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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92화 (91/94)

추가 외전 5화

오늘은 우리 둘이

“취했어요?”

“아뇨! 나 안 취했으니까 얼른 말해봐요. 당신 진짜 얼굴이 뭐냐니까요?”

“무슨 말이에요?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요?”

영지의 말에 지석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퍽퍽 쳤다.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언제는 진짜 이상한 여자였다가… 언제는 또 청순한 척… 언제는 또… 언제는 또….”

지석은 낮에 드레스를 입고 촬영을 하던 영지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라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얼굴을 붉혔다.

“아무튼! 어떤 게 진짜 당신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그쪽 말로는 이상한 여자가 왜 청순한 척하냐 이거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영지의 해석이 억울해 지석은 발끈했다.

“나 그렇게 말 안 했는데요?”

“안 하긴 뭘 안 해요? 지금 그렇게 말해놓고.”

“내가 언제 그렇게 말을 했다고….”

“됐고! 청순한 척해서 미안하게 됐네요. 그럼 이상한 여자는 이만 갑니다.”

영지는 콧방귀를 뀌면서 치킨집을 나갔고, 지석은 그런 그녀를 잡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 뭐냐고….”

지석은 제 머리를 헝클며, 창밖으로 씩씩대며 걸어가는 영지를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치킨집을 나섰다.

* * *

샤워 후, 지아가 침대로 털썩 쓰러지듯 눕자 강현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머리 안 말려?”

“몰라요. 귀찮아요.”

침대에 머리를 묻은 지아가 칭얼대듯 이불에 얼굴을 비비자, 강현은 그녀의 옆에 기대 누웠다.

“그래도 드라이는 하고 자야지.”

강현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지아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싫어. 귀찮아.”

“해달라는 거지?”

지아가 대답을 안 하자, 강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꼬옥 안았다.

“아기네. 일어나.”

강현은 지아를 껴안은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드라이해줄게.”

강현은 축 늘어진 지아를 데리고 화장대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드라이를 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바람과 함께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굉장히 편안하고, 평화롭기까지 했다.

지금도 꿈만 같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 했었는데…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아는 이게 진짜인지 확인하듯 그를 껴안았다.

갑자기 와락 안기는 지아를 보며 강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고생했어.”

“강현 씨도 고생 많았어요.”

“오랜만에 꽃밭에 가니까 어땠어?”

“너무 좋았어요. 어떻게 그 예전이랑 똑같이… 진짜 감동.”

“다행이네.”

“오랜만에 보육원 간 것도 좋았어요.”

“나도. 옛 생각 많이 나더라.”

“나도요… 나도….”

그 순간, 지아는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드라이가 다 끝나고, 강현이 다 마쳤다고 말을 하는데도 지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꾸하질 않았다.

지아가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자, 강현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지아야.”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지아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자, 강현은 다시 물었다.

“왜? 무슨 고민 있어?”

“아니 그게….”

지아는 슬쩍 강현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강현 씨….”

지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강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자꾸만 생각이 나서요….”

지아의 말에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

“오늘 우리가 보육원에서 봤던 아이요….”

“그 남자아이 말하는구나?”

“네, 파양됐다는 그 아이요… 그 아이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아요.”

강현은 지아를 침대로 데리고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녀를 꼬옥 껴안아 주고는 등을 쓰다듬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품에 안겨 있던 지아가 입을 열었다.

“전에 저도 그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어요.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고… 모든 게 원망스러웠거든요.”

강현은 더 세게 지아를 껴안았다.

“당신 탓이 아니야.”

“알아요… 이젠 나만 원망하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해요… 근데… 그 아이도 알까요? 알게 될까요? 자기 탓이 아니라는 거?”

지아가 고개를 들자, 강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내 그 걱정한 거야?”

지아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난 어릴 때요… 그 집에서 도망치면서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못 했던 거 같아요. 그냥 살고 싶다 정도? 내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 못 했거든요.”

“지금은?”

강현의 물음에 지아는 고개를 들었다.

강현을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지아는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때만 해도 행복이란 건 진짜 감히 빌 수 없는, 바랄 수 없는, 나랑은 정말 어울리는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강현을 바라봤다.

“지금은 아니에요. 너무 행복해. 당신 만나고 달라졌어요.”

“나도. 고마워.”

지아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강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행복해져도 된다는 걸 알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어요… 그 아이도 지금… 그때의 나 같은 생각을 하면 어쩌죠? 그거 아닌데… 행복해질 수 있는데… 행복해져도 되는데….”

“도와주고 싶다면 그렇게 해.”

강현의 말에 지아는 놀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네?”

“계속 마음 가는 거 아니야?”

지아가 딱히 반박을 못 하자, 강현은 그녀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만약 그러고 싶다면,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고. 난 당신 결정, 존중하고, 응원하니까.”

“고마워요.”

제대로 감동을 받은 지아는 너무도 예쁜 말을 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자, 강현의 눈빛이 서서히 진하게 변하고 있었다.

피곤해서 그냥 자려고 했는데, 저 눈빛은 위험을 감지하는 신호였다.

“강현… 읍….”

욕망의 방아쇠를 당기고 만 지아였다.

오늘은 그냥 자나 했는데….

입술을 진하게 맞물리고 나니, 그냥 자기에는 어쩐지 아쉬운 밤… 신혼부부의 뜨거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지아야.”

“엄마!”

갑자기 꽃집으로 등장한 희숙을 보고 지아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달려 나갔다.

“엄마, 어떻게 왔어?”

“너랑 점심 먹으려고 왔지.”

“점심?”

지아가 살짝 당황하자, 희숙이 눈치를 살폈다.

“왜 약속 있어?”

“아니 그게….”

그 순간, 꽃집으로 기순이 들어오자 희숙은 얼굴이 굳었다.

“약속 있다는 게….”

“어, 그게… 엄마도 같이 먹자.”

“아니야. 내가 끼면 불편하지. 안녕하셨어요?”

희숙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놀라서 멍하니 서 있던 기순이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인사만 나누고 적막이 흐르자, 지아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 아직 일이 마무리가 안 돼서… 잠깐만.”

지아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러 다른 방으로 들어갔고, 희숙과 기순은 쭈뼛쭈뼛 주변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았다.

희숙이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허공만 둘러보고 있자, 기순이 먼저 말을 걸었다.

“잘 지내셨죠?”

“네, 그럼요… 잘 지내셨죠?”

“네, 뭐….”

“가까이 사셔서 좋겠어요. 우리 지아 얼굴도 자주 보시고.”

“네, 뭐… 지아가 자주 찾아뵙죠?”

“그렇긴 한데 워낙 바쁜 애들이라… 가까이 사는 것만큼 자주 보지는 못하죠.”

“아, 네….”

또다시 적막이 흐르고, 일을 마무리한 지아가 방에서 나왔다.

“엄마.”

그 순간, 희숙과 기순이 동시에 ‘어.’라고 대답을 하고는 서로 눈치를 살폈다.

지아도 습관적으로 ‘엄마’라고 부른 걸 후회했다.

분위기가 또 어색해지자, 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다 같이 점심 먹자.”

“어?”

“……?”

기순과 희숙이 서로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질 못하자, 지아가 두 사람의 팔에 팔짱을 꼈다.

“같이 가자. 강현 씨도 불러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그 순간, 희숙이 지아의 팔짱을 풀며 기순을 바라봤다.

“오늘은 우리 둘이 먹는 거 어떠세요?”

“네?”

“따로 약속 잡을 것도 없이, 오늘이 기회가 좋은 거 같은데….”

“네, 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지아가 눈을 껌뻑이는데, 희숙이 그녀를 바라봤다.

“넌 차 서방이랑 같이 먹어. 오늘은 엄마들끼리 먹을게.”

“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희숙과 기순은 꽃집을 나섰고, 혼자 남은 지아는 강현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강현 씨… 어떡해요?”

잠시 후, 강현이 초밥을 포장해 꽃집으로 찾아왔지만, 지아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괜찮을까요?”

지아가 좀처럼 식사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자, 강현은 초밥을 집어 지아의 입에 가져갔다.

“아.”

입을 벌리래도 지아가 입을 꾹 다문 채 걱정 가득한 표정만 짓고 있자, 강현은 다시 말했다. 더 단호하게.

“아!”

“입맛 없어요….”

“아!”

지아가 마지못해 입을 벌리자, 강현은 그녀의 입속에 초밥을 쏙 넣고는 자신의 입에도 초밥을 넣었다.

“걱정 말고 밥 먹어.”

“설마 감정 상해서 오시는 건 아니겠죠?”

“어디 그러실 분들이야? 걱정 마.”

“그래도….”

“이것도 맛있겠다.”

강현은 또 지아의 입에 초밥을 가져갔다.

“아.”

지아가 입을 벌리자, 강현은 또 그녀의 입에 초밥을 밀어 넣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잘 먹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밥 잘 먹고 기다리는 것뿐이야. 어머님들 믿고.”

그 말에 딱히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지아는 입안에 초밥을 우물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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