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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78화 (77/94)

78화

안 해주니까

화보 촬영이 끝난 하은은 매니저를 기다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밤, 자신을 벤치로 눕히고는 위로 올라와 입술을 탐하던 영준이 떠올랐다.

평소 분위기는 초식남이더니… 키스를 퍼붓는 그는 완전 육식남… 짐승이 따로 없었다.

그의 거친 야성미에 압도당해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아니 오히려 키스를 즐겼던 제 자신이 떠올라 하은은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그날 이후로 약국 앞도 지나치질 못하고, 며칠째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이렇게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연애를 해도 늘 남자를 휘어잡는 스타일이었지, 끌려다니는 쪽은 절대 아니었다.

부끄러워해도 남자가 더 부끄러워했지, 그다지 부끄러움을 느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근데 왜 이렇게 부끄럽냐고.

약국 앞만 지나가면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아 미칠 것만 같았다.

와중에 영준에게서는 가타부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술에 취해서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싶은 거야? 왜 연락이 없어?

하은이 이렇게 영준에 대한 생각에 푹 빠져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는 게 느껴졌다.

“누구…?”

인형이었다.

고개를 돌려 인형을 본 하은은 팔을 꼬아 팔짱을 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쟤 아는 척하기 싫은데….

하은이 모르는 척하고 있자 인형이 그녀에게 또 아는 척을 했다.

“야, 안 들려?”

“왜?”

“인사 안 해?”

“나랑 인사하고 싶으면 네가 하면 되겠네.”

“내가 너보다 선배야.”

“하… 또 왜 그러니… 어떤 선배?”

“내가 너보다 데뷔 선배거든?”

“하! 너 내가 언제부터 활동을 했다고 생각해? 너 따위 상상도 못 할 때부터 활동했어. 나한테 선배 소리 듣고 싶으면 다시 태어나. 너는 그 수밖에 없어.”

하은에게 말로 이길 수 없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인형은 또 그녀에게 밀리자 이가 갈렸다.

인형은 시계를 보면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올 때가 됐는데….”

이때, 인형의 전화를 받고 그녀를 데리러 온 병현이 차를 세웠다.

창문을 내린 병현은 인형이 하은과 함께 있자, 눈을 키웠다.

“……?”

하은은 못 볼 걸 봤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고, 병현은 차에서 내렸다.

원래는 내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하은을 보는 순간 병현은 저도 모르게 차에서 내렸다.

병현이 차에서 내리자, 인형은 보란 듯이 그의 팔짱을 꼈다.

“우리 오빠 알지? 성문그룹 후계자.”

하은은 시선을 외면했고, 병현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라는 병현의 인사에 인형은 미간을 좁혔다.

이때, 매니저가 주차장에서 나왔고, 하은은 고개를 까딱인 뒤 차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병현이 하은이 떠나는 뒷모습을 애잔하게 보고 있자, 인형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이하은도 있다는 얘기 왜 안 했어?”

“그걸 얘기해야 해?”

“다음부터는 말해.”

병현이 차갑게 말하고 운전석에 타자, 인형은 기분이 상한 채 보조석에 탔다.

그 밤, 인형은 결국 기분이 나빠 그냥 집으로 일찍 돌아왔다.

솔직히 인형이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병현이 기분이 안 좋아서였다.

인형은 병현이 하은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 병현이 하은의 개인 영상을 보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시애틀에서 난 스캔들이 사실은 차강현이 아니라 차병현이라는 루머도 있었기 때문에 인형은 자꾸만 이하은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차병현, 너도 이하은한테 관심 있었던 거야? 안 그래도 스트레스받아 죽겠는데… 또 이하은!”

인형은 이를 바득 갈며,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생리를 안 하길래 혹시나 해서 해봤던 임신테스트기를 보고 인형은 눈을 키웠다.

“말도 안 돼… 나 어떡해?”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하게 두 줄이 가 있는 걸 보고, 인형은 혼란스러웠다.

“나 어떡해… 어떡하지?”

인형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누구 애지? 아, 진짜 누구 애지?

어떤 남자의 애인지 알 길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스쳐 가는 남자가 너무 많았으니까.

그 남자들 다 친자 검사를 해볼 수도 없고… 아, 진짜 뭐지?

인형은 한동안 충격에 빠져 정신을 놓고 있다가 불현듯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면… 선택할 수 있다는 거 아니야?

그 순간, 병현이 떠올랐다.

병현은 관계를 가질 때도 피임을 거의 안 하는 편이었다. 늘 불안했지만, 그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는데… 이건 좋은 기회였다.

성문그룹 후계자 차병현….

나를 황금 마차에 태워줄 남자….

“그래, 차병현… 네가 내 아이 아빠 하면 되겠네. 이하은한테는 못 뺏기지. 차기 성문그룹 안주인, CF퀸은 나 이인형 거라고.”

만약에 아이를 지우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럼 돈을 얻게 될 거고, 보기 싫은 그와도 인연을 끊을 수 있게 되는 거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성문그룹 안주인이 되는 것도 좋았고, 돈을 받게 되는 것도 좋았다.

어찌됐든 차병현은 황금 마차를 태워줄 남자임은 틀림없었다.

차병현, 당신 내 아이 아빠 해야겠어.

* * *

띵동-

잠을 자려고 눈을 감는 순간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지아는 눈을 떴다.

“누구지?”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군가 싶어 지아는 침대에서 나와 현관문으로 향했다.

“강현 씨?”

예상대로 인터폰 화면으로 강현이 보였다.

지아는 반가운 마음에 버선발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무슨….”

강현은 지아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강현 씨….”

“얼른 같이 살자.”

“갑자기요?”

“내 옆에 있어. 잘해 줄게.”

“지금도 잘해 주고 있잖아요.”

“만족하지 마. 더 바라라고.”

지아는 고개를 뒤로 물러 강현을 빤히 바라봤다.

“강현 씨….”

“왜?”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정곡을 찔린 강현은 일부러 놀란 걸 숨기려 눈살을 찌푸렸다.

“어?”

“그렇잖아요. 갑자기 나타나서 왜 이러는 건데요?”

지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강현은 그녀의 얼굴을 제 가슴에 묻었다.

“왜 그런 눈빛이야? 무슨 생각 했어?”

“아무 생각 안 했어요.”

강현은 지아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했는데? 눈빛이 불순했는데?”

“치… 왜 왔어요?”

지아가 갑자기 퉁명스럽게 말하자, 강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그래? 보고 싶어서 왔지.”

“여태 전화도 없었으면서….”

지아가 삐친 것 같자, 강현은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숨 막혀요. 이거 놔요.”

“내가 전화 안 해서 서운했어?”

지아가 아무 말이 없자, 강현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왜?”

“오늘 당신이….”

“내가 뭐?”

“말도 없이 늦고, 통화도 딴 데 가서 하고, 잘 자라고 전화도 안 해주고….”

강현은 투정 부리는 지아가 귀여서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냥 늘 해주던 걸 안 해주니까….”

“안 해주니까?”

강현이 웃으면서 물어보자, 지아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왜 자꾸 웃어요. 몰라요… 이건 당신 때문이에요.”

“갑자기?”

“당신이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거라고요. 진짜 당신 말대로 당신한테 더 바라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데….”

“잘하고 있어.”

“네?”

강현은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거 나한테 길들여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말이 왜 그렇게 돼요?”

“지금 당신이 그랬잖아. 내가 당신 버릇을 잘못 들여놨다고.”

“그건….”

“그래, 그렇게 더 바라고 더 해달라고 해. 다 해줄게. 그래야 당신이 다른 놈한테 못 가지.”

“……?”

“잘해주고 또 잘해주고 공을 들여서 다른 놈은 성에도 안 차게 당신을 길들여놓을 생각이거든.”

“치… 당신은요?”

“난 이미 당신한테 길들여졌고.”

“차강현 씨가 나한테 길들여졌다고요? 말도 안 돼.”

천하의 차강현이 누군가한테 길들여진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길들였으면 길들였지, 그가 길들여진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

“진짜.”

지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자, 강현은 그녀의 입술을 맛보듯 핥았다.

“봐. 이렇게 당신 입술 맛에 길들여져 미쳐 있는 거. 그리고….”

강현의 손이 지아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지아가 움찔하자, 강현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갈라진 살결을 지그시 눌렀다.

“난 당신의 여기에도 길들여져서….”

강현은 지아의 손을 꺼떡이는 제 욕망에 가져다 댔다.

“이놈이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날뛰어. 누군가한테 길들여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 줄 알아? 난 알아. 당신이 날 길들였거든. 당신한테만 반응하고, 당신만 바라보게, 당신을 절대 떠날 수 없게 당신이 날 길들였어. 그래서 난 당신이 나한테 길들여졌으면 좋겠어. 당신도 날 떠나지 못하게.”

지아는 강현을 와락 껴안았다.

“내가 왜 당신을 떠나요. 그렇게 따지면 나도 당신한테 이미 길들여졌는데….”

“……?”

“왜 그렇게 봐요?”

“보여줘.”

“……?”

“보고 싶어.”

이야기의 흐름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자, 지아는 눈동자를 굴렸다.

“뭘요?”

느리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강현은 지아의 입술을 야릇하게 만지며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 당신이 나한테 길들여졌다는 증거.”

“…….”

“응?”

“어떻게 보여줘요.”

“당신은 보고 있잖아.”

강현이 시선을 내리자, 지아도 그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여전히 그의 바지 앞섬이 들썩이고 있었다.

강현은 지아에게 다가가 하체를 붙였다.

“당신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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