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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63화 (62/94)

63화

지금 가는 길이야.

“마지막엔 웃었지?”

치한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봤어. 식사 내내 우릴 의심하나 불안했는데… 이 정도면 믿는 거지?”

“안 믿었다면 이 자리에 나와서 이 비싼 음식을 사줬겠어? 다음에 보자잖아.”

치한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어색해서 그러나? 그나저나 왜 아무것도 안 묻지? 이것저것 물어볼까 봐 달달 외웠는데….”

“그러게… 근데 그거야말로 의심을 안 한다는 뜻 아니겠어? 믿으니까 안 물은 거 아니겠냐고.”

“그런가… 근데 아빠, 아까 날 왜 이렇게 세게 껴안아?”

“내가 언제?”

“아까 세게 껴안았잖아. 변태처럼.”

“이 자식이! 아빠한테 변태가 뭐야?”

“지아한테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친딸한테는 그러지 맙시다. 징그러워.”

“으이그… 딸이라고 있는 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집 나가서 연락 한 번 없다가 이제 돌아와서는 아빠한테 한다는 소리가! 쯧쯧쯧.”

치한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병희를 바라봤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

“아빠나 대사 틀리지 마. 아까 조금 버벅거리더라?”

“내가 그랬어?”

“더 연습해. 들키면 어쩌려고!”

“너나 일기장 달달 외워.”

“걱정 마. 내가 안네의 일기, 난중일기도 안 읽은 사람인데, 지아 일기는 아주 이젠 안 보고도 읊을 수 있으니까. 이게 얼마짜리 일인데 대충해? 아빠는 어떻게 그동안 저 부자한테 푼돈만 뜯냐? 무려 성문그룹 후계자야. 저런 사람한테 푼 돈이나 뜯어내다니… 그러니까 아빠가 사업을 망한 거야.”

“이놈의 지지배가!”

치한이 손찌검을 하려고 하자, 병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어? 또 때리게? 나 옛날의 임병희 아니야. 아빠, 나 없으면 이번 일 성사 못 시키는 거 알지? 이미 내가 지아인 거로 해버렸어. 나 없이 일 안 되는 거야? 잊었어?”

“이게 어디서 놀다 와서 아빠한테 협박을 해?”

“그럼 구질구질한 곳에서 나까지 같이 뒹굴어야겠어?”

“그래서 좋은 곳에 있다 왔고?”

“몰라. 이제 좋은 곳으로 가면 되는 거지. 저 남자가 날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지 않겠어? 내가 지아인데?”

“그래, 네 말대로 가보자. 좋은데.”

치한은 테이블에 남은 고급 음식들을 입에 욱여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집에 가자.”

병희는 또 곰팡이 나는 지하 방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해 고급스러운 룸을 한번 둘러보고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차에 탄 강현은 운전석에 있는 지석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지아 어디라고?”

“무사히 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강현은 식사 내내 지아가 걱정돼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었다.

물론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마음에 안 들었고.

강현은 지아가 무사히 집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아 집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거기로 가.”

“네?”

“왜?”

“연락은 하셨습니까?”

“연락?”

“남자들이 연락도 안 하고 집에 불쑥불쑥 찾아가는 거 여자들이 안 좋아합니다.”

“우선 출발해.”

차가 움직이자, 강현은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은 잘 다녀왔고?”

- 네, 강현 씨는요?

“나도 뭐. 지금 가도 되나?”

- 어딜요?

“당신 집.”

- 갑자기요?

“지금 가는 길이야.”

- 집을 어떻게 알고….

지아는 말을 하면서도 질문이 너무 바보 같아서 그만뒀다.

- 제 집은 또 언제 알아낸 거예요?

“말 안 하고 가려다가, 지석이가 불쑥 찾아가는 거 여자들이 안 좋아한대서 전화하는 거야. 말하고 가려고.”

- 이미 오고 있다면서요?

“응.”

- 오지 말라면 안 올 거예요?

“아니.”

- 얼마나 걸리는데요?

강현은 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문 실장, 얼마나 걸려?”

“40분 걸립니다. 사모님, 좀 천천히 갈까요?”

지석이 수화기 너머로 들릴 정도로 소리치자, 지아가 수화기 너머에서 그에게 답했다.

- 네. 좀 천천히요.

“귀 떨어지겠네. 문 실장, 천천히 가달래.”

“네.”

“문 실장이 그러겠대.”

- 네.

강현은 지석과 지아에게 말을 전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천천히 가면 뭐 하고 있게? 빨리 보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 몰라요. 우선 끊어요.

지아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자, 강현은 황당해서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그런 강현을 보며 지석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여자를 모르는 거지.”

“……?”

“제가 누나가 있어서 아는데… 집에 있을 때 여자들 상태 장난 아닙니다.”

“지아는 달라. 집에서도 예뻐.”

“그건 형이 있으니까 꾸민 거고. 아마 지금 씻고, 바르고, 치우고, 닦고 난리도 아닐 거다.”

강현은 설마 하며 시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비위에도 안 맞는 짓을 하느라 너무 고통스러워서 얼른 지아를 봐야 충전이 될 것만 같았다.

“문 실장, 서둘러. 최고 속도.”

하여간 말 되게 안 듣는 강현을 보며 지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렇지.

* * *

경옥은 차 회장에게 녹음을 다 들려주고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때요? 들으니까 알겠죠? 윤은서가 어떤 애인지… 얘가 이런 애예요… 그러니 제가 가만있을 수 있겠냐고요….”

“거짓말이면 진짜 가만 안 있어….”

“거짓말 아니에요. 지금 당신 귀로 듣고도 절 의심해요? 당신은 그렇게 날 몰라요? 그리고 윤은서한테 말했어요. 강현이 이제 선볼 거라고. 청선그룹 큰딸이랑요.”

“……?”

“내가 강현이를 정말로 미워했다면, 청선그룹 큰딸이랑 선보게 놔두겠어요? 이 불여우 같은 윤은서를 떼놓겠냐고요….”

“근데 당신 전에는 은서 유산한 거 많이 슬퍼하지 않았었나?”

“그건 아이 때문에 그런 거죠. 애가 무슨 죄예요?”

“그래….”

“그만 좀 의심해요. 나 솔직히 강현이가 은서랑 결혼생활 하는 내내 그 불여우가 입양아인 거 알면서도 당신이랑 강현이한테 말 못 했어요.”

“왜?”

“걔가 협박을 했거든요.”

“무슨 협박?”

“병현이가 사고 치고 다니는 거… 그거 언론에 뿌리겠다고요.”

“뭐야?”

“그런 애라고요. 그러니 내가 그 집에 녹음기를 설치 안 하게 생겼어요? 사람 안 보내게 생겼어요? 그 불여우가 어떤 일을 꾸밀지… 다 우리 아들들 위해서, 성문그룹을 위해서 한 거라고요. 날 좀 믿어줘요. 여보.”

차 회장은 한숨을 내쉬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경옥은 차 회장이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강 실장?”

- 네.

“제대로 먹혔어. 잘 버무렸던데?”

- 녹음 조작하는 거야 일도 아닙니다.

“간만에 제대로 했어.”

- 감사합니다.

“강현이랑 은서랑 다시 만나는 거… 그거 사진 좀 몇 장 찍어서 보내.”

- 사진을요? 그건 왜….

“청선그룹에 보내야 할 거 아니야. 윤은서가 보낸 것처럼. 그래야 윤은서가 맞선을 망친 게 되지.”

- 아… 네, 알겠습니다.

강 실장과 통화를 끝낸 경옥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병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결했으니까, 내일부터 회사 나가.”

- 어디? 내 자리 그대로인 거야?

“당연히 그대로지. 너 애 아빠 될 사람이야. 조심 좀 해. 알았어? 당분간 유흥주점 근처도 가지 말고.”

- 아, 알았어.

병현과의 통화도 끝낸 경옥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욕실로 향했다.

* * *

지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40분이란 말이지?”

그가 처음으로 집에 온다고 생각하니 이게 뭐라고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방이 더러운 건 아니었지만, 지아는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예쁜 물건은 꺼내놓고, 조금 지저분한 것은 서랍 속으로 집어넣고… 빨랫감도 모두 세탁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좋은 향기가 날 수 있도록 향초도 피웠다. 근데 또 너무 일부러 향을 냈다는 건 들키기 싫어서 향초를 껐다가 향이 또 다 날아간 것 같으면 켰다가를 반복하며 자연스러운 향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사람 한 명 오는 게 이렇게 신경 쓰이는 일일 줄이야….

심지어 갑자기 온다고 해서….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했는데, 지아는 또 욕실로 들어가 꼼꼼히 다시 샤워를 했다.

아까 너무 대충한 거 같아서….

그가 몸에서 좋은 향이 난다고 한 날 이후로, 제 몸에서 어떤 향이 나는지 지아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지아는 킁킁대며 제 팔에도 코를 대보고, 머리카락 냄새도 맡아봤다.

“어떤 향이 좋다고 한 거지?”

이걸 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 향이 안 날까 봐 걱정은 또 되고….

진짜 별걱정을 다 하고 있었다.

“아니야… 진정해.”

지아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 오케이, 소파 오케이, 식탁도 오케이, 선반도 오케이, 욕실도 오케이, 작은 방도 뭐… 오케이, 그리고 침실.”

지아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좀 전에 정리를 했는데도 침대 베개가 조금 비뚤어진 것 같아 다시 위치를 조정했다.

“됐나?”

베개를 정리하고 나니 갑자기 침대 커버를 교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핑크색이 너무 유치해 보이는 것 같아서 고민이 되었다.

한참 동안 침대를 째려보던 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고민할 시간에 바꾸자.”

강현이 오기 전에 침대 커버를 바꾸기 위해 베갯잇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한 개를 벗기고, 또 한 개를 벗기려는 순간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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