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파안대소 (4/33)

3. 파안대소

산에는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퍽 추워졌구나 하고 침아가 생각할 무렵 첫눈이 내렸다. 동짓달에 접어들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그리고 동짓달 끄트머리 즈음 세우지의 물이 얼었다.

세우지(細雨池)는 저택의 북서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못의 이름이다. 주위를 둘러싼 갖가지 나무들로 풍광이 수려하면서도 물은 여름날 해가 한창일 무렵에도 손을 넣으면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놀란 건 침아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료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물에서 아무렇지 않게 멱을 감고는 했다.

침아가 이 집에 온 시일이 점점 쌓이면서 료가 이따금 침아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일도 생겼다. 멀리까지 가는 일은 없다. 세우지로 가는 일이 거의 대부분이고 전에 한 번 밤나무와 도토리나무가 군락을 이룬 숲에 데리고 간 것이 가장 멀리 간 일이었다. 그날 침아가 밤과 도토리를 모으는데 매우 열심이었던 것이 어째선지 료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 다시는 데려가 주지 않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지만 왜냐고 물어보는 서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이 세우지에 데려오는 일조차 귀찮아할지도 모른다. 물은 비록 이상하리만큼 차갑긴 하지만 저택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물이 얼어붙어 얼음지치기를 할 수 있게 된 지금은 더욱이 소중하다.

침아는 눈을 빛내면서 세우지 가장자리에 서서 료를 보고 있다. 옆에 서 있는 우송도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잔뜩 좁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세우지가 얼었다는 우송의 말에 침아에게 글을 가르치던 것도 뒷전으로 하고 당장 여기까지 온 료였다. 물론 침아도 기회는 이때다 하고 따라나섰다. 가장자리는 단단한 것 같지만 그래도 며칠 더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우송의 말에도 료는 직접 확인해 보겠다면서 못으로 내려갔다. 성큼성큼 겁도 없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우송의 미간은 자꾸만 좁혀지다가 마침내는 울상에 가까워졌다. 안절부절못하며 당장 불러 세우고 싶은 걸 참는 기색이 역력한 우송의 모습에 침아가 크게 외쳤다.

“너무 멀리 가셨어요, 주인님!”

그 목소리에 료가 돌아보더니 팔을 한 번 휙 내저었다. 더 가보겠다는 뜻이다.

침아는 우송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더 가겠다는데요? 라는 눈짓에 우송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다시 한 번 말해 봐.

“돌아오시면 안 돼요? 아니면 제가 따라가요?”

료가 홱 고개를 돌리더니 인상을 썼다. 잠깐 발을 쿵쿵 굴러보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뛰기도 했다. 발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썩 마뜩치 않다. 둘이 서 있을 만한 얼음 두께가 아니라고 생각한 료는 자꾸 불러대는 일행들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침아가 우송의 손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얼음 위로 내려서고 있었다. 두 팔을 펼치고 한 발 한 발 느릿하게 내딛는 폼이 겁을 집어먹은 걸로 보였다. 료에겐 생소한 광경이었다. 둘의 간격이 가까워져 갈수록 침아가 우스꽝스러우리만큼 조심하는 모습은 확실해졌다.

갑자기 심술궂은 생각에 사로잡힌 료가 느닷없이 발을 굴러 뛰어갔다. 침아를 밀어뜨릴 듯한 기세로 달려와 “왁!”하고 소리쳤다. 미는 시늉만 했지 정말로 밀 생각은 아니었는데 침아는 놀래서 도망치다가 단 두 걸음도 못 가서 콰당탕,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빙판 위에 넘어졌다. 훌륭한 대(大) 자가 되어서.

“으하하, 뭐냐, 이 녀석. 알고 보니 이만저만 몸이 둔한 게 아니잖아?”

배를 끌어안고 웃어대는 료의 모습에 우송도 피식피식 웃어댔다. 침아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도 그대로 대자가 되어 있었다. 곰 같은 체격만큼 실은 성미도 온순한 곰 같은 우송이 먼저 웃음을 그치고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료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봐.”

주의를 끄는 말을 던져보았다. 그래도 널브러진 그대로다.

“침아야?”

제가 지어놓고도 제대로 불러주는 일은 별로 없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제야 침아가 꿈틀하고 어깨를 움직이더니 주섬주섬 일어나 앉았다. 등 돌린 뒷모습을 통해 침아가 슥슥 손등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우나?’

료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우송을 쳐다보았다. 우송도 같은 뜻으로 료를 쳐다보았다. 우송이 팔을 흔들었다. ‘제 탓이 아닙니다, 주인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료는 그래도 눈을 부라리며 턱짓을 했다. ‘어떻게 좀 해. 나더러 어쩌라고?’ 우송은 더욱 열심히 팔과 함께 고개도 흔들었다. ‘저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있습니까?’

말도 없이 둘이 용케도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사이 침아가 바닥에 손을 딛고 일어섰다. 홱 뒤를 돌아보는 얼굴에서 유난히 이마가 새빨갛다.

“이마가 아파요.”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넘어질 때 난 요란한 소리의 상당 부분이 이마를 찧을 때 난 소리였던 모양이다. 료는 켕기는 바가 있어 괜히 더 우악스럽게 반응했다.

“네가 둔해서 그리된 것 아니냐. 누가 넘어지라던?”

“예. 제가 둔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말하다 말고 침아는 이마를 꾹 눌렀다. 그때 침아의 이마 중간에 볼록 튀어나온 혹이 료의 눈에 보였다. 벌써 시퍼런 멍이 생기려 하고 있다. 거기를 누르는 것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여 료의 미간이 좁혀졌다. 정작 침아는 이마를 손으로 가린 채 덤덤히 말을 이었다.

“머루가 있나 찾아보겠습니다.”

“머루?”

전혀 생각지 못한 말에 료는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예. 머루가 먹고 싶어요. 그러니까 잘 찾아보면…….”

“너 머리가 어떻게 됐느냐? 저기, 그리고 저기 쌓인 눈 안 보여? 지금 여기 못이 얼어붙었다고. 이런 판국에 어딜 가서 머루를 찾는단 말이냐?”

“찾아보면 손이 닿기 힘든 교묘한 곳에 한두 송이쯤 남아 있을 줄 어찌 압니까.”

“머루가 무슨 홍시라도 되느냐? 이 산에 온전히 남아 있는 머루가 한 알이라도 있다면 내가…….”

역정을 내다 말고 료의 말이 뚝 끊겼다. 어지간하면 침아가 있는 자리에선 입도 뻥긋 안 하는 우송이 대신 목소리를 냈다.

“저것이 아무래도 머릿속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

료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침아는 이마를 누르고 있던 손을 내려 코를 손등으로 닦는 중이다. 어쩐지 색이 말간 피가 자꾸만 흘러나와서 소맷자락이 흥건히 젖고 있다.

“머루가 먹고 싶은데……. 안 멈추네. 손을 차갑게 해볼까.”

마치 남의 일처럼 무심한 얼굴로 침아는 몸을 굽혀 얼음에 손을 대본다. 그러는 사이에도 빙판 위로 뚝뚝 핏방울이 떨어졌다.

료가 성큼 다가가서 그 피를 보았다. 역시 진한 색이 아니다. 묽다. 뭔가 좋지 않은 징조라고 판단한 료의 눈이 크게 떠진 채 굳어졌다.

“어쩌지?”

그의 맥없는 중얼거림에 침아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피를 멈추게 하는 주문은 모르십니까? 이럴 때 쓰면 좋겠는데요.”

“그런 것 따위 몰라!”

“그렇게 크게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어쩐지 귀까지 아픕니다만.”

아주 약간 눈을 찡그리며 대답하곤 다시 빙판에 댄 두 손을 내려다보는 침아의 앞에 료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방금 전에 침아가 한 말에서 또 덜컥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확인해 보려고 머리카락에 가려지지 않은 침아의 오른쪽 귀를 본 료의 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코와 마찬가지로 귀에서도 한 줄기 말간 피가 흐르고 있다. 료는 다급한 손길로 침아의 얼굴을 움켜쥐며 자신을 보게 했다. 눈빛을 확인했다. 어딘가 몽롱하게 흐려진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침아가 중얼거렸다.

“야단치실 요량이시라면 나중에 한꺼번에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저……넘어졌을 뿐인데……?”

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목전에서 일어났던 일은 침아가 허우적거리다 빙판에 넘어진 장난 같은 일일 뿐이었다. 우송은 저 머리로 몇 백 년 된 나무도 박치기를 하여 쓰러트리고도 멀쩡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빙판에 넘어져 머리를 부딪치더니, 십중팔구 죽을 증세를 보인다. 저 화타라도 된다면 머리에 구멍이라도 내어 치료할 엄두라도 낸다 치지만 료는 다만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래. 우송과는 다르다. 우송은 반은 인간이지만 벼락을 맞아도 한 방으로는 죽지 않을 놈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전에 비를 맞고서도 엿새 가량 앓아누워서 맥을 못 추었다. 인간은 쉽게 죽는다고 한 말이 이런 뜻이었다면, 애초에 이 아이를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못 하게 했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다. 그러는 사이 침아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인님 손이 따뜻할 때가 다 있네요. 어쩐지 졸려.”

“내 손이 따뜻해?”

물어보는 료의 목소리가 바짝 가라앉아 있다. 침아가 얼핏 웃었다.

“그렇다니까요. 별일이야…….”

몽롱한 빛조차 수그러들면서 침아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료는 무작정 침아의 뺨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윽박질렀다.

“야, 정신 차려, 야, 야! 눈 감지마! 명령이다, 눈 떠! 죽고 싶으냐? 눈 뜨라고, 이 멍청아!”

그 행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침아가 다시 눈을 뜨긴 했다. 침아의 눈이 료 너머의 하늘로 향했다. 흐릿한 눈이 한순간 밝게 빛났다.

“아! 어쩜……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새가 있을까…….”

또 헛소리인가 싶어 얼굴이 일그러지는 료의 귀에 다급한 우송의 말이 들려왔다.

“주인님, 저기에 큰도련님이……!”

“휘?”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돌린 료의 눈에 하늘의 해를 가리며 공중을 선회하는 푸른 매가 보였다. 매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색도, 크기도 전혀 다르다. 등으로 쏟아지는 햇빛과 아래의 빙판이 반사해 내는 햇빛을 받는 온몸이 눈부신 푸르름으로 반짝거렸다. 저런 새는 없다. 적어도 인간들이 보는 세계에는.

료와 우송이 열심히 쳐다보는 가운데 푸른 매는 그들에게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가까워진 매의 눈이 료와 료 가까이에 있는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새의 눈빛이 호기심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매몰차게 외면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을 료가 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이겨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매의 탐색 비행이 길어지자 안달이 나서 소리쳤다.

“구경만 말고 도와주세요!”

“어?”

매의 부리에서 여느 새에겐 불가능한 감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부딪쳤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안 좋아 보여요. 아까부터……야, 야, 정신 차려! 눈 감지 말라고 했잖아!”

매를 쳐다보느라 눈을 뗀 사이 어느새 침아는 눈을 감아버렸다. 축 늘어져서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기만 하는 침아를 보는 료의 눈빛이 당황을 넘어 절박으로 치달았다. 료가 황급히 매를 돌아보았다.

“도와달라고요! 제 말 듣고 계신 겁니까?”

품 안의 침아만 없으면 당장 매에게 달려들고 말겠다는 듯이 소리를 질러대는 료를 보면서 매가 마침내 바닥에 내려앉았다. 새의 한 발이 바닥에 닿는다 싶은 순간 검푸른 아지랑이가 일면서 매의 전신을 감쌌다. 그 연기가 언제 그랬냐 싶게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을 때 거기엔 푸른 비단옷을 걸친 단아한 귀공자가 서 있었다.

“료. 몇 달 안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믿을 수 없다는 듯 깊게 쌍꺼풀이 진 두 눈을 깜박거리며 휘가 웃었다.

“나한테 네가 도와달라고 했지, 분명?”

료는 다급한 마음에 신경이 곤두설 대로 서 있었지만, 어차피 눈앞에 있는 자의 말을 중도에 멈추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료가 절체절명이든 말든, 휘의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은 자,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야말로 지금 료에게 필요한 자라는 걸 모를 만큼 어리지 않았다.

휘가 다가온다.

료는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제가 그리 말했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형님.”

확실히 침아는 인간 세상이었다고 하면 몇 시간, 혹은 며칠 안에 조용히 죽었을 상황이었다. 고작 빙판에 넘어진 일로 그 정도로 머리를 다친 것은 운이 없었지만, 거기에 휘가 나타난 걸 보면 운이 몹시 좋았다. 우습게 들리는 말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휘의 선심은 베풀어지는 경우가 한정되어 있다.

사혈을 남김없이 뽑아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종류의 일은 휘에겐 별 수고로움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일이었다. 살아 있는 것을 상대로 한 그의 주문은 강력했다. 생기(生氣)가 없는 것밖에 다루지 못하는 료와는 그 차원이 달랐다.

“평소에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갓난아기 정도의 체력만 있어도 하룻밤 자고 나면 멀쩡히 깨어날 거다. 이걸 마시면 한바탕 푹 쉬고 난 것처럼 기분도 좋아질 거고.”

치료는 주술에 가까운 것이었어도 약을 제조하는 것은 성실했다. 료가 심심파적 삼아 꾸며둔 약실을 제 안방처럼 오가며 휘는 탕약을 만들었고 그것을 손수 환자에게 떠 먹여주었다.

“좋은 의원은 마지막까지 환자를 돌봐주는 거지. 성심을 다하여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몹시 고상한 일이야. 그리하여 보살핌을 받는 자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는 걸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말이지. 하늘 아래 사는 생물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일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다 문득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몇 마디 덧붙였다.

“하긴 가장 가치 있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이윽고 휘가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려다가 침아의 왼쪽 머리카락을 슥 손으로 걷어 올렸다. 백랍처럼 가라앉은 안색 속에서 불빛을 받아 유난히 또렷한 울퉁불퉁한 흉터 자국이 몹시 흉하다. 휘는 쯧쯧 혀를 찼다.

“없애주랴?”

그 조용한 물음에 이제껏 지척에 있으면서도 말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있던 료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당연히 없앨 수 있지. 아, 물론 여기서 없앤다는 것은 눈을 의식한 말이다. 거기에 있어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쯤이야 간단해. 만지기 전까지는 절대 모를 거라고 장담하지.”

료는 언제 반응했냐 싶게 무표정해졌다. 그래도 휘는 떠보듯이 물었다.

“어렵지 않아. 곁에 두는 아이가 어여쁜 것이 싫을 턱은 없을 것 같은데?”

“사양하겠습니다.”

어렵게 료의 입이 열렸다.

“본인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저도 이 아이의 이 모습에 불만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불만이 없다?”

료의 말을 음미하듯이 중얼거린 휘가 부러 천천히 침아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혹시 이 모습이 마음에 든 건 아니고? 네 괴팍한 심미안을 놀릴 생각은 없다만.”

무표정한 료의 얼굴에서도 얼굴 근육이 팽팽히 긴장하는 것이 휘에게는 또렷이 보였다. 휘는 어디 이래도 네가 가만히 있나 보자, 하는 뜻으로 손을 펼쳐 침아의 왼쪽 얼굴을 덮었다.

“보렴. 흉터가 사라지니 이렇게나 귀여운 얼굴이야. 여기서 이쪽 얼굴까지 깨끗해진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면서 휘가 고개를 숙여 침아의 왼쪽 얼굴을 덮은 손 위에 대고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십시오!”

료가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 몸을 들썩거리자 휘는 장난스런 얼굴로 냉큼 손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녀석, 유별나게도 구는구나. 호의를 베풀면 좀 받을 줄 알아야지.”

“제가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걸 해주시면서 호의라는 억지를 쓰지 마십시오.”

“흥. 하여간 괴팍하긴.”

정색을 하고 싫은 내색을 하는 료를 보는 것도 이젠 지루하다 싶어 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만 모처럼 생긴 건수를 이렇게 흐지부지 버릴 휘는 아니었다. 하녀가 들고 있던 대야의 물에 손을 적시면서 그가 물었다.

“그래서 내게 무엇으로 답할 참이지?”

료의 경직된 시선이 휘의 옆얼굴에 와 머물렀다. 휘는 보지 않고서도 그 시선을 즐기며 말했다.

“얼굴을 고쳐주겠다는 것은 내 자발적인 호의였으나 네 녀석이 거절했지. 그것과 별개로 내가 저 인간 아이를 치료한 것은 네 녀석이 바란 호의가 아니냐? 응당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있을 걸로 생각한다만?”

“길게 끌지 마시고 바라는 게 있다면 말씀하시지요.”

료의 대답은 냉담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버는 듯 휘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공들여 씻었다. 그러다 언뜻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료를 돌아보았다.

“저걸 내게 주련?”

료는 잠시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하여 눈을 깜박거렸다. 휘가 웃었다.

“그냥 두어봤자 며칠 못 살았을 게다. 내 덕에 살았으니 죽은 걸로 치고 그냥 주렴. 대신 내가 쓸 만한 애를 두엇 보내주지.”

“……저런 걸 무엇에 쓰시려 하십니까? 보시다시피, 명백히 하자가 있는 물건이 아닙니까?”

“아. 가엾지 않으냐.”

“가엾다고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휘가 료에게 다가왔다.

“인간은 말이지, 암컷이 수컷에게 잘 보이려고 스스로를 꾸미기 마련이란다. 암컷이란 이유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야 귀하게 대접받는 족속이야. 저 아이는 그런 면에서 아쉽게 되지 않았느냐. 저래서야 평생 가도 스스로가 아름답다는 생각 한 번 할 일이 없을 테지. 너는 본인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말했지만, 만약 고칠 수 있다고 하면 저 아이가 싫다고 할 것 같으냐?”

료는 침묵했다. 시선은 무릎 위에 주먹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휘가 잠시 뜸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억지로 빼앗아 올 생각은 없으니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렴.”

고집스럽게 침묵하면서 자신의 손만 쳐다보는 료를 보는 휘의 눈에 미소가 넘실거렸다. 명백한 심술이었다.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가져가도 무방하다는 뜻이렷다?”

그렇게 물어도 료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온몸으로 싫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임에도 휘의 심술은 끝나지 않았다.

“아. 그럼 주인은 동의했으니 저 아이의 뜻만 얻으면 되겠군.”

그때서야 고개를 든 료가 휘를 응시했다. 휘는 수건을 하녀에게 넘겨주며 짐짓 상냥한 눈빛으로 침아를 돌아보았다.

“어려도 암컷은 암컷이니까. 무작정 몸만 취하여 내 것이니 뭐니 하는 건 참으로 볼품없는 짓이야. 암컷이란 한 번 마음을 허락하면 무엇이든 다 주는 연약한 존재란다. 참으로 가련하기도 하지?”

그렇게 말하고 휘는 료의 침소를 나갔다.

휘가 오래 비워 둔 자신의 거소로 들어섰을 때 기다렸다는 것처럼 여러 미녀들이 달려와 그의 팔에 휘늘어지듯 감겨들었다. 몇 달 만에 이 고적한 저택에 화사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들의 분향과 낭랑한 웃음소리가 모이자 그 자체로 바깥의 계절과 무관한 영원한 봄이 찾아온 듯싶었다. 휘의 주변에 모여 앉아 그의 목욕시중을 들며 웃음꽃을 피운 여자들 대다수는 침아가 이 저택에 오고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다.

“결국 화산 할머니가 가져오셨다는 것뿐이냐? 아홉 달 전이면 꽤 됐는데 료의 어여쁜 꼬마에 대해 아는 아이가 하나도 없다니 유감이구나.”

휘의 투덜거림에 그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곱게 눈을 흘겼다.

“어머나. 그런 흉측한 것을 보고 어여쁘다 하시니 저희야말로 유감천만입니다.”

“흉측하다니. 너 그 꼬마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아니냐?”

술을 따라주는 여자의 손목을 살며시 희롱하며 휘가 물었다. 여자는 잔뜩 꾸며낸 교태로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새로 온 아이가 있다기에 저희들끼리 발 너머로 충분히 내다보았습니다. 물론 볼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어찌 그런 얼굴을 보고 잊을까요.”

“바람이 불어서 머리카락이 날릴 때 본 왼쪽 얼굴은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지요.”

“저라면 그런 얼굴로 살 바에야 진즉에 강물에 뛰어들고 말았을 텐데요.”

“인간들은 어찌 그런 꼴로도 살아갈 수 있는지.”

여자의 말에 이어지는 다른 여자들의 품평은 하나같이 침아의 보기 흉한 왼쪽 얼굴에 대한 것뿐이었다. 휘는 느긋하게 그들의 말을 들어주다가 술을 넘기고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보기만 했다면 모르겠지. 그 꼬마의 오른쪽 얼굴은 참으로 훌륭하단다. 게다가 그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데, 그걸 알아챈 아이가 없다니.”

이번엔 빈 잔을 왼쪽에 있는 여자에게 내밀었다. 그 잔에 또 다른 미녀가 술을 채워주는 사이 여자들은 휘가 꺼낸 말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안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했었어요. 그 아이가 주변으로 올 때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향이 나서. 저 꼬마가 값비싼 향낭을 가진 게 아닐까 저희끼리 말한 적도 있어요.”

“그 향을 조합해 보려고 머리를 모은 적도 있었답니다.”

“애써봤는데 잘 안 되었지요.”

“정향하고 해당화는 틀림없는데. 다른 것에서 뭔가 우리가 생각 못한 게 있을 거야.”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향료의 배합 쪽으로 흘러갔다. 휘는 묘한 미소를 지을 뿐 사실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 꼬마는 몸 자체가 꽃이었는걸.’

새파란 유리 술잔을 어루만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는 휘의 눈이 기억을 더듬으며 아련해졌다. 약을 먹이면서 잡았던 침아의 얼굴 감촉. 인간의 어린것의 살갗은 본디 좋은 감촉을 준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꼬마는 특별했다. 이미 암컷으로서의 징후가 드러나는 나이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 꼬마의 살갗은 흠잡을 것이 전혀 없었다.

‘진짜 절세가인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 절정기라야 길어봤자 이삼 년이었겠지만.’

왼쪽 얼굴만 그리되지 않았다면. 아쉬워서 저절로 휘는 입맛을 다셨다. 절세가인. 인간들이 걸핏하면 붙여대는 그 과한 호칭에 어울리는 진짜를 휘는 보고 싶었다. 휘는 아름다운 것에 탐닉하는 취향이 있어 미인에 대한 소문을 지나쳐 본 적이 없다. 눈이 멀 만큼 아름다운 이가 있다 하면 천 리도 마다치 않고 찾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간 곳에 흔한 미녀는 있었을지 몰라도, 세상에 견줄 이 없는 미인은 존재치 않았다.

그리 아름다운 이는 하늘이 내는 것이라 했는데. 아직 하늘은 세상에 진짜를 보여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꼬마의 얼굴에 남아버린 커다란 흉터를 떠올려보며 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을 생각하는 것도 시들해졌다. 결국 그의 뇌리에 남는 것은 분명한 흠뿐이다. 설사 그것이 고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해도…….

“음?”

다시 찰랑거리도록 술이 담긴 잔을 입가로 가져오던 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푸른 유리잔을 눈높이까지 들여 올려 지그시 응시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흠이 생겼다.”

“예? 설마요. 얼마나 조심히 다루었는데…….”

서역에서 들여온 푸른 유리잔은 휘가 유난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었다. 소홀히 다루지도 않았고, 쓸 일이 없을 때도 이따금 꺼내 먼지를 닦아내며 정성스레 보관한 것이다. 휘의 말에 여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어 무슨 흠이 생겼다는 건지 찾아보려 하였으니 도무지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흠집을 발견한 휘의 눈에 그것은 태산만 한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그는 잔을 멀리 떼어놓으려는 듯 손을 옆으로 뻗었다. 누군가 그것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다음 순간 휘의 손안에서 잔은 파삭 소리를 내며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놀라서 탄성을 내뱉었다.

“자. 단면이 날카로우니까 손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렴.”

손을 내민 여자에게 칼로 잘라낸 듯 사등분이 난 유리잔을 넘겨주며 휘는 상냥하게 말했다. 여자들은 그 미소에 녹아들 것처럼 웃으면서도 조각나버린 유리잔을 보며 그렇게 하실 바엔 자기에게나 주시지 하면서 아까워하는 눈빛을 던졌다.

“새로 구하러 갈 거야. 돌아올 때 너희들에게도 하나씩 선물해 주지.”

휘가 다독이는 뜻으로 가볍게 말했다.

“어머나, 반가운 말씀을. 하지만 이제 막 돌아오셨는데 다시 떠나시는 건 싫습니다.”

“휘 님이 계시지 않으면 이곳에 즐거운 일 따위는 전혀 없는 걸요.”

“봄이면 또 훌쩍 떠나실 거면서 겨울조차 나지 않으신다면.”

토라져서, 또는 애원하면서, 또는 서운해 하며 여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중 한 명 운 좋은 이의 뺨을 만져주며 휘가 말했다.

“걱정들 말려무나. 쉬려고 집에 돌아왔는데 벌써 떠나기야 하겠느냐? 너희들이 즐겁게 해준다면 생각보다 오래 머물 수도 있지.”

다시금 웃음꽃이 피어오른 여자들을 바라보다가 휘는 느긋하게 머리를 뒤로 넘겼다. 약간 식어버린 목욕물에 누군가가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섞어주면서 화악 김이 피어올랐다. 휘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재미있을지에 달렸지. 새로 생긴 구경거리가…….’

새로 생긴 구경거리. 뇌리에 아른거리던 침아의 얼굴을 단박에 덮고 나선 다른 얼굴이 있다. 료의 얼굴이다.

‘그 녀석, 재미있게 굴었어.’

씩 웃었다. 그의 생각은 단박에 료의 침소로 향했다.

료는 휘가 나간 뒤에도 자세를 바꾸는 일 없이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잠이 들었나 싶을 정도로 미동조차 없는 자세였으나 분명히 눈은 뜨고 있다. 눈꺼풀은 깜박거리면서도 눈동자는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식사를 어찌하시겠느냐면서 하녀가 한 번 들어왔었으나 손짓만으로 물리쳤다. 해가 떨어지고 어둑해지자 방에 불을 피우러 다른 하녀가 들어왔다 나가면서 우송이 누대 아래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료는 마지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가기 전에 침아를 한 번 돌아보았다. 아까 휘가 건드린 대로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미간을 좁히며 돌아와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러다 불현듯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양두구육이란 말을 아느냐?”

잠든 침아가 들을 리가 없건만 그렇게 물었다. 그러고서 자문자답했다.

“그자의 정은 변덕스럽고 덧없는 것이다. 늘어놓는 소리는 그럴싸하고 미소는 꿀과 같은지 몰라도 속에는 독이 있느니라.”

거기서 잠깐 말을 끊었다가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너도 암컷이니 그자가 손 내밀면 좋다고 가버릴 터이지.”

손을 거두고 료는 큰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시틋했던 기분은 점차 분노에 가까운 것으로 변하여 기다리던 우송이 그를 보고선 무슨 일이 있으시냐고 물었을 정도다.

“살기가 느껴집니다, 주인님. 이대로 사냥에 나가보았자 헛수고만 할 텐데요.”

“시끄럽다. 아둔하고 늙어빠진 것이라도 잡아오면 될 것 아냐.”

그런 기세로 사냥을 가보았지만 우송이 경고했던 대로 헛수고만 한 셈이 되었다. 우송이 제아무리 능숙한 사냥꾼이라고 해도 대놓고 살기를 뿜어대는 맹수의 접근에 십 리 밖으로 도망갈 기세로 피해 버리는 사냥감에 창을 던질 재주는 없었다. 료의 활은 화살을 먹일 일조차 없이 잠자고 있었다.

수백 번은 돌아다녀서 그 지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숲이었지만 이 숲이 이렇게 고요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아무리 큰 비가 오고 큰 눈이 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사냥을 단념한 료가 활과 화살집을 우송에게 던졌다. 대신 료는 나뭇잎 틈으로 드문드문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말 등에 누워서 구경했다. 우송에게 따달라고 한 나뭇잎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우송의 물음에 시들한 대꾸 한 마디 던져놓고 료는 풀피리를 부는데 전념했다. 그러다 툭 질문 하나를 던졌다.

“명나라에 갈까, 우송아?”

“명나라요? 좋습지요.”

“명나라 서쪽 어딘가에는 까만 인간들이 산다 하더라. 아, 코끼리라는 큰 동물을 말처럼 타는 곳도 있다더라. 코끼리라면 아마 널 태우고도 끄떡없을 거야.”

“제가 탈 수 있는 말이 생긴단 말입니까?”

“살 수 있다면 사 주지. 갈래?”

“좋습지요.”

“아라사는 어떠냐?”

“아라사입니까. 좋습지요.”

“넌 뭐 생각도 해보지 않고 다 좋다 하느냐?”

면박과 함께 료가 풀피리를 집어던지자 우송은 옆으로 지나가는 나무에 달린 잎사귀를 따서 후후 불어 료에게 주면서 대꾸했다.

“어차피 주인님이 가시면 제가 가는 거 아닙니까. 어딜 가든 갈 텐데, 좋다고 하고 가는 게 좋습지요.”

“허, 그래. 너 참 단순해서 좋구나.”

료는 실소를 하고는 나뭇잎을 잎에 물고 질겅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빛이 오락가락했다. 뒤따라가던 우송도 덩달아 달을 올려다보며 걷고 있는데 료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고 싶다는 소리도 말뿐이지. 아직도 내게는 저 하늘이 멀고도 멀어.”

우송은 작은 주인을 쳐다보았다. 전에 없이 시무룩한 기색이 암만해도 여느 때와 다르다. 달고 있긴 하지만 본연의 용도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머리를 이용해서 우송은 생각이란 걸 해본다.

“꼬마가 다친 곳이 많이 나쁩니까?”

화제의 방향은 제대로 짚었다. 우송은 제 주인이 안색이 바뀔 정도로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았다. 료가 일족 중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이라 할 수 있는 화산 노파가 준 선물이라 마음을 쓰는 줄로만 여겼는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다. 심지어 휘에게 도와달라고 간청까지 했다.

“죽는답니까?”

료가 대답하지 않자 우송이 다시 물었다.

료는 멍하니 하늘에 시선을 던진 채로 있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죽으라고 내버려둘 걸. 내가 왜 그랬을까.”

우송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 순간 달이 구름 사이로 들어가면서 료의 얼굴도 어둠에 가려졌다. 구름이 한참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더니만 종일토록 뿌연 구름만 가득할 뿐 해가 나지 않았다. 어두워지면서부터는 빗방울이 하나 둘 흩뿌리기 시작했다.

날이 이래서야 밤 산책하러 가시지 않겠지 하고 저택 뒤꼍의 광대한 밭에서 괭이질을 하고 있던 우송은 말울음 소리와 함께 료가 모습을 드러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괭이를 내던지고 따라나섰다.

“꼬마가 잔소리하지 않습니까?”

잠깐 우송은 침아가 다친 일을 잊어버리고 물었다.

비 오는 밤에 산책―본디 사냥이라 했지만 침아가 밤 산책이라 명명한 뒤로 그것은 산책이 되었다―을 나가지 않게 된 것은 전에 침아가 빗속에서 그들을 기다리다 앓아누웠던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돼서이다.

그 일 이후 한 번 더 비 오는 날에 사냥을 나갔던 일이 있다. 나가는 그들을 배웅하면서 침아는 내내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날이 궂은 날엔 산책은 삼가시라 말렸지만 료가 듣지 않았던 것이다. 다녀온 뒤 우송은 멀쩡했으나 료가 한 이틀 미열이 있었다. 료가 깨끗이 나은 뒤로도 침아는 내리 열흘을 입을 다물고 벙어리 흉내를 냈다. 원래의 료였다면 감히 뉘 앞에서 아랫것이 토라져서 시위를 하느냐며 경을 쳤겠지만 그래도 전처럼 다짜고짜 손찌검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몇 번 윽박질러보았지만 침아가 끈질기게 입을 다물고 있자 어디,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면서 코웃음 치며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흘이 닷새가 되고 닷새가 이레가 되자 료는 마침내 분통을 터뜨렸고 기어이 매질까지 했지만 침아는 그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아가 말문을 닫은 지 열흘째 되던 날 저녁에 비가 왔다. 이날 료는 바깥 걸음을 하지 않고 이슥해지도록 마루에 앉아 비파를 안고서 엉터리 가락을 연주했다. 그러다 옆에서 글자 공부를 하고 있던 침아에게 기러기발을 내던졌다.

“내 이리 네 말을 들어주었건만 네 녀석은 아직도 부루퉁해서 입이 나와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

같은 마루의 한쪽에 앉아서 칡뿌리를 자르고 있던 우송은 말로는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실은 그만 말 좀 하라고 침아에게 사정을 하는 료의 모습을 보고 눈을 끔벅거렸다.

침아는 료가 던진 기러기발을 주워 옷소매로 닦으면서 료를 힐긋 곁눈으로 보았다. 침아와 료 둘이 눈싸움을 벌였다. 술대를 쥔 료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고 저러다 침아 녀석 또 맞지 하고 우송이 생각했는데 료가 발끈하여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침아의 새침한 목소리가 마루 위에 퍼졌다.

“오늘만 해보시는 일인 줄 제가 어찌 압니까?”

료가 우송을 돌아보았다. 너도 저 목소리 들었지 하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 하지만 이내 침아를 돌아보면서는 고성을 냈다.

“나가고 마는 것은 모두 내 마음이지, 그걸 너 따위가 간섭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런 일로 꽁해서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또 그럴 테냐?”

“그럼 제가 입을 열든 말든 그건 제 마음이지, 어찌 주인님이 간섭하십니까? 말을 안 했다 뿐이지 제가 주인님이 하란 일을 안 했습니까, 하지 말란 일을 했습니까?”

“내가 벙어리 흉내 내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전 벙어리 흉내를 낸 적이 없습니다. 말하기 싫어서 말을 안 한 거지 어찌 제가 벙어리 흉내를 냈다고 그러십니까?”

“에잇, 이 녀석 주인이 하는 말에 사사건건 말대꾸나 하고! 하여간 건방지기 짝이 없어!”

계집이랑 사내가 말싸움을 해보았자 사내가 이길 리가 없다는 것쯤은 우송도 아는 일인데 료는 그것 좀 밀린다고 씩씩대면서 냅다 벼루를 걷어찼다. 근간에 매질을 해서 생긴 침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나름 신경을 써서 벼루를 찬 건데 벼루가 데굴데굴 구르며 침아는 먹물을 뒤집어썼다.

처음엔 슬금슬금 구경하다가 마침내 손 놀리는 것도 잊고 입을 헤벌리고 구경하는 우송의 눈에 침아가 료를 쏘아보는 것이 들어왔다. 먹물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지만 눈에 자글자글하게 고인 눈물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크, 하고 저도 모르게 우송이 눈을 찡그렸다. 료도 그 비슷한 얼굴이었다.

침아는 소매로 얼굴을 닦다가 까만 먹물이 묻어나자 벌떡 일어나 마루 끝으로 달려가 마당으로 내려섰다. 료와 우송이 멀뚱히 쳐다보는 가운데 침아는 신도 신지 않고 마당으로 걸어 나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일어날 생각도 안 하는 침아를 보다 못한 료가 물었다.

“벌 받는 중입니다. 말하면 말대꾸한다고 화내시고 말 안 하면 벙어리 흉내 낸다고 화내시니 이 아둔한 것은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비 맞고 콱 죽어버리렵니다.”

좌락좌락 퍼붓는 빗소리에 뒤질세라 큰소리로 대꾸하는 침아는 옹골지기 짝이 없었다.

“하! 기도 안 차서! 누가 죽겠다고 하면 무서워서 벌벌 떨 줄 아느냐?”

료 역시 대꾸는 다부지게 했다. 그러나 돌아서서 가는 시늉을 하다 금세 돌아와 길길이 뛰면서 화를 내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어디서 감히 주인한테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야료를 부리느냐? 당장 일어나, 일어나지 못해!”

침아는 땅이 침상이요 하늘이 이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감고 버텼고, 료는 마루에서 소리 지르면서 핏대를 세우다가 아무래도 통하지 않자 우송을 부렸다. 아무리 버티려고 애써봤자 우송의 손에 허리를 잡힌 침아는 범에게 물린 하룻강아지였다. 우송이 침아를 마루 위에 던져놓자 침아가 이번에는 대청 기둥에 머리를 찧으면서 죽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료와 우송은 어안이 벙벙해서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고 말았다.

하여간 그 뒤로 비 오는 밤에 나가는 일은 없어졌다.

돌이켜보면 굉장한 일이었다. 료도 결코 성격이 좋다는 말은 할 수 없는데, 그런 료가 결국 침아의 패악질에 두 손 들고 만 것이지 않은가. 그 일로 침아에 대한 우송의 시각도 약간 바뀌었다.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지만 지내면서 보니 순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성질을 부릴 때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우송은 비 오는 날인데도 나타난 료를 보고 무심결에 침아가 알면 좋은 낯을 할 리 없는데, 하고 생각한 것이다. 돌아온 료의 대답은 신경질적이었다.

“그 녀석이라면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

“아. 그랬습지요.”

뒤늦게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우송은 머리를 긁적였다. 도롱이를 걸쳤음에도 차가운 부슬비는 슬그머니 파고들어왔지만 한껏 일을 한 끝이기도 하고 해서 우송의 주변으로 이글이글 김이 피어올랐다. 우송의 걱정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 작은 주인 쪽이었다. 삿갓이며 우장은 일단 차려입었으나 드러난 얼굴이 벌써 잿빛에 가깝다. 숨을 내쉴 때마다 흰 김이 피어오르는 파리한 입술을 보고 우송은 그 꼬마는 어째서 아직도 자고 있나 궁금해졌다.

“우리가 나간 사이에 꼬마가 깨면 어쩝니까?”

“그러건 말건.”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료는 앞만 보며 갔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료가 틀림없이 화를 낼 거라는 것을 우송은 잘 알았다. 료도 더는 말 붙일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그때까지 빠르게 걷게 하던 말을 달리게끔 했다.

우송은 료를 따라가면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달빛 없는 빗속에 잠긴 저택이 신기루인 양 뿌옇게 보였다.

침아는 처마 끝을 타고 똑똑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깨어났다. 한동안은 멍하니 그 단조로운 소리만이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러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시야가 트였다.

잠시 후 일어나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해진 방인데 뭔가 익숙하지 않다. 그게 뭘까 골똘히 생각한 끝에 깨달았다. 료가 없다.

기다렸다.

기다렸다.

좀만 더 있으면 오겠지, 라면서 오도카니 앉아 있은 끝에 문득 침아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빗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목이 말라서 자리끼를 마신 후에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내다본 밤하늘은 여전히 구름이 많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던 달빛이 조금씩 강해지는 중이었다. 이제 개이겠구나 하고 직감했다.

“근데 이 꼬마는 어디에 갔담.”

갸우뚱하니 고개를 기울여 방을 돌아보며 침아가 중얼거렸다. 창문을 닫고 이불 대신으로 덮여져 있던 가뿐한 깃옷을 들어 어깨에 걸치고서 방을 나섰다. 나무 마루로 이어진 미로 같은 집의 구조도 이제는 훤하게 익혀서 어둠 따위야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료의 침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누마루에 올랐을 즈음엔 달이 구름 너머로 머리 한 귀퉁이를 내밀었을 때였다. 그것이 어찌 보니 료가 엉망으로 타곤 하는 비파의 줄을 고르는 옥으로 된 기러기발 같았다. 훗 하고 웃고서 침아는 비가 들치지 않은 쪽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이제는 달이 나오길 기다렸다. 아아, 그런데 하늘에 구름이 너무도 많다. 동쪽으로 더디게 흘러가는 구름보다 달이 더 빨리 서쪽으로 옮겨가버릴 것 같다. 침아의 시야에 들어온 서쪽 하늘엔 여전히 구름이 그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다. 다만 검은 물기를 머금은 비구름이 아닌 것만이 기다릴 만한 이유가 된다.

비 온 끝의 찬바람이 한 차례 누마루를 휘감고 간다. 침아의 드러난 목에 얇게 소름이 돋아났다.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침아는 오히려 목을 뒤로 젖혔다. 뒤로 젖혀진 얼굴에서 오른쪽 눈이 유난히 반짝이는 가운데 침아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것은 항아(姮娥)뿐이라고 시인들은 노래하네.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난 그녀는 사랑을 버리고 영원을 얻었나니.

예톢여, 어리석은 예여, 태양을 떨어뜨리는 재주를 어찌하여 썩히셨나? 속절없이 스러져 감겨가던 눈에 비친 달 보며 아리따운 이와의 봄날을 기억하셨는가?

항아여, 영리한 항아여. 버림받은 사내가 달에는 차마 시위를 겨누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아리따운 항아여.

그대 다시는 그처럼 사랑해줄 이를 얻지 못하리.

광한전 너른 뜰을 밝게 비출 그대의 춤사위, 가없이 고와도 덧없고 덧없어라.

덧없다는 대목을 거듭해서 흥얼거리는 침아의 시야 저 끝에 푸른 꽃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둥실 떠올랐다. 바라보는 사이에 그것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꽃이라 생각했던 것은 은은한 광채를 머금은 비단옷자락이 너풀거리는 휘로 밝혀졌다.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듯이 사뿐사뿐 기와를 밟고 오는 모습은 그 가벼움이 춤을 연상케 했다. 침아가 기대앉은 난간이 보이는 지붕에 이르렀을 때 훌쩍 휘가 몸을 솟구쳤다. 마치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그를 밀어 올려준 것처럼 그는 가뿐하게 난간에 올라앉았다.

“목소리가 곱구나, 아이야.”

휘의 칭찬에 침아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런데 나는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인 것 같은데. 제목이 어찌 되느냐?”

침아는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 고개만 갸웃하고 말뿐이다. 휘가 잠시 말미를 주었지만 침아는 그를 말똥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다.

“제목을 몰라 그러느냐?”

침아의 입술 끝이 좀 더 휘어지면서 미소가 커졌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알고 있으면서 말해 주지 않을 참이야?”

침아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하고 만다. 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침아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렇게 노래를 잘 불러 놓고 왜 이제 와서 벙어리 노릇을 하는 거지?”

또르륵 또르륵 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눈동자를 굴리던 침아가 문득 휘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디밀더니 소곤거렸다.

“주인님이 안 계신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랫소리를 들을 때 느꼈듯이 아이치고 별나게 쉬어 있는 침아의 목소리는 소곤거림에 잘 어울렸다. 얼굴에 큰 흠이 있는 것은 여전히 애석했지만 그 목소리가 듣기 좋아 휘의 수집욕에 불을 지폈다. 료에게 한 말은 단순히 심술에 불과했으나, 그 말대로 하지 말란 법은 또 없다. 휘는 더욱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누군진 알고?”

“주인님의 형님이시지요.”

“내가 네 머리를 치료해 주었는데, 그건 아느냐?”

“그러셨습니까?”

침아는 크게 뜬 눈을 깜박거릴 뿐 별다른 반응이 없다. 기대치에 못 미치는 반응이라 휘가 물었다.

“고맙지 않으냐? 내가 없었으면 넌 그대로 깨어나는 일 없이 죽었을 텐데.”

잠깐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침아가 고개를 저었다.

“감사의 인사는 제 주인님께 드려야지요.”

“어째서? 그 녀석이 뭘 했다고?”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침아가 입술을 슬쩍 쫑긋거렸다.

“예를 들어 인간은 소를 키웁니다.”

“그런데?”

“소가 아프면 그 주인이 소를 고치는 의원을 부릅니다. 의원이 소를 고쳐주면 주인은 그 답례로 쌀이든 돈이든 내어주기 마련이지요. 그럼 소가 의원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호오. 그럼 너는 료가 키우는 소란 말이구나.”

“예.”

놀리듯이 물어본 것인데 침아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즉답했다. 휘의 목소리가 더욱 은근해졌다.

“그럼 내가 널 고쳐준 대신 널 내 소 삼기로 했다 하면 어쩔 테냐?”

“그럴 리가요.”

“정말인데? 그대로 죽느니보다 살려서 나한테 보내는 편이 낫다는 걸 료도 인정했지.”

그러자 침아가 고개를 젖히며 깔깔거렸다.

“동생분이랑 안 친하신 모양이지요? 제 주인님 성격에 퍽이나 그러마 하셨겠습니다.”

웃음을 그치고 침아는 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주인님이 절 살리려 하셨다면 그건 제가 주인님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그런데 정말로 절 받아가겠다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정말이다만?”

비로소 침아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린애답지 않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름다운 이가 제멋대로라는 것은 저 달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기묘한 말을 하는 아이라고 생각하며 휘도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달이 숨은 하늘은 어둑하기만 하여 볼 것이 없었다. 별 뜻 없이 주변 풍경을 휘둘러보고 시선을 거두려던 휘의 시야에 무언가 재미난 것이 들어왔다.

휘는 침아를 돌아보며 바짝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아까의 노래 제목은 가르쳐주지 않을 셈이냐?”

“제가 살아서 그쪽의 소가 된다면 가르쳐드리지요.”

“맹랑한 소릴 하는구나.”

전혀 기분 상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한 휘가 문득 침아의 얼굴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리며 조건을 걸었다.

“한 번 죽은 걸 되살려내는 것도 해당되는 게지?”

그의 손을 옷소매로 밀쳐내며 침아가 대꾸했다.

“그런 재주가 있으시면 죽기 전에 구해 주시는 건 더 쉽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마.”

짙은 미소를 남기고 휘는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올 때의 느긋한 걸음과 달리 돌아가는 걸음은 너무 빨라 아주 사라진 후로도 푸른 잔상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 잔상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침아의 시선은 휘가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침아가 언뜻 눈이 부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구름을 벗어난 달이 막 벼려낸 쇠처럼 예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유난히 크고 지상에 가까워, 저런 달이라면 저 활의 명수인 예가 쏘아서 땅에 떨어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끝끝내 못 쏘았지. 그 애틋한 정이 결국 항아에게 저주가 될 거라는 걸 알았을까나.”

얼핏 웃음 지으며 침아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왼쪽 얼굴에도 달빛을 쬔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마루를 뒤로 하고 돌아가는 길에 저도 모르게 방심 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그 공허한 눈에 생기가 돌아온 것은 언뜻 불어온 찬바람이 목덜미를 훑었을 때였다.

바람이 불어온 쪽을 보았을 때, 침아는 시커먼 그림자를 보았다. 쿵쿵쿵 발소리를 가릴 생각 없이 다가오는, 아니, 쫓아오는 동물이 있다. 침아는 꼼짝 않고 서서 그 동물을 기다렸다.

마침내 우송이 나타났다.

생매장과 익사 중 어느 쪽이 더 괴로울까?

침아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불에 타 죽지만 않으면 돼.

그러나 섣달의 얼음물은 지독했다. 표면에 얼음이 얼었다가 오늘 하루 비가 와서 얼마쯤 녹은 끝에 다시 깊은 밤 찬바람에 단단하게 얼어붙어 가는 못의 중앙 부분, 아직 얼어붙지 않은 틈바구니 사이로 침아는 내던져졌다. 물에 빠진다는 걸 의식할 틈도 없이 어마어마한 서늘함이 뼛속까지 뒤흔들었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사지가 알아서 퍼덕거리며 여기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물에 빠졌던 힘이 강력했던 만큼 물이 밀어내는 힘도 만만치 않아서 침아의 몸은 다시 물 밖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거기에는 당장이라도 발길질을 할 기세로 수면을 응시하는 우송이 있었다.

“어째 이러십니까!”

여기까지 오는 길에 몇 번이나 물었던 말이지만, 지금 침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큼 처절함이 담겨 있었던 적은 없었다.

“주인을 물어뜯는 개는 죽인다.”

우송은 첫날 만났을 때보다 훨씬 음산한 표정을 하고 대답해 주었다. 침아는 벌써 얼어붙어 가는 혀를 억지로 움직여 소리쳤다.

“물어뜯은 적 없습니다!”

“주인이 아닌 자의 먹이를 받아먹는 개도 죽인다.”

“그 먹이, 먹고나 죽게 한 번 구경이나 합시다!”

“내 두 눈으로 본 게 있어!”

우송의 사자후에 침아 주변의 빙판에 쩍쩍 금이 가는 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렸다. 우송을 올려다보며 침아가 외쳤다.

“물러나요,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으면! 어서 가!”

침아를 보는 우송의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지금 자신을 죽일 셈으로 눈이 시뻘건 맹견한테 위험하니까 저리 가라고 소리치는 이 아이는 뭘까, 하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침아는 멀거니 서 있는 우송을 향해 악을 썼다.

“가라고, 이 천치야! 가, 가!”

분명히 버티고 서 있는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우송은 감지했다.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주춤거리다 팔을 뻗으려 했다. 침아에게. 그때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아주 잠깐 망각할 뻔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저택에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광경. 모르고 갈 수도 있었는데 바람에 실려온 달짝지근한 향기가 잡아온 들짐승의 비린 피 냄새를 잊게 할 만큼 강했다.

탁 트인 누마루의 난간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주고받는 침아와 휘의 모습 중에서 우송의 눈에 제대로 보인 쪽은 휘였다. 다만 익숙한 향기 때문에 그 안쪽에 있는 흰 덩어리가 침아라고 짐작했다. 웃고 있는 휘를 보고 우송은 눈치 없이 지껄이고 말았다.

“나간 사이에 꼬마가 깨어난 모양이지요. 목숨을 구해준 분이란 걸 용케도 알았나 봅니다. 그나저나 저긴 어찌 올라갔을까.”

“휘는 뭐든 원하는 것을 쉽게 얻지.”

“큰도련님이 불러내셨단 말입니까?”

우송의 물음에 료는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누마루 위를 응시했다. 보고 있는 사이에 누마루 안쪽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료도, 우송도 들어본 적 없는 큰 웃음소리는 분명 침아의 것이었다. 료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저 녀석에겐 뭐든지 쉽구나.”

낙담에 가까운 그 중얼거림에 우송은 쭈뼛하며 놀란 기색을 감추었다.

그러다 우송은 밖으로 시선을 돌린 휘와 언뜻 눈이 마주쳤다. 그들을 알아본 휘가 엷게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든 료가 그 시선을 받고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를 우송은 똑똑히 들었다.

“죽게 내버려두는 것을.”

이 사이로 내뱉듯이 중얼거리고 료가 홱 몸을 돌려 걸어갔다. 우송은 잠시 그대로 멈춰 서서 누마루에 있는 휘와 성큼성큼 걸어가는 자신의 작은 주인을 번갈아 보았다. 아둔한 그였으나,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급히 료를 쫓아가며 우송이 물었다.

“큰도련님이 꼬마를 뺏어가시는 겁니까?”

“뺏어가긴! 손 내밀어 오란 시늉만 해도 제 발로 뛰어갈 거다. 들었지 않느냐. 잘만 웃더구나. 하긴 머리를 다쳐서 혼절하기 전에도 휘를 보고는 반쯤 넋을 놓았었지. 다 죽게 생겨놓고는 어찌 저리 아름다운 새가 있냐는 소리나 늘어놓고. 별수 없는 암컷이라 이거다.”

“그렇지만 꼬마는 화산 어르신이 주인님께 주신 건데.”

“나도 필요 없어. 남의 손을 탄 것 따위……. 데리고 가라지 뭐.”

그렇게 말하는 료의 목소리 끝이 떨리면서 툭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인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송은 일단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주인이 상심한 것을 두고 보지도 않았다.

마구간에 말을 가져다 놓고 사냥감도 던져놓고서 우송은 누마루가 보이는 자리로 돌아왔다. 이미 거기에 없는 침아를 공중에 떠도는 향기를 근거 삼아 쫓아갔다. 못에 던져버리겠다는 생각은 달려가면서 우연히 떠올렸다. 다만 못에 이르렀을 때 그러고 보니 얼음이 얼었지 하면서 뒤늦게 주저했으나 상심했던 료를 떠올려 다시금 마음잡고 침아를 내던졌던 것이다.

감히 료를 두고 간다는 발상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 제깟 것을 료가 아껴주어서 다른 이도 아니고 휘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지 짐작도 못할 주제에 그자 앞에서 큰 소리로 웃기까지 했다. 료는 두 번이나 말했다.

“죽도록 내버려두는 건데.”

후회하고, 상심하는 자신의 작은 주인을 떠올리자 우송의 표정이 모질어졌다.

“그래. 네 녀석은 죽는 게 낫다.”

침아 쪽으로 내밀려고 했던 팔을 거두고 우송은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몸을 돌려 겅중겅중 뛰었다. 쩌억, 쩌억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그를 뒤쫓아 갔다. 그러나 그는 물에 빠지는 일 없이 못 가장자리에 이르러 올라섰다.

우송이 무사히 나가는 모습을 보고 침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너무 추워서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입 때문에 숨을 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때까지 끈질기게 움직여보던 팔에서 힘을 빼면서 침아는 발장구치는 것도 그만두었다. 온몸에 힘을 빼자 몸은 가라앉는 대신 일시적으로 비스듬히 물에 떠올랐다. 물에 뒤통수가 잠기면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얼굴은 아직 수면 위에 나와 있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가능했다.

달이 보였다. 벼려낸 쇠 같다고 생각했던 그 달에서 자신은 살기(殺氣)를 예감했구나 싶어 침아는 희미하게 웃으려 했다. 그러나 입가가 얼어붙었는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또한 궁금했다. 이렇게 죽는다면 이것은 익사인가, 동사(凍死)인가.

어쨌든 불구덩이에 던진 건 아니니까 상관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서서히 물이 귀를 덮고 눈을 덮고, 코를 덮고, 무언가 중얼거리던 입술마저 완전히 삼켜버렸다…….

―라는 것이 의식의 끝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파동과 함께 물살이 침아의 얼굴을 때렸다. 이어서 무언가가 침아의 옷자락을 붙잡아 위로 당겨 올렸다. 다시 물 밖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러나 침아는 눈을 감은 채로 코로도 입으로도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았다.

“숨 쉬어!”

찰싹, 뺨을 때리는 손길이 살얼음이 낀 물살보다 아팠다.

“숨 쉬랬잖아!”

또 날아든 손이 너무 매워 침아는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콜록거리며 한참 동안 숨 고르기가 이어졌다. 가까스로 자신을 붙잡고 있는 이를 쳐다보았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료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찌푸린 료의 눈을 보는 침아의 눈에 힘이 들어가면서 잔뜩 인상을 썼다. 료가 닦아세웠다.

“뭐냐, 그 눈빛은? 살려준 것이 불만이냐?”

“너…….”

“너?”

“그래 너. 너 또 한 번만 이래 봐. 그땐 정말 물어뜯어버릴 거야.”

침아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을러대더니, 그대로 까무러쳤다.

료는 축 늘어진 침아를 보며 잠시 멍하니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러다 웃기 시작했다. 몸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웃음을 쏟아냈다. 파안대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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