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신고하면 그만이니까
지아는 남일 같지 않아서 기순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럼 그때 그 미역국은….”
“정작 내 딸은 못 먹는 거죠. 어디에서 미역국은 먹고 지내는지… 생일 축하는 받고 지내는지… 많은 사람들이 내 딸 생일을 축하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해마다 딸 생일에는 미역국을 돌려요.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고 나면 내 딸이 진짜 어딘가에 잘 지내고 있을 것만 같거든. 살아있는 것 같거든.”
어느새 눈시울을 붉힌 기순은 주책이다 싶어 얼른 눈가를 닦아냈다.
“내가 미쳤나 보다. 바쁜 사람 앞에 두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그래서 내 딸이랑 나이 같은 아가씨들만 보면 마음이 아려요. 어제 어찌나 보면서 속상하던지… 강현이가 마음 아파하는 거 보니까 더 속상하더라고.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잘 먹어요. 강현이가 많이 놀랐어요.”
“네, 감사합니다.”
그때, 기순이 가방을 들더니 냉장고로 향했다.
“내가 정리 도와줄게요.”
“안 그러셔도 돼요.”
“아니야. 이게 뭐 일이라고. 냉장고 좀 열어도 되죠?”
“열어도 되긴 하는데….”
지아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냉장고 문을 연 기순은 싸온 사골국물을 정리하면서 주변을 닦기 시작했다.
기순이 어느새 청소까지 시작하자, 지아는 몸 둘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사장님, 제가 할게요.”
“난 이거 버릇이에요. 버릇. 신경 쓰지 말아요.”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퉁퉁 부어 두꺼워진 손가락으로 냉장고를 닦고 테이블을 닦는 게 안타까워 지아는 그녀를 말렸다.
“제가 할게요. 여기에서까지 와서 일하지 마세요.”
“아니, 내가 해도 되는데….”
“제가 할게요.”
“너무 많이 줘서 짐 될까 싶어 그러지. 내가 손이 이렇게 커요.”
“짐이라뇨… 너무 감사합니다.”
지아가 정말 고마워하는 표정을 짓자, 기순은 뿌듯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난 왜 이렇게 꽃집 사장이 남처럼 안 느껴지나 몰라. 강현이 처라서 그런가? 어머… 내가 이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거죠? 지난번부터 자꾸 조심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아니에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이 더 화내요.”
“하긴… 강현이가 극성이긴 하더라. 아주 피곤하겠어.”
“조금요?”
지아가 넉살 좋게 농담을 받아주자, 기순은 웃음을 터뜨렸다.
“강현이 알면 서운하겠는데?”
“비밀이죠. 알면 큰일 나요.”
지아와 기순이 함께 키득이며 웃고 있는데, 그때였다.
도어벨이 울리고, 누군가 꽃집으로 들어왔다.
“딸, 엄마 왔다.”
“아빠도 왔다.”
“엄마, 아빠.”
희숙과 건명이 꽃집으로 들어오자, 지아의 부모를 처음 보는 기순은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누구?”
“이 앞집에서 치킨집 해요.”
“아, 그러시구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기순은 희숙과 건명과 인사를 나누고는 보냉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난 이만 가볼게요.”
“차도 한 잔 못 드리고 죄송해요.”
“다음에 와서 먹지 뭐. 오늘만 날인가? 그럼 가볼게요. 계시다 가세요.”
“네.”
기순은 꽃집을 나가려다가 다시 뒤돌아섰다.
“아, 냄비에 있는 것 꼭 오늘 먹어요. 알았죠?”
“네.”
“진짜로 가볼게요.”
기순이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가자, 희숙은 고개를 갸웃했다.
“냄비에 있는 거라니?”
“사골을 끓였다고 가져다주셨거든.”
“사골?”
“응. 괜찮다는데 냉장고에 정리까지 해주시는 거 있지?”
정리? 희숙은 뭔가 싶어 냉장고 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
“이걸 다?”
“얼마나 있길래 놀라?”
건명도 냉장고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사골 파시니? 네가 산 거야?”
“아니, 아빠도 참… 내가 저 많은 사골을 사서 뭐 해? 먹으라고 주신 거야. 잘됐다. 아빠랑 엄마도 가져가요. 안 그래도 강현…!”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꺼내고 만 지아는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강현의 이름을 못 들었을 리 없는 건명은 눈을 치켜떴다.
“네 입에서 왜 그 자식 이름이 나와?”
“어?”
지아가 시치미를 떼자, 건명은 희숙에게 물었다.
“당신도 들었지? 지아가 그 자식 이름 말하는 거?”
희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너 다시 만나니? 차 서방?”
희숙의 말에 건명은 불같이 화를 냈다.
“차 서방은 누가 차 서방이야? 당신도 정신 못 차려? 우리 딸이 그 집에서 어떤 취급을 당했는데, 그놈이 우리 딸한테 어떻게 했는데 차 서방이야?”
“소리는 왜 질러요… 입버릇이에요. 입버릇… 차 서방이 입에 익어서….”
희숙의 말에 건명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벨도 없어? 그리고 입버릇은 무슨… 결혼하고 한 번 본 사위, 불러본 적도 없는데 무슨 입에 익었다고 입버릇이야?”
“알았어요. 당신은 하여간 차 서방 얘기만 나오면 발끈해서….”
“발끈 안 하게 생겼어?”
평소에는 화를 잘 내지 않는 건명이었지만, 강현의 얘기만 나오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목청을 높이고, 가끔 욕도 할 정도로 과격해졌다.
건명은 지아를 찌릿 째려봤다.
“너, 그 자식 만나는 거 아니지?”
지아가 대답하지 못하자, 건명은 단호하게 소리쳤다.
“윤지아!”
지아는 입술을 짓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빠, 미안해요. 엄마, 미안….”
“뭐, 뭐야?”
“어머! 너 다시 만나니? 정말이야?”
희숙이 반색하자, 건명이 인상을 구겼다.
“당신!”
건명이 화를 내자, 희숙은 투덜댔다.
“물어도 못 봐요?”
건명은 희숙에게 경고를 하듯 째려보고는 지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그놈을 다시 만난다는 거야?”
“강현 씨 많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저도 강현 씨도 서로 오해를 해서….”
“안 된다.”
“아빠….”
“여보!”
“한 번 그런 놈은 또 그런 법이야. 널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놈은 언제 또 너한테 그럴지 모른다고.”
“강현 씨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사람 안 바뀐다. 지금 당장은 그놈이 무슨 생각인지 태도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한 번 그런 놈은 또 그러게 되어 있어.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놈을 또 만나? 그 시댁은 또 어떻고?”
지아는 얼마 전에 경옥을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경옥이 떠오르자, 지아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떨궜다.
“그새 잊은 거냐?”
“하지만….”
“널 소중히 대해 줄 사람을 만나. 널 함부로 하는 사람 만나지 말고. 난 다시는 네가 그런 취급받는 거 못 보니까, 그놈 얘기는 입 밖에 꺼낼 생각 마라.”
“아빠….”
“쓰읍!”
건명이 말도 못 꺼내게 화를 내자, 희숙은 지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랬다.
“휴….”
이때, 꽃집 문이 열리면서 도어벨이 울리자, 지아가 입구를 바라봤다.
“어서 오세요….”
꽃집으로 들어오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지아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를 노려봤다.
“오랜만이야.”
병희였다.
어릴 때 입양됐던 집의 친딸.
얼마 전, 치한을 보고 났더니 병희를 보는 건 놀랍지도 않았다.
어쩌면 찾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서였을까? 뭐 때문에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좋은 이유 때문에 찾아올 리는 없다는 거였다.
10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어제 본 것처럼 생생했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저 끔찍한 얼굴….
병희의 정체를 모르는 희숙과 건명은 오랜만이라고 인사하는 그녀를 보고 지아의 친구인 줄 알고, 인사를 건넸다.
“친구?”
병희가 대꾸를 하려는데, 지아가 말을 막아섰다.
“엄마, 아빠.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가게 좀 봐줘.”
“어, 그래.”
“그래.”
“금방 올게. 가자.”
지아가 병희를 끌어당기는데 그녀는 희숙과 건명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꽃집을 나가는 순간까지 뚫어지게 그들을 바라봤다.
지아는 꽃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가서야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병희를 노려봤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가족을 봤는데, 인사를 이렇게 하는 거야? 저 사람들한테 엄마, 아빠라고 하는 거 보니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고 우릴 모르는 척하는 건가?”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어.”
“너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
“네 가게야?”
“하아… 네 아빠가 말해? 나 여기 있다고?”
“그럼 내가 어떻게 알고 왔겠어?”
병희는 지아의 꽃집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번듯하게 가게를 차리고 사는 거 보니까 주민등록증은 있는 거 같은데… 누구 인생 뺏어서 살고 있는 거야?”
들켜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사실에 지아는 움찔했다.
“…….”
“놀랐어? 뭘 놀라 당연한 거잖아. 넌 실종이 오래돼서 이미 사망 신고가 되어 있는데… 이렇게 일을 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면 신분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지금 널 보니까… 잘살고 있는 거로 봐서는 신분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만든 거야?”
“협박하려고 온 거니?”
“협박으로 들렸어? 뭐 찔리는 게 있긴 한가 보다.”
병희가 실실 웃으며 비아냥거리자, 지아는 예전 생각이 나 울컥 화가 치밀지만, 꾹 참았다.
이런 식으로 늘 자극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게 병희의 특기였으니까.
“아니, 나 그런 거 없어.”
“아, 그래? 신분은 어떻게 만들었어? 불법으로 만든 거야? 아니면… 진짜 훔쳤어?”
지아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병희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몰아세웠다.
“대답 안 할 거야?”
“내가 너한테 말해 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말 안 해도 상관없어.”
“……?”
“난 저기 네 가게에 있는 사람들 신고하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