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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이야기 (1/33)

여는 이야기

“자아, 그럼 이야기는 그만하면 됐고.”

느긋하게 비단신을 까딱까딱하던 동자(童子)가 촤르륵 소리가 나도록 부채를 접었다. 신을 바르게 신고 훌쩍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땅에 닿는 그 어떤 소리도 없이 내려앉았다. 바람도 없는 데 긴 옷자락이 땅에 닿지도 않고 아이의 주변에서 너울거렸다.

“이제 대가에 대해 이야기할까? 무엇을 내놓을 거지?”

“줄 수 있는 건 뭐든.”

소녀는 즉각 대답했다.

“목숨이라도?”

“받아서 쓸데가 있다면야.”

“치. 시시하군.”

동자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하품을 했다.

“그렇지만 너한텐 관심 없는 걸. 먹어서 맛있는 것도 아니고. 하긴 안 먹어봐서 모르겠지만. 여하튼 먹고픈 생각은 없어. 소개해 준 녀석 얼굴을 봐서 이야길 들어주긴 했지만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아.”

“…….”

“인간 여자아이를 셋 정도 물어다주면 생각해 보지.”

그 장난꾸러기 같은 말에 대번에 소녀의 눈에 뚜렷한 적의의 감정이 드러났다. 동자가 손사래를 쳤다.

“장난이야, 장난. 나도 기호란 게 있어. 아무나 골라다 주는 걸 덥석 받진 않아.”

동자는 주변을 바장거리며 둥글게 원을 그리듯이 걸었다. 부채로 탁탁 손바닥을 치면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문득 돌아보며 소녀에게 휙 부채를 내밀었다.

“운이 좋았어, 너. 내가 몹시 심심한 때를 골라 왔으니 말이야. 부탁을 들어주지. 그 대가는 차차 받도록 하고.”

“차차?”

어차피 각오는 한 바이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두루뭉술한 단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염려 마. 인간 여자아이를 잡아오라고는 안 할 테니까.”

“어떤 대가든, 내 일신에 국한해서만 들어줄 수 있어요.”

“물론 그런 걸 요구할 거야. 내가 멍청해 보여?”

동자는 소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웃음과 함께 날아든 동자의 시선은 외관상 갖추고 있는 예닐곱 살의 꼬마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동자가 다시 탁탁 부채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여자 앞으로 다가온 동자의 작은 발을 보았다.

“우선, 담보를 받아볼까.”

부채로 탁 하고 아이가 여자의 이마를 두드렸다. 언뜻 고개를 드는데 훅, 하면서 아이가 입김을 불었다. 왼쪽 얼굴, 특히 눈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워져 소녀가 손을 대려는 순간 동자가 “츳”하고 혀를 찼다.

“손까지 타고 싶어?”

소녀는 가까스로 손을 대지 않고 멈추었다. 눈의 뜨거움은 짧은 얼마간 격하게 이어지다 동자가 휘파람 같은 숨결을 불어오자 그쳤다.

“이젠 만져도 좋아.”

동자의 선심 쓰는 듯한 명랑한 말에도 소녀는 손을 들 기분이 들지 않았다. 눈을 깜박여 가면서 사태를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아요.”

“그래. 침착한 애로구나.”

동자는 칭찬이라도 하는 듯 큭큭 웃었다.

“눈이야 하나로 족하지. 다리나 손을 하나 뗀 것보다 그게 더 편할 걸? 그리고 지금처럼 예쁜 건 곤란해.”

동자가 문득 부채를 펴자 아까까지 노골적인 춘화가 그려져 있던 면에 시내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으로 동자가 바닥에 휘휘 바람을 일으키자 둘 사이에 느닷없는 물길이 생겨났다.

“자, 보렴.”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까지 귀에 들려오는 진짜 시내였다.

소녀가 그곳을 내려다볼 때 동자가 부채로 소녀의 왼쪽 머리카락을 슬쩍 들어주었다. 물에 비친 왼쪽 얼굴, 이마에서 눈을 가로질러 뺨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기이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묘한 흉터 비슷한 그것은 소녀의 티 한 점 없는 흰 얼굴을 한순간에 꺼림칙한 것으로 돌변시켰다. 동자는 보드라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화상이지. 너는, 갓난아기 때 키우는 이의 잘못으로 얼굴에 뜨거운 물을 끼얹고 만 거야. 알아듣겠어?”

“화상, 인가요.”

“그 일로 눈도 먼 거고.”

잠자코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자가 팔짱을 끼고 소녀를 바라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안 놀라네. 재미없어. 너희들은 예쁜 것이 아주 중요한 종족 아닌가?”

어깨조차 으쓱하지 않고 소녀는 수면에 보이는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꾸했다.

“환술사의 재주에 일일이 놀라서야.”

“어린것 주제에 그렇게 덤덤한 척 마. 귀엽지 않아. 암컷은 뭔가 호들갑스러운 면이 교태롭다고.”

그렇게 말하는 동자 쪽이 오히려 교태란 말에 어울리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었다. 동자는 한순간에 아름다움을 잃고서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소녀의 모습이 적잖이 기대 밖이었는지 눈을 심술궂게 빛냈다.

“그건 저주다.”

소녀는 말이 없다.

“일이 끝나고 내가 받아 마땅한 대가를 받지 못하면 너는, 영원히 그 흔적을 달고 살 수밖에 없어.”

소녀가 얼핏 웃었다. 동자는 이 새파랗게 어린것이 자신의 말을 가벼이 여기는 것에 한순간 못내 고까워졌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술한 생각 마라. 나는 대가 없이 일한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그러고는 생긋 웃으며 거들먹거렸다.

“그렇기에 이토록 신령한 거지.”

동자 주변으로 여전히 너울거리고 있는 흰 비단 옷자락을 보면서 소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 들어서, 이 자리에 있는 거지요.”

동자는 그제야 진지한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가 나름대로 고생을 하면서 찾아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됐어.”

동자가 탁 하고 부채를 한 번 치자 졸졸졸 흐르던 물길이 사라졌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감싸인 울창했던 수양버들의 숲도 사라졌다. 대신 그들은 캄캄한 굴속에 있었다. 소녀는 앞쪽에서 반짝이는 한 쌍의 노란 눈을 보았다.

“이제 실마리를 내놓을 차례이지?”

그 눈을 향해 소녀는 품 안에 조심스레 갈무리해 두었던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느낌으로 그것은 소녀의 손을 떠나 허공에서 가볍게 원을 그리다 동자의 손에 떨어졌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은근한 푸른 광채가 도는 검은 깃털이었다.

“좋아, 좋아, 좋아.”

동자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암컷의 원한은, 교태롭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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