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3)

1.

일 외에 입는 정장은 퍽 오랜만이었다. 희선은 단정하게 차고 있던 넥타이를 조금 내리며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화보 촬영이나 미팅이 아니라서 머리는 왁스로 조금 매만졌을 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지금 그는 결혼식장 뷔페였다. 친분이 있는 잡지사 팀장의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혼자 온 참이라 어쩌다 보니 다른 잡지사 사람들 팀에 끼어서 식사 중이었다.

원래 사는 집안이라고는 들었으나 배우자 쪽도 잘사는지 결혼식은 꽤 화려했다. 희선이 얌전히 앉아 코스로 나오는 요리를 먹는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에디터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희선 씨, 전에 비해 어른스러워졌네.”

“원래 어른이었는데요?”

“그거야 알지. 그래도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차분하다고 해야 하나.”

“저도 이제 30대잖아요.”

희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티를 내긴 했으나, 확실히 전과는 달랐다. 아마 예전이라면 유머스러운 한마디라도 더 보태며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난한 답변으로 적당히 대화에 어울리고 있었다.

“나이 드니 기운이 없어서요.”

“그치, 그치. 힘들지.”

“운동도 이젠 몸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살려고 한다니까요.”

“꾸준히 해야죠. 쉬면 아파.”

그의 말에 30대 후반인 에디터와 40대 초반인 에디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맞장구를 친다. 희선은 썰고 있던 고기를 입에 머금으며 대충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음식을 씹는 동안 슬쩍 왼손을 들어 시계를 보니,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마침 근처에 한복 차림으로 인사를 도는 신랑 신부가 보였다. 희선은 지인인 신부 측에 눈도장을 찍은 뒤엔,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럼 전 일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봬요.”

“그래, 잘 가~.”

“촬영 때 보자고.”

마침 이 잡지사와는 조만간 촬영 일정이 잡혀 있었다. 희선은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바로 뷔페를 나왔다.

로비를 지나는 길에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 숙이거나 손을 흔들어야 했다. 잡지사 팀장의 결혼식답게 패션계 종사자들이 여기저기 많았다. 식당이나 뷔페에서도 잔뜩 봤지만 로비도 마찬가지였다. 희선은 아는 척 말을 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다음에 보자며 적당히 넘겼다.

호텔을 나온 그는 빠르게 걸어가다 마침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흘끔 쳐다보다 곧 눈을 커다랗게 떴고 순식간에 시선이 몰린다. 카운터에 있는 직원조차 움찔 굳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긴 다리로 성큼 다가갔다.

“아메리카노 작은 컵 하나요.”

“아, 네. 사이즈는 어떻게 드릴까요?”

“제일 작은 거요.”

“네. 영수증 드릴까요?”

“아뇨. 버려 주세요.”

다시 한번 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희선이 픽 웃으며 다시 말해 주자, 직원은 얼굴을 붉히며 카드를 받았다.

희선은 제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다 주문을 받는 것도 잊어버리는 직원들을 매주 한 번씩 만났다. 지적하기도 귀찮아 카드를 지갑에 넣은 채 픽업대 앞으로 가니 사람들의 시선이 그대로 따라왔다.

“와, 대박 멋있다.”

“연예인 아냐? 엄청 잘생겼어.”

마침 문으로 향하던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입을 가린 채 쳐다보다 문 앞에서 옆에 있는 친구에게 속삭였다. 친구는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는 대신에 슬쩍 창문 쪽 테이블에 자리해 계속 구경했다.

둘뿐 아니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신을 주시했으나, 희선은 제 손에 들린 휴대폰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끝났어. 이제 출발할 거야.]

[얼마나 걸려?]

[30분?]

[데리러 갈까?]

주말 오후 강남은 오후까지 차가 몹시 막힌다. 그 탓에 희선은 절대로 결혼식엔 일부러 차를 끌고 오지 않았고, 올 때도 일부러 걸어왔다. 서원이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게 질색인 그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갈게.]

언덕길을 오르는 것이 조금 귀찮긴 하지만 날도 좋으니 산책 겸 걸어가도 될 것 같았다. 답장을 보내고 나자, 곧 자신을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는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까지 마실까 했지만 그러다 괜히 뒤풀이에 가자고 붙잡힐까 봐 굳이 나와서 사 먹는 중이었다. 아메리카노를 든 그는 후후 불어 한 모금 홀짝인 후 기둥 쪽에 서서 다시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점심 먹었어?]

[응. 먹었지.]

[그럼 내가 디저트 사 갈게. 기다려.]

희선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향했다.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 사람 예전에 그 유명했던 모델 아냐?”

“진짜 크다. 근데 얼굴 대박 작아.”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것도 느껴졌으나 이 또한 반응하기조차 지겨운 일들이었다. 희선은 커피를 든 채 빠르게 안쪽 골목으로 돌아갔다.

이리저리 길이 나뉘어 있어 복잡하지만, 희선은 망설임 없이 골목을 누볐다. 일찌감치 시작한 모델 일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근처라면 지겹게 돌아다녔다. 성인이 된 후엔 10년 넘게 살았으니 강남은 제 손바닥이나 마찬가지였다.

집 근처에 거의 다다르자 다 마신 커피 컵은 쓰레기통에 버린 뒤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도 맛있지만 케이크나 구움 과자도 유명한 곳이었다. 그가 들어가자 안면이 있는 주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와요. 오늘은 뭘 드릴까요?”

“음, 피낭시에랑 마들렌 열 개씩이요. 아, 그리고 이 선물 세트도 같이 주세요.”

피낭시에와 마들렌을 열 개씩 사자, 주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곧 여전히 대식가라며 부지런히 과자를 담았다.

희선은 가게에 들를 때마다 구움 과자를 잔뜩 사 들고 갔다. 그가 유명한 모델이자 쇼핑몰을 하는 것을 알기에 처음엔 사무실 식구들한테 돌리나 싶었으나 아니었다.

1년 전쯤 희선은 서원과 산책하던 중에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열 개나 되는 과자를 전부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본 뒤론 주인은 여태 자신이 팔았던 과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되었다.

늘 통 크게 사 주는 손님이니 주인은 서비스로 파운드 케이크와 그가 간혹 사 가던 다쿠아즈도 넣어 주었다. 희선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 봉투를 받았다.

밖으로 나가며 희선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거의 다 옴.]

수신자는 당연히 서원이었다. 희선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집을 확인하자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휴대폰을 넣었다. 그의 걸음이 전보다 더 빨라지고 있었다. 언덕길을 평지만큼이나 가볍게 걸어서 곧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왔어.”

“잘 다녀왔어?”

마침 서원은 현관 근처에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식당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자, 웃고 있던 희선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다.

“저기 밑에 과자점에서 사 왔어. 먹자.”

“아, 안 그래도 거기 지나면 좀 사 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머그컵을 들고 있던 서원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에 오늘 저녁에 방문할 집에 가져갈 선물 이야기를 했었다. 희선은 봉투 안쪽에 들고 있던 다른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형들 집에 갈 때 가져갈 선물도 사 왔어.”

“다행이네. 안 그래도 뭐 사 가야 하나 했는데 잘했어.”

서원은 그가 들고 있던 박스를 확인하고는 안도하며 웃었다. 일견 무심해 보이던 얼굴이 밝아지자, 희선은 멈칫하더니 곧 봉투와 박스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서원의 잔을 빼앗아 내려놓고는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서원은 움찔 놀랐으나 잠시 후엔 제 몸을 감싸는 상대의 몸을 끌어안았다. 희선은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더니 곧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

“응…… 이제 좀 괜찮아.”

숨을 들이켤 때마다 서원에게서 저와 같은 체향이 느껴졌다. 욕실을 공유하며 같은 제품을 쓰니 당연했지만, 희선은 마냥 좋아하며 상대를 더 꽉 끌어안고 비비적거렸다.

서원은 저를 품에 안은 채 즐거워하는 남자의 품에서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딱히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다. 그저 전날 밤 잠자리가 거칠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던 것뿐이다.

희선은 종종, 아니 몹시 자주 흥분했고, 하필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정확히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결혼식 얘기를 하면서 점점 더 지분거림이 심해졌던 것 같다.

처음엔 분명 결혼식에 가기 귀찮다는 투정이었다. 모델 생활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희선은 인맥이 넓었다. 게다가 사업도 하고 있으니 빠져선 안 됐고 경조사엔 잠시라도 들러 얼굴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때마다 귀찮다며 가기 싫다, 어디 어디 뷔페는 맛이 없다, 불평했고, 서원은 잘 달래서 보냈다.

물론 말만 귀찮다 하지, 시간이 되면 재깍재깍 준비하고 나간다. 그저 엄살이 조금 심할 뿐이었는데, 어제도 또 달라붙어 귀찮다 소리를 하기에 그래도 가야지, 소리를 하다 뜬금없이 신혼여행 얘기가 나왔다.

그 후엔 늘 그렇듯이 갑자기 흥분한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려 다급하게 관계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격렬한 행위 후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 보니 희선은 외출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근육통에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키니, 다 씻은 그가 얼른 다가왔다. 씻는 것을 도와준 뒤엔 제가 먹을 아침도 차려 주고 결혼식에 갔다. 하지만 서원은 그가 간 이후에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잠깐 다시 잠들었던 그는 일어나 안마의자에 앉았다. 반 시간 정도 굳은 몸을 풀며 전자책을 보다 끝난 뒤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니 조금 나아졌다.

두 사람이 붙어 있는 옆으로 바닥에선 로봇 청소기가 지나갔다. 넓어서 청소기를 돌리는 것도 일이라 구매했는데 몇 년간 가장 쓸모 있는 지출 중 하나였다.

“우리 멍뭉이 일 잘하고 있네.”

멍뭉이는 로봇 청소기 이름이었다. 하루 종일 집을 돌아다니며 청소하는 게 귀엽다며 마치 반려동물처럼 귀여워했다.

‘진짜 멍뭉이는 얼마나 귀여울까?’

라는 말도 꼭 빼놓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빤히 쳐다볼 때마다 서원은 애써 못 들은 척을 해야 했다.

지금은 그나마 덜 하지만, 한동안은 개를 키우자며 얼마나 졸랐는지 모른다. 서원이 1년 동안 열심히 무시하자 최근엔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대신에 옆집에서 키우는 개들은 여전히 예뻐했다.

“루엔이랑 노즈 보러 빨리 가고 싶다.”

“조금 일찍 가도 되냐고 물어볼게.”

“그래. 아, 차라리 우리가 산책시키면 안 되나?”

이사 오며 친해진 옆집 사람들이 여행을 가거나 집을 오래 비울 때마다 맡아 주는 건 둘이었다. 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시지를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오전에 이미 산책했다는 답변이 왔다.

“오늘은 이미 했대.”

“으! 아깝다.”

희선은 아쉬워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번듯한 정장 차림으로 울상을 짓자, 서원은 그 모습을 보며 풋 웃음을 흘렸다.

희선은 제 애인이지만 정말 외모만큼은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울 만큼 잘생겼다. 물론 실제로 자랑한 적은 없지만, 오늘처럼 특히 잘 차려입은 날엔 매일 보는 자신도 설렐 정도였다.

왁스로 살짝만 손봐 자연스럽게 정리한 머리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맨 단정한 정장 차림은 당장 광고에 나와도 어색하지 않았다. 서원은 그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우울해하는 희선을 위로했다.

“내일 가자고 하자. 아마 오늘 술 마시면 형 내일 못 일어날걸.”

“그럴까? 이따 말해야겠다.”

“너도 많이 마시지 말고.”

두 사람의 옆집엔 정한과 일한이라는, 이름은 비슷하지만 생판 남인 남자 둘이 살았다. 처음부터 예상했지만 둘은 역시 커플이었고, 대형견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일한은 회사원인데 직책이 꽤 높은 편이었고, 정한은 가게를 운영하는데 경영은 다른 사람이 한다고 한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둘 다 집안도 좋고 부유해 보였다. 집도 그렇고 옷이나 시계 차 등을 봤을 때 보통 사람들 수입으론 엄두도 못 내는 것들이 잔뜩 있었다.

정한과 희선은 둘 다 말술이라 만날 때마다 커다란 병이 몇 개씩 사라진다. 달에 한 번은 꼭 술자리를 가졌고, 그때마다 술을 못 하는 서원은 안주를 만드는 일한을 도와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

일한은 요리를 정말 잘했다. 웬만한 음식점보다 더 맛있었고 종류를 가라지 않았다. 여행을 갈 땐 개를 맡기는 것이 미안하다며 항상 반찬을 잔뜩 만들어 주는데, 떨어지면 두 사람은 한동안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곤 했다.

하지만 완벽한 일한도 베이킹은 못 한다. 정확히는 시도를 안 한 것인데, 그래서 선물은 주로 술이나 디저트였다. 음식 재료나 과일은 따로 집에서 늘 보내 준다고 하니 선물할 수 있는 것이 한정적이었다.

외출이지만 바로 옆집이라 두 사람은 편한 차림으로 나섰다. 대문이 열리자마자 안에서 개들이 반갑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저희 왔어요!”

“어서 와요.”

문을 열어 준 것은 정한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주방에서는 일한이 앞치마를 맨 채 고개를 까딱였다. 희선은 그와도 인사를 하자마자 얼른 거실로 가서 개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루엔! 노즈! 일주일 만이네.”

희선의 인사에 개 두 마리가 얼른 달려와 안긴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두 마리 개를 얼싸안았다.

“어이구, 귀여워. 너희는 그새 더 커진 것 같다.”

자주 보는 데다 산책도 오래 시켜 주고 잘 놀아 주는 그를 보고 개들도 신나서 꼬리를 흔들었다. 서원은 그럴 줄 알았기에 들고 있던 봉투를 정한에게 건넸다.

“구움 과자예요. 드세요.”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고마워요. 편하게 앉아요.”

“아니에요. 식사 준비 중이신 것 같은데 도와 드릴게요.”

“그럼 저야 고맙죠. 일한이도 저보단 서원 씨가 도와주는 편이 편할걸요.”

정한은 사양하지 않고 털털하게 웃었다. 차분하고 손이 꼼꼼한 서원은 일한의 조수역을 그보다 더 잘했고, 어느 순간 집주인과 손님의 역할이 바뀌었다.

희선이 개들과 놀아 주는 동안 정한이 술과 잔을 내와 식탁에 세팅했다. 주방에선 일한이 음식을 만들면 서원이 옆에서 도우며 유심히 살폈다.

“아, 소스는 마지막에 붓는 거예요?”

“네. 그래야 너무 짜지 않거든요. 가볍게 볶아 내는 편이 담백하고 불지도 않더라고요.”

일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기 쉽게 차분히 설명했다. 강사인 서원은 이럴 때마다 그가 자신보다 더 잘 가르치는 것 같아 동업자가 아님에 감사했다.

조용히 대화하며 음식을 만드는 둘과 달리, 정한과 희선은 대화하며 계속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한은 본인 자체는 조용한 편이지만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게다가 전부터 희선이 자기 친구들과 잘 놀 것 같다며 관심을 보였다.

희선이 개들과 노는 동안 음식들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 정한은 음식은 못 하지만 플레이팅은 제법 잘했는데, 서원은 그가 음식을 담는 모습도 잘 살폈다.

식탁에 음식들이 차려지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당장 화보에 나와도 될 만큼 완벽한 세팅이었다. 냄새 또한 식욕을 자극했고, 네 사람은 곧 자리를 잡고 앉아 잔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드세요.”

시작은 가볍게 와인부터 땄다. 얼마 전에 일한과 정한이 프랑스 여행을 가서 소도시에서 사 왔다는 화이트 와인은 음식과도 잘 어울렸고 무척 맛있었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그쵸? 이거 말고 다른 것도 맛있어요.”

“얼른 먹고 맛봐야겠는데요?”

정한은 주당답게 여행을 가면 꼭 술을 사 왔다. 덕분에 희선은 온갖 나라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금도 술이 반병 넘게 남았는데도 다른 술을 탐하자, 정한은 역시 다르다며 감탄했다.

두 사람은 취향과 주량이 맞는 술친구가 생겨 기쁜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난 뒤에도 계속 잔을 놓지 않았고, 술이 약한 서원은 일한의 뒷정리를 도우며 그가 안주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언제나처럼 느긋한 주말이었다. 보통은 둘만 보내지만 이렇게 옆집 커플과 함께 식사할 때도 있고, 가끔은 서로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희선이 바비큐 그릴을 샀을 때는 조금 자주 만났고, 아니면 그의 회사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를 열기도 한다.

지금은 원래 주인인 희선 대신에 정현이 사는데, 겨울만 아니면 그는 자주 혼자서도 고기를 구웠다. 환기 걱정이 없으니 좋다며 혼자 퇴근 후에 소주와 삼겹살을 즐긴다고 한다.

예전엔 희선이 같이 있었으나, 지금은 홀로 먹는데도 별로 아쉬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경쟁자가 사라져 혼자 여유롭게 구워 먹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그의 SNS엔 술과 고기 사진밖에 없는데, 오늘도 마침 올라왔다.

“와, 이 지독한 놈, 오늘도 혼자 삼겹살 먹네.”

“정현 씨?”

서원은 그 말에 휴대폰에서 SNS를 확인했다. 제일 상단엔 1분 전에 희선이 올린 루엔과 노즈 사진이 있었다. 희선은 원래 SNS라면 질색했고 가입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꾸 친구 추가를 해서 메시지를 보내온다며 싫어했으나, 루엔과 노즈 사진을 저장하기 위해 비공계 계정을 만들었다. 가장 가까운 지인들만 추가되어 있었는데, 개 사진들을 빼면 여행지에서 찍은 풍경 사진이나 음식 사진뿐이었다.

그 아래 5분 전에 올라온 정현의 사진이 보였다. 오늘도 혼자 옥상 평상에 앉아 술과 삼겹살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의 앨범은 거의 비슷한 사진뿐이었다. 초점도 맞지 않는 무성의한 사진을 보자 댓글에 렌즈 좀 닦으라는 타박이 이어졌으나, 이게 멋이라며 뻔뻔하게 대꾸한 흔적이 보였다.

화면을 보며 웃고 있으니 마침 옆을 지나던 정한이 아는 척을 해 온다.

“그 삼겹살 친구?”

“네. 오늘도 삼겹살 구워 먹네요.”

삼겹살 친구라는 말에 서원이 웃었다. 들을 때마다 삼겹살만 먹고 있으니, 정한은 어느새 정현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눈치 없는 친구는 요즘 어때요?”

“여전히 몰라요.”

눈치 없는 친구라는 말에 서원의 눈이 접혔다. 평소 눈썰미 좋고 화통한 성격의 효성은 자기 연애엔 정작 눈치가 없었다.

1년 넘게 한결이 짝사랑 중인데, 다른 사람은 다 알지만 효성 본인만 모른다. 다정한 성격이지만 밀어붙이는 것에 약한 한결이 한 방이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얼른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이 보기엔 두 사람은 성격도 맞고 잘 어울렸다. 감이 빠른 희선도 몇 번 함께 술자리를 한 뒤 깨달았는데, 자신과 달리 처음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아니, 왜 하필 효성이야?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효성이 괜찮은데.’

서원은 희선의 반응이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효성은 성인이 된 직후부터 옷 장사를 해서 그런지 패션 센스가 좋았다. 자연스럽게 잘 꾸미고 장사를 해서 말주변과 사회성도 좋고 성격도 털털했다.

낯가리는 편인 서원은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늘 세련된 그가 부러웠다. 그러나 희선은 자신은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원래 남자한테 관심 없긴 하지만, 효성은 친구 이상으로는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효성도 아무리 잘생겨도 희선은 싫다 하니, 어찌 보면 공평한 관계였다.

그 뒤로 두 사람은 효성과 한결이 언제 사귈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진척이 없자, 재미있어 하던 희선도 슬슬 답답해 미치려고 했다.

전에도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는데 효성이 가게 때문에 늦게 오자, 이제 차이든지 덮치든지 하라고 울화를 터트릴 정도였다. 그 뒤, 집에 놀러 왔을 때도 사리가 쌓인다며 불만을 털어놓았기에 정한과 일한도 효성과 한결의 일을 알고 있었다.

“난 좀 이해가 돼. 원래 친했으니 고백해서 관계가 어긋나는 게 무서울 수도 있잖아요.”

“맞아요. 친구 사이도 소중하니까.”

정한의 말에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나 희선은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짝사랑인 시점에서 사실 친구도 아닌 거 아닌가.”

그 말에 서원은 가슴이 뜨끔했다. 친구의 자리라도 지키려고 했던 과거가 떠올라 희선을 바라보자, 그는 과거 일은 전부 잊은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냥 겁이 많아서 그런 거잖아요. 말만 친구지, 속이 시커먼데.”

서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양심이 찔리는데, 다행히도 일한이 곧 커트해 주었다.

“그래도 친구로서의 감정도 분명 존재할 테니까요.”

“아, 그렇긴 하네.”

“연애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이전이나 현재의 우정이 의미 없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래도 너무 답답하다고요.”

희선은 그 말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다 곧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일한이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더 이상 양심에 찔리는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별일 없죠?”

“없어요. 늘 비슷하죠.”

희선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한동안은 정말 평화로웠다. 가끔 짜증 나는 일은 늘 찾아오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격이 올 만한 일은 없었다. 정한이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게 좋은 거지. 별일 없이 사는 거.”

“맞아요. 아무 일 없는 게 좋은 거죠.”

크게 잘 되는 일이 없더라도 별 사고 없이 잘 지내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었다. 서원은 주변이 무탈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다가온 루엔을 쓰다듬었다.

그사이 부엌 정리를 끝낸 일한이 다가오더니 새 와인을 따서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이 집에 들락거리며 와인에 눈을 뜬 희선은 기뻐하며 받았고, 정한은 벌써 다음 술을 고민하고 있었다.

장소를 거실로 옮긴 뒤에도 얘기는 계속되었다. 진중하고 털털한 성격의 집주인들 탓인지, 즐겁지만 소란스럽진 않은 편안한 분위기였다. 일한과 정한이 여행 가서 겪은 일들이나 각자 근황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떠드는 사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정이었다.

정한과 희선 둘 다 술이 올랐고 손님이 와서 신나 실컷 뛰어다니던 루엔과 노즈도 잠이 들었다. 서원은 일한을 도와 마저 뒷정리하고 취한 채 자는 개들을 쓰다듬는 희선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토요일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취한 희선은 평소보다 더 푹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서원이 보이지 않아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먼저 욕실부터 들렀다가 대충 씻고 나와 거실과 주방을 살폈다.

“서원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르게 걸어가던 그는 곧 주방에서 식사 준비 중인 서원을 발견했다.

“일어났어?”

음식 냄새가 난다 했더니 역시 요리 중이었다. 얼른 다가간 희선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달라붙었다.

“맛있겠다. 해장국이야?”

“응. 너 어제 이것저것 많이 마셨잖아.”

화이트 와인으로 시작해 포트 와인으로 바꿨다가 나중엔 데킬라까지 다양하게 마셨다. 일한이 부지런히 안주를 챙겨 빈속이 아니긴 했지만, 서원은 그래도 속 버린다며 다음 날엔 꼭 해장국을 끓여 주었다.

그럭저럭 먹을 만했던 솜씨는 점점 좋아져 요즘은 사 먹는 것만큼 괜찮았다. 이게 다 일한에게 비법을 배운 덕이었다. 주당인 애인과 살며 는 것은 해장국과 안주 만드는 것밖에 없다며 웃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원은 안주는 만들지 않지만 대신 아침에 해장국은 끓여 주었다. 어젯밤에 집에 오기 전에 일한이 나눠 준 반찬을 함께 먹고 나선 정리는 희선의 몫이었다.

희선이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는 동안, 서원은 커피를 내려 거실로 가져갔다.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으니 앞에선 멍뭉이가 열심히 돌아다니며 먼지를 치우고 있었다. 손을 닦고 돌아온 희선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세상 살기 편해졌다. 그치?”

“그러네.”

세밀한 작업은 사람이 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청소와 설거지를 대신 해 주니 편하긴 했다. 희선은 로봇 청소기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잘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다 보니 내려놓자 알아서 복도를 돌아다니며 청소했다. 희선은 그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면서도 계단을 내려오며 투덜거렸다.

“그냥 하나 더 놓자니까.”

“계단 두 번 왔다 갔다 하는데 시간 얼마나 걸린다고. 그리고 더 이상 짐 늘리지 않기로 했잖아.”

희선은 귀찮으니 2층에도 로봇 청소기를 따로 놓자고 했지만, 서원은 계속 반대했다. 번거로우면 자신이 할 테니 희선에게 내버려 두라 했으나,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희선은 구시렁거리면서도 한 시간 뒤엔 2층에 올라가 멍뭉이를 데려와 먼지통도 착실하게 비우고 걸레도 제가 빨았다. 평일엔 집에 있는 서원이 하니까 주말엔 집안일을 열심히 돕는 편이었다.

그가 청소하는 동안 서원은 혹시 몰라 일한에게 개 산책을 대신 가 줘도 될지 물었다. 예상대로 정한이 숙취로 산책을 못 하게 되었다며, 괜찮다면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서원은 바로 수락한 뒤, 희선을 불러 옆집으로 향했다.

“저희가 데리고 놀다 올게요. 푹 쉬세요.”

“고마워요.”

일한이 개들을 건네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해 왔다. 희선은 손사래를 치며 환하게 웃은 뒤 노즈의 줄을 붙잡았다.

“뭘요. 저희도 덕분에 같이 노니 좋은데요.”

두 사람은 신나 하는 개들을 데리고 공원 쪽으로 향했다. 근처에 개 공원이 있는데, 그곳엔 대형견들도 많고 견주들도 많아서 풀어 놓고 쉬기 좋았다.

“개들이랑 있으면 눈에 덜 띄어서 좋다니까.”

희선은 흐뭇해하며 말했으나 서원은 긍정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이유는 아무리 눈에 띄는 개들과 있어도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희선이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훤칠한 데다 잘생긴 그가 커다란 개들까지 데리고 돌아다니자 평소보다 더 많은 시선이 몰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는 말은 걸지 못하던 사람들이 개를 핑계로 이것저것 질문했다.

“어머, 귀여워라.”

“개들 이름이 뭐예요?”

“제가 주인이 아니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요즘 세상이 워낙 험해서요.”

희선은 이때만큼은 나름 친절했다. 원래라면 못 들은 척 지나갔을 텐데 나름 미안한 척 웃으며 적당히 넘어간다.

보통 이 정도 대처면 사람들은 바로 이해하며 넘어갔다. 워낙 세상이 흉흉하니 이름도 함부로 알려 주면 안 되는 건 당연했다. 다른 견주들도 자주 마주치는 동네 주민이나 공원에서 안면을 익힌 견주들 외엔 이름도 알려 주지 않는다.

일한과 정한이 당부하기도 했지만 좋게 거절하는 모습을 보며, 서원은 내심 감탄했다. 확실히 예전과 달리 어른스러운 부분들이 언뜻 보일 때마다 기분 좋은 만족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바로 어제 일이 떠올랐다. 본의는 아닐 테지만 자신의 과거를 타박하는 듯한 발언에 서원은 고개를 돌려 힐끔 희선을 살폈다.

희선은 개들을 살피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워낙 잘생긴 탓에 무표정해도 멋있지만 웃고 있으니 훨씬 보기 좋았다. 천진난만한 눈으로 개들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그를 보자니, 살짝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너 어제…….”

“응? 뭐?”

“아냐.”

서원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려고 그런 자신이 쪼잔하게 느껴졌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괜히 과거 이야기를 꺼내 봤자 저만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이 흘려넘기는 게 낫겠다 판단했을 때였다. 희선은 걸음을 멈추더니 서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무슨 일인데?”

“별거 아니야.”

“아닌 것 같은데.”

진지한 눈빛에 서원은 당혹감을 느꼈다. 혹시 제 표정이 어두웠나 생각하는데 희선이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네가 이렇게 말을 하다 말면 꼭 내가 의식 못 한 실수를 했을 때가 대부분인데”

“…….”

“뭐지? 내가 뭘 또 실수했지?”

희선은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본인은 도무지 짐작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서원의 눈치를 살핀다. 그 모습에 서원은 처음엔 난감함을 느꼈으나 곧 픽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배려심은 부족하지만 눈치는 빨랐다. 그러자 희선은 갑자기 왜 웃냐는 듯 의문스럽게 바라봤고, 서원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냥 앞으론 술 좀 줄이라고.”

“진짜야?”

그래도 희선은 의심을 풀지 않는다. 이러다 나중에 또 한 소리 듣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게 훤히 드러나는 얼굴이라 서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럴 때마다 상대가 어린애처럼 느껴지면서도 귀엽고, 또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다. 루엔이나 노즈가 잘못했을 때 몸을 잔뜩 웅크리고 기어 오는 모습과 비슷해 절로 웃음이 났다.

“저녁 뭐 먹을까? 피자 시켜서 영화 볼까?”

“그거 좋지.”

먹는 얘기로 돌리자, 희선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신메뉴 나온 게 궁금했다며 즐거운 얼굴로 떠든다. 서원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공원으로 향했다.

루엔과 노즈는 공원에서 실컷 다른 개들과 뛰어놀았는데도 기운이 넘쳤다. 개들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준 뒤, 서원은 안마의자에 몸을 기댔고 희선은 피자를 시켰다.

다행히 피자가 도착했을 땐 조금이나마 체력을 회복했다. 소파 앞에 앉아 피자를 먹으며 영화를 한 편 본 뒤엔 디저트로 커피와 함께 어제 사 온 구움 과자를 먹었다.

코미디 영화라 우스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희선은 서원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서원도 그의 손을 붙잡아 만지작거리다 따라 웃기도 했다.

열심히 화면을 바라보다 중간에 광고가 나올 때면 희선은 서원에게 지분거렸다. 손으로 뺨을 만지작거리자, 서원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챈 그는 바로 고개를 들어 입술에 키스했다.

희선의 얼굴에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전엔 대놓고 졸랐으나, 최근엔 이런 식으로 눈치를 주는 편이었다. 느긋한 키스가 오가는 동안 다시 방송이 시작되었으나 그만둘 마음은 없어 보였다.

서원은 낮게 웃으며 제게 달라붙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느새 자세도 바뀌어 소파에 누운 채였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한 희선이 몸을 숙이더니 서원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붙잡힌 손은 희선의 바지 안으로 넣어졌다. 서원은 움찔하면서도 순순히 시키는 대로 그의 성기를 붙잡았다. 이미 단단해지고 있는 살을 주무르자, 희선이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목을 깨물었다. 서원은 약한 통증과 동시에 쾌감을 느끼면서도 살짝 눈을 찡그렸다.

“안 되는데…….”

“왜?”

희선이 불안한 눈빛으로 인상을 구겼다. 서원은 그를 마주 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욕실 청소해야…….”

“지금 그게 할 소리야?”

희선은 바로 눈을 부릅떴으나 서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했다. 평일엔 이래저래 바빠 주말에 하기로 이미 약속했었다. 그런데 주말에 희선이 결혼식을 가야 했고 저녁엔 옆집에 가느라 여태 못하고 있었다. 희선은 괴로워하는 소리를 내더니 곧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따 샤워하면서 욕실 청소할게.”

“응.”

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다시 손을 움직였다. 단단해진 살을 쥐고 흔들자, 희선은 다시 신음하며 서원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손이 서원의 바지 속으로 들어갔고 조금 전보다 더 진한 키스가 오갈 때였다.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렸다. 희선은 바로 인상을 구겼으나 고개를 떼는 서원의 입술을 다시 눌렀다. 서원은 당황하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누가 온 것 같은데.”

“누가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다고.”

주말이니 택배도 아닐 테고 배달 올 것도 없었다. 희선은 무시하며 다시 입술을 눌렀으나, 그 순간 벨이 또 울렸다. 동시에 테이블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는 인상을 구기며 벌떡 일어났다.

“대체 누구야!”

일요일 저녁을 방해하는 자를 용서치 않겠다며 희선이 험악한 걸음으로 인터폰으로 향했다. 서원은 테이블에서 진동하는 것이 제 휴대폰임을 확인하자 얼른 들었으나, 그 순간 바로 전화가 끊겼다.

“어?”

[나야.]

발신자는 효성이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가 인터폰에 울리고 있었다. 희선은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서원은 옷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희선이 대문을 열어 주자, 곧 아래쪽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희선은 현관으로 다가가며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너는…… 됐다. 갑자기 찾아온 내 잘못이지.”

효성은 갑자기 열리는 문에 당황하며 희선을 아래위로 살피다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얇은 트레이닝 바지 위로 존재를 드러낸 묵직한 그의 성기와 마주한 탓이었다. 서원은 뒤에서 그 모습을 보다 얼굴을 붉히며 다가갔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했거든? 너희가 안 본 거지.”

“아…… 미안.”

그 말에 휴대폰을 다시 확인해 보니 10분 전에 지금 집으로 찾아가고 있다는 메시지가 보였다. 서원은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하며 거실을 가리켰다.

“차라도 줄까?”

“응…… 주면 고맙지.”

서원은 얼른 주방으로 들어갔다. 효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거실로 향했고, 그사이 희선은 짜증을 내며 침실로 들어갔다.

왜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효성은 애써 모른 척하며 소파 근처를 맴돌다 흐트러진 쿠션들을 보더니 한층 더 어두운 표정으로 조심히 쿠션을 올려놓았다.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있던 서원은 민망함을 숨기며 질문을 던졌다.

“밥은 먹었어?”

“아니.”

“정말? 배고프겠네.”

그는 커피 대신에 먹을 것이 있는지 냉장고부터 살폈다. 저녁으로 시킨 커다란 피자 한 판은 사이드 메뉴까지 전부 사라졌다. 그가 급하게 먹을 것을 찾는 사이 주방으로 다가온 효성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배 안 고파.”

“그래도 먹어야지.”

서원은 그러면 안 된다며 냉장고를 마저 뒤졌다. 그런데 언제 다가왔는지 희선이 싱크대를 열어 라면을 꺼냈다.

“뭐가 예쁘다고 밥까지 차려 줘. 그냥 라면이나 끓여 줘.”

“라면은 좀…….”

“마침 얼큰한 게 당겼는데 잘됐네.”

희선은 매운 라면을 꺼냈다. 서원은 미안해하며 효성을 살폈으나, 다행히 그는 뭐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라면만 내주기엔 미안했다. 서원은 냉동 칸에서 떡과 만두 그리고 차돌박이를 꺼냈다. 빈속에 매운 것을 먹으면 위가 아플 테니 건더기를 풍성하게 넣을 생각이었다.

희선은 그사이 한 번들을 전부 포장을 뜯었다. 저녁과 후식까지 다 먹고 양이 좀 많지 않은가 했으나, 원래 혼자서도 서너 개는 거뜬히 먹는 희선이었다. 효성도 양이 적지는 않으니 넉넉하게 만들어 내놓았다.

효성은 처음엔 입맛이 없어 보였으나 끓기 시작하자 얼른 식탁에 앉았다. 커다란 냄비를 앞에 내놓자 바로 젓가락을 들더니 잔뜩 집어 갔다. 희선은 그를 경계하며 자신도 잔뜩 덜었다.

“밥맛 없다더니.”

“흠, 성의가 있는데 맛있게 먹어야지.”

효성은 헛기침을 하더니 바로 한입 가득 면을 넣었다. 맛있는지 쉬지 않고 먹자, 희선은 얼른 만두와 차돌박이를 건져 대기 시작했다. 서원은 이러다 효성의 몫까지 다 빼앗길 것 같아 국자로 건더기를 듬뿍 퍼서 건네주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야?”

“아…… 그게…….”

효성은 본론을 꺼내자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망설이며 만두를 젓가락으로 자르며 고민했다. 서원은 그의 그릇에 면을 더 덜어 주었다.

“일단 먹고 얘기해.”

“고마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일단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효성은 머뭇거리다 다시 젓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배가 고팠는지 얼마 안 가 다 비웠다. 희선은 밥통에서 남은 밥을 가져오더니 말아 먹기까지 했다. 효성은 배가 차자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내가 너무 자의식 과잉 같아서 말하기 힘든데.”

“아, 뭔데?”

희선은 얼른 말하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효성은 그를 힐끔 노려보다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또 뜸을 들였다. 희선이 눈을 부라리며 얼른 말하라고 눈치를 줬다. 결국 욕이 나오기 직전에야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혹시 한결이가…… 나 좋아하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선이 움켜쥐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서원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을 들이켰고, 그 모습을 보자 효성은 움찔 놀라더니 곧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아니겠지. 잊어 줘!”

괜한 말을 했다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붉어지는 얼굴을 가린 채 갈 채비를 하자, 서원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효성은 급하게 현관으로 향했지만, 다행히 희선이 잽싸게 그의 뒷덜미를 잡으며 호통을 쳤다.

“그걸 이제 알았냐! 이 눈치 없는 새끼야!”

* * *

상대의 존재를 몰랐을 땐 무심히 지나가는 법이지만 한 번 안면을 트면 관계는 어떻게든 진전되기 마련이었다. 정현과 경진은 최근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 대신에 효성의 가게에 갔다.

오가며 마주칠 때도 있고 희선의 집에서도 몇 번 모임이 있어 친분이 생겼고, 눈치가 빠른 둘은 당연히 한결의 짝사랑도 깨닫고 있었다.

“드디어?”

“이제야?”

“그렇다니까. 미친 줄.”

희선은 질색하며 답했고, 정현과 경진은 어이없어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도 진작 눈치챘는데 어떻게 본인이 여태 몰랐대?”

“난 이제라도 안 게 신기하다.”

경진과 정현이 번갈아 묻자,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고백했다면 그렇게 멍청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불판 위에 김치를 얹으며 말을 이었다.

“그랬으면 답답하지나 않지. 요즘 한결이한테 연락하는 사람이 있었나 봐. 알고 보니 효성이랑도 아는 사인데, 한결이가 자기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거절했다는 얘길 들었대. 근데 이 멍청이가 한결이한테 그게 누구냐고 물었던 거지.”

“허억, 한결 씨는 뭐라고 했대?”

경진이 소름이라고 중얼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걸 보니 분명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희선은 익은 고기를 두 점 입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한결이가 한숨 푹 쉬면서 분위기 겁나 싸해졌고 아무 말 안 하다가 그냥 가 버렸대. 그제야 이 둔탱이가 혹시나 하고 물으러 왔던 거야.”

“허어억!”

경진이 양손으로 제 어깨를 잡았다. 상상만 해도 어색해 미칠 것 같은 순간이라며 진저리치자, 정현은 피식 웃었다.

“진짜 웃기는 사람이야.”

“내가 한결이면 이미 효성이 한 대 쳤다.”

희선은 정색하며 덧붙였다. 정현과 경진은 공감한다는 눈빛을 보내며 각자 입에 고기를 털어 넣었다.

“이제 알았냐고 했더니, 너희는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데, 진짜 어이가 없어서.”

“효성 씨 생각보다 엄청 둔하구나.”

“눈치 빠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쩌긴, 당장은 놀라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대서 튕기지 말고 잡으라고 했지. 솔직히 한결이가 아깝지 않냐? 그런데 계속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하다, 그러기에 서원이가 상대하라고 내버려 두고 난 욕실 청소했지.”

“뭐? 그 타이밍에?”

“서원이가 꼭 그날 하라고 했단 말이야. 미루면 평일에 본인이 해 버리니까 주말에 내가 한 거지. 아, 오기 전에 딱 분위기가 좋았는데.”

희선이 샤워까지 마치고 내려와 보니 효성은 사라져 있었고, 서원 혼자 주방 정리 중이었다. 희선은 잘됐다 싶어 다시 지분거렸으나 서원은 영 내키지 않는지 씻으러 가 버렸고, 결국 심심한 밤을 보냈다.

경진은 아무리 자기 친구가 아니라지만 너무하다는 듯 바라보았고, 정현은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이 대화할 동안 쌈에 고기를 세 점 넣었다.

셋은 오랜만에 모여 저녁 식사 중이었다. 희선은 서원이 강의가 있어서 함께 저녁을 못 먹고, 경진은 야근 예정이고, 정현은 원래 고기를 좋아하기에 뭉친 참이었다.

셋 다 잘 먹는 편이라 삼겹살을 두 근 사서 굽는데 남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옆엔 포트에 라면을 세 개나 끓이고 있었다. 경쟁하듯이 먹느라 그것도 얼마 안 가선 바닥을 보였다. 경진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희선을 흘끔거렸다.

“너 너무 먹는 거 아니냐? 요즘 전보다 쪘는데.”

“괜찮아. 모델 안 하면 되니까.”

“뭐? 진짜?”

“젊은 모델 많은데, 뭐. 언제까지 내가 하냐.”

희선은 전에 노출 광고를 찍느라 다이어트를 했었으나 최근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충분히 보기 좋게 마른 건강한 몸이었다.

“모델 바뀐다고 망할 것도 아니고. 서브 모델들 상품도 잘나가잖아. 결과적으로 옷만 괜찮으면 되는 거야.”

그 말에 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희선이 입는 제품이 제일 잘나가긴 하지만 쇼핑몰 후기엔 모델발이었다는 후기도 많았다. 따라 사 봤자 저 얼굴과 몸 아니면 소용없다는 자학 섞인 내용들은 유머 사이트에 종종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걸 귀찮아하는 희선이었다. 나이가 들자 전보다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저를 연예인처럼 좋아하는 팬들이 많았다. 과거엔 사진을 찍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지금은 달랐다. 서원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아 괜히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싫었다.

다행히 요즘은 굳이 밖에서 데이트하지 않아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최신 영화도 VOD로 금세 나왔고 배달 음식도 전보다 훨씬 수준이 높아졌다. 게다가 서원은 원래 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고 취미도 정적인 편이라, 희선은 옆에서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며 붙어 있었다.

실은 계속 지분거리고 싶어도 서원이 집중할 때 건드리면 조용히 화를 내며 다른 곳으로 옮기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입술을 비쭉거리는데, 경진이 따지듯이 물었다.

“야, 근데 이 재미있는 소식을 왜 이제 얘기해? 나랑 정현인 한결이가 언제 고백하나 내기까지 했다고!”

“너는 친구라는 놈이 응원은 못 해 주고 그러고 있냐.”

“그러는 너는 나 도와준 적이 있냐?”

희선은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라면을 자신의 그릇에 담았다. 돌이켜 보니 세 사람은 서로의 연애에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그나마 희선이 일방적으로 가끔 투덜거릴 뿐이었다.

“바빠서 다 같이 모일 시간이 없었잖아. 난 촬영하고, 경진인 어제까지 출장 갔었고, 정현이만 회사에 남아 있었으니까.”

“맞다. 그랬지.”

물론 SNS가 있기는 했지만 셋은 같은 회사인 데다 용건이 없으면 말을 걸지 않았다. 심지어 희선은 장 볼 목록이나 스케줄을 적는 메모장으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무튼 효성이 걔도 연애 참 못하는…….”

“사실이라도 너한테만은 듣고 싶지 않다.”

희선이 어이없어하며 비웃을 때였다. 갑자기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깜짝이야!”

“단란하게 모여 날 까고 있었단 말이지.”

“연락도 없이 왜 또 들이닥치고 그래!”

“난 항상 미리 연락했거든? 네가 확인 안 한 거지.”

당사자인 효성이 나타나자, 경진은 민망해하며 웃었다.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한 희선은 정말 메시지가 보이자 놀랐으나, 정현은 이미 들어올 때부터 보고 있었기에 웃기만 했다.

“어서 와요. 근데 이 시간엔 웬일?”

“뭐, 대충 사정 알잖아요.”

효성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선은 왜 또 나타났냐는 시선으로 쳐다봤고, 경진은 민망한 표정으로 웃는다.

“어서 와요, 효성 씨.”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여러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효성은 그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흘렸다.

“정말 다들 알고 있었네.”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냐.”

희선이 타박하자, 효성은 그 말에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격 좋은 세 사람에 비해 작긴 하지만 보통 이상의 신장과 체격을 가진 그까지 합세하자 꽉 차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 몰랐다고.”

“그 얘기 하러 온 거야?”

“그게…… 그 이후로 한결이가 안 와.”

거의 매일 효성의 가게에 출근 도장을 찍었던 한결이었다. 직장도 멀지 않아 끝나면 당연한 듯 들르던 그였는데, 그 일 이후로 연락도 없다고 했다. 희선은 그 말을 듣더니 인상을 굳혔다.

“당연하지. 너라면 가겠냐?”

“저라도 가기 껄끄러울 것 같은데요.”

웬만하면 좋은 말만 하는 경진까지 맞장구를 쳤다. 효성은 어두운 표정으로 들고 온 봉투에서 소주를 꺼냈다. 희선이 그 모습을 보더니 얼른 다가와서는 안을 확인했다.

소주와 맥주가 잔뜩 있었다. 기뻐하며 꺼내는데, 효성이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어 내며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너 먹으라고 안 했는데?”

“야, 갑자기 찾아왔으면 뭐라도 내놓는 게 원래 예의 아니냐?”

희선은 하여간 매너가 없다며 구시렁거리더니 숟가락으로 맥주부터 땄다. 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가서 잔을 더 가져왔고, 네 사람은 말없이 술을 주고받았다.

정현은 여전히 혼자 여유롭게 남은 고기를 구웠고, 경진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희선은 예정에 없던 술을 즐기고 있는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효성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근데.”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자 세 쌍의 눈이 자신을 주시했다. 그러나 며칠 전 서원과는 사뭇 달랐다. 애정과 관심 대신에 방관과 흥미와 무관심이 가득한 눈빛들을 보자 말을 할 의욕이 사라졌다.

답답해서 찾아오긴 했지만 하필 왜 이 사람들인가. 가깝고 제 성향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찾아오기엔 너무나 삭막한 인간들이었다. 효성은 이전의 만남을 통해 제가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입을 다문 채 한숨을 내쉴 때였다. 희선이 그를 비웃으며 새 맥주를 땄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냥 한결이한테 연락을 하든가. 걔랑 연애할 생각이 없으면 그냥 끝…….”

“야, 김희선.”

“왜? 뭐?”

조용히 있던 효성이 나지막이 희선을 불렀다. 희선은 왜 부르냐는 듯 껄렁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이어진 말엔 바로 입을 합 다물었다.

“너, 서원이가 나중에 너랑 헤어지고 싶으면 누구한테 제일 먼저 상담할 것 같아?”

“헙……!”

“서원이가 집 나가거나 사라지면 넌 누구한테 연락할까?”

효성은 두 손을 뒤로한 채 앉아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주변이 워낙 조용해 똑똑히 들렸고, 희선은 얼른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뭐가 궁금해? 어떻게 해 줄까? 뭐든 말해 봐.”

바로 태세 전환을 하는 그를 효성은 싸늘한 시선으로 흘겼다. 지켜보던 정현은 픽 웃음을 흘렸고 경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희선이 넌 효성 씨한테 잘해야지.”

“점수 많이 따 놔야 할 거다.”

경진과 정현이 번갈아 충고하자, 희선은 흠칫하더니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았던 탓에 여전히 서원에게 기를 펴지 못하는 편이었다. 잘해 보려고 하지만 애초에 섬세함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났으니 조심해도 늘 모자랐다.

“어휴…… 안주가 없네. 가져와야지.”

희선은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정현의 냉장고이니 분명 고기가 더 있을 거란 생각 탓이었다. 안주 핑계로 자리를 뜬 그는 곧 소시지와 고기를 더 가져왔다. 원주인인 정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긴 했으나 뭐라 하진 않는다.

“근데 정말 한결이한테 별 감정 없어요?”

“아니, 없다기보다는…….”

“한 번도 남자로 안 느껴졌어요?”

“그건 아니지만…….”

효성은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진심으로 고민하는 모습에 경진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사귀어도 괜찮지 않아요?”

경진은 모델 출신답게 훤칠한 키에 스타일이 좋았다. 잘생기고 세련된 데다 사근사근하지만 실은 무척이나 욕망에 솔직해 연애사도 화려하고 가십도 좋아했다. 효성은 유일하게 관심을 보여 주는 그를 보며 잠시 흔들렸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한결이 좋죠. 잘생겼고 키도 크고 매너도 좋고 착하고 보기 드문 좋은 남자라는 거 알죠.”

“근데 왜 고민해요?”

“아니, 괜찮다고 다 사귀나요? 뭔가 좀…… 그런 분위기가 있어야 사귀는 거지.”

효성은 열심히 설명했으나, 경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불신 가득한 눈빛에는 있었는데 모른 거 아니냐는 뜻이 듬뿍 담겨 있었고, 효성은 그 표정을 보자 찔리는지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한결이는 저한테 정말 잘해 줬고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취향도 나름 잘 맞는 친구, 30대 돼서 사귀기 힘들잖아요. 오히려 애인보다 친구 사귀기가 힘들 때니까.”

“아, 알지, 그거.”

희선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드물게 공감하는 모습에 이번엔 효성이 불신의 눈길을 보냈으나, 희선은 웬일로 맞는 말을 해 왔다.

“정말 좋은 사람이다 싶으면 친구로 오래 남고 싶은 기분, 이해해.”

“그치? 오히려 선 안 넘으려고 조심하게 되잖아.”

“맞아. 괜히 건드렸다가 어색해지고 좋았던 사이 틀어지면 아깝지.”

희선이 매우 드물게 제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처음으로 마음이 맞자 효성은 잠시 본론을 잊고 감동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김희선이었다. 효성은 여운에 젖을 사이도 없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제 감정을 되짚었다.

“난, 그저 오해하고 싶지 않았어.”

“무슨 오해요?”

정현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물었다. 겉으론 무심한 것 같아도 이럴 때 보면 은근히 주변 상황을 잘 살피는 성격이었다. 효성은 감사 인사를 하며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결이요. 원래 다정한 성격이잖아요. 서원이랑도 소개팅 후 잘 지냈었고 늘 칭찬만 들었으니까,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그 녀석 어딜 가든 주변에 잘하니까 종종 오해하는 사람도 있긴 하죠.”

친구인 경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인기 요인이기도 하지만 본인도 피곤한 일이라며 작게 투덜거리는 것이 들렸다. 효성은 적극적으로 공감하다 문득 떠오르는 과거 일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더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처음엔 일부러 그랬는데 나중엔 그게 익숙해졌어요. 나한테만 그런 거 아니니까 헛물켜지 말자, 서원이한테도 잘해 주고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다정하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희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인 것 같았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전부 효성을 보느라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름 선 지키려고 노력한 거였는데.”

남녀도 그렇지만 게이끼리도 마찬가지다. 친구로 지내다 호감이 높아지면 곧 연애인지, 우정인지, 애매한 관계가 되어 버린다. 제대로 연애로 발전하면 좋지만, 감정이 중간에 식어 버리거나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경진은 그 점을 잘 알기에 효성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렇지. 어설프게 덤볐다가 깨지긴 싫지.”

“게다가 상대가 뒤로 슥 빠져 버리면 나만 우스워지니까. 결정타 날아오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는 거지.”

그 말엔 정현도 공감해 왔다. 효성은 제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주는 둘을 보며 구원자 보듯 바라봤다.

“아, 그거요! 그거! 나중에 보니 나만 혼자 계속 설렌 거면 정말 억울하잖아요.”

20대엔 감정에 충실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고 30대가 되니 신중해진다. 말 잘 통하는 좋은 친구 만나기도 힘든데 욕심내다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하다 보니 어느 순간 감정을 누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셋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조용히 있던 희선이 불시에 끼어들었다.

“맞다. 나도 그랬어.”

“응?”

“서원이가 계속 게이가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것만 아니면 완벽한데, 왜 하필 남자를 좋아할까 아쉬웠었어.”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이 떠올랐다. 요즘엔 애인 사이가 익숙해져 그런 생각은 하지 않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귀기 전까진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워했었다. 희선이 탄성을 흘리며 과거를 추억하자, 효성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흘겼다.

“지금도 그래?”

“아니? 완전 고맙지.”

“하…….”

“야, 서원이는 게이인데도 그렇게 보수적인데, 심지어 이성애자였으면 난리 났지. 내가 얼마나 꼬시기 힘들었겠냐고. 아무리 내가 이렇게 잘생겼어도.”

희선은 활짝 웃으며 대꾸했고 효성은 그 모습을 보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로는 못 할망정 염장을 지르자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었다.

“아 진짜, 넌 말을 마라. 내가 서원이면 너 차 버리고, 어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도대체 서원인 왜 너랑 사귀지?”

“좋으니까 사귀겠지!”

맞는 말이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효성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잘난 얼굴을 노려보았다. 잠시라도 도덕이 없는 사회를 꿈꾸는 그의 눈빛엔 깊은 환멸이 담겨 있었다.

“참나, 고작 이 껍데기 때문에…….”

“고작이라니? 이 껍데기가 얼마나 비싸고 소중한데!”

희선은 이 외모로 이 건물과 다른 건물과 집과 차를 다 산 것이라며 무릎으로 서서 당당하게 외쳤다.

“오로지 이 몸과 얼굴 하나로 이룩한 재산이거든? 그 외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고.”

“자랑이냐?”

“당연히 자랑이지.”

희선은 제 몸을 엄지로 가리키며 오만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제 외모에 만족하는 게 분명했다. 효성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잠시 고민도 잊고 맹렬하게 속으로 욕을 퍼붓다가 간결하게 한마디로 축약했다.

“얼른 늙고 못생겨져서 차여라!”

“야!”

“뭐!”

“잘생긴 건 늙어도 안 변해.”

“…….”

“미소년이 미청년이 되고 미중년 거쳐 미노년이 되는 거라고. 살만 안 찌면 내 클래스는 영원해.”

“아…… 정말…… 재수 없어…….”

효성은 이젠 대꾸할 의지조차 사라졌다. 희선에게 등을 돌린 채 술을 마시는데, 지켜보던 경진과 정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희는 매일 이 지랄을 봐요.”

“월급 주니까 참지, 안 그랬으면…….”

정현은 옥상 벽 너머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 높은 빌딩이 아니라 아쉬워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선은 어림도 없다는 듯 양반다리로 앉으며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야, 내가 쉽게 추해질 것 같아? 곱게 늙으려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관리하는데.”

희선은 아직 모델 활동을 하니 피부 관리실은 물론 PT도 꾸준히 받고 있었다. 건강과 몸매 유지를 위한 투자는 그에겐 어릴 때부터 너무나 당연한 일과였다. 하지만 전성기보다 지금이 더 투철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서원 때문이었다. 서원은 외양을 중시하는 편은 아니지만 분명 제 외모를 좋아했다. 자연스러운 모습도 좋아했지만 힘줘서 꾸미면 특히 감탄했다.

때때로 제 얼굴이나 벗은 몸을 홀린 듯 쳐다보기도 하고, 붙어 있으면 단단한 피부를 만지며 감탄했다. 그럴 때마다 희선은 우쭐함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야, 일단 만나. 만나면 어떻게든 돼.”

“그건 알지만…….”

“뭐가 문제야. 차단당했냐?”

“아냐. 단지 나도 머리가 복잡한 상태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효성은 다시 풀이 죽은 표정으로 머리를 쓸었다. 차라리 제 안에서 결론이 났다면 편했을 것이다. 상대는 자신이 좋다니 저도 끌리면 사귀면 되고, 아무리 생각해도 우정이다 싶으면 사과해야 했다. 그가 고민하고 있자, 경진이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일단 연락해 봐요. 한결이 그렇게 매몰찬 성격 아니잖아요.”

“사귀든 차든, 결론 내면 결국 하나는 끝나니까 싫은 거지.”

조용히 있던 정현이 한마디를 꺼내자 모두 말을 잃었다. 효성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채 굳었다. 희선은 헐 소리를 내며 감탄했으며, 경진은 너무한 거 아니냐는 듯 그를 흘겼다. 하지만 분위기를 얼게 만든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효성 씨 마음이 그래서 복잡한 거 아닙니까?”

“아…….”

효성은 진심으로 한 방 맞은 얼굴이었다. 머릿속이 얼얼한 느낌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이내 허탈한 숨을 흘렸다.

“정현 씨가 은근 독하다니까.”

“아니거든? 대놓고 독하거든? 아주 지독한 놈이라고.”

희선은 정확히 말하라며 참견해 왔다. 그러나 마음이 심란한 효성은 평소처럼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연애도 안 하다 보면 감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다들 그렇죠. 정현 씨는 안 외로워요?”

“별로.”

“그러고 보니 늘 여러 명이 보니까 몰랐는데, 정현 씨도 잘생겼잖아요?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슬렌더한 경진과 보기 좋은 마른 근육질의 희선에 가려서 그렇지, 정현은 건조한 성격과 달리 듬직한 인상이었다. 눈매가 날카로워서 무표정할 땐 조금 위압감을 주지만, 웃을 땐 반대로 순해 보인다.

물론 웃는 일이 별로 없기는 했다. 피식거리는 비웃음이 대부분이라 효성은 이래서 희선의 친구구나, 새삼 깨달았다. 희선이 그 모습을 보더니 다시 정현을 손가락질했다.

“말했잖아. 아주 지독한 놈이라고. 이 자식은 정이 없어요. 성욕도 없을걸? 그냥 고기만 있으면 돼.”

“축구랑 게임도.”

그 말에 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부정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동안 듣고 본 게 있는 효성은 인정하며 이번엔 경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알기론 경진은 늘 애인이 있었다. 상대가 바뀌긴 하지만 연애는 쉬지 않는 편이었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연애를 지속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희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아, 서원이 강의 끝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네.”

오늘은 보충이라 하필 늦게 끝난다. 희선은 입을 비쭉 내민 채 우울해했고, 그 모습을 보자 효성은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이 왜 하필 이곳에 왔는지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효성은 술병을 들어 제 잔에 콸콸 쏟아 낸 뒤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두 시간 뒤, 서원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옥상에 도착했다. 정현과 경진 셋이서 밥을 먹는다더니 효성까지 왔다는 말엔 조금 신기했지만, 근처에 사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오랜만에 거나하게 취한 희선과 평상 위에 널브러진 효성을 보자 착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경진은 먼저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고, 정리 중인 정현이 가장 멀쩡했다.

“못 볼 꼴을 또 보시네요.”

그는 병을 수거해 옥상 구석에 정리했다. 마치 장식처럼 열을 맞춰 잔뜩 늘어서 있는 병을 보면 그가 얼마나 술을 즐겼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후엔 평상에 늘어진 효성을 일으키더니 어깨에 기대게 해 옥탑방 안으로 향했다.

“효성 씨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요. 안에 들여다 놔야겠어요.”

제 두 배는 될 법한 덩치를 가진 정현은 힘도 장사였다. 보통 이상의 크기를 가진 장정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옮기자, 서원은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넘어질까 다른 팔을 붙잡은 채 부축했다.

바닥이 차가워 일단 침대 위에 올려놓은 둘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제 평상엔 희선 혼자 남아 있었다.

“희선아, 일어나.”

“으응…….”

아무리 날이 따듯해졌다지만 저녁엔 쌀쌀한 봄이었다. 서원은 희선이 눈을 뜨지 않자 외투를 벗어 그에게 둘러 주었다.

일단 희선은 평상 위에 두고 정현을 도와 상을 치웠다. 다행히 중간에 한 번 정리했는지 치울 건 많지 않았다. 정현은 서원이 움직이자 바로 만류했다.

“괜찮아요. 두세요.”

“아니에요. 희선이가 또 폐를 끼쳤네요.”

“뭘요. 저도 놀러 가면 종종 그랬는데. 그보단 항상 꽐라 처리하는 서원 씨가 고생이죠.”

집들이도 그렇고 이후에 술자리나 바비큐 파티에서도 서원은 집주인답게 열심히 정리했다. 희선도 돕긴 했지만 아무래도 친구들과 노는 데 열중하느라 그만큼 자주 움직이진 않았다.

하지만 서원은 그 부분에 서운했던 적은 없다. 원래 성격이 다르고 자신이 남들보다 더 신경 쓰는 탓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정리가 거의 끝나자, 다행히 희선은 정신을 차렸다.

“어, 언제 왔어?”

잠이 깬 희선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서원을 안았다. 서원은 아무리 밤이고 옥상이지만 얼른 그를 떼어 냈다.

“안 추워? 얼른 집에 가자.”

“잘 들어가요.”

“가 볼게요. 편히 쉬세요.”

서원은 제게 안기는 희선을 챙겨 계단으로 향했다. 정현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고, 희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술 냄새를 풍기며 구시렁거렸다. 대충 들어 보니 이렇게 취할 예정은 없었다는 변명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홱 쳐들고는 정현에게 외쳤다.

“야, 너 효성이 조심해라아!”

“무슨 소리야.”

“쟤가 자는데 덮칠 수도 있어.”

“조용, 밤이잖아.”

취한 와중에도 시비를 걸자, 서원은 놀라 희선의 몸을 잡아끌었다. 저보다 무거운 그를 부축하며 아래에 주차한 차로 향했다.

혹시 추울까 봐 히터도 틀고 시트도 데웠다. 다행히 희선은 바로 잠이 들었고, 서원은 좁은 공간에서 술 냄새에 살짝 괴롭긴 했으나 밤늦은 시간인 데다 집이 멀지 않아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깨우자, 희선은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서원은 그를 붙잡은 채 함께 계단을 올랐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어쩌다 보니…….”

실은 효성이 달리기 시작하자 술을 빼앗길까 봐 겁난 희선도 속도를 높인 탓이었다. 하지만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므로 희선은 모른 척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희선은 주방에서 물을 잔뜩 마셨다. 그 후엔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욕실로 직행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늘 샤워부터 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서원은 비틀거리면서도 양치하는 그를 보며, 옆 세면대 앞에 서서 제 칫솔에 치약을 묻혔다.

세안한 뒤 잠옷을 입고 누우니, 안에서 드라이하는 소리가 들린다. 곧 잠옷 바지만 입은 희선이 나타났다.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이불 속으로 파고든 그는 바로 서원에게 달라붙었다. 커다란 덩치가 감겨 들자 서원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제 술 냄새 대신에 샴푸 향이 나는 머리에 고개를 묻었다.

정현은 희선을 챙기는 서원이 고생이라 했지만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이유는 희선이 이렇게 취하는 일도 거의 없었거니와 예전엔 이런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친구였을 때는 희선은 오히려 칼같이 선을 지켰다. 흐트러진 모습은 거의 보여 주지 않았고, 곧 취할 것 같으면 분위기가 아무리 무르익어도 술잔을 내려놓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기분이 나빠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다 솔직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아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벽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원은 제게 달라붙는 남자를 토닥거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해장은? 속 안 아파?”

“으응, 괜찮아. 먹으면서 했어.”

“또 라면 먹었구나.”

옥상에서 술을 먹었다면 뻔했다. 아마 삼겹살을 잔뜩 굽고 옆에선 라면을 계속 끓였을 것이다. 가끔 그곳에 술을 마시는 희선을 데리러 가면 항상 메뉴가 비슷했다.

“며칠 전에도 먹어 놓고…….”

너무 자주 먹으면 안 좋다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희선이 더욱 달라붙었다.

“다행이다.”

“뭐가…….”

“네가 게이라서.”

뜬금없는 소리에 서원은 제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왜 또 이런 말을 하나 싶어 아래를 내려보니, 희선은 졸린지 눈을 감은 채 제 몸에 더 달라붙어 왔다.

“그리고 나를 좋아해 줘서.”

“갑자기 왜 그래?”

서원은 당혹감을 느끼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나 희선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새 잠이 든 건지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에 서원은 귀를 기울였으나 이후론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완전히 잠이 들었는지 힘없이 제 쪽으로 기우는 몸을 보던 서원은 눈을 끔뻑거리다 이내 픽 웃음을 흘렸다.

헤드에 반쯤 기대 누운 서원은 베개 대신에 자신에게 달라붙은 희선을 토닥거렸다. 그사이 희선이 뒤척거리더니 제 종아리를 자신의 다리로 감으며 더욱 들러붙었다.

항상 있는 일이기에 서원은 몸에 힘을 풀었다.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던 그는 한참 지나서야 슬쩍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희선은 깊은 잠에 빠졌는지 깨지 않았고, 서원은 스탠드 불을 끄려다 마침 테이블 위에 있는 자신의 폰을 발견했다.

화면을 확인하니 마침 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원은 힐끔 뒤를 돌아보고 자는 희선을 확인하고는 휴대폰 조명을 낮춘 뒤 내용을 확인했다.

[혹시 주무세요?]

발신인을 확인한 서원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제 옆에 달라붙은 희선을 살폈다. 고민하듯 화면과 희선을 바라보던 그는 곧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간 서원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읽음 표시가 뜨자 또 다른 메시지가 와 있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내일 말씀드릴게요.]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서원은 다급하게 답을 보냈다. 읽었다는 표시가 떴지만 바로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멈춰 있는 화면을 걱정스럽게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목이 말라 주방으로 가서 냉수를 한 잔 받으니 메시지가 떴다.

[내일 볼 수 있을까요?]

서원은 물잔을 든 채 화면을 보다가 길게 한 모금 마신 뒤 도로 내려놓았다. 그 후엔 키패드를 열어 짧은 답문을 보냈다.

[네. 내일 괜찮아요.]

[언제가 좋으세요?]

이번엔 바로 답장이 왔다. 서원은 입가에 손을 댄 채 고민하다 슬쩍 시선을 돌려 침실을 바라보았다. 희선은 아직 자고 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스케줄러를 열어 일정을 확인한 서원은 시간을 헤아린 뒤에 키패드를 두들겼다.

[괜찮으면 점심 같이 할래요?]

상대의 답변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로 도착했다.

[네. 점심 좋아요. 내일 오전에 다시 연락할게요. 잘 자요.]

[주무세요.]

대화가 끊기자 서원은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