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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61화 (60/94)

61화

연애할까?

아침부터 지아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영지는 괜히 심술이 나서 입을 삐쭉였다.

지아 때문에 점점 말라가는 제 오빠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열이받는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좀 얄미웠다.

“야, 너무 티 내지 마라.”

“응?”

“티 좀 그만 내라고.”

“왜 그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지아에게 이유를 말할 수도 없는 영지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 다른 말을 하진 못했다.

그냥 지아를 툭 치는 거로 심통 난 걸 티 낸 영지는 애먼 꽃한테 시비를 걸었다.

“이건 왜 이렇게 못생겼어?”

“왜 꽃한테 그래?”

“너 주변에 좋은 여자 없어?”

“응?”

“우리 오빠 좀 소개시켜 주게.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데, 너 우리 오빠보다 어리잖아. 근데 너만 결혼하고 연애하고 또 결혼을 하겠다고? 우리 오빠는 한 번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왜 이래, 진짜? 결혼 두 번 하는 걸 지금 부러워하는 거야?”

“누가 부럽대? 너만 연애하지 말고, 우리 오빠 좀 돌보라고, 좀!”

“알았어.”

영지가 짜증을 내자, 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짜증을 내는 법이 없는 애인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제와 영준 오빠가 혼자 있다는 게 신경 쓰이는 건가?

지아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하은이 떠올랐다.

“이하은 씨 어때?”

“뭐?”

“오빠랑 나이도 맞고. 이하은 씨가 한 살 어리지? 어? 가만… 한 살 어리면 강현 씨랑 동갑이어야 하는데… 강현 씨가 이하은 씨한테 누나라고 하잖아. 뭐지?”

“연예인들 나이 속이잖아.”

“아, 그런 건가? 그럼 몇 살이지?”

“몇 살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야, 이하은 연예인이야. 배우라고. 우리가 이 동네에서 자주 본다고 쉽게 봤나 본데… 배우가 동네 약사를 만나겠어?”

“오빠가 어디가 어때서? 동네 약사가 어디가 어때서?”

“우리 오빠가 기우는 게 아니라… 더 화려한 사람을 만날 거다, 이거지.”

“그러려나?”

“네 꽃집에 꽃꽂이하러 오는 수강생들 중에는 없어?”

“한 번 볼게. 다들 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

“그래, 신경 좀 써.”

그때, 지아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을 확인한 순간, 지아의 표정이 갑자기 굳자 영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누구 전화길래… 안 받아?”

액정을 보니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누구길래 그래?”

지아는 대답도 안 하고, 받을 생각도 안 하고, 액정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 * *

지석이 무슨 보고를 해도 강현은 아침부터 티가 나게 기분이 좋았다.

평소 같으면 인상을 썼을 보고에도 미소를 짓는 걸 보며 지석은 흠칫했다.

뇌 신경 어딘가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거나.

“괜찮으십니까?”

“뭐가?”

“아, 아닙니다.”

정말 괜찮은 표정을 짓는 강현을 보며 지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제 뭐 하셨습니까?”

“왜?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아니 저는 뭐 그냥….”

“궁금하면 연애해. 내가 설명해 준다고 해도 문 실장은 모르니까.”

“네?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 모른다고? 저도 연애해 봤습니다.”

“언제?”

지석은 골똘히 생각했다.

골똘히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 먼지 쌓인 연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순간 처량함이 밀려와 지석은 발끈했다.

“그러는 본부장님도 지금 연애할 때는 아닌 거 같은데요? 해결하실 일이 많으신 거로 압니다만.”

“전쟁 중에도 꽃은 피는 법이지. 문 실장은 모르겠지만.”

“…….”

모른다. 몰라. 그래, 모른다.

지석은 약이 올라 입을 삐쭉였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어, 그래.”

지석은 집무실을 나오며 살짝 배신감을 느꼈다.

연애는 절대 안 할 것처럼 굴던 오랜 동지가 연애를… 그것도 푹 빠져서 연애를 하다니….

매일 매일 치열하게 바쁘게 일을 시켜서 연애할 틈도 안 주더니… 자기 연애한다고 방치를 해?

일 밖에 할 줄 몰랐던 지석은 강현이 일을 시키지 않자,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이 일찍 끝나도 일을 더 찾아서 야근을 하거나, 그도 안 되면 치킨집에서 일을 도와주고, 방바닥만 긁다가 회사에 출근하기 일쑤인데, 얼굴이 활짝 핀 강현이 어쩐지 얄미워 보였다.

강현만은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은 사랑에 빠져도 저 냉혈한 인간만은 오랜 동지로 남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근데 강현이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니… 절로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아, 나도 연애할까?”

집무실을 나온 지석이 주위를 쭉 둘러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맨날 이러고 있는데… 무슨 연애냐 연애는….”

혼자 푸념을 하고 있는데, 율희가 다가왔다.

“문 실장님.”

“네.”

“소개팅 한번 하실래요?”

“소개팅?”

평소라면 단박에 관심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겠지만, 지석은 마음이 동했다.

어떻게 이런 타이밍이!

이건 운명이었다!

“좋습니다. 소개팅. 언제 만날까요? 빨리 만났으면 좋겠는데?”

지석이 너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자, 율희는 흠칫했다.

“누군지도 안 물어보세요?”

“그게 중요합니까? 만나서 알면 되는 거지.”

“그렇죠? 그럼, 저 진짜 날짜 잡아요?”

“네, 잡아요. 언제든 좋습니다.”

“네!”

율희는 신이 나서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며 탕비실로 향했고, 지석은 집무실을 노려봤다.

“나도 연애한다. 나도.”

* * *

“언니! 지금 통화 가능해요?”

응, 왜?

“내가 언니 소개팅 상대 구했어요.”

- 야, 진짜 하라고?

율희는 어제, 휴가와 보너스를 받게 해준 지아에게 고마워 꽃집을 방문했었다.

근데 꽃집 문이 굳게 잠겨 있자, 지아에게 전화를 거는데, 약국에서 영지가 나왔다.

“꽃집 사장님 오늘 문 닫으셨는데, 다음에 오시겠어요?”

“저 그게 아니라… 어?”

율희가 먼저 영지를 알아봤다.

“선생님 친구분 아니세요?”

“네? 누구….”

“저 지난번에 술자리에서 잠깐 인사드린 적 있었는데… 선생님 수업 듣는….”

“아, 지아한테 플랜테리어 부탁하신 분이구나?”

“네, 맞아요. 선생님 어디 가셨어요? 문 닫을 시간 아니잖아요?”

“아… 그게… 얘가 요즘 연애에 정신이 팔려서.”

“네? 선생님 연애해요?”

영지는 율희가 강현의 회사 직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아의 연애 상대가 그라는 건 밝히지 않았다.

“네, 뭐….”

“아, 그렇구나. 그럼 오늘 안 나오세요?”

“그럴걸요.”

“아, 그렇구나… 일부러 플랜테리어 안 하시는 날로 골라서 서프라이즈로 온 건데… 오늘 선생님이랑 한잔하려고 했는데 다음에 와야겠네요.”

율희가 굉장히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영지는 넌지시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괜찮으면 나랑 한잔할래요? 저도 한잔하려고 했는데, 우리 오빠가 바람맞혔거든요.”

“아, 그럼 그럴까요?”

그렇게 치킨집에서 술자리를 가지다가 코드도 잘 맞고, 성격도 잘 맞아서 영지와 율희는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지아가 남자를 만난다고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다며 툴툴대는 영지에게 율희는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영지의 푸념을 듣는 순간 적당한 상대가 율희의 머릿속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바로 문지석!

연애를 안 하니까 늘 회사에만 붙어 있고, 어차피 집에 가봤자 할 일도 없다며 야근을 하는 그가 율희는 참 불편했었다.

율희는 연애는 안 했지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퇴근 후에 취미활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 지석 때문에 눈치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이 퇴근을 해야, 내가 맘 편히 퇴근하지!

제발 여자 좀 생겨라! 생겨라! 바라고 또 바랐었는데, 율희의 앞에 영지가 나타난 거였다.

아, 이건 신께서 내게 주신 기회야!

요즘 일이 잘 풀리려니, 이런 기회도 주시는구나.

마침 영지가 지석의 치킨집 단골인데다가 집도 가까우니… 둘이 사귀면 당연히! 지석은 집에 빨리 갈 게 분명했다.

매일 만날 수 있는 상대니까.

장거리 커플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나겠지만, 둘은 매일 만날 수 있는 근거리 연애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모든 게 착착 맞아들어갔다.

지석이 나이가 한 살 어리긴 하지만, 영지는 동안이니까.

딱이다. 율희는 칼퇴 완전 보장의 그 날을 꿈꾸며 지석의 소개팅을 빠르게 추진하기 위해 영지에게 전화를 건 거였다.

“언니, 내가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거 상상해 봤는데… 진짜 대박! 너무 잘 어울려요.”

- 그 정도야?

살짝 기대를 하는 듯한 영지의 목소리에 율희는 눈을 번뜩였다.

“그렇다니까요. 언니, 날 믿어요. 진짜 언니도 꼭 마음에 들 거에요.”

- 도대체 누군데?

영지의 물음에 율희는 잠깐 멈칫했다.

지석은 너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고 영지가 부담스럽다고 거절을 할까 봐….

그러면 칼퇴 보장은 멀어지는 거였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우선 만나게 해야 돼. 만나고 거절해도 늦지 않잖아. 만났는데, 싫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만나기도 전에 부담스럽다고 거절하는 건… 그건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언니, 벌써 알면 재미없죠. 날 믿으라니까요? 완전 일등 신랑감! 탄탄한 직장에 훤칠한 키! 능력도 있어서 앞으로의 회사 생활도 탄탄대로! 부모님도 얼마나 좋은데요?”

- 알았어. 알았어. 그만해. 뭐 부모님까지 말해?

“그만큼 자신 있는 상대다 이거죠. 언니도 분명 마음에 들 거예요. 그럼 언니, 나 이 소개팅 추진할게요.”

- 글쎄….

영지의 글쎄라는 말에, 율희는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다 된 밥에….

이럴 순 없었다.

영지가 망설이자, 율희는 다급해졌다.

“언니, 후회해요. 진짜 후회할 거야. 꼭 해야 돼요. 이 소개팅은 꼭 해야 돼. 네? 해요, 네?”

- 어째 네가 이 소개팅이 더 간절해 보인다? 도대체 상대가 누구길래 그래?

“아니 그게… 아, 너무 좋은 상대니까… 언니랑 너무 잘 어울리니까 나는 안타까워서 그러지. 언니, 소개팅해요. 선생님이 안 놀아준다고 서럽다며? 응? 소개팅! 소개팅! 소개팅! 이미 그쪽한테는 소개팅 잡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 그래, 알았어. 해보지 뭐.

“진짜죠?”

- 그래.

영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율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칼퇴 보장의 날이… 그날이 곧 펼쳐지겠구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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