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름 짓다
노부인은 하룻밤도 머물지 않고 떠났다. 가는 모습을 소녀는 보지 못했다. 소녀는 아침에 본 쌍둥이 같은 하녀들과는 또 다른 무표정한 얼굴의 여자의 손에 반나절 가까이 씻겨지느라 바빴다. 살이 익겠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물에 살갗이 퉁퉁 불 지경으로 때를 불렸다가 벗기길 수차례. 처음엔 시원하고, 점차 따갑고 얼얼하다가, 나중엔 거의 감각이 없어졌다. 머리는 몇 번을 다시 감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땟물이 쪽 빠져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노라니 마침내 물통에서 건져낸 소녀를 여자가 닦아주었다. 손길이 거칠어, 민감해진 피부가 쓸리면서 몹시 아팠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견뎠다.
“머리 정도는 네가 빗어. 입을 옷을 가져올 테니까.”
퉁명한 말과 함께 소녀의 발치에 이빨이 성긴 빗이 떨어졌다. 소녀가 알았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가 헛간 문을 열고 나갔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호롱불이 흔들리면서 벽에 기이한 그림자를 그려냈다. 소녀는 여자가 세워 둔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호롱불 그림자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머리를 빗었다. 여러 번 감은 덕분에 엉킨 곳 없이 매끄러워진 머리칼은 공들여 빗을 것도 없었다. 곧 소녀는 빗을 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제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구경하며 놀았다. 그러면서 이야기 만들기를 했다.
“깊은 산, 외딴 집에는 괴물이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쪽 눈을 못 쓰는 인간의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길을 잃어서 헤매다 온 것이 아니라, 살러 온 것입니다. 아이는 무서워서 엉엉 웁니다. 인간은 약해서 무서운 게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 집엔 아이를 달래줄 착한 괴물은 없습니다. 아이는 너무 무서워서 계속 웁니다. 그래서 괴물은 화가 났습니다. ‘이런 시끄러운 건 귀찮아!’ 날카로운 발톱으로 뎅겅, 목을 베어 버립니다. 아이는 이제 울 필요가 없네요. 하지만 다시 태어나야 하겠어요. 불쌍하게 죽은 애는 다시 태어나도 역시 불쌍하게 태어난답니다. 울어선 안 돼요. 인간의 아이는, 정말로 약하니까.”
다소 으스스한 이야기를 퍽 진지하게 하고선 아까 뎅겅 벤 목 흉내를 내며 떨어뜨린 빗을 주워 머리를 빗던 아이가 문득 홱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물을 계속 써서인지 천장의 몇 곳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따금 물방울이 바닥에 똑 하고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녀의 눈이 가 닿는 곳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기와를 올린 본채와 달리 너와를 얹은 헛간 지붕에서 무언가 작고 가벼운 것이 달려가는 듯한 소리를 소녀는 똑똑히 들었다.
“여기, 쥐가 있어요.”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 여자에게 소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어.”
“제가 들었어요. 지붕에서 달려가는 소리를. 쥐가 아니면 고양이었나?”
고개를 갸웃하는 소녀의 이마에 여자가 사정없이 꿀밤을 먹였다.
“이 집에 그런 것들은 있을 수가 없어. 어린것이 어디에 대고 거짓말이야?”
아팠기 때문에 소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여자가 입혀주는 옷 때문에 뭔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데요.”
“바닥에 끌리지 않게 옷자락을 들어.”
면으로 된 얇은 홑옷 위로 여자가 입혀주는 옷은 하얀 우의, 즉 깃옷이다. 품은 비교적 맞는데 길이가 길다. 눈에 익은 옷이라고 소녀는 생각했지만 말로 꺼내진 않았다.
“작은도련님 옷이니까 조심해서 입어. 쓸데없이 더럽히거나 옷을 상하게 하면 그냥 혼나는 정도론 끝나지 않아. 너 같은 꼬마를 기십, 아니 기백을 팔아도 못 구하는 옷이야.”
여자의 으름장에도 소녀는 방긋 웃다가 매를 한 대 더 벌었다. 그 료라는 녀석, 자신보다 작던데 이 옷을 길어서 어찌 입나 생각했던 것이다.
헛간을 나와 본채 쪽으로 걸어가는데 밤하늘에 보이는 달이 유난히 가깝고 크다. 그 달이 붉고 주위에 흐릿한 달무리를 걸치고 있었다.
“이번 보름엔 큰 비가 오겠네.”
아쉬운 듯 소녀가 한숨을 쉬었다. 앞에서 여자가 재촉해 서둘러 달려가는 통에 더는 달을 볼 수 없었다.
가장 반가운 것은 만 하루 만에 받게 된 밥상이었다. 비록 먹을 것이라곤 물에 불린 육포와 그 정체를 알아내기 힘든 묽은 갈색의 죽이었지만 양은 충분했기 때문에 배불리 먹었다. 죽도 그 찜찜한 색과 달리 맛은 괜찮았다. 정체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걸 먹은 뒤에는 이까지 닦게 했다. 소녀는 기꺼이 오래오래 소금으로 이를 닦고 정향 내음이 은근히 나는 물로 입을 헹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까지 몸가축을 시키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너는 작은도련님을 모실 거다.”
여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둘러 어딘가로 걸어가면서 여자가 계속 말했다.
“그러니 머물 방도 따로 주지 않아. 작은도련님 방에서 기거하면서 시중드는 게 네 일이니까. 오늘처럼 따로 요기를 할 일도 없어. 작은도련님이 드시고 남는 걸 네가 먹는 거야. 식탐하고는 인연 없는 분이니까 굶어 죽을 염려는 안 해도 될 거다. 물론, 작은도련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네가 할 일이야. 천한 목숨이나마 이어가고 싶다면 알아서 잘 해보라고.”
다소 트릿하게 들리는 마지막 말에 이어 힐끗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생긴 건 그렇게 안 보이지만, 혹시나 싶어 죽을 길 하나는 알려주지. 일없이 작은도련님 상대로 수작 부릴 생각은 마. 갈가리 찢겨서 까마귀 먹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저기.”
여자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기며 소녀가 물었다.
“그 수작이란 게 뭔가요.”
여자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가 한 번 짧게, 개가 짖는 것처럼 웃었다.
“됐다. 모르는 게 약이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모르면 살 날이 늘어날 거다.”
퉁명스런 대답은 마치 그렇게 해서 소녀가 살 날이 늘어나는 것이 유감이란 것처럼 들렸다. 소녀는 잠자코 여자의 뒤를 따라가면서 팔을 살짝 들어 올려 입고 있는 옷으로 뺨을 감쌌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흰 깃에는 엷은 향내가 배어 있다. 소녀는 그 어렴풋한 향기를 킁킁 맡으면서 길게만 느껴지는 길을 걸었다.
너무도 사위가 고요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소녀는 가만히 어깨를 움츠렸다. 앞서 걷는 여자의 거친 베옷이 내는 스치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는 아무리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살집이 제법 있는 몸임에도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소녀는 맨발이다. 올 때 입고 온 옷이며 신발을 여자가 가져가서는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걸칠 옷은 주었지만 신은 내어주지 않았다. 본디 몸에 열이 많은 소녀에게 맨바닥은 써늘하기 그지없어 소녀는 발꿈치를 들고 발끝으로만 걷고 있다. 자연히 발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소녀가 어깨를 움츠린 것은, 본능적인 위화감 때문이었다. 산속, 호젓한 곳에 외따로이 있는 집이다. 올 때 본 대나무 숲은 물론 집을 감싼 수풀도 울울창창했다. 하물며 이 집 안에는 오전에 본 그 커다란 향나무를 비롯해 저택 곳곳에 높다란 나무가 있는 것이 보였다. 숲이 우거진 곳에는, 생물이 산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 중에는 분명히 야행성동물도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일상적인 움직임이 빚어내는 일상의 소음들이 지금 소녀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귀가 무척이나 밝은데도 불구하고.
“괴물이 사니까…….”
소녀의 중얼거림에 앞서 가던 여자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뒤를 쏘아보았다.
“뭐라고 했니?”
고개를 저으며 소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꾸했다. 여자는 흠 하고 거센 콧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입 간수를 제대로 못 하면 후회할 일이 생길 거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수다쟁이는 여기선 살 수 없어.”
하는 말마다 겁주는 말뿐인 여자에게 소녀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적어도 이 여자 앞에서 수다스러워질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들어가. 계속 걸어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문이 있어. 그 문이 네 목숨줄이라 생각하고 열어.”
긴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여자는 돌아보는 기척조차 없이 가버렸다. 소녀는 잠깐 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여자가 가라고 가리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이 아마도 소녀의 목적지일 것이다. 계속 그랬던 것처럼 발돋움을 해서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 발바닥을 전부 땅에 닿게 하며 걸었다. 확실하게 자신이 가고 있다는 기척을 내면서 소녀는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서늘함에 몇 번 진저리를 쳤다.
소녀의 앞에 문이 나타났다. 투박하리만치 별 장식이 없는 문에는 쪽빛으로 반짝거리는 깁이 발려 있었다. 주저한 건 아니지만 문을 여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조금은 긴장했을지 모를 소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촘촘히 짜인 대나무발이었다. 걷어내며 앞으로 나서자 또 하나가 나타났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앞을 가로막는 발들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것을 하나씩 치우며 앞으로 갈 때마다 공기가 훈훈해져 갔다.
마침내 발이 끝나는 곳에 푸른 종이를 바른 등롱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복도 바깥까지 흘러나온 희미한 빛의 정체였다. 그 외에는 방을 밝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둥근 창문이 있다. 서쪽으로 난 창의 주변으로 어렴풋하게나마 달빛이 방 안에 머물고 있었다. 그 달빛과 어둠이 녹아드는 곳에, 붉게 타오르는 숯이 담긴 화로가 있었다.
그리고 화로의 곁으로 두툼하게 깔린 것은 짐승의 털임이 분명했다. 흰색, 혹은 그와 비슷한 밝은색 털을 다듬어 둥글게 만든 깔개 위에 보다 더 흰, 무언가가 누워 있었다.
“이쪽으로 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료. 소녀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오라는 말이 들리지 않아?”
마치 눈이 부시기라도 한 것처럼 가늘게 뜬 눈을 깜박이며 소녀가 변명했다.
“죄송해요. 아직 방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요.”
“이렇게 환한데? 아. 인간이라 그런가.”
“저는 밤눈이 어두운 편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저능한 쪽?”
료는 비웃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팔꿈치를 괴면서 입고 있던 옷에서 깃털 하나를 뽑았다.
“염(炎).”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 휘파람을 부는 듯 가볍게 불어낸 숨결. 순간 깃털은 그의 손에서 날아올라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되었다. 료는 그 빛 너머에서 소녀에게 명령했다.
“오너라.”
소녀의 눈은 료가 호기롭게 보인 잔재주에 머물러 반짝거렸다. 소녀가 료에게 다가갈 동안 푸른 불꽃은 소리 없이 타오르다가 료가 소녀의 팔을 잡는 순간 가뭇없이 사라졌다.
“너, 땀을 흘리고 있구나. 왜? 무서운 게냐?”
료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소녀의 이마에서 뺨을 타고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다소 무겁게 숨을 토해 내며 대꾸했다.
“이곳이 덥습니다. 그리고 제가 입고 있는 옷 역시 덥습니다.”
“그래?”
신기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료가 슬쩍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잡고 있던 소녀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하마터면 료의 몸 위로 쓰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모면했다. 발로 딛고 있을 때보다 손으로 잡게 되니 그 보드라운 정도가 놀라울 만큼 생생한 깔개를 한 손으로 꼭 쥔 채 몸의 균형을 잡는 소녀였지만 이미 료와의 거리는 아슬아슬하리만큼 가깝다.
소녀의 팔을 놓아준 료의 왼손이 그녀의 오른뺨으로 향했다. 손등으로 아주 천천히 소녀의 뺨을 누르듯이 만져본다.
“과연 뜨겁구나.”
마치 경탄하듯이. 소녀는 뺨에 닿은 료의 손이 낮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차디찬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안고 자면 화로를 안고 자는 느낌이 들까?”
그 말에 소녀의 눈이 커졌다. 료는 손을 거두며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건 귀찮아서 싫어. 내 것이 아닌 숨소리를 듣는 것도 고역인데 그렇게까지야.”
료는 이걸 어쩌면 좋을까 고민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소녀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머리맡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베개 대신으로 써주지. 화산 할머니가 주신 성의도 있고 한데.”
베개? 소녀는 료를 흉내 낸 것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료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애초에 저 구석에서 화로나 지키게 할 셈이었어.”
그러고서 소녀를 쏘아본다. 소녀는 료가 응당 자신이 감사의 대답을 해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약간 늦게 깨달았다. 늦게나마 깨달았으니 행동에 옮겼다.
“감사합니다.”
료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척 몸을 돌려 앉으며 말했다.
“덥다고 하니, 그 옷은 벗어도 좋아.”
“네.”
‘벗어도 좋다’는 말이 ‘벗으라’는 말인 걸 감지한 소녀는 고분고분하게 깃옷을 벗어 곱게 접어 옆에 두었다. 홑옷 차림이 된 소녀는 옷섶을 바짝 죄며 고개를 갸웃했다. 베개 노릇은 어찌해야 하는 일일지? 힐끗 료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돌아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소녀는 잠시 동안 보드라운 깔개를 일없이 손끝으로 뜯으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마음을 정해 료가 가리켰던 머리맡 쪽으로 엎드려 누웠다. 오른팔을 괴어 손등에 뺨을 대면서 저도 모르게 후우, 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등줄기에 차가운 무게감이 느껴진 것은 잠시 후였다. 사르륵거리며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소리가 소녀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소녀의 등에 머리를 얹은 채 료는 천장을 쳐다보다가 이내 투덜거렸다.
“목침처럼 딱딱해. 뜨거운 거 말곤 아무 소용도 없는 거냐?”
소녀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 료의 투덜거림도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열처럼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료의 눈은 한동안 천장에 머물러 있었다. 둘 다 꼼짝하지 않으면서 말까지 없자, 방 안은 아까 소녀가 오면서 느꼈던 어리둥절할 정도로 깊은 정적의 언저리까지 다가간다.
그때 소녀가 들이마셨다 내쉬는 깊은 숨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어깨가 가만히 들썩였다가 내려앉는 진동에 료는 슬쩍 소녀의 머리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규칙적인 희미한 숨결. 그러다 한 번씩 깊이 심호흡하는 주기가 있었다. 지켜보던 료가 문득 소리를 내어 물었다.
“너, 자는 거냐?”
역시 대꾸가 없다. 어쩌면 이미 자리에 누워서 머리를 뉘였을 때부터 잠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자들은 눕자마자 잠드는 희한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료는 알고 있다. 우송이 그랬다.
“왜 내가 부리는 것들은 하나같이…….”
입 안에서 중얼거리며 료는 다시 고개를 반듯하게 했다. 눈을 감았다. 소녀가 호흡할 때마다 비롯되는 미세한 진동에 마치 단조로운 물결 위에 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따뜻하고도, 아련한 향기가 감도는 물결. 료의 숨소리가 점차 점차 작고 느려졌다.
진정한 어둠이 료의 방에 찾아왔다.
소녀가 새로운 집에 온 지도 며칠이 흘렀다. 큰일이랄 것도 없이 단조롭게 흘러간 날들이었다. 소녀가 무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료가 첫날처럼 패악을 부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겠다.
소녀는 첫날 목욕을 시켜주었던 여자가 충고한 대로 말을 아꼈고―자의로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시피 했다―료는 본디 무뚝뚝한 편인 듯했다. 그저 소녀가 자신의 시야 안에 얌전히 있으면 료에게서 말이 나올 일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료는 우송과 집을 나서면서 소녀에게 “적당히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좋아”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료는 취침이며 기상 시간이 몹시 늦다. 소녀가 온 첫날 같은 경우는 드문 예외에 들 정도로 일찍 잠이 든 것이었고, 실제로 료는 새벽 동이 틀 무렵에나 잠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자서는 해가 훌쩍 떴을 때 힘겨워하면서 일어난다. 눈을 뜨고 일어나 앉은 후에도 한참을 불쾌한 얼굴로 멍하니 있다. 그러다 간신히 첫 식사를 하는 것은 중천의 해가 한 뼘쯤 옆으로 움직였을 때다. 그 후로도 날이 저물 무렵까지 침소를 떠나지 않는다.
밝은 낮이라곤 해도 창문을 열어놓지도, 문을 열어놓지도 않는 침소의 밝음은 한계가 있다. 그래도 그나마 대낮에 본 침소는 우선 그 넓이에 놀라고, 구조의 복잡함에 두 번째로 놀라게 된다.
소녀가 아직도 무슨 털일까 궁금하게 여기는 큼지막한 털깔개가 깔려 있는 곳이 침소의 본 목적에 맞게 가장 안쪽이다. 이곳의 세간이라고 해보아야 화로를 비롯한 두어 가지가 고작이다. 자는 것 이외의 무엇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연결되는 다른 곳. 첫날 소녀가 들어오면서 몇 번이나 지나쳐야 했던 그 대나무발들은 이를테면 칸막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발과 발 사이의 공간에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똑같이 생긴 미닫이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문들을 열어보면 설기며 궤가 그득한 창고 같은 방도 있고 거문고며 석경들의 음률 도구가 어지러이 널려 있는 방, 천장과 벽에 말린 약초와 괴상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도 안 되는 작은 단지가 수두룩한 약방 같은 곳도 있다.
일단 소녀가 눈에 익을 만큼 자주 보게 된 곳은 책이 가득한 방이었다. 지난 며칠간 료는 날이 밝은 동안에는 거의 이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떤 날은 굉장한 속도로 몇 권이고 책을 읽어내는가 하면 어떤 날은 그저 앉아서 꼼짝 않고 있다. 서가(書架)가 지척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그렇게 멍해 있다가 문득 옆에 소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무슨 책인가를 찾아오라고 시켰다.
“글자를 모르는 데요?”
소녀의 태연한 대꾸에 료는 더 할 수 없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면박의 말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 말 없이 료가 일어나서 어딘가로 향했다. 잠자코 뒤따른 소녀에게 료가 던져준 것은 먼지가 켜켜이 앉은 낡은 책이었다. 어린아이들이 한자를 익힐 때 쓰는 책이었다.
“하루에 최소한 서른 자, 아니 쉰 자는 외워. 새 발자국하고 문자도 구분 못하는 아둔함이 자랑은 아니야. 하다못해 우송도 제 이름을 쓸 줄 안다고.”
소녀는 잠자코 책의 먼지를 털어내면서 중얼거렸다.
“어차피 전 쓸 이름도 없는데요.”
“없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크는 동안 아무도 이름을 안 불러줬다는 게 말이 되느냐?”
믿지 못하겠단 료의 반응에 소녀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모로 몸을 돌려 잘 떨어지지 않는 먼지를 불어냈다. 료가 거칠게 소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그를 보게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대답부터 해!”
“네.”
“내가 방금 전에 한 말에 대한 대답은?”
“……원래 이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제 기억에는 없어요. 누가 절 부를 때는 ‘너’나 ‘야’나 ‘저기’였지 다른 건 없었어요.”
순순히 소녀가 대꾸하자 료는 더욱더 미간을 찡그렸다.
“인간들은 태어난 순서대로 불리기도 한다면서. 셋째나 넷째 같은 그런 이름도 없었어?”
소녀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가 실수를 깨닫곤 급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기억이 안 나요. 낳아주신 분들 일도 모르는 걸요.”
“전혀 기억이 안 나?”
“네.”
“그럼 넌 여기 오기 전에……. 아니야. 됐어.”
질문을 하다 말고 료는 몸을 돌려 다시 원래 앉아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소녀는 따라가면서 슬며시 책을 펴보았다. 앞쪽은 검은색보다 흰 바탕이 압도적으로 많더니 뒤로 갈수록 검은색의 비중이 늘어갔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툭 내밀고 눈을 찡그렸다. 홱 돌아본 료의 눈에 그런 소녀의 표정이 잡혔다. 료의 얼굴을 보고 재빨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료는 몸을 돌리며 슬며시 웃어버렸다. 하지만 소녀에게 던져지는 말에는 웃었다는 내색은 전혀 없다.
“내가 직접 가르쳐줄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배워. 봐서 우송 녀석만큼 멍청하면 나중에 우송이 색시 하라고 줘버릴 줄 알아.”
히익, 하고 소녀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갑자기 소녀는 높아진 목소리로 열심히 말했다.
“듣고 외우는 건 잘해요. 멍청하단 소리는 아재한테도 들은 적 없어요. 잘할게요. 쉰 자도 외우고, 백 자도 외울게요.”
“우송이 색시 되라니까 그렇게나 무섭냐?”
“그게, 그 아저씬 너무 커다래서 같이 자다가 깜빡 잘못하면 깔려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하긴. 그럴 일이 없으리라곤 말 못하지. 마구간에서 자다가 말도 압사시킨 녀석인데.”
소녀가 다시금 목구멍에 뭔가가 걸린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료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언뜻 맴돌았다. 하지만 곧 걸음을 멈춘 료는 매서운 눈으로 소녀를 쏘아보았다.
“아재란 건 누구냐?”
“아재요? 아재가 아재지요. 아야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도 모르냐는 듯 물었다가 소녀는 이마를 철썩 맞았다. 소녀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전에 모신 주인님입니다.”
“어떤 놈인데?”
“예쁘긴 한데 하나같이 성격 개차반인 첩들 등쌀에 시달리며 사는 승냥이요. 성격이야 어쨌건 보기 좋으면 다 용서가 된다는 희한한 취향이었지요. 어쨌든 하루에 두 끼긴 해도 배불리 먹여준 좋은 주인님이었어요.”
“흥. 배불리 먹었다는 녀석이 그렇게 뼈에 가죽 씌워 놓은 듯 깡말랐단 말이냐?”
“저는 먹는 게 키로 가서. 다른 애들은 살이 포동포동했어요. 좋은 값 받고 팔려면 살집이 좀 있어야 한대요. 그래서 저는 번번이 팔리지 않는 물건이었어요. 그래도 구박하지 않았어요. 아재는 참 좋은 주인님이었어요.”
“흥. 그래 봤자야.”
소녀의 감상을 간단히 비웃고 료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아까의 자리도 그냥 지나쳐 방의 오른편 구석으로 갔다. 거기엔 지필묵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적을 들어 벼루에 물을 따르더니 먹을 슥슥 문질러대고 바로 붓을 들어 적셨다. 종이에 붓을 대기 무섭게 빠르게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소녀에게 던졌다.
“네 이름이다.”
“이름이요?”
“그래. 이런 게 바로 주인의 할 일이야.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팔 목적으로 사육하는 자를 보고 좋은 주인이라 하는 건 인간들의 헛소리야. 애초에 제 배 불릴 용도로 가축을 묶어 키우기 시작한 무지막지한 것들이 바로 인간이야. 나면서부터 우리에서 태어나 죽을 때나 우리를 벗어나는 돼지에게 주인의 좋고 나쁨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넌 돼지도 아니면서 배불리 먹여주니까 좋은 주인 운운하는 게 얼마나 우습게 들리는지 아느냐?”
소녀는 눈만 깜박거리다가 작게 그런가요, 하고 중얼거렸다. 소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손에 든 종이로 향했다. 거기 쓰인 문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료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침(枕). 베개라는 뜻이야.”
“베개……침?”
말할 수 없이 묘한 표정이 되어 소녀가 힐끗 료를 올려다보았다. 료가 발끈하듯이 성을 내었다.
“왜, 싫으냐? 방금 전까지 이름도 없었다는 녀석이 싫고 말고 할 처지야?”
“아니오, 싫다는 것은 아닌데…….”
“아닌데 무어냐?”
“별로 예쁘지가 않은데…….”
“쳇. 주제에 암컷이라 이거냐.”
료는 투정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들고 있던 붓을 벼루에 던졌다. 그러고 돌아서는 료의 등을 보던 소녀가 덥석 손을 뻗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깃옷 밑으로 그의 차가운 팔이 소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저기.”
자기 눈을 의심하는 표정으로 료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식으로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 한 아랫것이 지금껏 없었다. 최소한 이 집에 있는 자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료는 스스로 손은 대도, 다른 이의 손을 타지는 않는다는 것을. 료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에게 손을 댔던 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소녀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소녀는 자신이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있다는 것은 짐작도 못한 채 오른쪽 눈을 반짝거리며 료에게 말했다.
“이왕 지어주시는 거, 두 글자 이름으로 해주세요. 주인님.”
료는 물끄러미 소녀의 눈을 응시했다. 아직 소녀가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그의 팔에 닿은 소녀의 손이 전해 주는 뜨겁다 싶은 온기에 점차 익숙해져 간다.
“두 글자?”
나지막한 료의 반문에 소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함께 있었던 애들 중에 제대로 이름이 있는 애들은 다 이름이 두 글자였어요. 물론 거기엔 끝순이니 삼녀니 하는 대충 붙인 이름도 있었지만 매화꽃봉오리란 뜻의 매영이나 소나무꽃이라는 송화 같은 건 참 예쁘더라고요. 두 글자였으면 좋겠어요. 제게 이름이 생긴다면.”
“어려울 것 없지.”
가벼워진 말투와 함께 료는 소녀의 손에서 종이를 가져갔다. 다시 붓을 잡아 원래의 글자 밑으로 한 글자를 보탰다. 몇 획 안 되는 간단한 글자였다.
“아(兒) 자다. 합쳐서 침아.”
“아? 어떤 뜻인데요?”
“아이라는 뜻의 아.”
“에? 그럼 제가 나중에 크면 어떡해요? 스물 되고 서른 되어서도 아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요?”
“나중에 봐서 다른 아 자로 고치면 되지. 너는 개명이라 하는 말도 못 들어봤느냐?”
“다른 아 자에 예쁜 게 있나요?”
“찾으면 있지. 갈까마귀란 뜻의 아(鴉)라던가, 거위란 뜻의 아(鵝)라던가, 아니면 단순히 어여쁘다는 뜻의 아(娥)도 있고.”
앞의 두 예에선 반응이 없던 소녀가 어여쁘다는 뜻이 되자 매우 흥미를 보였다. 소녀는 료가 쓴 종이를 보고 품에 안고 있던 책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글자를 배워야 이름도 예쁘게 지을 수 있는 거군요. 아! 이 두 글자는 벌써 외운 것 같아요. 베개 침에 아이 아. 마흔여덟 자 남았다. 참, 주인님 이름은 어떻게 쓰는 거예요?”
“내 이름?”
“써주세요. 외울게요. 아, 따로 쓰지 말고 여기 옆에다.”
소녀의 말대로 료는 침아라고 쓴 오른편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료.”
“예쁘게 생긴 글자네. 무슨 뜻이에요?”
“높이 난다는 뜻. 높이 날 료야.”
“뜻도 좋구나. 근사한 이름이에요, 주인님.”
미소 지으며 료의 얼굴을 쳐다본 소녀는 의외로 시무룩한 료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그쳤다. 자신이 쓴 글자를 내려다보면서 료는 웃는 듯 마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별로 근사하지 않아. 세상엔 그 자체로 비웃음거리가 되는 이름도 있어.”
말을 뱉어놓곤 그 말을 뱉었다는 자체가 싫은 듯 소년이 인상을 썼다.
“내가 이런 소릴 했다고 어디에 흘리기만 해봐.”
을러대는 료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 걸요. 제게 말을 걸어주는 분은 이 집에 주인님밖에 없어요.”
“혼잣말도 안 돼.”
“안 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잠꼬대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데요.”
“노력해! 무조건.”
“네.”
막무가내의 명령에 소녀는 결국 그리 대답했다.
료는 결국 이날 소녀에게 쉰 자의 한자를 가르쳤다. 소녀는 제가 자신한 대로 암기력이 뛰어나서 료가 몇 장 지나서 앞으로 돌아와 물어보면 실수 없이 척척 맞히곤 하였다. 많아 봐야 다섯 획이 고작인 쉬운 한자들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자신할 것 없다고 면박을 주긴 했으나 확실히 우송보다는 훨씬 영리하다는 것만은 료도 인정했다.
날이 저물 무렵, 료는 가볍게 요기를 하고 우송과 함께 집을 나섰다. 어디를 간다고 설명해준 적은 없지만 그들이 사냥을 가는 것임을 소녀는 알고 있다. 우송은 창을 등에 지고 있고 료는 빈손이긴 해도 평소에 입는 흰 깃옷 말고 검은 옷 위에 붉은 여우털로 된 조끼를 걸치고 나선다. 돌아올 때는 멀리서부터 피냄새가 난다. 그날 잡은 산짐승을 우송이 창에 꿰어오기 때문이다. 나갈 때처럼 멀끔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료에게서도 진한 피내음이 나곤 한다. 료가 하루 중 유달리 즐거워 보일 때이다.
지난 며칠 동안 소녀는 그들이 나간 문 앞에서 돌아올 때까지 오도카니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료가 확인하면 깨끗하게 발라낸 토끼털이나 담비털 등을 가지라고 주곤 했다. 개에게 상을 주는 것 같은 훈련인지는 몰라도 소녀로선 받아도 처치 곤란인 상이었다. 어제는 멧돼지 이빨을 주겠다고 해서 더욱 당황했다. 다행히 우송이 그것을 욕심내는 것을 눈치 채서 재빨리 우송에게 양보한 덕에 약간의 점수를 딴 것 같다.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다는 것만 빼면 세상 다시없이 쉬운 일이지만 밤이 이슥하도록 한데서 꼼짝 않는 것은 몸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선지 지난밤 잠자리에서 소녀는 몇 번 기침을 했고 아침부터는 미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변덕인지, 하여간 료는 소녀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해 주고 나갔다. 료와 우송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문간에 서서 배웅한 소녀는 잠깐 문 안쪽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보였다. 달무리가 져 있다. 하늘은 맑은 듯 보이지만 잘게 찢어놓은 듯한 구름이 여기저기 흩어져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비가 올 것이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소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료가 사라진 길 부근을 응시했다. 그대로 돌계단 끝에 앉아 소녀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언가를 긁적거렸다.
“침아, 인가.”
갈겨쓴 글귀가 상당히 그럴싸하다. 제 이름을 써놓고 기뻐하는 건가 싶던 소녀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럴싸한 뜻의 침 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베개람. 성의가 없는 건지, 사내라 재주가 없는 건지.”
소녀는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글 쓴 자국을 없앴다.
“아무렴 어때.”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소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깃든 소녀의 오른쪽 눈이 영롱한 호박 빛깔에 가까워진다.
료와 우송은 비를 맞으며 돌아왔다. 비가 올 거라는 것은 짐작하고 나갔지만 그래도 보름이라는 것에 기대를 걸어 보았었는데 통하지 않았다. 사냥은 허탕이었다.
빗발은 돌아가는 길에도 꾸준히 세져서 료는 이따금 얼굴의 빗물을 훔쳐내야 했다. 사냥 가기 전까지 선홍빛에 가깝게 돌아왔던 입술색이 지금은 짙푸른 자줏빛이다. 우송은 그런 료의 기색을 자꾸만 곁눈질한다. 비를 가려주고 싶은데, 료가 못하게 해서 오히려 제가 전전긍긍이다.
“내가 맞고 싶어서 맞는 비다. 비 올 걸 뻔히 알면서 유의(油衣)도 준비해 가지 않은 건데 뭘 그리 호들갑이냐? 제발 좀 체격에 맞게 놀아, 우송.”
“주인님이 아프시면 안 됩니다.”
“안 아플 거다.”
“주인님은 감기에 자주 걸리십니다.”
“이번엔 안 걸릴 거다.”
선선히 장담을 한 료가 홱 고개를 돌려 우송을 보며 다짐을 두었다.
“비 맞았다고 옳거니 씻었구나 하지 말고 제대로 따뜻하게 몸을 데우고 자도록 해. 안 그래도 큰 녀석이 아파서 골골대기라도 하면 그 시중을 누가 감당하느냐?”
전적이 있는지 우송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께 걱정 끼치지 않겠습니다.”
“널 걱정해 주는 게 아니야. 사냥 나갈 때 앞을 막아줄 이가 없으니 내가 다칠까 걱정하는 거지.”
“그래서야 큰일이지요. 꼭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시큰둥한 료의 대꾸에 우송은 알겠다는 뜻으로 힘차게 대답했지만 눈썹이 팔(八) 자가 되어서 웃고 있다.
료는 발치에 고여 흐르는 물을 부러 찰박찰박 소리가 나게 밟는 것에 정신이 쏠려 있다. 비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비가 오면서 바뀌거나 생겨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흠뻑 젖는 수고마저 감수하며 비 오는 날 나가 노는 어린애나 다름없다. 갈 때 타고 갔던 말조차 놀리면서 제 발로 걷는 것은 그런 이유다.
“음? 저건…….”
불쑥 우송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료는 발치에서 시선을 들었다. 우송의 시선의 방향으로 눈길을 돌린 료는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는 저택을 보았다. 하지만 우송이 본 것은 단순히 집이 아니었다. 비가 가득한 어둠 속에서, 멀리 응시하는 료의 눈이 닦아낸 거울이 햇빛을 반사하듯이 번쩍거렸다. 곧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비를 헤치며 달려가는 서슬에 얼굴에 와 닿는 빗방울이 따갑다.
“증(烝)!”
마치 비를 옆으로 쳐내는 듯한 동작과 함께 료의 입에서 나온 짤막한 한마디에 그의 몸 주변에 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그의 몸에 닿기 무섭게 기화해서 스러지는 중이었다.
료와 우송은 체격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시에 같은 장소에 이르렀다. 모락모락 주변으로 연기가 이는 가운데 료는 그가 발견하고 달려온 것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멍청이! 기껏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갔더니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말로 화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발로 옆구릴 걷어찼다. 그 서슬에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어버린 소녀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옆으로 기울었다. 쓰러지기 직전에 우송이 손을 뻗어 막아주면서 료를 돌아보고 말했다.
“암컷은 약합니다, 주인님.”
소녀 앞에선 아직 보여준 적 없는 마음씨 착한 우송의 얼굴이다. 료는 이번엔 우송의 다리를 찼다.
“누구 앞에서 역성을 들어주는 거냐!”
아무리 힘주어 차본들 우송에게 료의 발차기가 먹힐 리 없다. 그래도 우송은 주인에게 걷어차인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진 얼굴로 눈을 끔벅거렸다.
료는 애초에 우송에게 화가 난 게 아니다. 우송이 크고 두꺼운 두 손으로 소녀의 머리 위를 가려 우산을 만들어주는 자체를 뭐라 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리 가려주는 걸로는 어쩔 수 없을 만큼 소녀가 쫄딱 젖었다 해도 말이다.
자기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든 소녀는 거인인 우송의 손과 비교되어서인지 더욱 작아보였다. 실제론 그리 작지 않다. 료보다 소녀가 반 뼘쯤 더 크다. 처음 대면했을 때, 료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주 큰 원인이다. 료가 소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 우송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크게 말해!”
료의 역정에 우송이 제대로 말했다.
“이 아이, 열이 많이 나나 봅니다.”
“이래서 멍청한 덴 약도 없다는 말이 있는 거로군! 아프기만 해봐라, 혼을 내줄 테다.”
신경질을 내면서 소녀의 이마에 손을 대본 료는 다른 손으로 아까 취했던 동작에 이어 소녀의 등을 눌렀다.
“증(烝), 조(燥)!”
소녀 주변으로 비가 오지 않는 공간이 생겨났다. 동시에 소녀의 젖은 옷과 머리가 마르면서 뜨거운 아지랑이가 한순간 자욱해져 우송이 눈을 질끈 감았다. 료는 자신의 여우털 조끼를 벗어 마르게 하는 주문을 외운 뒤 소녀의 머리부터 뒤집어씌웠다.
“들고 와, 우송.”
료의 명령에 우송이 눈을 떴다. 이미 료는 문을 지나 들어가고 있다. 우송이 조끼로 감싼 소녀를 조심히 옮겨 들자 소녀에게 걸린 주문이 우송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눈으로는 비가 오는 게 보이는데 그 비가 몸에 닿기 무섭게 사라져 몸에 닿았다는 감촉조차 희미해지는 감각이 기이해서 우송은 어리둥절해했다. 자연히 걸음이 늦어져 앞서 가던 료의 질책을 받았다.
“이런 건 언제 배우셨습니까, 주인님?”
우송의 소박한 질문에 료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안 배웠어.”
하녀들은 동시에 세 명의 목욕물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졌다. 료는 먼저 소녀와 우송부터 씻게끔 하고 자신은 침소로 돌아가 약실(藥室)에 들어갔다.
“우송하고 같은 약을 쓰면 죽겠지?”
의서를 뒤적이며 저울로 약재를 달아보는 등 퍽 진지해졌다. 곧 나름대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작은 꾸러미를 들고 욕간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서자 소녀를 씻기고 있던 쌍둥이 하녀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안 깨어났어?”
“예. 아직입니다.”
“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드물게 서로 다른 말을 하는 하녀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료는 나무로 된 목욕통에 가슴까지 잠겨 있는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말간 물빛으로 소녀의 나신이 훤히 보였지만 그로 인한 변화는 료의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료는 직접 소녀의 얼굴을 잡아 입을 벌리고서 약재 몇 가지를 소녀의 혀에 올려놓았다. 입을 다물리고 계속 쳐다보고 있자 한참 만에 소녀가 약간 괴로운 기색으로 약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좋아.”
기꺼운 표정으로 료는 몸을 일으켜 욕실을 나갔다.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더니 하녀들에게 말했다.
“내 침소에 화로를 있는 대로 다 가져다놔. 아. 몇 개는 우송에게 가져다주고.”
그러고는 우송이 씻고 있는 헛간으로 향했다. 소녀가 이 집에 온 첫날 목욕을 했던 그곳이다. 꾸러미에 담긴 남은 약재를 몽땅 우송에게 먹인 뒤 제대로 씻으라고 엄포를 놓고 밖으로 나온 료는 헛간 지붕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저 커다란 녀석은 곰이랑 비슷하게 생긴 주제에 곰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씻기를 싫어한다. 시늉만 하지 않도록 감시가 필요하지만 사내 녀석이 씻는 걸 구경할 만큼 료는 비위가 좋지 않다. 헛간 지붕에 앉아서라면 보지 않고서도 귀만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그럭저럭 말을 잘 듣고 있다는 판단이 들 무렵 료는 너와를 사뿐히 밟으며 걸어가다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고양이보다도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누군가는 무엄하게도 쥐에 비유했지만.
료가 시중들어주는 이 없이 마지막으로 씻기를 마치고 침소로 돌아왔을 때 발갛게 타는 숯이 가득 담긴 화로가 주르륵 늘어선 침소 안은 훈증막을 방불케 했다. 소녀는 그런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숨 쉬는 게 고역일 정도로 방 공기가 후텁지근해 창문을 빠끔히 열어두고 료는 소녀의 곁으로 가 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발갛게 달아오른 소녀의 뺨이 잘 보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녀의 이마를 짚으며 료는 못마땅한 눈빛을 지었다.
“약이 너무 적었나?”
열이 전혀 내리지 않고 오히려 더 뜨거워져서 료는 마치 손에 숯을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소녀가 뜨거운 만큼 료의 손이 전하는 차가움은 한층 더했다. 그것에 정신이 들었는지 소녀가 눈을 떴다. 몽롱하게 일렁거리는 까만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와 시선을 맞춘 소녀가 입술을 들썩였다.
“베개가 필요하십니까?”
“멍청이. 비가 오면 알아서 피했어야지. 하다못해 풀 속에 사는 벌레도 비가 오면 숨을 곳을 찾는다. 너는 벌레보다도 못하단 말이냐?”
“……벌레 충. 충아라고 개명하겠습니다.”
열이 올라 정신이 없을 터인데 오늘 배운 쉰 자 중 하나를 이용해 농지거리를 했다. 료는 실소를 지었다.
“멍청이란 말은 취소하마. 하지만 어쩌자고 그런 곳에서 잤느냐? 설마 비가 오는 것도 몰랐느냐?”
“그냥……기다렸지요.”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어도 좋다고 했잖아.”
“그래서……기다렸지요.”
소녀의 대답에 료의 표정이 얼마쯤 굳어졌다.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단 말이냐?”
“없습니다. 저는……아무것도 없는 인간이에요.”
긴 한숨을 쉬고 소녀는 그것만으로도 지쳤는지 눈을 감았다. 열이 지독한 데도 땀은 거의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소녀에게서 나는 독특한 향기는 더욱 강해졌다. 그 향기에 가장 근사(近似)한 것은 등나무꽃이 아닐까 싶다. 료는 꽃잎을 달이는 곳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제 손이 물수건이라도 되는 양 소녀의 이마 위에 얹어놓았던 손을 다른 손으로 바꾸면서 료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으니 앞으론 채울 일만 남았구나.”
다시 잠들어가던 소녀가 얼핏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어르신 말씀이 맞네요. 주인님은 상냥해요.”
료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소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베개한테도 상냥한 주인님. 침아는 운이 좋군요.”
한참 만에 투덜거림 같은 료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베개 주제에 운은 무슨.”
료의 고개는 창문 쪽으로 돌아가 있다. 손은 여전히 소녀의 이마에.
가늘어진 빗줄기가 단조롭게도 이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