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선풍(旋風)
월인산과 그 옆 성인산 줄기가 이어지는 야트막한 곳에서 용출되는 물이 모여 이루어진 못은 그 옛날 못의 주인이던 이무기가 검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과 함께 흑룡소라고 불리고 있다. 그 어떤 심한 가뭄이 와도 흑룡소의 중앙은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이 푸르다 못해 꺼멓다.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과연 용이 될 이무기가 살 만한 곳이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만하다.
그 전설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 바로 그 흑룡소를 발원지로 하는 세 강줄기 중에서 남쪽으로 뻗은 은호강이 지금 이들을 혜양까지 실어가 줄 것이었다.
때는 음력 2월 열엿새의 새벽. 봄의 초입이라, 높은 계곡에 얼었던 물들이 녹아 흐르는 도화수의 기세도 만만치 않아 강줄기는 도도하기 짝이 없다. 또한 순풍을 받은 배는 돛에 팽팽히 바람을 받아 물살을 가로질러 갔다.
은호강을 모조리 빌린 듯 너른 강에 띄워진 단 한 척의 큰 배가 보름달 아래 유유히 흘러가는 풍경은 어느 화원의 그림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 근처의 강변에 실제로 화원이라 할 만한 자가 있었다고 해도, 이런 모습을 눈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혹여 볼 수 있다고 치면, 그자는 드물게 인간 세상에 나타나곤 하는 ‘보는 자’일 것이다.
인간의 것이 아닌 별세계(別世界)의 어떤 길. 몇몇 귀하신 분이 택한 그림자길(影道)의 하나이다. 달빛이 워낙 환해 이따금 다른 자들과 길이 겹쳐지며 주변이 소란해질 경우도 있었지만 자주는 아니었고, 뱃길은 전반적으로 고요하게 흘러갔다.
밤이 깊어지면서 화산 노파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을 청하러 선실로 들어갔다. 배를 타본 것이 처음이라는 우송은 배에 탄 지 얼마 안 되어 뱃멀미를 시작한 통에 진작 아래로 내려 보냈다. 반반의 핏줄이 모두 철저히 육지 쪽에 익숙한 터이니 그러려니 했다.
다만 의외인 것은 침아의 경우였다. 배에 타고서 노래지다 못해 얼굴이 해쓱해지는 우송을 보면서 알고 보니 몸이 약하다면서 놀려댈 정도로 그녀는 멀쩡하기만 했다. 야행성인 료 때문에 평소 오경(五更 : 새벽 3시~5시)이나 되어야 자는 버릇하던 침아는 갑판에 서서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다.
하늘의 달, 달빛을 함빡 받아 지상에 또 하나의 밤하늘을 그려내는 은빛 강, 그리고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배. 침아에게는 퍽 오랜만의 신선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전부 눈에 담겠다는 듯이 맑은 눈에는 졸린 기색이 전혀 없다.
새삼 배를 돌아보면서 침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절로 가는 것처럼 조용한 배지만 실제로는 열 명 남짓한 뱃사람이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모두 차분한 먹빛의 옷을 입은 온순한 인상의 조용하기 짝이 없는 사내들이다. 그들이 아주 가끔 무언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지만 알아들을 만한 언어가 아니었다. 말이 아니라 휘파람에 가까운 소리들.
수레를 실어놓은 배의 고물 쪽에서 어떤 이가 높고 짧게 휘파람을 불자 이물에 가까운 우현에 서 있던 작달막한 이가 휙 몸을 돌리고 종종종 뛰어갔다. 침아가 고개를 빼고 그 선원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것을 보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료가 한마디 했다.
“황새 처음 보느냐?”
그 말에 홱 고개를 돌린 침아의 머리채가 료의 안면을 강타했다.
“으아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시죠, 주인님?”
“괜찮은지 네가 한 번 맞아볼 테냐?”
“애걔, 겨우 머리채에 좀 맞았기로서니 그게 얼마나 아프다고……는 농입니다. 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란 것은 아시죠? 자, 우리 주인님, 아프지 마세요. 침아가 호 해드릴 게요.”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있다더니 침아가 딱 그랬다. 작은 병을 주고, 제법 단 약을 준다고 해야 하나. 뚱한 얼굴을 하고 못마땅한 기색을 짓고 있는 료의 얼굴을 침아가 슥슥 어루만져주면서 호, 호, 불어주었다. 싫진 않았으나 좋은 척하는 것도 마땅치 않아 료는 한층 뚱한 표정으로 공연히 고개를 돌리며 애꿎은 강바람을 탓했다.
“바람이 차서 못 쓰겠다. 그만 들어가야겠어.”
“벌써요. 달이 저리도 좋은데.”
“물리도록 본 달 뭐가 좋다고.”
“강 위에서 보는 달은 또 다르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운치가 없으신지요. 이래서 사내는 나이가 들면…….”
“무어라?”
“왜요,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인데. 하긴 본디 주인님의 성정이 강파른 편이긴 합니다만.”
“네가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말이 없구나.”
“입이 뚫렸으니 말을 하지요. 듣기 싫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언제든 다물어 드린다니까요.”
“허! 이것이 아주 몹쓸 버릇이 들어서는…….”
료의 노기가 차츰 쌓여 안 되겠다 싶었는지 침아가 살살 웃으며 주인을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고, 주인님, 한 번만 봐주십시오. 모처럼의 나들이에, 이리 좋은 구경까지 하는 판이라 제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나 봅니다. 바람이 차다 하셨지요? 춥지 않게 이 침아가 뭐라도 해드리겠습니다. 자, 마고자가 낫겠습니까, 뜨신 물주머니가 낫겠습니까?”
“네 주제에 무슨 변신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비웃는 료의 말에 침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곤조곤 말하면서 료의 등 뒤로 돌았다.
“변신은 못하지만 이 머리는 쓸 수 있지 말입니다. 자, 이렇게 돌아가서 탁하니 등에 걸치면 마고자 내지는 털 없는 갖옷이요…….”
침아가 냅다 료의 등을 끌어안아오자 료가 움찔하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침아는 재빨리 몸을 떼더니 료의 앞으로 돌아오면서 종알거렸다.
“또 이렇게 돌아와서 대롱하고 매달리면 이게 바로 뜨신 물주머니 대용 아닙니까? 아, 불편하십니까? 그럼 제가 돌지요.”
료의 정면에 온 침아가 그의 허리를 담뿍 안으며 상체를 겹쳤다가 료가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에게 등을 보이게 몸을 돌렸다. 료가 아무 반응도 없이 서 있자 침아는 고개를 돌리면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뭣 하십니까? 자요, 물주머니로 쓰시라니까요.”
한마디로 등 뒤에서 침아를 부둥켜안으란 뜻이다. 료는 헛기침만 하면서 오히려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침아는 자못 이상하다는 듯이 료의 손을 잡았다. 늘 그랬듯이 사내 쪽은 희한하도록 차고 계집 쪽은 살이 벌겋지 않은 게 이상하리만큼 따끈따끈하다. 사내의 손을 두 손으로 토닥토닥 녹여주면서 침아가 물었다.
“왜 제가 솔선해서 하라니까 또 빼십니까? 추우신 거 아니었습니까?”
“누가 춥댔느냐. 바람이 차다고 했지.”
“그러니까요. 괜히 몇 날 며칠 몸져누워서 저까지 묶어 놓으실 거 아니면 어서 둘 중의 하나를 취하십시오. ……으이구, 참말로 말도 안 들으신다.”
기다려도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그가 답답하다는 듯이 침아가 혀를 차더니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잠시 후 침아는 뱃전에 서서 풍경을 구경하는 자세로 돌아갔고 료는 선 채로 침아에게 업혀 있는 듯한 묘한 자세가 되었다.
“따뜻하시지요?”
“불편하다만.”
“그건 알아서 어찌 해보시고요. 제가 주인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어찌해야 불편한지 편한지까지 챙기란 말입니까?”
그 말이 맞는 말인데도 괜히 료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구시렁거리며 툴툴댔다. 그러면서 두 팔을 움직여 침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의 배 위에서 두 손이 교차하게끔 했다. 그런 그의 손등을 침아가 손으로 덮었다. 도포 위이긴 했지만 그녀의 손의 온기는 확실히 그의 손에 닿았다.
슬쩍 침아를 내려다보면서 료는 문득 뿌듯해졌다. 자신이 확실히 전보다 자랐지 싶어서 말이다. 처음 보았을 때 이 삐쩍 마른 사람의 아이에게 키로 밀려 적잖이 기분이 잡쳤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 료가 침아보다 커진 것에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전의 주인을 못 만나서 서운해서 어쩌느냐?”
“아, 그랬지요.”
내심 침아가 전 주인 이야기를 했던 것을 고깝게 기억하고 있던 료가 그렇게 떠보자 침아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린다 싶더니 부스럭거리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덕택에 나름 잘 살고 있으니 뭐라도 맛난 것을 대접해 드릴까 했더니만. 아재가 그럴 복이 없나 봅니다.”
“뭐냐, 그것은?”
“뭐긴요, 금입니다.”
료의 눈에 잘 보이라고 침아가 드밀어 주는 것은 가칠가칠한 삼실에 꿰인 주머니 속 작은 금 조각이다. 료는 미간을 찡그렸다.
“웬 거냐고 묻는 거다.”
“아, 말씀드린 적이 없었나요? 그럴 짬이 없었나? 전에 아재가 준 겁니다.”
“그런 걸 왜 널 주느냐?”
“화산 할머님께서 절 사가실 적에 잘 살라고 하면서 주었지요.”
“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걸 왜 주느냔 말이다.”
“왜긴요, 말씀드렸잖아요. 잘 살라고 그랬다니까요.”
“그러니까 왜…….”
같은 말이 몇 번이고 반복되고 있다. 료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 승냥이 녀석이 무슨 마음을 먹고, 돈 주고 팔아치운 네게 그런 것을 줬는지 말해 보란 말이다.”
“글쎄요. 그거야 준 아재 마음이지 제가 또 그 속을 어찌 압니까? 가만 보면 주인님은 참 제게 많은 것을 바라십니다.”
똑바로 쳐다보며 혀를 차는 침아의 말에 료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어쩌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되바라지게 되었나 생각해 보니, 처음 집에 들어올 당시부터 이랬지 싶다. 일 년 정도는 바짝 무섭게 대했어야 하는 것을, 워낙 약해서 쉬 죽어버릴까 저어하여 그만 적당히 내버려둔―더 나아가 오냐오냐해 준―것이 불찰이었다.
“주인에게 말하는 품새가 이따위라니. 고약한 녀석 같으니.”
대놓고 면박을 주는데도 침아는 눈도 깜빡 안 하면서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는 듯이 그에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인님. 황새라는 것은 보통 하얗고 참 예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음? 하얗긴 하지. 그게 왜?”
료는 대번에 부루퉁한 것도 잊고 침아의 질문에 호기심을 보였다.
“여기 선원들은 황새치고는 우중충하지 않습니까?”
“뭐 황새라 하여도 천차만별 아니냐. 여기는 보아하니……먹황새들 판이고.”
그 말에 침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힐끔거리며 선원들을 쳐다본 침아가 다시 료에게 소곤거렸다.
“그게 딱 보면 보이십니까?”
“그 정도야 보려고 들면 보인다. 뭐 그리 대단한 영물이라고 정체조차 파악 못하겠느냐.”
“아아. 그러면 주인님께도 보이는 게 있고 안 보이는 게 있습니까?”
“있지. 아직은 안 보이는 게 훨씬 많다. 인간들 속담대로 하자면 하룻강아지에 불과한 신세라.”
“주인님이 하룻강아지면 저는……하룻강아지 발등에 사는 벼룩쯤 됩니까?”
침아의 황당한 말에 료는 피식 웃으며 슬그머니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따스한 몸이 그의 품에 더 소곳하게 들어오며 목덜미에 기분 좋은 향이 일었다.
“주제 파악 한 번 잘하고 있구나. 알면 알아서 조심해라. 진짜 벼룩이라도 된 양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횡액을 당할 생각이 아니면 이 몸 곁에 찰싹 붙어 있으란 소리다. 알겠느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나 싶던 침아가 힐끗 돌아보며 한마디 모난 소리를 했다.
“주인님이야말로 범 따위한테 덤비시면 큰일 납니다. 기왕이면 이 침아가 천수를 누릴 때까지는 참아주세요.”
“네 녀석이 천수를 누린 뒤엔 내가 어찌 되어도 좋다는 뜻이냐?”
“어쩌겠습니까. 죽은 뒤에 제가 무슨 힘이 있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며 주인님이 어찌 사시는지는 또 무슨 수로 보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긴 합니다만, 어쨌든 오래 사는 건 주인님이지 제가 아니니 알아서 하셔야지요.”
천연덕스럽게 훌쩍거리는 시늉을 하더니 씩 웃으며 다짐을 했다.
“같이 사는 동안엔 위험한 일 없이 잘 살자고요, 주인님. 앞으로도 말 잘 들으면서 성심을 다해 모실 테니까, 기왕이면 가끔 이렇게 놀러도 데리고 나와 주시고요.”
생글거리며 웃는 침아의 눈에 애교가 자르르 흐른다. 두 번만 말을 잘 들었다가는 료를 찜 쪄 먹고도 남겠다. 한 소리 해주고 싶었지만, 다소라도 오래 산 료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하는 걸 봐서 십 년에 한 번쯤으로 생각해 보마.”
“십 년에 한 번이요?”
“왜? 너무 자주라 번거로울 것 같으냐?”
“됐습니다, 됐어요. 쳇, 아까 그 전갈을 몰래 사서 밤에 방에다 풀어놓는 건데.”
“오호라. 주인을 모살하겠다 이거구나. 용감한지고.”
“해보는 소린 줄 아십니까? 흥. 제 숨겨진 악독함을 보시는 날엔 깜짝 놀라실 걸요.”
“그래, 그 악독함을 발휘하여 내가 잘못되는 날에는……내 기꺼이 너를 저승 가는 길동무로 삼아줄 테니까.”
“순장이라니! 요새는 인간 세상에서도 그런 허튼짓은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 같은 존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후손은커녕 반려조차 없이 죽을 신세라면 저승길 시중을 들 너 하나 데려가는 것을 그 누가 뭐라 하겠느냐?”
나긋나긋하기만 한 료의 말에 침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얼마 후 졌다는 듯이 풀 죽은 목소리로 침아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모살 계획은 취소니까 마음 푹 놓고 사십시오. 그런데 참 지독도 하십니다. 암만 부리는 하인이라 해도 그렇지 어찌 죽을 때 데려간다는 소리를 그리 당당하게 하십니까?”
살짝 옆으로 흘겨보면서 침아가 투덜거렸다.
“반대의 경우였다고 하면, 기겁을 하셨을 거면서.”
그 말에 료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너 죽을 때 날 데려가겠다는 소리냐? 꿈도 크구나.”
“말로 해보는 거라면 지금 당장 옥황상제님인들 못 되겠습니까? 안 데려갈 테니 그런 얼굴 마세요. 침아는 태어날 때 홀로였듯이 갈 때도 홀로 갈 것입니다. 이 배처럼 유유하게.”
그러면서 뱃전에 부딪치는 물살이 일으키는 가벼운 포말을 쳐다보던 침아가 고개를 들어 이울어가는 만월을 응시했다. “그새 달빛이 흐려졌네. 저거 달무리인가?” 하고 중얼거리는 침아의 말에 함께 달을 보던 료가 언뜻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만히 내뱉었다.
“기왕이면 갈 때는 둘인 편이 좋겠지. 먼 길이든, 짧은 길이든. 험한 길이든, 쉬운 길이든.”
침아가 그를 올려다보는 기척에 료가 슥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내 함께 가주랴?”
침아는 물끄러미 료를 쳐다보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저승에 가서도 주인님을 모시라는 거 아닙니까.”
“모르지, 거기는 이승과 반대라 내가 널 모시게 될지도.”
“어머, 그거 재미있겠다. 그래도 싫습니다. 살아서 지긋지긋하게 본 얼굴 죽어서도 보라니요.”
“고작 몇 십 년 살 것에 불과한 인간 주제에 지긋지긋하다는 소리를 하다니.”
“그래서 인간인 거지요. 변덕이 죽 끓듯 하니 몇 십 년도 길다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모습은 어쩌면 패기에 차 있다고도 표현할 만했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일까.
“그런 소릴 하는 것도 지금 네가 죽음에서 한참 먼 곳에 있다고 믿기 때문일 거다. 당장 네가 마흔, 아니 서른 중반만 되어도 인간의 삶이 너무 짧다고 매일같이 눈물을 쏟을지도 몰라.”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만.”
“가보지 않고서 그런 장담은 마라. 내 예전에 한창 꽃 같았던 인간의 여자가 불과 일 년도 못 되어 두려움으로 말라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침아는 조금은 굳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시는 분이었는데요?”
“내가 알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휘의 후원에 핀 꽃 중 하나였다.”
침아는 자못 신기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분의 후원에 인간의 여자도 머물렀었단 말입니까?”
“그는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것을 그냥은 지나치지 못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이거다 싶으면 데려다 놓았다가 또 싫증나면 훌쩍 버리고 오기도 하지.”
그렇게 말하며 료가 침아의 왼쪽 머리카락을 살며시 걷었다.
“그자가 어느 날 문득 네게 달게 느껴지는 과자를 내밀지도 모른다. 혹 내가 네 곁에 없다고 해도 그 과자를 덥석 받는 바보짓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 뜻이 헤아려지는 경고에 침아가 빙긋이 웃었다. 장밋빛 흉터 자국을 만지면서 그녀는 말했다.
“저는 아름답지 않은 걸요. 괜한 걱정을 다 하십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흉터를 가린 침아의 오른쪽 얼굴은 달빛 아래에서 유난히도 단정해 보였다. 오래전 후원에 머물다 간 적 있는 인간 여자는 어떠했더라. 료는 기억을 되살려 보려 애썼지만 보람 없는 노력이었다. 이미 잊어버렸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곧잘 노래를 즐겨했다는 것, 또 나뭇잎으로 피리 불기를 좋아했다는 정도.
문득 료는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냥을 나갔다 돌아올 때 간혹 나뭇잎을 뜯어 피리를 부는 그의 버릇의 시원(始原)은 그 인간의 여자로부터였지 싶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호두나무 아래에 앉아 그는 나뭇잎으로 서툴게 피리를 불고 인간의 여자는 공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고 보니 그 공을 여자가 료에게 주었는데. 겉을 새파란 비단으로 감싼 금빛 술이 달려 있던 그 공을 내가 어쨌더라?
“……기억이 안 나.”
“예? 뭐가요?”
침아의 묻는 소리에 료는 자신이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별것 아니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찌했나 싶어서.”
“장난감? 어떤 건데요?”
“음, 그냥…….”
설명해 주려고 하는 료의 등 뒤에서 자락자락 옷 스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들 재미나게 하시는지요?”
목소리를 듣고 짐작했던 대로 돌아보니 가선 낭자가 시종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야시에서 본 것과 복장이 달라졌다. 아름다운 꽃과 나비 무늬를 짜 넣은, 소매가 넓은 진홍색 장포에, 수를 넣은 은실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반짝거리는 복숭아색의 치마, 허리에 두른 띠에는 정교한 나비매듭을 지은 두 개의 술 사이로 새하얀 옥패가 매달려 있다. 앙증맞도록 귀여우면서도, 풍성하고 윤기 나는 머리채를 뽐내는 듯 정교한 쌍환계는 흔히 보기 어려운 머리라 침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선과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침아는 문득 쑥스러운 기색으로 료의 품에서 떨어지려고 슬쩍 몸을 힘주어 당겼다. 하지만 조심스러워하는 침아와 달리 료는 태연자약하게 침아를 품에 둔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침아가 벗어나려 하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가 모르는 척 손에 힘을 주어 꾹 끌어안는 바람에 가선이 오기 전보다 더 꽉 안긴 모습이 되었다.
“사이가 돈독한 주종 간이시네요.”
가선이 넓은 소맷자락을 들어 웃음을 가릴 때 비단 스치는 소리가 음악처럼 일었다. 그 고운 행동거지를 넋 놓은 듯 바라보던 침아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면서 대꾸했다.
“특별히 돈독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주인님의 물주머니 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오해 마십시오, 아씨.”
“물주머니?”
“왜 날이 잔뜩 추운 날에 이부자리에 튼튼한 가죽부대에 뜨거운 물을 담아서 넣으면……아, 모르시려나.”
설명이 미진하다 싶어 침아가 불쑥 가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번 잡아 보세요.”
가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손짓이 워낙 느려 침아가 기다리다 못해 덥석 가선의 손을 움켜쥐었다. 침아의 손에 잡힌 가느다란 가선의 손은 료만큼 차갑지는 않으나 침아처럼 뜨거운 경우도 아니었다.
“과연. 뜨겁구나.”
가선의 중얼거림에 침아가 그렇다는 듯 방긋 웃고는 손을 거두었다.
“제가 체열이 좀 높습니다. 그런 이유도 주인님을 모시게 된데 한몫했습니다. 아, 저희 주인님이 정말로 몸이 차서요. 그냥 찬 정도가 아니라 아주아주. 자요, 저희 주인님 손도 한 번…….”
제 손에 이어 료의 손도 가선에게 내밀어주려 한 침아의 뜻을 료가 단칼에 잘라버렸다.
“됐다.”
“왜요, 얼마나 차가운지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잡아보는 편이 훨씬 빠른데.”
“왜 굳이 그런 걸 낭자에게 알려주지 못해서 기를 쓰는 거냐?”
“어, 기를 쓴다기보다는……. 그렇군요, 궁금해 하시는지 묻는 게 먼저였네요. 궁금하십니까, 아씨?”
료의 말을 교묘하게 딴 뜻으로 받아들인 침아 때문에 료가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가선은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궁금하긴 하나 그렇다고 공자님의 손을 잡는 것은 외람된 일 같구나.”
그제야 침아가 아차하며 손을 마주쳤다.
“아, 그렇지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마터면 두 분 다 난처하게 만들 뻔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생각을 하면 그 외의 일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요. 전에는 안 이랬는데…….”
“전에는 안 그러긴. 처음부터 줄곧 그래 왔으면서. 초지일관이란 말을 배운 기억은 나느냐?”
“아니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로 생사람을 잡으십니까?”
침아의 자기변명을 단번에 부정하는 료의 말에 침아는 가자미눈을 하면서 료를 쏘아보았다.
“아아, 그러고 보니 내 오늘 야시에 들르면 꼭 사고자 한 것이 있는데 까맣게 잊었구나. 내 언제부터 네게 면경을 사주려고 벼르고 있었건만. 원숭이처럼 까불 줄이나 알지 도통 자신을 들여다볼 줄을 모르니.”
“글쎄, 그런 이야길 꼭 지금 이 자리에서 하시는 심보는 또 뭡니까, 주인님?”
이를 앙다물고 눈을 흘기는 서슬에도 료는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었다. 딴청을 피우듯이 서쪽 하늘을 올려다본 그가 중얼거렸다.
“달무리가 진해지는구나. 흠……저 앞쪽에 안개가 깔리기 시작한 모양이야.”
그의 말에 일동의 눈이 모두 뱃머리 앞으로 향했다. 침아는 눈을 비비면서 힘주어 봤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만 갸웃갸웃했다.
“그렇군요. 안개가 자욱하게 몰려오나 봅니다.”
가선이 동의하더니 슥, 소매를 펴면서 손을 바닥이 위로 오게 하여 펼쳤다.
“아무래도 머잖아 비가 올 듯하지요.”
그 말에 료가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만 들어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숨 자면서 비를 긋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리 서두르실 것까지야…….”
“슬슬 졸린다 싶던 차입니다. 덕분에 짧은 여행길이나마 단잠을 자겠습니다. 그럼.”
만류하는 기색이 엿보이는 가선의 말을 못 알아들은 듯 료는 정중히 목례를 해보였다. 가선은 더는 붙잡지 않고 옆에 있던 시종에게 말했다.
“머무르실 곳을 살펴드리고 오너라.”
하얀 비단옷을 입은 기름한 얼굴의 시종이 잠자코 가선의 명에 따라 둘을 안내했다. 침아는 얌전히 료의 뒤에서 따라가다가 선실로 들어서면서 쿡 료의 옆구리를 찔렀다.
“얼마쯤 이야기하는 시늉이라도 해주실 것이지.”
“내 졸린다고 했잖으냐.”
“퍽이나 졸리시겠습니다. 그렇게 모르쇠로 나오실 게 아니라 날씨 이야기라도 더 하셨으면 됐을 텐데.”
“도통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저 아씨 덕분에 이런 배로 편히 돌아가지 않습니까.”
“목적지가 같았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고맙지 않다는 뜻입니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 걸 좀 말로 해보심이 어떠십니까?”
“알았다, 알았어. 원 그 녀석 일일이 잔소리하고는.”
“귀찮으시면 말씀하시라니까요. 언제든 입을 봉해 버리겠습니다.”
“너는 어찌 그리 중도가 없느냐?”
둘의 소곤거림은 안내받은 선실에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침상의 넓이가 침아가 베개 노릇을 하기가 여의치 않아 료가 침상에 눕고 침상 아래에 자리를 펴서 침아가 잠을 청했다. 배에서 자는 것은 색다르다며 종알거리던 침아는 얼마 안 가 잠이 들어버린 반면에 료는 뒤척이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결국 벌떡 일어나 앉아 달게 잠든 침아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료가 잠이 깊이 들었을 즈음에 이번엔 침아가 눈을 떴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려던 시도는 여러 방해로 실패했다. 턱 밑까지 끌어올려진 이불을 비롯해 왼편엔 단단한 선실 벽이요, 오른편엔 차가운 료라는 벽이 있었다. 어느 틈에 침상 위로 데리고 올라온 건지.
“하루도 사람이 편하게 자는 꼴을 못 보지…….”
잠기운 그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침아가 료를 옆으로 밀어냈다.
“왜, 자다 말고 어딜 가려고…….”
잠결에 료가 물어오자 침아가 대꾸했다.
“물 좀 마시러 다녀오겠습니다.”
“그놈의 오징어인가 뭔가를 게걸스럽게 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료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잠겨들었다. 그래도 어서 다녀오란 듯이 손을 까딱거리긴 했다. 벌써부터 침아가 없어 추운 듯 몸을 웅크리는 료를 잠깐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침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을 마시는 것 말고도 소피를 볼일이 급했다. 본디 잘 때 옷을 얇게 입어 버릇했는데 나오면서 걸칠 옷을 가지고 오지 않아 홑옷 차림으로 동동거리며 침아는 선실을 오락가락했다. 갈증도 해결하고 볼일도 보고 느긋한 기분이 되자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유난히 빗소리가 크게 들리는데다, 잠들기 전에 비해 선체의 요동도 적잖이 있지 않나 싶었다.
그냥 돌아서서 자러 가도 되는데 발이 반대로 향했다. 계단에 올라 갑판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자 싸늘한 빗발이 침아의 얼굴을 때렸다.
“화조의 밤에 비라. 꽃을 키우는 비로군.”
입 안에서 가만히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적시는 비의 느낌을 얼마쯤 만끽했다. 손으로 빗물을 훑어내고 이제 돌아갈까 하는 찰나에 새하얀 무언가가 침아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까 료와 침아를 선실로 안내한 남자 시종이 여전히 뱃전에 서 있었다. 펼쳐든 우산은 하나인데, 시종이 비를 긋는 용도가 아니었다. 시종은 옆에 선 여주인을 비로부터 가려주고 있었다.
우산은 제법 큼지막하나, 바람이 꽤 불고 있다. 변덕스레 춤추는 빗발에 가선의 고운 비단옷이 젖어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 고운 옷을 적셔가면서 볼 만한 것은 없는데, 하며 침아는 멀리 시선을 던졌다. 달은 구름에 가려졌다. 시간상 이미 졌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출렁이는 강물을 보는 것엔 무리가 없었다. 별달리 큰 비도 아닌데, 바람이 생각보다 센가 하면서 시선을 돌리던 침아는 저편에서 시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잠이 오지 않으시는 거라면 함께 이야기라도 함이 어떠냐고, 아씨께서 물으십니다.”
공손한 초대. 게다가 주인은 빗속에서 홀로 서 있다. 하나 있는 우산을 시종에게 들려 보낸 채로. 그냥 자러 가려던 참이라는 말이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으나 아까 료의 무성의한 태도를 기억한 침아는 하물며 종복인 주제에 나까지 그리 심드렁할 일은 아니지, 하면서 시종을 따라 나갔다. 금세 비가 몸에 스민다. 과연 바람이 부는 것 이상으로 쌀쌀하다 싶어 침아는 저고리 앞섶을 단단히 여몄다.
“시각이 퍽 늦었을 텐데 아직 여기에 계셨습니까?”
침아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묻자 가선이 어여쁜 눈매를 가늘게 좁히면서 말했다.
“만월인데다 비까지 오니 쉬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시종의 우산이 둘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멈추어 있다. 한 우산을 같이 쓰기엔 침아와 가선의 거리가 그리 가깝지 않다. 가선이 손끝으로 침아에게 좀 더 다가오라 손짓하자 침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아, 우산을 하나 더 가져오도록 해.”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럼…….”
“이건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정이라 불린 시종에게서 침아가 우산 손잡이를 건네받았다. 시종은 상긋이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이곤 우산을 가지러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사내치고는 태가 좋은 이구나 하면서 침아의 시선이 시종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뭔가 궁금한 게 있는 눈빛이네.”
“아……. 주인님께서 여기 선원들은 먹황새라고 하시던데 저분도 그런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황새라 하면 화를 낼 걸. 저 아인 두루미지.”
“어쩐지 참 걷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저기 제가 잘 생각이 안 나서 그러는데 황새보다 두루미가 더 큰 거 맞지요? 다 자라면요.”
가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뱃전으로 다가가는 가선의 걸음에 침아가 급히 우산과 함께 따라갔다. 빗발이 눈으로 보던 것보다 더 센 것은 확연했다. 바람 역시 수월찮게 불고 있다. 갑판을 야무지게 디디고 섰지만 밑바닥이 요동치는 감각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비가 이리 올 줄 알았다면 뭍길로 가자고 하는 건데요.”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침아가 생각 끝에 무난한 화제지 싶어 꺼낸 말이었는데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귀한 아씨가 젖지 않게 우산을 씌워드리려다 정작 침아의 왼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한밤에 세우지에서 멱도 감던 강심장이지만 비에 젖어 피부가 쌀쌀해지는 것은 그와는 또 달랐다.
“그러고 보면 굳이 뭍길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도로 가실 수 있는 분들이신데, 그만 눈치 없이 발목 잡는 짐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윽 돌아보는 가선의 눈길이 느껴졌다. 상냥한 미소에 이어 그녀가 물어왔다.
“네 무슨 경로로 공자님을 모시게 된 것이냐?”
“오늘 보신 화산 어르신께서 주인님께 보내셨습니다.”
“공자님을 모시는 이가 몇이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얼마나 되는지 수를 헤아리는 것이 힘든 것이냐?”
“그런 뜻은 아니옵고……. 실은 이미 다 보셨습니다. 뱃멀미 때문에 일찍 들어가서 자고 있는 우송 아저씨와 저, 이렇게 둘입니다.”
“단둘? 그렇게나 적어?”
“일단 집안의 하인 중에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측근만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측근이라……. 공자님이 널 퍽 가까이 여기시는 모양이지?”
“음. 제 주인께선 다소간 강파른 면모가 있어 쉬 곁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선 아무 때나 그분의 등 뒤에 서도 되는 우송 아저씨나 저 같은 경우는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특히 네가 그렇겠구나. 심지어 자면서도 떼어놓지 않으시니 말이다.”
웃음기 어린 말에 침아는 머쓱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베개라서 그렇습니다. 겨울날 화로를 가까이 두고 자는 이치와 다를 바 없어요. 제 손을 만져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애초에 몸뚱이가 이리 따뜻하지 않았다면 화산 어르신이 절 사셨을 리 없지요. 아, 근본적으론 향기가 좋아서였던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는데……. 정확히 왜 사셨냐고 여쭤본 적이 없어서요.”
요령부득인 침아의 말에 가선의 웃음이 깊어져 침아가 다소 쑥스럽게 웃었다. 그런 침아를 보며 가선이 말했다.
“나도 그리 오래 살지 않았다만 인간이란 넓게 보든 좁게 보든 두 종류뿐이란 말이 한 번도 그른 경우를 못 봤어. 그렇게나 개체 수는 많은데 말이야.”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침아가 물었다. 아직은 웃는 낯이다.
“인간의 두 종류라 하시면……?”
“노둔(老鈍)하거나 후안(厚顔)하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딱 잘라 답하는 가선의 눈빛에 어둠 속에서도 쇠붙이의 그것처럼 날이 보였다. 침아는 잠시 동그랗게 뜬 눈으로 가선을 응시하면서 입 안에서 가선이 한 말을 중얼거렸다.
노둔하거나 후안?
어리석고 둔하거나, 뻔뻔하여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뜻이다. 듣는 순간 이해했으나 바로 반응하지 못한 것은 바로 침아 자신이 그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 가선의 의중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아, 날 싫어하는 거군, 하고 짐작했다. 이유는 알 도리가 없다. 굳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침아는 깊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어디까지나 공손히 시선을 내리깔면서 대꾸했다.
“아씨를 모시는 이중엔 인간이 없는 듯하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우산을 가지러 간 가선의 시종이 어서 나타나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침아가 왼편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오른쪽 귓가에서 여전히 상냥하게 들리는 가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지. 아무렴. 앞으로도 계속 다행이고 싶어.”
무언가, 담긴 뜻이 불온한 말이다.
침아가 힐끗 가선을 쳐다보면서 그녀와의 간격을 더 벌려 섰다. 이제 우산은 침아의 손에 쥐어 있다 뿐이지 오로지 가선의 머리 위를 가리기 위해 존재했다. 우산 가지러 간 이는 우산을 새로 만들어서 오나 싶어 미간을 찡그리며 침아가 도로 고개를 돌렸을 때, 써억 하는 으스스한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뱃전으로 강렬한 바람이 일어왔다.
느닷없는 바람에 비가 섞여 후려치는 서슬에 언뜻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인 침아가 얼굴을 가렸다. 뱃전으로 강물이 치솟아 올라와 몸을 덮쳤다. 반사적으로 오른손에 쥐었던 우산을 방패로 삼으려다가 아차, 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붉은 소맷자락이 펄럭거리는 것을 실눈 사이로 보고 침아가 가선에게 손을 뻗었다.
“아씨, 안으로 들어가셔야…….”
손에 팔이 잡혔다는 느낌이 들기 무섭게, 그대로 뿌리쳐졌다. 촤악 휘두르는 붉은 소맷자락이 침아의 얼굴을 스치면서 따끔하도록 아팠다.
“놓아라, 천한 것 주제에 감히 뉘 몸에……!”
마주하게 된 가선의 얼굴에 침아는 자신이 우산을 놓쳤다는 것도 몰랐다. 우산은 불어오는 바람에 속절없이 뱃전을 뒹굴면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허락 없이 내 몸에 손을 댄 것 하나로도 죽어 마땅하다. 원망 같은 것도 네게는 과분하지. 고작 인간 따위가!”
갑작스레 일어난 바람만큼이나, 느닷없고 지독한 악의(惡意)였다. 침아가 어리둥절하여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휘몰아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려 그녀의 왼쪽 얼굴까지 또렷이 드러났다. 화상 흔적이 남은 그 얼굴에 가선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아, 흉측해. 하물며 이리 곱지도 않은 것이라니……! 정말로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어!”
마치 어린애의 투정 같은 소리에 이어 가선의 손이 침아를 잡았다. 본능적으로 뿌리치려 하였으나 팔을 옥죄어 오는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악스러웠다. 아래를 내려다본 침아는 사람의 손이라기보다는 매의 발톱처럼 변한 가선의 손을 보고 놀랐다. 놀란 만큼 가득 힘을 주어 버둥거렸다.
“왜 이러십니까, 대체……! 아파요, 놓아주……. 아아앗!”
뱃전으로 떠밀려 문득 하반신이 무언가에 세게 부딪쳤다. 그것이 배의 난간임을 알아본 침아의 눈에 비로소 두려움 비슷한 것이 퍼졌다. 자칫하다 강에 빠지겠어!
뒤이어 섬뜩한 깨달음이 전신을 내달렸다.
지금 이 여자가 나를 강물에 내던지려 하는 거구나!
“이런 일을 하고도 무사하길 바라?”
돌아보며 그리 묻는 침아는 그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어떤 벌도 받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 하나를 어찌한 것이 무슨 흉이라고?”
환한 미소와 함께 가선은 침아의 다리를 걸었고 침아가 휘청거리는 순간 눈 깜박할 새에, 너무도 손쉽게 침아를 배 밖으로 내던졌다. 풍덩 하고 침아가 빠지는 소리는 기이하도록 빠르게 물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강물에 가라앉았던 침아가 반동으로 솟아올라 물 위로 머리를 쳐들었으나 방금 전까지 뱃전으로 밀어닥치던 그 격한 바람이 바로 그때를 노렸다는 듯이 큰 파도를 만들어 침아의 머리를 도로 물속으로 짓눌렀다.
배가 나아가는 속도보다 침아가 급류에 떠내려가는 쪽이 월등히 앞섰다. 몇 번이고 허우적거리면서 침아가 물 밖으로 몸을 끌어올렸으나 파도는 집요하리만치 그녀를 따라다녔다. 입을 벌려 살려달라 소리칠 틈조차 없이 또 한 번 큰 물살이 침아를 짓찧어 강물로 우겨넣었다. 그렇게 다시 물로 떠밀려 들어가기 직전에 침아의 오른쪽 눈이 그녀를 뒤따라오는 배를 마지막으로 담았다.
이상하리만큼 부드럽게, 물살을 가로질러 오는 배. 심지어 팽팽히 펴져 있는 흰 돛은 비바람은 무엇이고, 급류는 또 무엇이냐 침아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격류는 오로지 그녀의 주변으로만 흘렀다. 아니, 애초에 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람이…….’
느닷없는 선풍처럼, 갑작스레 회오리치는 물결의 힘에 한갓 사람의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짧았다. 마침내 물밑으로 가라앉은 침아의 몸이 더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뱃전에서 우두커니 서서 앞쪽을 응시하는 가선의 소맷자락이 세차게 나부꼈다. 묘한 것은, 소맷자락을 그처럼 나부끼게 할 만큼의 바람은 불어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느새 원래대로 얌전해진 빗줄기는 거의 수면에 수직으로 내렸다. 공중의 어디에도 바람은 일지 않는다. 다만 가선의 소맷자락과 배의 돛만이 바람을 안아 흔들리고 있을 뿐.
“우산을 가져왔습니다.”
조용한 목소리에 가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녀오는 사이 이슬이 엷게 내려앉아 유난히 뽀얗게 보이는 시종 정이 가선에게 우산을 씌워 주면서 중얼거렸다.
“들어가서 쉬십시오. 곧 날이 밝아올 것입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빗을 테야.”
“그럼 그것부터 해드리겠습니다.”
소매 속에 손을 감추고 선실로 향해가는 가선의 발이 거의 바닥에 닿지 않는 듯 가볍다. 그녀의 얼굴 가득한 즐거운 미소가 가신 것은 별안간 선실로 향하는 통로에서 나온 료를 보면서였다. 료는 가선의 일행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들 너머를 살폈다.
“혹시 침아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아뇨, 저는……히끅.”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으나 돌연 딸꾹질을 하며 가선이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료가 힐끗 보는데 정이 부드럽게 말했다.
“공자님의 시녀라면 제가 보았습니다. 우산을 가지러 갈 때였는데 측간을 찾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게 어디냐 물어서 가르쳐드렸습니다.”
“거기가 어딘지 내게도 가르쳐줘야겠군.”
“저어……급하신 게 아니면 나중으로 미루심이. 뵈었을 때 보니 시녀분은 아무래도 배탈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아. 하여간. 오늘 지나치게 먹어대더라니.”
그것 보라지 하는 식으로 중얼거린 료가 그대로 돌아서려다가, 문득 침아가 충고한 예의에 대한 말이 떠올라 대충 가선에게 한마디 건넸다.
“비가 오는데 아직 밖에 계셨던 모양이지요?”
“저는…….”
딸꾹질이 쉬 그치지 않아 가선은 기침까지 했다. 이번에도 정이 자연스럽게 대신하여 대꾸했다.
“이리 먼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신 데다 야시를 둘러보신 것도 오늘이 처음이라 쉬 잠이 오지 않으시는 듯해 제가 권유해 드렸습니다. 조금 움직이시면 기분 좋게 잠드실 수 있을 듯하여.”
가선은 바로 그러하다는 듯 소매 위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료는 정을 쳐다보며 칭찬의 뜻으로 말했다.
“믿음직스러운 시종이로군. 주인에게 의지가 될 만하겠어. 조금 부럽습니다. 그럼…….”
얼마쯤은 더 예의를 챙겨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료는 바로 그들의 일을 잊었다. 정말 배탈이 났다면 측간에 붙어사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침아를 찾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료는 다시 자러 갔다. 침아가 누울 자리를 비워놓고 옆으로 누운 채 돌아오면 조금 놀려줄까 하고 기다려보다가 이내 집에 가면 배탈에 좋은 약을 지어줘야지 하면서 이런저런 약재를 떠올렸다.
“인간은 너무 약해서 원…….”
성가셔 죽겠다는 말투와 달리 잠이 든 료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 미소는 동이 튼 후 얼핏 깼다가 여전히 자신뿐인 싸늘한 침상을 확인하기까지 료에게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