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무슨 약속?
-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는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요…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지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화기 너머 강현의 한숨이 들려왔다.
- 나만 보고 싶은 건가?
“지금 회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 어, 회사지.
“회사에서 그런 말 해도 돼요?”
- 안 될 건 뭐야?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 들어도 상관없고.
“일할 때는 통화하는 것도 싫어했으면서….”
- 과거의 나는 잊어. 반성하고 있으니까.
“네? 차강현 씨가 반성을요?”
“당신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어?”
지아는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 걸 애써 끌어내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강현은 피식 웃었다.
- 지금 당신 표정 직접 보고 싶다. 좋으면 좋다고 해. 혼자 음소거로 웃지 말고.
“음… 내, 내가… 내가 언제요?”
지아는 목소리에 묻어나는 웃음을 애써 숨기며 대답했지만, 다 티가 나고 있었다.
- 하… 지금 당장 보고 싶다. 영상 통화할까?
“지금요? 회사잖아요.”
- 내 방인데 어때?
“그러다 직원들이라도 들어오면 어떡하려고요? 그리고 나도 지금 가게예요.”
- 오늘 집에 가는 날인가?
“네.”
- 그럼, 거기에 그냥 있어. 저녁 약속 끝나고 빨리 들어갈게.
“안 돼요. 오늘은 제가 약속이 있어요.”
무슨 약속?
“그냥 누구 좀 만나려고요.”
- 누구?”
“있어요.”
- 영지?”
“아뇨.”
- 남자야?”
그럼 그렇지… 지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 아니에요. 됐죠?”
- 그럼 누군데?
눈치가 빠른 그였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집요하게 묻는 그였지만 누구를 만난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이 모르는 친구예요. 다녀올게요.”
지아와의 통화를 끝낸 강현은 어쩐지 찝찝했지만, 너무 집착하나 싶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참….”
강현은 지석을 불렀고, 곧 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오늘 저녁에 임치한 만나는 거, 장소는 어디로 정했어? 좀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오픈된 공간이 아닌 룸으로 정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미리 세팅해 놓고.”
“네, 물론입니다.”
강현의 표정이 어딘가 어둡자, 지석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지아 말이야.”
“네.”
“오늘 누굴 만난다는데… 아무래도 영 찜찜해서 말이야.”
“걱정되시면, 사모님께 몰래 사람을 붙일까요?”
“아니, 지아 말고 이경옥. 이경옥 그 여자 스케줄 어떻게 되는지 파악해봐.”
“네, 알겠습니다.”
* * *
“오랜만입니다, 본부장님.”
치한은 강현이 룸으로 들어오자,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일으켜 세우며 인사를 건넸다.
여자도 강현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금방 눈시울을 적셨다.
“오빠….”
강현은 그 모습이 보기 역겨워 고개를 돌렸다.
“우선 앉죠.”
여자는 살짝 민망했지만, 한 번 잡은 감정선을 애써 이어갔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빠, 잘 지냈어요? 오빠가 날 찾았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래.”
너무 침착하게 대답을 하는 강현을 보며, 치한도 여자도 예상했던 그림이 아니라 살짝 당황했다.
이 감정선이 아닌가?
치한과 여자가 서로 눈치를 살피는데, 강현이 입을 열었다.
“외국에 있었다고?”
“네.”
“한국에는 언제 온 거지?”
“일주일 전에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찾았어요. 그저 멀리서 바라본다는 게… 아빠랑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여자가 치한을 바라보자, 그가 옳다구나 무릎을 탁,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 눈을 딱 마주치는 순간, 아, 내 딸 지아구나!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어찌나 그 예전 모습 그대로인지….”
“워낙 엄마, 아빠가 잘해주셔서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떠난 거였는데…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악착같이 더 성공하려고 했고요. 근데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너무 면목이 없어서 멀리서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무슨 소리야? 왜 멀리서만 보고 가? 이 아빠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아이고, 내 딸 지아야.”
치한은 여자를 껴안았고, 그녀도 그의 품에 안겼다.
얼마나 연습을 한 건지, 죽이 척척 맞고 있었다.
신파를 보고 있자니, 심기가 불편해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아, 네네.”
치한과 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강현은 문을 열고 나와 지석을 바라봤다.
“좀 비슷한 거라도 데려다 놔야지.”
“네?”
“지아랑 완전 달라. 날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그 정도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궁금하네요.”
“이경옥 어디 있는지 파악했어?”
“역시나 사모님을 만나는 게 맞았습니다.”
“하아….”
“어떻게 할까요?”
“그 여자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사람 붙여.”
“네, 알겠습니다. 수시로 상황 파악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코스 좀 짧게 내오라고 해. 음식 한꺼번에 내놓으면 더 좋고. 더 오래 못 앉아 있겠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방으로 들어섰고, 지석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 * *
“예약했는데요.”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경옥입니다.”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지아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룸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경옥이 룸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역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자 예전 생각이 떠올라 거부감이 밀려왔다.
경옥은 인사도 하지 않는 지아를 노려보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젠 인사도 안 하니?”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경옥은 대답을 하지 않고는 비릿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네 부모는 끝까지 네가 입양아라는 거 우리한테 말 안 하더구나? 우리 식구 모두를 속여놓고.”
“그걸 왜 얘기해야 하죠? 그때 얘기 끝난 거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제가 말해요. 부모님은 끌어들일 생각하지 마세요.”
“여전히 뻔뻔하구나. 이혼해 놓고 강현이 집에는 왜 드나드는 거지? 목적이 뭐니? 또 돈이니?”
경옥이 영문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자, 지아는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또 돈이라뇨?”
“네 결혼생활 내내 우리가 네 집 도와준 걸 생각해.”
“아버지가 일해서 번 돈이에요. 이혼하고 재단에서 바로 나왔고요. 이런 얘기 들을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제 말이 틀렸나요?”
“그럼 왜 강현이 집에 드나드는 거지?”
“저 강현 씨랑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뭐, 뭐야?”
“이제 강현 씨 혼자 안 놔두려고요.”
“원한다면 돈은 얼마든지 주마. 강현이한테서 떨어져.”
“싫어요.”
“싫어? 네가 이런다고 성문 안주인이라도 될 거라고 생각하니?”
“네, 잘난 성문그룹 안주인 되려고요. 어머님이 싫어하는 짓, 저 하려고요. 어머님 하시는 거 보니까 더는 못 보겠어요. 강현 씨한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집에 사람을 보내는 게 말이 돼요?”
“난 더한 것도 해. 우리 병현이 위해서라면.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네가 강현이 몰래 남자 만나고 다닌 거 다 알고 있어.”
“그건 어머님이 조작하신 거잖아요.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아, 일찍도 알았구나? 멍청한 것. 진짜 속을 줄이야.”
“어머님….”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나 원망할 거 없다. 속은 네가 잘못이지? 안 그래?”
“네, 그래요. 속은 게 잘못이죠. 그래서 이제 안 속으려고요. 강현 씨 옆에서요.”
“뭐? 넌 정말… 난 이만 일어나마.”
“네?”
알 수 없는 이야기들만 나열하고 경옥이 일어나자, 지아는 황당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왜 만나자고 하신 거예요?”
“강현이 옆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경고하려고 불렀다. 나도 회장님도 다시 너 받아줄 생각 없다고.”
“…….”
“이만 가마. 다신 만나는 일 없길 바란다. 역시 너랑은 말이 안 통하는구나. 아, 이 얘기도 하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경옥은 기분 나쁘게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강현이 곧 선본다.”
“……?”
“청선그룹이라고 알지? 그 집 첫째 딸이랑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니 괜히 헛물켜지 말고 떨어져. 회장님까지 나서시기 전에.”
경옥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고, 지아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 * *
식사를 거의 마치자, 지석이 안으로 들어와 강현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이제 일어나시죠.”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재킷 단추를 잠갔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지만, 급한 일이 생겼네요.”
그 말에 치한과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굽신거렸다.
“바쁘신 분인 줄 아는데, 오늘 시간 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오빠, 고마워요.”
“그래.”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가려는데, 치한과 여자가 따라 나오려고 하자, 지석이 막았다.
“배웅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그래도….”
“맞아요. 그래도 오빠 배웅은….”
강현은 짜증 섞인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다시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아니, 식사 다 못 했을 텐데 마저 식사하시죠. 디저트도 곧 나올 텐데.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보자.”
강현이 미소를 짓자, 치한과 여자는 입이 귀에 걸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세요.”
“오빠, 또 봐요.”
강현이 나가자, 그가 일어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치한과 여자는 눈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