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밤 나들이 (6/33)

5. 밤 나들이

해넘이 무렵의 산길을 자색 비단발을 드리운 수레가 간다. 털이 유난히 매끈한 검은 소가 끄는 수레의 앞에서 회색 말에 오른 수려한 귀공자가 길잡이를 하고 있다.

느슨하게 고삐를 잡은 귀공자의 고운 손 위쪽의 시선은 서쪽 하늘을 가득 채운 붉은 물결에 못 박혀 있다. 허여멀쑥한 피부에 하늘의 붉은빛이 더해져 더욱 색이 진해진 자줏빛 입술이 요염을 넘어 불길하리만치 아름답다. 바야흐로 양(陽)의 흐름이 음(陰)의 흐름에 주도권을 넘겨주는 때와 맞물려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요기를 불러들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비단발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노을 구경을 하던 침아는 문득 그런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며 료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마침내 경쾌하게 돌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시선을 안으로 돌렸다.

“소리만 요란했지 겨우 한 뼘도 못 오셨습니다.”

바둑판 위에 놓인 하얀 돌의 소극적인 공격에 침아는 박수 치며 웃었다. 탄기(彈棋 : 바둑돌 튕기기)놀이를 하는 중으로 화산 노파가 흰 돌, 침아가 검은 돌이다. 침아의 웃음 섞인 말에 화산 노파는 공연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도 이런 거추장스러운 것을 달고 살아보려무나.”

화산 노파가 중지부터 소지까지 끼우고 있는 세 개의 손톱집을 힐긋 본 침아가 당돌하게 말했다.

“귀찮으시면 싹둑 잘라버리시지요?”

“너는 그 머리채를 싹둑 자르라면 자르겠느냐?”

“자르지요. 이런 머리가 사는 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도 없다면서 왜 길고 있누?”

“주인님께서 길라 하셨습니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 당돌함에 혀를 차며 화산 노파가 물었다.

“료가 내버려두면 길지 않을 모양이지?”

“당장 적당한 길이로 잘라버릴 겁니다.”

“적당한 길이라면 어느 정도이냐?”

“음. 이 정도가 좋겠지요.”

손을 들어 대충 가늠한 침아는 딱 턱 부근에서 가위질하는 시늉을 했다. 흉터만 가릴 수 있으면 족하다는 뜻이렷다. 팔짱을 끼고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다음에 튕길 돌을 고르는 침아에게 화산 노파가 말했다.

“네가 잘 모르는 듯한데 인간의 암컷들은 머리를 길러 치장을 하는 법이다.”

“그렇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너는 고와지고 싶지 않으냐?”

“기왕이면 고운 편이 좋겠지만…….”

대답을 하다 말고 침아가 왼쪽 가장자리에 있던 돌을 기세 좋게 튕겼다. 의욕은 좋았으나 섬세하지 못했다. 돌은 목표지점을 훌쩍 넘어 바둑판 아래로 떨어졌다. 침아가 혀를 빼문 동안 화산 노파가 침아의 실책으로 따게 된 흰 돌을 들었다.

“이러다 종국엔 내가 이기겠구나.”

벌써 적의 수중에 떨어진 흑돌이 세 개다. 그중 두 개가 자책수였다. 침아는 턱을 긁적거리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신중해지겠습니다.”

화산 노파가 공격할 차례가 되어 느긋하게 바둑판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만?”

“아,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지, 저도 고와지고 싶긴 합니다만 두 가지 면에서 글렀다고 봅니다.”

“어디 무언지 들어나 보자꾸나.”

“우선 첫째로, 치장 같은 것에 정도 이상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귀찮습니다. 매일같이 깨끗하게 씻고 더럽지 않은 옷을 정갈하게 입으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공들여 치장을 해보았자 어차피 머리는 잘 때가 되면 풀 것이요, 분단장도 지우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꾸미는 순간의 즐거움이란 것도 있는데?”

“그래 보았자 남는 게 없으니 버리는 시간인 듯하여 아깝습니다. 그 시간에 비파를 타고 공후를 타면서 즐겁게 노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 놀면 재주라도 남지 않습니까?”

화산 노파는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잘 알아들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고?”

“두 번째로는 제가 모시는 분이 문제입니다.”

“음? 료 말이냐?”

“효빈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서시가 말이지요, 아, 혹시 모르십니까?”

“글쎄, 서시가 누구더라?”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의뭉을 떨며 화산 노파는 기억을 더듬는 척했다. 침아는 에헴,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제법 으스대면서 말했다.

“옛날에 월나라에서 오나라 왕에게 미인계 삼아 바친 ‘서시’라는 미녀와 관련되어 나온 말이라 합니다. 그 절세의 가인은 폐병인지 심장병인지 때문에 곧잘 아파서 가슴을 누르면서 이맛살을 찌푸리는 버릇이 있었답니다. 근데 그 모습이 더욱더 곱다고 칭송을 받았대요. 그 소리를 듣고 ‘동시’라는 추녀가 자신도 미녀가 되겠다면서 이맛살 찌푸리는 버릇을 따라 했답니다. 추녀가 그런 짓을 했으니 흉측하기 짝이 없어 사람들을 기함시켰다지요.”

거기서 말을 멈춘 침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도 저리 고운 주인을 모시면서 거울은 무엇 하러 보겠습니까. 이미 제 앞마당에 모란꽃이 가득한데 민들레꽃을 보고 곱다고 생각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 모란을 자주 보아 민들레꽃이 고와 보일지 또 어찌 아누?”

“아하,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손을 탁 치며 침아가 동의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아직 제 눈엔 모란꽃이 곱기만 한데요. 얼마나 오래 보면 민들레꽃이 모란보다 더 고와 보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침아가 비단발을 슬쩍 들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직 하늘을 보고 있는 료의 옆얼굴을 쳐다보다가 하늘을 한 번 보고 이내 화산 노파를 마주보고 앉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까지 제가 살 것 같지가 않습니다.”

“료가 그리 고와 보이느냐?”

“고와 보이는 게 아니라 곱습니다.”

딱 잘라 말하더니 문득 그 소리가 밖까지 새어나갔을까 걱정하듯 화산 노파 쪽으로 몸을 숙여 속삭였다.

“주인님이 심통을 내시면 저만 고달파집니다. 아무쪼록 그런가 보다 하시고 탄기놀이나 계속하심이 어떠십니까?”

“오냐, 오냐. 자, 이번엔 어느 돌을 따본다지?”

수레 안의 탄기놀이가 제법 진지해져 가면서 말소리도 드문드문해졌다. 지평선에 걸려 있던 해가 막 그 끄트머리까지 사라지면서 잠시 하늘 끝이 타는 듯 붉어졌다. 비로소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다.

“모란과 민들레라…….”

제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 안에서만 중얼거려 보았다. 땅거미가 지는 잠시 동안 료는 멍하니 딴생각에 잠겨 길을 재촉했다. 그러다 언뜻 뒤따르던 검은 소가 요란스레 되새김질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 뒤를 돌아보았다. 말 흉내를 내듯 소가 푸르르 입을 풀었다.

“그래, 꽤 어두워졌지.”

료는 홰에 불을 붙여서 수레 가까이 다가가 수레 지붕 앞쪽에 걸린 등롱에 불을 밝혔다.

“할머니, 어둡지 않으십니까?”

수레 안을 향해 묻자 화산 노파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침아를 쳐다보았다.

“어두우냐고 묻는구나.”

“놀만합니다, 주인님.”

빠끔히 고개를 내밀면서 침아가 대꾸했다. 료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누가 네게 물었다던?”

“제 눈에 밝으면 할머님께서도 밝다고 생각하실 것이 자명하지 않습니까? 하여간에 성미 참 뾰롱뾰롱하십니다.”

“너, 너, 감히 뉘더러 그런 말을…….”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주인님이 아니면 우송 아저씨한테 했나 보지요.”

그 주인에 그 하인, 침아도 톡하니 쏘아붙이고 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산 노파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감추고 웃느라 여념이 없다.

“지난 몇 년이 꽤 길었던 게로구나. 둘이 퍽 사이가 좋아.”

“제가 숫기가 좀 좋아 그렇습니다. 입이 방정이라 맞을 짓을 골라 하지만, 그렇다고 맞아 죽을 정도로 미움을 사지는 않을 거랬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해주었던고?”

“아재요. 금 열 냥에 절 판 전 주인나리 말입니다. 새암부리기론 한 배에서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똑같은 첩이 셋이 있었는데, 지금은 첩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로는 안 봐도 된다 하더니 은근히 소식이 궁금한 모양이지?”

“혹시 보게 된다면 물어보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침아가 창문을 열고 발을 젖혀 바깥 하늘을 보았다.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엔 별이 쏟아질 것처럼 가득히 뿌려져 있다. 아직 달이 오르지 않은 그 밤하늘을 내다보던 침아가 중얼거렸다.

“이제 가면 또 언제 야시(夜市)에 가보겠습니까…….”

말 위의 료가 미간을 찡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침아의 말에 배인 아쉬운 기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까짓것, 야시에 데리고 가달라고 했으면 안 들어주었을 것은 또 무언가. 물론 한 백 번쯤 졸랐다면 생각해 봤을 거란 이야기다.

화산 노파가 오기 전까지 야시의 야 자도 꺼내지 않았으니 그 속을 료가 어찌 알아내라고. 하물며 지난 삼 년간 말도 하지 않았던 주제에. 그런 뜻으로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침아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잠자코 고개를 돌렸다.

료는 바깥나들이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나―굳이 말하자면 꺼리는 편에 가깝지만―이제부터 두어 달에 한 번쯤 달이 좋을 때 좀 멀리 데리고 나와 볼까 생각해 보았다. 원체 다녀본 곳이 없으니 갈 곳이야 널렸다. 지리지에서 그 명칭이나 봐두었던 곳을 직접 보러 다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으리라. 지금처럼 그림자길을 골라 다닐 것 없이 평범한 인간들의 방식으로 다니는 유람은 나름대로 소일거리도 될 것이고. 다만, 우송을 어찌 해줘야 하겠구나 하면서 슥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처럼 수레를 끄는 소 신세로 데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할 테니 말이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차에 이쪽을 보고 있던 침아와 눈이 마주쳤다. 함빡 미소를 짓더니 쏙 수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화산 노파와 탄기를 하면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앞을 보고 가는 료의 표정이 얼마쯤 개운치 못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간밤의 일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료는 침아가 깨기 전에 알아서 일어나 평소처럼 잤던 것 같이 꾸밀 요량이었으나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눈을 떴을 때, 방에는 이미 그 혼자였다. 잠시 어리둥절하여 있었더니 그가 씻을 준비를 해서 침아가 방으로 돌아왔다. 대야의 물로 얼굴을 적신 료에게 조두를 건네면서 어르신이 함께 식사하려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하는 침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모습에 료는 자신이 꿈을 꾸었나 의심했다.

화산 노파와 식사를 하면서 꿈이 아니란 쪽으로 분명히 결론을 내렸으나 이후 급작스레 화산 노파의 입에서 오늘 밤 월인산에서 열릴 야시에 놀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간밤의 일에 대한 의문은 잠시 덮어두었다.

료에겐 집 근처 산 말고는 외출 자체도 퍽 오래된 일이긴 했으나 야시는 그보다 더 오랜만에 가는 것이다. 어릴 때 가재가 하인들을 데리고 장사 나간다는 것을 구경나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에는 몹시 불쾌한 기억이 남아 있다.

계절에 한 번씩 장소를 옮겨가며 열리는 야시에는 온갖 종류의 존재들이 모여든다. 야시가 펼쳐지는 곳에서는 사냥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원칙이 있기는 하나 그래도 혼자 다니시면 안 된다는 가재의 경고를 무시하고 시장을 둘러보러 나섰던 료는 천적을 만나고 말았다. 얼굴에 크게 흉터가 있는 늙은 살모사의 거의 장님에 가까운 눈이 료에게 멈추어 번들거리던 그 순간을 어찌 잊을까. 그 살모사의 오래된 흉터가 어릴 적 료의 일족 중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훈장이라는 것을 료가 알 리 만무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는 했으나 그 살모사의 이빨이 박혔던 어깻죽지에는 아직도 푸른 자국이 남아 있다. 몸을 도는 피 역시 그때 이래 한층 더 차가워졌다. 단 하나 료에게 남은 것은, 그날 일을 들은 아버지가 여차할 때 료의 앞을 몸으로 막아설 시종 하나를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송이다.

야시로 향하는 료의 기분이 그저 가볍기만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비장한 것도 아니다. 여차할 때 방패로 쓸 우송이 있어서는 아니다. 자신이 더는 그때처럼 어리지 않다는 자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운이 없어도 그렇지, 그날 같은 일이 반복될 리가 없잖은가. 그 늙은 살모사는 야경꾼들의 손에 죽었다. 설사 귀신이 되었다고 해도 야시에는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료의 시야에 월인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야시가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산중턱에 자욱한 안개가 구름처럼 둘려 있다.

“달이 나왔다.”

보름의 달이 산을 비껴 세상을 비추면서 료가 안내하던 그림자길에도 달빛이 자욱이 뿌려졌다. 주위에서 웅웅거리며 바람이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몇 겹으로 둘러쳐진 다른 그림자길의 존재들이 내는 소음이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침아가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도착했습니까?”

료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침아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실망스럽게 말했다.

“아직이군요. 소란스러워졌다 싶었는데.”

“곧 도착이다. 저기 보이는 것이 월인산이야.”

“적막하게만 보입니다만. 정말 오늘 밤에 시장이 서긴 합니까?”

“넌 고작해야 인간일 뿐이니까.”

놀리듯이 말한 료가 고개를 돌려 월인산 중턱을 응시했다. 눈을 한 번 깜박이고 가늘게 뜨자 산 아래서부터 중턱으로 이어지는 불빛의 행렬이 보였다. 수없이 이어진 푸르스름한 도깨비불은 촉촉하게 서린 안개 때문에 주변에 둥그스름한 빛의 테를 써서 그 자체로 하나의 등롱처럼 보였다.

하늘의 만월이 미치는 산꼭대기, 그 아래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산중턱의 안개구름, 또 그 아래로 깊이 잠든 월인산의 숲을 종단하는 푸른빛의 등롱.

가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저것을 온전히 보여주기 위해 침아에게 눈을 하나 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착하면 어련히 알려줄 테니 탄기나 계속하지 그래?”

“끝났어요! 제가 이겼습니다! 할머님께서 설당과자를 사주시마 약속하셨습니다.”

“대체 단것은 어찌 그리 좋아하는지 원.”

“자주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좋아하는 거지요. 왜 좋아하느냐 타박하기 전에 매일 이 가엾은 하인에게 엿이라도 하나씩 던져줘 보시지요, 나리.”

“그랬다간 이가 상해 서른 전에 다 뽑게 될지도 모른다.”

“엿을 먹는데 이가 무슨 소용입니까. 잇몸하고 혀만 있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하루에 엿 하나씩 주신다고 약속하시면 지금이라도 제 이를 몽땅 뽑아드리겠습니다.”

“정말 네 머릿속에는 뭐가 든 것이냐?”

혀를 차고서 말고삐를 조여 길을 좀 더 재촉하면서 료는 침아에게 명령했다.

“또 목이 아프네 마네 투덜거리지 말고 심심하면 손이라도 놀려라. 비파를 타도록 해.”

턱을 괴고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던 침아가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마음을 바꾸어 화산 노파를 보며 애절한 곡이 좋으냐 명랑한 곡이 좋으냐 여쭈었다. 너 좋을 대로 타라는 화산 노파의 말에 침아는 비파를 등에 지고 기러기발이며 술대를 머리에 꽂고선 수레 앞 작은 문을 열어 꾸물거리며 빠져나갔다. 뒤에서 들리는 부산한 소리에 무슨 일인가 돌아본 료는 수레에서 기어 나와 검은 소에 찰싹 달라붙어 꼬물꼬물 앞으로 오는 침아를 보고 기가 차서 물었다.

“비파를 타랬더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탑니다, 타. 기왕 타는 거 달 구경을 하면서 타면 운치 있고 좋지 않습니까. 어엇, 우송 아저씨더러 가만히 계셔달라고 말 좀 해주세요.”

등에 탄 침아를 떨쳐내고 싶어서 검은 소, 즉 우송이 꿈틀대자 덩달아 수레까지 흔들렸다. 료는 한숨을 내쉬고 우송을 달랬다.

“돌아갈 땐 못 그러게 할 테니 잠시만 참도록 해. 네가 그러면 할머님께서 놀라시겠다, 우송.”

그 말에 소는 요동을 멈추었지만 콧김을 썩썩 뿜어대며 못내 불쾌함을 표현했다. 침아는 낄낄거리면서 제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비파를 끌어안았다. 머리에서 뺀 기러기발로 줄을 고르면서 그녀가 말했다.

“이따가 할머님께서 설당과자를 사주시면 딱 반을 떼어 드릴 테니까 노여워 마세요, 우송 아저씨. 나름대로 꿈이었단 말입니다, 소를 타고 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피리가 아닌 것이 아쉽긴 합니다만 이만하면 제 팔자도 신선이 부럽지 않잖습니까?”

“누구는 신선이고 누구는 하필 신선을 태운 소 신세란 말이냐?”

료가 농처럼 던진 말에 침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고 제가 소가 되어 우송 아저씨를 태울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인간들 말에 한 사람이 신선이 되면 그 집안 닭이며 개까지 승천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제가 승천이란 걸 하면 우송 아저씨도 잊지 않고 데리고 갈 테니까요.”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 타고 간다는 소리겠지.”

“그거나 저거나. 모로 가도 하늘만 가면 그만이지요.”

기가 차 하는 료처럼 우송도 쩝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참으로 숫기 좋은 아이라고 수레 안에서 화산 노파는 생각했다. 저리 입 놀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지난 삼 년간 말하고 싶은 걸 어찌 참았을까. 그렇다고 료가 없는 소릴 하는 것은 아닐 테니 참을성도 기막히게 좋다는 소리가 된다.

문득 침아를 살 때 그 승냥이가 했던 소리가 화산 노파의 뇌리에 떠올랐다. 혈통이 좋다고 태연하게 말했으렷다.

‘혹 다시 보게 되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되겠군.’

그런데 몇 년 전에 판 아이를 기억은 하고 있을까. 갯과 짐승들은 늑대를 제외하고는 아둔하다고 생각하는 화산 노파는 그 한 가지가 걱정이었다.

그 사이 비파 타는 소리가 천천히 주위를 채웠다. 비파 음색이야 숱하게 들어 새로울 것도 없지만 침아가 타는 가락은 영 귀에 설기만 했다. 가만히 화산 노파가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자니 침아가 가락에 붙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달도 밝아 보름이네, *화조(花朝)의 밤이구나.

월인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적적해라.

자색 덮개 씌운 수레를 끄는 것은 검은 소요,

회색 말 탄 길잡이는 모란 같은 나리로다.

달을 보고 비파를 타는 시녀 아이를 보시게나,

그 팔자 좋음이 신선이 부럽지 않네.

놀러 가네, 놀러를 가네, 망일(望日)의 야시로 놀러를 가네.

* * *

*화조(花朝) : 음력 2월 15일. 혹은 2월 12일이란 말도 있음. 꽃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옛 명절의 하나.

* * *

필시 즉흥적으로 뽑아낸 게 분명한 가락에 제 자랑을 담뿍 담아 늘어놓는 재주가 각별도 하다. 수레 안에서 낭랑하기까지 한 웃음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호호호, 그 아이, 참으로 맹랑하다. 인간의 아이가 다 너 같으면 오늘 야시에서 내 시종 하나를 사들여야겠구나.”

“설마하니 이런 것이 또 있겠습니까?”

화산 노파의 중얼거림에 료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침아는 둥기둥 둥기둥 비파를 즐거이 탔다. 그 비파 소리는 저 위, 야시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노랫가락이 잡히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이윽고 월인산 자락을 오르는 길에 접어들었다. 숲을 가로질러 난 가느다란 길 양옆으로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는 것이 이윽고 침아의 눈에도 보였다. 오는 내내 다른 이의 그림자 한 번 본 적이 없었으나, 숲길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불지킴이인 쥐들을 보게 되었고 중간쯤 갔을 때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난 숲지기 둘이 경비를 보는 임시 관문을 거치게 되었다.

“고(賈)인가, 객(客)인가?”

“객이외다.”

한 명이 일어나 수레 안까지 살핀 뒤 고개를 끄덕이자 질문을 던졌던 이가 료의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며 경고했다.

“합당한 대가 없이 얻은 상품, 상해로 이어지는 소요는 금지다.”

“잘 알겠소.”

술대를 다시 머리에 꽂고 손가락으로 비파줄을 퉁기면서 침아는 그들의 모습이 영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숲지기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염소 처음 보느냐? 뭘 그리 골똘히 구경이야?”

“아하, 염소구나.”

탁 손가락을 튕긴 침아가 투덜거렸다.

“생긴 건 사람 같은데 머리에 뿔만 덩그마니 두 개 있으면 제가 무슨 재주로 염손지 황소인지 알아보겠습니까. 우송 아저씨가 반은 소라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는데요.”

그 말에 우송이 머리를 흔들며 성을 냈다. 료가 우송이 말하고자 하는 걸 대신해 주었다.

“그냥 소가 아니라 검은 소다.”

“아,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이내 침아는 아까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를 다시 불렀다. 이번엔 유난히 ‘검은 소’ 대목에서 목소리를 늘여 뺐다. 놀리는 줄도 모르고 우송은 큰 눈을 껌벅이며 기꺼운 듯 머리를 까딱거렸다. 료는 쓴웃음을 지으며 새파란 어린것에게 놀림을 당하는 우송을 모른 척 외면했다.

좁은 길 끝이 어느 순간 환하게 번쩍인다 싶더니 눈부심을 피해 침아가 팔로 눈을 가렸다 떴을 때 일행은 야시장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좌판을 늘인 상인들을 비롯해 구경 중인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야시장은 대성황이었다. 침아는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고 자연스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개 너머로 뿌연 달이 보였다.

“아차차, 여기까지 와서 우송 아저씨를 타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아저씨도 구경을 제대로 하셔야지.”

침아가 훌쩍 땅으로 뛰어내리고서 검은 소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료도 말에서 내려섰다.

“그래, 우송. 이 아이 말이 맞구나. 너도 구경하고 싶은 게 있겠지.”

화산 노파의 말에 사양치 않고 우송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소에서 거인으로 화하는 동안 검은 안개가 몽글몽글 그의 전신을 감쌌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침아의 눈으로는 거의 붙잡을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이내 검은 털가죽 옷차림이 된 우송은 료의 말에 수레의 채를 얹어주고 그 뒤를 지키듯이 섰다. 야시를 채운 각양각색의 동물 중에서도 우송처럼 커다란 존재는 몇 되지 않았다. 침아가 자못 신기해하며 우송을 쳐다보는 동안 료가 수레 안을 향해 물었다.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할머니?”

“이왕 왔으니 빗이라도 볼까나. 마음에 들던 것이 나처럼 낡아서 이가 몇 개 빠지고 말았구나.”

“우송, 어느 쪽이냐?”

료의 말에 우송이 목을 죽 늘여 빼고 시장 안을 살폈다. 곧 그가 북서쪽 귀퉁이로 가면 되겠다고 알려왔다.

“굳이 다들 갈 것은 무어니. 나야 천천히 움직일 터이니 료 너는 이 말괄량이를 데리고 구경이나 다니려무나. 우송은 내가 데려가도 괜찮겠지?”

당연히 함께 가려 한 료와 침아를 만류하는 화산 노파의 말에 료는 힐긋 침아를 보았다. 침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저를 데려가세요, 어르신. 제게 설당과자 사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호호호. 그 과자는 돌아갈 때 받으면 안 되겠느냐?”

“싫어요, 먹으면서 구경 다닐래요. 빗도 보고 싶고요.”

“몸가축에는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니만?”

“저 말고 주인님 때문에 필요한 걸요. 빗치개도 좋은 걸로 하나 구하고 싶어요.”

“호오. 그러면 료 마음에 드는 걸로 사는 게 좋겠구나. 옜다, 둘이 사이좋게 과자 사 먹으렴.”

화산 노파가 수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료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침아가 마지못해 화산 노파가 주는 은 조각 몇 개를 받았다.

“재미나게 구경하려무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료에게 다 사달라 하고.”

부드러운 말 속에 너희 둘이 다니라는 완곡한 명령이 담겨 있었다. 침아는 우송을 쳐다보더니 그에게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자요, 아저씨도 과자 사 드세요.”

우송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워졌다. 침아가 헤헷 하며 웃었다.

“아까 싫다는데 올라타서 미안해요.”

그 밝은 미소에 우송도 못 이긴 척 몸을 굽혀 작은 은 조각을 받았다가 도로 침아에게 주었다.

“난 길에서 뭘 먹는 재주는 없으니까, 네가 내 몫까지 사서 나중에 주렴.”

“알았어요, 그럼. 이것저것 보이는 대로 맛있는 거 많이 사둘 테니까 기대해요.”

가슴을 두드리며 침아가 장담을 했다. 그리하여 사경(四更)까지는 이 자리로 다시 모이기로 하고 그들은 둘씩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설당과자보다 더 빨리 침아의 입에 들어온 것은 곶감이었다. 달다 싶은 건 보기 무섭게 이것도 산다, 저것도 산다 해서 얼마 걷지도 않아서 침아의 옆구리에는 곶감 몇 줄에 유포에 싼 설당과자 묶음, 엿 봉지 등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러고도 화산 노파가 준 돈은 넉넉하게 남았다. 매번 료에게도 이것 좀 먹어보라며 내밀었지만 료는 질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또 무언가를 보고 부리나케 달려가 한 봉지 사온 침아가 료 앞에 턱하니 그것을 내밀었다.

“자요, 해바라기씨랑 구운 콩. 이것도 싫어요? 바로 옆에 애벌레 구운 것도 팔던데, 그거 사드려요?”

“글쎄 난 생각이 없대도.”

“생각으로 먹나, 맛으로 먹지. 에이, 주인님. 근엄한 척 마시고 그냥 푹 풀어져 봐요. 해바라기씨 좋아하시면서 그런다.”

“너나 실컷 먹어.”

“그래도. 둘이 사이좋게 과자 사 먹으랬는데.”

“나도 먹었다고 해, 나중에 물으시면.”

“지금 저더러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시는 거예요?”

“나 참.”

결국 침아의 조르기에 밀린 료가 구운 콩 한 움큼을 쥐어 입에 넣었다.

“됐지? 됐어?”

“껍질도 안 벗기시고 드시다니.”

미간을 찡그린 침아가 재빨리 콩 껍질을 열심히 비벼 알맹이만 골라 내밀었다. 더는 실랑이하기도 싫어서 료는 그대로 받아먹었다. 한 번이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시작이었을 줄 어찌 료가 알았으랴. 그 뒤론 침아가 먹을 걸 살 때마다 나눠 먹어야 한다는 이유로 입 안이 그득해졌다.

“너 이런 게 먹고 싶어서 여기에 오자고 졸랐더냐?”

“기왕 왔으니 다 해보는 거지요. 매번 팔려나갈 상품이 되어 들어오던 녀석이 이제 손님이 되었으니 해보고 싶은 게 오죽 많겠습니까? 어머, 어머, 저기 반짝이는 저거 벼루 맞습니까? 주인님, 어서 가봐요.”

옥을 깎아 만든 벼루며 문진, 온갖 짐승의 털로 만들어진 붓, 좋은 먹, 색색의 고운 종이에 침아는 정신이 팔려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살 만한 게 있나 둘러보던 료의 눈길이 오른편에 모인 다른 좌판으로 향했다.

뭘 파는 건지 잘 보이지가 않을 정도로 앞에 모여든 손님의 수가 많았다. 죄다 여자다. 그네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료가 시선을 침아에게 돌렸다. 확연히 다르다. 료가 가끔 옷을 지을 때 남는 천을 써서 만든 침아의 옷은 색도 어둡고 이렇다 할 자수도 없다. 머리 모양은 또 어떠한가. 다만 둘로 나누어 땋아 내렸을 뿐, 장신구라 할 것이 없다. 아, 지금 그나마 비파의 상아기러기발을 꽂아놓은 것이 장식이라면 장식이겠다.

다시 오른편 좌판 앞의 손님들을 쳐다보며 료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본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대다수가 여우였다. 과연 놀기 좋아하고 꾸미기 좋아하는 여우구나 하며 료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아가 붓을 써 봐도 좋다는 좌판 주인의 허락에 이런저런 붓을 시험하는데 푹 빠진 걸 확인한 료가 슬그머니 오른편 좌판으로 향해 면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손님 속에 끼었다. 야시에 나온 솜씨 좋은 노리개는 그 수공 솜씨며 보석의 품질이며, 인간 세상의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늙수그레한 두더지가 매기는 값도 상당했다. 그래도 잘만 팔린다.

가만히 좌판 위의 물건을 둘러보던 료의 눈에 자석영 꽃장식이 있는 은제 머리꽂이가 눈에 들어왔다. 썩 화려하지도 않은 물건인데 눈을 뗄 수가 없다.

료가 손을 뻗어 그것을 잡기 무섭게 누군가의 손이 료의 손을 잡았다. 같은 것을 탐낸 동지로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상대편 여자는 료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그만 넋을 놓았다. 료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것은 제가 사겠습니다. 다른 것을 골라 보십시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주변의 여자들이 물건을 사는 것도 잊고 그를 쳐다보았다. 료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머리꽂이 가격을 부르는 대로 줘버리고 냉큼 돌아섰다. 당연히 깎겠거니 하고 큰 값을 부른 두더지가 횡재를 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이제 마음에 드는 붓을 세 개까지 좁힌 침아는 심각한 얼굴로 붓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소 상기된 표정의 료가 옆에 와서 헛기침을 했을 때에야 고개를 들고선 붓 좀 골라달라고 졸라댔다. 료는 침아가 주섬주섬 점찍어 놓은 것을 보더니 주인장에게 전부 얼마냐고 물었다. 또 부르는 대로 내려는 료를 두고 침아가 주인과 흥정을 벌여 절반 가까이 깎아냈다. 깎아낸 값만큼 벼루며 연적, 문진에 종이까지 사들여 보따리가 풍성해졌다.

“아니, 어쩌면 장사치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돈을 치르신단 말입니까. 장사치들은 손님이 어련히 값을 깎겠거니 하고 값을 높여 부르는 것이 기본이란 말이지요. 주인님은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십니다. 홍홍홍.”

기분이 어지간히 좋았던지 침아의 웃음소리에 콧소리가 섞여 있다. 료는 침아가 노리개 좌판에 관심을 보이면 어쩌나 했는데 그쪽은 힐긋 보더니 두 번 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다만 아직 거기 모인 손님들의 시선이 료를 지긋하게 따라왔다. 여자 장신구 따위를 사는 것은 두 번은 못 할 일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료는 침아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빨리 했다.

왜 빨리 걷느냐 묻지는 않았지만 침아의 눈은 분주하게 노점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러다 료가 걸음을 멈추면서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갔다.

“어떠냐, 저런 것을 사 볼까?”

그의 손이 가리킨 것을 본 침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무 색이……. 뭐 어울리지 않을 것도 없겠습니다만.”

침아는 위아래로 료의 복색을 살핀 다음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료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꿩 깃털을 머리에 꽂고 있는 비단 장수는 자신이 파는 것이 명나라 황실 비빈의 내탕고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소리 높여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물론 가져오는 것에 허락을 맡았을 리 만무하다. 한 필을 짜는 데 얼마만 한 품이 들어갔을지 헤아리기 어려운 최상품 비단들은 자색에, 다홍색, 연두색, 남색, 노랑 등등 갖가지 색채는 물론이요, 그 종류에 따라 짜넣음무늬도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파는 이도 말한 대로 비빈들, 즉 여인들이 쓸 목적의 옷감들이었다.

굳이 옷을 지어 입는다 치면 워낙 미색이 빼어나니 어울리긴 하겠으나 그래도 지금까지 침아가 봐온 료의 차림을 생각하면 파격이다. 그래서 난색을 띤 침아를 보며 료가 웃었다.

“내가 설마 저런 것들을 걸치겠느냐? 네게 사주겠다는 뜻이다.”

“저요? 왜요?”

침아의 반응은 료의 생각 외였다.

“왜긴, 옷을 지어 입는 거지.”

그 말에 침아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됩니다, 제 허술한 바느질 솜씨로 저런 고운 옷감을 손대면 큰일 납니다. 주인님, 벌을 주시려면 다른 벌을 주세요. 차라리 우송 아저씨랑 밭을 갈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벌이 아니라 네게 사줄 테니, 네 옷을 지어 입으란 소리다.”

“에엣? 전 옷이 부족하지 않은데요.”

여전히 미덥지 못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침아 때문에 료의 기분이 확 상했다. 그냥 돌아서 버리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쌓인 피륙 앞으로 걸어갔다.

“이것, 이것, 이것. 그리고 그것도. 여기 이 아이에게 옷을 해 입힐 것이니 알아서 끊어 주시오.”

“예, 예, 수려하신 미목만큼이나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값도 묻지 않고 주문을 하는 통 큰 손님에게 아첨을 하는 비단장수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침아는 뜨악한 표정으로 료와 비단장수를 쳐다보다가 이내 손을 내저으며 비단장수를 말렸다.

“아닙니다, 안 사요. 저한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무슨 소용이긴. 옷 해 입으라고 했잖아.”

말리는 침아를 또 료가 말렸다.

“제 솜씨로 이런 옷감을 어찌 다룹니까. 주인님은 돼지 목에 진주라는 말도 모르십니까?”

“누가 너한테 지어 입으라느냐. 따로 품을 들여 옷을 지어줄 테니까.”

“이제까지 제가 잘만 지어 입었는데 왜 갑자기…….”

“거 참 해준다는데 말도 많다. 잔말 말고 사준다면 고맙다고나 해.”

“……고맙습니다.”

석연찮은 표정으로 침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긴 했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들면서 중얼거렸다.

“차라리 맛있는 걸 잔뜩 사주시지. 먹지도 못하는 옷, 비싸기만 하고.”

“넌 그리 어려서 어디에 써먹는단 말이냐. 쯧쯧.”

먹을 것 앞에서 예쁜 것이 밀리다니. 료는 혀를 찼다. 비단장수가 솜씨 좋게 묶어준 비단 몇 필을 침아에게 훌쩍 던졌다. 오른편 옆구리에는 군것질거리, 왼쪽 옆구리에는 문방사우 보따리, 등에는 비단 짐이 지어지자 침아는 그야말로 짐꾼이 되었다. 무거울 만도 한데 끄떡없이 경쾌하게도 걸으며 료에게 늑장 부리지 말라고 손짓했다.

붉은 등롱이 이어지는 거리를 걸을 때는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린 것처럼 위만 보고 걷는 바람에 뒤따라가는 료가 다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어디에 한눈을 팔았던 간에 침아는 잘만 걸었다. 누구에게 부딪히지도 않고 어딘가에 넘어지지도 않고.

“하여간에 묘한 재주가 있군.”

중얼거리면서 료는 아까 샀던 자석영 머리꽂이를 찾아 소매 안을 뒤적였다.

“어? 어라?”

틀림없이 왼쪽 소매에 넣어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옷을 뒤집어 벗을 기세로 찾았지만 역시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어디에서 떨어뜨렸나?”

당황한 료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다시 돌아가자고 침아에게 말하려고 했던 료는 그 짧은 동안 시야에서 침아의 모습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아야, 침아야!”

목청껏 불렀지만 대답해 오는 소리가 없다. 침아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도, 이렇게 온갖 냄새가 가득한 곳에서 분별해 내기는 힘들었다. 료의 걸음이 빨라졌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영 거추장스러워 모조리 밀쳐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길을 재촉하는 료의 옷자락을 문득 뒤에서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너 감히 어디서 이런 장난을……!”

숨어 있던 침아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던 료의 예상은 돌아보는 순간 깨어졌다.

“저어, 죄송합니다.”

깜짝 놀란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는 낯선 여자의 모습에 료는 헛기침을 하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옷자락을 잡아당겼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나 싶어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여자가 다시금 중얼거렸다.

“저어…….”

료가 힐끗 눈길을 주자 여자가 가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는지요?”

“……아!”

가만히 료에게 보여주는 여자의 작은 손 위에 그가 찾던 자석영 머리꽂이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잃어버린 것이 맞습니다.”

반갑게 가져와 손에 쥐면서 료가 물었다.

“어디에서 주우셨습니까?”

“저기 비단을 파는 곳 근처에서……. 아까 사시는 것을 뵈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찾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여자의 말에 그제야 료가 좀 더 상대의 얼굴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번 본 일이 있다. 지금 료가 손에 쥔 자석영 머리꽂이를 살 때 간발의 차이로 그에게 선수를 뺏긴 여자가 아닌가. 탐이 났을 법도 한데 굳이 그를 찾아 되돌려 주었나 싶어 료는 미소를 머금었다.

“수고를 끼쳐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친절함에 감사드립니다.”

그의 미소에 여자의 아리따운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우아하고도 얌전하다. 누구하고는 천지차이구나 싶어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는 료의 눈에 비로소 멀리서 겅중겅중 뛰어오는 침아가 보였다.

“주인님, 주인님! 엄청 맛있는 것을 샀습니다!”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통째로 구운 오징어를 양손에 들고서 료에게 달려온 침아는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법 없이 대뜸 꼬챙이 하나를 료에게 내밀면서 덥석 살을 베어 물었다. 그을음으로 금세 새까매진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꿀꺽 넘기기 무섭게 아직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는 료를 보며 말했다.

“맛이 기가 막힙니다. 식으면 딱딱해지니까 말랑말랑할 때 드세요.”

“너는 정말 먹으러 놀러 나온 게로구나.”

“이 냄새 좀 맡아보세요. 저절로 군침이 돌지 않습니까? 그러고 섰지만 말고 눈 딱 감고 한 번 드셔보시라니까요?”

부득부득 침아가 꼬챙이를 들이미는 서슬에 료가 뒤로 몸을 뺀다는 게 아직 거기 서 있던 여자와 부딪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여자가 가벼이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가는 모습을 침아가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참 어여쁜 사람이네요. 아,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겠지요. 그런데 아시는 분입니까?”

“오늘 처음 보았다.”

어깨를 들썩이는 료와 달리 뒤돌아가던 여자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돌아보는 것을 침아는 보았다. 침아는 오징어를 한입 뜯어 우물거리다가 료를 보며 짓궂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 낭자가 주인님께 반한 모양입니다.”

“잠깐 스친 일로 무슨 그런 소리를.”

“잠깐 스치는 이가 모두 주인님처럼 고우란 법은 없지요. 근데 좀 드셔보시라니까요?”

오징어 꼬치가 료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료가 한사코 마다해서 침아는 오징어 두 마리를 혼자 다 먹었는데 배가 어지간히 불렀는지 그 뒤 야시를 도는 동안 또 뭔가 먹고 싶다는 소리는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몸은 거의 자랐지만 입가에 검댕을 묻히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늘어가는 짐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튼튼한 침아를 보며 료는 간밤의 일이 참 멀게만 느껴졌다.

‘이런 아이를 정인으로 삼는다라……. 십 년은 이른 일이겠군.’

그가 소매 속에 잘 간직해둔 자석영 머리꽂이가 어울리는 여자와는 한참 멀다. 차라리 아까 그 여자가 사게 그냥 둘 것을 그랬나 생각해 보는 료에게 문득 침아가 바짝 달라붙어왔다.

“세상에, 저기 좀 보세요. 저건 전갈이 아닙니까?”

“흠. 그렇구나.”

침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본 곳에는 전갈을 비롯해 독거미에 지네, 독나방 등의 독충들을 담은 궤며 나무로 된 장(欌)이 즐비했다. 밖에 내놓지는 않았지만 아마 찾는다면 독사도 내어줄 것이다. 료가 처음으로 오늘 자신을 위해 뭔가 사고 싶어진 게 있다면 바로 이것들이었다.

“몇 병 사갈까. 할머님께도 드리고.”

“저런 걸 뭐 하시게요?”

료를 올려다보는 침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하긴, 먹지……라고 간단히 대꾸했다간 펄쩍 뛰며 옆으로 달아날 것 같다. 안 그래도 전갈이 무서워 료에게 찰싹 붙어 있는 애한테 말이다.

“약재로 쓰려고 그런다. 잘 쓰면 좋은 약을 만들 수 있지.”

“아하. 그렇지만 위험한데요, 주인님. 정 사시려면 죽여 달라고 해서 사는 것이 어떠십니까?”

“왜. 그리 무서우냐?”

“무섭다기보다는…….”

독충의 상자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침아가 딱 잘라 말했다.

“독을 품은 생물은 질색입니다.”

료의 낯빛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이어서 묻는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왜 그리 질색하는 건데?”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릴 적 언젠가에 전갈이나 독사에 물려 죽을 뻔했나 보지요. 그러고 보니 벌도 싫은데, 벌에 쏘였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독버섯인가?”

이리저리 생각해 보던 침아가 그만 됐다는 듯 머리를 젓더니 료의 팔을 끌어 어서 다른 장소로 가자고 했다. 료는 다소 아쉬운 마음으로 간식거리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꽤 흘러 침아가 목이 마르다며 물을 사 마실 때 여전히 묻히고 다니는 입가의 검댕이 신경 쓰인 료가 손수건에 물을 묻혀 침아의 얼굴을 훔쳐 주었다. 침아는 얌전히 료가 하는 대로 얼굴을 맡긴 채로 작게 하품을 했다.

“벌써 졸리느냐?”

“아주 약간 고단할 따름입니다.”

“돌아갈 때 수레 안에서 자면 되겠구나.”

“그렇게 자버리면 일찍 깨서 곤란합니다.”

“내 오늘은 베개 노릇을 면해 주마.”

“그럼 어제처럼 죽부인 삼으시려고?”

그 말에 료가 뜨끔하여 손길을 멈추었다. 천진한 얼굴로 침아가 계속 말했다.

“혹시 어디 아프신가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여기저기 만져보았습니다. 간밤에 많이 추우셨습니까? 돌아가면 화로를 다시 내어올까요?”

간밤의 일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짐작도 못한단 말인가. 당장엔 그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화로 같은 건 필요 없다. 자, 이제 네가 그토록 노래한 빗이나 좀 보러 가자꾸나.”

“예!”

그저 쾌활하기만 한 침아가 앞서서 길을 트며 걸었다. 무언가 짐을 들어주고 싶어졌는데, 그런 말을 꺼냈다간 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요?”라고 물어올 것 같다.

료는 예전에 화산 노파가 침아를 사들인 승냥이가 보고 싶었다. 여전히 파는 물건이 있다면 적당한 걸 두엇 골라 침아의 시중을 들게 했으면 싶다. 그럼 분명히 침아는 왜 그래야 하냐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때 당당히 말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앞으로 넌 내 소실 노릇을 하면 된다.’

그러나 야시를 거의 둘러보았어도 승냥이의 승자도 보지 못했다. 하물며 오늘 밤엔 그런 물목을 파는 장사치도 없었다.

침아가 사고 싶어 했던 빗과 빗치개를 고르느라 얼마쯤 시간을 보냈더니 달이 꽤 기울어 4경에 가까워졌다. 화산 노파와 다시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던 둘은 나란히 서 있는 두 대의 수레를 보게 되었다. 자색 비단발을 드리운 화산 노파의 수레 옆으로 붉게 옻칠을 한 여성용 수레가 세워져 있었는데 걷어 올린 발 너머로 수레의 주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조곤조곤했다.

“오, 이제야 오는구나.”

우송이 화산 노파에게 귀띔을 하자 화산 노파가 반색을 하며 수레에서 내렸다. 뒤이어 옆에 있던 수레에 타고 있던 이도 시종들의 부축 속에 땅으로 내려섰다.

“료야, 여기서 뜻밖에도 난씨 일문을 만나게 되었구나. 저 바다 건너 파현에서 온 가선 낭자란다.”

모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나붓이 절을 하고서 가만히 눈길을 올려 료를 보는 여자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 그러셨습니까.”

“어머, 오징어 꼬치 사왔을 때 본 분이다.”

굳이 안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덤덤히 중얼거린 료 옆에서 침아가 대번에 아는 체를 했다. 여자가 방긋 웃으며 침아에게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화산 노파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아주 낯선 자리가 아닌 모양이지? 어찌 되었든 얕은 인연은 아닌 듯하구나. 료야, 네게 넌지시 말한 휘의 혼담 건 말이다. 바로 이 가선 낭자의 언니와 이야기가 진행 중이란다.”

료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만 가벼이 주억거렸다. 침아는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재빨리 우송에게 달려가 짐을 새로 부리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둘이 소곤거렸다. 료의 시선이 침아에게 향했지만 화산 노파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선 낭자와 그 언니가 혜양에 잠시 지내러 왔다는구나. 어차피 이제 돌아갈 길이 같으니 함께 가는 것은 어떠냐? 가선낭이 배로 왔다 하는데 뱃길이라도 상관없겠지?”

료는 돌아가는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쎄요, 침아가 뱃멀미나 하지 않을지……. 저 아이가 아프면 제가 곤란합니다.”

“그거야 물으면 될 일이지. 얘, 침아야, 배에 타본 적은 있느냐?”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제 이름을 부르자 침아가 용케도 알아듣고 고개를 돌려 대꾸했다.

“대여섯 번 타보았습니다. 그건 어찌 물으십니까?”

“혹 뱃멀미를 하는지 료가 궁금해하는구나.”

“그런 거 안 합니다, 저는 물에 빠져도 용궁 가서 잘 살 거라고 아재가 보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배 타러 가나요? 언제요?”

신이 나서 묻는 목소리에 료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저 아인 말을 안 해도 걱정, 해도 걱정이라고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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