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

3.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희선과 아침 식사를 마친 서원은 평소와 같이 밖으로 나갔다. 희선은 회사에 가고 자신은 출판사와 미팅이 있어 그가 중간에 내려 주기로 했다. 그런데 문을 열려고 하니 아직 잠긴 상태였다. 고개를 돌리니 희선이 상체를 쭉 내밀고 있었다.

“택시비 줘야지.”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 놀라 힘껏 밀었다. 한적한 곳도 아니고 사람 많은 강남 한복판의 도로 위였다. 주책스럽게 구는 상대의 어깨를 주먹으로 약하게 때려 준 뒤 내리니 약속 장소인 카페가 보였다.

서원은 구석 자리에서 노트북을 펴고 일하다 약속 시간 30분 전에 메시지를 보냈다. 일찍 와도 저 때문에 기다리거나 조금 늦어도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저 카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평소라면 딱딱한 답변을 보낼 담당자가 물음표만 보냈다. 서원은 혹시 잘못 누른 것인가 생각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저도 시간에 맞춰 도착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그 뒤엔 평범한 답변이 왔다. 서원은 역시 잘못 눌렀나 보다 생각하며 노트북을 꺼냈다.

다시 일하고 있으니 곧 담당자가 도착했다. 그런데 전과 달리 담당자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담당자는 교재를 주로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다. 서원과 비슷한 신장에 외모는 평범하나 옷차림은 세련된 편이었고, 공과 사의 구별이 뚜렷한 편이었다.

“선생님, 잘 지내셨죠?”

“네, 임 부장님도 잘 지내시죠?”

“저야 뭐 늘 그럭저럭 살지요. 그나저나 한 선생님은 점점 더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 더 멋있어지셨네요.”

“하하……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듣기 좋은 칭찬이지만 외모 칭찬에 면역이 없는 서원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담당은 계속해서 그를 살피더니 옆자리에 놓은 노트북 가방까지 칭찬했다.

“가방도 멋진데요. 이거 비쌀 텐데.”

“아, 이건 선물 받은 겁니다.”

생일에 희선이 사 준 비싼 제품이었다. 서원도 알 정도로 유명한 브랜드 제품인데, 로고가 보이지 않아 보통 사람들은 잘 몰랐다. 하지만 담당은 눈썰미가 좋은지 바로 알아챘다.

“선물로요? 굉장히 가까운 분이 주셨나 보네요.”

담당은 가격을 아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보통 친구 사이에 주고받을 물건은 아니었다. 가족이나 애인에게서나 받을 가격이라 서원은 부정하지 않은 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확실히 희선이 통이 크긴 했다. 그는 가끔 같이 쇼핑을 가면 커플 아이템이라는 명목으로 값비싼 제품을 사들이곤 했다. 눈에 띄지 않는 시계와 팔찌와 구두는 물론이고 머플러나 브리프 케이스 같은 것들은 실용적이라며 제 것까지 자꾸 사들였다.

그나마 옷은 자신의 회사 제품만 입으니 다행이었다. 서원에게도 광고하고 다니라며 주기적으로 옷장에 채워 놓았다. 오늘도 서원은 희선이 골라 주는 대로 입고 나왔다.

하지만 이 사실은 어디 가서 말한 적은 없었다. 서원은 성렬과 효성 외에 게이 친구들에게도 희선과의 관계는 숨기고 있었다. 물론 담당자들에게도 제가 애인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혹시 애인이 선물해 주셨나요?”

“네?”

“2년 전쯤부터 바뀌셔서요. 갈수록 멋있어지셔서 혹시나 싶어 물었습니다.”

“아…… 친구가 옷 장사를 해서 도움을 좀 많이 받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그런 친구 좀 있으면 좋을 텐데요.”

서원이 놀라자, 담당자는 부러워하며 답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제 옷을 살피고 있었다. 희선과 사귀면서 자주 들은 말이었지만, 서원은 뜨끔해서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다행히 그 후론 일 얘기로 넘어가긴 했다. 미리 논의한 사항들이라 미팅은 여유로운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전엔 노트북이나 서류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상대가 오늘따라 오늘따라 희한하게 자신을 계속 살폈다.

원래 거의 일 얘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사담을 나누긴 하지만 대부분 무난한 화제나 업계 이야기였는데 오늘은 저에게 많은 관심을 보인다. 계속되는 시선에 서원은 의아함을 느끼다 결국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저한테 묻고 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실은 오늘 좀 놀라서요.”

“네? 어떤 점이요?”

“그럴 거라곤 전혀 눈치 못 챘는데…….”

“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난 것일까. 혹시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일까 싶어 서원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담당자는 그제야 분위기가 심각한 것을 깨달았는지 오해하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아, 제가 말을 너무 두루뭉술하게 했지요? 그냥 선생님 프로필 사진이 조금 의외여서요.”

“네? 제 사진이요? 사진은 안 넣기로 하지 않았나요?”

교재에 들어가는 사진을 말하나 싶어 서원은 황급히 물었다. 담당은 이번에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대화창 말입니다. 이거요.”

담당은 제 휴대폰을 가리켰다. 서원은 그 말에 더욱 혼란스러움 느끼며 휴대폰을 들었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달리 프로필에 사진이나 상태 메시지가 없었다. 배경에도 흔한 풍경 사진 하나 없는데 무슨 소린가 싶어 SNS에 접속했다.

원래는 아무 사진도 없어 사람 얼굴 모양의 아이콘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이름 옆에 낯선 아이콘이 보였다. 놀라 클릭하자 희선의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이 보였다.

뺨에 손바닥을 댄 체 한껏 귀여운 척하는 사진은 옷을 보니 어제 입은 것이 분명했다. 당황한 서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희선이 또 장난을 친 거였다. 가끔 희선은 서원의 휴대폰을 몰래 가져가 프로필 사진을 제 사진으로 바꿔 놓곤 했다. 서원이 하지 말라고 했으나, 잊을 만하면 같은 행동을 했다.

“아, 이게…… 그러니까, 제가 한 게 아니라…….”

물론 제 주변 사람들은 자신과 희선의 관계를 모른다. 희선의 주변이나 세렝게티 직원들은 제가 자주 들락거리니 알고 있지만, 서원은 효성과 성렬 외엔 주변에 희선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 유명한 모델인 그는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탓이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출판사 직원은 진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역시 선생님께서도…….”

“네?”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희선의 이름이 나오자 서원은 순간 놀라 숨을 들이켰다.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담당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갑자기 들이밀었다.

“저도 어릴 때부터 팬이었어요.”

그의 화면엔 희선이 최근 찍은 화보가 있었다. 어두운 배경에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인 채 향수를 들고 있는 모습이 유혹적이었다.

평소라면 멋있는 사진이라며 감탄하겠지만, 때가 때인지라 서원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담당은 굳어 있는 그를 보더니 그제야 제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머쓱하게 덧붙였다.

“저희 학생 때 워낙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하, 아쉬워요. 다른 모델들처럼 배우 할 줄 알았는데 안 하더라고요. 그래도 계속 광고나 화보는 찍으니까요.”

갑자기 흥분하는 남자 때문에 서원은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화색을 띤 채 제 애인을 칭찬하는 그를 막을 수도 없었다.

“진짜 멋있지 않아요? 와, 어떻게 사람이 이래? 어떡하면 이렇게 태어나요? 진짜 같은 인종이 아닌 것 같아요.”

“하하, 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원은 희선을 매일 보는데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출근 시간이 되었는데도 침대에서 미적거리기에 서원은 커튼을 활짝 열었다. 그제야 비척비척 일어난 희선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눈을 잔뜩 찡그렸다. 하지만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상태로 눈을 감은 채 계속 있자, 서원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희선아, 씻어야지.’

서원이 잔소리해도 희선은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자, 서원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사이에도 앉은 채로 조느라 움직이지 않기에 다시 한번 깨우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희선아.’

앉아 있는 희선이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뻗친 데다 졸린 표정이긴 하지만, 그 순간 서원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마치 광고 속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다. 환한 햇빛 아래에서 눈을 비비는 희선은 흰 티셔츠만 입고 있었다. 평범한 차림이지만 그래서 더 잘생긴 얼굴에 돋보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쓸면서 저를 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만큼이나 눈이 부시다.

‘자기야, 나 일으켜 줘.’

귀여운 척을 하며 손을 뻗었다. 서원은 자신을 보며 웃는 남자를 넋 놓고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망설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희선은 얼른 데려가라는 듯 손을 더 뻗었다가 서원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끼더니 다른 손으론 허리를 감싸 안았다.

‘회사 가기 싫다.’

매일 하는 말이었다. 서원은 평소라면 네가 사장이라며 달랬을 테지만, 그 순간엔 어쩐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희선도 의외라고 느꼈는지 웬일이냐는 듯 바라보다 곧 씩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희선이 얼른 키스해 달라는 듯 입술을 내밀자 서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렸다. 가볍게 부딪친 후엔 바로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희선이 그의 허리를 붙잡으며 혀를 집어넣었다.

가벼운 모닝 키스로 끝날 줄 알았던 스킨십은 길게 이어졌다. 서원은 진정하라는 듯 어깨를 쓸었으나, 상대는 멈추지 않았다. 희선이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다시 침대로 몸이 눕히자, 서원은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때렸다.

‘출근하라고!’

언성을 높이며 다그치자, 희선은 입을 비쭉거리며 그제야 일어났다. 투덜거리며 욕실로 향하자 서원은 한숨을 흘리며 입가를 닦았다. 눈앞에 거울을 보니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한 자신이 보였다. 서원은 괜히 부끄러워 황급히 손부채질을 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때가 떠올라 다시 얼굴이 달아오른다. 서원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담당은 무슨 오해를 했는지 허허 웃으며 괜찮다는 듯 손을 뻗어 어깨를 두드렸다. 전과 달리 친근한 태도였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원래 누구나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모델은 하나씩 있잖아요.”

“네, 그렇죠…….”

“그런데 그 사진은 어디서 구하셨어요? 전 처음 보는데.”

생각보다 더 열렬한 팬인 것 같았다. 차마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없었던 서원은 다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난감해진 그는 횡설수설 변명을 했다.

“네…… 아, 저도 몰라요. 이거 제가 한 게 아니라 친구가…….”

“친구가 구한 건가요?”

“네? 네…… 가끔 제 휴대폰으로 장난을 쳐서…….”

“그 친구분도 김희선 씨 팬인가 보네요!”

“네에…… 뭐…….”

서원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귀까지 살짝 붉어져 있는 그를 보자, 담당은 곧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평소 얌전한 서원이 숨겨 둔 팬심을 들키자 부끄러워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아, 근데 이 사람은 늙지를 않아요. 나는 이제 아저씨인데 김희선은 예나 지금이나 완전 연예인, 딱 모델 같잖아요. 주얼리 광고할 땐 살이 조금 빠졌다가 최근 다시 조금 찐 것 같은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멋있더라고요.”

“그건…… 맞죠.”

서원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희선은 뭘 해도 태가 났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쪼그리고 있어도 전혀 궁상맞지 않았다.

희선은 쉬는 날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침대나 소파에서 머리가 마구 뻗친 채 휴대폰만 붙잡고 게임을 했다. 그러다 서원이 무어라 잔소리하면 찔끔한 표정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 후엔 제가 끌어낼 때까지 저를 쳐다보며 미적미적 계속 게임을 했다.

190센티미터의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마치 엄마 눈치를 보는 아이 같았다. 한심했지만 한편으론 솔직히 조금 귀여웠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한 적은 없었다. 서원은 제 앞에서 계속 희선의 사진을 보여 주는 담당의 말에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민망해했다.

미팅이 끝나자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서원은 담당자가 돌아간 뒤에도 얼마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대화창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메시지로 희선의 사진들을 잔뜩 받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팬이라는 그는 자기 회사와 집 PC에 희선의 사진이 잔뜩 있다며, 아끼는 것들을 보내 주었다. 일 얘기 외에 사담으로 말을 거는 것은 처음이었다. 서원은 어떻게 잘라야 할지 몰라 네네, 대꾸하다 그가 퇴근할 때까지 수많은 사진을 봐야 했다.

그 후엔 희선은 평소보다 늦은 퇴근을 했다. 평소엔 그가 올 시간에 맞춰 미리 준비하던 서원은 그제야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채소볶음을 하는데, 옷을 갈아입고 나온 희선이 옆으로 다가왔다. 서원은 그를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너 원래 남자 팬도 많았어?”

“몰라.”

“왜? 남자 팬들은 표현을 잘 안 해?”

“있어도 관심 없어.”

희선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건조하게 대꾸했다. 아무 감흥도 없는 눈빛과 고저 없는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서원은 왠지 모를 서운함까지 느꼈다. 너무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희선이 고개를 돌리다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냐.”

서원은 고개를 홱 돌리며 튀김용 젓가락으로 채소를 볶았다. 그 후엔 말없이 저녁을 만들다 식사 후에야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내 프로필 사진 네가 바꿨지?”

“아차!”

희선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바꿔 놓고 까맣게 잊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릇을 정리하던 그는 재빠르게 싱크대로 도망쳤다. 서원은 그를 차갑게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 말라니까. 너 때문에 오해받았잖아.”

“오해? 무슨 오해?”

“네 팬이라고.”

덕분에 담당자의 알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알게 되었다. 서원은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희선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아, 정말? 누가 너보고 내 팬이냐고 물었어?”

서원은 대답 대신 가까이 다가가 희선을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살살 때려 아프지도 않을 텐데, 희선은 소리를 지르며 엄살을 피웠다.

“악! 내 다리, 몸이 재산인데 폭력을 휘두르다니!”

서원은 서러운 척하는 희선을 무시하고 커피를 내려 거실로 향했다. 희선은 제 몫은 왜 없느냐며 뒤에서 졸졸 쫓아와 항의했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어? 내 팬이라고 했어?”

“그럴 리가.”

“그럼 뭐라고 했는데!”

“친구가 장난으로 바꿨다고 했지.”

“왜? 왜 아니라고 했어?”

“그럼 뭐라 그래.”

서원은 황당한 눈으로 옆에 달라붙는 희선의 팔을 치웠다. 사실 상대는 믿지 않은 것 같지만, 희선에겐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누가 물어봤는지는 안 물어봐?”

“남자라며.”

희선은 해맑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궁금해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칼에 선을 긋자, 서원은 온기를 잃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희선은 가끔 자신이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사는 것 같았다. 원래 이성애자라 그런지, 주변에 게이도 많은데 변한 것이 없다.

이럴 때마다 너도 이제 게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유치하게 느껴져 참는 중이었다. 서원은 커피를 마시며 옆에서 칭얼거리는 희선에게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사람은 정말 네 팬이던데. 네가 찍어 올린 셀카도 못 보던 거라고 바로 알아보고.”

자신도 언제 찍은 사진인지 몰랐다. 지적을 받아 확인해 보니 자신의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안 찍어 갤러리에 들어가지 않는 서원은 뒤늦게 열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과연 모델답게 포즈도 제각각이었다. 귀여운 척, 멋진 척, 슬픈 척, 사연 있는 척, 놀란 척, 기쁜 척, 온갖 콘셉트로 찍은 사진들은 아마 담당자가 봤다면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원은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희선은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그래? 진짜 내 팬이긴 한가 보네.”

“필터도 없이 피부 좋다며 칭찬하던데.”

“필터 같은 건 못생긴 애들이나 쓰는 거고.”

희선은 잘난 척하며 대꾸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지만 눈빛이 냉정한 걸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서원은 마르지 않는 그의 잘난 척에 존경심마저 느껴야 했다.

고개를 돌린 채 커피를 마시며 TV를 볼 때였다. 조용하기에 뭘 하나 싶어 옆을 살피니, 희선이 어느새 제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뭐야? 왜 도로 사진 내렸어?”

“하지 마.”

서원은 얼른 손을 뻗었다. 그러나 희선이 잽싸게 일어나 피하는 바람에 휴대폰을 찾지 못했다.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를 쫓아 일어났으나, 희선은 손을 번쩍 들었다.

“못 잡겠지?”

약 올리는 모습을 보자 울컥한 서원은 소파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희선은 또 냉큼 뒤로 물러났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서 약 올리듯 양손을 흔들자 서원의 표정이 굳었다.

“이리 내.”

“싫어.”

희선은 서원의 표정을 따라 하며 똑같이 정색했다. 서원의 인상이 구겨지자 그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제가 더 화가 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기에 서원은 화가 나는 와중에도 내심 감탄했다.

차라리 저 재능을 다른 곳에 써야 하는데. 서원은 인상을 구기며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장난 그만 치고 내놔. 빨리.”

“프로필 사진 바꾸면 줄게.”

희선은 바로 살살 웃으며 애교를 피웠다. 물론 여전히 휴대폰을 든 손은 번쩍 들고 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높이였다. 이런 장난을 수도 없이 당해 본 서원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 왜? 원래 프로필은 애인 사진으로 하는 게 예의지.”

“너도 내 사진 아니잖아.”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어. 네가 허락만 해 주면.”

물론 희선은 시도했었다. 그러나 서원이 몹시 언짢아하며 말렸기에 얼굴이나 전신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옆집 개들과 산책할 때 함께 찍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었다.

물을 주느라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서원의 뒷모습과 그를 가리듯이 서 있는 루엔과 노즈의 모습이었다. 개들이 시선을 사로잡아 자신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대신 키우는 개냐고 질문을 하도 받아 상태 메시지에 옆집 개라고 적어 놓을 정도였다.

더불어 거의 보이지 않는 자신은 옆집 사람으로 인식된 모양이다. 서원은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다.

“안 돼.”

서원이 그만하라는 듯 엄하게 자르자, 희선은 입술을 또 비쭉 내밀더니 얼마 안 가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나야 얼굴 팔렸지만 넌 아니잖아.”

서원은 제 목을 안으며 우는 남자를 곤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전엔 집착이 싫다느니 혼자가 편하다느니 말해 놓고, 사귀니 정반대의 행보만 보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서원은 원래 제 연애사를 남에게 보여 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속이 답답할 때면 아주 가까운 친구들에게 털어놓긴 하지만, SNS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알려 주는 일은 없었다.

“언젠 자기를 트로피처럼 자랑하는 거 싫다더니.”

“누가? 내가?”

희선이 양 검지로 저를 가리키며 물었다. 시치미를 떼는 그를 서원은 가볍게 노려보며 몸을 돌렸다.

“그럼 누구겠어.”

“내가 그땐 좀 어려서 그랬나 보지. 자랑해. 제발 자랑해 줘.”

희선은 다시 어깨에 달라붙어선 머리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커다란 덩치를 기대자 그에 비해 작은 서원의 몸은 바로 휘청였다.

“하지 마. 아, 정말.”

서원은 짜증을 감추지 않으며 밀었으나, 희선은 도로 달라붙어서는 더욱 끈질기게 굴었다. 입을 크게 벌려 어깨를 물자, 서원이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을 흘렸다.

아프진 않지만 귀찮았다. 힘도 세서 쉽게 밀려나지도 않는다. 버둥거리던 서원은 이내 포기하고 가만히 안겼다. 희선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눌렀다.

이럴 땐 옆집 개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희선은 본인이 내킬 때 꼭 스킨십을 해야 하고 기분이 좋으면 방방 뜨곤 했다. 그의 기분은 급속도로 바뀌는 데다 행동 또한 거침이 없어, 서원은 꽤 오래 사귄 지금도 적응이 힘들었다.

그래도 배운 건 하나 있었다. 일단 희선은 즉흥적인 성격이라 고집을 부릴 땐 내킬 때까지 조르게 내버려 둬야 한다. 그러다 나중에 흥이 식으면 그때를 놓치지 말고 알아듣게 설득해야 했다.

“안 된다면 안 돼.”

“으으음…….”

희선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표정도 마찬가지로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온몸으로 거부하는 그를 지켜보던 서원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방법을 썼다.

“희선아.”

“왜?”

희선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니 삐친 것이 분명했다. 서원은 고개를 돌린 채 저를 보지 않는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한강에 산책하러 갈까?”

희선이 그 말에 바로 고개를 돌린다. 좋다는 말은 없었으나 주먹을 꽉 쥔 채 저에게 집중하는 것을 보니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서원은 내심 안도하며 겉으론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너 거기 좋아하잖아. 나간 김에 맥주도 마시고.”

집에서 반 시간쯤 걸으면 한강 둔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둔치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다른 곳과 달리 한산한 매점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야식을 먹는 것이 그들의 코스였다.

정확히는 희선이 멋대로 주전부리를 잔뜩 사는 것이지만, 서원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역시나 맥주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희선의 눈이 반짝거리더니 얼른 제 손을 붙잡아 방으로 향했다.

“그래. 가자!”

다행히 프로필 사진에 대해선 관심이 사라진 것 같았다. 서원은 안심하며 빨리 나가자는 희선의 재촉을 따라 외투를 걸쳤다.

매점에서 파는 삼각김밥은 맛이 없어서 핫도그와 김밥은 미리 샀다. 일부러 외곽 쪽으로 가니 어둡고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서 더 편했다. 희선은 이번에도 매점에서 맥주뿐만 아니라 라면과 만두 소시지를 사서 매점에 비치된 테이블 구석에서 먹었다.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전부 소모될 수 없을 만큼 먹어 놓고 그제야 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어휴, 출출했는데 이제야 좀 살겠네.”

행복하게 먹는 모습은 도저히 저녁 식사 후에 나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서원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새삼스럽게 말해서 무엇하냐는 생각이 들어 도로 입을 다물었다.

희선은 집에 돌아갈 때까지도 만족해 보였다. 언제 심술을 부렸냐는 듯 방긋방긋 웃었고 덕분에 사람이 많은 길에선 시선이 모였다.

“집에 가서 딱 영화 한 편 보고 자면 되겠다.”

후드를 눌러서 가리고 있어도 워낙 키가 커 눈에 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서원은 홀린 듯이 희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도착해서는 침대에 누워 태블릿 PC로 편하게 기대 누워 함께 영화를 봤다. 뭘 볼까 고민하는데, 마침 케이블 채널에서 서원이 좋아하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희선은 바로 아는 척을 했다.

“아, 이거 기억나. 재밌었지”

영화는 드물게 두 사람의 취향이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원래는 희선은 판타지나 액션 영화를 좋아하고 서원은 드라마 요소가 강한 편을 선호했는데, 이 영화는 두 가지를 다 만족시켜 주었다.

희선은 서원의 어깨에 기댄 채 영화를 즐겁게 감상했다. 서원도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느긋하게 화면을 봤다. 그러나 몇 분 후엔 희선이 이불 속으로 손을 뻗어와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영화 보잖아.”

“이미 몇 번이나 봤잖아.”

정말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성격이었다. 서원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자세를 고치고 제 위에 올라타는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 *

담당자가 희선의 팬이었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지만 얼마 후엔 잊어버렸다. 희선은 다시 시작된 촬영으로 바빴고 자신도 막바지 수정 작업을 하느라 집중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담당자와는 자주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전체적인 콘셉트에 대해서도 이미 온라인으로 많은 의견 교환이 끝난 상태였다.

얼마 전에 만남도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기 위해 본 것이었다. 최종 편집 파일도 메일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에 직접 얼굴을 보진 않았다. 오늘도 사소한 수정 사항에 대해 SNS로 대화를 하는데, 일 얘기만 하다가 다 끝나고 나서야 넌지시 말을 꺼낸다.

[사진 없어지셨네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친구가 장난친 거라서요.]

[네네. 그렇죠.^^]

서원은 곤란함을 느끼며 열심히 변명했다. 물론 상대의 이모티콘을 보니 딱히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옷은 직접 매장에서 사시나요? 선생님 댁이랑 멀지 않은 데 있잖아요.]

[네? 옷이요?]

[전에 보니 세렝게티 옷 입으셨던데…….]

그 말에 서원은 다시 낭패감을 느꼈다. 유난히 자신을 살핀다 싶더니, 제가 입은 옷이 희선의 회사에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스타일이라 모를 줄 알았는데 옷 디자인까지 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서원은 새삼 상대의 능력에 감탄했다.

[아…… 저는 온라인으로 샀어요. 친구가 추천해 줘서요.]

[네네. 조금 전에 그 친구분이요?^^]

담당자는 이번에도 잘 알겠다는 듯 웃었다. 서원은 온라인으로 대화 중인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마 직접 만났다면 자신은 익숙지 않은 상황에 굳은 채로 횡설수설했을 터였다.

[근처에 본점이 있는데 위층이 회사라 김희선 자주 온대요.]

[그렇군요. 참고할게요.]

굳이 매장에 가지 않아도 집에 살고 있었지만, 서원은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유명하긴 해도 연예인 정도는 아니라 안심했는데 앞으론 더 주의해야 할 것 같았다.

서원은 한숨을 흘리며 노트북을 멍하니 바라봤다. 앞에 놓인 머그 컵을 들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길게 들이켜는데 옆에서 제 이름을 불러 왔다.

“김희선은 오늘 뭐 한다고?”

“어? 나도 몰라.”

서원은 저도 모르게 단호하게 부정했다. 강한 부정에 효성은 깜짝 놀라 당황스러워했고, 서원도 제 행동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아, 무슨 일인지 정확히 몰라서.”

서원은 미안한 얼굴로 정정하니, 효성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말을 걸어 놀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금 서원은 오랜만에 효성의 카페에 와서 작업 중이었다. 최근 연애를 시작한 그가 웬일로 만나자고 한 탓이었다. 원래는 크게 바쁘지 않아 혼자 일하던 그는 최근엔 아르바이트생도 구해 밤엔 한가해졌다.

데이트하느라 최근 연락도 없던 효성이 웬일로 부르나 했더니, 역시나 한결이 바쁜 탓이었다. 마침 희선은 일이 있어 언제 끝날지 몰랐고, 오랜만에 효성과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다.

“서원아, 이따 뭐 먹을래?”

“넌 뭐 먹고 싶어?”

“나? 나는 오늘 좀 매운 게 당기네. 그동안 못 먹었거든.”

효성은 매콤한 게 좋겠다며 근처 음식점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서원은 늘 그렇듯이 뭐든 좋다며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으론 효성에게도 미리 말을 해 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효성은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당연히 어디 가서 떠들진 않을 걸 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희선의 회사 근처인 데다 그와 직원들도 들락거린다. 여태 운 좋게 담당자와 마주치지 않았지만 어쩌다 이곳에 왔다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오해받기 딱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체구가 안으로 들어오며 반갑게 제 이름을 외쳤다.

“서원아, 나 생각보다 일찍 끝났으니까 같이…….”

“아니, 안 돼.”

서원은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펴서 그를 말렸다. 명백한 거부 의사에 희선은 눈을 크게 뜬 채 저를 쳐다봤고, 서원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미안…….”

그러나 이미 희선의 표정은 불쾌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납게 눈을 치켜뜬 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희선은 조금 전에 행동이 뭔지 설명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서원은 곤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길거리를 살피니 다행히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서울이 좁고 미팅을 자주 다닌다 해도 종로에서 일하는 담당자가 평일 낮에 이 근처를 지나갈 확률은 희박했다. 서원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험악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희선의 팔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할 말 있어. 우리 얘기 좀 하자.”

“뭐?”

희선은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번에도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서원은 그를 데리고 나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효성도 당황해 그를 불렀다.

“야, 어디 가?”

“잠깐만 나갔다 올게.”

어차피 짐도 다 놔두고 가는 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휴대폰만 챙긴 서원은 희선에게 회사 방향을 가리켰다.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하자.”

카페에서는 혹시라도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서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희선은 불만스러워하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두 사람은 회사 옥상으로 갔다.

날이 따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바람이 많이 불어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도어 록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서원은 바로 인상을 구겼다.

희선이 이사하며 이곳에선 현재 정현이 살고 있었다. 옷들도 많이 옮겨 공간도 넓어졌는데 더 깔끔해지기는커녕 번잡해졌다.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실 정현은 퇴근 후에도 사무실에서 게임을 하다 이곳에선 씻고 잠만 자니 더러워질 수 있을 리 없다. 서원은 아무렇게나 놓인 물건들은 대충 치우려 했지만, 희선이 바로 그의 손을 저지했다.

“내버려 둬. 왜 네가 해 줘.”

희선은 바로 정색하며 서원을 침대에 앉혔다. 과거에 자신이 도움받았던 것은 싹 잊은 것 같은 태도였다. 게다가 어서 설명해 보라는 듯 가까이 붙어 앉는다. 서원은 피식 웃으면서 그를 보다 주먹을 들어 그의 무릎을 약하게 쳤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뭐?”

희선은 갑자기 왜 자신 탓을 하냐며 억울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서원이 진지하게 노려보자, 슬그머니 눈을 내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바로 태도를 바꾸는 눈치 빠름에 서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프로필 사진 바꿔 놓는 바람에 담당자한테 엉뚱한 오해를 받았단 말이야.”

“겨우 사진으로 무슨 오해를 해? 평범한 남자도 아니고 내 사진인데.”

“네 팬이라서 바로 알아봤으니까 문제지.”

“어? ……정말?”

“그래. 인터넷에서 본 적 없는 사진이라면서 날 너의 엄청난 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그건 틀린 말은 아닌…… 아, 아냐. 잘못했어.”

서원의 눈빛이 서늘해지자, 희선은 바로 사과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그런 사람이 네 주변에 있을 줄 몰랐지.”

“나도 몰랐어. 원래 사담은 거의 안 했으니까.”

식사 자리에서는 사담을 나누긴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취미는 주로 운동이나 게임이었고 그 외에 화제는 꺼내지 않았다.

원래 사회생활 하며 만난 사람들끼리는 대중적인 취향이 아니면 잘 드러내지 않는다. 서원도 그랬다. 저랑 같은 성향일 거란 확신이 드는 사람이 몇 명 있었으나 굳이 겉으로 표현한 적은 없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내가 너랑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면 어떡해.”

“어쩌긴, 부러워하겠지.”

“…….”

“내 팬이라며.”

서원은 대답 대신 잘난 척하며 웃는 희선의 허벅지를 세게 쳤다. 원래는 다른 사람은 때리지 않는데, 희선과 살며 생긴 습관이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거나 답답한 순간에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곤 했다.

“농담하지 말고.”

“응, 안 할게.”

희선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눈빛에서 딱히 내키진 않으나 서원이 뭐라 하니 참는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무릎에 팔을 괸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대안을 하나 내놓았다.

“그냥 친구……라고 하든가. 그럼 내가 장난칠 수도 있지.”

“이미 모르는 척했단 말이야.”

“내가 싫어해서 그랬다고 하면 되잖아.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해.”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먹힐…….”

“먹히고도 남지.”

희선은 당당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내려 서원과 시선을 맞췄다. 갑자기 훅 가까워지자 서원은 움찔 놀라며 몸을 조금 뒤로 젖혔다. 희선은 긴장하는 서원을 보더니 씩 웃으며 허리를 감쌌다.

“내 팬이면 내 성격도 알 텐데 이해 못 하겠어?”

“아…….”

서원은 그 순간 바로 이해하고 말았다. 효성에게 그의 과거 성질머리에 대해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선은 쫓아다니는 팬들에게 가차 없었다. 순식간에 정나미 떨어지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고 그 덕에 사생활이 자유로웠다. 지금도 직접 그에게 다가오는 팬들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서원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차라리 담당에게 솔직히 말할까, 지금이라도 그게 낫지 않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의 팬이니 더 역효과가 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든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희선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정신을 차리니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입술이 겹쳐졌다. 서원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곧 놀라 그를 밀었다.

“뭐 하는 거야.”

“뭐긴, 늘 하는 거면서.”

희선은 왜 모르는 척이냐며 웃으며 달라붙었다. 하지만 서원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남의 집에서 실례잖아.”

지금 이곳은 집이 아니라, 그의 회사 옥상이자 정현이 쓰는 방이었다. 남들 다 일하고 있는데 위에서 남세스러운 행동을 하기 민망해 얼굴을 붉히자, 희선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실례? 원래 여기 내 집인데. 그놈이 멋대로 들어와 사는 거지.”

맞는 말이긴 했다. 사실 이 건물 전체가 희선의 것이었다. 정현은 그가 자리를 비우자 냉큼 선점한 것뿐이었다.

“꼬우면 나가라 그래. 월세 한 푼 안 내고 살면서. 게다가 이 침대도 내 거거든? 시트도 내가 산 거라고.”

그러고 보니 시트도 이불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정현은 정말 몸만 들어 왔는지 변한 것이 없었다. 못 보던 노트북과 몇 가지 물건들 외엔 예전과 똑같았다.

어수선하긴 하지만, 그래도 환기와 세탁은 똑바로 하는지 냄새나거나 지저분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서 하는 건 낯부끄럽고 어색해 서원이 몸을 피하자 희선은 그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그 후엔 재빠르게 서원에게 키스했다. 혀가 파고들어 와 입술을 벌리자, 서원은 저도 모르게 힘을 풀었다. 깊이 찔러 들어와 안을 훑어 대는 움직임에 몸에 힘이 풀렸다.

부드럽게 안을 휘젓자 서원은 점점 머릿속이 흐려졌다. 몸에 힘이 빠져 휘청거리니, 희선은 재빠르게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서원은 반소매 티셔츠 위에 맨투맨을 입고 있었는데 점점 말려 올라가 아래쪽 피부가 훤히 드러났다. 서늘한 공기가 닿자 서원은 움찔거렸으나 전처럼 거부하진 않았다.

희선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를 비틀었다. 제가 늘 물고 빨아 대서 부은 탓에 전보다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흣! 희선아…… 잠깐…….”

“왜? 얼른 빨아 줘?”

척 봐도 난감해하는 기색이었으나, 희선은 모르는 척 서원의 뺨에 입술을 누르며 물었다. 가뜩이나 붉어진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싫진 않은지 쭈뼛거리며 저를 올려다보자 희선은 못된 미소를 흘리며 보란 듯이 옷을 더 올려 그의 가슴을 주물렀다.

“좋지? 응?”

“응…… 흐응…….”

서원이 멍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단정하던 평소 모습과 달리 야해 빠진 얼굴로 허리를 꿈틀거리자, 그는 못 참겠다는 듯이 제 바지 벨트를 풀었다.

서원은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희선은 연이은 촬영 탓에 며칠 동안 강제 금욕한 상태였다. 자신이 한가한 상태라면 쪽잠을 자더라도 덤볐겠지만, 안타깝게도 서원도 마감이 겹쳐 바빴다.

원래도 사흘을 참지 못하는 희선이었다. 여름 상품들을 업데이트하느라 5일쯤 참았으니 그동안 잔뜩 쌓인 욕정을 지금 풀 게 틀림없었다.

예상대로 희선은 서원의 바지도 풀었다. 불룩해진 앞섶이 드러나자 서원은 창피해했으나, 커다란 손이 단단해진 성기를 주물렀다. 속옷 위로 꽉 붙잡아 문질러 대자 허리를 뒤틀며 신음하는 사이 손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예민한 살에 딱딱한 피부가 닿자, 서원은 더욱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손은 어느새 붙잡혀 희선의 성기에 닿았다. 얼른 만져 달라는 듯 희선이 귓가에 대고 졸랐다.

“자기야, 빨리. 응?”

서원은 홀린 듯이 그의 성기를 붙잡았다. 망설임 없이 바깥으로 드러난 성기를 만져 대는 것은 몹시 익숙해 보였다.

원래도 집에서 둘만 있을 때면 희선은 서원에게 제 성기를 만져 달라 조르곤 했다. 아니면 제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엉덩이에 제 앞섶을 비비적거리는 것도 좋아했다.

지금도 서원이 애무하자 손을 뒤로해 느슨해진 바지 속으로 집어넣고 엉덩이 사이를 문질렀다. 입구를 살살 간지럽히는 손길에 서원은 엉덩이를 들썩였다.

“으응…… 안 돼……. 아…….”

“왜 안 돼?”

희선은 장난스럽게 물으며 손가락을 입구 안으로 천천히 찔러 넣었다. 확연한 이물감에 서원은 약하게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아…… 하지, 흣! 으응!”

그러나 희선은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이 두 마디쯤 들어와 안을 살살 굴려 대자 간지러운 쾌감이 일었다. 서원은 곤란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희선은 귀엽다는 듯 뺨에 쪽 입을 맞추더니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착하네. 알아서 힘 풀고.”

그의 말대로였다. 서원의 의지와 다르게 그와의 행위에 익숙해진 몸은 성기를 자극당할 때부터 뒤가 욱신거렸다. 손가락이 들어오자 습관대로 힘을 풀고 기대감에 안이 젖어 들고 있었다. 서원은 그런 스스로가 부끄러워 발갛게 익어서는 울상을 지었다.

“흑! 여, 여기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벌써 뒷보지 다 젖었잖아.”

“흣…… 으응!”

“누워 봐. 응?”

서원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시트에 몸을 눕혔다. 오므렸던 다리가 힘없이 벌려지고 희선은 이미 벨트가 풀어진 바지를 벗겨 뒤로 내던졌다.

“아, 안 돼……. 누가 오면…….”

“이 시간에 누가 와.”

그랬다간 근무 태만으로 확 잘라 버릴 테니 안심하라며 희선이 속삭였다. 그럼에도 서원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안을 찔러 대자 엉덩이를 움찔거리면서도 계속 문 쪽을 힐끔거린다. 희선은 혀를 차며 그의 몸을 눕히고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알았어. 문에서 안 보이게 내가 가려 줄게. 그러니까 다리 벌려 봐.”

희선이 제 위로 올라타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러나 내용은 그리 상냥하지 못했고, 서원은 겁먹은 표정으로 그가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희선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서원의 다리가 올려졌다. 두께도 색도 전부 확연히 차이가 났고, 사이를 더욱 벌리자 젖은 입구가 드러났다. 희선은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더니 단단한 끝부분을 붉은 속살에 대고 살살 문질렀다.

“대자마자 벌름거리는 것 봐. 얼른 자지 빨고 싶어 난리 났네.”

“하, 하지 마아……. 하아…….”

상스러운 표현에 서원은 울상을 지었다. 희선은 원래 흥분할수록 못된 말들만 내뱉는다. 오늘도 당연히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서원은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으나 그사이 두꺼운 귀두가 안으로 푹 꽂혀 들어왔다.

“앗…… 하아, 아응! 응!”

“좋지? 응?”

희선은 기둥을 안으로 꾹꾹 밀어 넣으며 물었다. 심술궂은 미소를 짓는 그를 원망스럽게 보는데 불시에 세게 처박혔다. 서원은 히익,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그사이 희선은 그의 안으로 깊이 자신을 묻었다. 어느새 긴 페니스가 제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딱딱한 살덩어리에 꿰이자 서원은 다리를 벌벌 떨며 사정했다.

“흐아아!”

삽입만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희선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서원은 보수적인 성격과 달리 잘 느끼는 편이었다. 초반엔 제 성기가 너무 커 버거워하긴 했지만 익숙해진 후론 넣자마자 사족을 못 썼다.

이사 온 후론 더 잦은 관계 탓에 전과 달리 음탕해졌다. 구멍이 닫힐 틈이 없도록 해 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희선은 애무는 집요했고 삽입은 거칠었다. 익숙해진 서원은 그가 앞을 만져 주기만 해도 자연히 뒤가 젖었지만,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지금도 이른 사정에 수치심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서원은 희선이 웃으며 키스하자 조심스럽게 호응했다. 젖꼭지까지 살살 비벼 주자 몸을 들썩이며 허리에 다리를 감는다. 아직 안이 연결된 터라 천천히 허리를 흔들자, 다시 듣기 좋은 교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희선은 안이 다 풀린 것을 깨닫자마자 속도를 높였다. 서원은 점점 더 크게 흔들리며 제 가슴을 빠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은 채 헐떡였다.

“으응, 응…… 조, 좋아아……아! 너무 세, 흣!”

“세게 박아야 좋아하잖아.”

“흐으……응! 으응! 하아! 앗!”

“적당히 박아 주면 이제 재미없지? 항상 더 깊이 쑤셔 달라고 난리면서.”

희선은 사나운 기세로 제 성기를 쑤셔 박았다. 서원은 그때마다 크게 흔들리며 아래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쾌감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젠 이전의 행위들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희선과 교접하는 동안엔 이성을 지키기가 너무 힘들었고, 과거의 경험도 전부 장난 같았다.

이렇게 길고 두꺼운 데다 단단한 성기여야 했다. 또 제 몸을 가볍게 들어 난폭하게 구는 상대여야 절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같았다가 아니라 확실히 그랬다. 서원은 헐떡거리며 제 배 속을 어루만졌다. 단단한 아랫배 너머로 제 안을 채우는 것이 무언지 확실히 느껴졌다.

“흐윽……읏! 으응!”

“자기야, 이 보지 누구 거야? 응?”

“자, 자기거어…….”

“이름 말해 줘야지.”

“희선이 거…… 네 거야. 다 네 거야.”

서워은 정신없이 울먹거리며 대꾸했다. 희선은 그 말에 몹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 후엔 쉬는 시간은 끝났다는 듯이 다시 격렬하게 쳐 대기 시작했다. 서원은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흘리며 시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아, 희선아. 아니, 자기야, 나 좀, 아! ……아앗!”

“자기 보지가 너무 조여서 못 참겠어.”

서원이 자지러지며 외쳤지만, 희선은 모르는 척 대꾸했다. 그 와중에도 허리는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굵은 기둥이 좁은 입구 안을 한계까지 벌리며 난폭하게 안을 꿰뚫었다.

젖은 살끼리 부딪치며 철퍽철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매트리스 또한 크게 출렁거리며 반동으로 서원의 몸도 마구 흔들렸다.

몸이 밀려 반쯤 접힌 채라 다리는 양쪽으로 벌어져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순간순간이 발끝은 잔뜩 오므려졌고, 그때마다 커다란 교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한차례 사정한 후지만 다시 절정에 다다를 것 같았다. 서원은 완전히 흥분해 제 위에서 찍어누르는 남자에게 매달린 채 엉덩이를 흔들었다.

“으응, 희선아, 아앗! 아!”

“하아, 서원아. 너무 좋아. 네 구멍 진짜, 흣!”

“나도 좋아. 흣, 계속해 줘. 더, 더 쑤셔 줘…….”

서원은 흥분에 젖은 채 희선에게 달라붙었다. 취한 사람처럼 웃으며 제게 안기자, 희선은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서원에게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서원도 기뻐하며 입술을 벌렸고, 한참 뒤에야 고개를 떼어 낸 희선은 가느다란 허리를 두 손으로 세게 조였다. 그 후엔 전보다 더 난잡하게 처박아 대더니 서원의 안에 그대로 뜨거운 정액을 가득 쏟아 냈다.

분명 들어올 때는 환한 대낮이었는데, 나가니 노을도 지고 있었다. 서원은 낮게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옆에선 그런 서원을 지켜보는 차가운 눈을 한 효성이 있었다.

“잠깐 다녀온다더니?”

“미안…….”

노트북도 내버려 두고 무려 세 시간을 비웠다. 짧게 사과해도 효성의 눈초리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잔소리도 하기 싫다는 듯 외투를 걸쳤다.

“나가자. 밥이나 먹게.”

“응…… 내가 살게.”

“당연하지.”

효성은 아르바이트생이 온 후에도 연락도 없던 서원을 기다렸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 배고프다고 했으니 지금까지 굶주린 채였을 것이다. 서원은 쌀쌀맞게 대꾸하는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나섰다. 하지만 공손한 태도에도 효성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과 달리 묘하게 밝아진 피부나 홍조를 띤 뺨을 보더니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재미 좋았나 보지?”

서원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뺨을 더욱 붉히며 못 들은 척했고, 효성은 콧방귀를 끼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서원은 이번에도 부지런히 그를 따라 걸었다. 조금 전까지 희선의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어 댔으니 변명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원해서는 아니었다.

한 차례 제 안에 사정한 희선은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체위를 바꿔 열심히 그의 안에 자신을 박아 넣었다. 서원은 지쳐 일어나지 못했고, 조금 쉬다 돌아가려고 하니 희선은 그의 허리를 붙잡아 제 위에 앉힌 뒤 다시 삽입했다. 서원은 효성과의 약속 때문에 애가 탔지만 허리를 꽉 붙잡은 손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희선아, 나 정말 가야 해…….’

‘나 버리고 갈 거면 싸게 해 주고 가.’

희선은 어리광을 부리듯이 대꾸했으나 표정과 달리 악력이 너무 강했다. 슬그머니 허리를 쳐올리자, 잔뜩 자극당한 내벽이 움찔거렸다. 서원은 신음을 흘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뒤를 조였다.

어쩔 수 없었다. 희선은 한 번 흥분하면 앞뒤 가리지 않는 데다 질투도 심했다. 저를 두고 효성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말은 안 해도 삐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가 사정할 때까지 열심히 허리를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희선아, 빨리 싸 줘. 나, 못 참겠어.’

‘서원아. 네 안, 너무 뜨거워. 자지 다 녹을 것 같아.’

‘하아, 자기 자지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래.’

게다가 희선을 달래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음탕한 말들까지 잔뜩 해 줘야 했다. 흥분했을 땐 이성이 없다 보니 튀어나오지만, 멀쩡한 정신에 다시 떠올리자 뺨이 화끈거렸다.

서원은 애써 민망한 기억을 지워 내려 노력했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효성을 쫓아가니 그는 제법 비싼 곳을 골랐다. 하지만 가끔 기분 내러 오기엔 좋은 곳이긴 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음식이 나오자 효성의 기분은 금세 풀렸다. 서원도 만족스럽게 식사하며 그의 자랑도 들어 주었다. 한결과는 여전히 잘 사귀고 있는 것 같아 안도하는데, 메시지가 왔다.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들자 효성은 바로 눈을 다시 치켜뜨며 물었다.

“뭐냐? 김희선이야?”

“응. 정현 씨랑 저녁 먹을 테니 끝나면 연락하래.”

지금 그는 옥탑방에서 침대 시트와 이불 빨래가 완료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서원이 나오기 직전 세탁기에 넣고 그에게 꼭 널라고 신신당부를 한 탓이다.

희선은 신경 쓰지 말라 했지만, 서원은 그럴 순 없었다. 남의 잠자리에서 일을 벌이고 심지어 그냥 가다니, 본인이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 처음엔 근처 홈웨어 매장이나 마트라도 가서 사려고 했는데, 다행히 옥탑엔 야근하고 자고 가는 직원들 때문에 여분의 이불이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라면 찝찝해서 못 덮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침구는 이미 전에 희선이 쓰던 이불이었다. 이미 수없이 자신과 뒹굴었던 이불을 정현은 아무렇지 않게 덮고 살았다.

생긴 것은 무던해 보이는데,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서원은 그가 왜 희선과 친구인지 해를 거듭할수록 이해가 됐다. 비록 취향이나 표현 방식은 달라도 묘하게 낮은 모럴이나 기본 성향이 비슷했다. 무심하게 정곡을 찌르는 분위기도 어쩐지 겹칠 때가 있다.

이래서 어릴 때부터 친구인가 보다. 서원은 그런 결론을 내리며 효성의 얘기를 계속 들어 주었다. 대부분 근황을 빙자한 자랑이라 다른 생각을 조금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했는데 굳이 피자 사 들고 집에 오더라고. 나 이러다 곧 굴러다닐지도 몰라.”

“하나도 안 쪘는데?”

“아, 그야…… 흠, 먹는 만큼 소비하니까 그렇겠지. 아무튼 얘한테 무슨 말을 못 해요. 뭐, 잠깐 이러다 말겠지만.”

“한결 씨는 진짜 예상이랑 똑같다. 연애하니 정말 잘해 주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니 적당히 축하와 부러움만 전달하면 됐다. 예상대로 효성은 그것만으로도 흡족해하며 애인 자랑을 했다.

서원은 처음엔 역시 좋을 때라는 생각을 했으나, 어느 순간엔 진지하게 부러울 때가 있었다. 한결은 정말 상식적이고 평범하게 다정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하지 말라면 안 해?”

“당연하지. 그게 보통이잖아.”

“성질도 안 내고?”

“애냐? 화내게.”

희선은 보통이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서원은 쓰게 웃으며 후식으로 나온 차를 들이켰다. 식사를 다 마친 후엔 밖으로 나와 희선의 회사 쪽을 가리켰다.

“아, 난 희선이랑 같이 차 타고 가려고.”

“아, 그러셔?”

효성은 어차피 자신도 일찍 들어가려고 했다며 발길을 돌리려다 갑자기 멈췄다.

“아, 나 살 거 있다. 참.”

“뭔데?”

“옷 사야 돼. 그동안 연애 쉬면서 신경을 안 썼더니 입을 게 없어.”

그 말에 서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효성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서 다가오더니 그의 팔을 덥석 붙잡는다.

“웃지 마. 나 진지해.”

“아…… 응.”

“너 사장 애인이니 DC 받을 수 있지?”

“어? 어디를?”

“세렝게티! 설마 김희선이 너한테 제값 다 받냐?”

효성이 닦달하듯 물었다. 한 번도 돈을 준 적이 없던 서원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산 적이 없어.”

애초에 그곳에서 옷을 산 적이 없었다. 희선이 일방적으로 옷장에 채워 놓았고, 골라 주는 대로 입을 뿐이었다. 덕분에 원래도 희박한 옷을 향한 관심은 더욱 사라져 있었다. 효성은 그 말을 듣더니 부러워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렝게티, 몇 년 전부터 매장도 많아지고 백화점도 들어갔잖아. 덩달아 가격도 올라서 예전처럼 편하게 못 산다고.”

근처에 있는 본점과 명동이 장사가 잘된다는 말을 얼핏 듣긴 했다. 원래도 연예인 협찬이 많이 들어갔지만, 한세화나 현우진 같은 톱스타들이 입는 데다 업계 톱 스타일리스트인 한주희가 참여한 작년 라인은 초대박이 났다.

해외에서도 유명한 아이돌이 입으면서 특히 아시아 관광객들도 많이 사 간다고 주워들었던 기억이 난다. 잘된 건 좋지만, 더 바빠진 희선은 덕분에 잦은 출장을 가야 했고 일에 치여 살았다.

서원도 덩달아 영어로 된 서류 작업을 도왔다. 해외에서 반응이 오니 대기업에서 바로 인수 제의를 했으나 희선은 단칼에 거절했다. 회사를 넘기기엔 만족할 만한 금액이 아닌 데다, 브랜드 가치를 더 키워서 파는 편이 본인 커리어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

덕분에 규모는 여전히 크지 않아 품절 현상이 잦지만, 그래서 장사는 더 잘되는 모양이었다. 프리미엄 라인도 잘나가고 있고 서브 브랜드도 만드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서원이 얼떨떨해하는 사이에 효성은 그를 앞세워 세렝게티로 향했다.

“가자. 너 있으면 10%라도 할인해 주겠지.”

“하지만…… 희선이는 매장에 없는데.”

“네가 부르면 되잖아! 그리고 직원들이 네 얼굴 몰라?”

“알긴 알겠지만…….”

자주 회사에 들락거리는 데다 일도 도우니 모르진 않는다. 희선과 함께 매장에 들른 적도 여러 번이라 오래 일한 직원들은 자신을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서원은 차라리 제가 사면 샀지, 당당하게 할인을 요구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사이에 세렝게티 매장에 도착했다. 서원은 효성을 설득해 볼까 고민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문 앞엔 경진이 있었다.

“어? 서원 씨, 오랜만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효성 씨도 있네? 옷 사러 왔어요?”

천만다행이었다. 경진은 효성을 보자 반갑게 웃었고, 마침 관계자가 필요했던 효성은 그에게 얼른 다가갔다.

“네, 옷 좀 사려고요. 혹시 할인 좀 됩니까?”

“하하, 당연히 되죠. 제가 직원 할인가로 드릴게요.”

경진은 효성의 당돌한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흔쾌히 수락했다. 유쾌한 표정으로 웃으며 안으로 데리고 가자, 서원은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효성의 바람은 경진이 이루어 줄 것 같았다. 그는 효성을 신상 라인이 있는 행거로 데려가더니 어울릴 만한 옷도 골라 주었다.

“마침 잘 오셨네요. 저희 새 신상 들어왔거든요. 인기 많은 제품이라 온라인에선 이미 품절인데, 소량 남았어요.”

“진짜요? 얼른 보여 주세요.”

“이 재킷 어떠세요? 가을에도 입기 좋은 색이고 효성 씨 체격에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효성은 바로 재킷을 갖고 거울 앞으로 갔다. 원래 입고 있던 재킷을 벗는 사이에 경진은 휴대폰을 들었다. 누구와 통화하나 했더니 곧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희선아, 서원 씨 매장에 있는데 안 내려와?”

“괜찮아요. 제가 올라가려고 했어요.”

“이미 내려오고 있다는데요?”

서원은 놀라 화급히 그를 만류했지만, 이미 희선은 내려오는 중이었다. 어차피 그와 돌아가려고 했으나 번거롭게 한 것 같아 멋쩍어하는데, 얼마 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선이라고 생각한 서원은 바로 몸을 돌렸다.

“희…….”

“한 선생님?”

“어? ……임 부장님.”

그러나 상대는 희선이 아니었다. 대신 다른 익숙한 얼굴에 서원은 놀라 굳어 버렸다.

제 담당자인 임 부장이었다. 그가 세렝게티에 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오늘 만날 줄은 몰랐기에 인사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곧 희선이 도착할 터였다.

머릿속으론 이것저것 떠올랐지만 막상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지 몰라 굳어 있는데, 임 부장이 다가왔다.

“역시 여기 단골이셨네요!”

“그, 그게…….”

그는 왜 아닌 척했냐는 듯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하지만 서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그 순간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한서원.”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서원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희선이 딱딱한 표정으론 자신과 임 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딴 인간과 있냐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자 서원은 움찔 굳어 버렸고, 임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임 부장은 입을 떡 벌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저를 위아래로 훑는 희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고, 희선은 그런 임 부장을 몹시 하찮게 살피더니 서원에게 물었다.

“누구야? 이 사람은?”

“이번에 내 교재 나오는 출판사의 담당자인 임 부장님이셔!”

서원은 그가 오해하기 전에 얼른 크게 대꾸했다. 너무 자세한 설명이 어색했으나, 그런 것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늘 조용한 서원으로선 몹시 흥분한 상태였고, 그 소리에 다른 사람들도 전부 쳐다봤다.

경진과 함께 옷을 고르던 효성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여기저기서 꽂혀 왔으나, 서원은 차마 거기까진 신경이 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두 남자 사이에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흘끔 고개를 돌리니 역시 임 부장은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이게 무슨……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그러니까, 그게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희선이 다가오더니 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희선이 성큼 다가와 옆에 서자, 서원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올리니 조금 전과는 달리 밝게 웃고 있는 희선이 보였다.

“서원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네? 네? 무슨 말씀을…….”

“제 팬이시라면서요.”

희선은 다짜고짜 임 부장의 비밀을 발설했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서원이 놀랐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자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마치 TV 속 트렌디 드라마에 나오는 젊고 잘생긴 사업가 같아, 서원은 더욱 당혹감을 느꼈다. 오늘은 거래처와 미팅이 있어 정장을 입은 탓에 더욱 그랬다. 평소엔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어색해하는데, 임 부장은 정반대였다.

“아, 네!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모델 활동하시는 모습 쭉 봤습니다.”

그는 희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르는 사진이 없는 팬답게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뭘요. 요즘은 전처럼 활동도 잘 안 하는데, 잘 봐주시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잡지나 광고에서도 종종 뵙는걸요. 쇼핑몰 사진들도 빼먹지 않고 늘 잘 보고 있습니다. 하, 정말 변하질 않으시더라고요. 더 멋있어지시고.”

임 부장은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다 마침 옆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서원을 발견했다. 잠시 그의 눈에 강한 불신이 스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저를 보자, 서원은 양심이 찔려 절로 고개가 내려갔다. 다행히 희선은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는 슬쩍 그의 앞을 가렸다.

“그러고 보니 죄송합니다.”

“네? 뭐가…….”

“제가 주변에 소문나는 걸 싫어해서 친구들한테 입단속을 시키거든요. 서원이가 그래서 말을 못 했을 겁니다. 제가 어릴 때 워낙 데인 일이 많아서요. ”

희선은 미안한 듯 웃으며 그럴듯한 설명을 했다. 다행히 임 부장은 그의 말에 바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이해합니다. 워낙 유명하시니…….”

“그래도 임 부장님 얘기를 해 주셔서 기뻤습니다. 제가 사실 남자 팬이 별로 없거든요.”

“그럴 리가요! 제가 다니는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옵니다.”

“정말요?”

물론 그 사실은 희선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홍보 차원에서 늘 모니터링을 하고 있으니 보고받지만, 전혀 모르는 척을 했다. 그사이 임 부장은 그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열심히 설명했다. 희선은 의외라는 듯 기쁘게 웃으면서 슬쩍 변명까지 해 주었다.

“서원이 휴대폰으로 장난을 쳤는데, 아시죠? 쟤 성격. 다른 사람 말할 때까지 모르더라고요. 프로필 사진이 바뀐 걸.”

희선은 하여간 둔한 친구라며 서원을 가리켰다. 갑자기 화제가 자신에게 돌아오자 서원은 당황했으나, 임 부장이 지켜보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제가 그런 거 확인을 잘 안 해서.”

“아…… 그 친구분이 희선 씨셨군요.”

임 부장은 설마 그 장난 친 친구가 실존하는 데다 심지어 희선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다. 서원은 굳은 채 가만히 있다가, 희선이 눈짓을 보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인이었어요. 원래 성격이 좀 짓궂어서…….”

이것만큼은 확실히 진실이었다. 서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고 임 부장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희선과 시선을 마주하더니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팬이라더니 그 성격을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이야, 정말 부럽네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지인이 있을 줄은. 게다가 김희선 씨가 한 선생님 친구라니…….”

마지막 말은 뼈가 좀 담겨 있었으나 그 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사자인 서원조차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희선과 서원은 척 봐도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외모도, 취향도, 스타일도 매우 다르다. 둘이 어떻게 친해졌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을 보내기에, 희선은 이번에도 적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영어 배우다 알게 되었어요. 요즘은 회사에서 필요한 번역 일을 도와주거든요.”

“아, 그렇군요! 하긴 한 선생님은 언어 능력이 정말 뛰어나시죠.”

이건 사실이었다. 서원은 이번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임 부장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가슴이 쓰렸지만, 서원은 굳이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다행히 임 부장은 그에게 관심을 끊고 희선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직접 보게 돼서 정말 너무 기쁩니다. 세렝게티에 자주 왔는데도 한 번도 못 봤는데.”

“단골이셨어요? 아쉽네요. 제가 매장은 자주 내려오지 않아서요.”

“네, 저 블랙 다이아입니다! 오늘도 신상이 온라인에 없어서 본점에만 남아 있다기에 사러 왔어요!”

블랙 다이아는 회원 중 최고 등급이었다. 1년에 200만 원 이상 써야 가능하기에, 희선은 바로 환하게 웃더니 근처에 있던 경진을 불렀다.

“경진아, 이분, 서비스로 신상 하나 드려.”

“네? ……아, 아니 그런 목적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제가 남자 팬이 흔하지 않은데 이렇게 만나 뵌 기념으로라도 꼭 보답하고 싶네요.”

희선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뒤로 빠졌다.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시계를 확인한 그는 서원을 안 보이게 툭 치더니 임 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 친구가 도와줄 겁니다. 그럼 전 일이 있어서 이만.”

“아, 안녕히 가세요! 만나 봬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여기 MD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임 부장은 경진에게 붙잡힌 와중에도 열심히 인사를 건넸다. 희선은 나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비즈니스 미소를 흘렸고, 서원은 슬쩍 빠져나갔다. 이미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 같이 나가도 어색하지 않았다.

효성에게도 간다며 눈짓을 보냈다. 다행히 직원 할인 서비스를 받게 된 그는 이용 가치가 사라진 서원에게 관심이 없었다. 성의 없이 손을 흔드는 그의 뒤로 설레는 표정의 임 부장이 보였다.

그는 정말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경진이 나서기도 전에 착착 옷을 고른다. 어쨌든 두 사람 다 목적을 이뤄 다행이었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서원은 지친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희선은 바로 표정을 바꾸더니 따지듯이 물었다.

“뭐야? 놀랐잖아.”

“나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웬 못생긴 놈이랑 같이 있어서 내가 얼마나 당황한 줄 알아?”

조금 전엔 감사하다더니 이젠 못생긴 놈이란다. 서원은 새삼 그의 인성을 깨달았으나, 기운이 쭉 빠져 잔소리할 힘이 없었다.

“됐다……. 가자.”

서원은 지친 목소리로 출발하라며 손짓했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서원은 시트에 몸을 기댔다. 희선은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차를 움직여 건물에서 멀어졌다.

“나 잘했지? 응? 잘 수습했잖아.”

도로로 나가는 와중에도 희선은 생색을 냈다. 그러나 서원은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이미 옥상에 가기 전부터 임 부장을 비롯해 희선과 효성까지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응…… 잘했어.”

서원은 느리게 답하며 희선 쪽으로 몸을 기댄 채 손을 뻗었다. 힘없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희선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턱을 치켜든 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 후엔 제가 어릴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자랑을 했다. 서원은 그가 말을 끝내며 기대에 찬 눈으로 흘끔거릴 때마다 그래, 그래, 대꾸하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원하는 만큼 칭찬해 주었다.

얼마 후, 업무로 임 부장에게 또 연락이 왔다. 서원은 처음엔 별생각 없이 대화를 나누다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그의 프로필 사진을 발견했다. 이전에 풍경 사진과 다르게 거울을 통해 찍은 본인 사진이었다.

휴대폰으로 얼굴은 가리고 상체만 찍어 재킷밖에 보이지 않았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아 확대하기 위해 클릭한 순간, 서원은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프로필 배경엔 희선의 화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쪽에 작은 아이콘엔 임 부장이 있었는데 클릭하니 그제야 사진이 제대로 보였다.

임 부장의 재킷은 희선과 같은 모양이었다. 상태 메시지엔 “희선 님 영접, 15년 만에 드디어 계 탔다!”라고 적혀 있었다.

텍스트만으로도 신난 것이 티가 났다. 게다가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임 부장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인다. 굳이 묻지 않아도 저 옷이 선물 받은 거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유난히 사근사근하더라니, 아마 유부남이 아니었다면 그의 성 정체성을 조금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서원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프로필 창을 껐다. 그 후엔 일도 끝나 서재 밖을 나가 거실로 향했을 때였다. 주방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선도 보이지 않기에 그쪽으로 가 보니 곧 익숙하고 은은한 냄새가 풍겨 왔다.

“흡……!”

그곳에선 희선이 혼자 싱크대 앞에 서서 자장 라면을 먹고 있었다. 면을 가득 입으로 밀어 넣던 그는 서원을 보자 깜짝 놀라 행동을 멈췄다. 얼른 이로 면을 끊어 내더니 냄비를 내려놓는다.

“자기야, 언제 왔어?”

아직 입안에 면이 남아 있어 볼을 가득 부풀린 채였다. 심지어 급하게 먹느라 국물이 흰 티셔츠에 튀어 까만 얼룩도 생겼다. 서원은 그 모습을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보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평일이지만 희선은 출근하지 않았다. 전날 늦게까지 촬영하느라 피곤한 탓이었다. 그래서 느지막이 일어나 자신과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저녁엔 외출할 예정이었다. 분명 넉넉한 양을 먹었음에도 배고팠는지 그새 혼자 라면을 먹고 있었다. 엄한 눈으로 살피자, 희선이 눈치 보며 냄비를 내려놓았다.

“너, 너도 하나 끓여 줘?”

희선은 얼른 입안의 면을 삼키며 물었다. 비굴하게 웃는 모습은 조금 전에 본 화보와는 전혀 달랐다. 여유로운 얼굴로 턱을 치켜든 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보던 모델은 사라지고 구겨진 티셔츠와 잠옷 바지를 입은 채 제 눈치만 보는 커다란 사내만 있었다.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가기로 했잖아.”

“아는데…… 청소하고 나니 배고파서…….”

서원이 일하는 동안 희선이 설거지하기로 했는데, 청소까지 마친 모양이다. 확실히 집 안이 아침보다 정돈되어 있었다. 서원은 주변을 둘러보다 그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뒤 표정이 조금 풀렸다.

“티셔츠 벗어. 얼룩 생기겠다.”

“네…….”

손을 내밀자 희선은 얼른 티셔츠를 벗어 넘겼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먹다 남은 라면 냄비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른 더 먹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서원이 라면 좀 자제하라며 어제도 잔소리했기에, 혼날까 봐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원은 상의 탈의한 채 자신만 바라보는 희선에게 턱짓했다.

“마저 먹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선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얼른 냄비와 젓가락을 집는다. 서원은 그 모습에 인상을 쓰며 식탁을 가리켰다.

“앉아서 먹지, 왜 서서 먹어.”

“세 입이면 끝나!”

서원이 세제를 묻혀 그 부분을 빨 동안, 희선은 정말 세 입 만에 남은 면을 먹어 치운다.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할 것처럼 후다닥 해치우는 모습에 서원은 곁눈으로 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처음엔 임 부장이 이 모습을 봤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의 환상을 굳이 부술 필요는 없다. 희선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는 게 삶의 소소한 재미일 터였다.

비록 그의 남신은 카메라 앞에서만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서원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피식거리며 부분 세탁을 마친 티셔츠를 세탁실로 가져가 널었다. 다시 주방으로 가니 희선은 잽싸게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고 있었다.

“일은 다 끝났어?”

“응, 오늘은 일 더 없어.”

“커피 마실래?”

고개를 끄덕이자 혼자 라면 먹은 것이 미안했는지 얼른 커피까지 내린다. 서원은 식탁 앞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윗옷을 벗고 있어도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몸에 붙은 근육이 돋보여 저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곧 희선이 커피를 다 내렸는지 머그잔 두 개를 들고 다가왔다.

“우리 저녁은 뭐 먹을까?”

맞은편에 앉은 그는 다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물었다.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저를 빤히 주시하는 모습은 마치 그린 듯한 화보 같았으나, 먹자마자 또 다른 먹을거리를 탐내고 있었다. 하지만 서원은 타박 대신에 고민하다 답했다.

“네가 먹고 싶은 거.”

광고나 화보처럼 늘 멋있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이 참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상대는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그 표정은 그의 얼굴에 익숙한 서원도 넋을 잃을 정도였다. 서원은 조금 전에 결심도 잊은 채 카메라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넋 놓고 쳐다보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서원은 제 쪽으로 몸을 굽히는 사내를 보더니 다시 엄한 눈으로 돌아왔다.

“감기 걸리겠다. 옷 입고 와.”

요즘 따듯해졌다곤 해도 아직 바람은 서늘했다. 상체를 굽히며 다가오던 희선은 움찔 행동을 멈추더니, 그 말에 얼른 몸을 일으키고는 침실로 향했다.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라며 작게 투덜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살피던 서원은 고개를 돌리다 문득 식당 창 앞으로 뻗어 나온 가지를 발견했다.

얼마 전 꽃잎이 나더니 어느새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뒷마당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이 본 가지 외에도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모습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뒤에선 마침 희선이 새 티셔츠를 입은 채 다가왔다. 창 앞에 선 서원을 보자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옆에 섰고, 곧 풍성해진 꽃나무를 보며 감탄했다.

“언제 이렇게 피었대?”

“그러게. 뒷마당이 이러면 공원은 더 많이 피었겠다.”

“지금 보러 갈래?”

희선의 제안에 서원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엔 곧바로 손이 붙잡혀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이 집에 이사 온 후로 두 사람은 늘 꽃이 피는 계절엔 자주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옷을 갈아입은 뒤 마시지 못한 커피를 텀블러에 옮겨 담고 대문 밖을 나가기 전까지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집에 있을 때보다 더 환한 빛이 쏟아졌다. 희선은 오늘 처음 보는 청명한 하늘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날씨 좋네.”

“그러게. 안 나왔으면 아쉬울 뻔했네.”

서원은 희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전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나무들이 보였다. 담 위로 삐져나온 초록색 풍경들이 보기 좋아 평소보다 걸음도 가벼웠다. 그사이 도착한 공원은 전과 달리 벚꽃이 잔뜩 피어 있었고, 절로 탄성이 나왔다. 서원은 천천히 걸어가며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봄이 좋다. 꽃도 많고.”

겨우내 쓸쓸한 풍경만 봐서 그런지, 탐스럽게 핀 꽃들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희선은 이번엔 바로 긍정하지 않았다.

“난 너랑 있으면 어느 때나 다 좋아.”

그는 위로 향해있던 고개를 돌리더니 뜬금없이 고백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서원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었으나, 희선은 태연하게 웃고만 있었다.

“꽃보다 그거 보고 웃는 네가 더 예뻐.”

연달아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릿속이 멍해진다. 그때 하필 센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세차게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희선의 뒤로 분홍빛을 띤 꽃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꽃잎들이 팔랑거리며 내려오는 데도 희선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원은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로 억울하게 상대를 쳐다보았다.

“누가 할 소리를…….”

그건 제가 할 말이지, 눈앞에서 웃고 있는 남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서원은 타는 것처럼 붉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근처에서 꽃구경 나온 사람들은 희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훤칠한 미남이 녹을 것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뒤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가득했으나, 남자의 시선은 눈앞의 연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혼자 봄을 다 가진 것 같은 미소였다.

<그저 그 순간 속에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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