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늘 이런 식이었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선보냐고요.”
“그 여자가 그래?”
“……?”
지아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내리자, 강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여자가 그러냐고.”
“네?”
지아가 시치미를 떼자, 강현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한테 할 말 없나?”
“……?”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무슨 말이요?”
“내가 선본다는 건 누가 말해줬어?”
“…….”
“어제 누구 만났는지 끝까지 말 안 해줄 건가?”
강현이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묻자, 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는 거죠?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뭘 물어요.”
“그 여자가 그래? 내가 선본다고?”
“네.”
“그러게 거길 왜 나갔어? 그런 소리밖에 못 들을 거.”
“근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내가 어머님 만난다는 거?”
“어젯밤.”
“혹시 날 미행한 거예요?”
“아니, 이경옥. 당신이 그 여자만은 안 만났으면 했거든. 근데 그 여자가 당신을 만나러 갔더라고.”
미행을 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자신을 걱정해서 경옥을 감시했다는 얘기에 지아는 고개를 떨궜다.
난 어제 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에게 또 거짓말을 했다는 게 속상해 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거짓말하긴 싫었는데… 말할 수 없었어요.”
“말을 했어야지. 혼자 갔다가 위험한 일 겪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래서 어제 확인하려고 집에 온 거예요? 나 무사한지?”
“무사한 건 이미 알고 있었고. 당신 기분이 별로일 것 같아서. 역시 별로였겠네? 누가 선을 본다는 거야?”
지아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 강현의 품에 안겼다.
그는 지아의 등을 쓰다듬었다.
“다음엔 만나지 마.”
“안 만나면 어머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날 또 어디에 이용하려고 하는 건지… 행여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냥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나간 거예요. 당신한테 해가 될까 봐.”
지아의 등을 쓰다듬던 강현은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 소리를 들은 지아는 고개를 들었다.
“왜요? 화났어요?”
“늘 이런 식이었나?”
“네?”
“늘 이런 식으로 나한테 해가 될까 봐 그 여자를 상대한 거냐고.”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난 당신 아내였으니까.”
“지금은?”
“당신 편이니까요.”
강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아는 안심하라는 듯 씩씩하게 말했다.
“저 진짜 어제 아무 일 없었어요. 걱정 말아요.”
늘 지아가 지켜주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지아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건 자신이었는데, 정작 자신을 지켜주고 있던 사람은 그녀였다.
왜 자꾸 그녀 앞에 서면 부끄러워지는 건지….
모르고 있는 사이에도 너무 많은 걸 주고 있던 그녀였고, 알게 된 순간, 그녀가 제게 얼마나 많을 걸 주고 있는지 깨달았다.
더불어 자신은 그녀에게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날 더 얼마나 미안하게 만들래?”
“강현 씨….”
강현은 지아를 꼬옥 껴안은 채, 한참 동안을 놔주지 않았다.
* * *
지아가 꽃을 정리하고 있는데, 영지가 꽃집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사장님, 출근이 늦으셨네요?”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영지의 시선을 외면한 채, 지아는 하던 일에 집중했다.
“어제 꽃도 다 정리했고, 오전 예약도 없어서….”
“아, 그래서 늦었어?”
가게로 들어온 영지가 따가운 시선을 보내자, 지아는 목을 가린 스카프를 더 넓게 펼쳤다.
“왜?”
“좋아 보여서.”
“뭐가?”
“목은 왜 이렇게 가려? 또 쪽쪽! 자국 엄청 냈나 봐?”
영지가 입술을 내밀며 놀리자, 지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꽃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아니야….”
“아니긴? 아까 헤어지기 싫어서 한참 동안 차 안에 있는 거 다 봤거든?”
“어?”
“약국에도 들렀다 갔어.”
“약국에? 약국에는 왜?”
“어, 그게….”
영지는 괜히 말했다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어디 아프대?”
“아니, 아프긴… 인사. 인사하러 왔더라고.”
“강현 씨가?”
“어, 우리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
“뭐… 그럼 다행이고.”
“그나저나 되게 피곤해하더라. 너무 피곤해하길래 피로회복제 줬어. 밤새 뭘 했길래 피곤해?”
“글쎄.”
지아가 꽃 냉장고를 열며 분주한 척을 하자, 영지는 눈을 흘겼다.
“아주 깨가 쏟아지세요?”
“깨는 무슨….”
“너는 네 깨 볶느라고 절친 소개팅하는 거 하나도 신경 안 쓴다 이거지? 궁금하지도 않냐?”
“아, 맞다.”
“아, 맞다? 너 진짜 이럴래?”
“미안. 소개팅 언제랬지?”
“내일모레.”
“입고 나갈 옷은 샀어?”
“옷은 됐고, 나도 스카프나 하나 사려고. 누구처럼 목에 둘러야 될 수도 있으니까.”
“야! 자꾸 놀리지? 너 진짜 남자 생기기만 해봐.”
“글쎄다. 소개팅에서 만날 남자랑 너네 커플처럼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게 될지… 두고 봐야지. 열정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면, 스카프 선물 부탁해.”
“너 진짜… 박스로 사줄게. 박스로. 그러니까 제발 연애해라. 나도 좀 놀리게.”
“헐크 나오면 생각해 볼게.”
“넌 이상형이 왜 헐크야? 요즘 헐크 스타일의 남자가 많이 없지 않나? 근육이 있어도 거의 잔근육이잖아.”
“그러니까… 그래서 말인데, 사진을 미리 볼 걸 그랬나?”
“만나보고 다 알아보겠다며?”
“그랬는데…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다보니까 그 사람 얼굴이 너무 궁금해지더라고.”
“문자를 주고받았어?”
“응.”
“뭐라고?”
“그냥 일상적인 대화. 우리 계속 문자는 하고 있어.”
“원래 그런 거야? 소개팅 전에 문자 하고 그래?”
“남들이야 모르지. 근데 좀 걱정이야. 이렇게 문자메시지 주고 받아놓고 막상 만났는데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해?”
“문자메시지 느낌은 어떤데? 만나서 맘에 안 들 거 걱정하는 거 보니까 지금까지는 느낌 좋은가 봐?”
“응, 지금까지는.”
그때였다. 영지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어? 또 헐크다.”
“헐크?”
“아, 그 남자. 소개팅남.”
“근데 왜 헐크래?”
“우리 서로 이름 안 밝혔거든. 만나거든 밝히자고. 그래서 각자의 이상형을 말하자고 해서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 그래서 내가 헐크라고 했더니 자기 헐크래. 너무 웃기지?”
“근육질인가 보네. 그래, 그 사람은 헐크고, 너는 뭔데?”
“난 소피.”
“뭐? 소피?”
“응, 소피마르소의 소피. 진짜 웃기지? 이거 처음엔 좀 오글거렸는데… 문자메시지로 소피 님 소피 님 듣다보니까 익숙해지더라.”
“그래서 그 헐크 님이 뭐라고 보냈는데?”
“추우니까 목도리 꼭 하라고.”
“어머, 되게 스윗하다.”
“그렇지? 여기에 진짜 헐크면 딱 좋은데.”
“헐크 아니면 만나서 거절하게?”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 뭐… 메시지 주고받은 거로는….”
영지가 뜸을 들이자, 지아가 피식 웃었다.
“맘에 드는 눈치네?”
“그렇다기보다… 다정하더라고. 매너도 있을 것 같고. 아… 진짜 얼굴 너무 궁금해.”
“참은 김에 더 참아.”
“그래, 맞아. 괜히 사진 보면 편견만 생길 수 있어. 솔직히 나도 소피마르소는 아니잖아. 안 그래?”
살짝 들떠 보이는 영지를 보며, 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진짜 잘됐으면 좋겠다. 잘되면 이제 부부약국 오해 풀겠네.”
“아, 맞아. 그렇게 오해하는 손님 진짜 많다니까….”
“너 짝 생기면 영준 오빠도 여자 좀 만나려나? 오빠도 소개팅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아의 말에 영지도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나 무릎을 탁, 쳤다.
“맞다. 너 우리 오빠 짝 찾아보기로 한 거 어떻게 됐어?”
“아….”
“너 진짜 이럴래?”
“알았어. 찾아볼게.”
“찾아도 나한테 먼저 말해. 행여 우리 오빠한테 소개팅시켜줄까, 네가 먼저 물어보지 말고.”
“왜?”
“아무튼 그런 거 하지 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선 너부터 성공하자.”
“그래! 아, 헐크여야 하는데… 제발.”
영지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 * *
“오늘 저 야근 못 합니다.”
뜬금없는 지석의 발언에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거부권?”
“시키실까 봐요.”
“무슨 일 있어?”
“저 오늘 소개팅하거든요.”
“……?”
“저 연애할 겁니다.”
지석이 웬일인가 싶어서 강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생각했네.”
“꼭 소피 마르소 같이 청순한 여자를 만날 겁니다.”
“소개팅이라며? 원하는 상대가 안 나올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아뇨. 우리 소피 님은 분명히 청순하실 겁니다.”
“우리 소피 님?”
“문자메시지는 주고받았거든요. 문자메시지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그 청순미가… 역시 우리 소피 님은….”
“이름이 소피야? 뭐 이름이 그래?”
“아뇨, 소피마르소에 소피… 저는 소피 님이라고 부릅니다. 소피마르소의 재탄생이거든요. 우리 소피 님은.”
“그래, 소피마르소 꼭 만나라.”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강현을 보며, 지석은 투지를 불태웠다.
소개팅을 꼭 성공하리라!
* * *
“이게 다 뭐야?”
청선그룹 회장 비서실로부터 전달받은 사진을 확인한 차 회장은 분노로 부글거렸다.
“맞선 앞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걸 누가 보냈다고?”
“청선그룹 측에서도 보낸 사람은 모르겠다고….”
“하아….”
차 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경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회사로 나와.”
잠시 후, 경옥이 회장실로 들어오자마자 차 회장은 그녀 앞으로 사진을 툭 내던졌다.
경옥은 그 사진이 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연기하며 사진을 꺼내 확인했다.
강현과 지아가 다정하게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어머! 이게 다… 이걸 누가 청선그룹에 보냈다고요?”
“이게 누가 한 짓인 거 같아?”
“그야… 윤은서 아닐까요?”
“윤은서?”
그때였다.
회장실로 강현이 들어오자, 경옥은 깜짝 놀라 눈을 키웠다.
“네, 네가 왜?”
“내가 불렀어.”
차 회장의 말에 경옥은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