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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67화 (66/94)

67화

너 맞지?

“왜 왔냐니까?”

지석의 휴대전화에서 경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나 교양 있는 척, 다소곳한 척, 세상 순진한 척하던 평소 그녀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이어서 차분한 지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건이 있어서요.”

“조건?”

“제가 강현 씨한테는 조건이 없는데, 어머님께는 이혼 조건이 있어서요.”

이혼 조건이라는 말에 차 회장은 귀를 기울였고, 이어서 들려오는 지아의 진심에… 경옥의 무정함에… 그는 가슴이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요. 세상에 귀하지 않은 자식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자기 자식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좀… 하물며 어머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자식한테는 그렇게 하지 마세요.”

지아가 사정을 하듯 말하는데도 경옥은 조금의 반성도 없이 당당했다.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네가 뭔데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가르치는 거 아니고, 이건 상식이요. 아니, 당연한 거요. 강현 씨가 이렇게 못되게 큰 건 어머니 탓이 제일 커요. 강현 씨한테… 진짜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후회하실 겁니다, 정말.”

지아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차 회장은 절로 양심이 찔렸다.

강현이 이렇게 무심하게 큰 건… 이 아이가 아버지를 찾지 않게 된 건, 내 탓이 제일 큰 게 아닌가 싶어서….

지아의 얘기를 들으며 스스로 반성을 하고 있는데, 경옥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어디서!”

짝-

뒤이어 경옥이 은서의 뺨을 갈기는 소리가 쩌렁 울려 퍼지는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차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옥의 뺨을 내리쳤다.

“이런 쓰레기 같은….”

“……?”

“당장 끌어내.”

차 회장의 명령에 따라 경호원들이 경옥을 끌어내려고 하는데, 그 순간, 그녀의 성정에 쐐기를 박는 한마디가 지석의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왔다.

“너 따위 거 이 정도 때리는 게 일인 줄 알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어. 어디서 훈계질이야?”

듣기 싫은 경옥의 목소리가 쩌렁 울려 퍼지자, 차 회장은 긴 세월 동안 경옥에게 속았다는 것에 기가 막혀 뒷목을 잡았다.

“저, 저 물건 얼른 치워. 얼른!”

경호원들이 경옥을 회장실에서 끌어내자 그녀는 발버둥을 쳤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이거 안 놔?”

병현은 제 엄마를 따라 나갔고, 강 실장은 누가 끌어낸 사람이 없는데도 줄행랑을 치며 회장실을 나갔다.

이 녹음 파일을 또 듣게 되다니….

강현은 지아가 당하는 걸 듣고 또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강현은 지아가 경옥을 만나고 왔다기에,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르니 방패막이가 될 증거를 준비한 거뿐이었다.

혹시 몰라 녹음 파일 얘기를 꺼낸 영지에게 물어본 거였는데, 역시나 녹음 파일은 실제로 존재했다.

영지는 경옥이 해코지라도 할까 봐 지아가 녹음 파일을 복사해서 주었다고 했다.

경옥이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으면 지아가 이런 걱정까지 했을까 싶어 강현은 분개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또 실망했다.

그때 그녀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게… 그게 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가져왔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동안 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무능했던 과오를 씻기 위해서라도, 강현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젯밤, 그녀의 휴대전화에서도 녹음 파일을 빼 왔다.

경옥과 대화할 때 녹음을 하는 지아라면 분명 이번에도 휴대전화 녹음 버튼을 눌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져보니 역시나 있었다.

녹음 파일을 달라고 하면 약한 마음에 또 망설일 게 뻔했다. 심하면 죄책감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강현은 몰래 가지고 나오는 방법을 택했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여자를 제거할 증거는, 지아가 결백하다는 증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근데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이야.

얼른 사라져주고 싶다는데, 그 길에 촉매제를 뿌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경옥과 병현, 강 실장을 회장실에서 내보낸 차 회장은 힘들어도 화가 나도 아비 한 번 안 찾는 무정한 자식 대신 지석을 불렀다.

지석은 그간의 이야기를 차 회장에게 했고, 강현은 그 옆에서 마치 남의 얘기를 듣듯 덤덤히 그 얘기를 들었다.

경옥은 미술관장직에서 물러나는 건 물론이고,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병현은 정직 처리로 처분을 기다리게 됐으며, 강 실장은 해고였다.

그다음의 처벌까지 더 논하기로 했지만, 강현은 지금 당장 지아가 보고 싶어져 회장실을 나왔다.

“문 실장, 이만 퇴근하자.”

“네.”

그때, 지석의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가 날라왔다.

띠링-

무슨 문자메시지인가 싶어서 확인을 하는데… 그 순간, 지석은 눈을 키웠다.

「실장님, 소개팅 파이팅!」

“헉!”

지석이 ‘헉’소리를 내자, 강현이 그를 바라봤다.

“왜 그래?”

“저 소개팅이요.”

“아….”

“지금 몇 시죠?”

손목시계를 확인한 순간, 지석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약속 시간 20분 전이었다.

지금 당장 날아간다고 해도 절대로 도착하지 못할 시간이었다.

첫 만남부터 지각이라니… 나의 소피 님에게….

지석은 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강현에게 말했다.

“저 어쩌죠? 나 진짜 미치겠네… 저 이만 갑니다. 저 먼저 가도 되죠?”

이미 가고 있으면서 묻는 지석을 보며,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석은 강현의 대답을 듣지도 않아놓고 벌써 사라진 뒤였다.

* * *

곧 도착한다는 강현의 전화를 받은 지아는 가게 뒷정리를 서둘렀다.

밖에 내놓은 화분을 다시 들여놓으려고 문을 열고 나가는데, 지아의 눈에 기순이 들어왔다.

“어?”

기순은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와 건물의 작은 공원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순의 표정이 너무 심각한데다가 남자도 수상해 보이고, 심지어 그녀가 그 남자에게 무언가 건네주는 것 같자, 사기인가 싶어 지아는 저도 모르게 관심을 갖게 됐다.

“뭐지?”

기순은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가게로 들어갔고, 지아가 뭔가 수상해 빤히 바라보는데,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남자를 보고 놀란 지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 임치한?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치한을 보는 순간 지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서리를 쳤다.

치한은 처음엔 ‘저 여자가 왜 저러나?’라는 눈으로 지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점점 눈을 키웠다.

“넌….”

벌벌 떨고 있는 꼴을 보니 지아가 분명한 것 같자, 치한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래, 너 맞지?”

움직여야 하는데, 지아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너 맞구나?”

치한이 손을 뻗는 순간, 지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악!”

지아가 소리를 치자, 치한은 당황했다.

“야, 조용히 안 해.”

치한이 조용히 하라고 할수록 지아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올까 싶어 주변 눈치를 살핀 치한은 지아에게 윽박을 질렀다.

“조용히 하라니까!”

그 순간, 약국에서 영준이 나왔다.

“야! 너 누구야!”

영준이 다가오자, 치한은 저도 모르게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잇….”

영준은 그를 쫓았다.

그때, 차를 주차한 강현이 이 상황을 보고 놀라서 지아에게 다가갔다.

한편 영준이 쫓아가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임치한?

강현은 치한을 따라가서 잡을 수도 있었지만, 영준에게 맡기고 우선 지아에게 향했다.

“지아야!”

강현을 발견한 지아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그의 품에 안겼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아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강현의 품에서 사시나무같이 떨며 눈물을 흘렸다.

강현이 두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떨고 있는 지아를 달래고 있는데,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뒤늦게 기순이 달려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지아의 떨림이 점점 더 심해지자 불안해진 강현은 그녀를 업었다.

“안 되겠어요. 병원. 가까운 병원이요!”

“벼, 병원? 병원 이쪽!”

강현은 기순의 안내를 받아 병원으로 향했다.

* * *

“아… 나 너무 신경 썼나?”

소개팅 장소인 커피숍에서 소개팅남을 기다리고 있던 영지는 연신 고개를 내려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이거 은근 긴장되네….”

앞에 놓여있는 주스를 빨대로 한 모금 쪽 빨아먹고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헐크 님이었다.

“헉, 왜 전화를 했지?”

영지는 목을 가다듬고 휴대전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소피 님?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겨서.

“아….”

미리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최대한 빨리 가고 있습니다. 회사에 큰일이 생겨서요.

“어쩔 수 없죠. 천천히 오세요.”

너무 죄송합니다. 처음 통화하는 건데, 이런 말부터 전했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조심히 오세요.”

제가 오늘 진짜 맛있는 거 사드리겠습니다.

“네, 그래요.”

그럼, 저 빨리 가겠습니다. 한 30분이면 도착합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네. 괜찮아요.”

네, 갈게요.

“네.”

- 저기 전화를 끊으셔야… 제가 먼저 끊을 수는 없어서요.

“아, 네… 전화… 끊습니다.”

네.

영지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는 휴대전화를 빤히 바라봤다.

“이 상황에서도 전화를 먼저 안 끊는 거야?”

영지는 매너가 좋은 헐크 님이 마음에 들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목소리… 다급한 목소리였지만 자신을 위해 조급해하고, 미안해하는 것도 진심 같아 설레었다.

처음 통화하는 건데 이런 말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뭔가 배려심이 많은 사람 같아서 좋고.

영지는 점점 더 헐크 님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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