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

2.

약속 장소는 넓은 테라스엔 식물들이 가득해 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맛집인지는 모르지만, 애매한 시간인데도 손님이 꽤 많은 걸 보니 유명한 곳 같았다. 시간에 맞춰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가 보였다. 서원은 저를 보며 손을 드는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랜만이네요.”

“네, 잘 지냈어요?”

그 질문에 서원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는 못했다. 이유는 척 봐도 한결의 얼굴엔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메뉴부터 고르죠.”

한결이 선택한 곳은 그가 일하는 스튜디오 근처의 브런치 카페였다. 그는 자신은 이미 정했다며 서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조금 늦은 시간에 불러 죄송해요. 배고프시죠?”

“아니에요. 아침을 늦게 먹어서 딱 좋아요.”

희선이 숙취 때문에 평소보다 늦잠을 자서 서원도 그에 맞춰 먹느라 평소보다 아침이 늦었다.

서원은 대꾸하면서 메뉴판을 살폈다. 그러나 이런 결정에 약한 편인 그는 적극적으로 보는 대신에 고민하다 추천 메뉴를 골랐다.

브런치가 낯선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익숙했으나 딱히 선호하는 음식이 없어 문제였다. 그래서 식당엔 희선과 오는 것이 편했다. 호기심과 식탐이 많은 그가 적극적으로 메뉴를 고르기 때문에 여러 개를 시켜 나눠 먹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희선이 아닌 상대와 식당에 온 것도 퍽 오랜만의 일인 것 같았다. 음료수도 추천 메뉴까지 고르고 서버가 다녀가자, 한결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테이블에 엎드렸다.

“제가 결국 질러 버렸어요.”

시작부터 깊은 한숨을 쉬는 그를 보자, 서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한결은 효성을 꽤 오래 짝사랑했다. 서원은 둘이 잘되길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한결은 밀어붙이는 것에 약했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새 햇수로 3년 정도가 지나 버렸다.

답답하긴 하지만 남의 말을 할 처지가 아닌 서원으로선 그저 응원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고백해 보세요.”

“이미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확실히 말한 건 아니니까.”

정식으로 고백하는 것과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건 다른 문제 같았다. 서원이 소극적으로 부정하자, 한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평소에 침착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눈 밑도 조금 까만 것이 요즘 잠을 통 못 잔 모양이었다. 어쩐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에 서원은 입안이 썼다. 괜히 목이 타 물을 마시는데, 한결이 소심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효성이도 당황스러울 텐데, 연락하기가 애매하네요.”

“그렇죠.”

“혹시 화내요?”

한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서원은 그건 아니라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놀라긴 했는데 부정적이진 않아요. 오히려 본인이 더 미안해하는 눈치던데요.”

서원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야 좋은 소식만 전하고 싶지만 괜히 중간에서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결에겐 딱히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짜 몰랐구나.”

“…….”

“저를 전혀 연애 대상으로 안 봤나 봐요. 하…….”

“아니, 그건 아닐 거예요.”

서원은 그 문제엔 조금 단호하게 대꾸했다. 정말 아니었다면 고민할 가치도 없었을 터였다.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한결 씨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요.”

“정말요?”

“네, 효성이, 확실한 성격이잖아요. 그래서 감정적으로 판단하기보단 신중하게 고민하는 걸 거예요.”

서원은 효성과 알고 지낸 시간이 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확신하고 있었다. 거절하기 미안해서 질질 끌 정도로 우유부단하진 않았다. 한결도 그건 잘 알고 있기에 조금 전보다 표정이 나아졌으나, 얼마 안 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받아들이는 건 또 애매한 거겠죠.”

“아…….”

“알아요. 제가 잘못한 거죠. 진작 여지를 주든지 했어야 하는데.”

한결은 작게 한숨을 흘리며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서원은 그를 방해하지 않았고, 그 와중에 음료가 먼저 나왔다. 어색해서 빨대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한결은 또 다른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이번엔 결심했어요. 다시 친구로 돌아가진 않을래요.”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서원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전처럼 돌아갈 순 없었다. 한쪽이라도 연애 감정이 있다면 희선의 말대로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자신도 과거에 같은 경험이 있기에 그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어제 봤는데 자는 모습밖에 못 봐서…….”

“네? 효성이 집에 갔어요?”

“아뇨. 희선이네 가게 옥상에서 다들 술을 마셨거든요. 저는 강의 때문에 늦게 끝나서 술자리 파하는 모습만 봐서…….”

“거기서 잤다고요?”

한결이 놀라 물었다. 서원은 그제야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당황하며 덧붙였다.

“아니, 과음해서 뻗은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정현 씨랑은 아무 일 없었을 거예요.”

“알아요. 정현 씨는 게이도 아니고…… 아니, 그걸 넘어서 애초에 남한테 관심도 없어 보이니까……. 하지만.”

한결은 어지러운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것 같았다. 서원은 이번에도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기 때문이었다. 희선은 가끔 일이 너무 늦게 끝나면 옥탑방에서 자고 오곤 했다. 경진이나 다른 직원들도 종종 그곳에서 쪽잠을 청했다.

자신과 사귀는 와중에 다른 여자와 함께 방을 쓴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일은 없지만, 당시엔 서원도 꽤 화가 났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으며 상대와 본인 둘 다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한결이 어떤 기분일지 이해가 갔다.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으니, 한결은 입가에 댄 주먹을 꽉 쥔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확 치밀어오르는지 인상을 구겼다.

“이 와중에 또 다른 남자 집에서 잠이 들다니. 아무리 안심되는 상대라고 해도 좀……. 아니, 아니에요.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한결은 말하다 말고 손을 펴 얼굴을 감쌌다. 질투하는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내 사람도 아닌데 이러는 거 좀 꼴사납죠.”

“전혀요. 그것도 당연한 거잖아요.”

서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전부 공감이 갔다. 하나도 낯설지 않아 오히려 그 점이 씁쓸할 뿐이다.

예전엔 서원이 한결의 위로를 받았다. 엉뚱하게도 소개팅으로 만난 사이인데도 친구가 되었고, 서로 비슷한 상황이라 기댈 수 있었다. 효성에게조차 털어놓기 힘든 속마음들을 그에게만큼은 털어놓았고, 덕분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곤 했다.

지금 상황은 서로의 과거 입장과 반대가 된 것뿐이었다. 그걸 느낀 것은 본인만이 아닌지 한결도 곧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서원 씨는 어떻게 참았나 싶어요.”

“하하…….”

“마음고생 많이 했잖아요.”

“이젠…… 다 예전 일이니까요.”

“그래도 두 분, 잘 사귀는 것 같아 보기 좋아요.”

한결은 정말 다행이라며 기쁘게 웃었다. 잠시라도 표정이 환해지는 그를 보자, 서원은 고마움과 더불어 부디 그의 문제가 잘 해결되길 바랐다.

“그렇게 보이면 다행이고요.”

“정말이에요. 희선 씨는 만날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게 보이거든요. 뭐라고 해야 하지? 전보다 섬세할 때가 있어요.”

“그런가요……?”

“네. 서원 씨가 보기에도 요즘 되게 안정적이지 않아요? 몇 달도 아니고 사귄 지 거의 2년째잖아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희선은 주변의 염려를 비웃듯이 아주 얌전히 살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업무 외엔 외부 활동을 자제했고 웬만하면 서원의 일정에 맞춰 일찍 집에 들어왔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희선이 노는 것도 질려서 과거를 청산하고 바른 생활을 한다며 떠들었다. 서원은 직접적으로 듣지 않지만 효성이나 한결을 통해 전해 들었다. 얼마나 갈지 두고 본다던 희선의 친구들도 요즘은 정말 정착이 가능한 것이냐며 놀라곤 했다.

미련이 없을 만큼 질리게 놀아서 그런 것이라며 이해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그 탓에 자신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없어 다행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남자 둘이니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의심하지 않았고, 또 동네 외엔 밖에 잘 안 돌아다니는 이유도 컸다.

집이 넓은 탓에 안에만 있어도 크게 답답하지 않았다. 정원이나 옥상에서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봤고, 서원은 옆에서 책을 봤다. 그러다 시간이 나면 해외로 갔는데, 관광보다는 주로 휴양지를 택했다. 리조트 안 풀 빌라에만 있으니 남의 눈에 띄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둘만 가기보다는 촬영 일정에 맞춰 여러 사람이랑 같이 있으니, 가뜩이나 화려한 사람들 틈에서 저는 눈에 띄지 않는다. 통역 일을 도와주거나, 뒤늦게 합류해 희선과 며칠 더 지내다 가는 식이었다.

“한 번 타이밍을 놓치니까 힘드네요.”

“원래 모든 관계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알아요. 그리고 제가 비겁한 것도 알아요. 하지만 친구 사이라도 없어지면 정말 접점이 사라지니까 자꾸 멈춰서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맞아요. 그리고…… 용기를 내기보다 이대로 머무는 게 낫다는 생각에 지칠 때도 있죠.”

서원은 예전 생각이 나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쓰게 웃었다. 한결이 하는 모든 말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모두 다 제 과거처럼 느껴져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앞에선 한결이 열렬히 공감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아, 맞아요. 그랬어요! 아, 정말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서원 씨밖에 없다.”

의도치 않게 동지애를 느끼는 순간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원은 갑자기 머릿속으로 다른 마음을 품은 시점에서 이미 친구도 아니라는 희선의 말이 떠올랐다. 늘 자책하던 부분이었는데, 희선이 시원하게 직구를 던지자 변명할 수도 없었다.

서원은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결을 바라보았다. 제 과거처럼 넘치는 감정과 고민을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물론 한결은 자신보단 더 솔직한 편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울상을 짓던 한결은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 나 왜 이렇게 웃기지?”

“왜요?”

“막상 이렇게 되니까 망했다 싶긴 한데…….”

한결은 딱히 정의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우울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기뻐 보이기도 했다.

“왜 빨리 연애하고 싶죠?”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서원은 실소를 터트렸다. 한결은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설레고 있었다.

“보고 싶어 미치겠어요. 그동안 너무 참았나.”

한결은 붉어진 뺨을 쓸어내리며 괜히 창가로 시선을 돌린다. 서원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귀여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꼭 연락해 보세요.”

“그래도 될까요?”

한결은 당장에라도 연락하고 싶은 표정이지만 이번에도 주저한다. 서원이 고개를 끄덕여 응원했지만, 한결은 망설이더니 목소리를 죽여 고백한다.

“근데 만나서 아, 역시 얜 아니야, 하면 어쩌죠?”

“아닐 거예요.”

“하아, 이젠 친구가 아니니까 남자로 보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잘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한결 씨 충분히 멋있어요.”

서원은 진심을 담아 응원했다. 그러나 마음이 소란스러운 한결은 평소라면 신뢰 가득했을 서원의 말도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냐, 지금 세상에서 최고로 찌질하다고요.”

목소리를 죽인 채 자학하는 모습에 서원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한숨을 푹 내쉬던 한결이 고개를 들더니 갑자기 물었다.

“서원 씨도 처음 사귈 땐 어색해했잖아요.”

“네? 아…….”

“희선 씨랑 사귀기 시작했을 때 고민 많았잖아요. 친구에서 갑자기 애인 되는 거,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렇죠. 갑자기 바뀌었으니까…….”

서원은 느리게 대꾸했다.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이 복잡하게 밀려 들어왔다. 한동안 잊고 있던 사실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지금은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지만, 당시엔 마냥 좋은 추억들보단 불편하고 불쾌했던 기억이 더 많았다. 상대의 무심함도 문제였으나, 스스로 자기혐오에 빠져 있던 것도 문제였다.

“맞아요. 쉽지 않았죠.”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 잘 지내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서원은 힘없이 웃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분명 자신들은 꽤 헤맸던 편이었다. 하지만 한결도 그와 같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결 씨.”

“네.”

“효성이가 저희 집에 왔을 때 곤란해 보이긴 했어요.”

“아, 정말요?”

눈 끝이 축 처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서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며칠 전 찾아왔던 효성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결이가? 걔가 왜 나를? 뭐가 좋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서원은 두 사람이 잘될 것 같았다. 굳이 참견하지 않아도 진전할 사이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한결에게 연락하지 않은 거였다.

“그 상황에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자기 착각이 아니냐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어…….”

“한결이가 그럴 리 없다고, 괜히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냉정하게 말해 달라고요. 믿어지지 않았던 거지, 절대 싫은 표정이 아니었어요.”

당장은 민망하고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라며, 서원은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결은 그 말에 처음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입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랬어요?”

“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연락하세요.”

“그, 그럴게요! 아! 지금은 좀 그런가?”

한결은 황급히 휴대폰을 들었다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효성은 한창 가게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자신도 곧 스튜디오에 다시 들어가 봐야 했다.

“아, 젠장.”

어찌할 줄 모르고 인상을 쓰는 그를 보며 서원은 낮게 웃었다. 평소엔 늘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편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어린 청소년처럼 수줍어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늘 저 어때요? 괜찮아요?”

“네, 멋있는데요.”

“아, 눈 밑도 꺼지고 난리인데. 술 좀 덜 마실걸.”

한결은 휴대폰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제 모습을 확인하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다. 그래도 원래 본판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서원은 잘생겼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몇 번이나 격려해 주었다.

한결은 퇴근 후에 효성에게 찾아가겠다며 결심했다. 서원은 부디 잘 성사되길 바란다며 덕담을 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근처에서 볼일을 보느라 지체하긴 했지만, 퇴근 시간 전이었다. 당연히 비어 있을 줄 알았던 집 안에 누군가 있었다.

“희선아, 너 벌써 돌아왔어?”

서원이 의아해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곧 주방을 가로지르는 희선이 보였다. 예상보다 일찍 온 그를 보자 반갑게 웃는다.

“어, 왔어?”

“벌써 퇴근했어?”

“응. 오늘은 일이 별로 없어서.”

희선은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옆엔 커다란 팬도 함께 있었다.

“뭐 사 왔어?”

“너 저녁 전에 온다기에 미리 준비하려고 했지.”

나름 놀래줄 요량으로 일찍 왔으나 서원이 알려 준 시간보다 이르게 오는 바람에 실패했다며, 희선은 웃으며 투덜거렸다.

“아깝다. 그릇에 담아 놓고 내가 만들었다고 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 샐러드랑 타코를 다 준비했다고?”

“그릇에 옮겨 놓으면 모를 수도 있지.”

어차피 주방을 사용한 흔적이 없으면 티가 난다. 서원은 피식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고, 근처에 있는 손님용 욕실에 가서 손을 씻고 왔다.

그사이에 희선은 타코를 팬에 옮겨 데우고 볼에 샐러드를 옮겨 담았다. 돌아와 보니 그럴듯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귀찮다는 이유로 박스만 열어 먹었을 텐데, 지금은 플레이팅까지 해 놓았다. 서원은 놀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와, 진짜 식당 같은데?”

“정한이 형 따라 해 봤지.”

정한은 요리는 못해도 바를 경영하기에 플레이팅은 잘했다. 희선은 오랫동안 패션 업계에서 일한 데다 어린 시절부터 근사한 곳을 많이 간 덕인지, 역시 센스가 좋았다.

“맛있네. 전에 갔던 곳에서 사 온 거야?”

“응. 네가 여기 괜찮다고 했잖아.”

희선은 토르티야에 볶은 채소와 고기와 새우 아보카도 등을 잔뜩 넣어 돌돌 말아 한입에 넣었다. 꽤 크기가 컸는데 두 입에 해치운다. 서원은 여전히 봐도 봐도 신기한 모습을 구경하다 그를 따라 입에 가득 머금었다.

물론 희선처럼 깔끔하게 먹지는 못했다. 훨씬 작은 조각을 세 번에 걸쳐 나눠 먹은 뒤 마침 떠오른 것을 물었다.

“맞다. 효성이 잘 들어갔어?”

“모르는데.”

“정현 씨는?”

“걘 출근했지. 사무실 들르니까 일하고 있던데.”

“그래? 그럼 효성이도 잘 돌아갔으려나.”

서원은 휴대폰을 들었다. 효성에게 연락하려고 했으나 한결이 찾아갈 거란 사실이 떠올라 도로 내려놓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선 황급히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다행히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효성이 전화를 받았다.

―응, 서원아, 무슨 일이야?

“너 오늘 집에 들렀어?”

―응? 아니, 늦잠 자서 그냥 가게 나왔는데?

“아…… 안 되는데.”

서원은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흘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이제 곧 6시였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자, 수화기 너머에선 효성이 궁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일단, 너 씻어. 빨리.”

―뭐?

그의 질문에 서원은 드물게 단호하게 대꾸했다. 뜬금없는 명령에 효성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으나, 서원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옷도 갈아입어. 한결 씨 오늘 간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술 냄새를 풍기는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될 일이었다. 기껏 일으켜 세운 의욕을 꺾어선 안 될 일이었다. 다행히 효성은 바로 알아듣고 작게 소리를 질렀다.

―뭐? 진짜? 언제?

“퇴근하고 간다고 했으니까 빨리 씻어.”

―어, 어디서?

“근처에 목욕탕, 아니, 요즘은 없지. 모텔이라도 가서 씻고 옷 갈아입어. 여벌 옷은 있지?”

서원은 답지 않게 부산스럽게 굴며 다급히 대꾸했다. 효성은 패닉에 빠졌는지 어어, 소리를 내다가 곧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서원은 안도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마침 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희선과 마주쳤다.

“뭐냐?”

“아…….”

“한결이가 어딜 간다고?”

서원은 그제야 자신이 수상하게 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갑자기 전화로 효성에게 쏟아 냈으니 희선의 입장에선 황당했을 것이다. 그는 민망함을 느끼며 속으로 말을 골랐다.

“한결 씨가 효성이 가게에 찾아간다는데, 어제 옥탑방에서 자고 그대로 출근했다고 하기에…….”

“아? 그래?”

희선은 하여간 느리다고 중얼거리며 타코를 입에 넣었다. 큰 흥미는 없는지 시큰둥한 태도였다.

“드디어 갈 생각이 들었나 보지? 그래, 뭐 늙기 전에 연애하면 좋지.”

말은 축하하는 투였으나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인 게 훤히 드러나, 서원은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다 타코를 입에 물었다.

머릿속으론 효성이 씻을 곳을 찾았는지, 한결과 엇갈리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효성의 가게에 들러서 귀띔이라도 해 줄걸 그랬다는 후회를 할 때였다. 남은 토르티야를 가져간 희선이 그런 서원을 수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아, 둘이 잘 만났나 싶어서.”

서원은 휴대폰을 흘끔거리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희선은 그것이 못마땅한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알아서 하겠지. 애들도 아니고.”

“그거야 알지. 그냥 걱정돼서 그렇지.”

여러모로 신세를 진 두 사람이라 그런지 더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은 민망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대꾸했다. 그러나 희선은 전혀 공감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뭐 걱정까지야. 가게에 없으면 어련히 전화해서 안 만날까.”

희선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런 행동들이 전부 쓸데없는 행동이라는 비난이 느껴지고 있었다. 서원은 시선을 들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희선은 언행이 가벼워서 그렇지, 원래 성격 자체는 냉정한 편이었다. 사소한 일엔 심심풀이 삼아 이것저것 재며 고민하지만, 중요한 일엔 오히려 결단력이 있다.

감정에 휘둘리는 편이 아니었고 그래서 사업이 적성에 잘 맞았다. 더불어 심성도 그리 곱지는 않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박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분이 있는 둘이 잘되길 바라는 것인데, 그 마음을 무시당하자 서원은 기분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경험상 여기서 역성을 들어 봤자 더 역효과만 날 것이다. 희선은 분명 자신의 말이 틀리냐며 계속 우길 것이다. 진지하게 답해 봤자 장난스럽게 꼬투리를 잡을 테고, 서원은 늘 반복되던 상황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같이 사는 동안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웬만해선 좋게 넘어가는 서원과 달리, 희선은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가족이든 친구든 가차 없이 평가하는 경우가 많아, 서원은 제가 괜히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결과 효성의 일이라 그런지 그런 상대가 조금 괘씸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마음고생할 때 제일 많이 도와준 둘이라 더욱 그랬다.

게다가 희선 본인도 효성에게는 몇 번이나 상담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더욱 불만은 커지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희선이 못된 것 같아 울컥한 서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식사도 끝나갈 때였다. 희선은 남은 음식을 입에 밀어 넣고 있느라 신경 쓰지 않았다. 서원이 냉장고 옆에 서자 마침 잘됐다는 듯 음료를 더 달라며 손짓할 뿐이었다.

“서원아, 나 음료수 좀 더 줘.”

서원은 거절하지 않았다. 마침 옆 싱크대에 음료수 페트병이 있기에 다가가 따라 주었다.

음식이 가득했던 테이블 위는 어느새 빈 그릇밖에 남지 않았다. 희선은 마지막으로 남은 새우를 먹은 뒤 음료를 들었다. 순식간에 반을 마셔 버리는 그를 주시하며, 서원은 음료수병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희선아.”

“왜?”

희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서원은 앞에 있던 그릇들을 모아 싱크대로 들고 오는 그를 물끄러미 보며 말을 이었다.

“한결 씨, 원래 네가 나한테 소개했었잖아. 둘이 잘해 보라고.”

그 순간 희선이 들고 있던 그릇들을 툭 떨어트렸다. 다행히 유리나 사기그릇이 아니라서 깨지거나 망가지진 않았다. 단지 고요한 집 안을 찢어 놓을 것처럼 잠시 소란스러웠을 뿐이었다.

그 상황을 반쯤 예상했던 서원은 타박하는 대신에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주워 싱크대에 도로 넣었다. 그사이 앞에 있는 희선은 딱딱하게 굳은 채 저만 쳐다보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엔 불안이 가득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안에서도 혀가 꿈틀거렸으나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이지만 인정했다가 괜한 소리를 들을까 봐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평소엔 당당하게 펴고 다니던 어깨도 잔뜩 움츠려져 있었다.

“서, 서원아…….”

설마 하는 표정에서 그의 속내가 고스란히 보였다. 서원은 제 이름을 부르는 그를 보며 남은 그릇들을 치웠다.

“그땐 네가 나한테 매일 연애 좀 하라고 그랬었는데.”

서원의 입에서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미소는 사라지고 가만히 허공을 본다. 서늘해진 눈빛에 희선은 크게 움찔거리며 한 걸음 내디뎠다.

“아니, 잠깐…… 갑자기 왜…….”

그러나 그의 걸음은 한 번 더 내딛기도 전에 멈춰지고 말았다. 가장 경계하던 순간이 닥쳤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네가 뭐라 그랬지?”

“잠깐! 서원아, 그건…….”

“나 좋아하지 말아요, 라고도 했었지.”

“아아아악!”

희선은 제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완전히 잊고 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늘 당당하던 그가 몸을 구부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웬만해선 동요하지 않는 그였으나, 이것만큼은 달랐다.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 중에 가장 선두를 차지하는 발언이었다.

과거의 업보가 혹한의 서릿발처럼 자신을 후려치자, 그는 고통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갑자기 그 얘긴 왜 하는데!”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갑자기 왜!”

“미안, 네 냉정한 모습을 보니 불현듯 떠올랐네.”

두 손을 입가에 모은 채 진저리치는 모습을 보자, 서원은 차가운 시선으로 흘겼다. 희선은 냉정하다는 말에 흠칫하더니 잠시 후엔 설마 하는 시선으로 서원을 살폈다.

그러나 서원은 이미 그에게서 시선을 뗀 후였다. 테이블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개수대에 넣고 그릇을 헹궜다. 그러다 제 옆에 우두커니 선 희선을 다시 발견하고는 행주를 내밀었다.

“테이블은 네가 닦아.”

희선은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으나 거절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행주를 가져가더니 계속 서원의 눈치를 보며 테이블을 닦았다. 그사이 서원은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있었다. 뒤에선 계속 시선이 느껴졌으나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희선은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맴돌다가, 서원이 손을 닦으며 옆을 지나자 얼른 따라붙었다.

“화났어?”

“아니.”

서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순간 안심할 뻔했으나, 희선은 자신을 스쳐 지나는 그의 등을 보고는 다급히 따라갔다.

“화났잖아!”

“아니라니까.”

“아니긴, 누가 봐도 화났는데. 아니 근데, 대체 왜 그러는 건데!”

희선은 억울해하며 물었다. 도저히 어떤 타이밍에서 제가 지뢰를 밟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서원은 그를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커피 머신 앞으로 향했다. 희선은 이번에도 얼른 그의 옆에 섰다.

“넌 왜 화나면 바로 말을 안 해?”

“화 안 났다니까.”

서원은 무심히 대꾸하며 커피 캡슐을 손에 들었다. 표정만 보면 정말 평소와 똑같았으나, 희선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사이 서원은 제 몫의 커피를 다 뽑은 뒤 희선에게도 물었다.

“너도 마실 거지?”

희선은 대답 대신에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분명 화가 난 것 같은데 인정하지 않자 짜증이 난 탓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왜 그러냐고 따지고 들면 서원의 기분이 상할까 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원은 커피를 든 채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천천히 거실로 걸어가는 동안 희선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다.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은 서원은 편하게 앉은 채 TV를 켰다. 최근에 보는 드라마를 틀자, 주방에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지켜보던 희선은 곧 험악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한서원!”

“응.”

서원은 느긋하게 기댄 채 대꾸했다. 쳐다보지도 않자 희선은 분한 표정으로 얼른 그의 옆에 앉더니 무어라 말을 하려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나운 표정을 애써 감춘 그는 곧 연기인 게 티가 나는 어색한 톤으로 질문했다.

“내가 뭐 기분 나쁘게 했어? 말을 해야 알지.”

최대한 좋게 해결해 보자는 의지가 물씬 느껴졌다. 서원도 놀랐는지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희선의 눈에 가득 찬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선은 다시 따지려 들다가 주먹을 꽉 쥐며 성질을 눌렀다. 그간의 경험으로 여기서 더 화를 내면 저만 나중에 더 혼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에 열심히 머리를 굴려 조금 전에 무슨 대화를 했나 되짚어 봤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저 서원이 효성과 한결 얘기를 계속했고, 자신은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그 외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희선의 눈이 좌우로 크게 굴러가며 점점 더 안색이 나빠졌다.

그 와중에도 서원은 휴대폰을 살피고 있었다. 뭘 하나 싶어 고개를 내려 살피자, 효성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게 보였다. 희선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고, 그는 소파에 기댄 서원의 몸 위에 올라탔다.

“나보다 한결이랑 효성이가 중요해?”

“무슨 소리야, 또.”

서원은 기막혀 하며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는 항의에 진심으로 황당해했으나 희선은 울컥해서는 그의 휴대폰을 빼앗아 옆에 던지며 달라붙었다.

“계속 둘 이야기만 하고, 지금도 효성이만 신경 쓰고.”

“갑자기 또 유치하게 왜 그래.”

서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인상을 쓰거나 밀어내지 않는 걸 보니 화가 나지 않은 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희선은 몹시 억울한 표정이었다.

“너, 정말 너무하다.”

“내가?”

서원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왜 화살을 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니, 희선이 소파 위를 짚은 채 하소연을 했다.

“내가 일찍 들어와서 저녁도 차렸는데 칭찬도 안 하더니.”

“응……?”

“일부러 집 반대 방향에 있는 가게에서 사 온 건데. 얼마 전에 네가 거기 맛있다고 해서 기껏 준비했는데 칭찬은 안 해 주고.”

“아.”

서원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희선이 왜 평소보다 날카롭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캘리포니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사실 타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멕시칸 요리가 워낙 대중적인 데다 누나가 좋아해 자주 먹어야 했다. 한국에 와서는 잘 찾지 않았는데, 얼마 전 희선이 데려가서 먹었더니 오랜만이라 그런지 맛있게 먹었다.

얼마 전 저녁거리를 고민하다 희선이 또 타코는 어떠냐고 묻기에 거절하며 그곳을 언급했었다. 지나가듯 그 집 타코는 괜찮았다 말한 것인데, 희선이 그걸 기억하고 일부러 사 온 모양이었다.

“정말 고마워. 생각도 못 했는데.”

서원은 미안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제 몸 위에 있던 희선과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어깨를 붙잡으니 희선은 눈을 치켜올리며 따져 들었다.

“그런데 넌 그 둘 얘기만 하고…… 나한테 화내고…….”

“정말 화난 거 아냐.”

“그럼 왜 그랬어?”

서원은 그 말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실은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풀렸기 때문이다.

화가 났다기엔 미미한 수준이었고 정말 잠시뿐이었다. 서원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부루퉁한 얼굴을 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냥 조금 언짢았던 거야. 게다가 금세 풀렸어.”

“왜 풀렸는데?”

“그건…….”

서원은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바로 위협하듯 저에게 가까워져 오는 희선을 보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네 반응이 너무 재미있어서.”

조금 심술을 부린 것뿐인데 소리까지 지를 줄은 몰랐다. 서원은 악귀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르던 희선을 떠올리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희선은 계속 키득거리자 눈 끝이 더욱 올라갔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심각한 표정으로 따지자, 서원은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입가를 가린 채로 웃자, 희선은 그 반응에 표정이 더욱 살벌해졌다. 서원은 참아 보려고 했으나 바로바로 변하는 다채로운 표정에 감탄하면서도 바로 그 점 탓에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 미안…… 근데 너 표정이…….”

“으으……악!”

희선은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고함을 지르며 서원을 덮쳤다. 몸을 꽉 끌어안으며 여기저기 깨물어 대자 서원은 아픔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못했고 그 목소리는 점차 신음으로 바뀌어 갔다.

“아, 잠깐…… 진정해, 희선아.”

서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희선을 말렸다. 어느새 그의 몸은 옆으로 누운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커다란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와 속살을 마구 주무르고 있었다.

차분하던 음성은 점차 다급해졌다. 숨소리가 잔뜩 섞였고 달래듯이 상대의 이름을 부르던 것은 점점 애원으로 바뀌어 갔다.

* * *

한때는 이 남자와는 절대 친구 이상은 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고독하지만 타인을 통해 위로받거나 정착할 생각이 그에겐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아무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았다. 누구나 탐낼 잘난 외모에 젊은 나이에 반해 일찌감치 성공한 인재였지만 어느 것도 쉽게 얻은 것은 없다. 전부 본인이 고생해서 얻어 낸 결과였고, 그래서 더 이르게 환멸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고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통해 위로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홀로 지내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서원은 그의 곁에 머물길 택하며 스스로를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남자가 그어 놓은 선 안에서 해를 끼치지 않으면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흥미가 식으면 물러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절대 그가 만든 벽을 허물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행동은 선의라도 참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를 연민하지 않으려 했지만 무방비하게 약한 면을 드러내는 상대에게 빠지고 말았다.

기울어진 마음은 결국 관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한때는 그대로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스스로 포기한 연을 다시 잡은 것은 놀랍게도 희선이었다.

미련하게도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가 내민 손을 거부하지 못했다. 호텔에서 마주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예약한 방에 들어가기 전에 서원은 몇 번이나 다시 돌이킬까 생각했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지금이라도 되돌리자고 생각했었다. 옷을 벗고 있는 상대의 뒤에서 서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고민했다.

무겁게 닫힌 입술을 어떻게든 열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귓가에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희선이 옆에 있는 테이블을 보라며 턱짓을 했다.

‘이거면 되나?’

서원은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발견했다. 약국 봉투 위에 젤과 콘돔이 보였다.

‘처음이라 잘 몰라서 말이지. 일단 젤이랑 콘돔은 사 놨는데…….’

희선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제야 그가 남자끼리의 관계가 처음이라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정확히는 맨 정신으로 본인이 원해서 한 관계로는 처음인 거였지만, 서원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다 황급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새삼 이곳에 그와 자러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이었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치르는 행위에 그는 숨이 막힐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때 희선이 갑자기 몸을 돌려 성큼 다가왔다. 서원은 움찔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칠 뻔했으나 손이 붙잡혀 굳어 버리고 말았다.

‘남자끼리는 힘들다던데…….’

희선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가라앉은 표정에 서원은 두려움을 느끼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핑계로 이 갑갑한 상황을 피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고 그만두길 바라며 서원은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희선이 더 빨랐다.

‘하, 처음이라 긴장되네.’

희선이 한숨을 내쉬며 저를 끌어안자, 서원은 힘없이 끌려갔다. 비틀거리던 그는 간신히 옆에 있던 단단한 팔을 붙잡았고 그 순간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최대한 안 아프게 할게.’

전과 달리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의 손 또한 달래듯이 제 몸을 쓸고 있었다. 서원은 놀라 고개를 들다 저를 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응? 하게 해 줘.’

초조한 눈으로 저를 보는 남자의 눈엔 정욕이 가득했다.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조르듯이 쳐다보다 천천히 입술을 내린다.

이마부터 시작해 코와 뺨, 입술과 턱을 타고 내리는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잔뜩 긴장한 게 역력히 드러났다.

‘서원아, 응?’

분명 건장한 성인임에도 그 순간만큼은 상대가 힘없는 아이처럼 보였다. 단단한 팔과 억센 힘으로 저를 가두고 있는데 얼른 허락해 달라며 조르는 모습에 맥이 탁 풀리고 만다.

몸에 힘이 빠지자 가까이 있던 상체가 맞닿았다. 희선은 제게 기대 오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슬쩍 웃었다. 허락의 뜻으로 안 건지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다시 서원아, 하고 부르며 이마를 붙인 채 허리를 끌어안아 온다.

‘키스해 줘.’

얼른, 빨리 허락해 줘.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서원은 제게 매달려 오는 남자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입술을 부딪치는 순간 이후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몹시 힘들었다는 것이다. 잔뜩 흥분한 희선 때문에 행위는 정신없이 시작되었다. 잔뜩 긴장한 데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서원은 행위에 몰두하면서 그저 빨리 이 순간이 지나길 빌었다.

젤을 쓰긴 했지만 상대의 성기가 워낙 커서 삽입부터 난관이었다. 차라리 먼저 준비하고 왔어야 했다는 후회를 계속했었다. 희선은 곤란한 표정으로 미안하다며 계속 사과하고 입을 맞춰 왔으나 제 안으로 계속 자신을 밀어 넣었다.

서원은 초반엔 너무 아파 그를 밀어내기도 했으나, 얼마 안 가 단단하고 두툼한 성기에 꿰인 채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었다. 밑은 찢어질 것 같았고 반강제로 시작해 버린 관계 또한 자신을 비참하게 했다. 그런데도 버틴 이유는 오로지 위에서 난폭하게 자신을 범하는 남자의 눈빛 때문이었다.

‘서원아.’

계속해서 제 이름을 불러 대며 입술을 누르고 절박하게 매달려 오는 탓이었다. 밀어내는 손길을 붙잡아 제 몸을 꽉 조이며 자신은 더욱 깊이 찔러넣는다. 조금이라도 더 닿기 위해 애를 쓰는 상대를 보자, 서원은 힘없이 눈을 감으며 지친 손을 들어 상대를 끌어안았다.

희선은 항상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흥분하곤 했다. 오늘도 갑작스럽게 시작한 행위에 서원은 난감했으나, 어느 순간 저도 불이 붙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소파에 누운 채 다리를 넓게 벌리고 삽입을 조르고 있었다.

“아…… 희선아…… 제발.”

사정감이 차올랐는지 희선은 제 것을 빼내었고 한참 절정에 오르던 중에 쾌감이 끊기자, 서원은 초조함에 미칠 것 같았다.

허리를 들썩거리며 조르자 희선은 그 모습을 사나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쉽게 넣어 주지 않았다. 대신에 끄트머리를 입구에 문질러 대자 서원은 몸을 뒤틀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그의 아래에선 입구가 계속 뻐끔거리고 있었다. 질척하게 젖은 붉은 속살을 단단한 선단이 꾹 누르자, 서원은 결국 흐느끼며 스스로 엉덩이를 쳐 댔다.

“빨리…… 넣어……. 아!”

음탕한 행동과는 다르게 처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희선은 난폭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다시 안으로 파고드는 사나운 기세에 서원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그를 받아들인다.

“아! 아앗! 좀, 천천히…… 흐읏!”

안을 강하게 찔러 대는 움직임에 서원의 몸이 계속 위로 밀렸다. 어찌나 기운이 좋은지 항상 몸이 들린다. 하지만 괴로운 교성을 흘리면서도 그의 다리는 점점 더 넓게 벌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 열심히 빨아 먹네.”

“흐윽, 응!”

“대답해야지, 자기야. 자지 맛있어?”

“으응…… 좋아……. 마, 맛있어, 자기야……. 아, 흐응, 읏!”

“흣, 쑤셔 주니까 좋지?”

“응, 응. 좋아……계속해 줘. 아, 아앗!”

희선은 취향도 고약했다. 잠자리에서 툭하면 상스러운 말들을 강요했다. 서원은 낯부끄러운 소리를 내뱉는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허릿짓이 빨라질수록 서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참으려고 해도, 희선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벌리게 했다. 비음 섞인 교성이 그 사이로 터져 나왔고, 자신이 듣기에도 몹시 민망했다. 서원은 고개를 마구 젓다가 희선이 낮게 탄성을 흘리자 얼른 외쳤다.

“아, 안 돼. 소파에 흘리면.”

“알았어.”

희선은 인상을 구기더니 행동을 멈췄다. 또 쾌감이 끊기자 서원은 아쉬움에 움찔거렸으나, 곧바로 허리가 붙잡혀지더니 불시에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앗! 하으응!”

서원은 이미 제 안에 꽂혀 있던 성기가 안으로 더 깊이 처박히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고개를 젖힌 채 몸을 뒤틀자, 희선은 그 모습을 보더니 못된 미소를 흘리며 다시 허리를 뒤로 뺐다 다시 위로 세게 쳐올렸다.

반동으로 위로 올라갔던 몸이 다시 아래로 쑥 꺼지자 단단한 성기가 또 깊이 찔러 들어왔다.

“흐아아!”

서원은 이번에도 몸을 젖히며 교성을 질렀다. 희선의 어깨를 움켜쥔 채 다리론 허리를 강하게 조였다.

몹시 건장한 희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고 마른 몸이었다. 희선은 제 품에 매달린 채 할딱거리는 서원의 엉덩이를 단단하게 붙잡은 채 주무르며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희선의 성기를 머금은 채 옮겨지는 것은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안에선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꿈틀거렸다. 계속해서 위로 올려 치자, 서원은 힘없이 흔들리며 울부짖었다.

“아! 아앗! 흐응, 읏!”

“그렇게 좋아?”

“내, 내려……. 아! 너무, 깊어!”

서원은 너무나 강한 자극에 진저리를 치며 몸을 들썩였다. 스스로 허리를 흔들며 안을 꽉 조이자, 희선은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도중에 멈추었다. 그 자리에 선 채로 몇 번이나 몸을 크게 흔들며 작은 엉덩이 사이에 제 것을 꽂아 넣었다.

“하, 씨발…… 좆나 조여.”

“아, 아앗! 아아! 그만, 나…… 아아!”

서원은 침대에 도착하기 전에 사정해 버렸다. 뒤를 강하게 조이자 안에서도 희선의 성기가 깊이 꽂힌 채 뜨거운 정액을 터트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는 도중에 자극당하자 서원은 고개를 젖히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완전히 넋이 나간 채 희선의 품에 매달린 그의 얼굴은 평소의 점잖은 모습이라곤 없었다. 크게 흔들리느라 희선의 배와 가슴, 바닥까지 전부 정액이 튀었다.

한동안 정신이 멍했으나 곧 제가 무슨 꼴인지 깨달은 서원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침실 앞 복도에서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가 버렸다는 것을 인식하자 몹시 창피했다. 그러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희선은 내려 주지 않았다.

“그렇게 좋았어? 중간에 쌀 만큼.”

“흣…… 하지 마.”

“하여간 은근히 밝힌다니까. 전에 식탁에서도 그러더니.”

희선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또 서원을 놀려 댔다. 얼마 전의 일이 떠오르자 서원은 억울함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며 그의 어깨를 때렸으나, 희선은 웃으며 침대로 데려갈 뿐이었다.

며칠 전 정사 땐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다가 뜬금없이 시작되었다. 서원은 싱크대에서 엎드린 채 희선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한쪽 다리가 높이 들린 채 몹시 불안정한 자세였다. 마치 개가 소변을 보는 듯한 자세라 서원은 창피해했지만, 그럴수록 희선은 흥분했다.

그 외에 이 집 여기저기에서 일을 벌였다. 침실이나 서재 거실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밖에서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도 거침없었다. 주차장이나 다용도실이나 계단이나 현관에서도 희선은 쉽게 흥분했다.

하지만 그에 휩쓸려 어느 순간 정신을 놓아 버리는 본인도 문제였다. 서원은 민망함에 얼굴을 쓸면서도 다시 덤벼 오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으며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옥상에서도 덤볐지만, 서원이 야외에서만큼은 질색했기에 그나마 해당 사항이 없었다. 물론 희선은 여전히 원하지만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서원은 심하게 절륜한 제 애인을 지그시 노려봤다. 그러나 뻔뻔한 희선은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서원의 팔을 주물렀다. 안마의자가 등과 허리와 어깨와 다리는 잘 풀어 주지만 팔과 앞쪽은 안 닿기 때문이었다.

둘은 일찍 시작한 행위 덕에 밤엔 오히려 건전하고 느긋하게 붙어 있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둘의 앞엔 희선이 만든 야식도 있었다. 평소에 자주 먹는 라면이 아니라 만둣국과 볶음밥이었다.

“웬일이야? 귀찮다고 라면만 먹더니.”

“무슨 소리야? 서원이 너한테 어떻게 라면 따위를 먹여.”

희선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볶음밥을 후후 불어 입에 넣어 주었다. 이럴 때면 아주 여우가 따로 없었다. 서원은 기막힌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입을 벌렸다.

어차피 만둣국도 시중에 파는 완제품 만두와 곰탕으로 만들었으면서 유세였다. 그래도 나름 정성이 보여 서원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희선도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조금 전에 보던 드라마를 틀었다.

“저 얼굴 왠지 익숙하다.”

“전에 그 드라마에서 나온 배우잖아.”

“아, 맞다. 주인공 남편이었지.”

희선은 예전엔 외국 배우라면 할리우드 톱스타 말곤 몰랐는데, 요즘은 점점 아는 배우가 늘고 있었다. 서원이 보는 드라마를 함께 보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다 먹은 후엔 희선이 뒷정리까지 했다. 서원은 소파에 편하게 기댄 채 휴대폰을 보다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커피 대신 차를 가져온 희선은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옆에서 힐끔거리니 모를 수가 없다. 서원은 아쉬운 표정으로 이유를 알려 주었다.

“효성이가 답이 없네.”

“아, 알아서…….”

서원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희선은 바로 인상을 펴며 인위적인 미소를 흘렸다.

“잘 만났겠지. 우리보다 더 뜨거운 밤 보내고 있는 거 아냐?”

희선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서원은 뻔한 행동에 어이없어했지만, 잠시 후엔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길 빌어야지.”

격렬한 행위 뒤에 야식을 먹은 탓일까. 점점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서원은 양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희선에게 기댔고, 어느 순간 정말 잠이 들어 버렸다.

서원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침대에 있었다. 어깨 옆엔 희선이 잠들어 있었는데 곧 출근할 시간이었다. 그를 깨워 욕실로 데려간 후엔 씻고 함께 아침을 먹었다.

피곤해 기절하듯 잔 탓인지 평소보다 개운했다. 몸은 조금 피곤하지만 안마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태블릿 PC로 간단한 업무를 한 뒤엔 나아졌다. 그 후엔 점심이 되기 전에 서원은 효성의 카페로 향했다.

미리 연락할까 하다가 어젯밤 보낸 메시지에도 아직 답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한결과 엇갈렸거나 오해가 생겼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답이 없어도 가게는 열 테니, 직접 보고 상태를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픈 시간이 되었는데도 가게는 닫혀 있었다. 서원은 덜컥 불안한 예감에 차를 몰고 이번엔 효성의 집으로 향했다. 점심부터 본격적으로 손님이 몰리는데 혹시 심각한 상황일까 싶어서였다.

효성이 사는 곳은 근처 빌라였다. 주차한 뒤에 서둘러 입구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자, 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괜찮다니까.”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효성이었다. 마침 계단을 돌자마자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통화 중인 건지 현관 앞에 서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살짝 틀어진 터라 얼굴이 약간이나마 보였는데 생각보다 밝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서원은 안도하며 마저 계단을 올랐다.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입술을 여는 순간, 또 다른 음성이 들린다.

“무리하는 거 아냐?”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서원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위를 살폈다. 곧 효성이 비켜서며 현관이 활짝 열렸다. 안에선 한결이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밖에 서 있던 효성의 손을 잡아당겼다.

“일어나기 힘들다며.”

“그렇다고 가게를 쉴 순 없잖아.”

문밖에 서 있던 효성의 몸이 다시 현관 안쪽으로 기울었다. 한결은 그의 뺨을 붙잡더니 웃으며 입술을 겹쳤다. 효성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서원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계단 아래에 서 있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데, 마침 효성에게 달라붙는 한결의 옷이 눈에 익었다.

어제 자신과 만났을 때와 똑같은 차림이었다. 게다가 아침에 효성의 집에서 나온 데다, 연인처럼 다정하게 키스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뻔했다. 서원은 머릿속에 떠오른 확신에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 순간 하필 구두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조용히 사라지는 건 실패하고 말았다. 낭패스러움에 작게 신음을 흘리는 순간,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아래를 봤기 때문이었다.

“서, 서원 씨?”

“야! 네가 여긴 무슨 일로…….”

“그, 그게…….”

후다닥 떨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서원은 민망함에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이란 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효성이가 연락이 안 돼서…….”

서원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변명하듯 대꾸했다. 그 말에 효성은 그제야 휴대폰을 살폈고, 한결은 민망해하며 허둥지둥 밖으로 나섰다.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출근해야 하니 전 먼저 가 볼게요.”

“아, 네……. 잘 다녀오세요.”

한결은 붉어진 얼굴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서원은 얼른 비켜 주면서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질 못했다. 머쓱하게 서서 흘끔 위를 보니, 효성은 문을 닫고 있었다.

“흠, 밥은 먹었냐?”

무표정했으나 달아오른 얼굴은 지금 그의 기분을 대변했고, 걸음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서원은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 고개를 저었다.

“점심은 아직이야.”

“그래. 일단 밥이나 먹자.”

효성은 어색한 걸음으로 계단을 느리게 내려왔다. 어젯밤 격렬한 하체 운동을 한 사람처럼 어기적거리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으나 바닥에 발이 닿을 때마다 가늘게 떨리는 허벅지가 애처로웠다. 서원은 말없이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효성은 굳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면서도 그의 배려를 거부하지 않았다.

“고맙다. 이젠 괜찮아. 으윽!”

다 내려와 입구에 도착하자 효성은 슬쩍 몸을 뺐다. 먼 곳을 보며 손을 목에 가져다 대던 그는 갑작스럽게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민망해하며 팔을 붙잡는 그를 보며 서원은 작게 중얼거렸다.

“잘된 것 같네.”

겉보기엔 다친 곳이 없는데 근육통에 시달리는 이유는 뻔했다. 서원이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자 효성은 다시 헛기침을 쏟았다.

“어흠! 흠!”

귀까지 새빨갛게 변한 채 앞서가는 그를 뒤에서 지켜보던 서원은 피식 웃으며 제 차를 가리켰다.

“몸도 안 좋으면서 걸어가려고? 태워다 줄게.”

그의 제안에 효성은 바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웃고 있는 서원의 얼굴을 보더니 민망해했으나 거절은 하지 않는다.

“그럼 가게 근처에서 먹자. 내가 살게.”

“그래. 네가 사라.”

서원은 그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늘 아침까지 연락이 없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마음을 졸인 것을 생각하면 작은 대가였다.

두 사람은 효성의 가게 근처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마침 근처에 고깃집이 보였다. 점심에 파는 탕이나 김치찌개와 제육이 맛있어 전에도 종종 오던 곳이었다.

통유리로 된 창을 통해 안을 보니 점심시간이라 가게는 붐볐는데, 대부분 이 집의 대표 메뉴인 매운 제육을 먹고 있었다. 효성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바로 등을 돌렸다.

“다른 데 가자.”

서원은 힐끔 고개를 들어 효성을 봤고, 그는 잽싸게 시선을 회피했다. 매콤한 메뉴를 피하는 이유가 훤히 드러났다.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지자 결국 효성이 성을 냈다.

“아, 뭐! 그만 웃어.”

“응, 안 웃을게.”

서원은 말과 달리 여전히 입술이 올라가 있었다. 효성은 오늘따라 얄밉다고 구시렁거리며 서원을 노려보았다.

“햄버거나 먹을래?”

“응, 좋아.”

“웃지 말라고!”

저도 모르게 또 웃어 버린 모양이었다. 서원은 입술을 꽉 다문 채 효성을 따라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 카페에 가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효성은 어제 서원의 연락을 받자마자 마침 놀러 온 친구에게 가게를 맡기고 부리나케 가게에 있는 근처 사는 친구 집으로 향했다.

마침 3분 거리에 친구가 살고 있었고, 빈집에 들어가 씻고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카페를 하다 보니 간혹 커피를 흘리거나 전날 과음하고 바로 출근할 때가 있어서 여벌 옷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급하게 드라이를 하고 다시 가게로 오니, 얼마 안 가 한결이 찾아왔다고 한다. 마침 손님도 없기에 아예 가게를 닫고 그와 자리를 옮겨 얘기를 나눴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얘기하기엔 조금 민망한 화제라 일부러 룸으로 된 식당에 들어간 것이 문제였다고 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술을 한 병 시켰는데 민망함에 자꾸 마시다 보니 취했고, 한결이 집에 데려다주러 왔다가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되었다는 거였다.

희선이 뜨거운 밤 운운했을 때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다. 서원은 당혹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둘이 사귄다니 축하할 일이었다. 외부 일이 없는 서원은 식사 후엔 그의 카페로 갔고, 효성은 계속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실없이 웃으며 계속 키패드를 두들기는 모습은 연애 초기의 설렘이 진하게 풍겼다. 여태 눈치채지 못한 게 신기할 정도로 좋아하자, 서원은 황당함마저 느꼈다.

집에 돌아와서 멍하게 있으니, 퇴근한 희선이 왜 그러느냐 물었다. 서원은 간략하게 사실을 전했고, 희선은 음흉한 표정으로 손뼉을 쳐 댔다.

“진짜? 둘이 잤어? 어머, 대박. 얌전해 보이더니 손이 엄청 빠르네?”

그동안 오래 굶은 탓이라며 희선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후엔 이 소식을 어서 널리 알려야 한다며 경진과 정현에게도 전했다. 서원은 이래도 되나 싶었으나 어차피 다음 날 회사에 가면 쪼르르 말할 걸 알기에 내버려 두었다.

희선은 휴대폰을 두드리며 미친 듯이 웃어 댔다. 남의 일처럼 관심이 없더니 둘이 잤다는 이야기엔 즐거워하는 희선을 보며, 서원은 어이없음을 느꼈다. 그러나 며칠 뒤엔 유유상종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효성 씨, 실망입니다.”

“네?”

정현은 카페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따지듯이 말했다. 서원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설마 하는 시선을 보냈으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나랑 같이 밤을 보내 놓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커피를 마시던 중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서원은 입가를 가리며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졌으니, 효성은 더욱 황당할 터였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예상대로 효성은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다 손님이 서원밖에 없음을 확인하고는 억울해하며 외쳤다. 그러나 정현은 웃음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로 멀쩡한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몰아갔다.

“내 집에서 나랑 자고 다음 날 한결 씨랑 사귀다니!”

정현의 말에 효성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입만 벙긋거리던 그를 보며 정현은 씩 웃음을 흘렸다. 진심으로 만족해하는 미소에 서원은 역시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효성은 볼일이 끝나자 나가는 정현을 보며 씩씩거리다 분통을 터트렸다.

“아! 김희선 이 망할 놈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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