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벙어리 3년
우송이 ‘화산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검은 옷의 노파가 무주의 저택을 다시 찾은 것은 그 전 방문으로부터 햇수로 4년이 지난 봄날 오후였다.
산 밑에서는 이미 음력으로 2월에 접어든 이후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절기였지만 산 위의 저택 주변엔 이제 겨우 봄꽃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고, 저택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향나무도 이제야 게으르게 암꽃과 수꽃을 피워 올리는 중이다. 머금고 있는 고운 향에 비해 꽃은 거의 눈요기가 되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요사이 이 저택의 몇몇은 나무 아래 자리를 깔아놓고 해가 가도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날 화산 노파가 자신의 조카손자를 본 곳도 바로 향나무 아래였다.
갈퀴 손질을 하다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우송이 문득 갈퀴자루에 이마를 부딪치면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시선의 방향에 화산 노파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쿠, 어르신, 어찌 기별도 안 주시고…….”
잠깐 꿈결에 헛것을 보나 하고 눈을 비비다 그게 아니란 걸 깨닫고 우송이 허둥지둥 일어나는 것을 화산 노파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란 시늉을 하자 우송도 꾹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화산 노파가 바라보는 곳으로 우송의 고개가 돌아갔다.
공기 중에 춘곤증의 기포라도 떠돌고 있는 모양이다. 향나무 아래에 있는 두 아이도 낮잠 삼매경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아이라 부르기도 힘든 모습이다. 나무에 기대어 서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이 든 침아의 가슴께는 꽤 부풀어 올라 입고 있는 옷이 작지 않나 싶게 여민 옷섶이 팽팽했고 그런 침아의 무릎을 베고 잠든 료의 신장은 물론 체격도 그사이 눈에 띄게 성장했다.
“호오. 기대한 이상으로 내 선물이 유효했나 보구나.”
화산 노파의 흐뭇한 중얼거림에 우송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도 짝을 지어주어야 할 텐데.”
생각도 못한 화산 노파의 발언에 우송은 얼굴만 벌게져서 열심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뭔가 말은 하고 싶은데 화산 노파가 조용히 시킨 것을 지키느라 끙끙대는 것이었다.
“하긴 네 주인의 혼사가 먼저겠구나.”
그 말에 우송은 궁금증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혼인하십니까?”
화산 노파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런 일에는 순서가 명백한 법이지.”
“그럼……큰도련님이 혼인하십니까?”
화산 노파는 가타부타 말없이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때 마침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에 료가 선잠에서 깨어났다. 료의 반응은 우송보다는 더 무디고, 싱거웠다. 그는 바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우선 일어나 앉아서 소매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더니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잠을 쫓아내었다. 그런 다음에야 두 발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옷차림을 확인했다. 이제는 전처럼 깃옷을 입는 대신 제법 휘를 흉내 내어 도포로 멋을 부리고 있다.
료가 그대로 다가와 화산 노파의 앞에 섰을 때 화산 노파는 료의 키가 이미 자신을 훌쩍 뛰어넘은 것을 발견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할머니. 강녕하셨는지요?”
“호옷. 강녕하다마다. 료, 세월이 흘러가는 게 이리 기쁠 때도 있구나.”
지지부진하게 어린 모습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숨 가쁘다 싶을 만큼 자라는 것이 자신들의 일반적인 성장의 형태임을 화산 노파는 그간 잊고 살았나 싶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료의 성장이 눈부셨다. 수려한 미소년이라기엔 어딘가 거칠고, 미청년이라기엔 어딘가 여려 보이는 애젊은 외모는 기대를 벗어나지 않게 뛰어났다. 또 전과 달리 나름대로 예를 갖추는 것에도 신경을 쓰는 것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이리 커가면서도 내게는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투로 서찰을 보내다니, 괘씸하구나.”
“그리 많이 컸습니까? 하지만 저야 늘 그 모습이 그 모습 같기만 하던 걸요.”
미소 짓는 모습도 어딘가 둥그스름하게 원만하여 훈훈했다.
“철마다 보낸 옷이 작았을 터인데?”
“손을 보아 잘 입었습니다. 덕분에 저 아이의 바느질 솜씨가 볼만해졌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료가 향나무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선잠 정도가 아니라 아주 푹 잠이 든 침아는 그들의 도란거림에도 들썩이는 기척조차 없이 잘만 잔다. 그 모습을 본 화산 노파가 슬쩍 미심쩍다는 듯이 료에게 말을 건넸다.
“저 아이 혹 포태(胞胎)를 한 것은 아니겠지?”
료는 얼마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화산 노파의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옆에 있던 우송이 목덜미까지 벌게져서 자꾸 몸을 긁어대는 것에 작작 좀 하란 식으로 눈총을 주다가 뒤늦게 그 말을 이해했다.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할머니, 이상한 소리를 다 하십니다!”
펄쩍, 하고 실제로 공중에 뛰어오르며 료가 두 팔을 내저었다. 방금 전까지 의젓하게 굴던 인물과 동일인이 아니다.
화산 노파는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또 얼마쯤 그런가 하고 안심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쉽게 여겼다. 아직 아끼는 조카손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어 안심이면서도 이리 허우대 멀쩡하게 자랐으면서 아직 춘정에 눈조차 못 떴나 싶어 유감이었다. 아무래도 이리 고적한 곳에 파묻혀 지내는 탓이 크다.
“뭘 그리 호들갑스럽게 놀라고 그러느냐. 휼이는 이미 너만 할 적에 아비가 되었었다. 휘부터 시작해서 너까지 셋이야. 중간의 계집애가 죽은 게 아깝게 됐지만. 그러고 보니 섬이가 죽은 것도 이 무렵인가…….”
료의 아비 일을 들먹이며 료 위로 있었다는 누이 이름까지 꺼내자 료는 가만히 코를 찡긋거렸다. 료가 태어나기 전에 죽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이였다.
“어여쁜 아이였어. 휘를 무척이나 따랐는데. 그 아이가 죽었을 때 휘가 정말로 슬퍼했단다. 같이 죽겠다고 그랬다던가.”
예전의 추억을 더듬으며 아련한 눈빛을 짓던 화산 노파는 다시 용건을 생각하고는 료에게 짓궂은 말을 하였다.
“그랬던 휘도 너보다는 일찍 사내구실을 하였다지?”
“그런 걸로 경쟁을 벌인다 하여 무슨 자랑거리가 됩니까? 오랜만에 오셔 놓고선 대뜸 이런 말씀이나 늘어놓으시다니, 아무래도 할머니께서 봄을 타시는 모양이시지요? 휘 편에 회춘에 도움이 되는 춘단이라도 얻어 가심이 어떠십니까?”
“이놈이 머리가 좀 영글었다고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하였던가. 부러 휘 이야기를 던져서 자극을 좀 시켜볼까 하였더니 어린것한테 회춘 소리로 농을 들었다. 화산 노파가 지팡이를 들었지만 료는 잔망스럽게도 뒤로 슬쩍 피하며 씩 웃었다. 양귀비꽃같이 요염한 미소를 방글방글 흘린다. 그 모습에 화산 노파의 장난기도 슬며시 동하였다. 설사 때릴 기회가 와도 차마 때리지 못할 걸 알면서도 짐짓 노여운 척하며 지팡이를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료는 또 료대로 멀찍이 피하는 대신 아슬아슬하게 맞을 만한 거리를 유지하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미소에 더불어 으하하 하는 명랑한 웃음소리까지 들려준다. 한때는 화산 노파에게만 보여주고, 들려주었던 웃음이다.
때아닌 소극(笑劇)에 달게 자던 침아가 꿈틀하며 잠에서 깼다. 기지개를 켜면서 눈앞의 광경을 보던 침아는 눈에 남은 졸음기가 완전히 가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달려가다 화산 노파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절을 했다. 허리를 깊이 숙이자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땅에 스칠락 말락 했다. 예전의 더벅머리가 그만큼 자랄 정도의 세월이었다.
고개를 들자 찰랑거리며 유난히 긴 앞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침아가 가지런히 갈무리했다. 왼쪽 얼굴을 덮는 휘장과 같은 앞머리가 까마귀 날개처럼 윤이 났다. 그 머리칼 옆으로 드러난 또렷한 이목구비에 화산 노파의 눈이 얼마쯤 커졌다. 적당히 살이 오른 뽀얀 얼굴에 갸름한 눈과 작지만 오뚝한 코, 도톰한 붉은 입술이 어울려 한층 고와졌다.
화사하다는 감상을 하기 무섭게 화산 노파는 의아해졌다. 입고 있는 옷도 산뜻함과는 거리가 있는 잿빛에, 꾸민 구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데 말이다.
“오호라……. 여전히 네게선 참 좋은 향기가 나는구나.”
화산 노파가 침아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보다 가까워지자 어느새 이 아이도 화산 노파의 키를 웃돌 만큼 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 밖에 낸 말처럼 좋은 체취도 여전했다. 그러나 그 향기가 조금 바뀐 것일까? 전에는 그저 참 풋풋하고 달콤하다 여겼던 것이 지금은 맑고도 차가운 빛깔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보랏빛에 가깝다. 분명히 꽃향기이다. 무언가 입에 걸려 나올 듯 말 듯한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아 화산 노파는 미간을 찡그렸다.
“확실히 나이가 들었어. 이거야 참…….”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료를 쳐다보았지만 료가 척하고 답을 내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료는 덩달아 화산 노파를 따라 하듯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팔을 뻗어 침아를 끌어당겨 옆에 서게 했다. 둘이 한 뼘 남짓 키 차이가 났다. 게다가 료가 더 크다. 침아가 원래 료보다 큰 편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화산 노파는 그 사이 료가 정말 많이 컸다는 것에 다시금 감탄했다. 내내 그렇게나 안 크더니 옆에 이 인간의 아이가 있어서 자극이 되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때 묻는다는 것을 잊었다만, 이제 네 나이가 몇이냐? 열여섯? 열일곱?”
침아를 향해 묻자 침아는 엉뚱하게도 웅크리고 앉더니 바닥에 손으로 글자를 적었다. ‘十六(십육).’
“그래. 그 정도일 줄 알았지. 딱 료의 사분지일이로구나.”
그 말에 침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사분지일. 그 말대로 헤아려 보니 육십 세가 훌쩍 넘지 않는가. 료를 돌아보더니 재빨리 바닥에 육십사란 숫자를 적고 그의 다리를 치면서 맞느냐 확인했다. 료는 냅다 발을 뻗어 침아가 바닥에 쓴 자국을 문대버렸다.
“이게 뭐 어쨌다고.”
료를 올려다보는 침아의 눈빛이 볼만하다. 료는 침아의 땋은 머리 한쪽을 붙잡아 일으키면서 나무랐다.
“너 같은 인간이랑 같은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해. 너희처럼 자라기 무섭게 늙어 죽으려고 태어나는 줄 아느냐?”
료의 손에서 머리를 빼내고도 침아의 표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세상에. 4년 전에 만났을 당시에 육십이었단 말이지. 인간으로 치자면 그야말로 백발이 성성할 할아버지였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유치했다니. 믿을 수 없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거람? 이라고 그 표정에 적혀 있다.
이미 벌게졌던 료의 뺨에 더욱 붉은빛이 강해지는데 화산 노파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째서 말을 하지 않느냐? 그간 어디가 아팠느냐? 내 말을 알아듣는 것으로 보면 벙어리가 된 것도 아닐 터인데.”
침아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다시 바닥에 앉는데 옆에서 료가 냉큼 대답했다.
“천하의 고집불통이라 이렇습니다.”
“응?”
“할머니께서 제게 상전 하나를 선물해 주셨다 이 말입니다. 얼씨구. 보세요. 이렇게 대놓고 주인을 노려보는 하인이 세상에 있기나 합니까?”
과연 침아가 눈에 힘을 잔뜩 주어 료를 쏘아보고 있긴 했다. 그런데 화산 노파에게 신기한 것은 침아가 아니라 료였다. 침아가 그런 식으로 쏘아보는데도 화를 내긴커녕 히죽거리며 유유자적이었다.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침아가 화산 노파의 옆으로 가더니 대뜸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었다. ‘계시는 동안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내 시중을 들겠다고? 나쁜 제안은 아니지만 료가 허락을 해주어야 말이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료에게 와서 머물렀다. 료는 그쯤이야 하는 듯이 턱을 가볍게 끄덕였다.
“다른 것들보다야 낫겠지요. 그저 잘 때만 돌려주시면 됩니다.”
“잘 때?”
화산 노파의 눈에 짓궂은 반짝임이 스쳤지만 료는 이번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녀석, 제 베개거든요.”
이 저택에 온 이래 침아가 본 주인의 일가붙이라고 해봤자 휘가 고작이다. 그나마 휘도 일 년 중 서너 달 남짓 집에 머물면 오래 있는 것이다. 본디 이 집의 주인이라는 휘와 료의 아버지 휼이란 자는 본 적도 없다. 일 년에 두어 차례 찾아와 빈 곳간을 그득 채우고 돌아가는 청작이란 이름의 가재(家宰)가 료와 몇 마디 나누면서 부친의 안부를 형식적으로 묻고 답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들은 적은 있다.
이 저택은 휼이 첫 번째 혼인을 할 때 신부가 가져온 지참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신부가 휘의 어머니는 또 아니다. 그 신부가 병치레를 하다 죽고 나서야 휼은 휘를 데리고 왔다. 방랑벽은 물론 바람기도 다분해 집이야 본체만체 떠돌기 바쁜 본래 주인 대신 저택에 머물면서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휘가 집의 실질적 주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제 나이를 서른아홉이나 마흔 정도로 헤아리고 있는 우송의 말로는 그가 아직 코흘리개 아이 적에 이 집에 왔을 때, 이미 휘는 지금처럼 완연한 어른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이들은 사람과는 나이를 먹어가는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가정한다고 해도 그 이야기로 추론하자면 휘의 나이는 일단 백 이상이란 소리다. 전에 침아가 료에게 글로 적어 물어본 적이 있으나 료는 휘의 나이는 관심이 없어 모른다 했고, 자신의 나이는 알 거 없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번에 화산 노파의 우연한 말에서 비로소 나이를 알게 된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침아는 료의 나이가 한심했다. 하긴 우송도 별반 차이가 없다.
“무슨 생각에 그리 넋을 놓고 있느냐?”
화산 노파의 말이 침아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등을 안마해 주다가 그만 딴생각에 푹 빠져 버렸던 걸 깨닫고 침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등에 적어보려무나.”
침아는 솔직하게 생각한 바를 적었다. 그 주인에 그 종복. 둘 다 나잇값을 못한다, 라고.
화산 노파가 잘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 애들은 경험이 너무 좁고도 일천하니 말이다. 바깥세상도 좀 보고 그래야 하는데 줄곧 이 작은 산을 벗어난 적 없으니……. 그래, 어린 네 눈에도 그리 유치해 보이느냐?”
침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빠릿빠릿하게 안마에 힘썼다. 아프고 결린 곳을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열심히 풀어주는 것이 재주가 좋았다. 늘 누우면 뻐근하기만 했던 어깻죽지가 노곤하게 풀리는 것이 온천에 한 며칠 담근 것보다 더 나은 듯했다. 화산 노파는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안마를 잘하는 줄 알았으면 료에게 주지 말고 내가 갖는 건데 그랬구나. 이제 와서 달라 하면 내어줄까?”
침아는 묘한 미소를 띠더니 문득 화산 노파의 등에 대고 손을 열심히 놀렸다.
“응? 살려서 데려가고 싶으면 료한테 말하지 말고 갈 때 몰래 훔쳐가라고?”
노파가 뒤를 돌아보았다. 침아가 빙긋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꼭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화산 노파도 눈치가 부족한 편이 아니다. 슬며시 웃더니 물어왔다.
“아무래도 네가 팔자에 없는 벙어리 흉내를 내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렷다?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곧 방 밖에 있던 하녀를 불러들여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침아는 종종 틀린 글자를 쓸 때면 혀를 내빼 물면서 부지런히 무언가를 적어갔다. 반쯤 몸을 일으켜 팔을 괴고 지켜보면서 화산 노파는 이따금 혀를 차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저런 세상에. 하마터면 물고기 밥이 될 뻔하였구나.”
몇 해 전 겨울의 이야기를 보자니 그저 웃음만 나는 화산 노파였지만 정작 그 일을 당한 이 아이는 무서워 오금을 저렸겠지 싶어 속으로 참았다.
“그 후로 아예 입을 봉하였다면, 휘를 볼 땐 어찌했누?”
침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이어서 귀를 막는 시늉도 했다.
“저런. 장님에 귀머거리 시늉까지 했어?”
빙긋이 웃으며 침아가 그렇다고 몸으로 대답했다. 화산 노파는 껄껄 웃으며 침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것이 많지 않은 일족의 사정상 휘와 료, 그 사이 있었던 섬이 화산 노파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세대이지만 그중 누구도 이 아이처럼 천진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아이는 다 이런가 하고 생각하며 물었다.
“휘는 그렇다 쳐도 나에게까지 영 입을 다물고 있을 셈이냐?”
침아는 갸우뚱하면서 어쩔까 생각해 보는 눈치다. 그러다 일어나 방 바깥을 내다보고 창밖까지 확인한 뒤 돌아와 화산 노파의 귀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껜 비밀입니다.”
드디어 근 3년간 봉했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파가 기억하는 어렸던 목소리가 얼마쯤 영글어져 포근하게 들렸다. 이 좋은 목소리에 맑은 체취가 어우러진 아이. 언젠가 이 아이를 살 때 그 승냥이가 무어라 했던가? 혈통이 좋다고 했었나?
“하늘 아래 정직한 상인은 있을 리 없다 여겼는데. 그 승냥이는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야.”
“아재요? 아재를 만나셨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아가 물었다. 목소리는 아주 작지만 노파는 무리 없이 듣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 본 적은 없다만. 왜, 보고 싶으냐?”
“못 만날 이유는 없지만……그렇다고 딱히 다시 볼 이유도 없습니다. 아! 하지만 야시 구경은 하고 싶습니다.”
“야시라.”
“그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가보고 싶은 게 더 크지만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늘 거기서 거기만 오가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고 침아가 다시 큰일 났단 표정으로 손가락을 세웠다.
“주인님껜 절대 비밀입니다.”
화산 노파는 공모자의 표정으로 가만히 입술에 손을 대어보였다.
그 뒤 안마를 해드리다가 그대로 주무시는 분의 이부자리를 살펴드리고 침아가 방에서 물러나왔다. 이경(二更)이 갓 지났을까 싶은 시각이라 평상시처럼 밤 산책을 나간 료 일행이 돌아오려면 멀었다. 목욕 시중에 안마까지, 평소에 안 하던 힘쓰는 일을 해서인지 옷이 땀에 젖은 데다 얼마쯤 노곤했다. 이대론 눕기만 해도 잠들 것 같은데 그 전에 물을 데워 목욕을 할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에 가까워진 둥근 달이 주변에 거느린 무수한 금빛 모래 같은 별무리를 압도하듯 고고하게 빛나고 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침아가 갸르릉대는 것 같은 묘한 목울림을 냈다. 별과 달의 색에 물든 금빛 눈 아래로 고운 입술이 벌어지며 하얀 이가 드러났다.
한쪽 팔을 들어 그 달을 만지려는 듯 손을 뻗다가 멈추더니 자신의 손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쿡, 하고 웃는다.
그대로 침아가 돌아서더니 옷자락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경쾌한 발걸음은 마치 체중이 없는 듯 가뿐하여 발소리가 거의 없다. 다만 사락사락 바람에 옷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되도록 문이 없는 곳으로 달려가다가 중문이라도 나올라치면 그 옆의 담을 넘는 편을 택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택 가장 바깥의 담조차 뛰어넘었다. 눈 깜짝할 새라면 과장이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침아가 마음을 먹으면 놀라운 빠르기로 집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료가 알면 그리 좋은 얼굴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목적한 바를 이루어야 한다. 세우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침아는 다시금 가볍게 달음박질을 쳤다.
갈아입을 옷을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 맹점. 그 생각을 침아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물에 뛰어들고서야 했다. 절기로는 봄이지만 아직 물이 따뜻해지려면 한참 먼 시기의 세우지의 물은 잠시나마 숨을 멈출 만큼 차가웠다. 그러나 이 물속에서 동사할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을 겪어본 침아에게 이 정도의 차가움은 ‘까짓것’ 수준이었다.
정수리까지 완전히 잠겼다가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을 때 몸을 타고 부서져 내리는 물의 느낌은 오로지 상쾌함뿐이다. 눈을 감은 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침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긴 두 팔을 하느작거리듯 앞으로 밀었다 옆으로 당겨오는 가벼운 동작만으로 그녀의 몸이 못의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별달리 씻는다는 의식 없이 깊은 곳에 이르러서 한참 먹이를 찾는 물오리처럼 자맥질을 즐겼다. 별과 달이 어우러진 황금빛이 일렁이는 못의 표면 못지않게 수면 아래까지 젖어든 빛의 향연도 훌륭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못의 주인인 양 첨벙거리는 침아 때문에 잠이 깬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느라 바빴다.
그러다 언뜻 침아가 고개를 든 것은 물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하얀 눈 같은 것을 발견하고서였다. 헤엄쳐가서 그것을 손에 잡아본 침아의 눈이 커졌다. 손에 잡힌 것은 하얀 꽃잎이다. 그 순간 바로 그 하얀 것이 또 여러 점 날아와 그녀 주위로 떨어졌다. 그것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침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아……!”
눈에 들어온 것은 매화나무였다. 볕이 잘 드는 쪽에 매달린 하얀 매화꽃이 만개하여 매달려 있다가 지금 문득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 쪽으로 날아와 떨어지는 것이었다.
바라보는 사이에도 한차례 바람이 불어와 흰 꽃을 공중에 띄워 올렸다. 너울너울 꽃은 공중에서 살아 있는 나비라도 되는 양 춤을 추다가 천천히, 천천히 수면 위로 내려앉았다. 침아는 그런 매화꽃의 비행을 몇 번이고 질리지 않고 바라보았다. 바람이 몇 차례 못 위를 지나가자 침아의 주변을 채운 하얀 꽃잎도 그만큼 많아졌다.
그러다 침아는 수면에 비친 달 위에 내려앉은 꽃송이를 두 손에 담았다. 찰랑찰랑 손바닥에 담긴 물 위에서 흔들리는 꽃은 용케도 온전히 만개한 한 송이였다.
침아는 물끄러미 자그마한 꽃을 바라보았다. 꽃을 담은 물속엔 달도 담겨서 금빛으로 흔들거렸다. 아름답고도 덧없는 모습이었다.
“……물에 비친 달과 떨어진 꽃인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침아는 조심스레 손을 모아 꽃을 건져 올렸다. 꽃에 코를 묻듯이 하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지만 바란 것만큼 향기롭게 마음을 채워주진 않았다. 그녀가 아쉬운 듯이 매화나무를 올려다보자 잔잔해졌던 바람이 기다렸던 것처럼 다시 일어나 후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많은 꽃이 떨어져 내렸다.
“아아, 안 돼.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떨어져 버리면 아껴서 오래 볼 수가 없잖아. 1년이나 걸려서 피었건만. 매화야, 힘을 내서 좀 꽉 붙잡고 있어줘. 내 너와 좀 더 즐기고 싶단다.”
꽃비는 멋진 풍경이었지만 그렇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매화나무에게 부탁했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산의 주인이라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는지 바람은 잠들었고 매화나무도 잠잠해졌다.
“옳지, 착하다. 아주 말을 잘 듣는 아기구나.”
수면에 떨어진 꽃들 사이를 헤엄치며 침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쉬 끝나지 않는 긴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그녀가 갑자기 물 아래로 잠수를 하면서 그쳤다. 얼마간 기포가 올라오면서 수면에 동심원이 생기다가 그것마저 잦아들었다. 고요함. 너무도. 조금 전까지 살아서 웃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앞쪽에서 밤새들이 뭔가에 놀라 일제히 숲을 떨치며 날아올랐다.
그 소리에 이어 세우지에서도 크게 물장구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잠수를 했던 그 자리에서 다시금 수면 밖으로 나온 침아가 내는 소리였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자는 셈으로 숨을 참다가 나왔더니 바깥 공기가 너무도 반갑다. 허겁지겁 숨을 들이쉬면서 침아는 매화나무 너머 먼 곳의 어둠을 응시했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두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등을 돌려 방향을 바꾸어 헤엄쳐 가면서 침아는 다시금 웃었다. 이번엔 소리 없이 이가 살짝 보일락 말락 할 정도의 엷은 미소였다.
“더 기다려 보실 작정이십니까?”
얼마쯤 지루해하는 우송의 물음에 료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를 돌아보니 우송이 목을 우둑우둑 소리가 나게 꺾어가면서 말했다.
“저기에 괜찮은 사냥감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 그런 것 같았는데, 허탕이구나. 다른 쪽으로 가버렸어.”
“경계심이 많은 놈인가 봅니다. 갑자기 이상한 바람이 부니 놀라서 도망간 건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말한 우송이 재빨리 몇 마디 덧붙였다. 혹시라도 자신이 료가 주술을 쓴 걸 비난한 걸로 받아들여진다면 큰일이다.
“하긴 그 정도 바람에 도망갈 녀석이면 여기서 쫓아간들 별수 있겠습니까만.”
료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하자 우송이 허리에 매고 있던 노루를 내려다보며 푸념했다.
“결국 오늘 사냥은 이 눈먼 노루 한 마리가 끝이군요. 화산 어르신께 별미를 대접하려면 세우지에 낚시라도 하러 가야겠습니다.”
“지금? 지금은 안 된다.”
료가 깜짝 놀라 거의 소리치다시피 했다. 우송이 눈을 끔벅거리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싱싱한 물고기를 낚으려면 새벽에 가야지요. 지금 간다는 말씀이 아니었는데……왜 그리 놀라십니까?”
“놀라긴.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새벽에 낚시를 갈 셈이라면 그만 돌아가자. 어차피 오늘은 달이 너무 밝아 사냥도 글렀어.”
“그러게 말입니다. 달이 참 밝지요. 이야. 여기서 보니 세우지가 커다란 거울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달님이 저걸 보고 분단장을 하시어 더 눈부신가 봅니다.”
말고삐를 돌렸던 료는 우송의 그 말에 또 놀라 홱 그를 돌아보았다.
“세우지가 보이느냐?”
“예? 아무렴요, 보이지 않습니까. 저기 저쪽 숲 너머에 반짝반짝하는 것이……. 그런데 주인님, 혹시 어디가 아프십니까? 제 눈에도 보이는 저 세우지가 아니 보이신다면 보통 일이 아닌뎁쇼. 주인님 시력이라면 저 세우지 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도 보여야 하는 건데요.”
“물론 보이긴 하는데……넌 어디까지 보이느냐?”
“어디까지 보이긴요. 그냥 저기 물이 있구나 하는 정도지요. 전 이렇게 키만 엄청날 뿐이지, 본디 하잘 것 없는 것 아닙니까. 벌써부터 무릎 관절이나 쑤셔대는…….”
그런 생각을 하니 우울해졌는지 우송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료는 다시 말을 걷게 하면서 몇 가지 약을 지어줄 테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먹으라고 쏘아붙였다. 덩치는 큰 주제에 쓴 약은 싫어하는 우송이 벌써 싫은 표정을 지었다.
산길을 내려가면서 료는 힐긋 시선을 오른편으로 던졌다. 멀리 세우지가 숲의 그림자에 가려져가고 있다. 우송의 말대로 오늘 밤 그곳은 하늘이 들여다보는 거울같이 빛났다.
그래서 그랬다.
무심코 그 거울에 시선을 주었다가, 튀어 오르는 물고기마저 보이는 예리한 시력 때문에 물고기가 아닌 엉뚱한 걸 보고 말았다. 멱을 감고 있던 침아를.
‘누구 맘대로 집에서 나와서 저런 곳에.’
처음엔 그런 생각에 괘씸해서 그쪽에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 생각만큼 강하게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매화나무를 흔들게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매화꽃이 떨어져 그것이 침아를 기쁘게 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러했다.
침아는 떨어지는 매화꽃을 보며 넋을 놓았다.
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북쪽 후원에 있는 휘의 여자들이 그런 것처럼 부산스럽게 꽃놀이니 뭐니 하며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침아 역시 꽃을 보고 좋은 낯을 하는 것은 익히 보았다. 그의 처소의 휑하기 짝이 없었던 뜰도 침아가 들어온 이후로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계절마다 무언가가 늘어나더니 바로 지난겨울 동백나무 세 그루에 붉은 동백이 만발한 걸 보고선 내 뜰이 사시사철 꽃이 끊이지 않게 되었구나 하고 료가 놀란 적도 있다.
우송이 밭일을 좋아하는 것처럼 침아는 꽃 가꾸기가 좋은가보다고 료는 생각했다. 고적한 산 생활에 그리 좋아하는 일 하나쯤 있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라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침아는 그것을 퍽 잘했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닐 텐데 때가 되면 가지를 잘라주고 포기를 나누어주고 추워지려 하면 줄기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우송이 밭에 뿌리곤 하는 두엄의 고약한 냄새 같은 걸로 료를 괴롭힌 일도 없다. 볕이 썩 잘 든다고 볼 수 없는 뜰인데도 싱싱하게 잘 자라는 화초들을 보면 이따금 신기했다. 침아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향기처럼 그 역시 타고난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그런 침아에게 익숙해졌는데도 매화꽃비에 넋을 놓는 침아의 모습이 료에겐 신선했다. 그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어서 료는 거듭 바람을 보냈다.
침아가 꽃을 건져 올려 무어라 중얼거리는 걸 보았지만, 미처 소리에 집중할 생각은 못했다. 아주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을 기회였는데.
작정하고 보낸 다음 바람에 침아가 하는 말은 똑똑히 들었다. 역시나 어린것답지 않은 말을 한다. 더구나 매화나무에게 말을 걸다니. 비웃어줄 만한 대목인데 료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가득 떨어진 꽃 사이를 헤엄치며 침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역시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
쾌활한 웃음일 뿐인데, 어쩐지 계속 이어지는 웃음소릴 들으며 헤엄치는 그 아일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저도 모르게 고삐를 꽉 잡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침아가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때, 잠수치고는 이상하리만큼 오래 나오지 않는다 싶어졌을 때, 섬뜩한 느낌과 함께 온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세우지에 무엇이 살더라?
거기에 인간을, 침아만 한 인간을 잡아먹을 만한 무언가가 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데도 순간 료는 그것도 잊고 무작정 살기를 흩뿌렸다. 비단옷 속에서 인간의 형태를 취한 살갗을 찢고 본연의 무언가가 돋아나려는 위화감을 느꼈다. 당장 세우지와의 사이에 있는 이 먼 거리를 좁히려면 료가…….
아래쪽 숲에 깃들어 있던 날개 달린 것들이 누구보다 먼저 위태로운 공기의 흐름을 깨닫고 일제히 달아났다. 간발의 차로 침아가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숨을 고르면서 그녀가 새들이 법석을 피우는 것을 이상히 여겼는지 료가 있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얼핏 눈이 마주쳤을 때 료는 저도 모르게 뒤로 말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우송이 세우지에 있는 침아를 알아보지 못하듯이 침아도 료를 보았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침아는 곧 방향을 바꾸어 헤엄쳐갔고, 이쪽에서는 우송이 기다리다 지쳐서 그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우송과 함께 돌아가면서, 어쩌면 일어났을지 모를 일을 상상하며 료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뒤따라오는 우송에게 공연히 상냥한 말이랍시고 던졌다.
“오래 살아라, 우송아. 머지않아 내가 네 짝도 찾아줄 테니까.”
“예엣? 아니 왜 주인님까지 그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송은 벌게진 얼굴로 쿵쿵 땅을 울리며 앞서서 내려갔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고 퉁명스레 덧붙였다.
“주인님이 일가를 이루신다면 저도 마땅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놈은 싫습니다.”
또 쿵쿵쿵 소리를 내며 내려가는 우송의 큼지막한 등을 보면서 료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전에 비해 저놈이 날 막 대하지 싶어 고개를 갸웃한다. 따지고 보면 침아 때문이다.
“……일가라.”
입 안에서 가만히 말을 굴려본다. 저녁을 들면서 화산 할머니가 휘의 혼사 건으로 왔다는 언질을 해주어 생각은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올해 휘의 혼사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료의 혼사는 아직 먼 훗날의 일이다. 솔직히 생각해 본 바도 없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바는 내겐 처도 후사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편이 두루 좋은 일이겠지.’
다시금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고소(苦笑)가 입가에 퍼졌다.
그러나 곧 그의 눈이 다른 생각으로 반짝 빛났다. 처는 맞지 않는다고 해도 정인마저 없으란 법은 없다. 다른 이들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료가 옆에 여자를 둔다면 우송은 그것이 일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송은 반은 인간. 인간들의 수명을 생각할 때 올해 마흔에 접어든 우송의 일은 료가 내심 걱정하던 차이다. 그런데 우송에게 어울리는 짝은 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밤 산책으로 몸에 앉은 먼지를 목욕으로 털어내고 돌아갔더니 이미 자리옷으로 갈아입은 침아가 발을 헤치고 나오며 그를 맞았다. ‘네 멋대로 이 밤에 세우지에 멱 감으러 가는 게 가당키나 해?’라고 야단치고 싶지만, 그걸 알게 된 제반 사정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료는 끙하고 속으로 삼켰다.
료가 옷 갈아입는 것을 시중드는 침아의 하얀 손을 보는 것만으로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물기만 겨우 없애고 온 수준의 료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빗질해 주느라 침아가 바로 뒤에 붙어 앉아 있는 것도 의식이 된다.
그러고 보니 아직 물이 찼을 텐데, 몸은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에 불쑥 료가 침아의 손을 붙잡았다.
“……?”
그의 손에 잡힌 침아의 손은 손가락 끝까지 따뜻했다. 곱게 다듬어진 얄따란 손톱이 투명한 붉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험한 일이라곤 해보지 않은 규중의 아씨처럼 희고 매끄러운 손이다.
그것이 료의 마음에 들었다.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있는 침아를 돌아보며 료가 거들먹거림을 담아 말했다.
“보아라. 이 고운 손이 누구 덕분인지 말이야.”
침아는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료는 그런 것 하나 바로 깨우치지 못하는 바보를 위해 침아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빗을 바닥에 놓게 하고선 그녀의 두 손을 모두 제 손 위에 올려놓고 가르쳤다.
“타고난 바탕을 그르치지 않고 곱게 지켜온 것이 누구 덕분인지 생각을 하란 말이야. 진작에 나 같은 주인을 만났다면 네 얼굴도 절대 그리되었을 리 없다고 생각지 않느냐?”
아하. 그러니 뼛속 깊이 감사하라 이 소린가. 침아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입술을 말아 올린다. 그 모습에 료가 발끈하여 침아의 두 손을 꽉 잡아 눌렀다.
“왜 그리 웃느냐? 내 말이 우습게 들리느냐? 나 아닌 다른 이를 만났어도 지금처럼 안락하게 지냈을 것이라 생각하나 보지?”
침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렇지 않다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딴 곳에 둔 채 웃고 있다.
불현듯 료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어졌다. 지난 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침아가 말하지 않는 것에도 익숙해져, 절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말해라, 왜 말을 안 하느냐, 하며 화냈다가 어르고 달랬다가 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말 따위 하지 않아도 소통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료가 체념하여 내린 스스로와의 타협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무와도 말을 안 하면 휘와도 엮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얼마쯤의 계산도 작용했다.
침아가 벙어리나 다름없어진 게 통했던지, 아니면 침아가 하마터면 세우지에서 죽을 뻔한 일의 원인에 질렸던지 하여간 침아를 저에게 달라던 휘의 말도 흐지부지되었다. 그러고는 전처럼 한집에 있어도 서로 얼굴 볼 일 없이 사는 이름만 형제로 돌아갔다. 물론 료가 바랐던 것처럼 침아가 휘와 엮일 일도 더는 없다.
그런데 침아가 말이 없으니 료가 그만큼 말이 많아졌다. ‘말 안 해봤자 너만 답답하지. 어디 한 번 언제까지 하나 두고 보자.’라고 별렀던 것도 무색하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가장 답답했던 것은 료였다. 침아는 스스로에게 굴레를 씌운 것처럼 굴면서 실은 료를 괴롭혀 온 것이다. 겁도 없이 료에게 너, 너 거리며 으름장을 놓은 것으로 모자라 뒤끝도 작렬했다.
“너 척부인 이야기를 알지?”
뜬금없는 료의 말에 침아의 눈이 료의 얼굴로 향했다. 당연히 기억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 몇 년 동안 료는 나름대로 침아에게 좋은 스승이었다. 글자를 가르치는 것을 뛰어넘어 배운 실력을 가늠하여 읽을 만한 서책도 준비해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 제가 독서할 때도 옆에 앉혀두고 그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듣게 했다. 그것은 『노자』나 『서경』, 『육도삼략』 같은 책부터 『삼국지』, 『산해경』 같은 흥미 위주의 것까지 망라하여 어찌 보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무엇이 침아의 흥미를 끌지 모르는 일이라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할 수 있다. 그 방법이 통했다. 침아는 역사서를 읽을 때면 특히 집중했고, 병서나 정치서를 볼 때에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흥미가 동하자 제 손으로 책도 찾아보게 되었다. 그가 지난해 봄에 준 『사기』는 책을 엮는 끈이 닳아 끊어져 새로 교체했을 정도로 열심히 보는 기색이다.
『사기』를 그리 열심히 보았으니 척부인을 모를 리 없다. 그녀는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후궁 중에서도 각별히 총애를 받았던 여자다. 유방 생전에 자신을 총애하는 황제에게 늘 눈물로 호소하여 자신의 아들이 황위를 잇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그 모든 노력도 보람 없이 황위는 황후인 여씨의 아들에게 돌아갔다. 여태후가 척부인에게 가진 한은 깊었다. 척부인이란 존재는, 변변치 못한 시골 정장 나부랭이에 불과했던 유방을 극력 보필해 한나라 황제라는 지존의 자리에 올린 조강지처를 뒷방 늙은이 신세로 밀어내고 유방 말년의 총애를 다 받은 것으로 모자라 심지어 제 어린 핏덩이를 황제로 삼을 욕심에 이미 세워져 있는 태자를 폐하려고 기를 써서 여태후의 피를 말렸던 것이다. 심지어 척부인의 시도는 몇 번인가 성공할 뻔도 하였다!
유방이 죽고 제 아들이 황제가 된 이후 여태후는 척부인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보복을 하였다. 눈엣가시였던 척부인의 아들을 황도로 불러들여 독살하고, 척부인은 온갖 고문 끝에 돼지우리에 던져 넣었다. 황제인 혜제가 어머니의 부름에 돼지우리를 구경하러 왔다가 발견한 ‘인간돼지’를 보고선 큰 충격을 받아 심중의 병을 얻어 요절할 정도로 그 보복은 독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침아가 써내려간 평은 이러했다. ‘한갓 첩에게 휘둘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한 조강지처를 그리 서럽게 핍박하고도 제 죽은 뒤 첩과 어린 아들의 신세를 근심하지 않은 유방이 천하에 다시없는 모진 자이다.’ 그래서 료가 인간들에게 통하는 여자의 칠거지악에 대한 개념을 들려주며 여태후도 잘한 건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침아는 코웃음만 쳤다. 료도 어차피 누군가를 감싸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너처럼 생각해서는 진짜 인간 세상에서는 살기가 매우 힘들 거라는 것만은 제대로 짚고 넘어갔다. 침아는 그 점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다시 인간들 속에서 살 일은 없을 거라고 여기는지.
하여간 그 척부인 이야기를 꺼내니 침아는 자못 궁금한 눈길을 던졌다. 료는 부러 고개를 바짝 기울여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되도 않는 벙어리 흉내를 낼 셈이라면, 어느 날 문득 널 진짜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겠다 이 소리다. 나는 거창하게 혀를 뽑지도 않을 거고, 눈을 인두로 지지지도 않을 거고, 귀에 쇳물을 붓지도 않을 거다. 나라면 훨씬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너, 그리되어도 날 원망 마라.”
빤히 료의 눈을 마주보던 침아가 가만히 시선을 떨구더니 어째선지 또 빙긋 웃었다. 료의 얼굴이 퉁퉁해졌다.
“해보는 소린 줄 알지? 과연 말뿐인지 어디 한 번 두고 보든가.”
독기를 뿜고 뱉어내는 소리에도 침아는 어깨를 조금 좁히고는 료가 잡고 있던 두 손을 빼 스르륵 옆으로 빠져나갔다. 다시 빗을 주워들어 료의 머리를 빗겨준다.
료는 내심 겁먹으라고 한 소리인데 전혀 통하지 않자 약이 올라서 속이 부글거렸다. 그런 기척이 씨근거리는 숨결을 통해 등 뒤에 있는 침아에게 훤히 보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며 제 할 일만 하고 말았을 텐데, 지금의 침아는 오른쪽 눈을 빛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후훗, 하고 웃었다.
“이쯤 되면 무서워서라도 제가 입을 여는 것이 순리겠지요?”
움찔하고 료가 놀랐다. 귓가에 들려온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과연 정말이었나 의심부터 한다.
“그렇지만 하필 척부인 이야기라니.”
앞으로 돌아온 침아가 반듯하게 가르마를 탄 료의 머리를 살펴보고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면서 슬쩍 흘겨보았다.
“제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그 지독한 예를 들어 을러대십니까? 나잇값을 좀 해보시지요, 주인님. 인간 세상이었다면 제 할아버지, 아니 증조할아버지가 됐을 수도 있는 연세잖아요.”
“증조할아버지라고?”
침아가 말문을 열었다는 반가움보다 그녀가 쏟아내는 단어에 료는 기막혀했다.
“아무리 인간들이 조혼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렇지 내가 어찌 네 증조부가 될 나이란 말이냐? 말을 하랬지 누가 그리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랬다고!”
“손이 귀한 집에서는 열 살을 넘기기 무섭게 장가를 들여보낸다던데요. 저야 들어서 아는 소리지요. 아홉 살, 열 살 된 꼬마 신랑에게 예닐곱 살이나 많은 신부가 시집을 간답니다. 주인님도 그런 경우였다고 하면…….”
“애초에 일어날 가능성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 가지고 말을 꺼내지마.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너희처럼 쉽게 태어나서 빨리 죽는 족속과는 다르단 말이야.”
“그럼 어렵게 태어나서 느리게 죽습니까?”
“그래. 말하자면.”
“그럼, 나중에 제가 할머니가 될 나이가 되어도 주인님은 지금처럼 홍안의 청년이실까요?”
그 천진한 질문에 료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인간은 정말 빨리 늙어 죽는다. 오죽하면 사람 나이 70이 예로부터 드물다는 시의 구절도 있다. 물론 그가 잘 보살펴 주면 침아도 무난히 70살까지는 살 것이다. 우송은 그 배는 더 살 것이고. 하지만 노화를 막아줄 비술은 알지 못한다. 더불어 침아의 말처럼 그녀가 70세가 될 무렵에도, 료는 지금처럼 홍안의 청년일 것이 틀림없다.
“피치 못할 액을 당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럴 테지.”
마지못한 듯 내뱉는 료의 말에 침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하긴 침아는 주인님의 정체는 무엇이냐 물어본 적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런 대화가 료는 당황스럽고 낯설었다.
“불쌍해라.”
침아가 갑자기 중얼거린 그 말도 그랬다. 어떤 의미에서 나온 말인지 료는 알 수가 없어 눈만 깜박였다.
가만히 놓고 있던 손을 들어 침아는 다시 이리저리 살펴보며 료의 머리를 정돈했다.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또 빗을 머리인데 오늘따라 유난하다고 생각하는 료의 눈을 침아가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주인님은 화만 안 내시면 참 아리따운 분이니까 나중에 생길 하인들에겐 처음부터 너무 무섭게 마세요. 우송 같은 하인이 또 생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 같은 아이가 와도 묻어버리라고 하진 마시라고요. 저랑은 달라서 아마 놀라 오줌을 지릴 걸요. 아하하하.”
쾌활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료는 방금 전에 들은 ‘불쌍해라’의 주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일찍 죽게 될 운명의 자기나 우송의 경우가 아니라 남겨질 료를 가엾게 여겼던 것이다.
“건방지게…….”
감히 누가 누구를 동정하는 거냐, 이 멍청아!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떠돌다 사라졌다. 화를 내는 것조차 잊게 만드는 보다 강렬한 감정이 료의 가슴을 차지했다.
‘덧없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갓 열여섯 살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올 것이다. 이 집에 올 때도 무척 크긴 했지만 그래도 앳된 얼굴이었던 우송이 해가 다르게 커가며 얼굴에 나이를 새겨가는 것을 보는 것은 료에게 얼마나 기이한 경험이었던가.
료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침아의 오른쪽 뺨을 감쌌다. 동그랗게 눈을 뜨는 모습이 맑고도 어여쁘다. 매화꽃 생각이 났다. 그의 생각지 못한 객기로 갑자기 나무를 떠나게 된 그 매화꽃들도 이렇게 덧없이 하얗고 보드라웠을 거다.
“나중에 다른 누가 온다고 해도 너 같은 녀석은 없겠지.”
“아아, 물론 더 어여쁘고 상냥한 이가 오겠지요.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죠?”
그렇게 대꾸한 침아가 반짝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그 전에 주인님도 혼사를 치르시겠네요. 그게 빠르든 늦든 잊지 마셔야 해요. 제게 새 이름을 붙여주셔야 하는 거.”
“응?”
“신부가 왔는데도 제가 베개 노릇을 할 수는 없잖아요. 아서요. 정말로 그건 사양입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침아를 보다가 료가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난 신부 따위 맞지 않는다.”
“흐응. 지금 그런 말씀을 하셔도.”
나중엔 생각이 달라질 거란 듯이 앙큼하게 웃었다.
료의 머릿속이 수런거렸다. 정오 무렵 화산 할머니가 오신 후로 느닷없는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 하루다. 휘의 혼사. 아무래도 좋다 그건. 우송의 일. 너무 늦기 전에 그 녀석에게 짝을 지어 주어야 할 텐데. 그 전에 내게 일가를 이루라며 화살을 돌렸지만.
우송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을 ‘일가’란 말이 료의 가슴에 무겁게 박혔던 것은 료 역시 나름대로 오래 마음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집이 갖고 싶었다. 오로지 내 편들로만 채운 내 집. 내 둥지.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식 분가로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오늘 생각해 보니 소실이라도 들여 나간다면 그것은 명분이 될 법하다. 갈 곳은 가려고만 들면 수없이 많을 것이다.
다만 소실이라고 하면 당장엔…….
거기에서 료의 사고가 잠시 그쳤다. 그때까지 무심결에 침아의 뺨을 쓰다듬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이상해하는 기색도 없이 침아는 담담히 그를 보고 있었다. 새삼스레 낯선 이라도 보듯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는 료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쳐갔다.
일단 부정했다. 인간이다.
곧 그 부정을 부정했다. 그래서? 어차피 후사를 얻을 것도 아닌데.
또 다른 부정. 어떤 일을 함께 해야 하는지 알잖아, 과연 이 아이를 상대로…….
“주인님?”
눈앞에서 부르는 소리도 자칫 못 듣고 지나칠 뻔했다. 퍼뜩 정신을 차렸더니 침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갑자기 험악한 표정이 되셨어요. 제가 뭐 잘못한 일이라도 생각나셨습니까?”
“……그런 일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생각하기도 벅차다.”
겸연쩍어 재빨리 손을 거두면서 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억울하다는 듯 침아가 따라 일어났다.
“뭐가 그리 일일이 많습니까?”
“시끄럽다. 넌 말문을 열기 무섭게 말대꾸냐?”
“그리 나오시면 도로 입 닫습니다. 이번엔 10년은 말 안 할 자신 있어요.”
“한 번만 더 그래라. 거꾸로 매달아놓고 말할 때까지 패줄 테다.”
“세상에 육십사 년이나 사신 분이 십육 년 살았다는 아이에게 그렇게 모진 일을. 부끄러운 줄 모르시고.”
그가 너른 방 안을 이리저리 걷는 것을 침아가 놓치지 않고 따라가니 벽에 비친 그림자도 쉴 새 없이 오락가락하며 춤을 추었다. 한동안 지치지도 않고 둘이서 그렇게 티격태격하였다. 시끄럽다고 야단치긴 하였으나 오랜만에 이리 말을 섞으며 노는 것이 전혀 싫지 않았다. 그래서 료는 부러 더 침아의 부아를 돋울 만한 말을 해가며 자꾸만 말을 끌어냈다. 정말로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새삼 생각했다. 인간이 아닌 새로 태어났다고 하면 얼마나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였을까.
어린 애들의 장난처럼 유치했던 대화는 침아가 하품을 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졸려서 더는 눈을 못 뜨고 있겠습니다.”
오래 쓰지 않았던 목이 아프다며 침아가 물을 마시고 먼저 제자리를 찾아 엎드려 누웠다. 보드라운 비단 베개에 왼뺨을 묻자마자 잠이 들어 버린다.
볼 때마다 기이한 그 속도에 오늘도 료는 헛웃음을 지었다. 다가가 그 옆에 앉아서 자는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빨리 잠들 뿐 아니라 푹 잔다. 자면서도 몇 번을 이유 없이 깨는 료와는 다르다.
료도 그만 잘 생각에 등잔의 심지를 끄고 돌아서다가, 또 한 번의 파격적인 발상을 했다. 해놓고는 곤혹스러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는데, 차분히 생각해 보니 썩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나는 자주 깨니까 나중에 제대로 자면 이 녀석은 모를 테고…….”
혼잣말에 수긍해 보면서 료는 이부자리로 들어왔다. 못내 겸연쩍어 한참을 주저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침아의 베개를 홱 잡아당겼다. 그였으면 백 번은 일어나고도 남았을 텐데 역시 침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쿨쿨 잤다.
그렇게 침아에게서 뺏어낸 베개의 남은 부분을 손으로 다지고 마침내 료가 거기에 머리를 뉘었다. 이것이 남녀가 한 베개를 베었다, 라는 상황인가. 일단 함께 눕는다는 첫 단계는 통과했다.
기이한 경험에 료의 눈이 초롱초롱해서 도저히 잘 것 같은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한 명을 위한 베개를 둘이 썼으니 자칫 머리가 옆으로 떨어질 판이다. 거기다 정말로 불편했다. 온기도 없고 딱딱하고. 침아의 등에 길이 든 료에게 아무리 값비싼 비단으로 덮인 베개라도 성에 찰 리 없다.
시험이고 뭐고 그만둘까 하면서 료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제야 베개 높이가 좀 편해졌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 보게 된 침아의 얼굴에……더 견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바짝 붙이자 침아의 어깨가 그의 가슴에 닿았다. 대번에 그 부분이 따뜻해진다. 료는 침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뒤쪽을 더듬거려서 이불을 찾아 끌어왔다. 얇고 가벼운 깃털이불이 둘의 몸을 덮었다. 그 안에서 료는 왼팔로 침아의 등을 가벼이 그러안았다. 감탄하고 말 것도 없다. 따뜻하다. 단순히 등에 머리를 올리고 누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그 온기에 홀려 한층 그녀에게 밀착하던 료의 입술에 침아의 촉촉한 숨결이 와 닿았다. 위험할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았지만 료는 바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숨결에서도 향기가 어른거렸다. 목덜미에서도 귓바퀴에서도. 항상 곁에 있어 이젠 무뎌진 줄 알았던 그녀의 체취가 원래 이리도 좋다는 것을 확인했다.
반신반의하며 시도해 본 일이었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정도가 아니라, 뭐라 해야 할까……. 료는 들뜨고 말았다. 들뜨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들뜬 것이란 것도 잘 몰랐지만 말이다.
그런 것치고 잠이 드는 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푹 잤다. 얼마나 푹 잤냐면, 자다가 그는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