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이마 키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지아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참 오랫동안 있었다.
계속해서 어딘가를 찾아 헤맸던 기억이 난다.
어딜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걸어갔던 거로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느 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꺼풀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 없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목소리를 낼 수 없어 답답했다.
그저 지아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아가…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눈 좀 떠, 아가.”
‘아가? 엄마? 이건 치킨집 사장님 목소리인데… 그분이 왜 나한테 아가라고 하지? 엄마라니?’
지아는 어느덧 매일 같은 시간에 들려오는 기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아가… 일어나기만 하면, 엄마가 우리 아가 좋아하는 갈비도 실컷 먹게 해주고, 그동안 못 해줬던 거 다 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떠 봐, 아가… 제발….”
‘내가 좋아하는 갈비? 아… 나 어릴 때 갈비 좋아했었지… 맞아, 나 그랬어.’
“아가… 제발 일어나. 엄마가 잘못했어. 그렇게 널 고아원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널 버린 게 아니야… 잠깐만… 잠깐만 맡기고 찾으려고 했어….”
‘엄마? 진짜 엄마야?’
“그땐 엄마도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어… 아가, 엄마가 그때 많이 아팠었어.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도 못 받고… 그대로 죽을 뻔했는데, 네가 아는 치킨집 남자 사장님 있지? 그 사람이 엄마 살렸어.”
‘치킨집 남자 사장님이면… 문 실장님 아버지?’
“엄마가 종업원이었는데, 그 사람이 사장님이었거든. 내가 아픈 걸 알고 치료도 받게 해주고, 엄마는 그게 고마워서 일찍이 엄마 여윈 그 집 애들 돌봐주다 보니까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되더라고.”
‘다행이다… 엄마도 누가 곁에 있었구나.’
“고아원으로 널 데리러 갔을 때는 넌 이미 입양이 된 상태였고, 입양된 집으로 널 찾으러 갔을 때, 네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고 어찌나 괴롭던지… 그날부터 매일 널 찾는 광고를 올리고 찾으러 다녔어.”
‘그랬구나… 엄마가 그랬구나….’
지아는 눈을 감은 채, 기순의 얘기에 집중했다.
“아가, 엄마는 절대 널 버린 게 아니야.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 우리 아가… 엄마가 매일 매일 그리워하고 사랑해. 그러니까 제발… 엄마 소원이니까 제발… 제발 눈 좀 떠, 아가.”
‘엄마가 날 버린 게 아니었네?’
지아는 이젠 듣는 것조차 힘들어서 다시 귀도 닫은 채 잠이 들었다.
* * *
1개월 후, 지아는 귀로 소리만 들을 뿐,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대꾸도 할 수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고.
하지만 강현은 매일 같이 지아의 옆을 지키며 대화를 나눴다.
“오늘은 아버지가 당신 안부를 묻더라. 결혼식 언제 할 거냐면서. 아무래도 아버지는 이미 당신한테 넘어온 눈치야. 얼른 일어나. 시아버지 사랑이 듬뿍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도 있고.
“간밤에 꿈을 꿨는데, 당신이랑 우리 어릴 때 좋아했던 야생화 꽃밭에 갔던 꿈을 꿨어. 난 가끔 갔었는데, 당신은 어땠어? 그걸 못 물어봤더라고. 나중에 야생화 꽃밭에 가보자. 어린 지아가 아닌, 다 큰 지아랑 가는 야생화 꽃밭도 의미가 있을 것 같네.”
가끔 이런 꿈 얘기, 추억 얘기도 하고.
“우리 결혼하면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생각해 보니까 당신이랑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적이 없더라고. 이번 신혼여행은 아주 길게, 일은 안 가져갈 생각이야. 난 뭘 하느라 당신이랑 여행다운 여행도 못 가봤던 걸까? 당신이 일어나면, 우리 여행 꼭 가자. 가까운 데든, 멀리든.”
이렇게 미래를 계획하는 얘기도 하고.
쪽- 쪽-
볼에 눈에 이마에 손에 손가락 하나하나에 연신 입술을 붙여올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돌아오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터뜨릴 때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얼른 말을 하고 싶은데, 얼른 눈을 뜨고 싶은데, 내가 듣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은데, 속이 타들어 가는 나날들이 이어져 갔다.
* * *
2개월 후, 지아는 힘겹게 눈을 떠 눈을 깜빡였다.
몇 개월째 노력을 해도 안 됐는데, 드디어 눈이 떠진 거였다.
그때였다. 역시나 강현이 제일 먼저 아는 척을 해줬다.
“지아야, 정신이 들어?”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지아야, 엄마야.”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고.
“지아야!”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고.
“아가! 일어났어? 괜찮아?”
이건 사장님… 아니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지아는 힘을 줘 눈 크기를 키웠다.
눈을 다 뜨니, 강현의 얼굴이, 엄마의 얼굴이, 아빠의 얼굴이, 그리고… 우리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지아는 강현을 먼저 바라봤다.
“강현 씨….”
“그래, 지아야. 괜찮아?”
“강현 씨는요? 괜찮아요?”
“난 괜찮아.”
“다행이다.”
지아는 강현이 차에 치이려는 순간, 그 앞으로 몸을 날렸다는 것만 기억이 나고 그다음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이 말을 얼마나 물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3개월 동안 소리는 들려서 대화를 듣고 그가 무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고 직접 묻고 나니 정말 안심이 되었다.
지아는 강현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또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들리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귀만 열려 있다 보니, 그들은 모르겠지만 지아는 병실에 누워서도 모든 소식을 알고 있었다.
차 사고의 범인이 경옥이라는 것도, 경옥이 차 사고뿐만 아니라 그동안 저지른 죄까지 모조리 처벌받을 수 있도록 강현이 그 죄를 철저히 물었다는 것도, 덕분에 그녀가 오랜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와중에 병현의 아버지가 알고 보니 강 실장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들었고, 병현은 결국 약물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강현이 곧 부회장으로 승진을 한다는 것도 들었고.
지아는 가끔 의식이 있을 때면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가 다른 대부분의 시간은 종일 잠만 잤다.
그리고 지아가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강현이 회사를 가고, 희숙과 건명도 집에 쉬러 들어간 시간, 기순이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기순은 여느 때처럼 지아의 병실을 청소하고, 가습기에 물을 채워 넣고 있었다.
그때였다.
“엄마.”
“……?”
기순은 얼른 가습기 통을 끼우고, 지아에게 달려갔다.
“아가?”
“엄마?”
지아가 눈을 뜬 것도 너무 신기한데, 엄마라고 부르는 건 더 신기해 기순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지아는 기순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엄마, 울지 마.”
“내가 누군지 알아?”
“응.”
“정말 알아?”
“응, 엄마.”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그동안 한 얘기 다 들었어. 엄마가 나 버린 거 아니라는 것도.”
“아이고, 내 새끼… 그래, 엄마 너 버린 거 아니야. 아가… 내 아가… 아이고, 내 새끼.”
지아는 병실에 있는 동안 기순이 해주는 얘기를 들으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맞아, 우리 엄마는 날 부를 때 꼭 이름을 안 부르고 아가라고 불렀어. ‘아가’ 아니면, ‘내 새끼’.
지금도 아가라고, 내 새끼라고 불러주는 기순을 보며 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나 이제 다 컸는데….”
“그래도 아가지. 엄마 눈에는 아가야. 아이고, 기특하다. 내 새끼. 잘했어. 잘했어. 잘 버텼어.”
지아가 눈을 떠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해 기순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기순은 얼른 휴대전화를 들어 전화를 돌렸다.
얼마 안 있어, 모든 사람들이 병실에 모였다.
강현도, 희숙과 건명도, 지석도, 영지와 영준도.
모두 지아가 눈을 뜬 걸 감사하며 밀렸던 이야기를 나눴다.
더 깊은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모두들 병실을 나가자 드디어 강현과 둘만 있게 되었다.
“강현 씨… 미안해요.”
“뭐가?”
“너무 오랫동안 걱정하게 해서.”
“별게 다 미안하네. 내가 미안하지. 다시는 그렇게 끼어들지 마.”
“아니, 난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할 거야. 당신 지켰잖아.”
지아가 미소를 짓자, 그녀를 밉지 않게 째려보던 강현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이겨?”
그 순간, 지아의 손이 강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현이 이게 뭔가 싶어 미간을 구기자, 지아는 손짓했다. 다가오라고.
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가 시키는 대로 다가갔다.
그 순간 지아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마가 아쉬워 강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몇 개월 동안 안 하더니 감을 잃었어? 방향을 잘못 잡았잖아?”
“이마에 하는 키스의 의미를 알아요?”
“그런 게 있나?”
“변함없는 사랑이래요.”
“……?”
“나 지금 당신한테 프로포즈한 건데?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강현이 눈을 키우자, 지아는 그의 넥타이를 끌어당겨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입가에 미소를 띤 강현은 이내 고개를 내려 그녀의 눈을 가까이에서 내려봤다.
“감 잃은 거 맞네.”
“응?”
“키스는 이렇게 해야지.”
강현은 좀 전의 입맞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진하게 지아의 입술에 입술을 맞물렸다.
한참을 맞물렸던 입술이 아쉽게 떨어지고, 강현은 프로포즈의 대답을 하듯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아야.”
“네?”
“내가 더 사랑해. 변함없이.”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리고, 입술은 다시 맞물렸다. 더더더! 찐하게.
<본편 완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