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밤보다 더한 짓-71화 (70/94)

71화

옷 고르는 기준

“그날 그 끔찍한 여자의 품에서 벗어나 말했어요. 이 여자가 우리 엄마를 데리고 갔다고. 근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죠. 그 여자는 모르는 일이라며 억울하다고 시치미를 뗐고, 아버지는 그 여자 말을 믿고 제가 충격 때문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집에 안 오고 보육원에 있겠다고 한 거였구나….”

“그 끔찍한 여자랑 같이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강현은 장례식이 끝나고 보육원으로 돌아갔지만, 갈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너무나도 행복하게 사는 그 여자를 보면서 이대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해야겠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복수를 해야겠다.

그 여자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성문그룹을 빼앗아야지.

그 여자의 아들인 병현이 아닌, 권은영의 아들인 내가 성문그룹 후계자가 되어 성문그룹을 차지하는 것, 그것만이 진정한 복수라 생각했다.

그래서 강현은 성문그룹으로 들어온 거였다. 성문그룹 후계자가 돼서 그 여자한테 복수하기 위해.

“강현아, 왜 혼자서 다 감당을 하려고 해….”

“혼자였으니까요. 저한테 편이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차 회장은 괴로움에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강현의 말이 맞았다.

보육원에서 강현을 데리고 오고부터 차 회장은 일부러 선을 그으며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았다.

그건 경옥이 부탁한 거였다.

강현과 친해지고 싶으니 아이는 제게 맡기라고, 끼어들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오로지 경옥에게 맡기고, 의지했다.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강현이 불만을 토로할 때면, 사춘기라고 새엄마한테 반항하는 거냐며 혼내기 일쑤였다.

맞았다… 강현의 말이 다 맞았다.

누굴 원망할 수 있을까….

차 회장은 돌이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자책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래도 말을 하지… 말을….”

차 회장이 계속 같은 말만 하자,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말했다고요. 말은 한 날이면 어김없이 그 여자가 절 괴롭혔지만 말했다고요.”

“널 괴롭혀?”

“그럼 가만 놔뒀겠어요? 아버지는 제 말을 믿어주지 않으셨고, 전 또 말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집요하게,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그 여자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어요.”

“강현아….”

“그래서 입을 닫았어요.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괴롭기만 했으니까.”

강현의 말에 차 회장은 호흡이 거칠어졌다.

“내가 이… 이… 감히….”

차 회장이 분노에 휩싸여 부들부들하자,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신 적 있으시죠? 맞아요, 사람 안 믿습니다. 철석같이 사람을 믿었다가 소중한 엄마를 잃어버렸으니까요.”

“미안하다….”

“이젠 괜찮아요. 지아를 만나고 달라졌거든요. 지아는 제 편이고, 저는 지아를 믿어요. 그러니까 제가 지아에 대한 그 어떤 얘기를 해도 받아들이세요. 제가 아버지께 바라는 건 이거뿐이에요.”

결국 이 긴 얘기를 꺼낸 건 지아를 받아주라는 거였다.

받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거였다.

“도대체 무슨 얘기길래….”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강현은 다시 입을 닫았고, 차 회장도 더 묻지 않았다.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가 경옥이었다.

그래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은영과 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경옥과 결혼을 하게 된 거였다.

은영을 사랑하는 날 이해한다며, 자기 때문에 헤어진 거 같아 미안하다며, 자기를 받아주면 부인으로서 잘하겠다고 사정하는… 너무나도 착한 여인네처럼 굴던 경옥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거짓된 연극이었으니, 어쩌면 은영이 갑자기 떠난 거에도 경옥이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차 회장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악행을 벌여온 건지….

차 회장은 은영의 죽음과 강현이 보육원에 간 사연에 이경옥 그 여자가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일었다.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강현에게 부끄러웠다.

차 회장은 더 이상 음식을 입에 넣었다가는 체할 것 같아 수저를 내려놓았다.

* * *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화초에 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물을 주고 있던 지아에게서 강현이 물조리개를 뺏었다.

“무슨 생각해?”

“어?”

“괜찮아?”

그제야 자신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 알게 된 지아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아… 미안해요.”

지아가 물 닦을 만한 것을 찾으려고 걸음을 옮기자, 강현이 그녀를 붙잡아 백허그를 했다.

“지아야.”

“네?”

“나 왔잖아. 날 보고도 아는 척도 안 하는 건가?”

“아… 왔어요?”

뒤늦게 아는 척을 하는 지아를 돌려세운 강현은 고개를 내려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왜 이렇게 멍해? 진짜 무슨 일 있어?”

“아뇨,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요. 얼른 물 닦아야겠다.”

지아가 또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강현은 그녀를 끌어당겨 꼬옥 안았다.

“물은 이따가 닦아도 되잖아.”

“그래도….”

“이렇게 좀 있자.”

강현은 지아를 꼬옥 껴안고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피로가 풀리고 편안해지는….

강현은 지아를 안고 있는 이 순간이 휴식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하루 종일, 평생 안고 있으래도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존재 자체로 행복을 주는 그녀였다.

순간순간 새삼 그녀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되고… 감동을 하는 자신이 오글거리고 기가 막혀 강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현이 갑자기 웃자, 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어요?”

강현은 고개를 뒤로 물러 지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강현의 눈빛이 민망해 지아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자꾸….”

“왜 가려?”

강현이 손을 치우자, 지아는 그의 품에 포옥 안겨 얼굴을 안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너무 빤히 보지 말아요.”

“……?”

갑자기 안기는 그녀 때문에 강현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어디서 이런 건 배웠어?”

“뭘요?”

“이게 더 문제야. 자기 뭘 했는지 모른 다른 거.”

“무슨 얘기예요.”

지아가 더욱 꼬옥 안으며 얼굴을 안 보여주자, 강현은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

“얼굴 좀 보여줘.”

“안 돼요. 너무 빤히 봐.”

“그럼 안 돼?”

“일하는 중이었잖아요. 거울 안 봤단 말이야. 상태가 어떤지 몰라서 안 돼요.”

“예쁜데?”

강현이 또 얼굴을 보려고 하자, 지아는 그를 더 세게 껴안았다.

“보지 말라니까요.”

“알았어. 이것도 좋네.”

강현은 품에 안긴 지아를 꼬옥 안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낮에 아버님, 어머님하고 점심은 잘 먹었어?”

“네.”

더 이상의 말이 없자,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끝?”

“……?”

“난 아버지랑 점심 먹으면서 당신 얘기했는데?”

“내 얘기요?”

“아버지가 당신 언제 데리고 올 거냐고.”

차 회장 얘기에 지아는 놀라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을 보지 말라고 해놓고 그새 잊었는지, 지아는 놀란 눈으로 강현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요?”

“응. 이경옥 집 나갔어. 아버지가 다 아셨거든.”

“어떻게요?”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당신 때문에라도 그 여자는 나가는 게 맞아.”

“설마 당신이….”

“내가 뭐?”

“당신이 한 거예요?”

강현은 대답 대신 지아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당신 혼자 아니야. 당신은 내가 지켜.”

“강현 씨….”

지아는 강현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다.

“따뜻해.”

강현은 지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는 그녀를 더 세게 껴안았다.

“당신은 오늘 당신 부모님하고 내 얘기 안 했어?”

지아가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하자, 강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얘기 아니었구나?”

“그게….”

지아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강현은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점수를 따야 하나….”

“그런 거 할 줄 알아요?”

“해야지. 당신이랑 결혼하려면.”

“음….”

지아가 영 못 믿겠다는 눈빛을 보내자, 강현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 표정 뭐야?”

“당신이 점수 따려고 한다는 게… 영 상상이 안 가서요.”

“직접 보여줄 테니까 기다려.”

“기대할게요.”

지아가 전혀 기대를 안 하는 목소리로 말하자, 강현은 그녀를 찌릿 째려봤다.

“기대하는 거 맞아?”

“솔직히… 당신 그런 거, 안 해봤잖아요. 누구한테 점수 따려고 노력하고 그러는 거… 차라리 그 누구보다 더 잘나고 위에 서려고 노력을 하면 했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면서도,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지아에게 강현은 눈을 흘겼다.

“지금도 하고 있잖아?”

“뭘요?”

“지금도 당신한테 점수 따려고 노력 중인데?”

“저한테요?”

지아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강현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악!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점수 따려고.”

“이게 점수 따는 거예요?”

강현은 성큼성큼 걸어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지아를 눕혔다.

그러고는 그 위로 몸을 포갰다.

“열심히 할 거야.”

“뭘요?”

“점수 따기.”

그 순간, 지아의 원피스 속으로 그의 손이 밀려 들어왔다.

“하웃….”

“이런 불편한 옷은 안 입으면 안 돼?”

“안 불편한데….”

“벗기기가 불편하잖아.”

벗기기 불편하다면서, 강현은 순식간에 지아의 옷을 벗겼다.

“저 옷은 오늘만 입고 버려. 다른 거 사줄게. 벗기기 쉬운 거로.”

“싫어요. 아깝게. 그리고 언제부터 옷 고르는 기준이 벗기기 쉬운 게 된 건데요?”

“당신이 날 만난 순간부터.”

브래지어까지 벗겨 낸 강현은 지아의 가슴을 움켜쥐고, 입술을 맞물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