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밤보다 더한 짓-94화 (외전 완결) (93/94)

추가 외전 7화

첫걸음

“아뇨, 그게 아니라….”

영준은 이젠 하은의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그게….”

그러더니 미간을 한껏 구기고는 마지못해 말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 네! 그래요, 기다렸습니다.”

“네?”

“기다렸다고요.”

‘옜다, 이거나 먹어라’도 아니고!

인정하기 싫은 걸 인정하는 것처럼,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말하는 영준을 보며 하은은 표정을 굳혔다.

“이 손 놓으시죠?”

하은이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자, 그제야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영준은 당황해 손에 힘을 풀었다.

“어? 미안합니다.”

순간, 하은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는 걸 느낀 영준은 흠칫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되게 기다리기 싫었는데, 기다리셨나 봐요?”

“네?”

“아니면 뭐든 하겠다고 말한 거 후회되세요? 그래서 저한테 이렇게 짜증 내시는 거라면, 못 들은 거로 할 테니까 기다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싫으신데 억지로 하실 필요 없으시다고요.”

기분이 팍 상한 하은이 언성을 높여 속사포 랩을 내뱉자, 영준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영준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하은은 그를 찌릿 째려보고는 한마디 더 보탰다.

“누가 해 달랬나? 웃겨, 진짜.”

하은이 돌아서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정신이 든 영준이 뒤따라가 그녀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무슨 소리예요? 난 짜증을 낸 게 아니라… 그리고 억지로라니….”

“이거 놔요.”

“기다렸다니까요?”

“네, 알겠다고요. 기다리느라 엄청 고생하셨겠네요. 그러니까 이제 그러지 마시라고요. 됐죠?”

하은이 손목을 뿌리치고 가려고 하자, 영준은 이번엔 그 앞을 막아섰다.

“잠깐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무슨 오해요? 비켜요!”

“못 비킵니다.”

“비켜요! 이 손도 좀 놓고!”

하은이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자, 영준은 나머지 손목까지 잡았다.

두 손을 다 잡힌 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못 가게 잡아두는 겁니다.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으니까.”

“뭘 더 들어요? 그쪽 짜증 더 듣고 싶지 않거든요?”

“누가 짜증을 냈다고… 난 짜증을 낸 게 아니라… 난 그저….”

“뭐요?”

“오글거리잖아요. 이런 말… 그래서 그랬습니다. 짜증 낸 게 아니고.”

“뭐가 오글거려요?”

“기다렸다는 말… 그쪽은 까먹었을지 몰라도 난 기다렸다고요. 그리고… 싫다고 안 했습니다. 기다리는 거.”

영준은 하은의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쐐기를 박았다.

“안 싫다고요.”

“……?”

“기다릴게요. 얌전히 기다릴 테니까 생각나면 그때 말해요. 뭐든.”

하은은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기다린다고요?”

“네, 그러니까 화 좀… 화 좀 내지 마요. 원래 성격 좀 있죠?”

“아뇨!”

“있구만 뭐. 근데 알고나 기다립시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하은의 미간이 살짝, 아주 미세하게 구겨졌을 뿐인데 영준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가 죽을죄 진 거 맞고, 그러니까 기다리는 거 그냥 말없이 기다려야 하는 거 다 아는데… 하아….”

영준이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앙다문 채 뒤돌아서더니,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였다.

괴로워하는 영준을 보며, 하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 왜 그래요?”

“하… 그러니까!”

갑자기 돌아선 영준이 비장한 눈빛으로 하은을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아니, 기다리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언제 연락 오나 휴대전화만 보고 있다고요…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왜요?”

하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고개를 든 영준은 결심한 듯 휴대전화를 내밀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연락처라도 좀 알려줘요.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올 때마다 신경 쓰이니까.”

“네?”

“얼른요.”

하은은 얼결에 영준의 휴대전화에 전화번호를 찍고는 돌려줬다.

전화번호를 확인한 영준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은의 휴대전화가 울리자, 영준은 그녀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연락할게요.”

“왜요?”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하던 두 사람 사이에, 먼저 입을 뗀 건 영준이었다.

“눈치가 없는 겁니까?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겁니까?”

“네?”

“혹시, 내가 연락하는 거 싫어요? 그래서 그런 거면 말하고요.”

“말하면요?”

살짝 충격을 받은 영준은 입술이 떨리는 걸 겨우 티 안 나게 붙잡고 물었다.

“…싫어요?”

“아뇨.”

너무도 빠르고 정확한, 간단명료한 하은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영준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가죠, 식 보러.”

“……?”

“고맙다고요. 가요.”

* * *

원형 테이블에 마련된 혼주석에는 차 회장을 비롯해 희숙과 건명, 기순과 수용이 자리했다.

은서의 생모와 양부모를 배려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사돈이 넷이나 되다 보니 어찌 된 게 1대 4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 차 회장은 살짝 기가 빨리고 있었다.

좀 전부터 희숙과 기순이 가까이 앉아 살갑게 대화를 나누자, 차 회장이 넌지시 물었다.

“두 분은 많이 친해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나요?”

서로 마주 보며 웃는 희숙과 기순을 보며 차 회장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정말 좋아 보이십니다.”

희숙과 기순은 미소로 화답했고, 차 회장은 건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건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차 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네, 있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이라뇨? 사돈이죠. 사돈.”

“네, 사돈.”

“네.”

“우리 지아… 잘 부탁드립니다. 예쁘게 봐주시고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라는 듯 노려보며 말하는 건명의 기에 눌려 차 회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 당연한 얘기를 하십니다.”

“그 당연한 걸… 후… 당연하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건….”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희숙이 건명의 옆구리를 찌르고 차 회장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해마세요. 지아 걱정해서 그래요.”

“이해합니다. 저도 뭐 잘한 것도 없고요….”

차 회장이 죄를 인정하는 것 같자, 희숙이 한마디 보탰다.

“진짜 잘 부탁드려요, 우리 지아. 맘고생 심했던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솔직히 같은 곳에 두 번 시집보내는 거… 쉬운 일 아닌 거 아시죠?”

“그럼요.”

“믿습니다, 사돈.”

“아, 네….”

희숙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순이 입을 열었다.

“지아 잘 부탁드려요. 강현이… 아니 차 서방이랑 잘 지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혼이 둘만 잘 지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아이고, 그럼요.”

“잘 부탁드려요. 저도 차 서방 자식처럼 예뻐하고 잘하겠습니다.”

“네, 저도 자식처럼 예뻐하고 잘하겠습니다.”

기순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엔 수용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고, 말씀하십시오.”

“네, 그럼 딱 한 마디만.”

“네.”

“우리 다 차 서방을 대할 때, 내 자식이다 생각하고, 못난 것도 예쁘게 보려 하고, 예쁜 건 더 예쁘게 보려고 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니 사돈!”

“네.”

“부디 지아도 그렇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도 강현이… 아니 차 서방 그렇게 사랑으로 품겠습니다.”

“아이고,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안 그래도 예뻐 죽겠습니다. 우리 큰며느리.”

“잘 부탁드립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한 네 사람은 강렬한 눈빛으로 차 회장을 바라봤다.

잘 안 봐주면 가만 안 두겠다는 듯.

그 어디에서도 기가 눌리는 법이 없는데, 차 회장은 기가 잔뜩 눌린 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신부대기실로 들어간 강현은 입장 준비를 끝내자마자 도우미들을 다 내보내고는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지아를 향해 몸을 돌린 강현은 자꾸만 삐져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곱게 드레스를 입은 지아는 왠지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고, 강현은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겨우 둘이 있게 됐네?”

강현이 고개까지 숙여가며 빤히 바라보자, 지아는 얼굴을 붉혔다.

“왜요?”

“눈에 담고 싶어서. 늘 예쁘지만, 오늘은 더 예쁘네.”

지아가 프리지아 부케로 얼굴을 가리자, 강현이 옆에 바짝 달라붙어 앉았다.

“지아야.”

지아가 부케를 살짝 치워 눈을 맞추자, 강현이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

“사랑해.”

지아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짓자, 강현은 지아의 손을 잡았다.

“프리지아 꽃말이 뭔지 알지?”

“알죠. 당신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그래. 지금도 그렇지만, 프리지아 꽃말처럼 앞으로도 난 당신을 많이 응원할 거야. 당신의 모든 걸.”

“고마워요. 나도 당신 응원해요. 늘, 당신의 모든 걸.”

“고마워.”

“나도요. 우리 잘할 수 있을까요?”

“그럼. 내가 당신의 남편이고, 당신이 내 아내인 이상… 못할 건 없지. 안 그래?”

지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사랑하고 또 사랑해. 내가 제일 사랑해, 지아야.”

“몇 번을 고백하는 거예요….”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그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시면 됩니다.”

강현은 지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가볼까?”

“네, 좋아요.”

강현의 손을 잡고 일어선 지아는 그와 함께 대기실 문 앞에 섰다.

지아가 숨을 고르자, 강현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물었다.

“문 열까?”

“네.”

지아의 대답과 함께 강현은 대기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화려하게 쏟아지는 조명과 함께 하객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졌다.

지아가 살짝 놀라자, 강현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고는 눈을 마주쳤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덩달아 미소를 지은 강현은 지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다시 시작된, 진정한 결혼의 첫걸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