로 싫은 눈빛을 던지며 위후의 손을 밀쳐냈다. 그대로 침아를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감추듯이 하면서 말했다.
“장사꾼치고는 대단한 선심을 쓰는구려. 말만이라도 감사히 들었다 치리다. 허나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소. 염려하시는 천덕꾸러기가 되거나 하는 일, 없을 테니 아무쪼록 안심하시오.”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침아가 고개를 들며 물어왔다.
“절……데려가 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데려가지. 아니면 예까지 무엇 하러 찾아왔겠느냐.”
“제 눈이……이리되어 버렸는데.”
“상관없다. 뭐냐, 갑자기 울보가 되어선.”
뚝뚝 눈물을 흘리는 침아의 모습에 료의 말투가 무뚝뚝해졌다. 침아는 소맷자락을 들어 눈물을 훔치다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알 수가 있어야지요. 정신을 차려보니 얼떨떨한 일들뿐이라 다시는 못 뵈는 건가 보다 하고……. 다시는…….”
흐느끼던 침아가 료의 옷자락을 잡은 채 스르륵 주저앉았다. 붙잡아주려고 료가 몸을 굽혀 보니 침아에게선 색색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눈물은 그쳤으나, 잠이 들어 버렸다는 것을 료는 깨달았다.
“허, 이 녀석…….”
혀를 차는 료에게 위후가 말했다.
“얼마나 안심이 되었으면 그러겠소. 자야 낫는다고 해도 도통 잠을 자야 말이지. 동틀 무렵에나 겨우 눈을 붙이나 싶으면 닭 홰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버리곤 했다오. 묘한 버릇이 들었어.”
료가 잠을 늦게 드니 침아 역시 그런 것이고, 닭 홰치는 소리는 료의 집에선 들을 수 없는 소리라 더욱 그럴 것이다. 침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료는 이윽고 위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괜찮다면 하룻밤만 신세를 졌으면 하오. 하룻밤이라도 푹 재워 길을 떠났으면 좋겠소만.”
위후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우송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신세에 저자도 포함되는 것이오?”
이제껏 조용히 있던 우송이 팡팡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놈은 마구간이라도 좋습니다. 지붕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없는 대로 나무 밑이라도 청해 잘 테니 머릿수로 셈하지 마시오.”
위후는 팔짱을 꼈다. 료를 보는 눈이 그리 곱지 않다. 이내 위후가 주위를 둘러보다 아직 남아 있던 다른 인간 여자를 보았다.
“이것이 지내던 방까지 모셔다 드려라. 그리고 저자는……뭐 마구간이라도 좋다 했으니까.”
쌀쌀맞은 말에 이어 휙 위후가 돌아섰다. 비틀거리며 갈지자로 걷는 그의 뒤를 몇 명의 종이 따라갔다.
혹시 모르니 방 앞을 지키고 있을까요, 하고 묻는 우송을 잠자리나 찾아보라고 보낸 뒤 인간 여자를 따라간 료는 침아가 머물던 방에 들었다. 방은 세간이라곤 별것 없었지만 그럭저럭 깨끗하고 따뜻했다. 침아를 눕혀주면서 보니 펼쳐진 요와 이불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그새 침아의 향기가 배었다. 료는 못마땅한 기색이 되었다. 고개를 돌려 돌아본 곳에 아까 들어서면서 눈에 들어온 비파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손에 쥐었다. 낡았지만 정성스레 간수가 된 비파였다.
“전에 쓰던 것인가.”
오늘 길을 떠나기 전에 화산 노파가 까마귀를 보내어 확인한 광경에서 침아가 비파를 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아마 이 비파였을 것이다. 화산 노파는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이니 안심하란 뜻으로 한 말이었으나 도리어 료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었다.
‘그곳에서 비파나 타면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다니!’
그렇게 성이 나서 약이 바짝 올라 말을 쉴 새 없이 몰아쳐 달려왔던 것도 그는 까마득히 잊었다. 이제는 비파에 이어 침아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불안한 것을 이것으로 달랬겠구나.”
기름이 다해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료가 내버려두니 불은 저 홀로 춤추다 스러졌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 안에 암흑이 찾아왔다. 물론 료는 눈을 한두 번 깜빡거리면서 아주 빠르게 시력을 회복했다.
비파를 도로 밀어놓고 침아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을 쓸어 보고 여간해선 보여주려 하지 않는 화상 흉터도 만져보았다. 한없이 그러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을 텐데 얼마쯤 지났을까, 불현듯 누군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료는 문 있는 쪽을 보았다. 연거푸 들으란 듯이 헛기침하는 소리에 료가 마지못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바깥에 위후가 서 있다.
“할 말이 남으셨소?”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 사이 세수라도 했는지 불콰했던 얼굴이 제법 맑아졌다. 위후는 말투부터 사근사근하게 공대하여 나왔다.
“지내기에 방이 누추하지 않으신지? 다른 방을 준비하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괜찮소. 이 방으로 충분하오.”
“그러시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제 아랫것들이 몰라서 무례를 범한 것이 있다면 아무쪼록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이쪽도 과히 자랑할 것이 없었소이다. 나 역시 불찰을 사과하오.”
꾸벅 머리를 숙이는 료에게 위후가 양 손을 저으며 그럴 것 없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더니 혹시 시장하시진 않느냐, 방이 춥진 않느냐 물어오는 것을 료가 다 괜찮다고 물리쳤다. 다만 우송은 그냥 두면 말구유 속 내용물을 탐낼지 몰라 참을 좀 챙겨주라고 부탁했다. 사례는 하겠다고 말하는 료에게 위후는 자신은 주막 주인이 아니라면서 손님에게 무슨 그런 값을 받겠느냐 야단이다. 아무리 술이 깼다고는 하나 장사치가 공짜 선심을 퍼붓는 것은 아무래도 의심이 든다. 게다가 료는 이자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계를 풀지 않고 료가 물었다.
“뭔가 따로 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는 것 아니시오?”
“그것이…….”
아니나 다를까, 위후가 말끝을 흐렸다.
“술김에 다소 성마르게 굴었을지는 몰라도 과히 거짓부렁을 한 것은 없습니다. 저 아이의 일은, 두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받았던 값은 고스란히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이다. 결국 이자는 자신에게 침아를 그냥 두고 가란 소리를 하려고 온 것이다. 료는 입 안이 마르는 듯한 느낌 속에서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대가 그리 말하는 그 뜻이 내겐 심히 의심스럽소. 눈까지 저리된 아이를 두고 가라 끈질기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비틀린 기벽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까지 하게 되오만.”
“아이고, 그런 오해는 마십시오. 다만…….”
“그리 머뭇대는 꼴을 오래 볼 생각이 없소. 하고픈 말이 있으면 차라리 한잠 자고 아침에 제대로 말하시오.”
그리고 돌아서려는 료의 뒤에서 위후가 붙잡듯이 말했다.
“저 아이의 모친 되는 이와 얼마간의 인연이 있습니다.”
그제야 위후를 보는 료의 눈빛에 살짝 호기심이 돌았다. 위후는 사뭇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거창하게 말할 것은 아니고, 그저 끼니 한 끼의 은혜라 할 것이나 생전에 갚지 못한 것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제가 거두기는 뭣하였으나 되도록 고생 않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높은 값을 불러 거두어줄 주인을 골랐습지요. 요행히 귀한 분께서 거두어 가셨으나 이제 저런 꼴을 하고 다시 만나게 되니 예서 데리고 있을 것을, 하고 후회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삼 생각해 보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격이 아닐지…….”
아주 이해 못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료는 얼마쯤 의문이 풀려 기분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
“정말로 우연히 저 아이를 구해낸 것이란 말인가?”
“꼭 우연이라 할 것은 아니지만…….”
“우연이 아니면 뭐, 미리 알기라도 했었다고?”
“실은 이 몸의 식솔 중에 점복(占卜)에 재주가 있는 자가 하나 있지요. 덕분에 하루를 시작할 즈음엔 꼭 그자의 점을 듣는 고질병이 생겼습니다.”
“흠.”
도무지 미더운 느낌이 없었으나 그만하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아니면 믿는 척하거나. 료는 지그시 위후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표정을 풀며 빙긋 웃었다.
“그 점 덕에 침아가 무사히 살아 있는 셈이니, 다행한 일이로군. 그자에게도 사례를 잊지 않겠소.”
“꼭 데려가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데려갈 것이오. 설사 시신으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도 데려갔을 것이오. 저 아인 이미 죽으나 사나 내 것이니까.”
이번엔 위후가 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뜻대로 하시지요. 하오나, 혹여 언젠가 귀찮고 보기 싫다 싶어지시면 연통 한 번만 해주십시오. 얼마가 걸리든 간에 데리러 누군가를 보내겠습니다.”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군. 그 정성을 기억하고 있겠소.”
섬돌에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서던 료가 돌아보며 말했다.
“저 아일 구해 주어서 고맙소.”
방에 들어와 위후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료는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료가 마음을 놓고 침아를 보았다. 그 사이 벽 쪽으로 가까이 간 침아는 벽에 맨 팔과 다리를 대고 있었다. 더웠던 모양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겉옷을 벗어두고 료는 이부자리에 들었다. 베개를 베고 침아를 당겨와 끌어안았다. 잠결에 시원한 곳을 찾아 침아가 몸을 돌려 품에 파고들었다. 료는 그런 침아를 내려다보며 미소했다. 그녀의 눈매를 어루만지는 동안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이제 내 너를 찾았으니……더는 울 일이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