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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70화 (69/94)

70화

엄마 친구

“뭐? 신고?”

지아가 노려보자, 병희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봐? 다시 말해줘? 신고. 내가 저 사람들 신고한다고.”

“네가 왜? 무슨 자격으로?”

“자격이야 충분하지. 넌 우리 집에 입양된 애야. 그런데 지금 네가 다른 부모가 있다는 건… 저 사람들이 널 납치한 거잖아.”

“납치 아니야.”

“납치지. 남의 집 딸을 데려가서 자기 딸로 삼았는데… 안 그래? 우리 부모님은 딸을 빼앗긴 거잖아. 그리고 만약 네 신분을 만들기 위해 저 사람들이 널 신분 세탁까지 했다면… 죄는 하나 더 늘어나는 거지.”

“임병희!”

“아니면 아니라고 해봐. 조금만 조사하면 다 나올 것 같은데?”

병희는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었지만, 지아는 그 얼굴에 당장이고 따귀를 날리고 싶었다.

지아가 주먹을 겨우 쥐며 참고 있는데, 병희는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네 부모한테는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비밀 지켜줄게.”

선심 쓰듯 말하는 병희를 지아는 죽일 듯 노려봤다.

내 인생을 이미 망친 것도 모자라 또 망치려고 나타난 거머리.

지아에게 병희는 그런 존재였다.

언니가 갖고 싶다며 징징대던 아이에게 그녀의 부모는 장난감을 쥐여 주듯 지아를 쥐여 주었다.

변덕이 심했던 아이는 금방 싫증을 내며 짜증을 내기 일쑤였고, 진짜 장난감이 아니었던 지아는 몸에만 상처가 나는 게 아니라 마음에도 상처가 새겨졌다.

집 안의 모든 나쁜 일은 다 지아의 탓이었고, 잘된 일은 더 잘될 수도 있었는데 지아 때문에 더 잘되지 못한 거였다.

사업이 망했을 때도, 빌어먹을 팔자가 기어들어 와 집안을 망하게 했다며 지아는 견디기 힘든 구박을 받아야만 했다.

더 자라고 나서는 아버지라는 탈을 쓰고 그렇지 못한 행동을 하려고 드는 임치한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집 안에 지아의 편은 아무도 없었고, 지아의 잘못이 아닌 것도 지아의 잘못이 되었다.

결국 못 버티고 나왔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나왔다.

그리고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그때 만난 부모님이, 구세주가, 건명과 희숙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들께 무슨 짓을 하겠다고?

내 인생 진창 만든 것도 모자라, 그들까지 진창에 구르게 할 수는 없었다.

지켜야 했다. 지킬 거다.

인생을 좀 먹는 이 거머리한테서.

“원하는 게 뭐야?”

“뭐겠어?”

병희가 손으로 돈 표시를 하며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 * *

“은서 언제 데리고 올 거냐?”

차 회장이 먼저 지아 얘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강현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데리고 오려고 그 난리를 피우면서 나한테 녹음 들려준 거 아니었어?”

“이번에 데리고 오면 결혼 날짜 잡을 거예요.”

“그래서 언제?”

선뜻 언제라고 말하는 차 회장에게 살짝 놀랐지만, 강현은 티를 내지 않고 젓가락질을 했다.

“…물어보고요.”

언제냐고 물어봤다는 건 재혼을 허락을 한 거나 다름이 없는 건데도 강현이 심드렁하게 답하자, 차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물어보다니? 은서는 생각 없는데 너 혼자 이러는 거냐?”

“물어보고요.”

“……?”

차 회장이 계속 쳐다보고 있자, 강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만 허락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왜? 은서 집안에서 재혼을 반대하는 거냐?”

“그 여자가 오죽… 뭐 저도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시간 좀 주세요. 지아한테 물어볼게요.”

“지아?”

“은서 이름 바꿨어요. 지아로.”

“갑자기 이름을 왜 바꿔?”

“그런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지아로 불러주세요. 이거 말고도 아버지한테 말씀드릴 게 좀 많은데… 근데 그래도 저 지아랑 결혼합니다.”

이건 또 무슨… 차 회장은 미간을 구겼다.

“무슨 말이야? 내가 들으면 반대를 할 얘기다 이거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뭔 얘기길래 속 시원히 말을 못 하고 뜸을 들여? 겁나게?”

“겁도 낼 줄 아세요?”

“겁나지. 넌 모르겠지만.”

예상치 못한 차 회장의 대답이 어색해 강현이 모르는 척 다시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겁이 나서 가만히 있었다.”

강현은 젓가락질을 하다 멈칫했다.

“……?”

“행여 내가 널 더 챙기기라도 했다가 네 새엄마가 널 미워할까 봐 겁이 났다. 엄마 정을 느끼지 못할까 봐 겁이 났어. 그래서 나서지 않았던 거였다. 물론 그 행동이 다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차 회장과 이런 속마음을 얘기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이제 와 이런 얘기를 해서 뭐할까 싶다가도 마음 한편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강현은 늘 그랬듯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물을 마셨다.

물잔을 탁 내려놓은 강현은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릴 때였어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그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며칠 전부터 계속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던 사람이라서 그날도 거리낌 없이 얘기를 했었어요.”

“그 여자가 이경옥이랑 말이냐?”

“네, 그때는 그 여자가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강현은 끔찍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아줌마가 엄마 친구라고요?”

“응, 나 사실은 네 이름도 알아. 권준우. 맞지?”

“네.”

“엄마가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

어린 강현은 경옥의 말에 경계를 하는 것도 잠시, 눈을 반짝였다.

“엄마 친구면… 우리 엄마 도와주려고 온 거예요?”

“응?”

“우리 엄마 친구라면서요.”

“아, 그럼… 엄마 도와주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네!”

딱 보기에도 돈이 많아 보이는 경옥을 보면서 강현은 생각했다.

이 부잣집 아줌마라면 엄마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엄마를 병원으로 데려가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이렇게 부자 친구가 있으면서 엄마는 왜 그동안 연락하지 않았지,라는 아쉬운 생각까지 했다.

강현은 누구든 엄마를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던 때였기에, 의심할 여유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경옥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인 은영은 경옥을 보고 놀랐고, 강현은 어린 나이였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준우야. 엄마, 이 아줌마랑 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잠깐만 나가서 놀래?”

“어?”

그때, 경옥은 준우에게 돈을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

“뭐 하는 거야?”

은영은 그 돈을 주지 못하게 했지만, 경옥은 돈을 강현의 손에 쥐여줬다.

“아니야. 가져도 돼. 이거 가지고 맛있는 거 먹고 놀다 와.”

몸이 아팠던 엄마는 매일 돈이 없다고 해서 군것질을 할 수 없었는데, 맛있는 걸 사 먹으라고 큰돈을 주니 강현은 경옥이 천사처럼 느껴졌다.

강현은 신이 나서 슈퍼로 달려가 엄마에게 평소 주고 싶었던 것들도 사고, 아이스크림까지 사서 집으로 갔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만 있을 뿐.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차 회장은 펄쩍 뛰며 화를 냈다.

“왜 여태 말을 안 한 거냐? 이걸 왜 지금 얘기해?”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죠. 둘이서 이런 얘기까지 할 시간 없었잖아요. 아니, 아버지가 제게 그런 시간을 주지 않으셨죠. 들어주려고도 안 하셨고요.”

“그건….”

차 회장이 딱히 변명도 못 하고 있자 강현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도망쳤어요. 죽기 살기로 도망쳐서 보육원으로 가게 된 거예요. 엄마가 전부터… 엄마가 떠나거든 가라고 했던 보육원이 있었거든요. 엄마가 가는 방법도 여러 번 알려줘서 전 거기로 갔죠. 그리고 엄마를 다시 보게 된 건… 엄마의 장례식 때였어요.”

차회장은 괴로움에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난 분명, 은영이가 병원에 있었다고 들었어. 네 행방은 모르겠다 들었고. 근데 은영이는 이미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져 곧 죽을 것 같다고….”

“그건 맞아요. 엄마는 저와 함께 있을 때도 저랑 헤어질 준비를 하고 계셨으니까. 그래서 아버지한테 10년 넘게 비밀로 하고 있었던 저의 존재를 알린 거겠죠. 그 덕분에 그 여자가 제 존재를 알게 됐고, 그 여자는 얼마 남지 않은 엄마와 저의 시간마저 앗아 버리고, 절 없애려고 한 거고요.”

차 회장은 분노로 치를 떨며 겨우 입을 열었다.

“감히 널… 은영이를 찾았으면서… 찾았으면서 못 찾았다고 날 속인 거였다니… 은영이가 보낸 편지가 누군가의 장난일 수도 있으니 자기가 먼저 가보겠다고 해놓고 은영이가 죽을 때까지 빼돌린 거였어….”

차 회장은 괴로움에 목이 메었다.

“난 네 엄마를 죽기 직전에야 봤다. 은영이한테 겨우 들은 말이라고는 네가 있는 보육원 이름뿐이었지. 네가 그 보육원에 있을 거라고… 넌 그 여자가 몰래 네 엄마를 그렇게 데리고 갔었다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왜 그걸 이제야 말을 하는 거냐?”

“말했어요.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아버지가 보육원에 있던 저를 장례식장으로 데리고 가서 그 여자가 이제 제 엄마라고 소개를 해줬을 때, 그 여자가 울면서 저를 껴안더군요. 그때 제 기분이 어땠겠어요?”

차 회장은 고개를 떨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강현의 덤덤한 목소리가 더 슬프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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