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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75화 (74/94)

75화

여전하네.

“네가 거길 어떻게….”

보육원 이름을 듣고 기순이 놀라는 걸 보니, 확실했다.

개자식!

임치한을 향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어머니, 이제 그 남자 만나지 마세요.”

“왜? 네가 보기에도 사기꾼 같니?”

“사기꾼 맞아요.”

“아니야. 사기꾼. 얼마나 내 딸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찾겠다며 전국을 뛰어다니시는데….”

“아뇨. 그 사람은 어머니가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만나지 마세요. 이제 딸도 그만 찾으시고요.”

“응? 딸을 찾지 말라니?”

“딸 찾으셨어요.”

“무슨 말이야? 내가 딸을 찾다니? 그리고 네가 참빛보육원은 또 어떻게 아는 거야?”

기순의 물음에 강현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열어 얼마 전에 영지의 집에서 찍었던 사진을 내밀었다.

기순은 자세히 사진을 확대해서 보고는 사진 밑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보고 눈을 키웠다.

분명히 참빛보육원이라는 글씨가 써 있었다.

“네가 이 사진을 어떻게….”

“제가 거기 있었거든요. 지아랑 같이.”

“……?”

기순은 듣고도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저었다.

“너 지금 뭐, 뭐라고?”

“지아랑 같이 있었다고요.”

“지아? 지아라면….”

“네, 어머니가 아시는 꽃집 사장 지아요. 어머니가 5월 23일, 참빛보육원에 지아 놔두고 가시는 거 제가 봤어요.”

기순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너무 놀라 눈꺼풀을 껌뻑이는 것도 잊었다.

“5월 23일을 네가 어떻게….”

“제가 거기 있었으니까요.”

“내가 누굴… 누굴 놓고 갔다고?”

“지아요. 어머니 딸.”

기순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는지 가슴을 마구 때렸고, 호흡은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강현은 너무 놀라 기순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기순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정신은 제정신이 아닌 듯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퍽퍽 치고 있었다.

“어머니!”

* * *

“왜 이렇게 늦었어요?”

지아는 강현이 일찍 온다고 해서 저녁도 안 먹고 꽃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도 없이 그가 늦게 오는 바람에 조금 뾰로통해졌다.

“미안.”

강현이 백허그를 하며 화해를 취했지만, 지아는 그를 째려봤다.

“전화라도 좀 해주지. 전화는 왜 안 받았어요?”

기순 때문에 전화를 받을 정신이 아니었다.

기순이 당분간은 지아가 제 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지석에게도, 하은에게도, 수용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어 강현은 홀로 병원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아에게도 비밀이었다.

기순은 정신이 들자마자, 강현을 붙들고 또 당부했다.

“당분간 비밀로 해. 벌써 말한 거 아니지?”

“네…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마음 같아서야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얼마나 놀라겠어. 지난번에 보니까 픽픽 쓰러지고 몸도 약하던데… 나 때문에 또 놀라서 쓰러지면 어째… 게다가 엄마, 아빠도 있던데… 내가 나타나도 될는지….”

“그럼 말씀 안 하시게요?”

“내가 괜히 나타나서 혼란이나 주고,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내가 갑자기 무슨 낯으로 나타나. 딸도 못 알아본 엄마인데… 내가 무슨 낯으로….”

기순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강현은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지아에게 상황도 설명할 수 없으니 그냥 비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 뭐 먹을까?”

“너무 늦었잖아요.”

“그래도 뭐 좀 먹어야지. 우선 나가자.”

서둘러 지아를 데리고 꽃집을 나온 강현은 약국에서 나오는 영지와 영준을 보고 인사했다.

같은 보육원에 다녔던 영준과 영지였다니… 어릴 때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나서 그런지 강현은 저도 모르게 너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가 그들의 표정이 그러질 못하자, 뻗었던 손을 뒤로 숨겼다.

“음!”

“되게 반가운가 보다. 우리가?”

강현은 비꼬는 영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도 이러더니 여전하네.

영준은 어릴 때도 강현에게 늘 툴툴댔었다.

자기가 멋대로 형이라고 불러놓고, 억울하다며 툴툴대고, 그때도 지아가 자기를 안 찾고 나만 찾는다며 대놓고 질투를 하면서 툴툴댔었다.

“여전하네.”

강현은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었고, 영준은 찌릿 그를 째려봤다.

“뭔 소리야?”

“형 반가워서.”

강현의 ‘형’이라는 호칭에 영준은 얼굴을 심하게 구겼고, 옆에 있던 영지도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도 그랬었다.

늘 영준의 옆에 딱 붙어서는 그가 반응을 보이면 영지는 그를 따라 더 크게 반응하고는 했다.

얘도 여전하네.

강현이 자신을 보며 실실 웃자, 영지는 지아를 보며 ‘왜 저래?’라고 입 모양을 지어 보였다.

지아도 이해할 수 없는 강현의 태도에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뭐 해요?”

“어?”

“가요, 얼른.”

“그래, 가야지. 그럼 둘 다 잘가.”

너무나도 친근하게 인사를 하면서 사라지는 강현을 보며, 영준과 영지는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뭐 잘못 먹었나?”

“그러니까… 왜 저래?”

그러고 멀어지는 강현과 지아를 보는데, 그 모습이 너무 다정하자 영준과 영지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서로 쳐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술이나 한잔할까?”

“그래.”

영준이 치킨집으로 향하자, 영지는 그를 막았다.

“오빠, 우리 다른 데로 가자.”

“왜? 귀찮아.”

영준이 다짜고짜 치킨집으로 들어가 버리자, 영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소개팅을 했던 그날 이후로 영지는 지석을 피해 다녔었다.

지석도 영지를 피해 다니는지 서로 안 본 지 꽤 됐었는데, 이렇게 치킨집을 가는 건 위험했다.

영지는 치킨집 문을 슬쩍 열어서 고개를 내밀고 동태를 살폈다.

지석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끝낸 영지는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치킨집 안으로 들어갔다.

영준이 앉은 자리를 발견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이 열리며 도어벨이 울렸다.

영지는 무의식적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고개는 빳빳하게 굳었다.

“어?”

“아….”

지석이었다.

소피와 헐크의 재회였다.

그동안 나누었던 문자메시지가 그의 얼굴 옆으로 자막처럼 보이는 것만 같았다.

문자메시지 속 헐크 님, 아니 지석은 너무나도 꿀 떨어지게 다정한 남자였다.

「소피 님이 맛있다면 저도 꼭 먹어보고 싶네요. 저도 나중에 꼭 데려가주세요.」

「소피 님 보여드리고 싶어서 사진 찍어 보냅니다. 풍경이 너무 예쁘네요.」

「소피 님, 출근 잘하셨어요? 커피 한잔하면서 생각나 보냅니다. 커피쿠폰이에요.」

「소피 님, 퇴근하실 시간이죠? 집에 도착하면 연락주세요. 걱정됩니다.」

「소피 님, 우린 서로 아는 사이였다면 어땠을까요? 문득 궁금해 보냅니다. 소개팅 날짜를 너무 늦게 잡았을까요? 시간이 너무 안 가네요.」

사귀자고 말만 안 했지, 문자메시지로는 벌써 사귀는 거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매일 아침이면 일어났냐고, 점심이면 끼니 챙기라고, 저녁이면 수고했다고, 밤이면 잘 자라고.

그가 보내주던 문자메시지가 오지 않아서 솔직히 허전했다.

날도 추운데 마음속까지 휑해지는 느낌.

그런데 하필이면 헐크가 지석이라니….

율희에게 따졌지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너무 잘 어울린다고 아쉬워하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영지는 지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영준에게 다가갔다.

지석도 영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주방으로 쏙 사라졌다.

원래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생맥주를 달라며 목청 좋게 외치던 영지였지만, 어울리지 않게 가만히 있으니 영준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주문 안 해?”

“오빠가 해.”

마침 홀에는 하은이 있었다.

저 여자는 인기도 많다면서, 바쁘다면서 왜 자꾸 여길 나오는 거야?

영준은 아직 하은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오해를 했지만, 직접적으로 어떤 오해를 했다고 말한 적도 없었고, 그저 퉁명스럽게 말을 했을 뿐이니 다짜고짜 사과를 하기도 민망했다.

그냥 그녀 입장에서는 안티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건데 괜히 사과까지 하는 건 오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영준은 모르쇠를 택했다.

그래도 이하은이 조금 불편한 건 사실이라 영준은 영지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네가 주문해.”

“오빠가 해.”

영준은 하은이 올까 봐, 영지는 지석이 올까 봐, 메뉴판을 떠넘기며 주문을 미루고 있었다.

그때, 보다 못한 하은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주문 안 하세요?”

하은이 오자, 영준은 대꾸를 안 했고, 영지가 답했다.

“맥주 두 잔이랑, 치킨이요. 반반.”

“네.”

하은이 주문을 받고 가자, 영지가 영준에게 속삭였다.

“오빠, 미안하다고 안 해?”

“내가 뭘?”

“오해도 다 풀렸는데, 미안하다고 했어?”

“뭘 미안하다고까지 해. 너는 했냐?”

“응, 난 했어. 지아랑 나랑은 했는데.”

“언제?”

“오빠 엄청 취한 날.”

“너네 미안하다고 사과할 때 나는 왜 안 했어?”

“지아한테 남자 있다고 난동부렸잖아. 조심해! 잘난 척하지 마! 막 이러면서.”

“아, 여기 괜히 왔네.”

“그러게 내가 딴 데 가자고 했잖아.”

“마땅한 데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

오늘따라 손님은 왜 이렇게 또 없는지… 테이블에 영준과 영지만 달랑 있었다.

“대충 마시고 가자.”

“응.”

그런데 어느새 한 잔 두 잔 술잔을 비우다 보니 갑자기 단체 손님이 들어오면서 가게는 붐볐고, 대충 마시겠다는 다짐은 잊혀지고 있었다.

영준은 술에 취하니 지아 생각에 속이 상해 한 잔, 두 잔 또 과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오빠, 그만.”

“괜찮아.”

“이러지 말고 여자를 만나. 내가 알아보고 있으니까 소개팅하라고.”

영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영지는 답답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린 진짜 왜 이러냐….”

“우리가 왜?”

“그렇잖아… 우리가 둘 다 연애 운은 진짜 지지리도 없나 봐.”

그 말에 동의하듯 영준도 한숨을 쉬며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말없이 술잔을 비우다가 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바람 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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